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한국의 ‘친일파’들에게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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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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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한국의 ‘친일파’들에게(1986년, 역설)


 


해방 41주년을 맞는 민족의 의지

이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된 지 이 달로서 만 40년, 41주년이 된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8ㆍ15 그날의 벅찬 감격과 화려했던 민족의 꿈은 퇴색되고 남ㆍ북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3년 만에 강토는 양단되었다. 그 결과 2년이 못 가서 골육상쟁의 내전을 겪고, 이 강산은 세계적 규모의 냉전체제에 편입된 채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핵전쟁의 잠재적 폭발점으로 변해버렸다. 민족의 통일보다는 군사적 긴장이 이 민족의 생리가 되고 체질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 오랜 세월의 제국주의ㆍ군국주의의 식민지 고통에서 해방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일그러진 사회적 체질과 국민적 정신구조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는 젊은이들의 반분단ㆍ반외세의 존ㆍ반전쟁ㆍ평화지향적 세계관을 오히려 위험사상으로 단죄하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젊은 세대의 그 같은 자각된 인식은 해방 후 40년의 제도적ㆍ사상적 모순을 지성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다.
해방 후에 탄생한 이른바 ‘해방세대’가 이 나라 총인구의 70퍼센트를 넘었고, 6ㆍ25 후에 태어난 세대가 60퍼센트를 넘어섰다.짐작컨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 해방 후 세대와, 그들을 뒤이을 후손들에게 해방 전 세대와 6ㆍ25 전 세대가 물려줄 것은 구세대들의 연대적 책임인 분단과 동족상잔의 기록은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 기성세대는 분단의 동족상잔을 더 이상 앞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해방 후 세대들은 휴전선으로 갇힌 것보다 더 넓은 민족적 지리공간을 요구하고 있고, 전쟁과 군사대결이 아닌 평화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이 민족의 내일을 상징한다. 내일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기성 해방 전 세대와 다른 만큼, 8ㆍ15해방의 의미도 앞으로는 지난 40년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민족의 내적 장벽을 허무는 시대로

해방 41주년을 맞는 민족적 의지도 과거 40년의 그것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물질적ㆍ군사적 대결로부터의 정신적 번신(飜身), 즉 정치ㆍ외교ㆍ사상ㆍ이념ㆍ문화면에서 민족 내적 장벽을 허무는 작업의 시대로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민족 외적으로는 민족 내적 화해와 공존, 나아가 통일의 길에 조성된 국제적 장벽과 방해요소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제는 지난 시기의 물질적 건설 못지않게 힘겨울 것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새로운 40년의 시간을 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방 직후의 분단과 그 후의 동족상쟁의 전쟁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연령층은 생명공산(生命公算)의 원리를 거부할 수 없다. 우리 세대는 가야 하는 것이고 새로운 사업은 분단과 동족상쟁의 책임을 강요당하기를 거부하는 젊은 세대의 과제가 되게 마련이다. 이 자각과 인식이 아직도 기성세대에게서 희박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제 이 나라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된 젊은 구성분자들이 자신의 생존형태를 구속하는 남ㆍ북의 민족 총체적 생존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신선한 시각으로 나라의 안팎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것은 40년 만의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 민족을 둘러싼 주변국가들과 관련 세력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관찰하기를 요구한다. 이는 지난 40년간 우리가 고수해온 이민족의 분단ㆍ대립적 체제유지의 관점이 아니라 군사적 대립의 완화와 통일을 향한 민족적 염원에 기초한 관점을 말한다. 일본이 이 민족을 지배했던 세월과 맞먹는 해방 후 40년을 보내고, 해방후 출생한 세대들이 시대의 주역이 되려는 1986년의 8ㆍ15에 서서 그들이 ‘새로운 관점’으로 일본을 살펴보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

우리가 일본을 관찰할 때 설 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인 개개인을 검증하는 관점이고 둘째는 일본국가와 국가적 조직원리, 그 지배세력의 성격과 세계관, 그리고 총체적 국가의지(國家意志)를 문제삼는 관점이다. 우리가 민족적 생존의 질적 변화의 분기점에 서서 긴급히 필요한 지식과 통찰은 일본국가에 대한 것이고 그것과의 관계양식이다.
일본인 개인의 인간적 자질이나 시민적 특성 심리 등에 관해서 말하면 결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종족으로 비친다. 그들의 친절심과 예의바름, 근면과 치밀성과 창의력(이미 모방의 단계는 지났다). 질서의식과 책임감 등은 세계에 정평 있는 측면이다. 반드시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일본인의 단결심과 복종심, 그리고 상하 좌우간 직업생활 관계 속에서의 순응성과 인화를 유지하는 재질은 가히 경탄할 만하다. 개성이 강한 반면(또는 바로 그 까닭에) 집단적 생활양식에 순응하기 어려운 한국인의 눈에는 신기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그 같은 많은 장점 속에 바로 그와 정반대되는 요소들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미국인 베네딕트가『국화와 칼』속에서 소상하게 파헤친 이후 수많은 외국인 관찰자들에 의해서 공통적으로 지적된 바다. 우리는 일제통치의 일본인과 최근 집단을 이루고 찾아들어 이 나라를 휘젓고 다니는 일본인 관광객의 모습을 그것과 대치시켜볼 수도 있다. 어느 종족ㆍ민족도 인간적 차원에서 보면 그들에게 매겨질 점수의 총합은 어차피 대동소이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일본인 개인이 아니라 그들의 온갖 특성의 종합적 의사표현인 정부와 국가라는 정치적 유기체에 있다. 즉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관계다. 일본과 한국은 해방 후 20년간의 관계단절 상태에서 1965년 ‘국교정상화’로 대등한 정치외교 관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구(舊)식민 종주국과 전(前)피식민 신생국 사이의 ‘평등’은 그 후 70년대 말까지, 그리고 오늘까지 이어진 20년간의 경제관계의 실체로 허구임이 입증되었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 불평등의 관계는 군사적 내용으로 확대되려 한다.
이 같은 한일관계의 불평등화 과정과 목표는 분명히 말해서 애당초 일본이라는 국가의 의지였다기보다 미합중국의 의지였다. 대한민국은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성장시키고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시장과 군사적 전방초소였다. 이승만 정권이 한일회담에서 뒷걸음치고 있을 때, 미국정부의 정책 자문자인 조지 케난은 분명히 경고했다. “미국으로서는 남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소중한 것이다. 만일 한국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주저한다면 차라리 미국으로서는 남한을 포기함만 못하다.”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5ㆍ16쿠데타로 집권하고,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간 1961년 11월의 회담에서 케네디가 박 정권에 대한 승인과 지지의 중요한 조건으로 조속한 한일회담의 타결을 강요했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완결단계에 이른 한국의 대일의존 체제

한국문제 전문가로서 미국의 학계에서 거의 독보적 존재인 브루스 커밍스 박사의 관찰이 그 이면을 잘 설명해준다. 커밍스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 정권과 박 정권 초기의 한국은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면에서 너무도 취약하여“북한의 총검 한 차례로 붕괴될”위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의 프랭크 처치 위원장도 그 당시 공개적으로 같은 말을 서슴지 않았다. 한일 양국 정부로 하여금 쌍방 국민의 노도와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국교를 맺도록 압력을 가한 미국의 의도는 위태로울 정도로 기운 남ㆍ북한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불균형을 일본의 정치ㆍ경제적 뒷받침으로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미국의 뜻을 받은 사토 일본수상이 1969년 11월 닉슨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한국의 안전은 일본 자신의 안전에 긴요하다”라고 성명한 것을 기점으로 한일 양국의 일체화 과정은 시작되었다. 이것이 소위 미ㆍ일 정부 간의 ‘한국조항’(韓國條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74년 미끼(三木) 일본수상은 한국(남한)의 안전과 일본의 안전을 직결시키는 인식은 냉전적 사고라고 반대했다. 그 결과 포드 대통령은 남한의 안전이 아니라“조선반도에서의 평화유지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필요하다”로 후퇴했다. 이것이 이른바 ‘신(新)한국조항’이라는 것이다.
다시 1977년 후꾸다(福田) 일본수상은 ‘한국의 안전’을 빼고“일본과 동아시아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조선(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의 유지가 중요하다”로 닉슨 미국 대통령을 만족시켰다. 즉 일본정부는 이 시기까지는 한국(남한)과의 군사적 관계 수립에는 소극적 노선을 고수했다.
그러나 미국에 레이건 정권이 서고, 일본에 나까소네 수상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의 대한정책은 군사적 일체화로 치닫게 된다. 1983년 1월, 집권 후 한 달 만에 공동성명에서“한국의 방위노력이 이 반도의 평화유지에 기여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한일 양국의 군사적 동맹화 노선을 강조하는 표시로서 우리 정부는“한ㆍ미ㆍ일 3국의 안보협력 체제가 더욱 긴밀해져야 한다는 점에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이른바 ‘한일신기원’(韓日新紀元) 또는 ‘한일관계의 새시대’론이다. 이 노선에 따라 40억 달러의 일본정부 차관이 한국에 제공되고, 뒤이어 이듬해 봄에는 한국의 대통령이 일황(日皇)을 도쿄에서 만나게 된다. 이 마지막 단계가 레이건 미국정부의 미ㆍ일ㆍ한 3국 군사동맹 체제를 마무리짓는 포석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같이 하여 20년 전 한일회담 타결 때부터 불안스럽게 예상되었던 한국의 일본 의존체제는 완결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이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일본으로 하여금 다시 한국의 보호자 역할을 맡게 하려는 ‘60년대 정치, 70년대 경제, 80년대 군사’관계는 일본에서는 나까소네 수상의, 그리고 한국에서는 전 정권의 등장으로 단숨에 촉진되었다. 앞으로 남은 것은 일본에 대한 ‘문화’적 동화작업뿐이다.
‘문화협력’이라는 명칭으로 추구되는 마무리 작업은 쉽게 말해서 한국국민의 심리ㆍ정신ㆍ사상적 ‘일본화’작업이다. 경제대국에서 정치대국의 기반을 굳히고 사실상의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본이 미국과의 ‘남한보호’업무 분담체제를 완결하려면 일본에 대한 한국국민의 역사적 감정을 분해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작업에 한해서 말한다면, 해방 이후 오늘까지 이 나라를 지배해온 과거의 역대 정권하에서 그 목적은 대부분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실례를 낱낱이 열거할 필요조차 없다.

미국숭배에서 일본숭배로

지금 이 나라 국민은 마치 미국과 미국문화의 숭배자가 되어버렸듯이 일본문화의 숭배자가 되어가고 있다. 쉽게 말해서 미국과의 정치ㆍ외교ㆍ경제ㆍ군사 관계의 결과가 미국에 대한 이 민족의 자주성 상실을 초래했듯이, 같은 과정의 결과로 일본에 대한 민족적ㆍ국가적ㆍ국민적ㆍ개인적 주체자주의식을 박탈하려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 정부는 집권 직후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하위 동맹국가(민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ㆍ심리적(즉 문화적) 갈등을 제거함으로써 피라밋형 미국 지배체제 강화를 목표로 하는 국제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과 아랍민족사이, 아프리카에서 남아공화국과 흑인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대한것이 그렇다. 그리고 동남아지역에서의 대상이 일본과 한국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화정책이 언제나 이스라엘, 남아공화국, 일본을 우월적 위치로 하는 ‘문화협력’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정책과 구상은 경제 즉 ‘돈’의 대가로 요구된다는 데 특징이 있다. 한일회담 체결로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 관계를 청산하는 ‘재산청구권’3억 달러로 이 국가의 문은 일본에게 활짝 열렸다. 1983년 초 40억 달러의 경제협력(원조) 보따리를 들고 온 나까소네 수상이 돌아갈 때 그의 손에는 쌍방정부 수뇌 간에 합의된 ‘한일 문화협력 촉진’이라는 우리 정부의 서약이 선물로 건네졌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반론으로 말한다면 우리 국민은 절대로 쇄국주의나 국수주의의 편협한 세계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류의 보편적 이익과 복지 및 평화를 위해 세계의 모든 나라ㆍ민족ㆍ국민 들과의 문화교류에 진취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하물며 가장 가까운 일본하고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 이유는 없다. 이 점에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점은 그 일반론에 앞서는 특수 특정적 목적과 성격이다. 판단의 기준은 그 모든 목적ㆍ구상ㆍ계획이 한반도 민족의 군사적대결의 강화, 민족분열의 영구화ㆍ고정화를 ‘위한 것’이냐 아니냐, 또 목적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작용할 것’이냐 아니냐에 있어야 한다.
일본을 관찰함에서도 일본인 개인의 기질이나 재능 같은 평가를 일단 취사하고, 그것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일본국’이라는 국가의 의지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주목할 필요를 강조한 까닭이 그것이다.

일본의 의지와 목표

현재의 ‘일본국’의 의지와 목표를 집약적으로 판별하는 가장 좋은 재료는 일본정부의 국정교과서 검정기준 사상이다. 어느 나라든 그 국민의 마음속에 이상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배양하려 한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그 교과서에 주입하려는 정신과 사상은 일본국 지배세력의 성격을 말해주며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대변한다.
지난 몇 해를 두고 우리는 일본정부의 교과서 검정 정신과 방향 때문에 분노하기도 하고 항의하기를 거의 해마다 거듭해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교과서 문제가 단순히 일본인들의 ‘과거’의 행위를 미화ㆍ분식ㆍ정당화ㆍ합법화하는 측면에서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난을 했을 뿐이다. 이 인식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역사왜곡’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과서 내용을 왜곡하려는 의도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일’즉 ‘장래’에 대한 기도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금년(1986) 들어서도 또 한 차례의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다. 일본의 침략과 통치의 피해를 입은 아시아의 정부와 국민들의 맹렬한 항의로 일본정부는 겉으로는 시정을 지시(그것도 마지못해)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은밀하게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일본정부는 바라지 않는데 일부 교과서 출판업자나 집필자가 ‘정부의 뜻을 어기면서’그런다고 생각하면 일본 교과서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과서의 ‘개악’(改惡)작업은 전적으로 일본정부와 그것을 구성하고 움직이는 일본 보수세력의 근본정책이다. 나까소네가 집권하면서 교과서 개악에 박차를 가한 것은 그들이 이미 설정한 구체적인 장기구상과 계획을 단시일 내에 실현할 제반조건이 갖추어 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과서 왜곡으로 그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 일제시대와 같은 완벽한 천황통치체제로의 복귀, 전쟁행위 및 군사력 보지를 금한 현 ‘평화헌법’의 폐기, 그리고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장애가 되는 헌법ㆍ법률ㆍ사상ㆍ가치관ㆍ제도ㆍ규정 등을 제거하여 일본군대의 독자성 부여와 외국에 대한 군사력 행사를 가능하게 하려는 3가지 목적이다. 나머지 많은 분야와 측면의 교과서 왜곡 사항들은 이 3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부수적 또는 구성요소적 차원의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입장에서 문제시하는 합방(合邦), 3ㆍ1운동, 토지조사사업, 국어 사용금지, 징병과 강제징집,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등에 관한 왜곡기술은, 일본 집권세력의 관점에서는 그 모든 침략행위를 ‘천황제도 일본제국’(天皇制度日本帝國)의 영광과 위업으로 묘사하여 천황통치체제 복구를 위해 일본국민을 세뇌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중국과 동남아의 침략과 대규모 학살행위에 대한 역사왜곡도 중국과 동남아지역 국민에게는 중대한 문제지만, 일본의 현 지배세력에게는 왕년의 ‘대일본제국 군대’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이룩할 수 있었던 ‘일본국’과 ‘일본민족’의 세계적 강대국으로서의 웅지와 긍지를 고취하는 뜻에서만 중요한 것이다. 그러자면 일본 군사력의 행사를 통한 일본 근대사에서의 온갖 범죄행위는 미화되고 정당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천황을 다시 신격화하고 그의 실질적이고 헌법적인 통치권을 복귀시키는 작업은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종교에서는 침략전쟁의 전사자를 모셨다는 신사(神社)의 성역화와 애국심의 상징화다. 이를 위해서 나까소네 수상의 집권과 동시에 전체각료의 공식참배가 강행되고 있음은 잘 알려진 바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전근대사상적일 수밖에 없는 농촌지방 주민들로 하여금 촌(村)ㆍ정(町)ㆍ시의회(市議會)와 각종 향토집단을 통해서 앞에서 말한 3가지 방향으로의 여론을 조성하고 그것을 입법화하라는 결의를 제기하도록 사주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일본제국 군대’와 천황제를 찬양하는 텔레비전ㆍ영화ㆍ소설ㆍ군가ㆍ향토적 행사 등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수년 전 천황의 원호연대(元號年代),즉 소화(昭和)가 서기연대를 대신해서 강제조항으로 입법화되었다. 관공서에서 ‘1985년’이라는 연대를 쓰면 서류의 접수를 거부당한다. 기원절(紀元節)ㆍ천장절(天長節, 일황의 생일)이 복구되고 있다. 국기(國旗)가 아닌 ‘히노마루’(日の丸)의 게양과 국가(國歌)가 아닌 ‘기미가요’(君ガ代)의 제창이 강요되고 있다. 헌법은 모든 사상과 집회 및 의사표시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지만 나까소네 정권 이후에는 천황통치제 회복, 전면적 군사력 확장, 평화헌법의 폐기 등을 요구하는 우익집회와 가두선전은 어디서나 자유지만, 그것을 반대하는 좌익ㆍ중도적 집회나 가두선전에 대해서는 경찰의 간섭이 심해지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역사적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황실의 ‘만세일계’(萬世一系) 학설과 이론, 중국과 특히 신라ㆍ백제ㆍ고구려의 영향을 극력 부정하는 일본문화 및 역사의 독창성과 황국(皇國)사상을 고취하는 폐쇄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런 실례를 들자면 한이 없다. 여기서 다시 문제의 핵심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가 일본 교과서 왜곡이 내포하는 문제를 중요시하는 까닭은 현 일본 지배세력이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것이 민족적 과제인 남북의 군사 긴장완화와 대결체제의 해소, 외세의존을 배격한 민족자주적 통일노력과 어떻게 관계되고 작용할 것이냐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복고주의적인 일본의 현 지배층

필자의 일본생활 경험에서 보더라도, 일본인 중에 자기 국가의 과거 범죄사실을 그대로 시인하는 사람은 좌익과 소수의 진보적 지식인밖에 없었다. 우익과 보수적 일본인은, 해방(패전) 전 세대이면 일제ㆍ천황주의 파쇼체제가 교육한 그대로 정당화하고 있거나, 고작해서 그들이 베푼 ‘시혜’로 ‘과실’은 상쇄되었다는 정도의 인식이다. 해방 후 세대는 왜곡된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그들의 국가적ㆍ민족적 과거에 대해 무지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 강력한 거부반응을 나타낸다. 우리의 인구 70퍼센트에 대응하는 일본인 70퍼센트의 전형적 답변은 이렇다.
과거지사는 역사에 묻어버립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종전 이후 세대에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이오. 그것은 할아버지ㆍ아버지ㆍ형들이 한 짓이지 우리가 알 게 뭐란 말이오.

물질적 번영과 향락주의적 문화에 매몰돼 있는 듯이 보이는 그들에게는 역사의식이란 없어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정부가 교과서 왜곡, 즉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교과서 기술내용에 대한 강제적 통제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패전한 지 10년밖에 안 되는 1955년부터니 말이다.
일본의 현 집권세력은 그것이 정부건 정당이건 또는 재계ㆍ경제계ㆍ문화계이건, 대개 전전(戰前)세대 즉 일본 제국주의의 추진자였거나 그 직계 연령층이다. 일본사회는 노령(老齡)문화가 지배한다. 우리의 유교적 전통사상 도덕으로서의 노인 존경과는 달리 노령의 지도력과 권위에 복종한다. 우리나라에서는 50대 중반이면 각 분야에서 지도력과 권위를 상실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같은 해, 같은 날에 해방(종전)되었지만 앞으로도 일제(일제적) 인물들이 일본을 끌고 갈 시간이 20년은 남아 있다. 우리나라 각계의 해방 후 세대의 젊은 지도자들은 앞으로도 20세는 더 많은 그 교활ㆍ노회한 그들과 상당기간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위인들이다.
이 노령층, 구제국 복고주의자들이 천황통치체제를 재확립함으로써 군사력의 무제한적 행사를 합법화하는 개헌을 기도하고 있다. 그것을 저지하려는 좌익과 노동조합 및 양심적 지식인 세력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국수주의와 천황숭배적 일본종교 신도(神道)의 정치세력화를 저지하려는 일본 그리스도교는 신ㆍ구교를 합쳐서 일본 인구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도쿄 시내에서 교회나 성당을 찾는 것은 현세에서 천당을 찾기보다 힘들다. 게다가 일본인은 종교적으로 우상숭배심이 강하고 민족정서로는 배타적이어서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신앙이 대중화할 정신적 토양은 매우 메마르다.
일본인은 ‘집단적’동물이다. 그들은 마을(村, 무라)의 일원이라는 향토적 감각이 강하다. 세계 최첨단의 과학기술과 경영ㆍ행정의 전문가들조차 자신들이 속한 집단과 조직 속의 위계질서 및 상호관계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권위에 대한 복종심은 아마도 세계의 수많은 국민 중 일본인에게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특징일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근대적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윤리는 일본인과는 인연이 없다. 일본교회가 천황통치체제로의 복귀를 저지할 기능은 애당초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의 천황관

그러면 일본인 일반의 천황관은 어떤가? 『아사히신문』이 1983년 8월에 실시한 여론조사가 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준다. “당신은 현재의 천황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라는 설문에 대한 응답은 다음과 같다.



별다른 생각 없다. 41퍼센트
존경심을 가진다. 31퍼센트
친근감을 느낀다. 22퍼센트
반감을 가진다. 3퍼센트
기타 및 무답 3퍼센트




이 응답에서 가장 주목되는 특징은 세대차이였다. ‘천황을 존경하는 사람’중 해방(패전) 후 세대인 젊은이들은 15퍼센트인데 반해 제국세대인 50세 이상은 50퍼센트가 넘었다. 한편 ‘별다른 생각이 없는’사람은 전후세대가 압도적이다. 20세가 60퍼센트, 30대도 50퍼센트를 넘었다.
패전 후 세대는 미국이 실시한 일정한 민주주의 교육과 반권위주의적 에토스 속에서 자랐다. 따라서 제국세대가 국민을 끌고 가려는 천황친정체제의 복구, 그 권위를 빌린 군사대국화,일본 군사력의 본격적 대외간섭의 합법화, 그것을 합법화하기 위한 평화헌법의 폐기, 나아가서 핵무장의 합법화 등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국민의 민주주의적 기본권리를 제약하는 각종 입법화와 조치 등에 대해서 젊은 연령일수록 거부감이 강하다.

반공을 위한 역사왜곡

그들의 의식을 군국주의적 방향으로 개조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일까?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단계에서 세뇌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정부와 지배층이 아시아 국가들과 양식 있는 내국민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강행하는 체계적인 교과서의 개악, 공식 명칭으로 ‘국정교과서 검정제도’인 것이다.
그것은 임나국(任那國)이 조선반도에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들이 3ㆍ1운동에서 학살한 ‘조센징’을 몇천 명으로 기술하느냐 하는 차원의문제가 아니다.10년, 20년, 30년 후의,다시 말해서 장래의 우리의 민족적 운명과 직결된 문제임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문제해명의 논리적 순서로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미화하고 교과서의 전반적 왜곡을 추진 지지하는 구체적인 개인ㆍ단체ㆍ세력의 정체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과 한국인은 지극히 불편한 입장에 처하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두 달 전에 또 일어난 교과서 분쟁의 최근판인『일본사』(日本史)의 저자 겸 발행인은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國民會議)’였다. 이 단체는 어떤 철학과 세계관의 모임인가?
‘국민회의’는 1982년 10월 27일에 결성된, 그런 성격과 목적의 단체들 중에서는 가장 어린 단체다. 그 구성원들은 일본안보연구센터, 일본전략연구센터, 통일협회와 그 산하의 원리연구회, 세계평화 아카데미 및 그 부속기관인 국제문화재단, 국제승공연맹 등의 저명인사들이다. 이들 단체는 일본에서 최우익ㆍ반공주의를 표방한다. 그 구성단체들의 지도적 구성원들은 일본 정ㆍ재ㆍ군ㆍ관ㆍ학ㆍ종교ㆍ언론 등 각계의 천황주의ㆍ반공주의의 최선봉에 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천황친정체제뿐 아니라 핵무장과 항공모함을 비롯한 공격적 군사력, 국가총동원법체제, GNP의 3퍼센트 군사비 지출 등을 위한 여론조성과 정치적 압력의 주역이 되고 있다. 그들은 예외없이 ‘친한파’이고 우리 정부와 각계의 민간기구 및 개인과 밀접한 친교를 맺고 있다. 그 이름을 열거하면 웬만한 한국인 식자는 자기의 ‘친구’임을 자처할 인물들이다.
이 단체는 그 같은 단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나머지 동류의 단체와 개인들도 예외없이 대한민국을 지지하고 북한을 반대하고, 한국의 각 분야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친한파다. 그들은 한국침략의 미화ㆍ정당화를 비롯한 모든 역사왜곡은 ‘반공’을 위해서 정당화될 뿐 아니라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제국주의ㆍ식민주의ㆍ군국주의나 천황 파시즘, 그 이념하의 인접지역 민중의 학살과 탄압을 합법화ㆍ정당화하는 반공주의 세계관의 단체와 인사들이다.
어찌하여 많은 일본인 중에 이런 자들이 주로 반공을 외치며 ‘친한파’가 되는가?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시’와 이념인 반공주의를 지원하기 위해서 역사왜곡이 정당화된다고 한다. 그들은 1982년의 교과서 파동 때, 대한민국의 항의에 대해“반공을 하기 위해서 그러는데 당신들이 항의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라고 오히려 반박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교과서 왜곡을 규탄ㆍ비난하는 눈을 우리의 국가적 체질과 우리 자신의 세계관ㆍ이데올로기ㆍ가치관에 돌려야하는 곤혹을 느끼게 된다. ‘반공’이면 그 모든 죄악이 정당화되는가? 우리의 입장과 관점은 ‘자기모순’이 아니면 ‘이율배반’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서독과 일본의 극단적 인식 차이

동서양에서 군사력에 의한 패권을 꿈꾸다가 참패한 일본과 독일민족이 패전 후에 보여준 태도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 모든 것이 후세대의 교과서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하는 태도로 집약된다.
독일은 일본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서독의 경우 1949년 ‘국제교과서연구소’를 설치하여 서독의 역사학자ㆍ교육자들이 나치의 피해자인 주변국가들의 학자ㆍ교육자들을 초대하여 왜곡된 역사적 기술과 표현, 평가를 바로잡는 공동 연구작업을 추진했다.
과거의 죄과를 반성 비판하고, 인류적 양심에 입각해서 다시는 범죄적 민족과 국가가 되지 않도록 새 세대를 교육할 근본사상으로서 교과서 수정작업이 국제적인 국가사업으로 추진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시에 설치된 이 국책연구소는 대체로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쳤다. 첫째 게르만 민족이 ‘선민’사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책임규명 작업, 둘째 독일인의 범죄행위의 여러 가지 사례를 놓고 그 ‘원인을 분석’하는 작업, 셋째 나치체제의 권력구조의 특성 및 권력 엘리트의 성분분석, 그들의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지위ㆍ위치ㆍ역할 등 종합적 구조적 해부였다.
이상과 같은 국가사업은 50년대부터 70년도까지 계속되었다. 이 사업에서 독일정부와 국민은 군국주의의 악몽을 털어버리고 민주주의로의 변신을 위해서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여기에는 미국과 소련의 전후 처리방식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에서의 반공 전초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전쟁범죄자 괴수급 7명을 교수형에 처한 것 외에 A급 16명에게 무기형을 선고한 후, 1950년 10월 그들과 공직에서 추방됐던 10만여 명의 각급 전범자들을 전원 석방했다. 석방된 이들 전쟁범죄자들이 그 후 반공의 이름 아래 미국에 협력하는 각계각층의 지도자가 되고, 현재까지도 일본 정치ㆍ재계ㆍ정당을 좌지우지하고있다. 천황친정제와 팽창적 군사대국화의 주도세력도 이들과 그 직계들이며, 그들이 대체로 교과서 왜곡운동에 앞장서는 소위 ‘친한파’인사들인 것이다.

역사적 과오를 씻는 독일의 자세

서독과 일본이, 전후의 비무장화를 요구하는 국민과 외국의 강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소(對蘇) 반공전략으로 각기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된 과정은 동일하다. 서독은 북대서양동맹에, 일본은 미ㆍ일 군사동맹에 편입되어 서ㆍ동양에서 미국의 가장 충직한 하위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동일하다. 그러나 자기 민족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도덕적 신념에서는 천양지차가 있다.
일본의 경우 전쟁범죄자를 자기 국민의 의지로 처단한 경우는 한 명도 없다. 도쿄 전범(戰犯)재판의 경우는 앞에서 기술했다. B급과 C급 전쟁범죄자의 처벌도 모두 외국법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미국ㆍ영국ㆍ오스트레일리아ㆍ네덜란드ㆍ중국ㆍ프랑스ㆍ필리핀정부의 개별적 재판정에서 합계 5,423명이 재판을 받고 그중 920명이 사형당했다.
독일에서는 승전 연합군에 의한 유명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끝난 뒤에도, 또 사실은 이미 그것과는 별도로 그때부터 독일국민의 의지에 의해서 ‘나치스 범죄추궁센터’가 설치되어 자가숙청을 계속했다. 일본의 B,C급에 해당하는 자들의 처벌이었다. 나치의 피해를 입은 주변국가들에서 행해진 개별적 처벌과는 또 별도였다. 그리하여 패전일부터 1982년 말일까지의 37년 동안 총계 8만 8,587명이 기소되고, 그중 6,456명에 대해서 유죄판결이 확정되었다. ‘독일기본법’(헌법) 제정으로 사형제도가 폐지되기 이전에 이미 12명이 사형에 처해졌고, 총 158명에 무기형, 6,180명에게 유기형이 확정되었다. 이것이 패전 후 서독국민에 의한 나치범죄 숙청의 실적이다. 수감 중에 노령으로 또는 병으로 사망한 수효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뿐이 아니라 서독국회(연방회의)는 1979년 7월,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이때까지 범죄추궁을 면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형법개정안을 가결했다. 범죄행위가 있은지 30, 40년 뒤에도“그 죄의 시효는 영원히 성립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둔다는 것은 일반적(문명사회의) 관념에서는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전쟁과 범죄행위가 끝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국민이 세계 도처에 도피 잠복해사는 나치 범죄자들을 기어이 찾아내어 처벌하고 있는 원칙적 정신구조는 일본국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독일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패전 후에 출생한 인구, 즉 자기의 아버지와 형들이 저지른 범죄에 책임이 없는 세대가 전체 인구의 반을 넘는다. 그러나 독일의 지도자들과 국민 일반은 자기 민족이 저지른 죄과에 관해서 누구도 역사적 책임을 모면하려 해서는 안 되며 회피할 수도 없다는 준엄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다시는 그 같은 범죄행위가 민족 또는 국가의 이름으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 국민적 결의를 재확인한 것이다. 독일의 선린정책과 이웃나라에 대한 ‘협력’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은 전혀 다르다. 일본, 특히 그 정부가 이웃에 대해 이른바 ‘협력’의 이름 아래 추진하는 접근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서 언제나 ‘침략적’이라고 비난받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 그들은 역사적 반성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철저하게 배타적이고 이기주의적이다. 일본을 모르는 우리의 해방 후 세대, 앞으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할 역사적 책임을 걸머진 지금의 젊은 한국인은 이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 지도자들의 말과 속셈은 언제나 다르다. 준엄한 자기반성을 행동으로 입증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한반도는 패전 40년 후인 오늘도 40년 전의 조선에 불과하다.
그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다. 우리는 그 증거를 바로 작년, 즉 두 나라의 패전 40주년의 날에 그 지도자와 국민들이 보여준 자세에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

서독 ‘바이츠재커’대통령의 처절한 참회

5월 8일은 독일의 패전기념일이고 8월 15일은 일본의 패전기념일이다. 1985년의 이 두 날은 두 국민에게 다같이 ‘전후 40년’적 의미를 갖는 중요한 ‘고비’로 간주되었고, 두 나라에서는 그만한 행사가 있었다.
독일의 경우는 독일연방회의에서 ‘리하르트 폰 바이츠재커’대통령이 한 기념사로 그날을 맞는 독일국민의 정신자세가 표현되었다. 그는 기념사의 주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5월 8일은 기억을 되살려야 할 날입니다. 과거의 일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왜곡함이 없이 상기함으로써 우리들의 진정한 존재의 부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진한 글씨–필자)




그리고 이어지는 긴 기념사의 서두를 독재와 폭정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에 바친 그는“독일 집단수용소에서 학살된 600만 명의 유대인의 명복을 빌고 독일민족이 저지른 전쟁으로 재난을 당한 모든 국민, 특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련과 폴란드 시민들의 영혼에 조의를 표명”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군인으로서 죽은 독일인, 본토에서 공습으로 죽거나 포로수용소나 추방 상태에서 죽은 동포들의 명복을 빌었다. 뒤이어 그는 독일국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그리고 개인적으로, “독일인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한 집시들, 동성연애자들, 정신병환자들, 종교인 및 정치범과 양심범들의 명복을 빌었다. 또 독일 내에서 처형된 수용자들, 독일인 점령하의 여러 나라에서 죽은 반(反)나치 항독 레지스탕스의 용사들, 국내에서 반나치 저항운동에 참여하여 처형된 공인ㆍ군인ㆍ교회신도ㆍ노동자ㆍ조합운동자 그리고 공산주의자”를 애도했다. 그리고 그는“적극적으로 항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양심을 유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사람들”을 애도했다.

조상들의 죄, 후손도 기억해야 한다

바이츠재커 대통령의 기념사는 가해자 독일민족의 피해자를 고루 찾아간다. 그는“그 시기에 가장 무거운 멍에를 져야 했던 것은 여러 나라의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재난과 행복의 박탈, 그리고 소리 없이 참아야 했던 인내심은 너무도 쉽게 역사에서 잊혀질지 모른다”고 울먹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독일국민 전부에게 가슴을 에이는 ‘반성과 자기비판’을 호소하면서 강조했다.



그로부터 40년 후의 오늘의 독일인구의 대부분은 그 당시 어린이였거나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행위에 대해서 죄책을 자백할 수는 없다. 그들이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의를 걸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별심 있는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친은 그들에게 극악한 유죄를 물려주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누구나가 다 그 결과적 사실의 멍에를 져야 하며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들은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려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서로 도와야 하며 또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저명한 철학자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인 이 독일 지도자의 도덕적ㆍ윤리적 그리고 종교적 참회는 다음의 구절에 이르면서 순교자적 엄숙함을 지닌다.



지나간 일은 수정되거나 백지화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 된다…… 참회와 속죄 없이는 구제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함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증언이다. 그것은 속죄의 원천이다…… 이 증거를 망각하는 자는 내일의 믿음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바이츠재커 대통령은 독일국민이 정의와 사랑의 정신으로 앞날을 건설하기 위해서 조상들의 죄과에 대한 책임도 회피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역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에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타이르고, 죄로 가득 찬 과거 위에 사랑과 정의를 꽃피우는 것은 다만 투철한 역사의식과 끊임없는 자기비판으로만 가능하다고 맺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어떤가? 일본은 소화(昭和) 31년, 즉 패전 후 10년이 지난 1956년에 벌써“이미 전후(戰後)가 아니다”(もはや戰後てはない)라는 오만한 태도로 돌아갔다. 한국전쟁의 혜택으로 경제복구를 이룩한 일본정부는 이 해의『경제백서』에서 그 같은 ‘전후에 대한 결별’을 선언했다. 도덕적ㆍ윤리적ㆍ종교적 참회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반성과 역사적 인식을 완벽하게 결한 물질숭배사상이 자랑스럽게 고취되었다. ‘일본민족 우수성’의 증거라고 정부가 선전하고일본인 자기들끼리 그것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반도 민중의 재난 같은 것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전후 총결산을 선언한 나까소네의 무치(無恥)

그로부터 30년 뒤 독일국민의 지도자가 조상의 죄과에 대해서 책임이 없는 전후세대에까지 처절한 자기비판을 호소한 같은 날, 나까소네 수상은 1985년을 ‘전후 총결산’의 해라고 선언했다. 과거의 모든 것은 완전히 ‘역사’속에 묻혔거나 영원의 ‘시간’속에 흘러가버렸다는 것이다. 물질적 ‘총결산’을 한 지 30년 뒤 정치적ㆍ도덕적ㆍ사상적ㆍ윤리적으로 그리고 법률적으로도 일본은 40년 전까지의 범죄에 대해서 완전히 ‘면책’(免責)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40회의 8ㆍ15를 맞이한 날 아침, 일본 지도자는 일제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구니 신사에 공식참배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사의식과 정신상태를 온 세계에 과시했다. 일제 말의 해군중위인 나까소네는 이미 7월 27일 천황주의 보수세력의 집결체인 집권 자민당 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이 40주년 기념사를 했다.



……아메리카에는 알링턴 전몰군인 묘지가 있고, 소련과 그밖의 나라에도 전몰군인의 묘가 있다. 국가를 위해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 국민이 감사의 마음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는가!




일본 지배세력의 철학을 대변하는 나까소네 수상의 마음에는 ‘군국(軍國) 일본’에 대한 복고적 집념이 불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기념사를 그의 입에서 듣게 된다.



전전(戰前)에는 황국사관이 있었다. 전후에는 태평양사관 즉 도쿄재판사관이 나왔다. 연합국의 법률로 일본을 피고로 해 문명ㆍ평화ㆍ인도의 이름으로 재판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가 최종 판정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에는 무엇이든 잘못됐다는 자학적인 사조가 번져 있었다. 지금도 그 여독이 남아 있다. (과거) 일본의 나쁜 행위를 지적하면 그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다. 나는 반대다. 전쟁에 이기건 지건국가다. 오욕을 털어버리고 영광을 추구해서 매진하는 것이 국가이며 국민의 모습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국민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전후 총결산’철학이다. 이제 속죄는 끝나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봐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다는 사상이다.
지난날의 일본의 ‘영광’만이 일본에게는 소중하다. 일본인의 영광의 희생물이 된 이 반도의 민족과 중국ㆍ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민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독일 지도자의 기념사를 옆에 놓고 생각해보라. 이 정신구조가 바로 일본정부, 그 지도자들, 일본 각계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보수적 지배세력, 소위 ‘반공적 친한파’개개인의 특성임을 알 수 있다.
바이츠재커 대통령에게서 발견하는 도덕적 감동은 티끌만큼도 없다. 철저한 ‘일본 중심’사상의 권화(權化)라 하겠다. 이들이 되풀이되는 ‘교과서 왜곡’분쟁의 주인공들이다. 소위 ‘친한파 인사’의 본성이다.
우리 해방 후의 젊은 세대들은 똑똑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친한파’라는 일본인들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를. 이들이 우리의 시대적ㆍ국민적 과제인 민주화 과정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 인가? 우리의 물질적 경제건설에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 민족의 분단상태를 해소하려는 민족적 지상목표와 그 과정에서 이룩해야 할 군사적 대결의 완화, 평화적 공존, 나아가 외세의 간섭 없는 민족자주적 해결, 한반도상에서 전쟁위기의 제거등에 대해서 일본의 지배세력은 어떤 속셈으로 닥쳐올 것인가? 최근의 재일교포 지문날인 강요문제, 그것을 거부하는 교포의 추방문제도 자민당의 이념과 정책의 발현이다. 사할린에 남아 있는 교포가 귀국하지 못하는 것도 애당초 패전시에 일본정부가 일본인만을 송환시키고, 그 후 그들에 대해서는 청구권에 의한 3억 달러를 지불했으니 책임 없다는 태도 때문이다.
히로시마ㆍ나가사끼의원자탄 피해자에 대해 일본국민에게는 보상 치료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강제로 일본국민이 되었던 한국(조선)인 피해자의 치료는 청구권 지불로 책임이 없다는 태도다. 일본인 중에도 ‘바이츠재커’대통령 같은 속죄의 정신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조상의 죄과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 대부분은 교과서 왜곡정책에 반대하는 경우에서 보았듯이, 좌익과 진보적 사상의 인사이거나 기독교 계통의 지식인들이다. 역사인식의 차이를 말해준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하려는 일본국민들에게 응당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그 같은 선의의 일본인에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앞서 서독의 나치범 처벌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 일본의 법학자 미야자와 고오이찌(官澤活一)가 그 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본의 태도에는 한국의 책임도 있어”

일본에서는 정부의 중추에 자리잡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외는 ‘과거의 청산’을 입에 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청산’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과거를 묵살하고, 무반성 위에 서서 현상을 긍정하려는 의도적인 논의가 엿보인다. 이러면 오류의 재발을 막기는커녕 언젠가 왔던 길을 다시 걷게 될는지 모른다…… 우리 일본인은 근년에 수없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이웃 여러 나라들에게 온갖 불법 비도(非道)를 범했다. 이들 범죄자들의 일부는 패전 후 점령군이나 외지의 군사법정에서 처벌되었다.
그러나 일본 재판소의 손으로 일본인이 범한 범죄, 타국민의 생명ㆍ신체ㆍ재산에 불법으로 가한 범죄의 책임을 추궁한 일은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독일인들이 저지른) 나치의 범죄와 같은 일이 없었던 것을 자랑하는 듯한 글을 나는 보게 된다. 나는 일본과 서독을 비교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양자에 대한 대접의 차이가 다른 까닭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서독은 주변국가 국민들로부터 심지어 왕년의 적대국 국민들한테도 환영받는 것과는 달리, 일본은 사실대로 말해서 그 성의를 의심받고, 마음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범한 과거의 수많은 악업을 자기 손으로 청산하지 않은 데 대한 불신감이 결국은 주변의 많은 나라들의 위정자나 국민들 사이에 꺼림칙하게 응어리지고 있다. (여기에는 이웃나라들의 책임도 있다.)
서독의 이웃들은 서독의 과거를 솔직히 비판하고 또 직접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와는 달리 일본의 이웃 나라들은 일본의 경제력을 곁눈질하며 일본의 경제원조나 얻어볼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일본의 과거를 건드리지 않거나 과거는 잊어버리자는 따위의 전술을 쓰고 있으니 일본인은 자기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현재의 우월적인 입장에 우쭐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지적할 것은 필자가 이 글에서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와 지적한 사항에 관해서 반드시 일본 측에만 책임과 허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교과서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얼마나 진실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다만 이 같은 자기비판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다른 글에서 피력한 바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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