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륙 중국에 대한 시각조정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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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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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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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신화


 


새로운 대약진이 마련되고 있다. 집단경제는 모든 시련을 넘어 인민공사(人民公社)는 반석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모든 기적을 나에게 보여준 이 나라 인민에게 축복 있어라.


 


(인민공사에 대해) 인민의 뿌리 깊은 개인경영사상과 집단수용소에 대해 느끼는 환멸감은 자본주의적 요소가 끊임없이 성장되도록 부채질할 것이며 공산독제체제의 멸망을 촉진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위에 예시한 두 평가는 모두 중국 대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사회의 정치ㆍ사회ㆍ경제ㆍ문화의 기초적 구조이며 기본단위인 인민공사에 대한 것이다. 전자는 쿠바의 한 특파원의 현지보도(루이암스트롱, 『중국에서의 편지』, 제9신 1963.7.3)이고 후자는 안경준(安慶濬) 한국외국어대학 강사가「인민공사와 그 체제 변천에 대한 고찰—중공 경제체제의 본질을 해부한다」(『정경연구』제72호, 1971년 1월호)의 맨 끝에서 내린 결론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과 현상에 대해 정면으로 상반된 견해를 볼 수 있다. 하나는 1963년의 것이고 하나는 1971년의 견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못 된다. 현재 이 시간에도 이와 같은 상반된 견해는 세계적으로 그대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현지에서 본 것이고 하나는 간접적으로 연구한 견해라는 것도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못 된다.


문제는 오히려 중국 대륙에서 중국 공산사회가 추진하고 있는 ‘인류사상 초유의 일대실험’에 대해서 처음부터 그 사람이 갖고 대하는 선입관과 입장인 듯하다.


중국의 사회주의적 ‘실험’에 대해서 호의를 가진 외국인은 처음부터 감격하여 웬만한 허물은 덮어놓고 전면적으로 찬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반공적 입장에 서는 외국인은 중공이 이룩한 어떤 성공과 업적은 덮어놓고 그 사회를 전면적으로 비방 규탄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같은 사실과 현상을 놓고 하나는 ‘기적’으로 보고 하나는 ‘파멸’로 보는 까닭은 선입관과 입장 때문인것 같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모두 어떤 사실과 현상에 관한 자료ㆍ숫자ㆍ내용의 통계적 고찰은 세밀히 하면서도 결론이 다르게 나온다는 것은 1차적으로는 그 사람의 개인적 가치관의 차이와 2차적으로는 중국 역사 속의 중국 인민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자기 사회 역사 속의 자기 입장에서 보려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은 평가의 상반은 인민공사뿐 아니라 중공 사회의 전면에 걸쳐 그러하다.


이와 같은 ‘주관’적 입장에서는 한 예를 들면 미국 사회조차 전적으로 ‘풍요’일 수 있고 반면 전적으로 ‘빈곤’일 수 있다. 또 소위 사실이라는 것과 숫자의 요술도 문제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를 평가하는 데도 다같이 정부나 한국은행 발표 자료를 토대로 하면서도 하나는 세계에 유례없는 발전이라 하고, 하나는 외차파산(外借破産)과 비인간화의 표본이라고 결론짓는다. 통계적 숫자나 소위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도 다루는 사람의 입맛에 맞게 선택되고 엮어지고 이론화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기적과 파멸 사이의 이론적 해석이 불가능해진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륙중국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체제인 이상 일단은 우리 사회의 법률적ㆍ사상적 요구로 해서 그것을 부인하고 들어가야만 하게 되어 있다. 과연이 같은 입장에서 학문적이고 양심적인 연구가 가능하며, 상대적인 규율 및 차원에서나마 어느 정도의 보편성 있는 평가와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우리가 어떤 정치적 데마고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대로 보면서 보다 긴 역사적인 안목과 좀더 넓은 세계적 전망을 통해 우리 사회 자체의 영원한 발전과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일단 ‘기적’과 ‘파멸’사이에서 중국을 살펴보는 자세가 아쉽다.


더욱이 직접적 관찰이 불가능한 우리가 그 사회와 인민의 실정을 간접적 방법을 통해서만 관찰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고정관념에서 일단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와 체제가 다른 공산주의와의 국가적 관계에서 이 나라가 전후 27년 동안 그리고 최근 몇 해 사이에 얼마나 고정관념의 피해를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다.


우리(남한)의 97배의 국토와 7억 5천만의 인간이 그 위에서 수행하고 있는 대혁명은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하며 또 복잡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는 개념부터가 다르게 실천되고 있다. 그러기에 상이한 체제의 연구나 평가에는 표현과 기술(記述) 수단인 용어의 개념부터 재음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용어는 역사적 산물이기에 그 경제ㆍ문화 조건의 내용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중공 사회의 관찰에 앞서 우리는 고정관념의 장애적 요소를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대립적 ‘신화’의 타파


 


이와 같은 몇 가지의 기본적이고 전체적인 의식을 가진다면 중공문제의 관찰은 이미 그 반은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작업을 거쳐 양극단적인 신화의 정체를 벗겨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최근 갑자기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 중공과 세계 각국의 급변하는 관계변화, 중공의 대외정책 또는 사회 각 분야의 세밀한 해부학적 기술은 피하기로 한다. 중공 사회의 여러 분야에 걸친 그와 같은 연구는 긍정적인 방향에서건 부정적인 방향에서건 이미 우리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낡은 것이 되었을 만큼 빈번히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중국 본토 사회를 밖에서 들어가 살펴보는 식으로 우선 들어가는 문제부터 시작하여 그 사회의 낯선 몇 가지 독특한 행동과 사상을 검토하면서 파악해보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이 지상(紙上)여행은 어디까지나 대표적인 측면을 골라 그에 대한 긍정ㆍ부정의 여러 가지 엇갈린 견해와 평가를 들면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독자에게 제기하는 정도에 그치려고 한다.


 


‘죽의 장막’이라는 신화


 


우리는 중국 대륙을 대나무의 장막을 드리운, 들여다볼 수 없는 나라라는 신화적 용어로 일컫는다. 중공 정권이 그 장막 밖으로 모든 정보나 소식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미국의 보도기관이나 여행자들에게는 이 정책이 고수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과는 반대로, 중공은 미국이나 그에 충실한 몇몇 동맹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의 신문ㆍ방송ㆍ잡지등 기자들에게 문호를 상당히 개방해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주의국가뿐 아니라 심지어는 미국과 군사동맹관계에 있는 일본ㆍ서독ㆍ영국ㆍ프랑스를 비롯해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의 기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고 보도해왔음을 지적하는 측도 있다. 그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보고 싶은 것을 맘대로 볼 수 있었느냐는 것이 문제이지만.


하여간 중공은 완전히 장벽에 싸인 나라라는 관념은 주로 미국의 주장이라는 일면이 강하다. 최근 탁구외교를 계기로 처음으로 미국 기자들의 입국이 허용됨으로써 이제는 미국도 그와 같은 신화를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워졌다.


우리나라의 대중공관은 대체로 미국의 대중공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미국 쪽에 중공에 관한 정보가 안 나오는 이유는 상호적인 것이지 미국의 일방적인 기피증 때문은 아니다. 선전을 넘어서 진실을 추구하려는 미국 언론ㆍ보도계의 노력이 사실은 미국 정부의 방해로 저지되어온 일면도 있다.


미국 국무성은 미국인의 중공 방문을 저지하고 있는 것은 북경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늘 발표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 보인다.


본래 중공 정부가 신문기자나 작가들을 포함한 많은 미국인에게 사증(査證)을 발부하려 했던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만해협의 위기가 가신 5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 중공 정부는 중국 입국을 희망하는 미국인에게 일반여행자로서의 사증을 내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혀왔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는 중공의 입국동의를 얻은 에이브럴 해리만이나 엘리노어 루스벨트 부인 등 저명인사는 물론 각종 보도기관의 중공 특파원 파견요청을 거부했다. 반중공정책으로 유명한 덜레스 국무장관은 중공 방문은 법률위반이라고 우겼다. 해리만은 중공 측의 사증을 받았지만 국무성의 여권발행 거부에 부딪히고 정부의 압력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방중(訪中) 자격을 일반시민 또는 정치인이 아니라 국무성에 불법조항이 없는 특파원 자격으로 신청했으나 그것도 기각당했다.


중공 방문을 뒤에서 운동한 몇몇 신문사와 출판사는 덜레스 장관의 요청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불러 압력을 가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 본토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혁명에 관해서 미국인들이 직접 또는 미국 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미국의 충실한 반공동맹국가의 시민들이 뉴스를 듣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견해가 여기서 나온다.


‘죽의 장막’이라고 미국 정부가 부르는 장벽을 넘어서 들어가보려는 미국 언론계의 압력이 날로 강해지자 덜레스 국무장관도 1957년에는 마지못해 중공에 특파원을 보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보도기관 명단을 만들었다.


이 조치에 따라 그 보도기관들이 중공 정부에 사증을 요구했다.


중공 정부는 그들을 언제라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미국인 특파원의 수만큼 중공 특파원의 미국 방문을 허가하라고 미국 정부에 제의하기까지 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 호혜적 제의를 일축했다. 그는 미국의 이민법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사증 발급을 금지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때 소련이나 동구공산국가의 특파원들은 미국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초 이민법 규정을 우회하여 일정수의 중공 기자의 입국허가를 고려하겠다고 말했으나 그것은 이미 중공 측이 미국 정부의 호혜적 기자 교환 거부 때문에 기자 교환은 불필요하다는 발표를 하고 난 뒤였다.


최근 갑자기 미국과 중공 관계의 ‘해빙’과 급속도의 ‘접근’을 이룩하는 데 막후역할을 담당한 유명한 중국통 에드가 스노조차 중공 정권 이후 중국 대륙을 두 번 방문하는 데 미국 정부의 온갖 방해와 압력을 받고 한 번 신청한 후 정부의 마지못한 허가가 나올때까지 몇 해씩이나 걸렸던 사실을 실토했다(Edgar Snow, The Other Side of River: Red China Today, 서문).


그러고 보면 외국인에게 중국 본토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려한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사실과 멀고, 미국과의 경우는 적어도 어느 한쪽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중공이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고립’하려 한다는 신화도 이와 비슷한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파헤쳐보면 반드시 사실이 아님을 알수 있다.


 


대륙정권의 ‘합법성’여부 문제


 


‘죽의 장막’시비를 넘어서 대륙에 들어온 외국인은 중국혁명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싫건 좋건 20여 년간의 혁명을 통해서 1949년 10월 1일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정권하에 들어온 것이다.


이 정권에 대해서는 특히 긍정ㆍ부정의 양론이 여태까지 들끓어 왔다. 한쪽에서는 이 정권이 그 당시 5억 중국 인민을 폭력과 사기술과 대량학살 등 온갖 불법적ㆍ비인도적 방법으로 장악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던 장개석 총통의 중화민국을 전복했으므로 불법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반대론자들은 “모택동의 공산혁명은 5천 년 역사를 통해 중국 대륙에 반복되어온 농민혁명의 최종적 결실이며, 폭군적으로 통치하던 장개석 정권의 철저한 부패와 무능, 그리고 인민지지의 상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설명한다.


혁명에 ‘합법성’여부의 시비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하여간 시비는 지금도 그치질 않는다(최근에는 전자의 입장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급속히 그 이론적 타당성을 상실해가고 있지만—하기는 미국 대통령조차 금년 들어서부터는 종래의 공식용어이던 ‘중공’이나 ‘대륙중국’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일단 이 시비는 고비를 넘긴 듯하다).


현 중공 정권 지도자들이 어떤 신념과 희생과 행동으로 방대한 영토와 인민을 통일하게 되었는가 하는 긴 세월의 투쟁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대립적 신화의 어느 한쪽 신자(信者)들의 말만으로는 부적당하다. 중국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속에서 수천 년을 두고 빈곤과 억압만을 알고 살아온 중국 인민의 생활상을 살펴봐야 이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자기가 사는 체제나 자기가 믿고 있는 이념과의 원근(遠近)관계에서 무작정 긍정하거나 부인하는 태도이겠다.


그러기에 우리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 혁명을 불신하고 싶은 경향이 있는 미국의 권위 있는 학자ㆍ전문가 들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유와 그것이 딴 곳에 미칠 영향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친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성공을 설명할 이유는 무수히 있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를 몇 가지만 든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중국 대륙에 혁명조건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 중ㆍ일전쟁입니다.


또 하나는 중국을 좀먹고 있던 봉건지주제, 인플레이션 또는 부패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인민대중의 굳건한 지지를 받을 만한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효과적인 정책ㆍ계획을 창조하고 실천하거나 그럼으로써 국민대중과 그들 세력 자체 내의 단결을 이룩하는 데 비공산세력의 지도자들(장개석 등)이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비공산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실정(失政)이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할 진공상태를 조성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을 만큼 기강과 도덕적 무장이 확고하고 강력한 혁명조직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토대에서 내셔널리즘의 시대적 요구에 호응하고 특히 항일전쟁 기간 중민중의 숙원인 사회개혁에 성의를 다했을 뿐 아니라, 유능한 혁명전략을 발전시키고 모든 개혁을 단호하게, 만약 필요하다면 무자비하게라도 추진ㆍ성취시킨 점에서 공산주의자들 스스로의 성공을 들어야겠습니다(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본토 중국에 대한 미국정책’청문회 의사록, 617쪽, 1966.3.8,컬럼비아대학 동아시아연구소장 도크 A. 바네트 교수 증언).


 


 


이와 비슷한 견해는 미국 의회사상 최대의 학술적 청문회라고 알려진 이 중공관계 청문회에 나온 거의 모든 저명한 미국 학자ㆍ전문가 들이 표명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의 긴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1921년 소수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의 강압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치고 30년의 고투 끝에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 이르는 역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 역사에서 미증유의 사건이다.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은 진승(陳勝)ㆍ오광(吳廣)의 봉기로 시작되는 중국 역대의 무수한 농민봉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1851년 광서(廣西)의 한 귀퉁이에서 거병하여 53년 남경(南京)을 점령하여 도(都)를 설(設)하고, 한때는 북경에까지 이르러 청조(淸朝)에 대충격을 주고 64년까지 11년간 장강(長江) 이남의 지구를 지배했던 태평천국(太平天國)과는 직접적으로 피를 통하고 있다.


중국의 농민은 언제나 농민폭동으로 왕조를 쓰러뜨리기는 했으나 그 뒤에 농민 스스로의 힘에 의한 정권을 세우거나 중국을 영속적으로 통치하는 정부를 만드는 데는 언제나 실패했다. ……농민들은 언제나 얼마 안 가서 본래의 통치계급에 자리를 물려주고 말았다. 농민의 아들이며 중국의 사서(史書)를 애독한 모택동은 농민 정권을 지키고 그와 같은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고 깊이 믿고 있는 듯싶다(貝塚茂樹, 『中國の歷史』하권, 184쪽).


 


 


이와 비슷한 견해는 역시 아이작 도이처가 그의『미완의 혁명─소련혁명 50년』의 ‘소련혁명과 중국혁명’장에서, 그리고 오웬 라티모어가그의 유명한 저서『중국사 개관』(China: A Short History)의 제4부 ‘중국과 근대사회’제2장에서 피력하고 있다.


 


새로운 인간형—중국인?


 


이와 같은 지도자들이 수년 전에 시작해 아직 완전히 끝을 내지 못하고 있는 대소동을 벌였다.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대중운동은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약 5년 동안 신문과 잡지에서 거의 매일같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모두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중국 8억 인민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활동 전면에 걸친 대수술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걷잡을 수 없이 엇갈려 있다. 워낙 외부사회의 체제나 이념 및 관념과는 다른데다가 중공에 대한 호의와 혐오의 입장에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그 긍정적 의미와 성공을 믿었던 것은 모택동과 그의 철학을 따르는 ‘조반’(造反)파밖에 없었다. 같은 사회주의국가들도 고작 해야 회의적 태도를 보여왔으며 이것으로 해서 중공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국가 사회 속에서도 고립ㆍ배척되었다. 반공주의적 국가나 학자ㆍ전문가 들은 문화혁명이라는 소용돌이가 중공 정권과 중공식 체제의 파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홍위병(紅衛兵)으로 대표된 문화대혁명은 대체로 중공 지도자들의 권력투쟁, 인간성 파괴, 야만적 문명말살, 정치적 반동, 강제된 개인숭배 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각각의 측면도 있고 그 전부일 수도 있겠다.


그것은 너무나도 큰 인간의 실험이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운동이기에 역사적으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도 시기상조라는 감이 있다. 긍정적인 입장도 부정적인 입장도 뭐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도 전례가 없는 크고 복잡한 실험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① 자본주의적 역사와 조건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개조하여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들자는 것과 ② 계급분화의 여러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평등한 인간생활을 보장ㆍ발전시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자는 것. 이 두 목적을 모택동은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발전적 전개라고 주장하는 모택동과 마르크스– 레닌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바바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은 바로 이 운동을 보는 대표적 견해다. 그 대표적 측면을 살펴보자.


 


인간개조적 실험의 측면


 


공산주의 권력으로 이루어진 경제발전과 그것으로 인해서 변화한 여러 조건 사이에 생긴 새로운 모순 또는 갈등에서 ‘인간의 문제’가 생겼다. 중국의 대명사였던 기아가 없어지고 일반적 생활수준의 향상, 문맹의 제거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이루어진 생산의 근대화, 과학ㆍ공업기술의 생활화, 급속한 공업화에 수반하는 도시인의 증가 등은 현재의 지도자들이 이상으로 삼는 연안(延安) 게릴라시대의 인간형과 현대적 생산의 현실과의 사이에 모순을 가져왔다.


연안시대적 인간형의 기본적인 강점은 철저한 평등ㆍ우애ㆍ동지애ㆍ자기희생ㆍ전체에 대한 봉사 그리고 극단적인 절약이었다.


또 중국은 관료주의와 대가족주의 사회로서 그것은 그 전까지는 중국 사회의 안정 요소이면서 동시에 극단적인 부패 요소이기도 했다. 모택동은 이 자기중심적인 가족주의의 탈피를 새 중국의 토대로 삼으려 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이기주의ㆍ출세주의ㆍ특권의식의 토대인 관료 및 특권계급화의 요소를 없애버림으로써, 이른바 소부르주아적 사상을 8억 인민 하나하나의 머리에서 절멸시키려는 노력인 듯도 하다.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물질제일주의와 인간제일주의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생산이 우선하느냐 정치가 우선하느냐의 오랜 과제에 대한 모택동의 답변이라고도 할수 있다. 이것은 소련 사회주의운동을 대표하는 스탈린과 중국의 그것을 대표하는 모택동의 기본적인 철학적 대립을 말해주기도 한다.


스탈린은 소련혁명 19년 만인 1936년,신헌법을 발표하면서 “이제 소련에서는 완전히 계급이 사라졌다”고 호언했다. 스탈린 사회주의의 특징은 기본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이루어지면 계급은 없어진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절대적 신뢰를 두었고 그 토대 위에서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확신했으며,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물질우선주의를 믿었다. 그에게 인간의 사상혁명은 부수적이고 자동적인 것이었다. 즉 스탈린은 기구개혁론자였다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이 점에서 스탈린과 기본적으로 대립한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옮겨 앉은 사회의 인간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나 생산의 증가로 자동적으로 개조될 수 없는 구사회의 사상과 습관과 타성을 그대로 장기간 지니게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기적 욕구는 뿌리 깊은 것이어서 노동자와 농민의 사상적 혁명을 기구적 혁명과 별도로 거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로의 역행충동이 우월해질 위험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무산계급의 계급적 독재를 그 내부에서 붕괴하는 힘이라고 그는 경계한다. 이것이 현재 악화하고 있는 중소 대립의 밑바닥에 깔린 기본적 사상의 차이이기도 하다.


 


유소기 대 모택동의 권력투쟁


 


생산이우선하느냐인간혁명이우선하느냐의 양자택일적 문제에서 유소기는 스탈린에 따라 전자를, 모택동은 후자를 택함으로써 급기야 문화대혁명은 유–모의 권력투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물질제일주의의 입장에 선 유소기는 생산력발전으로 인간의 사상개조가 촉진된다는 이유와 중공의 급속한 공업발전 그 자체의 긴급성 때문에 농촌에서는 사유지ㆍ생산이윤 등의 물질적 자극 방법을 확대했다. 공업분야에서는 전문가와 기술자 대우, 노동자의 종속, 관리인 중심의 경영제도, 41종에 달하는 보너스제의 도입 등 바로 현재의 소련식 방법을 취했다. 그 결과 단기적으로는 생산증가에 도움이 되었으나 노동자 농민의 자본주의적 이기사상이라는 역행현상을 심화하는 과정을 촉진했다고 모택동은 비난했다. 이에 대항한 모택동은 혁명=인간개혁을 촉진하는 것으로 문화대혁명이라는 4년간에 걸친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이기심이 동기가 되지 않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하여금 혁명과 생산이라는 과제를 양자 통일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혁명으로 현대적 공업에서 어느 만큼의 생산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은 두고 봐야 할 숙제이겠다.


또 생산의욕이 높아진다 해도 그것이 과연 영속할 것인가를 서방 학자들은 회의하고 있다. 작년 말 에드가 스노의 이와 같은 회의에 대해서 주은래 수상은 그 긍정적인 결과를 강조하면서 혁명의 선행이 옳다는 것이 생산의 증가로 입증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아사히신문』, 4월11일, 에드가스노, 「중국방문기」).


 


사회와 인간과 사상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했으나 공업화를 못 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혁명은 못 했다. 모택동은 공업화와 인간혁명을 아울러 하고 있다”는 말을 한 서방세계의 평자가 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두고 봐야 할 문제로서 이 시점에서 가부를 속단하는 것은 위험할 것 같다.


그러나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 중공 방문을 마치고 나온 영ㆍ미ㆍ호주ㆍ서독 등의 탁구 선수들 또는 기자들의 방문기는 그 엄청난 변화를 보도하고 있다. 사실인즉 그와 같은 변화와 개혁은 미국 기자들만이 못 보았을 뿐이지 그 외 세계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그러면 어떤 변화가 있었으며 그것은 어떤 뜻을 가지는 것일까.


한국과 같이 작은 나라를 견문하고 돌아간 외국 특파원이나 관광객의 글에서도 견해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으로 같은 서방사회에 속하고 경제ㆍ문화적으로 자본주의체제의 국가에서 왔다간 경우도 그렇다. 하물며 문화가 다른 동ㆍ서의 양(洋)을 격하여 정치ㆍ경제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인 체제하의 특파원이나 관광객이 중공 사회의 변화를 보고 느끼는 시각과 결론은 같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중공이라는 거대한 사회와 국가와 국민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또 무익하겠다. 차라리 그 속에 들어가서 직면하게 되는 몇 가지 분야에서 전형적인 가치관을 골라 상이한 평가와 견해를 통해서 어떤 포인트오브 뷰(관점) 같은 것을 가져보라고 시도함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교육과 인텔리


 


최근 중공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미국 탁구선수단이 북경의 명문 청화(淸華)대학을 살핀 방문기 가운데 학생들이 스스로 전자계산기를 조립하고 있는 광경이 나온다. 자기 자신이 미국 대학의 전자공학 기술자인 이 선수는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그런 것을 학교 실습 과정에서 만들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중공의 대학은 대학인가 공장인가라는 회의와 비판이 많다. 또 중공의 대학은 “정치 선전ㆍ선동과 교육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평도 있다.


반면 중공 지도자들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은 모두 교육의 일면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공의 대학은 이 양자가 각각 일면씩만을 강조하는 측면을 종합한 ‘지식교육ㆍ정치훈련ㆍ육체노동’의 3자를 통튼 형식과 기능이다. 청화대학생들이 문화대혁명의 첫 봉화를 올려 홍위병운동의 막을 연 것이 그 정치적 실천이고, 중공 사회 각 분야의 지적 지도자로 양성되는 것이 그 본래적 교육이고,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공장에서 전자계산기를 직접 만드는 것은 ‘실습’이기보다는 ‘육체노동’으로서 3자가 결합되는 중공 대학교육의 내용이라 한다.


교육의 목적은 이론만 아는 인텔리나 이론적 전문가를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정치적 실천자가 되고 대중과 유리되지 않고 노동을 통해서 노동자와 인텔리의 사상적ㆍ계급적 차별을 해소하는 데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소학생은 1주 3시간에서 6시간 학교의 작업장이나 농장에서 노동을 배운다. 중학생은 1주 8시간에서 10시간 노동하며, 대학생은 전공에 따라 3분류되지만 대체로 1년에 1개월 휴가, 4개월 현장노동, 7개월 교실수업의 제도다.


4개월 노동기간 중 공학과 학생은 댐ㆍ교량ㆍ발전소 등의 기계 제작 또는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지질학과 학생은 광산에서, 의학부 학생은 농촌의료소 또는 공장병원에서 노동한다. 그밖의 학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교수들도 역시 노동의 의무가 있어 전문분야에서 학생들과 같이 노동해야 하지만 이론만 아는 인텔리를 사상적으로 개조하기 위해 가장 천한 노동으로 돌려지는 수도 있다. 가령 미생물학자가 농촌에 가서 변소를 푸는 일 따위다. 이런 노동이 얼마만한 성과를 가져오느냐에 대해서 서방학자들은 비웃고 비판적이다. 반대로 중공 학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노동을 존경할 줄 알게 되고 육체노동을 비천한 것으로 생각하는 ‘선민적 인텔리’사상을 없애며 특권계급 의식을 뿌리뽑게 된다고 주장한다.


‘지식인은 노동자가 되고 노동자는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중공 교육의 구호다. 목표와 목적은 지식인을 노동자의 수준으로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림으로써 ‘두뇌지식인’과 ‘육체노동자’를 정신적ㆍ사상적으로 융합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공장ㆍ농촌의 노동자와 농민들 그리고 군대의 병사들 가운데서 선발된 사람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실제로 대학생은 노동자나 병사나 농민들이라는 말이 된다.


한 예로 미국 탁구선수들이 방문한 청화대학의 학생 직업성분은 노동자 45퍼센트, 농민 40퍼센트, 병사 15퍼센트라고 한다(아르베르토야코비에로, 『世界週報』, 1971.2.23).


말하자면 등록금을 내고 강의실을 직장으로 삼는 ‘직업적 학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대학생은 바로 노동자이고 대학은 바로 노동자의 고등교육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이 노동자ㆍ농민ㆍ병사의 3종류 학생이 이른바 ‘3결합’을 형성하고 이들과 교수 및 혁명위원회로 구성되는 ‘3결합’이 학교를 운영한다.


학업 평점도 답안을 쓰는 시험제도가 아니라 전인격적 활동을 학생들끼리 상호평가한다. 졸업장 같은 것은 없으며 그 대신 학생의 정치적 능력, 노동에 대한 태도, 여러 작품의 질 등에 관한 일종의 증명서를 받게 된다.


직업선택, 즉 취직선택의 권리가 학생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 지역사회의 요구에 응한다는 점을 들어 그 폐단을 강조하는 서방 세계의 평도 있다. 반면 모든 교육이 무료이며 생활비까지 지급받는 이상,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공헌을 모든 개인의 의무와 기쁨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논자도 있다.


 


전문가의 권위주의와 과학적 신비주의


 


모든 사회활동은 현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분업ㆍ전문화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또 필연적으로 전문가가 생기고 그것은 과학ㆍ기술을 독점하게 됨으로써 전문가의 권위주의를 낳고 일반 노동자나 농민에게는 과학ㆍ기술에 대한 신비주의를 갖게 한다. 모택동 일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윤추구ㆍ출세주의가 질서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전문가는 과학과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노동자나 농민의 전문적 향상을 저지하여 권위주의와 신비주의에 올라타고 특권적 지위를 영속화하려 한다.”


중공의 직장제도는 능력과 자질이 있는 하급노동자를 상부 교육ㆍ훈련기관에 추천, 고등기술의 습득을 장려함으로써 일부 사람들에 의한 과학과 기술의 독점을 깨고 높은 과학과 기술 및 관리 지식을 대중화하려는 정책을 쓰고 있다.


이것은 전문가와 노동자의 종속적 관계를 타파하고 관료주의 직장에서의 상하위계질서를 해체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또 그 필연적인 결과인 소수의 지식인과 대중의 사회적ㆍ문화적 대립을 해소하려는 노력으로 알려져 있다.


단기적 견지에서 생산능력을 올리기 위해 자본주의 경영방식으로 극단적인 전문화와 기술적 위계질서의 강화, 전문가와 노동자의 보수계층 확대 등 조치가 유소기 시대에 촉진되었다고 한다.


모든 실권은 고급관리인ㆍ전문가 들에 집중되고 하급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이 사회화되었음에도 그 운영이나 결정권에 참여할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었다고 모택동 일파는 주장한다.


문화혁명은 이와 같은 과학ㆍ기술적 특권화를 타파하기 위해 유소기 방식에 대한 반격을 했다. 대비판운동을 통해서 당ㆍ행정ㆍ공장ㆍ인민공사 등 모든 분야에서 간부와 노동자대중을 밀착시키는 기능이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구적으로는 한 예로, 공장관리자가 노동자와 격리된 독방 사무실을 쓰고 있던 것을 폐지, 관리자실을 폐쇄해버리고 소음으로 귀가 찢어질 듯한 공장의 한구석에 책상을 놓고 나와 앉아 있더라는 목격기가 있다(菊池昌典, 『朝日ヂャ-ナル』, 1968.5.5).


이렇게까지 해서 이루어지는 특권화ㆍ관료주의화의 타파가 실제로 사상적 향상만큼 생산적 향상에도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것을 회의하는 견해가 강하다. 그러나 중공에서는 소련의 혹심한 관료주의화의 폐단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를 깔고 앉는 특권화ㆍ관료화는 그것이 설사 생산에는 일시적으로 도움이 된다 해도 모든 인민을 직장ㆍ사회ㆍ국가의 진정한 주인으로 참여시키며, 인간적 평등의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장기적인 목표에서 후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련에서는 같은 공장의 미숙련 공장노동자와 최고기술자ㆍ관리인의 봉급이 최고 13배의 차가 있다고 한다(알렉산더 워스, Khrushchev Phase: Fear and Hope, 1968). 스탈린도 이 특권화ㆍ관료화에 대해서는 30년 전 이미 고심한 듯하며 제1차 공산당대회(1934)에서 그 문제를 중시, 특별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그의 대책은 자기비판, 노동자의 당강령 실행운동 동원,경제기관 정원의 감축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스탈린은 “인물을 잘 고르면 해결된다”는 인간적 차원에서 머물렀고, 흐루시초프 이후의 현재 소련에서는 그 현상이 해소되기는커녕 심화 또는 계획적으로 촉진되고 있는 경향도 있다(같은 책). 밀로반 질라스가『새 계급』에서 비판한 것이 바로 이것으로 믿어진다.


생산우선주의ㆍ물질제일주의는 필연적으로 이 경향을 낳게 마련이며 모택동이 소련 사회를 자본주의화 또는 수정주의로 규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택동은 ‘인물의 선택’보다 사회적 조건의 개혁으로 근본적인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전문가ㆍ관리인들에 대한 하급노동자의 자유스러운 공개비판, 노동자의 고급 과학ㆍ기술 습득을 통한 과학신비주의의 타파, 전문가ㆍ관리인들의 육체노동을 통한 권위의식 제거, 노동자의 집단적 경영정책 결정 등으로 그것을 보장하려 하고 있다.


인간우선과 물질우선이라는 두 개의 가치관은 중공 사회의 그밖의 여러 측면을 파악하는 기본적 관점을 제공한다.


 


의학(醫學) — 누구를 위한 것?


 


인간 생존의 기본문제로 의ㆍ식ㆍ주 문제가 해결된 인민에게 남는 것은 의료(醫療)와 교육이겠다. 교육은 앞에서 보았다.


중공을 방문한 유럽이나 아시아 공산국가의 의사 또는 특파원들은 파리ㆍ쥐ㆍ모기 등의 매개(媒介)는 물론, 거의 모든 전염병이 대륙에서 사라졌다는 보고를 하는 데 일치하고 있다. 그들의 글은 엄청난 의학과 의료시설의 발전을 말한 뒤에 반드시 중공의 의료 제도가 ‘질보다도 양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과 서양의학에 못지않게 ‘이상한’전통적 한방의학과 침술을 중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과학성에 회의를 표시하고 있음을 본다.


이들 외부인사들의 회의는 중공 의료제도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의학의 대중노선’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양의학(洋醫學)과 전통의학의 병진’이라는 독특한 사상이다.


 


(1) 의학의 대중노선


중공의 보도들은 끊어진 손목을 유착시켰다는 새로운 의학적 업적을 최근 자주 내보내고 있다. 반면 서방국가에서 그토록 발달한 뇌수술이니 인공심장이니 그밖의 고도의 의료수준과 엄청난 비용을 말해주는 특수의학은 거의 보잘것없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이에 대한 중공 사회의 답변은 이렇다. 의학이란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50세로 죽을 것을 51세까지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수 많은 고귀한 두뇌와 거액의 돈을 쓸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어쩌면 51세까지 살지도 모를 생명을 50세에 버려야 하는 가난한 대중의 전반적 치료와 보건을 위한 인간의 기술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중공 의학과 의료정책의 최고지도자인 마해덕(馬海德, 연안시대부터 혁명에 가담한 미국인 의사)도 시인하듯이, 중공의 의학과 의료는 8억 인민에게 만족스러운 치료를 다하기에는 아직 요원하다(스트롱, 「북경에서의편지」, 제13편).


그러나 한편 이미 1957년 중공을 시찰한 9명의 영국 의사들은 중공의 대중 의료ㆍ위생사업은 ‘대중노선’의 어떤 분야에서는 영국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와 숫자를 들면서 확인하고 있다.


즉 중공 의학과 보건정책은 소수의 부자(있는지 알 수 없지만)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비참했던 중국 대중에게 현대적이고 기초적인 의학의 혜택을 무료로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최근 중공당국은 중국의 양의사 수는 40만 명으로 도시와 농촌 인민공사에 고루 배치되었고 5만 명의 의사가 전국의 담당지역에서 순회의료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미합중국 위생국의 윌리엄 Y. 체인 박사가 대륙중국은 전 인민을 위한 ‘최저 표준’으로서 인구 1,500명당 의사 1명, 병상 5개를 기준으로 잡아 중국 전체에서 46만 명의 의사가 필요할 것이라고 수년 전에 계산한 그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중공에는, 서방사회 일부에서는 웃음거리가 되고(예를 들어, 빈의『쿠리에』지 주필 후고 포르취(Hugo Portsch)의『중공방문기』(Red China Today), 22장), 반면 중공은 세계에서 최초의 시도라고 하는 ‘맨발 의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인민공사의 노동자이면서 2년 정도의 의학 교육과 훈련을 ‘노동하면서 공부하여’또 ‘노동하면서 병을 고치는’노동자와 의사의 통일체 같은 것이다. 그는 그의 공사(公社)에 사는 모든 대중에게 가능하면 자기 수준의 의료ㆍ보건지식을 교육하고 대중화해야 할 의무도 지니고 있다. 의학 지식과 기술도 누구의 독점물이나 이윤추구의 도구가 될수 없으며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 목적을 위해 의과대학은 문혁(文革) 기간 중 4년 또는 5년 과정에서 2년으로 단축되고 농촌과 도시 복무를 마친 후 고등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모택동,「공중 보건에 관한 지시」, 1969.6).


78세의 모택동이나 임표가 심장병 또는 뇌 고장을 일으킨다면 그들은 인공심장으로 1년은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그런 ‘특권적 의학’에 쓰여졌을지도 모르는 두뇌와 자원과 돈으로 이루어진 ‘대중노선 의학’은 8억 대중을 전염병과 일반적 질환에서 해방했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들의 계급의식은 의학에서도 ‘계급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2) 한방의학


중공은 모든 전통적ㆍ재래적 문화와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는 비난이 많다. 예를 들면, 사찰을 헐어 공회당으로 쓴다느니, 4천 년 역사의 문화를 가진 한자(漢字)를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이 약자화 했다느니 하는 주장들이다.


서방의 많은 비평가들은 중국의 문화는 그들의 것이면서 동시에 전 인류의 것이므로 마음대로 변형ㆍ파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공은 모든 전통문화의 파괴자라고 낙인찍는다. 대체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공을 직접 방문해보지 못한 사람들인 것도 공통적이다.


반면, 동ㆍ서양의 학자들이나 특파원들의 방문기는 중공만큼 전통적 문화와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국민은 아마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만든다. 다만 문화라는 것을 소수의 지배자나 특권계급의 독점ㆍ향유물적 성격에서 대중의 것으로 바꾸고 가꾸려는 새로운 문화노선이 다를 뿐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전통을 살리는 한 좋은 예는 한방의학(한약ㆍ뜸ㆍ침술)의 발전이겠다. 이것은 ‘서양의학의 이론과 기술을 중국 전래의 그것과 결합ㆍ발전’시키려는 노력이다.


1958년 이후 양의학 전공 의사는 반드시 6개월의 한의학 연구를 하게 되었다. 한의학의 학술적 중심인 ‘북경 협화(協和)의학원’


은 양의의 한의적 교육기관이며, 전국에는 그 지부연구원이 설치되어 있으며 현대적 양의 기술과 지식을 흡수ㆍ발전시킨 한방의학의 현대적 병원은 전국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도되어 있다.


양의학과 한의학을 ‘변증법적으로 결합ㆍ고양’시킨다는 중공의 의료제도와 의사의 기본사상이 서구 현대의학과 어떻게 비교될지, 그 과학적 공헌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하여간 의학이나 의사는 환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환자가 의학이나 의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상과 실천노선을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사가 여태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아온 기본이념은 도시나 돈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5억의 빈민농이 있다. 대중복지와 무관한 엄청난 인적자원과 재력이 이른바 고등의학연구라는 이름의사업에 낭비돼왔다. 중국의 의학과 의료의 과제는 앞으로 중국 대중 속에 발생하는 대중적인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이다(「대중보건사업에 관한 지시」, 1965.6).


 


 


재미있는 것은 흔히 모택동 사상이라는 것이 어떤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대중과 대중 속에서의 실천적 관계 및 사상적 자세를 말하는 구체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의사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은 보여준다.


 


 


……또 한 가지 우스운 일이 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 또는 치료할 때 그들은 마스크를 낀다. 이것은 의사가 자기의 질병이 상대방에 전염될 것을 두려워해서인가? 사실은 아마도 환자의 병이 자기에게 전염될까 두려워서라고 나는 상상한다. 이런 습관은 당장에 집어치워져야 한다. 의사가 마스크를 낀다는 것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 장벽을 쌓는다는 것을 뜻한다(같은 글).


 


 


비과학적이랄 수도 있고 정신우선주의일 수도 있다. 하여간 모든 문제에서 그 사회가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


 


개인숭배


 


중공 사회를 밑바닥에서 꿰뚫고 흐르는 사상과 이념을 대충 훑어본 외국인에게 남는 가장 큰 불가사의는 소위 모택동 ‘개인숭배’라는 것이겠다.


우리가 개인숭배라는 표현으로 느끼는 감정은 무엇보다도 서구 민주주의의 정치ㆍ윤리ㆍ도덕 관념과 배치되는, 상대적인 ‘개인적 존재’의 부정 같은 것이다.


개인숭배는 숭배대상의 ‘무류성’(無膠性, infallibility)을 전제하거나 수반하는 것으로 개인숭배악의 시조가 되어 있는 스탈린에 앞서 로마 교황의 초월적 존재가 있어왔고, 그것은 서양 사상과 생활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종교적 측면이다. 스탈린은 정치적 의미의 최초의 신이었다.


주로 정치적 의미와 차원에서 개인숭배가 혐오되는 이유는 스탈린의 개인독재에 대한 연상 때문이라 하겠다. 스탈린 숭배는 소련 혁명의 과정, 특히 레닌이 사망한 후 1930년대의 당 내 권력투쟁과 국제정세의 긴박화로 모든 국가적 권력을 바로 스탈린 자신 ‘한사람’이 장악하게 된 데서 그 가장 추악한 일면을 드러냈다. 지도자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무류성이 권력을 가지고 조작되었다.


스탈린 사망 후 그의 시체가 묘지에서 파헤쳐져 어디론지 내동댕이쳐진 것은 조작된 개인숭배의 말로를 말해준다. 특히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와 대립관계에 선 서구의 정치선전이 그 추악성을 더한층 소름끼치는 것으로 일면화한 것도 사실이다.


모택동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이 적용되고, 스탈린에게 쓰인 같은 표현으로 해서 바로 그와 같은 감정이 복사ㆍ재생되어 나온다. 그와 같은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중국 인민의 모택동에 대한 감정을 정치적으로는 스탈린식 개인독재, 도덕ㆍ윤리적으로는 인간성의 말살 현상으로 보는 부정적 견해가 있다.


한편 그와 같은 위험성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현재 중국의 정치와 생활태도를 서구식 일반 정치이념으로 일률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 논자는 한 민족의 정치형태와 생활태도는 그 민족 스스로의 경험 속에서 이해하고 판단할 것이지 특수한 경험 없이는 이해조차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중국처럼 장구한 세월의 정치적 억압과 빈곤과 인간적 비참의 역사를 살아온 민중에게는 생물학적ㆍ인간적 존재의 기본조건을 처음으로 해결해준 지도자와 그 인간에 대한 감정은 숭배에 가까운 ‘거의 절대적인 존경’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취한다.


서구사고를 토대로 하는 견해와의 차이는 바로 중공의 경제체제와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 서구 특히 현재의 미국식 사고는 “개인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 전체의 최대이익이 이루어진다”는 경쟁경제제도에 대응하는 개인주의 정치도덕 사상이다. 이 가치체계에서는 개인이 지상이며 그 개인을 딴 개인에 종속시키는 가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중공 경제는 사회주의체제라는 것 이상으로 앞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개인의 경쟁이 아니라 ‘전체의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사회 속에서의 개인은 돈을 먼저 많이 차지하려는 적이 아니며, 상대방보다 먼저 출세하려는 이기적 경쟁상대가 아니라 전체의 복지 이상으로 개인복지가 있을 수 없다는 전체주의적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질적 사회에 딴 이질적 사회의 윤리ㆍ가치를 적용한다는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견해가 있다.


중국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에서는 유덕(有德)한 인간이 천(天)의 명(命)을 받아 천하를 다스린다. 덕을 잃으면 왕은 혁(革, 革命)된다. 중국인은 이것을 실천해왔으며 덕치(德治)의 지배자에게는 마땅한 존경을 보낸다. 모택동이 과거 중국 역사상의 치자보다는 유덕자가 아니냐는 데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입장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다.


그러나 중국 대중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숭배나 존경은 중국인으로서 순수하고 자연발생적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남은 문제는 모택동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여태까지 그에게 직접 물어본 사람이 없었으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작년 10월, 외부세계에서 궁금히 여기는 이 문제를 에드가 스노가 모택동 자신에게 물었다. 스노가 10월 1일 건국기념일에 모택동의 거실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건물밖 천안문 광장을 누비는 군중이 ‘모택동 주석 만세’를 외치며 끝없이 행진하고 있었다. 스노가 “저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기분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극히 솔직하게 “번거로운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스노는 중공이 처한 현 역사적 단계에서는 이것이 불가피한 하나의 ‘필요악’으로 그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는 인상을 적고 있다. 물론 모택동의 심중은 그만이 아는 일이라 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숭배라고 하지만 약간 다른 데가 있다. 스탈린은 당과 정부로 구성되는 관료화된 권력체제의 거대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관료적 방법으로 숭배를 강요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휘한 당 관료기구를 타파함으로써 민중과 자기를 직결시켰다. 차이는 이것이다.


 


강제노동수용소?


 


이밖에도 중공의 모습과 그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검토하고 그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의 시각 조절작업이 필요하다.


중공은 기본적으로 경제발전을 외부의 차관이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 인민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공이 외부로부터의 차관ㆍ기술ㆍ물질 등의 원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1960년 소련과의 이념대립이 격화됐을 때 흐루시초프가 중공과의 협정에 의해서 중공에 파견했던 343건의 대규모 공장 및 건설공사의 모든 청사진과 물자 및 기계를 깡그리 철수시키고, 1,390명의 과학자ㆍ기술자 들을 예고도 없이 소환해버린 보복 행위를 통해 외국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했다. 그 결과는 대약진운동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같은 사회주의 동맹국가가 그렇다면, 자본주의국가들의 지원이나 협조는 중국의 민족적 자존심과 주권의 포기 없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1966년, 한국전쟁 개입시 전쟁비용으로 소련에게 빌렸던 원리금 합계 14억 600만 달러의 빚을 완전히 갚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이 외부의 의존 없이 자력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는 데서 연안시대의 자기희생적인 혁명정신에 대한 강조가 이해된다. ‘강제노동수용소’라는 외부세계의 평(로베르 기랑)은 민중의 그와 같은 자각에 입각하여 별다른 현대적 기계설비도 없이 순전히 스스로의 창안과 절약과 집단적 노동으로 방대한 건설을 이룩해야 했던 초기의 긴박한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중공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현대화를 모든 분야에서 이룩하기까지 집단노동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을 ‘강제노동’이라고 봐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첫째는 중국 인민의 입장에 설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둘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계관의 문제겠다.


 


모택동 사상


 


이와 같은 자력갱생의 정신적 토대로서, 때로는 방법론으로서 모택동 사상이라는 것을 중공은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한 평가 견해도 가지가지다.


일부에서는 그것은 모택동을 우상화하기 위한 ‘신학적 교리’로 우민정책의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일부에서는 그것은 중국 인민들에게 혁명정신과 계급투쟁을 위한 기본적인 사상훈련 및 무장을 가르치고,백지와 같은 경제적 상태에서 급속한 현대화를 독력으로 이룩하기 위해 창안ㆍ인내ㆍ협동으로 온갖 것을 생산해내려는 극히 구체적인, 때로는 우화적인 방법론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테면 소련 기술자들이 철수한 뒤에 청사진도 기계도 없이 남은 것을 긁어모아 소련 기술자가 예정했던 것보다 훌륭한 6,000톤 프레스 기계를 마침내 생산했다든가 하는 그들의 주장은 실제의 생산과 사회 및 인간관계에서 민중을 그런 방식으로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화된 공업사회에서 그것이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할지는 회의적이기도 하다. 중공의 현실에서 20년의 짧은 기간에 세상에서 가장 몽매하고 게으른 민중을 불러일으켜 맨손으로 오늘의 공업화를 이룩하는 데는 그것대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언론과 문예의 자유 문제


 


아마도 중공 사회에 관한 가장 혹심한 비난은 언론과 문예활동의 자유라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언론이나 의사표시 자유의 문제는 그 사회의 독특한 상하 간 및 상호비판 방식의 차이나 일반적으로는 정치ㆍ경제적 부패의 존재 여부 및 성격에 따라 서구 ‘언론’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해서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극단적인 예나 가정을 가지고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은 어느 쪽의 신화를 믿는 사람에게나 무의미한 일이다. 문화혁명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일개 직공이 공장 최고책임자를, 한 학생이 대학총장을, 또는 일부에서는 모택동을 비판하는 대자보(大字報)도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 문제도 ‘언론ㆍ사상표시의 자유’를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어떤 기능을 예상하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사회의 언론자유 개념에 서는 사람은 중공에는 언론자유가 없다 하고, 반대로 그 사회의 정치적ㆍ사회적 개념에 서면 가장 훌륭한 언론과 의사표시의 자유를 가진 것은 중공의 민중이라고 반박한다. 이것도 의사표시의 수단에 대한 개념 차와 입장의 문제이겠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문예 특히 창작활동의 자유가 아닐까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중공에서는 추상ㆍ형이상학적ㆍ관념적 문예는 그것이 객관적 유희를 사치로 즐기는 소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배격하면서 민중의 생활과 무산자 혁명의 촉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무한한 정신적 향상과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단은 거부하는 것으로 문학론의 끊임없는 논쟁의 제목이 되어온 것이고 오늘의 소련이 그 진통을 겪고 있다.


중공 사회와 사상에 일반적으로는 동정적인 시몬 드 보부아르여사도 중공 방문기에서 이 문제는 중공 예술가들 일부에서도 진지하게 문제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소련에서 일반적 경제및 생활수준의 향상과 국가 안전보장에 자신이 생김으로써 자유로운 예술활동의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을 보면 중공에서도 앞으로 이 문제는 같은 현상을 보일 것이 아닌가 예상되고 있다.


다만, 그 사회의 예술가 자신들도 현재의 상태는 역사적 단계이며 항구ㆍ고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하니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흥미를 가지고 바라봐야 할 문제이겠다.


이밖에도 문제는 많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인류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대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대륙의 사회ㆍ인간ㆍ정신을 보는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해방되려는 기초작업이 선행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 『정경연구』, 197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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