5-4. 「민족통일의 세계사적 인식」
5-4. 「민족통일의 세계사적 인식」(1997년 경실련강연, 코)
오늘의 제 강의 주제가 민족통일의 세계사적 인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 저는 이렇게 고차원적인 담론에 해당하는 연구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제가 지난날 써온 글을 통해서 느끼셨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동안 저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인 주제보다는 구체적이고 또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당장 문제가 되는 그런 주제와 관련해서 실증적으로 검증해 나가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처럼 큰 주제는 제게는 약간 버거운 것이지만,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강의는 첫째로, 주어진 주제, 즉 한반도의 통일이 가지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인식의 차원에서 얘기해보고, 둘째로, 그러한 의미를 가지는 한반도의 통일이 과연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타국의 사례를 통해서 생각해보고, 이러한 검토를 바탕으로 하여 그럼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순서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그럼 강의의 첫 번째 부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우리 한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어서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는, 그리고 국제사회가 기대하고 부여하는 의무와 권리를 성실히 이행하는 건전한 국가로서 원만한 민족적ㆍ국가적 그리고 국민적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일곱 가지의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 민족 내적 의미로서의 민족공동체의 재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분단된 한반도가 50년간의 분단생활을 마감하고 반세기 만에 다시 통일국가를 이룬다는 것, 민족공동체를 재현한다는 것은 오랜 단일민족의 역사를 지닌 우리가 다시 단일민족으로 되돌아가는 민족사적 지상과제로 다른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역사상 강대국들의 분쟁의 각축장으로 여겨졌던 한반도가 통일됨으로써, 분쟁의 원인이 제거되어 동북아 지역의 평화에 공헌하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가 점한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세력확장 의도를 지닌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로 말미암아서 역사상 한반도는 주변 열강들 사이의 각축, 전쟁, 갈등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대륙의 패권을 잡은 몽골(元)이 1274년과 1282년 두 번에 걸쳐 고려조의 한반도를 거쳐 일본(倭)으로 건너가려고 했고, 400년 전 일본세력이 이 땅을 거쳐서 대륙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며, 그리고 지난 세기 말 무능했던 봉건왕조 말기에 한반도에 형성된 힘의 진공 상태와 불안 상태를 틈타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열강들이 각축을 벌인 일들이 바로 그런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형성되고 나아가 건전한 국가, 정부, 국민의 형태를 실현한다면, 이러한 동북아시아 지역에 걸친 외세의 패권 다툼의 싸움판으로 희생되는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적극 공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근현대 제국주의의 유산을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반도는 17세기 이후부터 시작되었던 근현대 유럽 제국,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의 아시아 지배의 마지막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땅과 민족이 통일된다는 것은 200~300년에 걸친 근현대 제국주의의 실질적인 청산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넷째, 한반도의 통일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문제를 종결시킴으로써, 대전의 실질적인 종결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전후처리라고 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에 이긴 연합국이, 구체적으로는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장개석 등 전승국가들의 원수들이 모여, 앞으로 지구상에서 전쟁의 요소가 되는 영토적 분쟁을 제거하자는 뜻에서 세계지도를 놓고 영토문제 처리를 결정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 ‘얄타체제’라고도 불리는 이 전후처리 결정과 관련하여, 이전에는 단일영토였던 그리고 단일민족 생활권이었던 지역들이 전승연합국의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분할, 통합되었는데, 한반도는 현재 이 인위적인 분할과 통합의 형태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남아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실제로 대전의 종식은 1945년에, 즉 독일에서는 1945년 5월 19일에 이루어졌고, 아시아에서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만, 전후처리를 둘러싼 영토분쟁은 지난 50년간 지속되어온 것이 사실이고, 아직도 한반도에서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의 통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어 대전의 실질적인 종결을 가져오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오늘 제 얘기의 두 번째 부분인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어떤 형태로 가능할 것인가 또는 가능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타국의 예를 통해서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타민족의 경우 이 전후처리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경험했는지를 실증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한반도의 통일로 지난 50년간 인류를 양분하여 총체적인 대립을 조성했던 이른바 ‘냉전체제’의 실질적인 종식이 가능해집니다. 흔히 1989년부터 91년까지의 3년 사이에 일어났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화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체제의 붕괴를 가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냉전체제가 붕괴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반도의 분단이야말로 냉전의 마지막 남은 숙제이기 때문에, 이 통일의 실현이 없이는 냉전체제도 끝났다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미ㆍ소 대결의 양극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정면 대립체제, 군사적 대결체제, 쌍방이 지니는 철학, 이념, 세계관, 경제체제, 윤리, 도덕 등 적대적인 생존양식을 가지고 대립했던 이른바 냉전체제는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원숙한 정치적 능력을 갖추고, 안정된 제도를 유지하는 통일국가가 한반도에서 형성될 때 비로소 마지막 갈등의 고리가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인류를 양분하여 총체적인 대립과 적대적 생존의 비극을 일삼았던 지난 50년간의 냉전체제의 역사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는 것이 됩니다. 흔히 우리들이 독일 통일과 소련 사회주의의 붕괴를 보면서, 그리고 동시에 미국이 일방적으로 세계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자본주의가 세계를 단일시장화하는 과정을 보면서 마치 냉전이 해소된 것처럼 개념화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잘못된 인식입니다. 우리나라의 학자들 그리고 정책 담당자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주로 미국 국가와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정보와 이론을 가지고 판단을 하다 보니까, 냉전체제를 ‘뜨겁지 않은 대립’체제, 즉 미ㆍ소 양극체제에서의 세력균형으로, 비록 세계적ㆍ전 지구적 대립은 있었지만, ‘뜨거운 대립’, 즉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던 ‘준평화’체제라고 개념화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발상입니다. 실제로 우리 한반도와 베트남에서는 민족상잔의 ‘뜨거운 대결’, 즉 전쟁이 치러졌습니다. 따라서 냉전체제의 열전의 희생물이었던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수립되는 것은 냉전체제의 진정한 종결이라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습니다.
여섯째, 통일은 그동안 한반도 주변 지역 역사의 주체로 제대로 서지 못했던 우리 민족이 긴 외세와의 결탁의 비자주적인 내적 역사를 청산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는 역대 왕조들이 사대주의와 외세를 등에 업고 치른 민족 내부의 전쟁으로, 그리고 외세의 사주를 받아서 그 외세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부정했던 비자주적 역사였습니다. 통일이야말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기 위해서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이후, 우리 민족의 권력집단들이 그때그때의 역사적 시점에서마다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외세와 결탁했던 비자주적ㆍ외세 편승적ㆍ사대적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통일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민족은 국제사회와 인류사회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공헌하면서, 동시에 민족적 안전과 번영,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국가 이념, 형태, 노선을 새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흔히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하여 강대국처럼 되고 싶은 염원을 담은 ‘부국강병’ 국가론이 있습니다. 또 부국강병책으로 과거에 당한 민족적 모멸을 거꾸로 되돌려주고 싶어하는 심정의 표현인 패권주의 국가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형태의 국가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져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막중한 군사비를 항시적으로 부담해야 합니다. 패권주의의 대가지요. 어떤 이는 현재의 미국에 대해서와 같이 통일된 뒤에도 주변 강대국 중의 하나와 군사동맹을 맺고, 그 국가의 군사적ㆍ정치적 후견하에서 살아가자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통일국가 노선은 하나의 강대국에 종속하여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에 다른 강대국들과는 긴장관계 또는 불편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지요. 나는 얼마 전에 미국에서, 통일된 국가가 어떻게 하면 주변 외세와 종속적인 관계를 끊고, 보다 더 민족자주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제껏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 희생되어왔던 피동적인 위치에서 거꾸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세력의 각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동적인 위치로 전환할 수 있을지 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조그마한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거기서 모색된 방법은 오스트리아처럼 국가의 이념과 형태와 노선을 ‘영세중립화’(永世中立化)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국가들의 각축이 예상되면 예상될수록, 그리고 역사 속에서 피동적인 존재로 희생을 강요당한 경험이 부끄러우면 부끄러울수록, 통일의 방법은 오히려 그 전체적인 틀을 거꾸로 하여 능동적으로 주변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분쟁의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는 영세중립화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그 세미나에서 거론된 것입니다. 영세중립화 통일 방법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귀에 선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서 설명하자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우리 민족을 국제사회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구성원으로 이끄는 통일을 영세중립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모색해보자는 문제제기 수준에서 그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제1부에 해당하는 한민족의 통일이 지니는 역사적 인식과 인류사적ㆍ세계사적 차원에서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부문으로 들어가서, 한반도의 통일이 과연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후처리의 대상으로서 우리와 같은 경험을 거친 민족들은 어떤 민족인가 하는 일종의 사례연구(case study)로서 살펴봅시다. 우리와 흡사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다른 민족들이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문제를 처리했고 그것은 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의 연구는 우리 민족의 통일이 과연 평화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현실론과 당위론의 양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자신의 논리나 주장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비판, 분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현실론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체제가 다른 경우,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의 힘의 차이에 의한 흡수통일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해왔습니다. 반면에 당위론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통일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어야 하며, 체제적 상호수용의 준비 없이 흡수통일이나 ‘합방통일’의 방법은 더 큰 민족의 불행을 자초하리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나아가서 현실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힘에 의한 통일 외의 방법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타민족들이 경험한 전후처리의 형태를 한번 살펴봅시다. 전후처리 문제의 대상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얄타협정을 통해서 합의한 영토구획에 의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전후처리의 2차적 파급효과로 인해서 영향을 받은 나라들입니다. 전후처리의 2차적 대상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전후처리 문제에 대한 연합국간의 합의에 의해서 분할된 것이 아니라, 1961년 영국이 전후처리의 대원칙에 입각해 식민지를 청산하고 아랍 세계에서 철수할 때 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하나였던 영토가 분할된 지역입니다. 석유가 아랍 지역에서 가장 많이 난다는 쿠웨이트 지역은 원래 이라크의 일부였는데, 석유의 지배권이 이라크로 고스란히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영국이 인위적으로 분할시킨 곳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으므로 1990년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본래 자신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며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이고, 아랍 세계에 대한 석유 지배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미국은 국제여론을 이용하여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이라크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렇게 대전종결 당시의 세계정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분할, 통합한 예가 있는데, 이런 예들이 바로 전후처리의 2차적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전후처리의 실례들을 유럽에서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로 분할된 유럽의 국가들로는 독일, 폴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있습니다. 독일과 폴란드는 그 후진세력이었던 러시아, 즉 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아서 거의 자동적으로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사실 어떤 강대국도 그리고 어떤 지식인도 독일의 통일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독일 민족이 다시 통일되면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유럽의 평화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독일은 쉽사리 통일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예상치 않았던 정세 변화로 인해서 독일은 평화적인, 적어도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은 통일을 이룬 몇 안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는 1945년 대전 직후에 미, 영, 소, 불 4대 연합국이 분할관리했습니다. 그러다가 1955년 4대국 분할관리체제가 종식되자, 국민투표에 의해서 ‘영세중립’과 비동맹을 선언하고 통일정부국가를 수립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이처럼 평화적인 통합을 달성하는 데에는 우리와는 다른 여러 조건들이 작용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오스트리아의 경우에 4개국에 의해서 분할관리되었지만, 우리나라나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강대국 간의 체제 대립이 심각하게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서독의 사회주의 정당과 그 정권이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동독과 평화적 공존ㆍ협조관계를 수립한 것처럼, 당시의 집권당이 사회주의 정당이었다는 점이 소련과의 교섭을 용이하게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의 구조는 자본주의체제이지만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그런 체제였기 때문에 4대 연합국 관리가 철수하면서 그대로 중립화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헌법에는 주변 국가에 위협이 되는 핵무기, 대량살상 무기, 장거리포 등을 가지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오스트리아와 같은 영세중립화 통일 방식이 한반도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는 없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주변의 어느 국가와도 적대적 군사동맹을 맺지 않음으로써 어느 국가도 적대시하지 않기 때문에, 막대한 군사비를 감면하게 되어 오로지 경제적ㆍ사회적 발전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주변 국가들은 물론 강대국들과의 협약으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동안보의 보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례를 검토해봅시다.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에는 트리에스테라는 조그마한 자유항구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가까운 이 트리에스테 지역은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한때는 로마 제국의 영토이기도 했고 또 한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영토이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후처리의 결과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됩니다. 하지만 이 지역이 과거에 유고슬라비아에 속했던 경험 때문에 이 지역에는 이탈리아 민족과 유고슬라비아 민족 간의 영유권 갈등이 군사 전투행위로 발전하는 위기가 존재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1954년에 유엔이 군사적인 중재를 하고 동과 서로 나누어, 동쪽은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로, 서쪽은 이탈리아의 영토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해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통합이 아니라 분할을 통한 문제 해결이었습니다.
다음은 내전이 4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를 살펴보겠습니다. 상이한 민족과 종교와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세 개의 지역이, 뛰어난 공산주의자였던 티토라는 지도자 밑에서 통합되었다가 전후처리 과정에서 그대로 승인되었던 지역이 바로 유고슬라비아입니다. 하지만 이 통합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무리하게 합쳐놓은 인위적인 통합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분할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대륙은 유엔의 조정이라든가 혹은 각 국가 지도자들의 협상과 타협 등의 중재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철수한 아프리카에는 흑인 독립지도자 엔크르마가 이끈 가나의 독립을 시작으로 하여, 1960년 한 해 동안에 16개의 신생 독립국가가 생깁니다. 아프리카에는 부족이라는 특유한 요소가 존재하는데, 대전 전후처리의 2차적 결과로서 무리하게 분할되었거나 통합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인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의 아주 좋은 사례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세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을 겪고도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념문제보다는 종교와 영토적 생존권, 석유자원과 전략적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미국의 국가이익이 개입함으로써 민족분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멘은 남북으로 체제가 다른 국가들이 형성됨으로써 여러 외교적ㆍ정치적 노력과 많은 국제적 중재 노력에도불구하고 결국 두 차례의 민족내전을 경험합니다. 처음에 이들은 변화된 국제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여 통일헌법을 만들어서 평화적으로 통일국가를 이룩하지만, 다시 내전 상태로 돌입하여 자본주의체제의 북예멘의 우월한 힘에 의해 재통합됩니다.
다음은 인도를 봅시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토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곳은 펀자브 지역인데, 이곳은 2차적 결과로서 두 나라의 영토분쟁에 휘말리게 된 곳입니다. 영국이 세계대전 후에 철수하면서 하나였던 통치 식민지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인위적으로 분할하게 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있는 펀자브라는 지역이 분쟁의 씨앗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파키스탄과 인도가 핵협정 체제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대전 이후의 청산되지 않은 영토 싸움이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영토문제나 분할된 민족문제를 생각할 때 참고가 되는 곳이 인도의 봄베이에서 약 260마일쯤 남쪽에 있는 고아라는 땅입니다. 인도의 작은 한 지역 고아는 본래 포르투갈이 300년 전에 아시아 동방의 무역기지와 행정적 지배기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대전 이후에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독립을 허용하고 자진해서 철수했지만, 포르투갈은 이 고아 식민지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온갖 협상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함으로써 네루의 인도 정부가 1962년에 무력으로 영토회복을 단행했습니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영토가 인위적으로 분할되자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중에서도 베트남은 1954년에 북위 17도에서 남북으로 분할됨으로써 우리와 아주 흡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이 어떤 형태로 통합되었는지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고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전쟁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종전 직후에 호치민 세력이 프랑스를 내쫓고 독립과 통일을 성취하려고 했던 제1차 베트남전쟁(1946~54)과 그 후 미국의 개입에 의해서 일어난 제2차 베트남전쟁(1955~75)이 그것입니다.
대만은 1895년의 청일전쟁의 결과로 중국이 일본에게 빼앗긴 것이기 때문에 대전 전후처리의 산물은 아닙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전후처리의 결과로서 현재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원래는 전승연합국의 하나인 중국의 장개석 정부가 얄타협정과 카이로선언에 의해서 대만을 수복하게 되어 있었지만, 장개석 국민당 정권과 모택동 공산당 정권의 혁명–반혁명 내전이 계속되자 미국이 대만을 공산당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군사력과 외교적ㆍ정치적 지원을 통해서 본토에서 대만을 떼어냈던 것입니다. 원체 큰 중국이라는 본토의 힘과 작지만 경제력을 가진 대만이 시간을 두고 통합을 이룰 것인가 아니면 정세변동에 따라서 대만이 분리독립을 성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 수 없는 현안 문제입니다. 쌍방이 전쟁에 의한 통합을 부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만문제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전운을 감돌게 하는 미사일과 해군이 동원되는 힘의 과시가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평화적ㆍ경제적ㆍ사회적 자본 교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주권적ㆍ민족적ㆍ정치적 차원에서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내년 이때쯤에는 마지막 남은 직접적인 식민지 통치를 상징하는 홍콩은 중국으로 돌아가겠죠. 이 홍콩 반환은 아시아 민족이 비로소 직접적인 식민지 상태를 청산하는 상징적이고도 실질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중국이 홍콩을 수복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은 중국과 영국 관계에서 중국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전후처리 문제는 아니지만 분열된 영토의 한 당사자의 압도적 힘이 수복의 동력이 된 좋은 예입니다.
옛 소련 영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체첸 내전이라는 것은 전후 처리의 문제이기보다는 그 이전 레닌 시대에서부터 시작된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정책 때문에 일어난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제외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한 20여 지역에서 이러한 전후처리의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많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여러 사례들을 살펴본 이유는 과연 평화적 합의에 의한 통일,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이 이루어진 선례가 있느냐 하는 것을 찾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답변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사례들 중에서 평화적으로 통일이 이루어진 사례는 독일과 폴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뿐이었고, 나머지 경우에는 모두 힘의 작용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두 번의 전쟁이 있었고 우리 한반도에서도 사실상 두 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저 관념적인 통일, 아름다운 통일, 손쉬운 평화통일—이렇게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통일이 실제로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냉엄한 현실로 받아들일 것을 부탁합니다. 실제로 체제가 달랐을 경우에는 더욱 어렵고, 체제가 다르지 않은 다만 영토적 문제일 경우에도 군사적 개입, 또는 전쟁이 통일의 수단이 되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결정적인 해답이나 답변을 여러분들에게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굉장히 어렵다는 것, 많은 민족들이 같은 역사적 경험을 하면서 같은 고민을 하고 우리와 다름없는 염원과 희구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압도적 힘의 차이나 무력이나 전쟁을 통해서 결말을 지었다는 것, 그리고 민족자주적으로 평화적인 합의에 의해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가 아주 냉엄하게 인식해야겠다는 것을 얘기하고 이 사례 검토를 일단락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부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6ㆍ25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고, 다시는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연방제니, 통일의 몇 단계니 하면서 통일 후의 정부 구성, 헌법, 국가권력 형태 등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방법론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갈라져 있던 민족이 하나되려고 하는 의지도 아직 서로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단계에서 훗날의 국가 형태니 헌법이니 하는 문제는 제게 그리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방식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단순히 뇌 속에서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사유만 바로잡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의식을 바로잡으면 그 결과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이 달라지고, 나아가서 그 바뀐 행동이 민족의 생활양식을 바꾸게 됩니다. 우리는 의식개혁을 통해서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잘못된 의식을 바로잡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입니다. 또한 이러한 의식개혁을 위해서는 남북한 모두가 50년간 극단적 대결만 일삼아온 데 대한 자기비판을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주장이 상당 부분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결국 이 방법이 아니고는 전쟁이나 흡수통일에 의한 통합으로 인해서 민족의 불행이 다시 반복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북한은 잘못된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증오와 적대의 감정을 키워온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바로잡아야 할 남북한의 잘못된 의식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겠으나, 북한의 것은 우리가 교육 과정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익히 들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모든 대상과 모든 생존양식이 체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냉전적 사고와 의식을 철저히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냉전의식은 상대방을 경쟁자나 선의의 경합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모조리 말살하고 소멸시키고 전멸시켜야 내가 살 수 있다고 믿는 의식과 관념입니다. 말하자면 ‘제로섬 게임’이고, ‘올 오어 낫싱’이고, 절대적 흑백논리입니다. 이러한 체제구조 결정론 및 광적 반공주의는 우리의 이성적 사고와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의 통일 노력에 장애가 되었던 의식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광적 반공주의가 큰 장애 요소입니다.
다음은, 남북문제를 생각할 때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의 역사적 배경을 객관적으로 이해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남북 간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는 어느 날 느닷없이 생긴 것이 아니라 자체의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 배경을 우리가 공평한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에만 우리는 남한의 행위나 북한의 행위 모두를 정상적으로 공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서너 해 전에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진행되었던 핵문제입니다. 북한의 원자로 건설에 대해서 우리 정부와 매스컴이 북한의 정권을 아직도 남침 야욕을 버리지 못한 전쟁광으로 묘사하면서 대대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가지려고 했던 행위의 뒤에 존재하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기 전까지 우리는 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북한은 사회주의 세계가 붕괴되고 소련과 중국이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했을 때, 그리고 소련이 북한과 맺은 우호협력 조약상의 군사적 보호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아무런 방어책도 가지지 못한 채 미국과 남한의 공격에 그대로 몸을 드러내게 되자 핵무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1991년 남한과의 국교정상화를 결정한 소련 외상이 북한에 와서 우호협력 조약에 의한 군사적 보호의 책임을 폐기하겠다고 통보했을 때, 북한은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인 것을 외신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의 자구책이 바로 핵무기인 것입니다. 북한은 경제력에서 남한의 20분의 1 수준이었고 따라서 군사비 지출도 남한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지원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살아남기 위해서 핵무기를 생각해낸 것이겠지요.
북한의 핵 사태로부터 정확하게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왜 우리가 어떤 문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하는지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1971년은 미국이 호치민의 베트남 인민해방군에게 사실상 패배하여 베트남에서 철수했던 해입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에서의 패배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닉슨독트린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이는 앞으로 아시아 대륙에서 일어나는 군사적 분쟁에는 미국이 더 이상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후방에서의 지원과 간접적 역할에만 머물 것이라는 일대 정책적ㆍ전략적 전환이었습니다. 앞으로 전쟁이 나면 직접적ㆍ군사적 책임은 동맹국 당사국에 일방적으로 떠맡겨진 셈이 되었습니다. 이 닉슨 독트린은 남한에도 즉각 적용되었습니다. 닉슨 정부는 우리 국회와 정부와 국민에게 한마디의 예고나 협의의 절차도 없이 주한미군 1개 사단을 그대로 철수시켜버렸습니다. 북한과의 군사적 상황에 대비한 모든 책임은 남한 정부에 떠넘겨졌습니다.
1971년 당시,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차이는 현재의 상황과 꼭 반대되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60년대 말 이미 중공업 부문에서 상당한 발전을 거두어 전기기관차를 세계시장에 내놓았던 반면, 남한은 겨우 삼천리호라는 이름을 가진 자전거를 만들었던 때입니다. 더구나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신생국가들이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했던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 남한은 점점 더 고립되는 느낌을 받았던 때입니다. 그러면 북한보다 모든 면에서 허약한 남한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 국가 보존의 책임을 지는 대통령, 정부, 지식인, 군대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핵무기를 생각했습니다. 핵무기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2,300만 달러어치의 우라늄 재처리 시설, 바로 북한이 지금 보유하려고 하는 그 윈자로의 구입 계약을 비밀리에 체결했습니다. 남한 정부의 핵무기 제작 계획은 미국의 강력한 방해에 의해서 백지화되었습니다. 이때 북한은 남한에는 세계 최강의 미국 군대가 있는데도 남한 정권이 독자적인 핵무기를 만들어서 자기들에 대한 핵공격을 계획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프랑스제 우라늄 재처리 시설로 75년에 첫 원자탄을 만들고, 1년 뒤인 76년에는 그것을 장착할 수 있는 첫 미사일을 제작한다는 계획하에서 전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상황 속에서 남한이 한 행위는 정당하고 합법적이라 평가되고, 북한이 한 행위는 부도덕하고 민족 파괴적인 범죄 행위로 규정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행위는 A라는 잣대로 재고, 북한의 행위는 그것과 전혀 다른 B라는 잣대로 재온 것이 사실입니다. 즉 같은 대상에 두 가지의 다른 가치판단을 하는 ‘이중 기준’, 즉 ‘더블 스탠더드’의 잘못을 범해 왔습니다. 이러한 판단의 착오는 우리가 어떤 문제의 역사적 배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서 결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는 이중 기준을 가지기가 쉬워 중대한 판단착오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남북 간에 벌어진 핵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실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한쪽이 다른 쪽에 의해서 자신의 생존을 위협당할 만큼 압박을 느끼면, 살아남기 위해서 핵무기에 손을 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972년에 남한이 그랬고, 92년에 북한이 그랬습니다. 답변은 간단합니다. 서로 군축을 함으로써 상호간에 군사적 안정을 확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군비경쟁과 군비는 남북한 모두에게 가장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다음으로 남북 간의 모든 문제는 인과관계의 구조 안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북 간에 일어나는 일은 거의 예외없이 한쪽의 원인 제공과 그것에 대한 다른 쪽의 대응 그리고 다시 상호간의 연쇄적인 반대응을 통해서 전개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부와 언론은 문제의 인과구조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의 반응만을 부각시켜 매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난 4월 남한의 지방자치 선거 때 북한이 이제는 휴전협정을 준수할 수 없다고 하면서 판문점에 1개 중대 정도의 병력을 배치시켰는데, 이에 대해서 우리 정부와 보도기관들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문제의 인과구조를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우리 정부와 매스컴은 북한이 휴전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선거 결과에 엉뚱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사건 본래의 의미도 확대, 왜곡시켰습니다. 북한의 이와 같은 행동은 미국이 정전위원회 위원장직을 일방적으로 남한에 이양한 것, 그러니까 미국과 남한이 휴전협정을 어긴 것에 대한 반대응으로서, 미국과 남한이 평화협정을 위반한 이상 북한도 더 이상 협정을 이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가 더욱 강했습니다. 이 사태에는 북한과 남한ㆍ미국이 서로 같은 분량만큼 책임을 져야 할 잘못이 있습니다. 사건의 전말이 이러함에도 우리 남한의 언론기관들은 일방적으로 북한군의 판문점 배치와 관련한 부분만을 부각시켜 마치 잘못이 북한 측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왜곡했습니다. 흥미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한심스러운 사실은, 이에 대해서 오히려 미국 정부가 공식발표를 해서 그때그때마다 이와 같은 남한 정부와 언론기관들의 과장되고 왜곡된 보도를 정정해 준 것입니다. 군사적 이동이나 군대의 훈련, 전방배치 등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다만 판문점에 1개 중대가 배치되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점은, 남북 간 문제를 놓고 언제나 나의 생각이나 행위는 절대로 옳고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위는 무엇이든지 절대로 잘못이라는 식의 위험한 선입감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중 기준을 가지고 문제를 재는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잠깐 언급이 되었던 부분인데, 사실 남북한 모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50년간의 분단생활을 통해서 남북이 서로 상대방의 처지나 이해관계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자기 쪽의 이익만을 기준으로 하여 고집을 부려왔습니다. 남과 북이 똑같습니다. 이런 편견으로 상대를 볼 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반이성적인 극단적 반공주의로 인해서 의식의 왜곡이 심각한 상태인데, 아무런 고려 없이 이런 착색된 안경을 쓴 눈으로 북한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남북한의 평화적인 통일을 원한다면 상대의 입장에서 그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도 그렇고 남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우리의 언론기관과 지식인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김주석이 사망했을 때 북한 인민들이 보여준 광적인 애도행위를 북한 TV를 통해서 접한 후, 그것을 한결같이 ‘집단 히스테리’ 현상으로 비웃고 매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평가는 우리가 북한이라는 사회를 잘 모르고 우리의 제한된 사고의 범위 안에서만 내린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김 주석이 왜 그렇게 인민대중의 뜨거운 사랑과 존경과 애도를 받느냐 하는 것은, 또한 그가 인민대중의 마음속에 어떠한 인물로 위치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리승만, 박정희, 전두환, 또는 노태우라는 인물이 어떻게 인식되는가 하는 것과는 단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북한의 인민대중이 김일성이라는 지도자를 그렇게 애도했던 것은 물론 공산당 선전기관이 오랜 기간에 걸쳐 시행한 우상화 교육과 세뇌의 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남한에는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유도 존재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머지 절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김일석 주석이 민중과 유리되어 강권으로 통치한 단순 권력형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남한에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항일운동의 경력을 가지고 있고 또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영토를 인민들과 함께 일구어서, 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남한보다 월등히 우월한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인민생활을 실현했고, 그 강렬한 민족적 긍지와 자력갱신 노선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제3세계의 수많은 인민들에게 경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그는 주석궁에 있는 시간의 몇 배를 농어촌, 광산, 탄광, 간척지 등을 돌아다니면서 초토화된 땅을 일구고 중공업화하고 국가재건을 하는 민중 속에서 살았습니다. 인민들 속에 들어가서 어울렸다는 사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지도자와 인민대중의 관계가 그들 사이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실정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고정관념과 편견에 의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진실은 모르면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은 평화적 통합은 더더구나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남북 재통합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신뢰구축책이 남북한 군사력의 감축이라고 생각합니다. 1993년 현재, 남한은 국가적 역량이 북한에 비해서 경제력 20배, 국제사회에서의 정치적 우월성, 군사동맹체제에서의 우월성 등을 토대로 한ㆍ미ㆍ일 공동전선으로 북한에 대한 포위, 고립화, 격리전략을 고수해 왔습니다. 1970년대에 북한 쪽이 남한 쪽에 위협을 가했던 것처럼 90년대에는 그 관계가 역전했습니다. 언제나 위협받은 쪽은 필사적으로 반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두려움을 품지 않도록 신뢰관계를 굳게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한은 신뢰 회복의 방안으로 인도주의 차원의 이산가족 찾기, 공동축구단 결성, 남북경협투자 등을 주장하는데, 정치, 경제, 사회, 동맹관계,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북한이 남한의 위협을 항시적으로 느끼고 있는 시점에서는 군축이 전제되지 않고는 실질적인 관계발전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북한의 종합적인 위상 역전 현상은 1975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이루어졌는데, 80년대에 들어오면 그 현상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미국이 한미 방위조약에 의해서 군사적으로 한국을 뒷받침하고 있는데, 소련이 남한과의 국교정상화와 함께 북한에 대한 군사동맹관계를 백지화함으로써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이 군사적 불균형을 돌파하려고 하지 않을까 저는 걱정하고 있습니다.
문민정부에 들어와서 파헤쳐진 율곡사업의 내용에서 얼마나 많은 군사비가 신규 무기와 장비의 개발과 구입에 소요되었는가를 많은 사람들이 알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남북한이 소유한 탱크, 비행기, 군함 등이 각각 몇 대이며, 북한의 병력이 100만인데 우리의 병력은 70만이니까 그 차이대로 전쟁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식으로 역대 군사정권이 가르쳤을 때, 우리는 실제로는 그것과 다른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은 1992년의 군사비가 21억 6,000만 달러라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그해 국방예산비가 120억 달러로 북한의 다섯 배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이 자체적으로 발표한 정부예산 구성의 16.1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였기 때문에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정부는 『국방백서』에서 처음으로 남한의 군사비가 북한의 2.4배라고 시인했습니다. 세계 유수의 권위 있는 군사 전문 연구소들의 평균적인 평가는 북한의 군사비를 대체로 30억에서 35억 달러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소련, 중국, 북한을 극렬하게 반대해온 미국의 유명한 반공적 성격의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은 1992년 북한의 군사비 예산안이 21.6억 달러로 발표되자, 몇 달간의 연구 끝에 북한이 발표한 것보다 1억 달러 정도 많은 22억 달러 정도일 것 같다는 견해를 발표했습니다. 만약 헤리티지 재단이 친북적인 성향의 연구재단이었다면, 우리는 이 결과를 무시할 수 있겠지만, 철저하게 북한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반공적인 연구소가 내놓은 연구 결과라는 점에서 이것은 의미 있는 평가로 볼 수 있겠습니다.
1987년과 89년 사이에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그동안 북한에 공급해왔던 중유 100만 톤을 5만 톤으로 삭감하고, 북한과의 군사동맹을 사실상 폐기하는 대가로 MIG-29기 28대를 북한에 공급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남한이 우려를 표시한 것과는 달리, 실제로 북한은 이 MIG-29기를 연간 네 시간밖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주한미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인 리스카시 대장에 의해서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의 사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North Korea’s economic troubles are to be creating serious problems. A U.S. official(in Seoul) said the pilots for North Korea’s Soviet-built MIG-29 fighters, the most modern in Pyounyang’s inventory, are permitted to train in the air only for hours per year.” “Their fuel situation is very, very low.” said (Gen. Robert W.) RisCassi.(1991.6.6, 서울 발 New York Times에서)—이런 상태에서 남한 정부의 지속적인 군사력 증강정책은 북한을 더욱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힘의 절대적 불균형 상태가 지속된다면, 북한은 재래식 군사력의 열등을 핵무기나 미사일 개발로 정면돌파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남북이 다 같이 외세와의 군사동맹관계를 청산하고 한반도 내의 군축체제로 전환할 단계라고 믿습니다. 군비 증강책을 추구하면서 평화통일을 표방하는 것은 최대의 괴변일 것입니다.
다음은 남북한 사회의 이질화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쉽게 범하는 실수는 우리는 전혀 이질화되지 않았는데 상대방만 이질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단 50년 동안 남북한은 서로 다른 제도, 가치관, 관습, 서로 다른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공유하는 측면 못지않게 이질적인 요소도 많을 것입니다. 사회의 이질화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함께 공유했던 민족생활 정서의 정상적인 모습에서 어느 쪽이 더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1993년판 정부의 공식 통계를 보면,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오늘까지 해마다 각종 범죄가 인구증가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월등히 큰 비율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통계에 포함된 각종 흉악범죄 발생 건수는 사직당국에 공식적으로 신고, 접수된 전체 가운데 입건된 15.8퍼센트로 추산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머지 84.2퍼센트의 범죄사건은 통계에 반영되지 않았는데도 그러합니다. 같은 정부 통계를 보면 국민의 78퍼센트가 이 사회의 인간관계가 무서워서 못 살겠다는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남한 사회는 철저히 범죄화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배 특권집단의 부정, 부패, 타락, 이기주의, 퇴폐풍조는 어떻습니까? 부모와 자식이 몇 푼의 돈 때문에 서로 죽이는 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밖에 믿을 수 없고. 인정, 정직, 친절, 보살핌 등의 기풍은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냉혈동물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북한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왜 저 꼴일까 하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북한만이 이질화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착각입니다. 북한의 이질화도 심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설명은 생략합니다. 따라서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규범에서 볼 때, 북한이 이질화한 분량만큼 남한이 이질화한 분량도 생각해야 합니다.
정리하면, 우선 우리는 우리 민족의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평화적인 통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놓고 방법론적인 교훈을 얻기 위해서 다른 민족들의 경험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적인 통합을 이룬 선례가 역사적으로 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상당히 어려운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쨌든 평화적인 통일을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의 개혁입니다. 평화적이고 민족자주적이며 외세배제적인 통일은 북한만이 아니라 남북한 모두가 상호주의적으로 개인의식과 사회적인 문제 두 측면에서 함께 변혁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남북한 모두에게, 냉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자세, 나부터 변화하려는 자기 변혁의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이같이 우리들의 깨어남이 있어야만 비로소 남북 간의 평화적 관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북한이 변화하는 것만큼 남한도 인간다운 삶의 사회로 탈바꿈해야만 사람이 살 만한 가치 있는 통일국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북한 같은 사회나 지금의 남한 같은 사회의 어느 하나가 민족 전체를 지배하는 통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남북한은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배척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남한의 자본주의적ㆍ물질적 생산 능력과 북한의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을 슬기롭게 결합한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진 한반도의 통일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성과로서 한민족의 행복만이 아니라 세계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주최 강연, 199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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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광주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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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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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불효자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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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농사꾼 임군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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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사회주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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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지식인의 기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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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키스앤드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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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제복과 유행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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