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한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한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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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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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한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1974년, 전논), `


 


서론

70년대와 한국

대한민국의 국가적 안보와 국제사회에서의 위치는 1970년을 기해 중대한 전환기에 들어섰다. 70년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첫해에 닥쳐온 내외의 급격한 상황변화는 70년대를 통해서, 그리고 보다 장기적인 국제정세 변화의 결과로 대한민국의 국가적ㆍ국민적 장래와, 길게는 남북한 관계의 재구성이라는 형식으로 민족사에 하나의 중요한 변혁의 시기로 기록될 것 같다.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대사는 1970년 7월 6일 한국 정부에 주한 미군 병력의 일부 철수 결정을 정식으로 통고했다. 1945년 9월 8일, 일본 항복 후 점령군으로서 미국 군대의 제1진이 인천에 상륙하고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증강을 계속해 한국 안보체제의 기틀이 되어온 미군은 25년 만에 한국 방위의 직접적 책임을 벗기 시작했다. 애그뉴 미국 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 및 장차의 한미관계의 전반적 수정 문제를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협의하기 위해 내방(8월 24~26일)하고 돌아가면서, “주한미군 전 병력이 앞으로 5년 내에 철수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미국무성에 의해 확인되었다.
한미관계의 변화는 군사적인 면에 그치지 않는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미국 행정부는 1953년 휴전 이후만도 41억 달러를 제공해온 경제원조 총액 가운데 그 중추를 이루는 무상지원원조(약 18억 7,650만 달러)를 1970년을 마지막으로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원조의 나머지 부분인 PL480호(잉여농산물 원조)도 1971년말 또는 72년 초에 끊어질 예정이다.
정치ㆍ외교적 면에서 미국의 대한정책 수정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1969년 8월 21일 호놀룰루에서 있은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원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970년 봄에 있은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대외공약분위’(사이밍턴 위원회)에서는 ① 한국의 군사적 방위책임의 조속한 이양,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장기적 정책목표로서의 ② 남북한의 적대관계 개선을 통한 한반도의 긴장완화 및 ③ 남북한 관계의 장기적 해결을 돕기 위한 관계 주요국가들의 공동노력이 앞으로 미국의 대한정책 방침이 되었다.
군사ㆍ정치ㆍ경제ㆍ외교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은 70년대의 대한관계를 한마디로 ‘한반도의 긴장완화’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과 한반도 정세의 장래는 이 방향에서 새로 제시되어 이른바 닉슨 독트린의 시험적 적용을 받게 되었다.

협상의 시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0년 2월 18일「평화를 위한 새전략—1970년대의 미국 대외정책」이라는 외교백서(대의회보고서)를 통해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을 밝혔다.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는 미국의 국제정치 이념 면에서는 그리스내란에 대한 개입(1947)으로 대공산주의 투쟁의 행동적 시발점을 이룬 트루만 독트린(1947)과 레바논 출병으로 반공우방 및 동맹국을 위한 무력 간섭시대의 문을 연 아이젠하워 독트린(1958)으로 굳어진 미국의 50년대 냉전정책에서 60년대의 준비기를 거쳐 점진적인 국제적 협조시대로 옮겨가는 앞으로의 국제정치에 적응하려는 것이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후 국제질서의 특성이던 미ㆍ소를 양극으로 하는 ‘군사적 양극체제’내부에 ‘정치적 다원화’현상이 일어났다. 전후세계에서 자본주의국가군과 사회주의국가군은 각기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보호 아래 대립하는 동서 블록 정치에 시종했다. 그러나 사회체제를 달리하는 두 제도의 국가들이 그들에 대한 정치적 ‘지배와 통제’를 감수했던 미ㆍ소 양대 핵국가의 강대한 군사력 그 자체가 각 진영 안의 군소국가들의 정치적 독립을 조장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쿠바사태(1962)를 계기로 미ㆍ소 양대 핵무장국가는 핵전쟁의 전면적 파괴 일보 전에서 이성을 발휘,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소련 수상으로 상징되는 미ㆍ소 해빙 또는 화해의 시대로 들어갔다. 적대군사진영의 기수인 미ㆍ소 두 나라는 백악관과 크렘린 사이의 직통통신선 가설(1962), 지상ㆍ대기권 핵실험금지조약(1963), 베트남전의 불확대 방침의 묵시적 양해, 중동전쟁을 에워싼 보기 드문 협의정책(1967), 핵확산금지조약 조인(1969), 대륙간탄도탄을 비롯한 각종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개시(1969) 및 유엔군축회의를 통한 생화학무기 금지 및 해상 비군사화 협상 개시(1969) 등으로 ‘대결에서 협상’의 시대를 이끌었다.
1970년 10월 ‘우주에서의 미ㆍ소 우주선 결합에 관한 각종 규격 표준화협정체결(모스크바)’등은 미ㆍ소의 협조가 지상에서 우주에까지 미친 것을 보여주었다. 군사면에서의 협조에 못지않게 경제ㆍ문화ㆍ외교 면에서의 화해현상도 현저했다. 미ㆍ소의 화해나 협조는 본질적으로는 전후세계에 성립한 미ㆍ영ㆍ소 3개국 중심의 얄타체제를 미ㆍ소라는 초강대국에 의한 세계지배체제로 재편성하면서 한편으로는 주로 중공(및 프랑스)이라는 새로운 핵강대국에 대비해 얄타체제의 스테이터스 쿼를 유지, 온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미ㆍ소 두 초강대국을 기축으로 하는 현상유지체제를 네오 얄타체제라고 할 수 있다면, 이 네오 얄타체제는 중공과 프랑스의 핵강대국으로서의 등장, 중ㆍ소 대립과 공산세계 내부의 국가적 상호관계의 변화 등으로 상징되는 국제정치상의 소위 다원화현상에 대응하는 체제다. 미ㆍ소 협조체제가 틀이 잡혀가고 다원화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60년대를 흔히 신(新)전후시대라고도 부른다. 60년대의 신전후시대는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파생효과와 함께 70년대를 준비한다.
1949년의 중공(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은 아시아ㆍ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식민지 해방투쟁을 자극했고, 신생독립국가의 대량생산이 가져온 국제정치에서의 제3세력(비동맹중립노선) 강화와, 경제면에서는 신생후진사회 발전의 방법으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적 투쟁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1957)를 계기로 차츰 표면화하고 격화된 중ㆍ소 간의 이데올로기 논쟁과 국가적 대립 분규는 60년대에 들어 격화ㆍ심각해져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산주의국가권과 국제공산주의운동에 파괴적 효과를 미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오늘날 사회주의국가들의 내셔널리즘은 전체적으로 보아 국제 공산주의의 ‘한 덩어리’론을 이미 옛이야기화하게 했을 만큼 원리화되었고 강화되었다. 1969년 2월 만주의 중ㆍ소 국경 진보도(珍寶島, 다만스키 도)에서 일어난 양대 공산국가군의 무력충돌 이후 중공은 소련과 미국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투쟁을 ‘이념화’(중공 9전대회 당규약)함으로써 세계정치에서의 중ㆍ소 대립은 결정적인 양상을 띠었다.
양국의 국경회담(1969.10 개시)의 진척과 2년 만의 대사교환 합의(1970.4)는 최악상태의 회피를 예상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 공산 및 사회주의 운동에 작용한 분열과 대립은 거의 항구적으로 정착한 듯하다.
공산사회 내부의 분열은 서방 자본주의사회의 단결과 결속에도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랑스는 드골 대통령 시대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군사적 관계를 사실상 단절하고 대중동 군사봉쇄기구인 동남아방위조약(SEATO)의 군사활동에 불참한 지 수년에 이른다. 드골 대통령이 시도한 동서세계의 화해는 브란트 서독 수상이 추진하는 ‘동방정책’으로 이어져서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정식 이름은 ‘독일연방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과의 관계에 관한 협정’) 체결(1970.8.12), 동ㆍ서독간의 관계개선을 위한 두 차례의 동서독 정상회담(1970.3.19, 5.21), 폴란드와의 국교정상회담 개시(1970.3)를 비롯,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와의 관계 정상화 노력으로 더욱 현실화하고 있다.
경제 및 정치적으로도 단일유럽으로서의 유럽공동시장은 미국의 20년에 걸친 지배와 후견에서 벗어나 동유럽경제협력회의(COMECON)와의 정치ㆍ경제의 접촉ㆍ교류를 크게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다원화 기운은 전통적으로 북미합중국의 세력권으로 인정되어온 중남미에서도 쿠바의 공산화(1960), 칠레의 자유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수립(1970.10), 볼리비아 좌익군부집권(1970.9) 등으로 이데올로기 중심의 군사블록체제 와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ㆍ미국ㆍ중공

아시아의 정세는 기타 지역의 그와 같은 급속한 시대적 발전에 뒤져 있다. 그러나 닉슨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전의 베트남화’정책으로 1972년 말경에는 베트남전쟁도 끝날 것으로 예상될 뿐 인도차이나 사태는 확실한 예상을 불허하지만, 아시아 대륙에서 다시는 미국 지상군을 투입한 전쟁을 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거의 확고한 정책은 긴장완화의 내일을 예상하게 하기에 족하다.
미국 국민의 지배적 여론은 중공과의 화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정책의 표현으로 1969년 7월 미국 정부는 ① 의원ㆍ학자ㆍ기자 등의 중공 방문 허가 ② 대중공 통상의 일부 완화 ③ 중공을 자극하는 가장 큰 요인인 대만해협의 제7함대의 감축 및 상시봉쇄에서 ‘유사시봉쇄’로의 전환 등 조처를 결정했다. 캐나다ㆍ이탈리아를 비롯한 중공승인 국가의 증가와 유엔의 중공배제정책의 한계점 도달로 미국은 중공과의 장기적 관계개선을 노리면서 일본으로 하여금 중공과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시키고 아시아 군소국가들에 대해 일본이 경제적ㆍ군사적으로 후견 역할을 하게 하는 이른바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정책에 주력하고 있다.
대한민국 안보정책의 수정을 타율적으로 강요한 닉슨 독트린은 이와 같이 과거 25년간 형성된 국제질서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한국 정부와 국민이 1945~55년대에 미국 냉전정책의 방벽 뒤에 안주하고 있는 동안, 세계와 아시아의 정세는 50년대 후반과 60년 대를 거쳐 70년대로 옮겨갔다. 전 세계로 뻗쳐 있는 미국의 정치ㆍ군사ㆍ경제적 방벽선을 크게 후퇴시키는 닉슨 독트린은 대한민국을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시켜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이 중개자를 거치지 않고 앞으로 접촉하고 대응해야 할 국제정치의 시대정신은 이데올로기 중심의 군사적 대결이기보다는 정치적 외교적인 절충협상을 통한 해결을 꾀하는 앙땅뜨 기조의 것이 될 가능성이 짙다는 것을 말해주는 징후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닉슨 독트린의 첫 실천적 조치인 주한미군 감축(또는 장기적으로는 철수)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장래와 길게는 남북한 관계의 현상타파에 관건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 분명하며, 또 미ㆍ소ㆍ중ㆍ일의 이해관계를 극동이라는 특정의 장에서 재정비하게 될 복잡한 국제정치적 움직임의 본격적인 시동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유의할 일은 극동지역에서 이 4대 강대국의 세력, 이해의 재구성은 사각형의 대각선처럼 한반도 위에서 교차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40년대 후반의 정세와 조건을 기초로 하여 성립한 우리나라의 70년대에 중대한 시련과 도전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4대국의 극동정책은 남북한과 각기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동시에 상호관계의 국면에서 작용하고 전개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닉슨 독트린은 일차적으로는 대한민국의 국가안보 문제이면서 동시에 길게는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역사의식으로 볼 때, 민족으로서의 영구적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기 위한 생존형태를 모색해야 한다는 과제를 우리 민족 앞에 던져주고 그것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계기임이 틀림없다.

전후의 극동정책

전후의 미국 극동정책은 중공을 주요대상으로 하는 외교목표 변화에 따라 크게 3단계의 전개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 과정을 통한 정책성격은 중공에 대한 ‘포위와 고립화’로 요약된다.
제1단계: 중국을 아시아의 지도국으로 인정하고 국ㆍ공합작과 국민당 정부의 육성을 꾀한 단계(1945~49), 제2단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한국전쟁 이후의 대중공 군사대결정책(1950~69), 제3단계: 대중공 긴장완화와 장기적으로 관계개선을 모색하려는 정책전환─닉슨 독트린의 시기(1970~현재).
미국의 국가정책 심의결정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지니는 중요성과 우선순위의 변화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이 대중공정책의 변화 과정에 대응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과 한국 안보의 관계를 측량하는 척도가 되어준다.

제1기: 우호적 불간섭(1945~49)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전시동맹국인 중국을 전후 아시아의 지도국으로 만들려 했다. 장개석 영도하의 국민당 정부와 모택동 영도하의 공산당세력 사이에 내전을 조정하려 한 마샬 원수의 국공합작 노력은 미국의 전후 아시아 질서를 위한 정책표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일본을 ‘비무장 3류국가’로 억제하려 했다.
트루만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가『중국백서』(1950)를 발표해 중공 집권의 원인을 장개석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돌렸을 때, 미국 정부는 국민당 정권보다도 중국 본토를 장악한 공산 정권과의 관계에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트루만 정권은 ‘중국 불간섭’정책을 결정했고 1950년 1월에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대만을 제외하고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발표했다(애치슨 선언).
미국은 장개석 정권의 대만(한국의 경우도 해당되지만 별도 기술)의 방위책임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은 이 아시아 전략을 확인하면서 대만은 중국의 영토라는 얄타ㆍ포츠담 양선언을 재확인하는 성명마저 발표했다(1950.1.5). 심지어 국무성은 1949년 12월 23일자 미국 해외공관에 발송한 비밀 동문(同文) 통첩을 통해 ‘대만이 함락될 경우 미국은 이에 불간섭정책을 취할것’에 대비, 미리 정책 해명을 준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D.F. Fleming,『냉전과 그 기원』, 제3부「동아시아의 냉전, 1945~55」). 이것이 제1단계 시기의 정책이다.

제2기: 군사적 대결(1950~69)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 중국 불간섭정책을 완전히 뒤엎고 그 후 1969년까지 계속되는 대중공 군사대결정책, 한국ㆍ대만ㆍ태국ㆍ필리핀 등 중공 주변국가의 반공군사기지 강화, 일본의 재군비 및 경제대국화 촉진 등 육성보호정책을 통한 대중공 포위고립화정책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공산세력의 팽창위험에 대한 미국의 공포를 자극했다. 이리하여 미국은 일본을 잠재적인 경제ㆍ군사적 대국으로 전신케 하여 장기적으로 중공과 극동에서의 세력균형을 이룰 수 있는 강력한 요소가 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시켰다.
당시는 아직 중ㆍ소 관계가 표면상 ‘한 덩어리’국제공산주의로 긴밀한 때였으므로 중ㆍ소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세력의 한반도 지배는 전후 일본의 강력한 사회주의세력을 도와 일본의 좌경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미국은 우려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력개입은 한국 자체가 지니는 미국전략상 중요성보다도 앞으로 중공에 대항할 수 있는 공업화된 일본을 방위하자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애치슨 선언에 표시된 바 한국ㆍ대만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미국 아시아전략이 확정된 지 불과 5개월이 못 되어 한국 전쟁에 미국이 군사개입을 결정한 것은 미국 국내정치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민주당 트루만 대통령 정부는 전통적으로 중국에 애착을 느끼는 많은 국민과, 특히 대공(對共) 강경노선을 주장하는 공화당을 비롯한 의회 우파세력으로부터 중국 상실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 압력하에 놓이고 있었다. 상세한『중국백서』를 발표한 것도 이 압력에 답변하기 위해서였다. 민주당 정권은 1950년 대통령선거를 수개월 앞에 두고 민주당의 ‘반공적 노선’을 유권자에게 보여줘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한국전쟁에 군사개입을 함으로써 중국 상실로 추락한 정치적 지지를 급격히 회복할 수 있었다.
트루만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가깝고 애치슨 장관이나 국방성과도 가까웠던 의회인사들이 “만약 공화당이 트루만 대통령에게 중국 상실의 책임과 대공유화노선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그토록 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한국문제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전국강철협회장어네스트T. 웨어, 「미국해외정세에관한정책성명」, 1951.1.5)라고 말한 것은 이를 입증해준다.
이 20년 동안 미국은 정치적으로 유엔총회의 ‘중공침략자’결의(1950.1.30), 이것을 토대로 한 유엔기구 및 국제회의 등에서의 중공배제, 자본주의국가의 중공승인 방지, 소련과의 협조를 통한 중소 관계의 이간, 미국세력권 내 아시아국가들의 협력기구 구성을 통한 정치적 포위와 고립화정책을 강화했다. 경제적으로 미국은 한국전쟁 기간 중 ‘대중공수출통제위원회’(CHINCOM)를 설치(1950.1), 이를 1949년 11월 미국의 주창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이 창설한 소련ㆍ동유럽 등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 Coordinating Committee for Export Control)의 하부집행기관으로 편입하여 중공에 대한 ‘전략물자’의 금수(禁輸) 내지 수출통제를 강화했다.
금수품목은 당초 약 400개였으나 1970년까지 가입국의 연례협의를 거쳐 4회에 걸쳐 완화되어 272개 품목이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ㆍ불ㆍ독ㆍ이탈리아 및 일본 등 주요 공업국가와 그밖의 서방국가들이 중공과의 교역을 확대 및 증가함으로써 현재는 도리어 미국이 이 대중공 경제제재의 희생자격이 되고 있다. 1970년에 들어서는 서방 공업국가들은 오히려 대중공 통상에 경쟁적으로 나오고 있어 금수위(禁輸委)는 미국만이 고집하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아시아에서 북한ㆍ몽고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와 개별적 또는 집단 방위조약을 체결, 중공에 대한 반원호형(半圓弧形)의 군사포위체제를 완성했다.
오끼나와(冲繩)의 원자무기를 핵으로 하는 미국의 대중공 ‘전진전략’개념은 북에서는 한국ㆍ일본으로부터 대만ㆍ괌도ㆍ태국 등을 지나 필리핀에 이르는 태평양 서부아시아 대륙연안 및 그 주변에 상시 미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중공을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태평양 군최고사령부 휘하의 그 총병력은 베트남전쟁 전에도 항시 30만 명으로, 가장 큰 주한 지상군 6만을 포함해 해공(海空) 편성을 주로 하는 기동출격부대는 최신의 재래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중공에 대한 상시출격대를 유지해왔다. 약 50척의 함정으로 구성되는 제7함대는 대만해협에 배치되어 대중공 군사압력의 주축이 되어왔다.

대일정책의 변전

이와 같은 대중공 장기정책의 중요한 요소로서 미국은 중ㆍ소 제휴체제에 항의할 미국과 일본의 공동 전략체제에 착수했다.
미국의 대일정책은 종전 후 큰 변질을 겪었다. 일본을 중립화해 ‘태평양의 스위스’로 만들려던 더글러스 맥아더 점령군사령관은 처음에는 전쟁을 포기할 것과 군대를 보유하지 말도록 규정한 이른바 ‘평화헌법’을 일본에 권유했다. 일본은 고유의 자위권을 유보 하지만 전통적인 뜻에서의 육ㆍ해ㆍ공군의 보유를 금지당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을 중공에 대항할 강력한 국가로 전환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대일전쟁의 주요 승리국인 소련을 배제한 채 대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1951). 미국의 일본 점령은 형식상 끝났지만 동시에 미ㆍ일은 군사동맹인 안보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조약에 따라 주일 지상군을 완전 철수(1957.6)했으나 해ㆍ공군과 병참병력은 더욱 증강했다. 한국전쟁 동안 일본 국내 좌익세력에 대한 억압력으로 창설된 ‘경찰예비대’는 그 후 미국의 압력과 집권보수세력의 지지로 본격적인 군대로 증강되었다.
일본의 군사적 강국화정책을 돕기 위해 미국은 그 토대가 되는 일본 경제의 육성ㆍ강화정책으로 전환했다.
점령 초 미국의 대일본정책은 일본 경제를 ‘일로(日露)전쟁 직후’수준으로 억제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일본이 위협적 존재로 재기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의 피침(被侵)국가들에게 미국이 지정한 일본의 잔존공업시설 기계류를 현물로 철거, 분배 보상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1946년부터 계속된 850개의 일본 공업시설 철거 반출을 즉시 중지하고(1952.4. 26) 또 일본의 무기생산 금지명령을 완화시키면서(1952.3.8), 일본의 아시아 피침략국가에 대한 배상은 그들의 경제발전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의 공업 생산품과 일본 용역ㆍ기술을 이들 동남아제국에 제공함으로써 일본이 공업국으로 재기하는 기틀을 만들어주었다. 즉 미국은 일본의 배상 내용(총액 10억 1,290만 달러,대한국분 제외)을 이와 같이 기존 공업시설의 반출에서 제품ㆍ용역의 제공으로 변경해 일본 공업의 부활을 도왔다.
일본의 자본재 위주 배상은 공업국 일본과 아시아(한국을 포함) 후진국가의 경제적 종속관계를 이룩하게 했고, 60년대를 거치는 동안 아시아국가들의 시장화로 일본은 자본주의세계에서 미국 다음가는 국민총생산을 이룩하게 되었다. 40년대 말에 취해진 이와 같은 미국의 일본정책 전환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ㆍ경제ㆍ군사 면에서 일본을 ‘아시아의 지도국’(사토 일본 수상과 닉슨 미국 대통령 회담에서의 용어, 1969.11.21)으로 만들었다. 중공과 맞서는 대항세력으로서 한국ㆍ일본ㆍ국부(國府) 등 극동 3국과 동남아시아 반공국가들의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안정을 육성ㆍ강화하려는 것이 약 20년간에 걸친 미국정책의 제2단계(1950~69)였다.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정책(닉슨 독트린)(3: 1970~현재)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69년 1월 취임 직후 미국 대외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에 착수했다. 그리고 취임 1년 후인 1970년 2월 18일 대의회보고서 형식으로「평화를 위한 새 전략─1970년대의 미국 대외정책」을 발표했다.
미국의 극동아시아정책을 포함하는 전후 대외정책의 수정은 닉슨 대통령 개인에 의해서거나, 70년대 들어와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서론에서 본 바와 같이 그것은 전후 25년간의 세계 정세의 변화 과정에 대응하여 주로 60년대의 10년간을 통해서 서서히 이루어진 결과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수상의 캠프 데이비드 회담(1959)을 하나의 시대적 구분점으로 하여 미ㆍ소 및 동서 냉전체제는 중요한 전환을 보였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60년대 초기에 사실상 미국 대외정책 수정의 기초를 굳혔다.
베트남전쟁으로 말미암아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 대통령의 보다 진보적인 대외정책을 확대 정착시키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베트남전쟁이나 중동전쟁(1967),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1968)과 같은 국제적 분쟁에도 불구하고 이미 국제정치의 기동력이 되어버린 ‘평화공존’‘정치적 다원화’‘긴장완화’‘대결에서 협조’‘중립비동맹’등의 여러 가지 표현으로 대표되는 시대적 조류는 베트남전쟁 외의 분야에서 계속 미국 대외정책을 ‘탈이데올로기’적 방향으로 밀고 갔다.
미국의 대외정책, 특히 아시아정책의 제3단계로 볼 수 있는 닉슨 독트린은 그와 같은 전후 세계사 발전의 논리적 귀결이라 함이 차라리 타당할 것이다.

닉슨 독트린의 내용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과 국제질서의 변화는 베트남전쟁을 계기로 미국 대외정책에 결정적인 전환을 강요했다.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으로 야기되었거나 조장된 미국의 세계적 권위의 실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국내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국민의 분열ㆍ대립, 경제적 악화 등 대외정치의 중대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면적인 정책 재검토에 착수했다.
대외정책 재검토 및 재편성의 기본적 명제는 전후 냉전시대의 유물인 반공지상ㆍ이데올로기지상의 원리 위에 구성된 미국 대외 정책의 기본적 구조를 변화한 세계정세에 맞추고, 나아가서 70년 대에 예상되는 보다 빠른 변화에 대응시켜 이니셔티브를 취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 세계의 43개국(스페인 포함)과의 군사동맹체제로 ‘국제헌병’이라는 미움받는 역할을 도맡아온 냉전외교정책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또 공산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방대한 미국 군사체제의 유지와 동맹 우방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로 악화되고 있는 미국 경제를 바로 잡아보려는 것이요, 또 해외에서 미국의 국력을 담보로 하는 ‘과잉의무’를 축소해 피지원국가들의 자주적 군사ㆍ경제적 노력을 촉진하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뿐 아니라 정부 지도자들과 미국 국민 전반에 역사적인 교훈을 주었다.
그러기에 닉슨 독트린 또는 미국 정부가 추구하려는 70년대의 새로운 대외정책은 아시아정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환과 수정을 보여준다. 정치ㆍ군사ㆍ경제ㆍ외교 등 미국의 종합적인 국가활동의 기본자세로 아시아 대륙에서의 전쟁에 말려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이며 그것을 닉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했다.
“단 한 세기 동안에 미국인들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 대륙에서 싸우도록 요구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에서 처럼 우리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한 지역은 세계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느 대륙도 그처럼 급속하게 그리고 복잡다기하게 변화한 곳도 없다. 평화를 이룩하지 못한 탓에 그처럼 큰 대가를 갚게 하거나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곳도 없다”(대의회보고서「외교백서」, 아시아편 서문).
70년대에 적응하고, 그 변화의 이니셔티브를 취하려는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정책은 세계정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반정세평가’를 기초로 한다.
① 국제관계에서 전후시대는 끝났다.
② 신생국가들의 자주ㆍ독립 능력이 강화되었다.
③ 공산권의 결속, 국제공산주의의 성격이 분열ㆍ변화했다.
④ 미국의 핵무기 독점체제 및 군사적 지배시대는 지났다.
⑤ 정치적 이념(이데올로기)시대는 지나고 경제문제 등 현실적 이해문제의 시대가 되었다(「외교백서」의 전체 서론부).
이것은 한마디로 전후의 팍스 아메리카나(Pax-Americana) 시대의 종말을 미국이 시인하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자세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 국제정세 일반평가를 토대로 하는 미국의 70년대 대외정책은 3가지의 기본원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닉슨은 말했다.
① 우방국가들과의 협동체제 강화로 이제까지의 피지원국가의 자체적 책임분담량을 증대시킨다.
② 미국의 힘을 유지해 침략자의 오산을 예방하는 동시에 ‘힘의 관계’에서 군비축소를 통한 안전을 증진시킨다.
③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에 치중하며 타국의 국가이익을 미국 태도 결정의 중요한 요소로 고려한다.
미국 대외정책의 일반적 원리는 우리나라와 한반도 정세의 장래에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할 아시아 및 극동정책으로서는 정치 정책과 군사전략의 두 국면으로 아래와 같이 적용된다고 닉슨은 지적했다.

(1) 정치
① 미국은 여전히 ‘아시아국가’로 남을 것이며 이 지역의 문제는 미국의 문제로 간주될 것이다.
②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국가의 결속 강화와 지역적 우방 국가들의 협조체제 강화를 뒷받침한다.
③ 미국은 군사적 개입도를 줄이고, 그러기 위해서 긴장완화를 촉진하여 평화상태의 조성에 힘쓴다.

(2) 군사
① 우방ㆍ동맹 국가와 맺은 조약상 의무는 지킨다.
② 동맹관계 국가이거나 미국 및 지역 전체의 안보에 절대 필요한 국가의 안전에 대한 핵국가의 위협에 대해서는 미국이 핵전력의 방패를 제공한다.
③ 다른 형태(핵공격이 아닌)의 공격에 대해서는 미국은 군사 및 경제적 원조만 제공해 당사국가가 미군 지상병력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책임을 져야 한다.

닉슨 독트린의 실천적 전개

미국 정부의 이와 같은 새로운 아시아정책은 그 형성배경과 역사로 미루어 닉슨 대통령 정부에 그칠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집권정당과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닉슨 독트린으로 집약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은 다소의 변경은 있을지 모르지만 기본원리로서는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정책은 한마디로 “아시아, 특히 아시아 대륙에서의 전쟁에 미국은 다시는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는다”로 집약된다. 정부당국도, 군 및 국제 전문가들도 이 원칙에는 일치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앞으로의 닉슨 독트린의 전개방향을 1970년 말 현재 단계에서 정확하게 예시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 원칙의 출발은 아시아에서의 미군 철수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의 철군(撤軍)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닉슨 독트린의 실천적 적용은 베트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닉슨 취임(1969.1) 당시 53만 6,000명이던 주베트남 병력은 1970년 11월 현재 4차 철수를 거쳐 38만 명으로 줄었고 1971년 5월 말까지는 8만 4,000명으로, 그리고 그의 임기가 끝나는 1972년에는 5만 명 정도의 지원부대만을 남겨놓게 될 예정이다.
필리핀으로부터의 철군도 진행 중이다. 미국 국방성은 필리핀 주둔 병력 2만 6,900명 중 8,600명의 철수계획을 발표(1970.7. 24), 1971년 7월 1일까지 그중 6,000명의 철수가 완료된다.
1898년 미국의 필리핀 점령 이래 근 100년을 유지해온 몇 개의 군사기지(사비크 만, 상그레 포인트, 클라크 등)에서 해ㆍ공ㆍ해병대가 철수하고 있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내 기지의4만 1,000명병력은 1972년까지 2만 명 선으로 철수할 계획이며, 한국전 후 급속히 증가했던 일본 내의 기지 및 시설 합계 3,800개소는 1970년 1월 현재 125개소로 줄었고 71, 72년에도 계속 줄어들 예정이다(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대외공약소위원회 ‘사이밍턴위원회’증언록, 1970. 1). 대중공전진기지망의 초석이던 오끼나와의 일본 반환(1972년 예정)은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것으로 하여 미국의 아시아ㆍ극동 전략구조도 각국 지상배치군 위주에서 ‘핵력기동군’중심구조로 수정되었다.
대만주둔 미군은, 미국의 대중공접근정책이 시동하기 시작한 1969년 말경부터 급속히 축소되어 70년 8월 현재 9,000명을 남길 뿐이다.
주태(駐泰) 병력도 베트남전쟁의 축소 과정에 맞추어 최고 4만 5,000명(1969년 말)에서 1972년에는 해ㆍ공군 요원 1만 명만이 남게 된다.
유럽주둔 미군 감축도 1971년에는 단행될 기세이며 사실상 내용적으로는 NATO 주둔 미군 철수도 부분적으로 진행되어왔다.
해외군사책임의 감축과 국방비 삭감을 강력히 주장해온 민주당의 정치적 압력이유럽 주둔 미군 철수계획을 촉진할 것이다. 1970년 11월에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는 상ㆍ하 양원은 물론, 여태까지 열세이던 주지사 세력에까지 공화당 집권하의 민주당의 우위를 강화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닉슨 독트린은 실제 세계적 규모로 추진되는 미국의 ‘군사적 수렴정책’이라 할 수 있다.
애그뉴 부통령은 1970년 8월 한국ㆍ대만ㆍ베트남ㆍ태국ㆍ캄보디아의 5개 아시아 군사동맹국을 순방, 미군 철수로 시작되는 닉슨 독트린의 구체적 내용을 아시아 지도자들에게 설명했다.
애그뉴의 한국 등 동맹국가 순방이 끝난 날 미국의 신문은 그 의의를 이렇게 논평했다.
“존슨 전 대통령은 군사적 ‘전진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미국의 군사력과 정치적 지배력의 외연을 확대하는 데 안간힘을 다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미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전진’을 제거했다. 힘의 방향은 역류이며 조류가 빠지는 것을 느끼게 한다. 다만 과거의 만조(滿潮)와 앞으로의 간조(干潮)의 속도가 어떻게 다를 것인지를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을 뿐이다. 애그뉴의 아시아 순방은 이 간조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미ㆍ일ㆍ중ㆍ소와 극동

한반도가 “베트남전쟁 종결 후 최대의 분쟁 예상지”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극동관계 열강들의 관계는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화해’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ㆍ일ㆍ중ㆍ소 4대국은 1970년에 들어 표면적인 대립관계를 지속하면서도 기조로서는 ‘대결에서 협상’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특히 중공과 일본 관계는 일본의 급격한 아시아세력권 확장과 군비강화로 중공의 경계심을 자극했지만 그러는 속에서도 관계향상의 노력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미ㆍ소ㆍ중은 삼각형적 관계에서 화해와 견제를 동시에 추진했다.
미ㆍ소ㆍ중ㆍ일 4열강이 사각형의 세력관계를 형성하면서 70년 대의 세력권 조정 과정의 초점인 한반도를 둘러싸고 협상의 시대로 들어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미국과 중공

미국은 중공에 대한 장기적 화해정책에 따라 1969년 7월 21일, 중공과의 여행 및 교역관계에 가해졌던 엄격한 제한조치를 일부 완화했다. 미국무성은 ① 중공제 상품의비군사용목적100달러 한도 내 구입허가 ② 국회의원, 신문인, 전문적 교육자와 박사 및 석사학위의 학자ㆍ대학 재학생, 의사, 적십자 간부, 과학자의 6개 범주에 해당하는 미국인에게 중공 여행목적 여권의 자동발급 허가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7월 23일부터 발효했다.
국방성은 곧이어 12월 19일 교역관계의 추가적 제한완화를 결정, ① 해외 미국상사의 중공 생산품 거래 허가 ② 미국 여행자의 중국산 선물, 미술품, 학술자료의 반입에 대한 100달러 한도 제한 철폐 ③ 해외 미국상사의 대중공 비전략물자 판매허가 등 조치를 발표했다(발효는 12월 22일부터).
이와 같은 대중공 접근 제스처에 이어 미국은 중공의 반미감정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 대만해협에서의 미 7함대 상시초계제도를 사실상 폐지했다. 이에 따라 구축함 1척이 상징적으로 대만해협에 남게 되었으며 상시초계는 소위 ‘수시초계’형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대미 국교관계 수립과 선린정책의 전제원칙으로 중공이 선언한 ① 대만이 중국의 불가분의 영토임을 인정 ② 대만 및 대만해협에서의 미국의 철수 ③‘평화공존 5원칙’의 상호존중의 선에 일보 접근하려는 조치로 해석되었다. 더욱이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한국 정부와 협의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만에 들른 애그뉴 부통령은 장개석 국부총통과의 회담(1970.8.25)에서 국민당 정부의 불안에 대해 미ㆍ소 상호방위조약의 의무는 굳게 지킨다고 다짐하면서도 미국의 대중공 긴장완화정책을 설명하고 설득시켰다.
이것은 1970년 1월 3일 애그뉴 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대만을 방문, 닉슨의 ‘괌 독트린’을 설명했을 때 천명한 바 ① 8억의 인구를 가지는 본토 중국을 무시할 수 없다. ② 7월과 12월의 대중공 여행ㆍ무역에 대한 제한완화는 미국이 중공과의 화해를 도모하려는 ‘작으나마 진지한 제1보’라고 보는 닉슨 정권의 대중공 정책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대중공정책은 1970년 1월과 2월, 중단된 지 2년 만에 바르샤바에서 제135차 및 제136차 미ㆍ중 대사 회담을 재개한 것으로 더욱 행동적으로 명시되었다. 5월로 합의된 제137차 회담이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중공 측의 반발로 유산되었으나 미ㆍ중 쌍방이 접근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표시되었다. 미ㆍ중 접근은 미국과 소련이 핵확산금지조약, 해저비핵협정, 화학 및 세균무기 금지협정, 인공위성규격 표준화협정, 핵 및 전략무기 제한회담(SALT) 및 경제ㆍ정치ㆍ문화 분야에서의 접근을 꾀하려는 노력에 있어 협조체제를 강화한 데 대한 삼각형적 관계의 견제목적도 크게 작용했음직하다.
더욱이 1970년 11월 20일 유엔 중국대표권(중공가입) 문제에서 ‘중공가입ㆍ국부축출안’(알바니아인)이 51 대 49표로 중공 지지표가 중공문제가 제기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과반수를 돌파하자, 미국은 대중공정책 수정을 위한 대담한 시도를 하려는 태도를 여러 경로를 통해 시사했다(크리스토퍼 필립스 유엔 미국대표의 유엔총회 연설, 11월 18일 등).
이에 앞서 캐나다ㆍ이탈리아ㆍ에티오피아 등의 중공승인은 서구와 아프리카 제국의 잇단 대중공수교의 기운을 촉진하고 있어 미국은 1970년이 저물면서 대중공정책의 현실적 전환의 압력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미국이 오끼나와나 한국 같은 중공 주변지역에서 미군 기지와 병력을 감축 또는 철수시키고 있는 것은 아시아 대륙에서 중공과의 지상전을 벌임을 회피한다는 정책전략에서 연유하는 조치다.

중공과 소련

중공과 소련의 관계는 70년대 들어 3년간의 ‘동결’상태에서 본격적인 ‘해빙’의 시기를 맞이했다. 이념문제를 비롯한 불화의 핵심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없지만 소련의 체코 침공,국경분쟁, 인도차이나전에 관한 정책대립 등으로 악화된 관계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9전대회(중국당대표자회의 제9차 전체회의, 1969.2) 개최 직전에 발생한 동북지방(만주) 국경에서의 군사충돌사건(진보도 사건 또는 다만스키 도 사건)은, 중ㆍ소 관계를 전쟁일보 전 상태로 몰고 갔다. 동서 국경지대에서 3차의 무력충돌이 있은 것으로 밝혀졌고, 쌍방 국경 경비병력은 대폭 증강되었으며, 소련은 극동군의 증강 및 미사일무기 중심의 작전체제 개편 등으로 한때 중ㆍ소 전쟁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호치민 월맹 대통령의 간곡한 유지(遺志)에 따라 코시긴 소련 수상의 북경 방문(1969.2.11)을 계기로 비난성명은 줄어들었고, 10월 7일에는 중ㆍ소 국경회담 개최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국경회담은 그 후 양국 간 분규의 전반적인 해결을 위한 회담으로 확대되어 1970년 11월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어느 쪽도 회담을 중단할 의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문화대혁명 이후 본국에 소환되어 있던 쌍방의 대사도 각기 임지로 귀임했다. 유신권(劉新權) 주소련대사가 1970년 11월 모스크바로 부임했고 톨스티코프 주중 소련대사는 이에 앞서 북경에 부임했다.
중공은 11월 6일 소련혁명 53주년 전날 인민대표회의상임위원회 명의로 소련에 “양국 간의 이념분쟁이 평화공존 5원칙에 입각한 쌍방 간의 정상관계 유지와 관계향상에 방해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중국 정부는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고 전제하고, “평화공존원칙에서 한 걸음 나아가 양국관계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자”고 제의했다.
같은 날 당 이론가이자 정치국원인 수슬로프는 소련 정부의 의사를 대변해 “국경회담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으며 타개책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논설을 발표했다.
관계개선을 위한 원칙에 상호합의한 양국은 1970년 11월 21일 양국 간의 통상청산계정협정을 체결, 북경에서 조인했다. 이 회담은 2년 동안 계속되면서 단속(斷續)을 거듭한 끝에 1970년 중엽 이후 급속한 양국관계의 화해를 반영하여 조인을 보게 된 것이다.
소련은 중공과 미국 간의 접근을 한쪽으로 염두에 두면서 국제 사회에서 중공의 국가적 권위와 향상, 아시아 및 극동지역에서 앞으로의 새로운 세력질서 개편을 생각하면서 중공과의 접근에 노력하고 있다. 중공 역시 9전대회로 문화대혁명의 여파인 내부혼란의 수습을 일단락 짓고 국제정치로의 적극적 진출을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유엔 중공문제 토의에서 전년(1969) 총회 때 중공 지지 연설을 하지 않아 주목을 끌었던 소련 대표가 마지막 표결 직전에 발언권을 신청, 강력한 중공 지지 연설을 함으로써 중ㆍ소 관계의 해빙은 본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일본과 중공

일본과 중공의 관계는 극동의 미ㆍ일ㆍ중ㆍ소 상호관계 중에서 가장 대립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시아 극동국가에 일본 경제권의 급격한 확대와 일본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의 강력한 침투는 중공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 및 인도차이나전쟁에 대한 일본의 대미 추종정책, 오끼나와 반환 이후에도 미국의 핵기지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미ㆍ일 합의 등으로 중공은 대일비난을 어느 때보다도 강화했다. 특히 닉슨 독트린의 실시가 확정된 1970년 8월을 전후해서와 69년 푸에블로 호 사건, EC 121 미국 정찰기 격추 사건 등을 계기로 중공은 북괴와의 군사적 제휴를 강화, ‘일본 군국주의’및 남한에 대한 ‘일본의 정치ㆍ경제 침략전쟁’에 대해서 극렬한 반발을 보였다. 한반도 정세는 일본과 중공 관계를 어느 때보다도 악화시킨 감이 있다.
일본 경제의 대한국지원을 억제하고 남북한의 상대적 균형 파괴를 막으려는 뜻에서 주은래 4원칙이 발표되었다(1970.4). 일본 경제계는 주은래 4원칙에 따라 한국과 대만의 통상 및 경제적 이권을 희생하고 중공과의 경제통상관계를 유지하려는 상사(商社)들, 그 반대정책을 취하는 상사로 분열되는 혼란을 겪었다.
일본 정부는 서구 공업국가의 중공시장을 염두에 둔 대중공수교 및 경제관계 강화에 초조감을 감추지 않고 있으나 당분간 미국과 정책적 보조를 일치시키려는 태도를 지키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도 친중공 상사들과 중공의 교역은 최고기록을 세워 1969년 실적은 쌍방 통상액이 6억 2,534만 달러에 달했다. 70년 1월부터 5월 사이의 실적은 3억 6,600만 달러에 달해 70년 말까지 7억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본은 단기적으로는 현 상태의 대중공 긴장관계를 유지하겠지만 70년대를 통해서는 미ㆍ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극동세력질서에 참여하기 위한 대중공 국교정상화정책에 주력할 뜻을 밝혔다(사토 일본 수상 제4선 연설).

한국에서 닉슨 독트린의 전개

그 배경과 차원

닉슨 독트린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미국의 수정된 대한 정책은 1970년에 들어 군사ㆍ경제ㆍ정치(및 외교) 세 차원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수정된 대한정책이 미군 감축이라는 극적이고 자극적인 사실 때문에 군사면에서만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경제면에서는 이미 구체화된 지 몇 해가 되었으며 정치ㆍ외교적 면에서는 군사면과 거의 때를 같이해 병행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정치ㆍ외교면은 그 본질상 일반의 관심하에서 진행되고 있으나 그 결과는 군사면에 못지않은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목표를 지니고 적용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호놀룰루 회담(1969.8.21~22) 공동성명에서 한국이 방대한 군사비의 중압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을 이룩해 외부의 원조 없이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날이 가까워졌다고 말함으로써 한국에 경제ㆍ군사적 면에서 닉슨 독트린이 적용될 것임을 시사했다.
또 이 성명은 그 말 끝에 “양 대통령은 앞으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장기적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성명 제5항)고 강조함으로써 군사면에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의 현 긴장정세를 완화하기 위한 미국의 한반도정책을 말해주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군사철수를 가능케 하기 위한 군사적 선행요건인 동시에 닉슨 독트린이 한반도의 남북한 관계와, 넓게는 한반도정세에 직접 관련된 열강들의상호관계의 장기적인 재조절 내지 화해 노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두 달 후, 닉슨 대통령과 사토 일본 수상의 와싱톤 회담 뒤에 나온 공동성명은 한국 안보의 장래에 대한 미ㆍ일의 기본구상을 전례 없이 분명하게 밝혔다.
사토 일본 수상은 미ㆍ일 공동성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총리대신은 특히 한반도에 여전히 긴장상태가 존재한다는 데 주목했다. 총리대신은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합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에 긴요(essential)하다고 말했다……”(일본 외무성 문서).
이것은 대만에 관해서는 “총리대신은 대만지역의 평화와 안전 또한 일본의 안전에 하나의 극히 중요한 요소(a most important factor)라고 말했다”(같은 글)와 비교할 때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강조의 도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고, 또 미ㆍ일간에 한국 안보에 대한 어떤 공동체제에 관해 기본적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한국 방위에 관한 미국의 전략이 25년간에 걸친 미국의 단독적인 한국 방위체제로부터 경제ㆍ군사 강국으로 재기한 일본에 그 책임을 분담케 하는 방식으로 전환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미국과 일본 전문가들은 해석했다. 한반도와 관계된 강대국들의 비군사적인 방법을 통한 이해조정과 협상을 통한 해결모색, 그리고 한국에 대한 미ㆍ일 공동안보 구상에서 미국 정부의 주한미군 일부 철수는 시작되었다.

미군 철수, 그 계획과 실제

1970년 6월 12일『뉴욕 타임스』(서울 보도)는 처음으로 주한미군 중 2만 명의 철수계획을 표면화했다. 사이공에서 열린 제4회 베트남 파병국가 외상회의의 전일(7월 5일) 로저스 미국 국무장관은 최규하(崔圭夏) 한국 외무장관에게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의 결정을 통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7월 6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가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를 공식 방문, 미국 결정을 전함으로써 다음날 한국 정부가 이를 처음으로 공식 발표하게 되었다.
미군 일부 철수에 따르는 군사측면의 문제가 7월 21일과 22일(미국 시간) 호놀룰루에서 한ㆍ미 국방장관회담 형식으로 개최되었으나 한국 측의 선행조건 제시로 난항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로부터 그때까지는 억제되어온 공개적 보도도 허용되고 한국 정부의 국군현대화 요구와 그밖의 부수적 선행조건으로 한ㆍ미 간 협상은 정돈교착(停頓膠着)의 상태로 들어갔다.
미국 대통령은 한국 측을 설득하기 위해 애그뉴 부통령을 파견(8월 24~26일), 한국 정부와 전후 10시간의 회담을 가졌으나 결국 그의 이한(離韓) 후에 발표된 쌍방의 성명서는 쌍방 입장이 조금도 접근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한국 측 성명은 ① 감군(減軍) 사전협의 ② 군원(軍援)이관 포함 국군파월 조건으로 약속된 미국 측의「브라운(대사) 각서」14항목의 이행 ③ 국군 현대화 및 M16형 소총을 포함하는 군수공장 건설들을 위한 향후 5년간 20억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 ④ 앞으로의 추가 철수계획 취소 ⑤ 유사시 미군개입의 서면확약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으로 향하는 도중 애그뉴 부통령은 그의 방한목적과 박 대통령과의 회담내용에 관한 기자 질문에 대해 “나는 다만 한국 측에 미국의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은 이미 확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통고했을 뿐이다”라고 답변했다.
애그뉴는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 계획에 관해서 “나는 박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현대화는 5년 또는 그 이상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 계획이 끝난 뒤에는 그 단계의 경제적ㆍ군사적 고려 위에서 한국내에 미군의 주둔이 필요 없다는 판단이 내려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미국의 희망을 극히 솔직하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문제에 관해 그는 “5년 이내에 현대화가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군 현대화로 미군 주둔 없이도 한국의 군사적 안전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면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 전 미군을 철수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10월 15일 주한미군 당국은 운천(雲川)의 캠프 카이저(Camp Keiser) 기지 및 시설의 한국 이양을 발표했고, 11월 3일에는 휴전선 미군지역의 대소시설 28개의 폐쇄계획을 한국 정부에 통고해왔다. 그러는 동안 한국 정부는 이 모든 조처에 강력히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국회는 대미경고 결의안도 채택해 미국 정부의 성급한 결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곧이어 11월 6일 2만 명 철군계획의 일환으로 서부 휴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제2사단을 6월 말까지 철수할 것이며 24킬로미터에 달하는 휴전선 미군 방위 책임구역을 한국군에 넘기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오직 남게 될 유일한 미국 사단인 제7사단은 제2사단 지역에 대치될 한국군전선 후방에 그대로 남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휴전선에서 북한군과의 직접대치 상태를 이로써 완전히 끝내고 오직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을 보호하기 위해 판문점에 180명의 1개 중대병력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경비대를 남겨 둘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군당국은 비무장지대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의 후방에 남을 제7사단은 전술핵무기와 80 내지 120대의 전투기 지원을 받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뉴욕 타임스』, 11월 5일).
미국 정부는 이와 같은 미군 철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한국에 10억 달러 정도의 국군 현대화를 위한 예산을 검토 중이며, 그것은 철수하는 제2보병 사단의 많은 장비와 200대의 M48형 전차를 포함한다고 미국 국무성에서 알려왔다(같은 글).
“미국 정부가 승인한 주한미군 상한선(실링)은 6만 3,000명으로, 실제로 그 수준에 달한 것은 1969년 12월 말뿐이고 그 후 조금씩 철수(철수 통고가 있기 전에)하여 현재는 5만 3,000명이므로 내년(1971) 6월 말까지 4만 3,000명으로 하기 위해 앞으로 1만 명만 더 철수하면 된다”(미 국방성 발표, 1970.8.27).
미국 상원외교위 해외공약소위에서의 마이켈리스 주한유엔군(미 제8군) 사령관의 증언에 의하면 1970년 1월 26일 현재 주한 미군 총병력은 5만 3,296명이고 그중 전투사단과 그 지원병 합계는 4만 8,000명으로 되어 있다.

미군 철수의 이유

주한미군의 부분 내지 전면 철수 이유로 미국 정부는 ① 극동전략의 비지상전ㆍ핵무기 중심적인 성격 ② 미ㆍ일 공동(한국) 방위 체제의 형성 ③ 한국군 현대화에 따르는 자주방위능력 향상 등 제반 원인 외에 다음과 같은 판단과 계획을 들고 있다.
① 한반도에서 전쟁재발 위험의 감소 ② 군사비 절약 ③ 비상작 전계획의 완벽 ④ 방위조약상 미군 주둔 의무가 없으며 방위와 미군 주둔은 별개문제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 가능성에 관해 미국 측은 한국 정부와 상반된 판단을 표명했다. 가장 위험이 고조했던 청와대 습격 미수 및 푸에블로 호 피납(1968.1) 당시와 그 후 한국 정부가 전쟁재발 임박을 걱정하고 있는 데 대해 주한미군 당국의 판단을 질문받은 포터 주한미국대사는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말을 뒷받침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답변했다(사이밍턴위원회 증언, 1970.2.25).
주한미군 유지비의 절감은 미 국방예산 감축정책으로 중요시되었으며 그 연간 액수는 지난 3년 동안 합계 약 20억 달러라고 지적되었다.

● [표]


비상사태 발생에 대한 비상작전태세의 만전도 미군 철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강조되었다. 푸에블로 호 피납 때, 주한 미육군의 보유기F4 팬텀 전폭기 12대 가운데 절반이 핵폭탄을 장치하고 있었다고 미 국무성은 밝혔다(『뉴욕 타임스』윌리엄 비치 기자 및 풀브라이트 상원외교위장).
또한 한국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에는 제5공군의 전 능력을 즉각 투입할 수 있고 그 후 태평양지역과 본토에서 단시간 내 추가 공군투입이 가능하며, 해군기동대도 단시간 내에 투입될 수 있는 해역에 상시 존재한다고 미국 고위사령관은 강조했다(아서 홀다네스 태평양공군 제314공군 사단장).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견해차이로서 한국 방위조약상의 의무는 반드시 병력 주둔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의무는 없다는 미국정부의 공식 견해가 밝혀졌다.
“……그러나 한미 방위조약은 미국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국내적 안보(치안)에 가담하거나 폭력 또는 쿠데타에 의한 정권 전복의 결과에 대해서도 어떤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사실상 미국으로서는 한국(영토 내)에 그 어떠한 군대든 유지해야 할 의무가 없다”(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관련한 미국 국방성의 대상원외교위원회 보고문서, 1954.1.21).

주둔 의무에 관한 견해차이

한국 측이 미국의 한국 방위 의무의 법적 토대로 강조하고 있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미군 주둔 의무를 과하지 않는다는 해석과 아울러, 양국 원수 공동성명이나 정부 간 교환문서의 해석에서도 미국 정부는 병력 주둔 의무와 미군 철수에 대한 ‘한국 측 사전승인 의무’를 거듭 부정했다.
국군파월 때 미군 불철수와 철수시의 한국 측 사전승인을 합의했다고 한국 정부가 내세우는 소위 이동원(李東元)–브라운 서한에 관해 질문받은 당시의 주한미국대사 브라운(현 극동담당 국방차관보)은 “그들(한국 정부)은 언제나 그들의 동의 없이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없다는 보장을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기를 그때마다 거절했다”고 증언했다(사이밍턴위원회 청문회 기록, 1536쪽).
박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박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의 정상회담 결과 나온 각 공동성명에서 적침시(敵侵時) 미국의 ‘즉각대응 군사 행동’에 합의했다는 한국 측 해석에 대해 미국 정부는 “한국 측은 박–존슨 공동성명속에 공격발생시 우리의 자동적 대응행동을 포함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우리는 당연히 그에 동의할 수 없었다. 박–닉슨 회담과 공동성명 작성 때 한국 측은 확실히 박–존슨 성명 때보다는 그런 요구를 덜 하는 눈치였다”고 반대견해를 강조했다(윌리엄 포터 주한미국대사, 1970.2.24).
말하자면 “주한미군 주둔은 미국의 국리(國利)에 따라 미국이 자유로이 결정할 문제이고, 병력 주둔은 조약상 의무가 아니며, 철수는 한국 정부의 사전동의를 얻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종합적 입장을 견지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외상 및 각급의 공동성명이나 문서를 거의 같은 문면과 내용인데도 기회 있을 때마다 발표하기를 요구한 한국 정부의 태도에 관해 미국 정부의 정책 수립자들은 “그것은 한국 정부가 한국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작전지휘권과 방위조약 개정 문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

한미 공동방위체제의 방패로 간주되는 방위조약에 대한 개정문제는 닉슨 독트린의 집행과 병행하여 양국 정부 간 외교접촉의 초점이 되었다. 국회와 정부와 군부는 그동안 ‘유사시의 미군 자동개입’조항을 삽입하거나 그 효과를 위한 조약 개정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직까지 미국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휴전 직후에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목적은 남한의 공동방위와 한반도(남북한 간)의 휴전 후 현상유지였음을 강조했다. “도발되지 아니한 공격”에 대해서만 남쪽을 방위할 책임을 지며(조약비준 ‘양해’사항), 그에 못지않게 남한에 의한 “공격도발 행위를 억제”(마이켈리스 유엔군사령관의 대의회 증언, 1970. 2.25)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전쟁 및 분쟁에 본의 아닌 개입을 예방하는 데 더 큰 정책목표를 두었다.
미국은 푸에블로 호 사건, 미국 정찰기 EC121기 피격 사건 등 미국의 국가적 위신이 걸린 중대한 국제적 분쟁에서도 전자의 경우 엔터프라이즈 핵추진항공모함을 비롯한 29척의 특별기동함대(CTF 71)를 북한 인접해역에 긴급 출동시켰으나 72시간 이내에 8척으로 줄여버리고 그것도 한반도 해역에서 떠나버렸다. 또한 정찰기 격추 사건 때는 아무런 대응조치도 취하지 않고 말았다. 한미 방위조약이 한반도의 분단 현상유지에 목적을 두고 있으며 새로운 분쟁발생의 억제와 미국의 한반도 분쟁 불개입정책은 닉슨 독트린의 첫 실천에 앞서 분명히 입증되었다. 대한민국에 의한 분쟁도발의 억제는 닉슨 독트린의 실행을 보장하는 한 가지 선행조건으로 중요시되었다. 그 보장은 주한미군(및 유엔군) 사령관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결심으로 표시되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H. 마이켈리스 대장은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위목적에서만 행동한다. 대한민국 군대가 본 사령관의 작전지휘권하에 있다는 사실은 따라서 공격적 도발을 억제함으로써 한반도정세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 이것이 미국 태평양지역 군최고사령관(CINCPAC)이 대한민국 군대의 작전지휘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기본적 이유다”라고 강조했다(대의회 증언, 1970.2.25).
“휴전선에서 북쪽 공격행위로 한국군이 죽어도 전쟁원칙에 의한 보복을 할 수 없는가”라는 의회 질문에 대해 마이켈리스 유엔 군사령관은 “그런 행동이 허용되면 결과적으로 분쟁이 확대되어 미국이 전쟁에 끌려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포터 대사도 “보복행위가 자동적이건 순간적으로 허용되건 그것은 결국 휴전선에서의 전투를 확대(escalation)하고 결국 미국을 끌고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다”(같은 글)고 분명히 말했다.
북쪽 도발행위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 현지당국 간의 ‘협의’에 관해서도 그는 “미국은 사태 발생시에 대한민국 당국과 협의하게 되어 있으며 이것은 그 사건이 미국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검토ㆍ판단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다. 또 우리가 그런 사태에 자동적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군대의 작전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필요하다”고 미국 정부 태도를 암시했다(2월 25일 대의회 증언). 특히 그는 한반도에서의 중ㆍ소 공산강대국과의 군사대결을 회피하는 것이 미국정책임을 강조하면서 “한국군에 의한 북침은 즉각 주요 공산국가들을 자극할 것이며 더욱이 한국 측의 군사행동이 성공할 듯한 상황일 때에는 특히 그 위험은 크다”고 증언했다.

유엔과 주한유엔군 작전권

한국 방위의 군사적기능에서 주한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 사령부와 유엔기능의 관계도 닉슨 독트린과 관련된다. 주한유엔군은 1970년 2월 현재 미 제8군과 대한민국군을 제외하면 영국군 24명, 태국군 1개 중대, 터키군 15명, 기타 국가 각 1~2명이다(마이켈리스 유엔군총사령관).
북으로부터의 공격을 가상할 때 1951년의 중공참전 당시와 같이 유엔이 유엔군의 군사적 개입을 자동적으로 승인하거나 승인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가 문제되었다. 우 탄트 유엔사무총장은 1967년 주한 유엔군사령부가 “지난 7년 동안 그 군대의 활동에 관해 사무총장에게 한 번도 보고한 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미 8군사령관이 지휘하는 주한유엔군과 유엔의 미묘한 관계를 지적했다.
주한유엔군이 사실상 미군뿐이며,기타 참전국(16개국) 군의 실제적 존재(presence)가 위에서 본 숫자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파병 결정은 유엔회의국 개별적으로나 유엔기구로서나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표시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주한유엔군(미 제8군) 사령관 마이켈리스 대장은 “주한 유엔군사령관은 오직 미국 합동참모본부의장의 명령으로 행동한다”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 “휴전협정이 계속 발효 중이므로 주한 유엔군사령관은 휴전협정 위반에 대해서는 여하한 군사행동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미국 국방성 대의회공식답변서).

미군 철수의 한계

닉슨 독트린은 한국 방위에 대한 공약의무를 거듭 강조했다. 5년 안의 지상군 완전 철수설(애그뉴)이나 아시아 전략구조 변경으로 인한 해ㆍ공군 및 핵무기 중심의 전쟁억제정책이라 해도 주한 지상군의 철수에는 한계가 있음을 미국 정부는 거듭 천명했다.
그 한계는 ① 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할 지상핵군부대 ② 핵무기대대를 경비하기 위한 경비병력 ③ 한국군 현대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필요한 군수 및 연락관계 병력 ④ 유엔군사령부를 존속시키는 것이 정치외교상 상징적으로 필요한 이상 남아 있어야 할 사령부 기구병력 ⑤ 남으로부터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계속 유지하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서 결정될 것이다.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해외공약분위에서 미국 의회와 행정부가 길게 논의한 것을 보면 미국 정부는 이 한계수준 결정에서 지나친 미군 병력 철수는 대한민국의 자주방위에 필수적인 국군작전지휘권 이양 요구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한반도정세의 현상유지 및 장기적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지휘권을 상당 기간 장악함이 필수적이라는 두 상반된 요인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선에서 미군병력의 유지를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수준은 2만 또는 1만 등 여러 가지로 보도되었으나 미국 국방성 및 국무성 정책 수립가들에게서는 아직 공식적인 확인이 없다.
이 문제는 미국이 남북한관계를 어떻게 평가하며 한반도정세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가의 정치목표와 그 성공여하에 따라 달라질 70년대에 걸친 문제다.
닉슨 독트린은 이와 같이 ‘70년대의 화약고’인 한반도에서 핵전략에 의한 전쟁억제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한반도정세의 완화와 남북 간의 긴장해소를 위한 정책으로한국 국민 앞에 제기되었다.

일본의 재등장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미국의 정책은 일본의 세계적 강대국으로서의 재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군사적 차원의 한국 안보뿐만 아니라 보다 종합적인 차원에서 한국의 국가적 장래와 한민족 전체의 장래도 일본의 아시아ㆍ극동 정책의 전개방향에 따라 크게 영향받게 되었다. 한국과 한반도의 중대한 정세변화는 일본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반대로 일본의 국내외 정세변화는 한국과 한반도에 직접 간접으로 크게 작용하리라는 것이 1970년 중의 정세발전으로도 증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한반도에서 물러간 일본이 20여년 만에 다시 한반도정세를 좌우하는 강대국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전쟁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앞서 미국의 전후 극동정책을 개관한 대목에서도 본 바와 같이 미국은 종전 후 일본의 경제적 해체와 약소국화, 평화헌법하의 비무장국화정책을 추구해오다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이 정책을 수정했다. 한국전쟁에 따른 특수(特需)는 일본 경제를 회생시켜 오늘의 경제대국의 기동력이 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소련 등을 배제한 채 급거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9)과 미일 안보조약을 맺어, 중공과 군사적으로 맞서는 미국의 극동전략체제 속의 강력한 요소로서 일본을 그 속에 편입시켜 아시아의 경제적 및 잠재적인 군사적 대국으로 커나가는 기틀을 닦아주었다. 그 후 20년 동안 비록 평화헌법하에서나마 경찰예비대에서 출발한 일본의 군사력은 다시 자위대의 이름 아래 3차례에 걸친 군비확장을 통해 이제는 헌법상의 비무장조항을 삭제하는 절차만 남겨놓고 명실공히 최강의 현대적 군사력을 이룩했다.
이 같은 사실을 배경으로 나까소네 방위청장관은 “앞으로 일본의 국제적 정치 및 외교는 일본 군사력과 일체로 추진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중의원예산위 증언, 1970.3.28). 그것은 일본의 경제력과 일본 군사력이 일체로서 행동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이와 같은 강대국 의식과 ‘사명감’은 닉슨 미국 대통령과 70년대 극동정치전략의 기본구상을 협의한 사토 일본 수상이 “20세기의 마지막 30년간의 세계평화는 태평양(아시아)지역에 달려 있다. 이 지역의 평화ㆍ번영 발전은 강대한 두 국가, 즉 일본과 미국의 협력에 달려 있다. 이 지역에서 일본은 앞으로 이 중요한 시기에 전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국가로서 관건적인 역할을 담당해나갈 것이다”라고 선언한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와싱톤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의연설, 1969.11.21).일본은 ‘아시아의 주역’이 되려 한다고 닉슨ㆍ사토 양 수뇌는 되풀이 강조했다.
1970년대 들어 일본은 극동정치에서 ‘아시아의 주역’이 되기 위해 현상 타파를 원하는 국가로 등장했다. 일본이 중공과 더불어 미ㆍ소 양 대국의 아시아 지배질서에 대등하게 참여하려는 의도가 닉슨–사토 공동성명 속에서 전 세계에 천명되었다. “비무장ㆍ전쟁포기”(일본 헌법 제9조 제1항 및 제2항)를 선언한 일본의 정치ㆍ군사ㆍ경제 강국으로서의 재기와 극동 세력구조의 개편은 소련과의 관계에서 같은 노선을 걷는 중공과의 직접적인 대립관계를 형성하게 하며, 실제로 1970년은 그것이 더욱 격화된 해였다.
극동에서 공산주의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대일정책을 수정한 이후 20년 만에 일본은 경제 발전, 재군비, 정치 및 사회정세의 안정 그리고 그에 따르는 국제적 지위의 급속한 향상으로 마침내 1970년에는 ‘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했다.
일본 국력의 토대가 되는 경제력인 1969년도 국민총생산(명목)은 59조 9,022억 엔(약 1,664억 달러)에 달했다(일본 경제기획청 작성『경제백서』,제1부서장「일본경제의 현세(現勢)」).일본은 같은 해의 미국 9,320억 달러, 소련 4,660억 달러(사회주의 경제와의 비교는 동가 측정이 곤란함)에 이어 세계 제3위, 공산국을 제외하면 세계 제2위가 되었다. 일본은 현재 서방 측에서 국민총생산 약 800억 달러로 추산(비교측정의 곤란과 단위당 경제효과의 차는 무시)하고 있는 중공 경제와 직접적으로 체제 우열을 경쟁하고 있다고도 보겠으며, 남ㆍ북한을 포함한 아시아 전 지역에 대해 싫든 좋든 정치ㆍ경제ㆍ군사 면에서 ‘지도국 지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한국과의 관계는 더욱 문제시된다. 우리나라 국민 총생산 약 75억 달러(정부 발표)에 비할 때 한국에 대한 일본 경제의 임팩트가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일본의 GNP는 지난 4년 동안에 대략 배가한 것으로 1970년의 그것은 2,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었다(『경제백서』).
이와 같은 일본 경제력은 전 세계 특히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극동의 우리나라에 집중적으로 진출, 뿌리를 박았다. 일본 경제가 동남아와 한국에 대해강력하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현실과 70년대의 전망은 다음과 같은 상대국과 일본의 ‘수출결합도’(상대국의 평화적인 수입 1.00을 넘어서 일본의 수출이 되고 있는 지의정도를 표시하는 계수)로써 명확하게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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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67년 평균, 소화(昭和) 45년도(1970) 연차경제보고『경제백서』, 제2부 제5“국제화 추진을 위한 여러 문제”)

무역면에서 항상 문제시되는 한국의 대일무역 역조현상과 함께 한국 경제의 전반이 얼마나 일본 경제에 밀착 불가분화되어 있는가는 한국의 계수가 5.41로서 최고라는 것으로 입증된다 할 것이며 70년대의 한일 경제관계의 성격을 아울러 예견하게 한다.
이와 같은 경제력을 뒷받침으로 일본은 ‘정치대국’으로 미국의 대아시아 및 극동정책을 대행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의 아시아 및 극동지역에서의 역할은 닉슨 미국 대통령과 사토 수상이 “이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미ㆍ일 양국이 상호 협력해야 한다는 신념”(공동성명 제2항, 1969.11.21)을 밝힘으로써 1970년부터 본격화했다.
현 자민당 정권의 극동정치ㆍ외교정책은 중국정세의 객관적 진전에 적응해서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1969년에이루어진 캐나다ㆍ이탈리아의 중공승인, 오스트리아ㆍ덴마크ㆍ서독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중공과의 수교 임박, 그리고 1966년 이미 대중공통상 제한 및 제7함대에 의한 대만해협 초계를 대폭 완화한 미국의 대중공 접근정책은 일본으로 하여금 70년대를 중공과의 관계정상화 시기로 설정하게 했다(사토 수상 제4선 연설, 1970.10). 일본의 극동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아시아의 공산국가인 중공 및 북한에 대항하는 미국 극동군사전략을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장기적으로 정치ㆍ경제ㆍ문화 면에서 화해정책으로 중점이 옮겨질 것이 분명해 져가고 있다.
중국대표권(유엔 중공가입) 문제가 유엔총회에서 처음으로 과반수 지지를(51대 49) 얻어 20년 만에 중공관계의 대세가 역전한 11월 21일을 전후해 일본의 여당 안에서도 대중공 국교정상화를 서두는 강력한 조직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ㆍ야당 의원 300여 명은 처음으로 당적을 초월해 대중공 정상화 촉진을 위한 공식 세력을 형성했다.
중공과의 통상은 1969년 6억 2,534만 달러(왕복), 1970년 상반기 3억 6,660만 달러로 연말까지 처음으로 7억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 공업국가들의 대중공관계 정상화를 위한 착실한 노력과 정치ㆍ경제 관계 확대노력의 성과에 비해 뒤지고 있는 일본은 70년대의 목표를 중공과의 관계증진에 둘 것이 거의 분명하다.
나까소네 일본 방위청장관은 1970년 6월 21일 미ㆍ일 군사동맹(안보)조약을 자동연장시킴에 있어 앞으로 안보조약은 70년대 중반까지 5, 6년간 이 형태로 유지하고 그 후는 정세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중공의 일본 적대시정책은 일본이 중공과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미ㆍ일 안보체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중공과의 관계향상은 대만문제와 함께 중공이 말하는 “미국 침략정책에 대한 일본의 공범자 역할”에 어떤 변화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 일본 내에서도 인식되고 있다.
제4차 방위(군비확장)계획으로 핵무기를 제외한 (어쩌면 그것까지를 포함해서)일본 군사체제가 완전한 ‘자주국방’태세를 갖추게 될 때 일본은 미국과의 군사동맹관계를 폐지하고 본격적으로 중국과의 국교정상화에 총력을 다하려는 것으로 나까소네 발언은 해석되었다. 이때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미ㆍ소ㆍ중ㆍ일의 4대국 권력질서는 예측할 수 없는 전개를 시작할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극동지역에서 일본의 역할은 대한민국에 대한 정치ㆍ경제적 지원과 그것을 통한 한국의 군사체제 강화로 나타나리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사토 일본 수상은 1969년 말 닉슨 미국 대통령에 대한 미군의 극동주둔을 요구하고(공동 성명 제3항) 분단된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한반도정세의 현상유지를 위해 군사적 역할까지 다할 것을 확약했다(같은 글, 제4항). 그러나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촉진하기 위한 극동 국제정치의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 일본정책의 방향임도 확실하다.
한국의 70년대안보가 종래의군사력 위주의 관념에서 보다 장기적인 정치적 개념으로 확대되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정당화된다.

일 안보체제와 그 전략

핵우산과 자주방위론

일본과 미국의 안보공동체제는 연중에 체제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했다.
1970년 6월 22일로 10년간의 유효기간이 만료된 미ㆍ일 안보조약이 자동적으로 연장된 것이다. 10년 전 당시의 기시(岸信介) 수상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이 조약의 비준을 강행, 혁신세력과 학생층이 중심이 된 반대세력의 거센 반대시위를 물리치고 소위 안보파동을 겪은 끝에 이의 비준을 실현하고 정권에서 물러났다.
1970년의 안보조약 기한 만료를 앞두고 평화헌법의 엄격한 준수와 비무장중립을 주장하는 공산당ㆍ사회당을 비롯한 혁신분자와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은 벌써 4, 5년 전부터 1970년의 안보조약 자동연장의 저지와 전면 폐기를 지상과제로 삼았고, 이와 다소 입장을 달리하는 공명당과 민사당 등은 일본의 자주방위의 입장에서 현행 안보조약의 수정을 내세워 역시 자동연장을 반대했만 실제로 1970년 6월을 전후해 벌어진 미ㆍ일 안보반대운동은 1960년 당시만큼도 기세를 떨치지 못했다. 자민당 정부는 닉슨– 사토 공동성명(1969.11.21)의 선에 따라 미일 안보조약의 자동연장을 관철시켰다.
닉슨– 사토 성명으로 새로운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된 안보조약을 법적 기초로 해 구상된 미ㆍ일 양국의 극동전략은 ① 오끼나와의 일본 반환(1972년까지) ② 일본ㆍ한국ㆍ대만의 방위를 위한 그후의 미군의 오끼나와 사용권 확인 ③ 오끼나와를 포함한 일본 본토를, 한국을 포함하는 극동안전을 위해 미군이 발진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실질적 권리의 사실상 보장 ④ 미국 핵보호하의 일본 재래식 군사력의 증강 ⑤ 한국ㆍ대만 등의 간접적 군사지원을 위한 일본 역할의 증대 등을 내용으로 하게 되었다. 20년 전 한국전쟁 발생 직후 국내 좌익세력에 대항하는 ‘경찰예비대’로서 창설된 일본 군사력은 20년 동안의 내부지향적인 성격에서 극동전역의 군사적 안보를 담당하려는 외부지향적 성격으로 변했다.
미ㆍ일 극동안보로서의 양국의 전략구조는 미국의 전략핵무기의 보호 아래 일본은 최신예 현대장비를 갖춘 재래식 군사력을 증강하며 ‘자주방위’를 기한다는 선으로 전환했다(『방위백서』, 1970.
10.20). 미국 군대의 전략핵무기는 오끼나와를 고정기지로 하여 일본 본토 주변에 배치된 미 제7함대와 제5공군사령부 예하의 핵무기가 일본에 대한 공격억제력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레어드 미 국방장관은 일본에 대한 공약을 강조하면서 미국은 안보조약의 의무에 따라 일본 방위를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 사용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1970.9.14).
일본은 이 미국 전략핵무기에 의한 보호를 수락함으로써 핵무기의 생산ㆍ보존ㆍ도입을 자주적으로 금지한 이른바 ‘비핵3원칙’을 ‘방위력의 한계’로 재확인했다(『방위백서』, 방위력의 한계). 그러나『백서』는 동시에 “자위를 위한 소형핵무기 보유는 법이론상으로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정책만 바뀐다면 언제든지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는 자세를 암시했다. 나까소네 방위청장관을 비롯한 자민당 정부 지도자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ㆍ경제 대국에 어울리는 군사력’을 강조해온 사실로 미루어 이와 같은 정부 공식견해는 일본 내 야당과 일본의 과거를 아는 아시아 인민의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은 핵무기의 생산ㆍ도입 금지를 규정한 ‘핵무기확산금지 국제조약’의 비준을 1970년 11월 현재까지 보류하고 있다.

미ㆍ일 공동전략과 한반도

이와 같은 미ㆍ일 전략구상과 구조는 극동지역에서는 중공과 북한을 주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일본군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아시아에는 조선반도와 대만해협 및 인도차이나에 3개의 분단국가가 있으며 한국ㆍ북조선ㆍ중국은 유엔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들로서 이 지역의 국제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중공과 북조선은 계속 경직된 대외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국제긴장의 초점으로 인정된다”는 상황분석을 토대로 제시했다(『방위백서』, 극동의 군사정세와 예상되는 무력분쟁).
이것은 미ㆍ일 극동정책 및 군사전략의 70년대 구상을 밝힌 닉슨– 사토 성명에서 “수상과 대통령은 특히 조선반도에 여전히 긴장 상태가 존재하는 사실에 주목했다”고 피력한 기본판단에 입각해 있다.
알렉시스 존슨 미 국무차관은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협의에서 일본의 안보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한반도에 계속되고 있는 긴장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북한이 일본을 직접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한반도를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것은 일본의 안전보장상의 이익을 해칠 뿐 아니라, 군사개입의 가능성이 있는 한반도의 분쟁은 분명히 일본 자신의 안전을 해친다는 견해에 일치했다”(미국 상원외교위원회 해외공약분위 일본관계 증언, 1970.1.26)고 말함으로써, 핵무기를 제외하고는 중공에 버금가는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의 한반도 지향성을 밝혀주었다. 일본 군사정책의 한반도 지향성은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미ㆍ일 극동안보체제의 가장 중요한 일부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문제에서 민족 내부의 의지와 자결권에 대해 일본의 이익 방향을 강요하는 외적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되었다.

한국은 일본 안전에 긴요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은 한국과 미국의 군사동맹과 양 동맹의 공통 체약국(締約國)인 미국을 연결점으로 하고 반공 공동체의식을 촉매로 해 일체화된 셈이다. 한ㆍ일 군사동맹의 체결 없이도 한변이 없는 삼각형 형식의 한ㆍ미ㆍ일 동맹안보체제의 의의가 강조되었다.
닉슨– 사토 공동성명은 그 제4항에서 “……총리대신은 한국의 안전은 일본 자신의 안전에 긴요(essential)하다고 언명했다.”대만에 관해서는 “총리대신은 대만의 평화와 안전도 일본의 안전에 하나의 극히 중요한 요소(a most important factor)라고 말했다.”이것을 비교한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70년대의 정책적 관심의 방향과 농도를 주목했다.
한ㆍ미ㆍ일 삼각동맹관계의 군사적 측면에 관해 사토 수상은 “만일 한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발생해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군대가 일본 국내의 시설지역을 전쟁작전행동의 발진기지로 이용해야 할 사태가 생기면 일본 정부는 (미국의) 사전협의에 대해 긍정적이고도 재빠른 태도로(positively and promptly) 결정을 내릴 방침이다”라고 약속했다(와싱톤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 1969.11.21).
일본은 미ㆍ일 안보조약 제6조에 의해 일본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닌 것에 대한 일본 주둔 미군의 행동이나 일본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를 미국 군대의 일본 영토 이용에 대해서는 미국 측의 사전협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 이 사전협의의 기본정신은 일본이 거부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수상은 한국 사태에 관해서 거의 자동적으로 주일미군의 일본 발진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일본은 한미 방위체제 속에 편입되었다. 이와 같은 한ㆍ미ㆍ일 삼각안보체제는 푸에블로호 사건 직후 북한 해안으로 긴급 출동한 미국 제7함대의 기동함대(CTF 71)가 일본기지에서 발진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일본군국주의’의 가능성

1970년대의 강대국 일본의 군사전략구조는 60년대의 미국 핵보호 중심의 ‘미일 안보체제’에서 일본 군사력에 의한 ‘자주방위체제’를 주로 하며 미ㆍ일 안보체제를 종(從) 또는 보완수단으로 하는 전략 순위로 역전했다.
미ㆍ일 안보조약은 한미조약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한 군사적 보호역할과 함께 일본의 대외적 군사도발행위를 억제하는 양면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일본의 ‘자주방위’가 미국의 억제효과를 상쇄할 만큼 큰 군사력의 뒷받침을 받게 될 경우, 중공에 버금가는 그 대군사력이 자위에만 쓰이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불신과 위구가 국제적 여론으로 일어났다. ‘자위대’라는 이름의 군대가 70년대에 지닐 위험성에 대해 미국 의회조사단은 “……본 조사단은 이 사실들을 주시하면서 일본이 신군국주의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명한다”고 결론지었다(하원외교위원회 아시아 현지조사단 보고「일본관계 보고서」, 1970.4.22 제출).
일본 군대(자위대)는 “그 병원수(兵員數)는 과거의 ‘대일본제국’군대에 비할 수 없지만 종합적 화력은 제국군의 2.5배나 강해졌다”(나까소네 장관, 1970.10). 일본 정부는 자위대 창립 후 20년 동안 총액 4조 8,445억 엔을 들였다(1달러=360엔=약 300원. 11월 현재 엔 대 원 실세는 대체로 1:1로 보아도 무방). 최초로 군사예산이 책정된 1951년에는 1,266억 엔이던 것이 제1차 방위(군비확장) 계획연초인 1958년에는 1,485억 엔, 제2차 계획의 초년인 1962년에는 2,138억 엔으로 착실히 늘어났다. 그 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인 1961년부터 70년까지 10년간에는 3,860억 엔으로 급증했다. 72년에 끝나는 현 제3차 계획은 약 2조 6,000억 엔의 예산으로 일본군은 소련과 중공을 제외한 아시아 최강의 위력을 갖게 된다. 1972년부터 76년까지의 제4차 계획은 5년간 약 5조억 엔(약 138억 달러)의 군비를 예상하고 있다. 한국의 1970년도 국가예산이 약 14억 4,000만 달러인 것과 비교하면 70년대에 들어 일본은 해마다 그 군사비만을 위해 우리나라의 국가예산(1970) 총액의 2배를 투입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일본은 군사비로 국민총생산의 약 1퍼센트를 쓰고 있을 뿐이지만 70년대 말의 국민총생산을 약 6,000억 달러로 추산하는 일본 정부는 최소한 연간약 60억 달러의 군사비를 예상하고 있다.
70년대의 일본은 경제ㆍ정치ㆍ군사 어느 면에서나 미국의 핵보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강대국이 될 것이며, 어쩌면 앞으로 “수년 내에 핵무기 생산에 착수할 것”이라는 전문가(허만 칸)들의 예언도 있다.

일본의 대한정책

한일관계의 새 기조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ㆍ경제적 협력체제는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한일 국교정상화(1965.6.22)로부터 69년까지를 준비단계로 해서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다져진 한일관계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닉슨 독트린 천명을 전후해서 그것과 병행해 정치ㆍ경제ㆍ군사ㆍ문화 등 모든 면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은 여태까지 한국과의 양자회의나 한국이 참가하는 국제회의 및 기구에서 한반도의 남북한 대립을 부채질하거나 한국의 적극적 반공노선을 지지하는 공식발언이나 성명을 삼가왔다. 그러나 1970년에 있은 한일 간의 정부ㆍ민간회의는 물론 다수국가가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일본 정부는 한국의 반공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으로서 그 정치이데올로기상의 변화를 분명히 했다. 1년간의 여러 가지 결정은 그것을 행동으로 입증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후견자적 입장과 그 권리 및 책임의 상당부분 또는 대부분을 일본에 분양(分讓)하기로 한 한ㆍ일 정부 간 합의(닉슨– 사토 공동성명 등)는 앞으로 70년대 한ㆍ일 국가관계의 기조가 된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미ㆍ일 양 정부는 베트남전쟁 후 세계 긴장의 초점은 한반도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으며 한국의 안전이 ‘일본 자신의 안전에 긴요’하기 때문에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장기적 노력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생존을 뒷받침하는 일본의 역할을 증대하는 적극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닉슨– 사토 성명 제3및 제4항의 요지).
미국을 삼각형의 정상으로 하여 한ㆍ미, 미ㆍ일 양 군사동맹에 의해 형성되는 삼각적 군사ㆍ경제권에서 한국이 그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이와 같은 한ㆍ미ㆍ일 공동방위체제의 대상이 되는 북괴ㆍ중공ㆍ소련은 이를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및 북괴에 대한 ‘침략정책’이라고 비난했다(모택동의 인도차이나관계 성명, 5월 20일;‘중공 정부 한반도 비상사태 개입용의’성명, 7월 27일; 중공– 북괴 한국전쟁 중공군 개입 25주년 기념 공동성명; 김일성– 시아누크 ‘일군국주의에 대한 공동투쟁’선언, 7월 22일; 주은래– 김일성 ‘일군국주의 재기 경고’성명).
미ㆍ일 정부의 극동 및 한반도에 대한 장기적인 정책구상에 따라 일본을 직접적으로 참가하게 해 형성된 한ㆍ미ㆍ일 3국의 한국 안보협력체제는 상대적으로 북괴의 미묘했던 대중소관계의 재조정 노력을 강화하게 했고 이를 통해 평양– 북경– 모스크바의 북괴 안보협력체제가 동시에 강화되었다. 중공은 일본에 대한 제동으로 주은래 원칙을 발표했다.
일본의 반공국가 강화정책의 경제면에 초점을 둔 4개 원칙으로 중공은 한국관계에서
① 한국과 교역하는 상사(商社)
② 한국에 투자하는 회사
③ 재일본 미국 자본과의 합판(合瓣) 또는 그 자회사 관계에 있는 상사
④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을 돕고 있는 상사
이상 4범주에 해당하는 일본 상사와는 통상관계를 맺지 않거나 또는 중단한다고 한 것이다.
일본의 대한 경제정책은 주은래 4원칙에 직면, 4월부터 8월에 걸쳐 상당한 재검토를 강요당했다. 정부가 체결한 포항종합제철의 주요 담당회사인 신일본제철을 비롯한 상당수의 회사는 주(周) 원칙을 거부하기로 하는 반면, 적지 않은 수의 회사가 주 원칙을 수락했다.
한일민간합동경제위원회는 5월 5일 주 원칙 거부와 한일경제 관계의 적극강화를 다짐했다(우에무라 고고로오(植村午五郞) 위원장의 동위(同委) 발족식 연설).주은래 4원칙의발표 이후 일본 정부의 수출입은행지원에 의하건 민간자본에 의하건 앞으로의 대한 경제원조나 한국시장 진출은 이 한일민간합동경제위원회 산하 회사들에 국한하게 되었다.

한ㆍ일 경제관계

한ㆍ일 경제관계는 1965년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대일청구권(정식 명칭은 ‘경제협력’) 협정에 의한 무상 3억 달러, 10년간 분할 제공되고 있는(그 후 기간단축에 합의) 2억 달러의
재정차관, 그리고 민간차관 3억 달러 이상 외에 그 후 민간차관 2억 달러가 추가되었고, 7월 한일각료회의에서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포함하는 제3차 5개년계획 사업용의 1억 5,900만 달러가 결정되어 일본의 한국 경제협력은 불과 5년 만에 정부ㆍ민간 합계 11억 달러를 넘었다. 같은 기간 중 일본의 저개발국가에 대한 경제 협력(원조) 가운데 한국이 제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의 외자도입비 총 594건(1970.3.5 현재) 25억 195만 3,453달러 가운데 일본은 173건 5억 3,042만 달러를 차지했다. 미국의 260건 10억 2,500만 달러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하지만 미국의대한원조의역사 25년에 비해 불과 5년미만에이루어진 일본 자본의 급속한 대한진출은 매우 주목할 만하며 앞으로의 한ㆍ일 양국의 정치ㆍ경제적 제휴관계의 굳건한 기초가 될 것이다. 특히 외국인의 직접투자액 1억 5,000만 달러 가운데 일본인 직접투자는 4,800만 달러 이상(1970.3 현재, 경제기획원 통계)으로 전체의 32퍼센트를 차지했고 1970년에 이르러 직접투자 분야에서는 일본이 오히려 미국을 넘어섰다.
미국은 휴전 이후 17년 동안 제공한 총액 41억 달러에 달하는 각종 경제원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우리 정부의 외자원이 되어온 무상지원원조(SA)를 1970년도분 1,000만 달러를 마지막으로 중단하기로 발표했다(SA 총액 18억 8,650만 달러). 나머지 무상원조인 PL 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 원조도 1972년으로 중단하기로 한 결정을 미국은 한국 정부에 공식통고한 바 있다. 자주국방체제 확립을 위한 비생산적 방위비 증가에 반비례한 미국 무상원조의 거의 전면적인 단절, 경제건설을 위한 소요외자의 계속 증가, 외차(外借) 원리금상환액의 누진적 증가, 주한미군을 상대로 벌어들이던 외화 약 1억 5,000만 달러(추산)의 미군 감축에 따르는 감소,베트남 특수(特需)경기의 급격한 감퇴등으로 말미암아 일본 경제력에 대한 한국의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경향은 이미 1969년 일본 외무성 경제협력국이 “60년대 후기의 한국의 고도성장은 우리나라와의 경제협력 관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일한 경제협력 보고서=외교백서)라고 일본 측 견해를 밝히고 있다.
7월 22일부터 2일간 서울에서 제4차 한일 정례각료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1972년부터의 제3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최대사업으로 정부가 요구한 포항종합제철소의 ‘4개 핵공장’인 주철공장(720만 달러), 외중기계공장(2,500만 달러), 특수강철공장(580만 달러), 조선소(2,100만 달러) 건설을 위한 합계 5,900만 달러를 포함하는 1억 5,900만 달러의 차관을 수락했다.
총액 2억 440만 달러 규모로 조강(粗鋼) 연산(年産) 103만 2,000톤의 선강(銑鋼)일관작업을 위한 이 포항종합제철 건설이 “한국 내 원료조달도 안 되고 규모가 적어 경제성도 없다”는 결론(세계은행 조사보고)과 대한국제차관단(KISA, 미ㆍ영ㆍ독ㆍ불ㆍ이탈리아)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에 동의했는데, 이는 일본이 경제성 유무와 관계없이 일본 메이커의 대한진출의 길을 터주고 또 한국이 국방상의 필요성을 중요시한 나머지 취한 정치적 동기의 결정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우리나라 정부가 가장 중요시해온 포항종합제철 기공식(4월 1일)에서 박 대통령은 “종합제철이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부흥의 토대가 될 것으로 확신하며 조선ㆍ자동차ㆍ건설 등 공업발전은 물론 군수산업 육성을 위해서도 철강공업은 반드시 육성돼야 한다”고 군수산업의 효용을 강조했다.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개통과 때를 같이하여 25년 만에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끼 사이에 관부연락선 정기항로가 개통된 것은 1970년 중의 한일경제의 융합현상을 상징했다. 일본 신문들은 관부연락선 항로 개통에 즈음하여 차라리 한국 국민들에게 일본 경제와의 과잉 일체화가 초래할 결과를 경고했고, 국내 신문들도 축하하기에 앞서 항로가 상징하는 뜻에 불안을 표명했다.
이에 앞서 4월 19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한ㆍ일 민간경제협력 협의기구인 한일 민간경제위원회 제2회 총회가 열려 한ㆍ일 경제 관계의 장기구상을 토의했다. 총회는 한국에 대한 일본 민간자본의 적극적이고 광범한 ‘협력’에 합의하면서 그 협력은 “중공과 북괴 측의 평화 파괴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미ㆍ일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공동노력을 다한다”고 말하여 단순한 경제적 차원을 넘어선 목적을 강조했다.
이 회의의 개회연설에서 한일경제협력의 막후정치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기시(전 수상)는 “일ㆍ한 양국은 근린 제국을 합쳐 아시아의 EEC(구주공동시장)적 단결을 형성해야 할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기시와 더불어 협력위의 중심 인물인 야스기(矢次一夫)는 이 회의에서 ‘일한 장기경제협력시안’을비공식으로제시,“ 포항제철지구로결정된포항이남지역과일본 북규슈(北九洲)지역을 합쳐 ‘협력경제권’을 형성하고 이것을 모델 케이스로 하여 한ㆍ일 양국을 협력경제권으로 확대하는”소위 ‘관서(關西)경제권안’을 비쳤다. 한ㆍ일 경제구조의 장기적 연구를 맡고 있는 ‘국책연구회’를 대표하는 야스기는 이 ‘일한 장기경제협력체제’를 위해 ‘일한 합판(合辦) 및 가공무역 진흥공사설립안’이라는 것을 제시,“일본은 노동집약적 산업을 한국에 이양하는 대신 한국은 자본집약적 산업을 일본에 의존하는 국제산업원칙에 입각한 경제협력”에 관해 한국 측 견해를 타진했다.
1970년대 한일 경제협력의 방향과 내용을 짐작케 하는 일본 측의 이 구상에 대해 “한국 경제를 일본 경제권에 종속화하려는 의도라는 불안이 표명되기도 했다”(『동아일보』, 4월 27일자 사설과 기사).
한국에 대한 70년대의 ‘경제협력’이 대체로 야스기 시안의 방향과 내용을 취하게 되리라는 것은 그 후(7월)에 발표된 일본 정부경제백서(정식 명칭은 ‘소화 45년도 연차경제보고’)에 의해 확인되었다.

일본의 군사력과 한국

일본의 책임 분담

“여태까지 자국의 안전을 따로 떼어 생각하던 일본이 한국의 안전보장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태도를 처음 공식적으로 천명했다…….”일본의 국방, 특히 군사정책을 평한 알렉시스 존슨 미국무차관은 닉슨– 사토 합의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미국 상원외교위 해외공약분과위 증언, 1970.1.26).
오끼나와 반환문제의 대일협상에서 미국은 반환의 대가로 일본에게 한국 방위를 위한 언질을 요구했으며 사실상 그것은 일본영토가 된 오끼나와를 기지로 하는 한국 및 대만에 대한 보호역할을 일본에 대행하게 하는 흥정이었다고도 미국 정부는 밝혔다(같은 글). 일본 정부는 즉각 미국 측의 이 주장을 부인했다(외무성 발표, 1970.8.23).
한국에서의 미군 일부 철수가 공식화된 시기를 통해 발표된 존슨 차관의 미국 정부 견해는 한국 국민과 정부에 일본과의 방위분담체제를 알림으로써 한국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러나 일본 외무성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미국이 군사기지를 유지하려는 것은 한반도의 분쟁에 대비한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제1차적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여태까지 일본 영토의 보호만을 위해서 일본 영토의 미군 발진기지 역할에 동의해온 정책에서 한국 방위를 위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정책을 수정했다”고 확언했다(존슨 국무차관).
전반적으로는 한일 국교정상화의 군사적 의의를 강조한 당시(1964) 길패트릭 미 국방차관의 구상대로 발전한 것이 1970년의 현상이었다. “……미국 정부는 일본이 장차 아마도 한반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관제(管制)전력—공격전력이 아니라 방위용—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한반도에서 다시 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은 미국의 지상병력을 파견ㆍ증강할 필요 없이 이에 대응할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길패트릭 발언).
1970년 들어 처음으로 일본군의 최고지도자가 한국을 공식방문하고, 한국 정부의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정부 및 군 지도자들과 회담도 가졌다. 한국군 시설이 일본 군사지도자ㆍ전문가들에게 해방 25년 만에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일본군 참모부는 이미 수년 전부터 한반도의 분쟁발생을 가상하여 ‘미쓰야(三矢) 작전계획’을 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화(昭和) 38년(1963) 통합방위도상(統合防衛圖上) 연구실시계획’이라는 정식명칭의 이 작전구상은 “모년 7월 17일 한국 휴전선에서 전투가 발생했다는 가정하에”일본 육해공군이 행동할 지침으로 짜여진 것으로 일본 국회에서 밝혀졌다.
그 뒤 1964년 4월 6일자로 작성됐다는 ‘플라잉 드래곤(飛龍) 작전계획’(정식 명칭 ‘소화 40년도 협동작전계획’)에 대한 세부작전 행동지침도 한반도의 ‘베트남전쟁화’상태를 가상상황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ㆍ미ㆍ일 3국의 군사적 협동체제는 한반도에서의 분쟁발생시 강력한 한국 안보의 기틀이 될 만큼 발전했다.
현재 극동지역의 정치 및 조약 체제구조상 휴전선을 넘는 남북한 간의 대규모 공격은 어느 쪽에 의한 것이든 한ㆍ미ㆍ일 대 소ㆍ중ㆍ북괴의 대립적인 연합군사체제 간의 무력충돌로 확대할 소지가 마련됐다는 것이 70년대를 군사적 측면에서만 보는 견해로 제시되었다.
남북한 쌍방이 그 배후의 강대국들과 더불어 형성하는 이상과 같은 군사적 공동체제 때문에 남북한 민족이 자체적으로 긴장을 완화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정세는 70년대에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점’의 상태가 될 것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견해는 일치해 있다.

•『합동연감』,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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