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기념 토론회 2부 전환의 시대 미디어와 저널리즘 추가 질문과 답변 / 권태호, 김희원, 정준희
1.토론자분들은 모두 뉴스 수용자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왜 특별히 지금 중요한지, 실제로 뭘 하자는 건지 등이 궁금합니다.
권태호
언론이 소비자(독자, 시청자)와 점점 유리되고 있습니다. 뉴스 소비층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으나, 개별 언론에 대한 독자, 수용자층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 한계에 이른 상태입니다. 독자 없는 언론은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갑작스레 상황을 급반전시킬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몇 가지는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우선은, ‘기사를 쓸 때, 독자(소비자)를 의식하는 기사 쓰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오랫동안 물리적 언론탄압을 겪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 언론에 대해 ‘지사다운 기사 쓰기’를 이상적 형태로 생각했고, 민주화 이후 이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애초 출발은 숭고했으나, 이는 자칫하면, 아무도 의식하지 않거나, 독선적 흐름으로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널리즘 측면에서 권력이나 자본뿐 아니라, ‘독자’도 진실추구와 권력감시라는 언론 고유기능에 방해물로 작동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 언론의 고유한 기능을 침해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또 이론적으로 ‘진실 추구’와 ‘독자와의 유대’가 충돌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만, 사실(fact)과 공정(fairness)에 천착하더라도, 언론이 독자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의 정성(sincerity)은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누가 나의 독자인가?’, ‘누구의 시각과 누구의 자리에 서서 이 문제를 바라볼 것인가’라는 점이 언론의 특성이자 고유성을 확보하는 공간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개별 언론은 늘 ‘독자’를 의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언론이란, 기사란, 산속에서 혼자 도를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물리적으로 주 독자층과의 접촉면을 넓혀야 합니다. 그래서 언론과 독자가 ‘연결’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언론의 마케팅이란, 개별 기사의 판촉이 아닌, brand의 가치를 고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언론의 장기적 발전 전략이기도 합니다.
김희원
우선, 언론 매체의 영향력이 떨어지고 개별 기사들이 많은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언론사들은 경쟁력을 가지려고 뉴스이용자들의 요구를 더 잘 알고 더 잘 반응해야 합니다. 과거처럼 몇몇 언론사가 정보 유통을 독점하던 시대가 아니라 독자들이 원하는 정보, 독자들에게 호감을 사는 형식을 담지 않으면 뉴스가 읽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충성도 높은 독자 군을 형성하고 커뮤니티화하는 것이 언론사 생존의 토대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유료화(구독모델이든 후원모델이든)를 주장했었습니다. 광고-구독 수입의 균형이 깨지고 광고시장이 위축되는 경향에서, 언론사의 미래가 뻔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일단 언론사가 생존해야 좋은 저널리즘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토론회에서 한 것 같습니다.
사회 전체를 보면 어떤 매체가 되든지 간에 언론과 시민 사이의 신뢰가 있어야 공론장이 유지되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신기술이 도입되고 어떤 미디어가 부상하든 언론의 기능은 필요한데, 언론 전반에 대한 불신과 부정은 공론장을 부정하는 셈이 됩니다.
정준희
매체와 뉴스 수용자관계를 생산자-소비자 관계로 보는 것 자체가 제한적인 문제설정입니다.
그러나 우선 생산자-소비자 관계로 본다면 경제적 관계 혹은 산업적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 언론은 이마저도 제대로 인지하여 수행하지 않는 게 근본적인 문제이기는 합니다. 만약 이 관계 안에 있고자 한다면 제대로 된 지급의사를 만드는 게 핵심인데 그럴 생각도 역량도 많지 않으니 현재와 같이 미디어 환경이 변하는 속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실제 소비자가 아닌 ‘영향력의 소비자’ 즉 정치권, 기업 등에 더 손을 벌리게 되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럴수록 소비자로부터는 정작 멀어지게 되는 악순환이 생깁니다.
다음으로, 미디어 관계는 전문생산자-비전문 수용자로 1차적인 설정이 이뤄지며, 민주적 공기-민주적 시민으로서 2차적인 설정이 이뤄집니다. 1차적인 설정은 직업적 전문성, 즉 정보와 의견의 탁월한 생산 역량이 언론 측면에서 중요하며, 2차적인 설정은 민주적 상관성, 즉 민주공동체 속 시민의 필요에 부응하고 공동체의 민주적 존속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점이 언론 측면에서 긴요합니다. 게다가 생비자(prosumer)라고 불리는 새로운 수용자이자 시민이 자신의 표출 수단을 갖고 자신의 전문성 혹은 시민적 태도로 언론을 대하게 되는 조건에서는 언론의 직업적 전문성과 민주적 기여 역량이 한층 더 높은 시험대 위에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언론이 이와 같은 요소를 정말로 중시하며 대응하고 있는지, 그저 막연히 미디어 환경 탓만을 하거나 시민의 정파성에 화살을 돌리는 식으로 자신의 약화한 경쟁력 혹은 민주적 무지를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부터 진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경제적 관계가 됐건 그것을 넘어서는 미디어 관계가 됐건 근본적으로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그간 언론 자신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일방적이었고, 이미 그 일방성을 견지하기도 어려워진 시점에서 새로운 종류의 양방향성을 개척해내고 있는지 역시 돌아봐야 합니다.
2. 토론 발제문에서 두 분 다 편집권력 또는 편집능력의 상실(도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문제의식이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권태호
과거 언론은 편집권력과 편집능력, 둘 다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둘 다 상실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정보가 통제되었기에 정보의 유통을 독점한 언론이 자연스럽게 편집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Gate Keeping이 언론의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 구조가 붕괴하면서 언론이 지녔던 편집권력, 위상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됐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고, 정보의 공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빚어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지만, 개별 언론사들이 능력과 역량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한 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쨌든 편집권력도 편집능력도 이전으로 되돌아가긴 힘듭니다. 최소한 편집능력의 경우, 우리 사회 발전속도에 맞게 계속 키워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동안 개별 언론은 이 분야에서 너무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제 언론, 그리고 기자 사회가 사회구성원의 평균적 역량을 크게 뛰어넘는 초 엘리트가 될 순 없습니다. 따라서 현 상황, 그리고 현 구조에서 과거처럼 계몽자로서 기능할 순 없습니다. 공공을 위한 사적 서비스 기업으로 충실히 기능하는 것이 현대사회 언론을 향한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언론사마다 추구하는 가치를 구현하되, 사회과학적 방법론과 합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희원
과거 몇몇 언론사가 정보 유통을 독점하던 시대엔 무엇을 기사화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편집권이 언론사의 권력으로 여겨진 면이 있겠습니다. 요즘 언론사가 뉴스이용자들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편집권한이 언론사에 있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시민에게 돌려주라는 주장은 모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업이 소비자의 요구를 파악해 자기 나름의 생산공정을 거치듯 언론도 훈련된 저널리즘적 시각으로 기사를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시민의 언론’이 필요하고 편집권을 뉴스이용자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대중이 원하는 기사를 원하는 관점에서 기사화하면 그것이 진실을 담보하고 공정할까요? 대중이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거나 정의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믿음이 우상입니다. 다만 언론이 뉴스이용자가 원하는 기사를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 자체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준희
편집권력은 보통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정보에 접근하여, 그 가운데 어느 것을 공개하고 어느 것을 공개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힘이 언론에 있었다는 점을 가리킵니다. 출입처 제도처럼 대단히 한국적인 독과점 체제가 존속되고 있고,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전달매체를 갖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비대칭적인 힘을 언론이 갖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편집권력은 유효합니다. 그러나 약화하고 있고 날이 갈수록 더 약화할 것이라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편집권력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내용적 권위(editorial authority)로 전환하고 그것의 정기능을 견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권위라는 것은 ‘그렇게 믿게 하는 힘’이고 ‘다수가 인정하여 따르도록 하는 지도력’입니다. 그리하여 대중이 내 멋대로 정보를 선별하는 게 아니라, (특정 분야, 특정 의견 지형에서의) 권위를 인정한 전문적 주체에게 그 선별을 위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입니다.
3. 올해 안종필자유언론상을 5개 언론사 프로젝트팀이 받았습니다. 김용진 대표는 한국언론의 살길은 독립언론의 네트워크화라고 했지만, 김희원 기자는 여전히 매일의 뉴스를 전하는 종합일간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필요는 하지만 권태호 기자가 말한 종합일간지의 영세성, 기초대사에 대부분의 에너지가 소진되는 한계를 갖는 종합매체가 이런 협업 프로젝트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 방식의 의의는?
권태호
저는 김용진 대표와 김희원 기자의 말이 상충하는 말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종합일간지의 문제는 그 ‘필요성’에 대한 격차가 내부자(언론사 내부 종사자)와 외부자(사회) 사이에 너무 크다는 점입니다. 종합일간지의 자본이나 역량, 심지어 제작방식까지 이전 그대로인데, 이는 현 상태로는 영속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소비층이 어디인지 알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대부분 언론사는 공영이 아닌, 민간기업이기에 자칫하면 공공성이 아닌 사적 기업의 존재를 위해 작동하게 됩니다. 아울러 한국에는 정론을 표방하는 종합일간지가 시장 규모에 비해 너무 많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따라서 종합일간지의 경우도, M&A 등 시장의 대규모 전환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이전처럼 모든 전선에서 각개 전투를 치르는 전면전 형태의 제작방식을 계속 유지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종합매체도 개별적 특성을 강화하는 특화 전략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 흐름은 이런 특화성이 오히려 점점 무뎌지는 형태로 움직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와 별도로, 종합매체와 독립언론 간 협업 프로젝트는 앞으로 더욱 활발히 전개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종합매체는 특화성을 살리고, 독립언론은 종합매체가 지닌 역량과 노하우를 익힐 뿐 아니라, 관계성을 고양하는 것도 큰 성과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 ‘협업 프로젝트’의 경우,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을 뿐 아니라, 콘텐츠 측면에서도 구체적인 성과를 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이번 ‘협업 프로젝트’의 경우, 큰 방향성만 공유했을 뿐, 작업은 각자 단위에서 각 언론사별로 진행해 단어 뜻 그대로의 ‘협업’적 성격은 조금 떨어졌다고 봅니다. 앞으로 또 어떤 형태로든 언론사 간 협업을 할 경우에는 좀 더 긴밀하게 움직이고 작동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울러 이런 언론사 간 협업 프로젝트는 조금 더 확장하면, 종합일간지 간 협업도 시도해 볼만 하다고 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도시의 노숙자 문제 해결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내 거의 모든 오프라인, 온라인 로컬 매체가 합동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게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우리 사회 공통의 사회적 과제 해결을 놓고 많은 언론이 함께 협업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협업을 극한까지 확장해 본다면, 서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언론사가 협업을 시도하는 것도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시도는 협업적 성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감정적으로 갈라진 진영 간 대립을 좀 더 합리적인 논쟁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기도 하고, 우리 언론이 지닌 영세성을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희원
종합일간지 입장에서, 독립 언론과의 협업은 좋은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생존 경쟁에 몰린 종합 일간지들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탐사보도에 투자를 줄여왔고, 그 공백을 메워온 것이 뉴스타파와 같은 독립 언론들입니다. 이들과의 협업은 언론 본연의 임무 중 하나인 탐사보도를 복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합일간지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여러 방안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언론 전체를 보면 종합일간지, 공영방송, 독립 언론은 제각각 임무가 다릅니다. 뉴스이용자들은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기사도 보고 싶어 하지만 당장 오늘 일어난 사건사고를 파악하고 싶고, 오늘 대통령이 한 발언도 알고 싶고, 정부가 발표한 정책의 여파도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독립 언론들이 보도하지 않는 많은 뉴스를 일간지와 지상파방송이 소화합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언론이 발전할수록 뉴스도 풍성해지는 겁니다.
정준희
종합일간지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한 개의 기업 형태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탁월히 수행해낼 만큼 자본력과 인적 자원을 갖춘다면야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그럴 역량이 안 되면서도 막연히 그 거죽만 유지하여 영향력과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자원을 산재시켜서 문제인 거라 봅니다. 전통적인 언론 모형이 뉴스통신사-중앙종합일간지-지역종합일간지-전문지-특수지의 형태로 이미 분화되어 있던 것도 어느 한 기업의 역량만으로 종합일간지의 ‘지향’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사정이 이러하고, 그 조건은 더욱 열악해져가고 있는데도 한국 언론은 유독 중앙정치 중심의 ‘중앙종합일간지’ 체제를 꾸준히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게 그나마 영향력을 확보하고 경제적 생존에 유리하다고 보아서 그렇겠고, 기타의 대안을 전격적으로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하고, 통합적이고 비전을 갖춘 경영전략과 언론의 지속적 자기성찰 주체와 분위기가 부재해서 그렇다는 점도 이해합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결국 협업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언론이 대개 기관을 벗어난 협업은 물론 기관 내에서의 협업조차 잘 하지 못하기는 합니다만, 한국 언론은 우리 사회 전반의 발전 정도에 비해 유독 이것이 잘 안 됩니다. 영향력을 얻기 위해 모여 있을 뿐, 결국 기자 개인이 그런 집단적 영향력에 의존하여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구조가 고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존하느냐, 뭔가를 해보려다 결국 기존의 모습으로 돌아오느냐, 망하더라도 해보느냐의 갈림길만 있습니다.
4. 김희원 기자는 리영희의 현재적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든 존재하는 우상과의 대결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만의 진실과 자기만의 정의를 각자 우상으로 삼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편 정준희 선생은 거대한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세상이 수용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토론자분들이 생각하는 대결하고 있는 우상은 언론의 영역에서 무엇입니까. 또, 각자가 믿는 진실과 정의가 다시 각자의 우상이 되는 게 아니라 ‘열린 부분’으로써 진실을 구성하는데 쓰이려면 매체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요.
권태호
이 부분과 관련한 답변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만, 문맥상 이때의 ‘우상’이란, 진영 논리 또는 ‘과도한(?) 정의’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이전 독재, 언론통제 시대와 달리, 타파해야 하는 ‘절대적 우상’이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스스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과거 민주화 이전의 언론 시대에는 ‘불굴’이 필요했습니다. 외부의 강압적 탄압에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것이 절실했습니다. 리영희 선생을 포함한 우리가 존경하는 언론 선배들 대부분이 그러했습니다. 지사형 기자의 일반적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물리적 탄압이 없지 않지만, 정보가 공개되는 현 사회 구조, 그리고 다원화되고 복잡계인 현시대에서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것이 자칫하면, 아집이 되거나, 정보의 편향 또는 폐쇄가 될 가능성이 온존합니다. 과거 지사형 기자들에게 필요한 수사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였다면, 지금의 기자들에게는 ‘내가 틀릴 수 있을 가능성’을 늘 열어두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는 자유언론을 기본으로 합니다. 지금도 개별 언론에 따라, 정치적 탄압, 자본권력의 강압, 사주의 일방적 요구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곳도 많다고 봅니다. 이런 곳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같은 ‘지사형’ 형태의 기자가 여전히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때와는 시대가 많이 달라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아울러 또다른 관점으로는 언론이라면 ‘진실과 정의’는 어떠한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기본값으로 하더라도, 자칫 ‘본질’과 ‘태도’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진살과 정의’는 ‘내가 옳다. 그래서 정당성이 내게 있다’는 식의 뻣뻣하고 오만한 듯한 ‘태도’로 지켜지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언론과 기자란, ‘나의 사상’을 전파하는 기관이 아니고, ‘사회와 사람’의 생각과 사건을 취재하고, 전달하고, 그리고 해석하는 곳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남과 바깥의 세상과 사고에 늘 열려 있어야 하며, 오픈 마인드가 생명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점은 ‘변절’을 최악으로 규정했던 과거 지사형 기자의 형태와는 속성상 여러 측면에서 다른 상황이라고 봅니다. 유연하면서도 본질적 가치를 보존하는 형태의 기사 쓰기와 언론의 보도 태도 등이 점점 중요해 질 수 있다고 봅니다
김희원
우선, 세상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건 지당한 말씀이고 제가 의미하는 자기만의 진실, 자기만의 정의와 반대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의식은 달라도 그 기반인 사실관계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무엇인지 조차 합의가 안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토론과 협상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민주주의가 작동하겠습니까. 서로 다른 의견, 다른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견이 사실을 압도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나만 옳다는 우상, 내가 보는 것만 진실이라는 우상입니다. 지금 언론과 정치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정파성이 사실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언론의 정파성을 없앨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사실 보도를 위한 저널리즘 원칙들을 지켜 나간다면 총체적인 진실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정준희
김희원 기자가 말한 부분은 비교적 타당하지만 온당하진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세계적으로 탈진실 경향이 심화되고 있고, 한국 역시도 각자의 편향적 사고만을 강화해가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우상’이라고 부를만하지 않다는 점에서 온당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국은 압도적인 사실 앞에서 그걸 대놓고 부정하는 집단이 두드러지게 성장해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미 그렇다고 전제해놓고 그런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거대한 우상을 타파할 역량을 언론 스스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오히려 우상이 실제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우(마치 편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힘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밝혀져 조롱의 대상이 되는, 그럼으로써 결국 언론과 전문가를 믿지 말고 스스로를 믿는 게 낫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를 범할 수 있으며, 그것이 한국 언론 다수가 행하는 실천적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언론 역시 자신의 편향성을 인정하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다양한 편향적 언론 혹은 편향적 개인을 교차시켜 문제점을 드러내는 그 역시 다층적이고 다면적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언론비평을 스스로 행하는 일원이 되든 그것에 노출된 자신을 성찰하든 하는 게 맞습니다.
세상은 복잡합니다. 그리고 그 복잡성은 날로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 복잡성을 단칼에 잘라낼 수 있는 단순화는 언제든 필요하고 지적 존재라면 누구나 그걸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습니다. 매체는 일차적으로는 자신만의 단순화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부단히 자기성찰하고, 이차적으로는 다른 단순화 방법과 스스로의 것을 교차하고, 가능하다면 삼차적으로는 다양한 단순화 방법을 메타비평적으로 고려하고 정리해주는 것에까지 나아가면 좋을 것입니다.
김희원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토론회 마지막에 정준희 교수가 말씀하신 마무리 발언에 대해 시간이 없어 말씀 못 드린 제 의견입니다. 정준희 교수는 리영희 정신의 함의가 전환, 단절이라며 기성 언론은 고쳐쓸 단계를 넘었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수사적 표현이라면 모를까, 기존 언론을 모두 타파하고 새로운 언론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거라면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기존 언론과 단절한 새로운 언론이 가능하다면 그런 대안이 왜 진작 안 나왔을까요. 정준희 교수가 언급하신 친구 모델, 가디언 모델이란 것도 제가 보기엔 기존 언론을 고쳐쓰는 방법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성 언론의 많은 한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독립 언론이나 유튜브 채널이 하지 못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잘못된 기사만큼이나 많은 좋은 기사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이 현실을 외면하고, 기성 언론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시민과 언론 사이의 불신을 깊게 하고 공론장을 위협하는 위험한 발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 언론과 사회에 도움이 될까요? 기자와 언론을 싸잡아 욕하는 건 참 쉬운 해법입니다. 지식인, 또 사회적 영향력이 크신 분들이 언론과 기자를 욕하며 정치적 우군을 확인하는 일에 편승하지 말고 진짜 필요한 비판, 필요한 제언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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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나이 차이를 건너뛴 카센터 사장과의 우정 - 공학도, 노년에 경비행기를 타다 / 신완섭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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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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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24.09.02 | 5 | 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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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한겨울 매화의 봄마음-리영희와 장일순에 관하여 / 한상봉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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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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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재단 특별상영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호응’하는 주체, 감옥 안팎의 공투(共鬪) / 심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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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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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리영희 선생이 다시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 김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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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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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24.07.02 | 5 | 1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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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활동에 빛이 되신 리영희 선생님! / 박순철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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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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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24.06.02 | 2 | 17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