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라는 배를 타고 가서 만나는 김수영과 1960년대 / 백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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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6-03-03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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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라는 배를 타고 가서 만나는 김수영과 1960년대
리영희 오마주3



 


 


 


 



백승욱(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이 글은 ‘리영희-이미정 부녀’가 나를 압박해 내 손을 빌려 쓴 것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 초고는 2026년 1월 7일 『나와 리영희』 북토크를 마친 이틀 후 1월 9일 단숨에 하루 만에 ‘씌어졌다’.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오래 미뤄둔 부녀의 대화 탁자를 마련해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행복감이 생겼다. 사실 나는 리영희 선생을 딱 한 번 잠깐 만났을 뿐이고 이미정 이사도 잘 알지 못한다. 『나와 리영희』 출간 십여 년 전에 이미정 이사와 짧게 두 번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고, 이번 책 출판 북토크 후 뒷풀이 자리에서 모처럼 조금 길게 이야기 나눌 기회를 처음 얻었을 뿐이다. 그래도 오래 잘 아는 사람 같았다.


1955년 이후 김수영 시인은 십여 년 이상 살며 생애를 마감한 구수동 41-2의 집에서 당인리 발전소까지 한강변 길을 산책 다니곤 했고 그 풍경이 시에도 많이 등장한다. 내가 김수영 시인 산책로 중간쯤 위치에 십여 년째 살고 있으면서도 이 공간이 그런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 또 내가 20년 이상 줄곧 다니던 직장인 흑석동 중앙대 정문 앞에서 리영희 선생이 경성공업중학 시절 하숙을 하며 어려움을 견디며 살았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두 분의 옛 공간과 나의 현재 공간이 겹쳐 있던 것이다. 어떤 ‘사건’이 공간에 틈입한 후 이전 공간이 같은 공간으로 머무는 것은 아니다.




리영희의 현재화, 연구대상으로서 리영희

지금 리영희를 다시 읽을 때 리영희가 논쟁이 되는 이유는 우리 앞에 두 가지 리영희가 있기 때문이다.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리영희와 이상주의자 리영희가 그것이다. 무대를 또 바꾸면 ‘역사화’할 대상으로서 리영희가 있고 그와 달리 ‘현재화’할 대상으로서 리영희가 있다.

『나와 리영희』책을 보아도 이 두 종류 리영희는 어디서나 공존하고 어디서나 논쟁이 되는데, 나는 줄곧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리영희만을 ‘현재화’할 수 있고 그를 지금 불러내려면 그를 ‘전투적 자유주의자’로 호명하는 게 정당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를 역사화하는 것은 리영희를 기억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반해 리영희를 현재화하는 것은 리영희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리영희가 연구대상이라면 그 연구의 핵심이 그가 ‘어떻게’ 글을 썼는지를 해부하는 데 있지 그가 ‘무엇’을 말했나 외우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리영희가 글쓰기의 모범이 되는 것을 넘어 글쓰기의 연구대상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의 글쓰기 실천의 결과를 제법 알고 있지만(저작들이라는 성과와 상대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그 효과로서), 대체 그가 그 글쓰기를 어떻게 구상했는지, 그 글쓰기의 비밀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 ‘경지’에 도달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의 글쓰기를 우리의 실천으로 옮겨올 수 있는지를 밝혀보려는 것인데, 리영희 자신은 그 질문에 대해 쉽게 답을 주지는 않는다.

‘天下第一筆’이라 불러도 아까움 없을 그의 글쓰기 실천은 글이 곧 힘이고 전투이며, 그러기 위해 글에 날을 세우고, 글이 곧 ‘글 포탄’이 되어 타격할 곳에 정확히 떨어져 예상한 효과를 발휘해야 함을 보여주는데,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아주 오래전 읽었던 꿔모뤄(郭沫若)의 한 수필에서 꿔모뤄는 공자를 불러내 마르크스와 대면시키는 장면을 그려낸 바 있는데, 아직도 내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사당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온 공자가 차갑게 식은 돼지고기를 입에 물고 나타난 장면이다. 어떤 인물을 ‘현재화’하지 않고 ‘역사화’하는 이미지는 내게 그렇게 남아 있다. 그래서 리영희를 기억의 대상으로 삼고 ‘역사화’하려는 시도를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리 선생께서 “차갑게 식은 돼지고기를 입에 물고” 나타나는 것을 보려고 내가 리영희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은 아니니까.

리영희를 ‘현재화’하려면 좀 다른 여정에 나서볼 필요가 있다. 리영희만 줄곧 읽는다고 리영희를 더 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른 여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여정에 나서려면 우리는 ‘리영희라는 배’(<리영희 호>)를 타고 그가 불러낸 상황과 그와 마주치는 인물들과 인사를 나누며,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해져야 할 다른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그 여정에 험난한 태풍을 만나고 리영희가 그 태풍을 벗어나게 우리를 도와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2013년과 2014년 연이어 쓴 두 편의 리영희에 대한 나의 ‘오마주 1,2’ 글에서 리영희를 따라 좀 먼저 그런 여행을 떠나본 셈인데(「한국 1960~1970년대 사유의 돌파구로서의 중국 문화대혁명 이해 - 리영희를 중심으로」와 「`해석의 싸움`의 공간으로서 리영희의 베트남전쟁: 『조선일보』 활동시기(1965-1967)을 중심으로」), 그 행로는 1960년대를 향해 있었다. 리영희가 『대화』에서 글쓰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최정점을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리영희를 아는 분들이 『전론』(『전환시대의 논리』) 이후의 리영희를 상찬할 뿐 왜 그에 앞선 그의 ‘화양연화 시기’로 거슬러 가보려 하지 않는지, 그렇게 새로 찾은 장소에서 리영희 사유의 특징을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는지, 대체 그가 그렇게 화려한 시절로 기억하는 1960년대를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탐구하지 않는 이유를 좀체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건 리영희를 ‘현재화’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기억의 대상으로 붙잡아두고 ‘역사화’하는 것 아닌가.

내가 리영희와 더불어 1960년대로 거슬러 가는 여행을 해보려 한 이유는 ‘사상사의 부재’라는, 나를 오래도록 붙잡고 있는 질문의 출발점에 리영희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상사의 부재’는 ‘사상의 부재’와는 다른 것인데, 우리가 성찰할 수많은 ‘사상 자원’이 있음에도, 포스트 식민적 상황이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동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국가와 근대 사회질서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제도를 수선하고 다시 성찰하고 다시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유를 반복할 논쟁 무대가 될 중간 회귀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어찌보면 빙빙 돌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사상사의 부재’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의 위기’나 ‘정치의 위기’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사상사 부재의 위기’이다(「(논평) 삼중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 사회」, 『동향과 전망』 117호, 2023년).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를 줄곧 민중운동의 상승국면과 승리를 향한 행진으로 보기보다, 내가 제안한 ‘1991년의 잊힌 퇴조의 출발점’이라는 문제제기에 다소라도 동의한다면 우리는 역사를 보는 관점을 전환해볼 필요가 있는데(『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자유주의적 전환의 실패와 촛불의 오해』, 북콤마, 2022), 1991년이 성찰의 시점으로 중요하게 떠오르면 그 다음 ‘저절로’ 1960년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세계체계 분석을 제창하면서 근대세계체계 수립 시기를 ‘장기 16세기’라고 부르고 조반니 아리기는 20세기 자본주의 헤게모니 질서를 이해하려면 시야를 좀 더 길게 ‘장기 20세기’로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긴 시기는 아니지만, 비슷한 이유에서 우리는 1960년대를 ‘긴 60년대’(‘장기’라고 명명하기는 너무 긴 느낌을 주니까 ‘긴’이라고 하자)라고 지칭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이 시기를 ‘포스트4.19’라는 특징으로 규정한 다음, 1960년대가 형성되는 연원으로 해방에서 1950년대까지를 포함하고, 1960년대가 만들어낸 어떤 ‘사상사적’ 유산이 1970년대의 암흑기를 버티는 자원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고 생각해본다면, ‘긴 60년대’를 사상사적 관점에서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연이어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은 1980년대가 ‘사상사적 관점’에서 이 ‘긴 60년대’의 계승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단절을 포함한 전환이나 퇴보는 아니었는지가 될 것이다.

얼마 전 퇴임한 김명인이 쓴 『회성록: 두 계엄령 사이에서』에서 이런 두 시대 대비의 쟁점이 확인되기도 하는데, 나는 이 책을 나 나름의 ‘사상사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읽으면서 <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이라는 내 판단을 출발점 삼아 1960년대로 나아가 성찰할 필요가 절실함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1991년을 질문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국 자본주의’(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한 고리)가 대체 어떤 제도 질서에 기반해서 작동하고 있는지 그게 왜 정치적 질문으로 계속 반복 부상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것인데. 이 제도 질서를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세 가지 자유주의 제도의 긴장된 연결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경제자유주의(김재익이라는 이름과 연결된)이고 두 번째는 법조자유주의(김병로라는 이름과 연결된)이다(「우회하기 어려운 자유주의라는 경계: 격동과 위기의 시대 한국의 사상좌표를 묻는다」, 『동향과 전망』 2026년 봄호). 그리고 1960년대는 여기 세 번째 것을 덧붙이는데 그것을 ‘언론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고, 이 언론은 좁게 신문만이 아니라 신문, 잡지, 문학, 예술 전 분야의 ‘사상과 발언의 자유’의 넓은 의미에서 언론자유주의를 의미한다. 리영희의 중요성은 바로 이 언론자유주의를 이해하는 한 축이기 때문이다.
 

리영희라는 배를 타고 1960년대로 거슬러가보면, 예상 못했던 놀라움에 마주한다. 매사가 놀라움의 연속인데, 우리는 그저 신문기자 리영희를 만나보려 그 시대를 찾아간 것이지만, 신문기자 리영희가 우리를 안내하는 시공간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 4월혁명이 열어준 ‘포스트 4.19 공간’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가 처음 새롭게 만나는 것은 ‘청년 리영희’이다. ‘원로들의 원로’로만 전달되어 너무 멀게만 느껴지던 리영희, 사당에 모셔져 ‘식은 돼지고기를 씹고 있는’ 리영희와는 다른 리영희가 거기 있고, 교수도 아니고 사회운동의 원로도 아닌, 열려있는 ‘외부 세계’를 언론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하려 매일매일 신문사 안팎에서 싸우고 자기 사유를 지면에 싣기 위해 싸우는 리영희를 만난다. 막상 다시 만난 리영희는 찾아간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만큼 바쁘고 또 민활하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새로운 잡지, 새로운 신문,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실천이 넘치며,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금 눈을 더 넓히면 많은 작가들이 그의 주변을 함께 걷고 있다.

이렇게 리영희라는 배를 타고 1960년대에 도착하면 우리에게 전수된, 책 속의 리영희, ‘선생님들의 선생님’인 ‘사상의 은사 리영희’가 아니라, 우리의 선배일 수도 있고 때로는 동료나 후배일 수도 있는 ‘빛나는’ 리영희를 만날 수 있다. 리영희가 가장 빛날 때를 찾으려면 리영희만 계속 파고들어서는 불가능하고, 리영희는 오히려 그가 놓인 상황에 비춰보고, 그가 만났거나 스쳐지나간 다른 사상가들에 비춰볼 때 훨씬 빛나는 존재로 다시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전논』 50주년을 기념해 리영희 재단 청탁으로 글을 쓰면서 나는 ‘사상사의 부재’라는 질문을 풀어가는 고리가 될 세 인물이 한 컷에 들어있는 사진을 전한 바 있다. 거기에 1929년생 리영희, 1934년생 박현채, 1937년생 김진균이 함께 들어있는데, <리영희 호>를 타고 1960년대로 거슬러 갔을 때 그 사진에 담긴 다른 두 사람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온다. 리영희를 ‘말갈’이라고 놀리며 ‘소년 빨치산 실천’의 부담을 안겨준 박현채는 1960년대 인혁당 활동을 통해 1970-80년대로 이어지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계보 형성에 중요한 족적을 남기며, 김진균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4월혁명 연구소>에 두었다. 1980년대에 중요한 활동을 한 이들에게도 중요한 출발점이 1960년대임을 새삼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엄혹한 국내 상황을 바꿔보려고 밤을 새며 ‘외부’ 세계의 정보를 실어나르던 ‘청년’ 리영희의 언론자유주의 시대, 이 1960년대로 <리영희 호>를 타고 가보면 전혀 의외의 인물을 만난다. 어쩌면 리영희가 우리를 그의 배에 태워 1960년대로 다시 보내려던 이유, 그가 가장 만나보고 싶던 인물이다.

시인 김수영.
김수영이라니! 아무도 리영희와 김수영을 연결시킨 적이 없는데!


리영희라는 배를 타고가서 만나는 김수영

그러나 차분히 살펴보면, 리영희와 김수영은 삶의 굴곡과 세상의 고난을 대처하는 방식, 그 ‘공학도적’ 태도, 우상을 파괴하는 일관된 모습, 무너지지 않는 “스스로 도는 힘”, 그리고 일본어와 영어라는 흥미로운 지식의 매개, 숨어 있는 비교점으로서의 루쉰 등등 많은 면에서 평행이론을 느낄 만큼 비슷함을 담고 있다.

리영희 자신은 『조선일보』 지면에서 벌어진 김수영-이어령 논쟁 때문에 1968년 신문사를 찾아온 김수영이 선우휘의 원고 수정요구에 일갈하는 모습에 큰 인상을 받았고 그 무렵 중국에서 벌어진 문학논쟁과 연관해 김수영에 본격 관심을 가지고 “김수영의 작품을 다 찾아 읽는 것으로 시작”하고 신동엽의 시에도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신동엽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백낙청에게 소개해달라고 해서 무안했던 이야기와 친분 있던 이병주를 김수영 사망 다음 날 만나 자기 때문에 김수영이 죽었다는 이병주의 자책을 들으며 “나는 또 한 번 만나보고 사귀고 싶은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와 사귈 기회를 잃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리영희는 또다시 기회를 놓치지는 않으려고 『창비』에 게재한 베트남전쟁 원고료를 받고는 백낙청 염무웅을 재촉해 함께 부산의 소설가 김정한 선생을 찾아 뵙고 대접한 이야기를 남긴다(『대화』 391-401쪽). 리영희와 김수영을 연결 짓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며, 김수영 읽기는 리영희가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 보이는 것이 될 수 있다. 막상 벽을 넘어서 리영희를 통해 김수영을 읽고 김수영을 통해 리영희를 읽으면 많은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이 느닷없는 두 사람의 대면을 겁없이 말하게 된 것은 글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리영희와 만난 독특한 경험 때문이다. 내가 리영희 오마주 글 두 편을 쓴 시기는 『전논』을 처음 읽고 그 긴장을 오래 지닌 채 살고 여러 연구를 하다가 너무 늦게 29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게 늦게 돌아와 리영희에 대한 ‘나의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건 어쩌면 리영희가 나를 ‘불러냈거나’ 아니면 ‘리영희가 내게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리영희의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의 문화대혁명과 베트남전쟁 보도에 대한 글을 썼지만, 그건 어찌 보면 내가 <리영희 호>의 안내를 받아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고 리영희의 목소리를 느끼며 썼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의 경험도 그래서 독특한데, 『나와 리영희』 출간 이후 북토크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받고 왜 굳이 나를 세 명의 토론자 중 한 사람으로 끼워 넣었는지 모르는 채, 어떤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면서 1960년대로 거슬러가는 이유를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2013년 리영희 글을 쓰면서 1960년대 ‘언론 자유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거기에는 리영희와 더불어 김수영이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그 때 그 글에서 이 김수영에 관한 말을 써놓았다고 기억했지만, 막상 찾아보니 김수영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준비가 없어 저어했던 것 같다. 오래전부터 김수영은 무언가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거대한 성벽 안에 들어갈 엄두도 내기 힘든 난공불락의 성처럼, 그러나 내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좋아서 늘 벽에 걸어두고 있는 칸딘스키의 그림처럼 내 방 한 켠에 머물고 있었다.

북토크를 준비하던 어느 날 그런 김수영이 불쑥 내게 다가왔는데, 그건 리영희가 손잡고 내게 데려다 준 느낌이었다. 물론 그 중간 과정에 김명인의 『회성록』이 있고 그걸 연결해 김명인의 김수영 읽기도 있었다. 그러면서 김수영과 『창비』의 특별한 관계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준비도 없이 나를 찾아온 김수영을 붙잡고 나는 1월 첫 한 주를 행복한 글 읽기에 푹 빠져 있었다. 내가 마르크스에 대해 책을 쓰면서 마르크스를 오래 붙잡고 있다가 나를 ‘찾아온’ 마르크스 덕에 어느 시점에 책을 쓸 수 있던 경험을 기록하며, “텍스트의 폭발적 힘이 자신의 사유의 희열, 사유의 기쁨과 만나면 그때 지식이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는데(『생각하는 마르크스』, 463쪽), 이번에 그런 경험을 다시 한 것 같다. 그 전에는 한 번도 김수영을 제대로 읽고 이해도 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김수영 시를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갑자기 그 시는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시’로 읽혔고 그게 리영희가 김수영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가 십여 년 전 내 직장에서 리영희 방식의 “글쓰기 실천”을 조금 해보려하면서, 모두 물러서려 했을 때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모습을 보여서(『나와 리영희』에 수록된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전투적 자유주의자」) 리영희가 김수영을 설득해 내게 ‘곁을 보여’주고 독해를 향한 문을 조금 열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김수영을 이해하기보다(얼치기 시도에 무슨 깊이가 있겠는가!), <리영희 호>를 타고 ‘리영희 프리즘’으로 김수영의 고민을 이해해보려는 리영희의 한 읽기 방식, 두 사람이 시간을 넘어 만나는 방식을 조금 적어보려 한다. (김수영 사망 전에 리영희가 김수영의 시를 모두 구해 읽었다고 하기 때문에 사실 리영희의 글쓰기에 대한 김수영의 영향력은 알게 모르게 작용해 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전투적 자유주의자” 리영희와 김수영

나는 리영희를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전투적 자유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를 찾아온 김수영은 리영희의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에 더 적합한 표현을 하나 던져주었다. ‘승패의 차이를 계산할 줄 아는 포탄의 이성을 갖춘 전투적 자유주의자’, 더 줄이면 ‘포탄의 이성을 갖춘 전투적 자유주의자', 이 표현이 더 적합하고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고 해야겠다. 김수영이 이 표현을 리영희에게 준다면, 이 구절을 담은 시를 ‘30대의 김수영’이 81세에 세상을 뜬 ‘선배 리영희 선생’에게 헌정한 헌시로 읽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조그마한 세상의 지혜를 배운다는 것은
설운 일이다

그것은 내일 되면 포탄이 되어서
휘황하게 날아가야 할 지혜이기 때문이다

원한이 솟는 가슴속에서 발사되는
포탄은 어두운 하늘을 날아간다
빛이 없는 둥근 하늘에서는
검은 포탄의 꾸부러진 곡성(哭聲)이
정신의 주변보다 더 간지러웁고
계곡을 스쳐서 돌아가는
악마의 안막(眼膜) 같은
강물을 향하여
그가 어떠한 은근한 인사를 하였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작렬할 지점을 향하여
지극히 정확한 각도로 날아가는
포탄이
행복의 파편과 영광과 열도(熱度)로써
목적을 이루게 되기 전에

승패의 차이를 계산할 줄 아는
포탄의 이성이여

“너의 자결(自決)과 같은 맹렬한 자유가
여기 있다”

— 「조그만 세상의 지혜」(1956) 전문 



이 헌시를 리영희에게 주고, 그 헌시를 받은 리영희가 지금 김수영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두 사람은 ‘포탄의 이성’과 ‘공학도적 글쓰기’ 이야기의 덕담만 주고받았을까? 그러지 않았을 게다. 둘 다 철저한 사람이고 ‘진실’의 바닥까지 나아가지 않고서는 포탄의 이성도 공학도적 글쓰기도 불가능하다고 여긴 이들이니까.

두 사람은 아마 두 번째 구절 ‘전투적 자유주의자’에 대해 바닥까지 하늘까지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그들의 삶에서 지금까지 세계를 바라보면서, 막상 전투적 자유주의자가 필요할 때는 아무도 나서지 않다가 세상이 뒤집히면 모두 전투적인 양 모습을 내세우는 세태를 보며 김수영은 리영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생, 사방을 둘러보시오. 모두 다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뿐이라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겠지.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사령」(1959) 부분



이에 응대해 리영희는 아마도 자신의 삶의 사표였던 루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후대’에 아마 루쉰을 ‘역사적 중간물’(첸리췬의 표현)이라고 불렀는데, 루쉰은 과거에 대해서도 싸우면서 그것과 단절 불가능하다 여기고 미래를 위해 싸우면서도 그에 온전히 발 담글 수도 없다 여겼던 인물이다. 그래서 이런 싸움에서 루쉰의 삶의 자세는 ‘모로 서서 싸우기(橫戰)’였는데, 화살을 앞을 향해서만 쏘는 것이 아니라 뒤를 향해서도 쏘고, 당연히 응사하는 화살이 앞에서만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도, 즉 자기편으로부터 더 많이 날아오고 그 화살이 더 아팠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나는. . .암만해도 조금은 옆으로 비켜서 있다”(<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김수영에게서 ‘모로 서서 싸우기’의 루쉰을 보았을 것이다.

루쉰을 인용하는 리영희를 보며 김수영은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언어는 나의 가슴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나는 모리배들한테서
언어의 단련을 받는다
(...)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아 모리배여 모리배여
나의 화신이여

— 「모리배」(1958) 부분



리영희가 김수영 시인을 만나서 가장 궁금했을 것은 그가 어떻게 ‘전투적으로 싸웠는가’는 아닐 것이다. 리영희도 전투적으로 글을 쓰고 글의 날을 세우고 전투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둘째가라면 서러워했을 것이고, 누가 리영희보다 더 전투적으로 뛰어난 글쓰기를 보이면 아마 그것을 보고 스스로를 반성했을 사람이니까.

리영희는 아마도 전투를 벌이지 않을 때,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을 수 없을 때, 잠을 자야할 때, 아름다운 자연에 빠져들 때, 이 시인 전사(戰士)는 어떻게 ‘칼의 날을 벼리고 있는지’ ‘쉬면서도 쉬지 않는지’ ‘쉬는 리듬 속에서 싸우는 리듬을 더 숙성시키는지’, 혹은 ‘그냥 쉬기만 하는지’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흐린 날에는 연극은 없다
모든 게 쉰다
쉬지 않는 것은 처와 처들뿐이다
혹은 버림받은 애인뿐이다
버림받으려는 애인뿐이다
넝마뿐이다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
날이 흐릴 때면 너와 대한다
가장 가까운 적에 대한다
가장 사랑하는 적에 대한다
우연한 싸움에 이겨 보려고

— 「적2」(1965) 부분



싸움을 벌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리듬을, 어떤 관찰을 키워야 하는지, 자칫 늘 날세운 칼만 들고 있다 쉬어야 할 때 그 칼로 가까운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만 하고, 정작 싸워야 할 때는 들고 있던 칼이 녹슬기 시작해 싸우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황을 미리 방비할 수 있을까.


낯선 리영희, 김수영과 만날 준비

이런 리영희의 질문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나와 리영희』에 담긴 고병권의 독특한 글부터 읽어볼 필요가 있다(「리영희 안의 리영희」). 고병권은 감옥에서 리영희가 부인 윤영자 여사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다른 리영희를 발견하고 반가워한다. 많은 이들이 이 글에서 고병권이 ‘따뜻한 리영희’를 발굴해 냈다고 생각하며 좋아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 가볍게 읽으면서 그런 ‘느낌’만 가지고 독서를 마쳤다. 그런데....

그런데, 고병권이 어떤 사람인가.『리영희 프리즘』과 『리영희를 함께 읽다』에서 줄곧 리영희의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를 찾아야 한다 말했고, 리영희처럼 글쓰기 위해 리영희를 연구해온 고병권인데, 그럴 리가? 니체를 읽고, 마르크스를 읽고, 루쉰을 읽으며, ‘날을 감춘 날선 글’을 써온,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산문을 쓰는 고병권이. 그럴 리가.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뭐?
아 그래.... 그래 그래 -

— 「하... 그림자가 없다」(1960) 부분



고병권은 리영희 서신을 다룬 자신의 짧은 글 어디서도 ‘따뜻한 리영희’를 말한 적이 없다. “낯선 리영희”와 “순진무구한 리영희”를 말했을 뿐이다. 글 처음과 글 마지막을 루쉰으로 감싸면서 말이다. ‘따뜻한 리영희’라는 문구는 우리가 거기서 없는 것을 발견하고자 했던 오해가 우리 눈을 가려 생겨난 착시효과일 뿐이다. 속은 것인가, 속을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인가!

‘낯선 리영희’가 누군가에겐 ‘따뜻한 리영희’로 비쳤고 그것으로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아니다, ‘낯선 리영희’다. 그 리영희는 더 어려운 싸움 속에 있고 그 싸움을 이겨낸 리영희다. 갑자기 끼어드는 말이지만, 나는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전태일만 ‘차가운 불꽃’이라고 봐야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생각하는 마르크스』 437-439쪽). 분노에서 시작한 거대한 뜨거운 불꽃들이 있지만 그 불은 자기 소중한 이들과 자기 집 부터 불태운 다음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차가운 불꽃’은 정교한 뜨거움이고, 필요한 것만 꼭집어 태우지만 철판도 자를 수 있다. ‘불꽃’이 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차가운 불꽃’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낯선 리영희’는 다른 곳에서 다른 리듬과 가락으로 우리에게 말 거는 리영희지만, ‘기억의 대상’으로서의 따뜻한 리영희가 아닌 연구의 대상으로서 ‘낯선 리영희’이다.

그런 리영희를 좀 더 알고 싶다면, 리영희의 자전적 에세이 『역정』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나는 어떤 소중한 책은 좀 멀찍이 두었다가 그 책이 나를 찾아올 때를 기다리는 습관이 있다. 숙성기간이 일치해 갔기 때문인지, 요즘 들어 그렇게 나를 찾아주는 책들이 있어 반가운데, 『역정』도 그랬다. 이 책이 리영희의 주요한 저서 중 가장 늦게 가장 무겁게, 그것도 내가 김수영에 갑자기 푹 빠진 이 1월 초 시점 김수영을 비집고 중간에 틈입해 들어왔다. 나를 읽어달라고, 바로 지금 나를 읽어야 한다는 듯이.

어떤 이들에게 이 책은 한 투사의 성장소설처럼, 마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처럼 읽힐지 모르겠다. 마치 고병권의 글에서 ‘따뜻한 리영희’를 찾아냈다고 착각하며 읽는 것처럼.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고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대체 이 책은 무슨 책일까. 자신의 『전논』 때문에 ‘의식화’되어 체포되고 법정에 선 청년들에게 답해야 할 책무를 무겁게 느끼며 쓴 이 <고백록>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어디 한 구석 ‘단련된 강철 투사’를 발견할 수 없고, 잘 싸우는 존재를 보여주는 곳도 없고, 어떤 이념 좌표도 없이 그저 아무거나와 싸우기만하는 존재를 발견할 뿐이다. 리영희에 익숙한 사람들이 자기가 익숙한 리영희를 떠올리며 이 책을 읽어오기만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 책은 자신의 ‘우상’을 기다리는 미래의 투사들에게 선물한 리영희의 『아Q정전』이 아니었을까?

만일 고병권의 글과 리영희의 『역정』에서 뒤늦게 발견되는 이 ‘익숙한 낯섬’, 이 “동양적 풍자(諷刺)”를 조금 느꼈다면 이제 리영희와 김수영이 만나는 무대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일 수 있다. 나는 리영희 『역정』의 백미가 다음 ‘공학적 글쓰기’에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간은 빈대 앞에 속수무책이어서, 인간보다 빈대의 진화가 앞서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화에서 뒤떨어진 인간에게 남아 있는 수단은 육탄공격밖에 없었다... 각 방향으로 도주하는 대군을 적시에 정확하게 타격하는 데는 여간한 기동성과 기민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화의 최첨단을 가는 놀라운 IQ를 지니고 있다....한판 격전을 끝내고 전과에 만족해 불을 끄고 누우면 적은 벽면을 타고 포복해 올라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잠복해와서는 급강하 폭격을 가하는 것이다. 공중에 대해서 무방비적인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전술이다...방 안의 어느 물건 하나 그들의 군사학에 이용되지 않는 것이 없다. ...나는 훗날 모택동을 연구할 때 그가 글에서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유격전 전략과 전술을 빈대에서 체득했으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모가 그 사실을 시인하지 않은 것은 빈대에 대한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역정』, 92쪽)

여기서 당신은 ‘따뜻한 리영희’를 발견하는가, 아니면 ‘낯선 리영희’를 발견하는가.

<이>라는 시를 쓴 김수영 시인이 이 리영희를 알았다면 아마 <빈대>라는 시도 쓰지 않았을까. 모택동을 등장시키면서. 아쉽게도 리영희에게 기회를 뺏긴 김수영은 이 도전을 ‘글쓰기 경연’으로 여겨 “그럼 나도”라며 응수하며 이런 시를 던졌을지도 모른다.


수입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너나 나나 매일반이다
모이 한 가마니에 430원이니
한 달에 12, 3만원이 소리 없이 들어가고
알은 하루 60개밖에 안 나오니
묵은 닭까지 합한 닭모이값이
일주일에 6일을 먹고
사람은 하루를 먹는 편이라

모르는 사람은 봄에 알을 많이 받을 것이니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봄에는 알값이 떨어진다
여편네의 계산에 의하면 7할을 낳아도
만용이(닭 시중하는 놈)의 학비를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한다

나는 점등(點燈)을 하고 새벽 모이를 주자고 주장하지만
여편네는 지금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니 430원짜리 한 가마니면 이틀은 먹을 터인데
어떻게 된 셈이냐고 오늘 아침에도 뇌까렸다

이렇게 주기적인 수입 소동이 날 때만은
네가 부리는 독살에도 나는 지지 않는다

무능한 내가 지지 않는 것은 이때만이다
너의 독기가 예에 없이 걸레쪽같이 보이고
너와 내가 반반--
“어디 마음대로 화를 부려 보려무나!”

— 「만용에게」(1962) 전문



그냥 물러설 리영희가 아니다. 리영희도 지지 않고, 1라운드가 ‘관찰하기’의 내공을 보여주는 ‘경연’이었다면 2라운드 ‘경연’ 주제를 ‘나를 드러내기’로 하자고 제안하고는, 그의 ‘비장의 무기’ 진주 기생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그녀의 기상에 눌리기 시작한 것을 느낀 나는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나의 위치를 회복하려 했다. 느닷없이 빼든 권총 끝에서 섬광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마당 한 끝에서 불꽃과 함께 폭발소리가 일었다...

“가! 약속했잖아! 누구를 놀리는 거야?”

나는 나를 묶고 있던 여자의 주술의 끈이 총소리로 흩날려버린 것을 느꼈다. 그리고 총소리에 기겁한 논개의 후예가 허둥지둥 뛰어내려와 장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리라고 기다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자는 높은 툇마루에 자태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홀연히 서서 나를 내려다볼 뿐이 아닌가!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한참 만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젊은 장교님, 아무리 하찮은 기생이라도 그렇게 흩어진 마음과 몸으로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진주기생을 잘못 보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그렇게 천하게 굴지도 않습니다.” (...)

나는 그녀의 너무도 당당한 기품과 위엄에 눌려 대답할 용기를 잃고 있었다. 하찮게 보고 덤볐던 자신이 너무도 왜소해져, 나의 전존재가 내면에서 산산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의 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맨손의 진정한 용자(勇者) 앞에서 가장 비겁한 존재가 되어버린 권총 찬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역정』, 247-248쪽)

김수영은 빙긋 웃으며, 리 선생께 아래 시 정도로 나를 드러내면 충분할 것 같고 앞으로도 리 선생은 생각 못할 정도로 나를 더 많이 드러낼 일이 있을 텐데, “리 선생은 어떠할지?”라는 표정을 지을 것 같다. “내가 혁명과 그 퇴조를 겪는 과정에서 <신귀거래 1~9>(1961년) 연작을 통해 ‘여편네(의 세계연관)의 발견’(좀 더 과장하자면 ‘여편네 주체의 탄생’)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 어떻게 더 내려놓고 더 드러내는 세계를 열고 내 나름의 ‘전투적 자유주의’ 실천을 새롭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리 선생이 알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부분



이 시를 보여주곤 김수영은 리영희에게 “염무웅이란 친구를 불러 물어보시오. 고은이 그 친구를 우리집에 처음 데리고 왔을 때 고은이 우리집 댓돌 위에 선 채 그 나태함 때문에 혼찌검 났는데, 그리 보니 툇마루에 서서 그 고은을 혼내던 내가 꼭 리 선생과 마주한 진주기생 같소이다 그려”라며 껄껄 웃었을지도 모르겠다(백낙청·염무웅, 「추억 속의 김수영, 다시 읽는 김수영」, 『시는 나의 닻이다』, 창비, 2018, 21-22쪽). 이 경연을 보는 우리는 처음에는 즐거울 수 있다. 마치 두 ‘전사’들이 서로를 남김없이 벗겨내는 경연을 보는 ‘관음증’ 같은 것을 느끼면서. 또는 ‘막장드라마’인가 하면서 낄낄대며, 그렇지만 그 다음 우리는 곧 “서러워진다”. 김수영과 리영희는 이 ‘한없이 낮아지는’ 경연을 벌인 후 곧 싸움의 무대에 다시 나서 ‘한없이 수직적으로 올라가’ “포탄의 이성”을 갖추고 그들이 벼린 칼을 휘두를 것을 알기 때문에.


칼은 어떻게 벼리는가

우리가 리영희의 이 『역정』과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숙독한다면 우리는 서야 할 싸움의 무대에 곧장 올라가 김수영처럼 리영희처럼 자신이 세운 ‘우상’에 기대지 않고, ‘오직 글로만’ 자신의 ‘포탄의 이성’을 믿고 홀로 외로이 “고독”하고 “고독해야만 하는” 싸움터에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갈 수 있을까?

그건 어렵다. 왜냐하면 둘 다 정말 비장의 비기는 보여준 적이 없고, 또 이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싸움이 없는 휘영한 밤 그들이 칼을 벼리는 장면뿐이었기 때문이다. 숫돌에 칼을 갈면서 칼날을 벼리고 있던 때와 장소는 싸움이 없던 곳, 그것도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그런데 밤이란, “모든 고양이가 회색으로 보이는 밤”이다(마르크스가 「루이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인용한 헤겔의 말). 김수영은 그 ‘밤’의 의미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 길로 마냥가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 「더러운 향로」 부분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이다/ 나는 그러한 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 「서시」 부분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 「봄밤」 부분



그렇게 매일 밤, 칼을 벼려 드디어 밤에 “부엉이의 노래도 부를 줄” 알면서 이제는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지” 걱정을 내려놓게 된 김수영도 막상 ‘낮’의 세계에 나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는 <비>에서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통해 비로소 밤에서 새벽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밤>이란 시에서 “밤이 밤의 창을 때리는구나/ 너는 이런 밤을 무수한 거부 속에 헛되이 보내고 있구나”라고 자탄한다.

그 김수영은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봄밤>)면서도 조급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밤을 벗어나 낮으로 나서려 했지만 어쩌지 못하고 낮같지 않고 오히려 가장 ‘밤같은 낮’인 겨울 한복판의 낮을 골라 조심조심 걸어나왔다. 순간 자신감은 급속히 흔들렸지만 ‘허세’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결심하고 나온 낮인데’. 달랑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겨울 한‘낮’에 뒤늦게 나와선, 마치 작열하는 한여름 태양 아래 선 것처럼 허세를 떤다.


내 몸은 아파서
태양에 비틀거린다

내 몸은 아파서
태양에 비틀거린다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광선의 미립자와 분말들이 너무도 시들하다
(압박해 주고 싶다)
뒤집어진 세상의 저쪽에서는
나는 비틀거리지도 않고 타락도 안 했으리라
그러나 이 눈망울을 휘덮는 시퍼런 작열의 의미가 밝혀지기까지는
나는 여기에 있겠다
(...)

— 「동맥」(1958) 부분



그 후로 김수영은 다시 ‘밤’으로, “뒤집어진 세상의 저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확실히 “여기에 있겠다”를 어기지는 않았으나, 비틀거림이 끝났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대신 김수영은 이 낮의 세계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리배들을 만났고,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아마도 그래서 그들을 거울삼아 덜 비틀거릴 수는 있게 되었을 것이다.
 

김수영에게 부치는 리영희의 편지


나이든 리영희는 40대의 김수영 시인을 뒤늦게 만나고는 북받치는 감격을 담아 아마 이런 편지를 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수영 시인께

내 평생 그렇게 만나고 싶던 김 시인을 여러 벗들 덕에 뒤늦게 만나니 북받치는 감정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모르겠소. 내가 『조선일보』 시절 김수영 시인의 기개를 직접 볼 기회가 있어 김 시인 시를 구해 읽고 감복했고, 신문사를 쫓겨난 후 국제정세에 대해 쓴 글을 통로 삼아 여러 새 벗들을 사귀었을 때는 그들 모두 매일 김 시인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미 김 시인은 내가 만날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나버렸고 나는 김 시인을 먼저 만났던 그들을 시샘하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소이다 그려.

내가 한글보다 일본어를 더 자유롭게 사용하는 중학 시절을 보내고 그 다음에는 해양대 생활이 흥미없어 도서관에서 빌린 영어 소설을 읽고 예이츠, 롱펠로우, 브라우닝, 테니슨, 키츠의 영시를 외우며 넓은 세상을 배우고 나니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일본어에도 못미치는 나의 우리말 소양은 대체 무엇인지 한없이 부끄러웠는데, 김 시인은 나와 비슷한 듯도 하지만 “몇 차례의 언어의 이민을” 하고도 “우리말을 너무 잘해서 곤란”(<거짓말의 여운 속에서>)할 정도로 어찌 그리 유려한 한국어를 혼자 습득했는지 너무 부럽기도 했소. 김 시인의 삶이 마치 내게는 거울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다 느끼기도 했소이다.

사람들이 김 시인을 ‘위대한 전사’로 ‘혁명의 시인’으로 숭앙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패배주의자’니 ‘졸렬’하다니 하면서 비난하는 것도 들었는데, 나에 대해서도 ‘사상의 은사’니 ‘시대의 양심’이니 하기도 하고 역사가 바뀐 줄 모르는 유토피아주의자니 ‘학생 의식화의 원흉’이니 하는 소리가 쏟아지기도 해서, 나는 김 시인이 더 궁금해지고 김 시인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았소.

내가 궁금한 것은 김 시인은 싸움터에 나서지 않을 때 어찌 지내시는지, 싸움터에서 들고 들어온 칼로 집 식구들이나 가까운 벗들을 혹시 벨까 걱정은 아니 하시는지, 또 집에 돌아와 아이들 싸우는 소리도 듣고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뉘고 나면 나를 다시 재촉해 싸움터에 불러내는 목소리가 듣기 싫어질 때가 있진 않는지 궁금해졌소이다. 사람들은 내가 “잠잘 때도 잠자지 않을 때도” 수박을 먹고 “뱃속이 반나절 꾸루륵할 때”도 오로지 싸움만 생각하고 칼만 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런다면 그게 어디 인간이겠소. 그리고 그런 싸움만 아는 기계가 싸움인들 제대로 할 줄 알겠소.

내가 천학비재(淺學菲才)인데다가 영시는 젊어 좀 읽었어도 우리글로 된 시는 제때 배우지도 못해, 내 좋아하는 벗에게도 ‘말갈’ 취급이나 받는 처지라, 모두들 ‘난해시’라 혀를 내두르는 김 시인의 시를 내가 어찌 ‘독해’ 주변이라도 가겠소만, 내 유일한 자랑이 ‘공학도적 글쓰기’니 공학도의 시야에 들어온 김 시인의 뜻을 내 방식으로 좀 말해볼까 하오. 겁 없이 독해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독해의 준비를 좀 해보려는 것이니, 어리석다 웃지는 마시오.


내가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다 하니 사람들은 내가 자료를 잘 모은다는 데만 관심이 있는 듯하여 좀 섭섭하더이다. 내가 말한 공학도란 건물을 짓듯, 설계도를 만들어 기계를 조립해 가듯, 글도 그리 써야 한다는 것인데 말이요. 그런데 내 김 시인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벗들에게도 전한 이유는 늘 시를 ‘운산(運算)’하는 김 시인의 태도를 볼 때 김 시인의 시가 내가 보기에 아주 ‘공학도적 글쓰기’의 완성처럼 보였기 때문이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뭐 그런 정도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공학도로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당연히 <헬리콥터>였소. 내 나이 들어 뒤늦게 동네의 순수한 마음을 지닌 벗을 사귄 덕에 경비행기를 만져도 보고 타보기도 했고, 오토바이를 보고는 타보려는 마음에 침을 삼키기도 했지만, 평생 고생만 시켜온 아내의 걱정근심을 더 키울 수는 없어 포기한 적도 있소이다. 그런 내게 <헬리콥터>라니. 김 시인이 고통을 겪은 그 전쟁터에 나도 몸이 휘말려들어 김 시인에 비하면 고통이라 할 것도 없을 삶을 좀 살았지만, 그때 헬리콥터는 타볼 생각도 못했소.

그런 기대로 시를 읽은 내게 <헬리콥터>는 그런 기쁨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망치로 내 머리를 내려치는 충격을 주었소.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진흙도 없고 진창도 없고 미련도 없이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안개처럼 가벼웁게 날아가는 너의 의사 속에는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
긍지와 선의가 있다

— 「헬리콥터」(1955) 부분



대체 어디에 숨어야 한단 말이오. 나는 대체 뭐란 말이오. 어찌 나를 이렇게 부끄럽게 만드시오. 나란 인간은 헬리콥터를 보고 겨우 거기 타보고 싶다는 치기만 부린 것 아니오.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졌소.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헬리콥터를 보고 이런 생각을 끄집어낸단 말이오.

내가 뒤늦게 안 것이지만 김 시인이 더 이상 세상에 시를 전해주지 못하게 된 나이보다 몇 해 더 지난 무렵 나도 더 이상 글을 못 쓸 수도 있다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는데, 내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 때문에 ‘의식화’되어 감방에 끌려간 많은 청년들에 책임감을 느끼고 앞으로 글을 못 쓰더라도 나를 드러내는 흔적은 남겨야 한다 생각하며 『역정』이라는 내 고백서를 쓴 적이 있소. 어쩌면 내가 모르면서도 김 시인이 쓴 <헬리콥터>의 시 정신이 바람을 타고 내게 전해들어 왔기 때문에 내가 그 책을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소. 그렇지만 그 언어의 수준, 김 시인이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라며 나를 질타하는 목소리를 따라가기는 정말 어려웠소.

김 시인이 전쟁을 겪은 후에 4월 혁명을 겪고 또 군사쿠데타를 겪으며 어떤 고민을 했는지 나도 그 이후 벌어질 끔직한 시대를 거치며 조금은 알게 된 듯 하오. 그렇지만 김 시인도 그렇듯이 우리는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만 보는 사람들이 아니고 또 세상이 많이 좋아지더라도 그 속에서 새로운 ‘우상’을 경계하는 태도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겠소.

그래서 나는 김 시인을 좀 더 이해해 보려고, 4.19 시기를 보여주는 시 한 편을 읽어 보았소. 김 시인은 “우리들의 적은 ...우리들의 곁에 있다”고 하고,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 다음,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고 했소.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시를 건성으로 읽고 “그렇다 위대한 혁명의 정신이다”라고 상찬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게 다인가” 이게 “반짝거리면서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일갈한 시인의 결론이 이게 다인가 좀 실망하기도 했소.

왜냐하면 내가 중국 문화대혁명의 연구를 좀 하고 거기에 조금은 ‘낭만적 유토피아’의 기대를 싣기도 했지만 이후 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때로 자기가 걸어온 궤적에 대해서 분명히 성격 규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라고 말하게 되었고, 중국의 문혁이 끝난 후 중국 농촌에 가보면 벽에 쓸쓸하게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말자”는 구호가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고 외롭게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는 느낌이라오.<그 방을 생각하며>), 문혁의 이상주의적 열망이 ‘적발-투쟁-비판’의 폭력으로 끝난 이유를 계속 되돌아보게 되는데, 김 시인이 아직도 알량하게 ‘적을 찾아서 섬멸하자’는 주장만 하는 건가,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던가 이런 씁쓸한 생각을 되씹게 되었던 것이오.

그런데 참 미안하외다. 미리 사과하겠소. 내 성급히 생각하고 그 다음을 읽지도 않고 결론부터 내렸으니까 말이요. 김 시인은 “하늘에도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고 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더니 “하... 그림자가 없다”며 뭔가 잊었던 것을 찾은 듯 말을 뱉습디다.

그리곤 “하...그렇다.../하... 그렇지.../아암 그렇구말구... 그렇지 그래...” 이리 외치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나더니, 얼씨구 웬 놈이 졸았는지 건성으로 들었는지 나와서는 “응응...응...뭐?”라며 응대하더니 곧바로 “아 그래... 그래 그래”하고 둘이서만 씩 웃고 나가더이다. 대체 그놈은 뭔지, 시인은 그놈하고만 뭔 말을 주고받은건지, 대체 그놈은 시인의 애타(愛他)라도 되는건지, 내 갑자기 궁금해져 참을 수가 없더이다. 시인께서는 “잃은/잊은” 것을 다시 찾는 데 도가 튼 “‘시시한’ 발견의 편집광”(<이 한국문학사>) 아니시오. 오죽하면 혁명에 직면해서도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기도>) 말하셨으니 말이오. 내 ‘공학도적 근성’에 도발을 하셨으니, 내가 졸리는 잠을 미루더라도 이 숙제는 풀고말리라, 그리 다짐해 내가 김 시인의 시집을 헤집기 시작한 것이오. 내가 빈대잡기에 집착하면 모택동도 저리가라 할 만큼 무서워지는 인간이란 걸 아시는지 모르겠소만.


그래 이 ‘무지한 공학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도 내가 <헬리콥터>에서 출발한 것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소. 김 시인이 나를 그 <헬리콥터>에 태우지 않고 김 시인 혼자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며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오.

한국 자동차 업계에서는 자동차 ‘역 설계’라는 일이 있는데, 국산차 만들기 쉽지 않으니 먼저 외제차를 사다가 분해해 역조립해 보면서 반대 방향으로 설계도를 그려본 것이라오. 김 시인이 불친절해서 후학들에게 절대 설계도를 보여주지 않았다니, 이 공학도가 역설계를 한 번 해보았지 뭐요. 4.19 이전의 시들이 공학도 눈에 좀 더 잘 보이니 그 전의 시들을 좀 말해보리다.

내 생각으론 김 시인은 <아버지의 사진>에서 출발해 <헬리콥터>에서 일단 잠정 종지부를 찍은 것 같습디다. <아버지의 사진>은 나중에 학자들이 ‘역사적 중간물’이라며 루쉰을 규정지은 그런 구도가 담겨있다고 내게는 이해되더이다. 루쉰 선생도 과거와 단절하겠다 야심차게 선언은 하셨지만 자기가 과거로도 미래로도 어느 한쪽에 속할 수 없다는 걸 아주 처절하게 아셨고, 나중에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너무 많이 맞고 심상하셔서 가까운 벗들에게 옛 문체의 한시를 지어보내고선 “나도 왜그러는지 모르겠다” 하셨다잖소. 아마 시인께서도 이런 “설운” 관계성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깨달은 그런 모순덩어리 아니었던가 싶소.

<아버지의 사진>에서 출발한 시인은 <달나라의 장난>과 <구라중화>를 한 쌍으로 삼아 거기서 다른 사물(요즘 공부 좀 하는 이들은 타자라 부르기도 하더이다만 꼭 타자는 아닌 것 같소)을 관찰하는데, 팽이와 글라디올라스에서 번뜩 얻은 깨달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 같소. 그리고 거기서 남들이 ‘실패한 시’라 부르는 <공자의 생활난>에서 드러나는 치기어린 잘난 척을 스스로 버리신 것 아닌가 싶소. 팽이에서 공자를 발견하고, 글라디올러스에게서 ‘생사의 선조’를 끊는, 그것도 여러 번 반복해서 끊어야 하는 “죽음 위에 죽음 위에 죽음을 거듭하리”를 찾아낸 것을 보면.

그러나 이런 ‘관조’, 즉 ‘보기’만 하는 태도에 머물 시인은 아닌 듯 싶어 계속 따라가 보니, 시인은 이번에는 <더러운 향로>와 <네이팜탄>을 한 쌍으로 묶고 대조해 쓰시면서 흥미롭게도, ‘나와 너’를 나누고, ‘너’를 관조하는 ‘나’가 너 속에서 어떤 진실을 발견하는 이런 ‘보는’ 단계를 넘어 나가서, 내가 너가 되는 길로 나아가시려는 듯 싶더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한 쌍의 시 중에 “창조를 위하여/ 방향은 현대--”라 쓴 <네이팜탄>을 더 높이 볼지 모르지만, 내 공학도적 안목으로는 시인은 <더러운 향로>에 애정이 더 깊은 것 아닌가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내 찾아보니 “하... 그림자가 없다”고 뭔가 새삼 발견한 시인의 말을 거꾸로 좇아서 대체 시인이 언제 “그림자” 이야기를 했나 찾아보니, 딱 이 <더러운 향로>가 걸리더이다. 그걸 다시 찾은 것 아니신지? 그저 내 생각 뿐일지도 모르겠소. 그런데 시인은 나중에 <거대한 뿌리>라는 시를 쓰는데, 제목에서도 두 시는 운율이 맞고 또 ‘더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으시는 걸 보면 아마 시인께선 <거대한 뿌리>를 <더러운 향로>의 변주곡으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시인과 이 <더러운 향로>는 어떤 떼어낼 수 없는 ‘설운’ 관계 아닐까 싶소이다(<거대한 뿌리>에 오면 정말 “괴기 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시 세계를 여신 것을 내가 새삼 말할 필요는 없겠소만).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 취하여 보는
이 더러운 길.

— 「더러운 향로」(1954) 부분



그러곤 <거대한 뿌리>에 돌아와서는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며 ‘잃은/잊은’ “더러운 것”을 또 찾아내시더이다. 내 살면서 이렇게 더러운 것에 푹 빠져서 즐거워하는 분은 처음 뵈었소. 시인은 역시 참 세상을 달리 보는 분이오. 나도 1989년 이후, 내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 같은 책을 또 쓸 수 있을지 그런 책을 쓰는 게 맞는지 오래 고민했지만 그럭저럭 힘을 추슬러 더러운 길이라도 좋다 생각하곤 다시 달려보려 한 적이 있기에, “방만 바꾸어 버렸다. .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그 방을 생각하며>)가 3년이 지나 <거대한 뿌리>의 시기에 “막다른 방”(<이사>)으로 돌아와 “나비야 우리 방으로 가자/어제의 시를 다시 쓰러 가자”(<시>)고 하며 “사랑”의 세계로 넘어가던 시인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쑨거(孫歌)라는 중국 학자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생각을 빌려 ‘회심(回心)이라 부른 고심같은 것이 있던 게 아니었는지 조심스레 추측도 해보았소이다.

그렇게 시인의 시를 읽다 보니 내가 타보고 싶던 그 <헬리콥터>도 이제 조금씩 달리 보입디다. 시인은 여기서 뜬금없이 헬리콥터를 “동양의 풍자”라 이르고, 그 다음 행에서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모양”이라는 구절을 쓰셨는데, 내 공학도적 눈썰미는 못 피해가실 듯 싶은데, 이 구절 써놓고는 시인께서 혹시 혼자 씩 웃지 않으셨소?. 나도 이 구절 보면서 씩 웃었소. 나중에 고 뭐라는 글쟁이가 내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헤집어 글 한편을 쓰면서, 저는 ‘낯선 리영희’라 썼는데 사람들이 죄다 ‘따뜻한 리영희’라고 읽었다며 씩 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게 “동양의 풍자” 아니겠소. 내가 다른 글들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수직선을 그리며 올라간다”거나 “수평선을 그리며 날아간다”고 말하는 이는 보았소만,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이라고 써놓고 씩 웃는 사람은 세상 처음 보오. 김 시인 아니면 누가 이런 이미지를 만들겠소.

그런 “동양의 풍자”를 찾고 나면 시인은 “설움을 아는 사람” 놈들과 “설운 동물”을 다른 종류로 나눈 것이 아닌지, 시인이 입만 열면 쓰는 ‘설운’은 ‘슬픈/슬픔’과 근본적으로 다른 건 아닌지 묻고 싶더이다. 관찰력 좋은 시인께서 아이들이 서러워서 서럽게 울기는 하지만 슬퍼서 우는 경우는 별로 없는 걸 모르진 않으실 테니 말이오. 그리고 이 “설운 모양”을 보는 “우리는” 헬리콥터에 “치정”을 부릴 수밖에 없는데, 그걸 “내려다볼 수 있을” 헬리콥터는 우리에 대해 “--자유/--비애”를 느끼니 참 까무러칠 일 아니겠소. 『역정』이라는 책을 썼지만 내가 아직은 이 책을 김 시인에게 드리지 못한 이유가 나는 아직 치정을 부리며 헬리콥터의 “설운 모양”을 올려다보고 있을 따름인데 시인은 헬리콥터가, “설운 동물”이 되어 나를 “비애”의 시선으로, “자유”의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걸 생각하니 내가 차마 책 첫 면에 이 책을 김수영 시인께 드린다고 적어 전하진 못하겠더이다.


여기까지 읽고 일단 시집을 덮고, 내 인생의 황금기라 여기고 절정이라 여기며 ‘잘난 척 하던’ 기자 시절에 김 시인을 만났더라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아니면 김 시인을 이제야 만난 덕에 휘둘리지 않고 그럭저럭 내가 걷던 길을 그런대로 걸어올 수 있던 것일까 생각해 보았소만 나도 잘 모르겠소. 나도 좀 비틀거렸소이다.

그리고 다시 시집을 열었는데, 시인은 역시 대단합디다. 멈출 줄 모르고 또 달리기 시작하니. 시인은 계속 달리면서, <헬리콥터>의 자기 생각도 또 밀어냈지요. “정지의 미”를 “너무나 등한하였다”하고(<서시>),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나를 비스듬히 바라보더이다. 내가 <헬리콥터>를 나름 공학도적으로 분석해보면서 “비애”를 조금 알았다고 생각하는 가소로운 모습을 보였더니, 시인은 내게 리 선생이 아는 비애는 ‘움직이지 않는 비애’(‘정적인 비애’)라고 말하고는 자신은 내리는 비의 “움직이는 비애”를 타고 갑자기 전력으로 달리며 밤에서 새벽으로, 다시 낮으로 뚫고 나가셨소. “태양에 비틀거린다”면서도 “이 눈망울을 휘덮는 시퍼런 작열의 의미가 밝혀지기까지는 나는 여기에 있겠다”(<동맥>)고 외치며 말이오.

나는 『역정』에서 시인처럼 그리 하지 못하고 계속 주저하고 있었는데 말이오. 김 시인이 밤의 세계에서 낮의 세계로 어찌 나가셨는지는 내 편지 앞쪽에 지 맘대로 글을 쓴 엉터리 학자 한 양반이 조금 기록을 남겼다니 그걸 좀 읽어보시기 바라오. 내가 봐도, 믿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김 시인이 발을 내딛은 그 낮의 세계에 나가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안개처럼 가벼웁게 날아가는” 그 삶의 자세를 조금 흉내내 보기는 하였지만 그 경지에 다가가기는 참 어려웠소. 시가 솔직함의 궁극의 자리이고 시를 쓰려면 자신이 먼저 솔직함의 극점까지 가야한다는 시인의 태도를 보면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가는”이라는 말이 쉽게 나온 것이 아니란 것을 새삼 알겠소이다 그려.

아, 참 아까 “앗...그림자가 없다” 이야기를 하다 잊어버리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싶은데, 내가 4.19 이전 시를 주로 이야기하려 했지만, 내가 우리나라 독립 이후 세상을 비관적으로 본 시선을 김 시인도 4월 혁명 이후 불현 듯 느낀 것 아닌가 싶기도 하더이다. 불현듯 갑자기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올 때, 5백명이 같은 방향을 달리다 갑자기 김 시인 혼자 아니다 싶어 돌아서서 499명을 막아서며 “이 길은 아니다”라고 말할 기개를 보이신 것 아닌가, 김 시인 시를 읽다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더이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라고 하곤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의 예상을 깨고 완전히 다른 세계인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고 하시니(<그 방을 생각하며>), 처음엔 화들짝 놀라고 성내기도 했지만, 그 선생의 “가슴”을 나도 내 안에 품으며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던 것 아닌가 싶고, 그래서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소이다.

사람들은 내가 후배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오해해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내가 존경한 루쉰 선생이 소설집 <외침> 서문에서 고민했듯이, 오히려 ‘절망의 절망’의 심연까지 들어가 그것을 헤쳐가보려 했던 것 같고 시인께서도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절망>)했을 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아닌가 헤아려 보기도 했소. 그 ‘절망의 절망’ 끝에서 시인께서 다시 “우리 방”으로 돌아가 시를 쓰기로 한 모습을 보면서 말이오.

김 시인이나 나나 이리 노력을 해보는 이유는 우리가 후진들을 위한 좋은 ‘사다리’라도 되어보려 한 것 아닌가 싶소. 내가 너무 넘겨짚은 것이라면 용서하시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루쉰 선생의 말을 빌려 걱정을 좀 담아두려는 것에 김 시인도 동의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할지?


나를 사닥다리라고 한 말은 지극히 지당합니다. ...만일 젊은 후진들이 정말 사닥다리를 밟고 더 높이 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야 밟히운들 원한이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소인은 어쩔 수 없이 젊은이들을 위해 사닥다리가 될 각오를 하였으나 그들이 사닥다리를 밟고 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루쉰,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 루쉰 서한집』, 78쪽)


김 시인을 만나면 또 묻고 나눠보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보니 첫 만남 이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미리 쏟아낸 듯 싶소. 다시 읽어보니 제 주제도 모르는 공학도가 주워담지도 못할 이야기를 너무 쏟아부은 듯 하오만, 내 진실함의 단면을 보여드린 듯도 하여 고치지 않고 그대로 부치려 하오. 김 시인을 또 만나면 시에 대한 이야기도 좀 많이 듣고 싶고, 우리 살아온 역정에 평행하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눠보고 싶고, 요즘은 김 시인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과 『현대』 잡지의 노력을 어찌 평가하는지도 듣고 싶소.

언제 김 시인 시간 날 때 같이 구수동 41-2번지에서 당인리 발전소까지 자주 걸었다는 산책길을 함께 걸으며 해지는 한강가에서 많은 이야기 나눠봅시다.

2026년 1월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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