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기자풍토 종횡기」

언론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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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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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기자풍토 종횡기」(1971년 『창조』, 전논)


누가 먼저 돌로 치랴

자기가 속하는 사회를 평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것은 간부(姦婦)를 치기 위해서 돌을 드는 사람과 다름없다.
오늘날 모든 가치가 전도되고 단테의 연옥(煉獄)을 연상케 하는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기자라면, 기자풍토를 논하기 위해 돌을 쳐들어도 먼저 자기의 머리를 치지 않고서는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기자사회라는 숲속의 한 그루 나무에 지나지 않은 사람은 자기와 자기의 직업적 동료들로 구성되는 숲이 어떤 모양인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수많은 제약을 전제(前提)적으로 인식하고 나서라도 아직 기자가 할 일을 하고 있는가를 따져 물어볼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다.
첫째 문제는 기자의 사회학적 귀속 감각이다. 현재 이 사회의 기자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의 경제적 토대나 직업적 활동의 대가로서의 물질적 보수는 엄청나게 낮은 경제적 계층에 속한다. 여기서 기자라는 표현은 수습기자에서부터 ‘회전의자에 앉은 높은 기자’까지를 포함해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물질적 토대와는 지극히 동떨어지고 비약한 형태의 사회집단에 대한 귀속감을 지니고 있다.
기자는 수습 또는 견습이라는 ‘미완성’의 자격으로서도 출입처에 나가면 위로는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은행총재로부터 아래로는 국장, 부장, 과장 들과 동격으로 행사하게 된다. 그들이 취재 대상의 하부층과 접촉하는 기회는 오히려 드물다. 장관이나 정치인이나 사장, 총재 들과 팔짱을 끼고 청운각(淸雲閣)이니 옥류장(玉流莊)이니 조선호텔 무슨 라운지니 하면서 기생을 옆에 끼고 흥청댈 때, 그 기자는 일금 1만 8,000원 또는 기껏해야 일금 3만 2,000원이 적힌 사내 사령장(辭令莊)을 그날 아침 사장에게서 받을 때의 울상을 잊고 만다.
점심은 대통령 초대의 주식(晝食),그것이 끝나면 은행총재의 벤츠차에 같이 타고 무슨 각(閣)의 기생파티에서 최신 유행의 트로트 춤을 자랑하고 이튿날 아침은 총리니 국회의장의 “자네만 오게”라는 전화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참석하는 꿈이 남아 있다. 이런 기회는, 많고 적고의 차이는 있지만 출입처를 드나든다는 기자에게는 반드시 있다.

소속 계층에 대한 착각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거나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기자도 얼마쯤 혼탁한 물에서 헤엄치다 보면 의식이 달라진다. 면역이 된다.
경제,재계,정계의 상층부에서 어울리는 동안 기자는 자기의 물질적 소속이 그 사회의 하층민중임을 망각한다. 여러 해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습기자로서 선배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반을 소리 높이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야. 건전한 국민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이 나라 현 체제의 수익집단인 지배계층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으로의 동화 과정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남의 집 눈총밥으로 마쳤다는 사실이나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어제의 불우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에 크게 탓하지 않아도 좋다. 문제는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된 그의 머리에서 기획되는 특집기사가 ‘매니큐어의 예술’이니 ‘바캉스를 즐기는 법’따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논설위원이 되거나 평론 한 편이라도 쓸 때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게 맡기기를’따위가 아무런 내적 저항감도 없이 나오게 된다. 서울의 종합병원 환자가 레지던트의 파업으로 하루 이틀 치료를 못 받는 것에 격분하는 기자는, 이 나라의 1,342개 면 가운데 거의 반절인 630개 면이 의사 없는 무의촌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 많은 농촌에서 일생동안 의술이라는 현대문화의 혜택을 거부당한 채 죽어가는 무수한 백성이 왜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사회체제와 결부해서 생각해볼 리 없다. 도시 위주이고 근원도 모를 퇴폐문화 위주다.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진 자와 지배하는 자는 대연각(大然閣)의 은밀한 방에서 나오면서 이(李) 기자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린다.
“역시 이완용 기자가 최고야. 홍경래 기자는 통 말을 알아듣지 못한단 말이야.”
그러고는 득의만면해서 돌아서는 이완용 기자의 등뒤에서 눈을 가늘게 치뜨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국민의 소시민화, 백성의 우민화,대중의 오도(誤導)라고 말하는 학생들의 비난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부인할 용기를 가진 기자가 몇 사람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권력 측 발표 그대로 사실화

“정치문제는 폭력이 두려워서 못 쓰고……”라는 일반의 인식이 뜻하는 폭력이란 물론 국가권력의 불법적 압력으로 해석된다. 그런 뜻에서의 폭력에 관해서는 몇 해 전 대통령ㆍ국회의원 선거 당시, 신문ㆍ통신사 내에 중앙정보원이 상주하고 있다는 야당의 주장으로 정치적 논쟁이 일어났다. 이때 소위 언론계 지도자의 한 사람이요, 한때 국가권력의 폭력에 대항해서 싸운 경력으로 이름난 기자가 중앙의 대신문 사설로 그런 일이 없다고 야당의 주장을 되레 반박, 비난한 일이 있다.
모든 신문은 그것을 본받았다. 정확하게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지만 소위 ‘기관원’이라는 범주에 드는 국가권력의 일선 대리인은 그때 신문사 내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높은 기자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 언론계 지도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국가권력의 폭력은 여러 가지 형태로 기자에게 가해지고 있다. 일선 취재기자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에 ‘안보관계’라는 것이 있다. 당국이 한번 이 딱지만 붙여버리면 기자의 발은 거기서 멈춘다.
아무리 정상적인 지식과 판단력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결정이나 사건이라 해도, ‘안보관계’라고 권력 측에서 발표하기만 하면 발표 내용 이상으로 깊이 파고들어갈 수는 없다. 그 발표 자체의 진위 여부조차 국민은 알 도리가 없다.
기억에도 생생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소위 ‘군 특수범 난동’ 사건이라는 것도 권력 측에서 여러 가지 상황 고려 끝에 그것이 공비가 아니라 곧바로 대한민국 국군이라고 일단 사실대로 고쳐 발표했으니 말이지, 공비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이롭다고 판단했더라면 국민은 그대로 속아넘어갔을지 모른다. 웬만한 휴전선에서의 충돌사건, 간첩사건, 반공법 적용사건 같은 것은 권력 측의 ‘발표’가 그대로 ‘사실화’된다. 이런 문제에 관해 그 진실과 내용을 외국에서처럼 기자는 신문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구명하고 추구해 들어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적이라고 하는 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최근에 말썽난 베트남전쟁 정책의 비밀문서 폭로를 통해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 20년을 두고 국민에게 발표해온 것은 전부가 ‘허위’와 ‘날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도 미국의 언론은 기어이 그 허위를 밝혀낸 용기가 있었지만 우리의 신문은 처음부터 그 직업적 책임과 공적 의무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있다.
취재된 기사도 외부로부터의 전화 한마디로 부장 선에서 주물러진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나 세력을 위해서 커지기도 하고, 절반으로 줄기도 하고, 영영 쓰레기통 속에 버려지기도 한다.
유명한 ‘한강변 정여인 살해사건’이라는 것도 사건 발생 첫 이틀 동안은 미묘한 윤곽이 드러날 듯하더니, 사흘째부터는 ‘국가이익’이라는 ‘폭력’때문에 신문은 발표문만을 실었다. 처음부터 사건을 취재한 기자들은 그동안 모여 앉으면 마치 국민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자랑하듯이, 그러나 뭣 때문인지 주위를 살피면서 이상한 표정과 음어(陰語)로 수군거렸다.

약자에게만 강한 건 깡패

기자의 사기와 지위는 자유당의 문민정권(文民政權) 때에 비해 현저히 저락했다. 11년 전만 하더라도 기자의 ‘임의동행’이나 ‘연행’은 큰 사건이었다.
『기자협회보』에 실린 보도자유분위 조사에 의하면, 지난 2년 동안 국가권력에 의해 취재기자가 테러를 당한 사건은 굵직한 것만 골라도 11건이나 된다. 그러나 그 기자의 소속사는 거의 그 사건을 보도하지도 못하고 우물우물 넘겨버렸다. 발행인은 자기의 신문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다가 권력의 폭력의 희생이 된 기자에 관해서나 그 사건 자체를 보도하기를 꺼린다. 권력과의 사이에 긴장 관계가 생기는 것을 극력 회피하는 것이 발행인의 이익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차장ㆍ부장ㆍ국장에 이르면 ‘무료 해외여행’, ‘생활보조’의 혜택으로 이미 기자이기보다는 어떤 뜻에서 권력 측에 가까운 예도 드물지 않다. 기사 재료를 독점으로 준다는 미끼로 그 ‘죽음의 키스’를 받게 되고, 이권청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폭력 앞에 무력해지고 만다. 그 지위가 되면 벌써 생각은 행정부의 국장, 차관, 무슨 비서관이니 국영기업체의 자리에 가 있다.
이와 같은 유혹과 압력, 그리고 요구하면 얻어지는 이권과 혜택을 거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가인 보도기관 사주(社主)의 이익은 바로 권력의 그것과 일체적인 까닭에 원칙을 지키려는 기자(어느 급이건)는 거추장스럽고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위 언론기관에는 그런 소수의 기자를 귀양 보내는 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구실과 부서가 마련되어 있다.
이쯤 되고 보면 “듣건대 고생스럽게 해낸 취재는 부ㆍ차장 선에서 잘리기 일쑤요, 힘들게 부ㆍ차장 손을 벗어나면 국장 선에서 난도질한다니 이 무슨 해괴한 굿거리인가”라는 말도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다. 언론을 출세의 밑천으로 삼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문기자들 사이에는 현 정권은 ‘기자를 뭣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자학 어린 말이 나돌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권력 측에게만 돌릴 책임은 아닌 것 같다. 그토록 존경받던 기자의 지위와 권위를 떨어뜨린것은 딴 누구도 아닌 바로 기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뜻에서 강간(强姦)은 없다. 참으로 그렇다.
‘붓을 휘두르는 깡패’라는 말은 좀 가혹한 표현이다. 그렇지만 그 말에 뭔가 짚이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권력과 금력 앞에 무력해진 기자(통틀어 언론)가 강자에게 할수 있는 것은 안간힘을 다해야 고작 희화(戱畵)나 야유 정도이고 언론의 칼에 얻어맞아 목숨을 잃는 것은 약자뿐인 상태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진주인지 마산인지 분명치 않지만 형무소에서 수용자들이 형무소 관리들에게 난동을 부린 사건이 있었다. 이 기사를 보내온 기자는 그들의 행패를 상세히 기술했다.
그러나 그 뒤에 알려진 바로는 이 난동의 원인은 형무소 당국이 급식과 후생 면에서 수용자들의 거듭된 진정과 불만을 묵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현지 기자는 약한 자의 행패만 규탄했고, 서울 본사의 부담당장이나 편집 책임자도 난동 원인을 추가 취재시켜서 보도하자는 편집회의에서의 한 사람의 의견을 묵살했다. 정당한 권리를 묵살당하고 박탈당한 약자의 입장보다 권력의 질서가 도전받는 것이 더 중대한 문제라는 듯이.
생활난으로 자살한 사건도 지금은 무슨 다른 이유나 동기로 돌려쓰는 경향이 있다. 깡패라는 것이 강한 자에 아부하고 약한 자에 군림하는 것이라면 ‘펜을 휘두르는 깡패’라는 말을 뭣으로 반박할까.

척지’(尺志) 횡납과 포커판

기자는 도둑의 파수꾼을 자처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고 직업적 기능으로서 아직도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일본의 모 자동차 제작회사는 제품 가운데 인간 생명을 제일차적으로 좌우하는 브레이크 장치에 치명적 결함이 있음을 입증하고 전부 회수했다. 그러나 그 제품과 관련 있는 우리나라의 어떤 자본은 그 기사가 나오는 것을 통신사에서부터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했고, 그 자본이 경영하는 신문과 그 신문의 기자들은 딴 신문에서 그것이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슨 음료수에 건강에 해로운 화학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외국에서 밝혀져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것을 만드는 국내자본은 그것이 경영하는 통신사와 기자들을 시켜 그 사실이 보도되지 못하게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 재벌의 대규모 밀수에 대해서 그 자본의 기자는 ‘자본주의에서 밀수는 불가피하다’고 써야 했다.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해서도 기자는 어쩌면 파수꾼의 위치에서 망보기꾼으로 바뀌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과감히 일어나서 ‘아니다’라는 소리를 질러주었으면 좋겠다.
기자가 축재(蓄財)한다는 주장은 많은 기자들의 강력한 반박을 받아서 마땅하다. 어느 정도를 ‘축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기자는 축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
기자는 가난하다(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계층에 대한 소속 의식에서는 환상 속에 살고 있지만).
1971년 3월 현재의 기자 봉급 통계를 보자. 전국(서울과 지방)에는 신문 37사, 통신 6사가 있다. 여기에 근무하는 각급 각종 기자 26,964명의 봉급을 보면 2만 원 이하가 47.7퍼센트, 1만 원 이하가 3.8퍼센트여서 한 달에 2만 원도 못 받는 ‘기자’가 합쳐서 51.5퍼센트로 반을 넘는다. 더욱이 지방 신문에서는 2만 원 이하가 73.5퍼센트를 차지한다(『한국기자협회보』제197호, 1971.9. 3). 갑종(甲種) 근로소득세의 면세점 이하의 ‘극빈자’가 많은 것으로는 어떤 자본의 기업체보다도 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숫자로 진실과 진상을 호도할 수는 없는 일면이 있다.
월급으로 사는 기자는 주로 내근자뿐이다. 보도기관에는 외부에 나가거나 외부의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 및 각종 단체ㆍ기업ㆍ기관과 연결을 갖는 기자의 수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안에서 뒤치다꺼리만을 하는 기자의 수가 약 반반으로 맞먹는다. 그리고 앞서의 통계가 뜻하는 것은 내근자들의 경우이며, 외근 기자에게는 이 통계숫자가 설명해주지 않는 일면이 있다.
기자사회에서 ‘촌지’(寸志)라고 불리는 이 소속사의 봉급 외 수입은 기자가 직무상 관계하는 대상의 재정적 규모에 따라 문자 그대로 수천 원의 ‘촌지’에서 수십만 원의 ‘척지’(尺志)로 가지가지다. 출입처 기자단은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한 취재의 편의에서보다 이와 같은 과외수입을 ‘징수’하는 압력단체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정기적으로 매달 엄청난 상납 아닌 ‘횡납금’(橫納金)을 거둬들이는 것은 경제계나재계와 관련된기자단이다. 1인당 2만 원이 횡납되자 ‘기자를 무시하느냐’고 하여 3만 원씩으로 낙착되는 것은 비교적 가난한 출입처 기자단이다. 허가사무와 관련된 이권청탁한 건에 얼마라는 액수는 해당 기자 외에는 영원한 비밀사항이다.
‘촌지’는 나오는 대로 기자실에서 ‘섰다’의 밑천이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척지’는 포커의 밑천이 되고서도 저택, 기업체의 투자, 승용차, 골프 멤버 등의 형대로 ‘확대 재생산’된다.

특파원 기사, 천편일률

정부 최고위 지도자들의 외국 예방(禮訪)을 수행하는 기회는 얼마나 ‘광고 대행’을 잘 하느냐에 따라 촌지의 기회도 되고 척지의 기회도 된다. 그러기에 정부 최고위 지도자들의 외국 예방이나 외국 지도자와의 회담에 관한 ‘어디 어디에서, 무슨 무슨 특파원 기(記)’의기사치고 ‘열광적인환영’이아닌것이없고, ‘요구한대로 모두 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대성공’이 아닌 회담이 없다.
그러기에 수행기자들의 기사는 한 신문만 보면 된다. 두 신문을 돈 주고 살 필요가 없다. 출발하기 전부터 ‘이하동문’(以下同文)의 기사를 한 사람이 작성해 해외공관 통신망을 통해 송고하는 방법이 정부 측과 물샐틈없이 협의된다. 기자는 경쟁에 생명감을 느끼는 직업이지만 여기에는 ‘아름다운 협조정신’이 십분 발휘된다.
수행기자가 제 나름의 독자적 취재를 하거나 그것이 본사에서 활자화되기 위해서는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권력의 위협을 물리칠 용기는 물론이려니와 동료 기자들이 앉아서도 누리는 ‘혜택’을 땀 흘려 뛰어다님으로써 포기해야 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자는 국가원수나 정부 지도자들의 외국 방문기사를 이렇게 쓰는 것이 애국심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지도자가 상대방 국가의 지도자에게 어떤 대접과 어느 정도 수준의 환영을 받았는가라는 평가나, 숙소 앞에는 ‘○○고 홈’의 플래카드와 시위가 있었는지의 여부 같은 것을 사실대로 보도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는 설이 기자사회에서는 신봉되고 있다.
외국인 특파원들은 베트남전쟁에서 취재 중 30명이나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하지만 우리 특파원은 그럴 필요가 없다. 사이공 호텔의 안락의자에 앉아서도 외국기자에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생생한 전투 묘사와 창의력이 넘쳐 보이는 종군기사를 써 보내거나 사진을 찍어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외국인 특파원이 피를 흘려가면서 쓴 기사보다 언제나 하루 늦게 나온다는 것쯤은 문제되지만…….
물론 훌륭한 기자정신을 발휘한 기자도 많다. 그러나 안이와 무기력이 기자풍토의 한 면임도 부인할 수 없다.

수습 때의 실력에서 퇴보하는 지성

기자풍토의 한 특징은 남의 권리 쟁취나 민주화ㆍ자유화 운동에는 당사자처럼 열을 내면서도 자체 내부의 권리투쟁이나 민주화나 자유화는 아직 원시적 상태라는 현실이다.
기자가 신문사나 통신사의 봉급에 대해 품는 불만은 최근 심각할 정도로 비등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사에서도 판사들과 같은, 대학교수들과 같은, 또는 병원 수련의, 심지어는 간호원들과 같은 단결심과 기개를 보인 일은 없다.
4ㆍ19 직후와 5ㆍ16 직후 한두 달 동안 기자사회 내부의 숙청론ㆍ정화론이 거론된 일이 있지만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자리에 그 사람이 둥지를 틀고 앉아 있기는 마찬가지다.
봉급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닌 까닭에 기자는 횡납액의 단위가 높은 취재처로 나가기 위해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고, 윗사람의 심부름은 충실히 집행해야 한다. 기자라는 신분이 그 모든 밑천이기에 아무리 불평과 불만이 있어도 기업주의 애총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고는 지금도 기업주의 손에 달려 있고, 기자라는 신분을 상실하면 봉급의 몇 배, 몇십 배 되는 부수입이 송두리째 사라지기에 경영 측에 대해서는 어떠한 부당성도 지적하기를 꺼린다.
무보수 기자라는 괴이한 존재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월급을 안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신문사에 돈을 내고 기자증을 받거나 출입처를 배당받음으로써 그 몇 배의 수입을 올리는 제도다.
기자사회에서 ‘사이비 기자’라는 것이 요새 한창 말썽이 되고 있다. 기자의 대외적 이미지를 흐리게 한다는 사이비 기자의 정의가 그와 같은 무보수 기자니 ‘대학을 안 나온’기자니 하는 식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도 한심한 일이다.
대학을 나온 기자는 기자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라면 현재 서울의 주요 보도기관은 그에 해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자협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본사(本社) 기자의 압도적 다수인 77.58퍼센트가 학사(學士)이기 때문이다. 그 대학 졸업자만이 만든다는 중앙지나 통신사의 몰골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기자들은 한번 자문할 필요가 있겠다.
필자의 견해로는 오히려 식민지적인 가치관ㆍ문제의식ㆍ세계관을 주입하는 것을 소임으로 하는, 이 나라의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보다는, 차라리 공장 노동자나 농사꾼이나 지게꾼이 뭣인가를 느끼고 분발해서 기자가 될 수 있는 길이 트여 있었다면 우리의 기자풍토가오늘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대학지식을 자못 대단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이 사회가 타파해야 할 권위주의가 아닐까 한다. 지식ㆍ기술의 신비주의ㆍ권위주의는 노력하지 않고 지배하려는, 그리고 그에 도전하는 사람에 대해 자기를 보호하려는 명분에 타락하기 쉽다.
그 많은 출입처나 근무부에서 책을 보는 기자를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권위주의의 탓이 아닐까 한다.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수습기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실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꾸준히 공부하고 연구하려는 것이 소원이었다고들 한다. 그러면서도 기자실에 늘어놓여진 것이란 한결같이 여자 나체 사진을 찍은 주간지가 아니면 좀 정도가 높다는 것이라야 월간지 정도다.
단행본 한 권 사 읽지 않고 1년을 보냈다는 기자가 많은 것도 아마 이 사회 기자풍토의 특징일 것 같다. 10년 기자생활을 하고 나니 수습 때의 지식이나 문제의식보다 퇴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사이비 기자의 기준을 대학 졸업자 이하에 두자는 것부터가 우습지 않은가.
사이비 기자란 사실을 보고도 기사화하지 못하거나, 기자가 애써 취재해온 기사를 사리(私利)와 권력 때문에 자의(恣意)로 조작ㆍ요술을 부리거나, 백성의 이익이 뭣인지를 알면서도 강자의 대변자 노릇에 만족하는 각급의 기자 외에는 없다.

조건반사적 토끼들

끝으로 우리 기자풍토의 가장 통탄스러운 특징은 그 고질적인 냉전의식이라 하겠다.
최근 우리 국민들은 ‘잠을 깨고 나면 세상이 한 바퀴씩 뒤집힌 것을 본다’고 놀라고 불안해하고 있다.
세계 사조와 정세의 변화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만약 기자들이 진정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을 추구하며,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이 되었더라면 이미 20년 전부터 변화해온 국제정세와 사조에 국민이 이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국민들보다 기자들이 더 놀라게 되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회 기자의 인식론적 기능은 냉전사상과 흑백의 이데올로기적 가치관 때문에 강요된 의식형태의 조건반사적 토끼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최근『뉴욕 타임스』의 레스턴이 북경에서 기사를 보내주었다. ‘중공’하면 소련의 괴뢰이고, 인민은 기아선상에서 피골이 상접해 있고, 백성은 금세라도 폭동과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타도하려 하고, 농민은 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웃음을 잃은 동물이 되었고, 종교ㆍ예술ㆍ문화는 모조리 파괴되어 야만 상태가 되었고, 그리고 침략 야욕에 여념이 없고…… 등 여태까지 이 사회의 기자가 중공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믿어왔을 뿐만 아니라 기사마다 그렇게 써온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레스턴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이와 같이 이 사회의 의식수준을 생각하게 된다. 진실로 문제인 것은, 지배세력이 말하면 그대로 믿어야 했고, 어떤 사상에는 반드시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 용어를 사용하면 반드시 일정한 고정관념을 머릿속에 형성하 게끔 되어버린 기자의 의식구조이겠다. 기자의 의식은 정부와 관료의 의식보다도 뒤져 있다. 혹평하자면 기자는 지배자가 내려 맡긴 의식 형태의 노예가 되어 있다.
자기만이 그렇다면 문제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조건반사의 토끼가 되어버린 기자가 그 가치관과 의식구조를 통해 취재하고 그것을 그런 각도에서 국민에게 전달해온 결과가 최근 우리 사회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국민이 넋을 잃게 된 것이라면 기자는 모름지기 의식구조를 뜯어고쳐야 하겠다.
기자는 이와 같은 비정상을 애써 찾아내어 정상적 형태를 부여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그것을 비웃는 풍조마저 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여태까지의 불평등ㆍ비민주ㆍ부자유를 평등ㆍ민주주의ㆍ자유로 추구해나가는 사회운동이기에 말이다.
기자가 마련하지 못한 것을 민중이 스스로 쟁취하려 하고 있다.
그럴수록 격동의 역사적 시점에 처한 기자는 민중 못지않은 능동적인 가치관과 사상을 가지고 이제부터라도 민중의 앞장을 서는 정신적 풍토를 구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창조』, 197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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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 집필생활 30년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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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위기와 한국의 평화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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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독재자의 ‘눈엣가시‘ 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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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쉬운 문학, 아쉬운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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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D검사와 이교수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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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왔다(來了)!-노신과 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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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광주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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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불효자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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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사회주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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