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쉬운 문학, 아쉬운 정신"
쉬운 문학, 아쉬운 정신
한때 총칼이 이 나라를 옥죄고 있을 때, "이 숨막히는 때에 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것은 죄악이다" 라고 절규한 어느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의 정신'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 로 공감했다.
그것이 어찌 시에만 국한된 일일까. 소설도 그렇고, 모든 형식의 정신적 창조활동이 다 그럴 것이라고 이해하고 또 그래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와 같은 이해와 믿음으로 문학을 대해왔던 터이기에,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문학작품'들을 보면서 당혹감을 느낀다. 작가의 이름이 가명이거나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자 크기가 작아져 있거나, 아예 작품 생산공장인 출판사 이름만 있는 '문학'도 있다고 한다. 먼저 시인과 작가의 이름을 알고 작품을 골랐던 사람들에게는 위화감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 문학이란 본시 이렇게 쉽게 생산되는 것인가!"라고 생각을 고쳐먹기도 한다. 그러고는 "숨막히는 시대는 정말 지나갔는가보다" 하고 나의 감각을 의심해보기도 한다.
지난 연말, 가벼운 감기를 업신여긴 업보로 어줍잖게 폐렴이 되고 또 늑막염까지 도지는 바람에 달포 가까이 병상에 누워 지내게 되었다. 회복기에 들어 지루함을 달래려고 여러 해 만에 다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기 시작한 것이 두 달 만인 엊그제에야 르 리브르 드 포슈(Le Livre de Poche) 판 세 권의 2,000쪽을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레 미제라블>을 읽기는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일제 치하의 중학생 때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 중의 한 권으로 읽었다. 번역본의 제목은 <아! 무정>이었다. 여러 대목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는 박정희 정권 말기에 2년 동안의 형무소 생활 중에 프랑스어 공부를 위해서 국역본과 대조하면서 읽었다. 그 책에는 "수번호 3710"이라고 기록된 독서 열독 허가증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빛이 바랜 채 그대로 붙어 있다. 이때 워낙 단단히 공부했던 탓에 이번에는 사전도 별로 찾지 않고 즐겁게 끝낼 수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저항한 위고가 영국해협에 있는 저지와 건지 섬에서의 10여 년간의 망명생활 중--전체적으로는 20여 년간 이었다--1862년에 내놓은 <레 미제라블>에 관한 이야기를 도중에 꺼낸 것은 섣부른 문학평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역량 밖이다.
나는 나의 관심을 끈 문학 외적인 사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한다. 위고는 그 대하소설 속에서 독자를 끌고 가면서. 몇 개의 중요한 국면 변화에 앞서, 문학가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의 치밀과 정확성을 가지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전지식을 서술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각기 굉장한 시간과 정력을 쏟아서 과학적, 실증적으로 조사하고 탐색한 자료들과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소설의 중요한 고비인 1831년 7월혁명의 묘사에 앞서 저, 나폴레옹 공화제 이후의 정치·사회·문화의 변화, 공화파와 왕당파의 세력 변동. 특히 그 시기 프랑스의 계급구조, 귀족과 대중의 생존양식 등이 온갖 현실적 근거를 토대로 거의 30쪽 분량으로 서술되어 있다. 조금은 지루하지만, 새로운 지식과 발견과 이해를 가지고 소설의 흐름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와 같은 그의 정밀하고도 방대한 정치적, 사회과학적 탐구의 노력은 오직 경탄스러울 뿐이다. 시가 '쉽게' 씌어져서는 안 되듯이 소설도 이처럼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각고(刻苦)한' 흔적이 뚜렷할 때에 감동을 준다.
파리의 하층사회, 빛을 피해서 어둠 속에서 사는 부랑아들과 범죄자들의 언어인 은어(隱語)에 관한 서술은 20쪽에 이르러 가히 그 당시 은어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정도다. 그 수집과 연구는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파리의 하수도는 세계 불가사의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장발장이 부상당한 주인공 마리우스를 등에 업고, 뒤따르는 냉혈한 자베르 경위와 그 미궁 속에서 벌이는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장면은 그에 앞서 파리시의 하수도망에 관한 25쪽 분량의 사전지식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독자는 거수(巨獸)의 내장과 같은 캄캄한 하수도망 속에서 작가 위고의 도시공학적 지식과 소 설가적 상상력 덕택에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만끽할 수 있다.
장 발장이 자베르 경위의 추적을 피해서 은신을 거듭하는 수도원,수녀원, 성당, 그리고 그 속의 영원히 닫혀진 종교와 신비스러운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대목 역시 그렇다. 그밖에도 위고는 어느 한 대목도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작가가 각고한 흔적을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는 큰 기쁨이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작가의 안이함과 나태를 비꼬는 말들을 자주 들었다. '쉽게' 문학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들이다.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 결코 '쉽게' 문학하려고 하지 않는 작가 빅토르 위고에게 경의를 표했다.
물론, 나는 소설의 줄거리에 삽입된 이와 같은 장황한 서술방식이 소설의 진행을 방해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은 '문학'과 '소설기법' 측면에서의 비판이다. 나는 다만 너무도 '쉽게' 씌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는 최근 우리나라 소설들의 걱정스러운 경향을 보면서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나의 오해이면 차라리 반가운 일이다. 1980년대 한국의 군부독재하에서 '쉽게' 만들어진 문학을 개탄한 시인의 말은 상황에 대한 정치적 양심의 소리다. 150여 년 전 프랑스에서 빅토르 위고라는 작가가 '쉽게' 쓰기를 거부한 것은 소설작법과 개인적 성실의 문제이므로, 같은 '쉽게' 라도 성격과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그 어느 경우의 '쉽게'이건 진정 문학하는 사람으로서는 다 같이 거부해야 할 유혹인 것 같다.
사족같이 보이는 한 가지 감동을 덧붙이고 <레 미제라블>을 읽은 감상을 끝맺을까 한다. 자베르 경위와 그의 부하들이 어느 날 밤 천신만고 끝에 장발장을 파리 시내의 으슥한 다리 위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장발장은 이제 꼼짝없이 주머니 속에 든 쥐가 되었다. 그는 마침내 체념한다. 길고 긴 추적과 도피의 경주가 추적자들의 승리로, 도피자의 피배로 끝나려는 순간이 다가왔다. 이 상태에서 마지막 결판을 내려고 부하들이 덮치려고 하자 자베르가 제지한다.
“안 돼! 구속영장을 안 가져왔어. 영장 없이 연행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 의회가 검찰총장과 내무장관 파면 결의를 할 거야, 원통하지만 오늘은 그만 철수하자! 구속영장을 받아 가지고 다시 나오자."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인 1840년대의 프랑스였다. 나는 그로부터 140년이 지난 뒤에, 구속영장도 없이 끌려가서 철창 속에 갇힌 대한민국의 교도소 안에서 1980년에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대목 하나의 감동만으로도 빅토르 위고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야만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140년 전의 프랑스의 사법제도와 국가공권력의 문명성이 빛날수록, 20세기도 끝나가려는 시기의 대한민국이 암흑으로 보였다.
--<창비문화> 1995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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