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상영 후 토크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7-02 06:47
조회
486

♦다큐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상영회 후 가졌던 관객 및 감독과의 토크쇼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전해드립니다. 전체 내용은 아래 링크의 영상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큐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특별 상영회 토크쇼




김효순


무장전선의 주범들은 1947년 48년생들이 많습니다. 이들과 일본에서의 소위 전공투(전학공투위)와 관계는 어떤건가요


심아정


저는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의 구성원들을 1960년대 전공투 운동과 엘리트의 권위를 버린 사람들로 나름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전공투 세대인 것은 맞는데요. 60년대 후반, 일본 대학가가 그 대학생 수가 급증을 해서 강의가 늘어나고 등록금이 인상되는데, 편의시설 부족하고 불만이 누적돼서 동경대 야스다 강당을 많이 떠올리시겠지만 당시 일본 최대규모 대학은 일본 대학이었습니다. 거기서 68년 5월에 전학공투회의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요.


한국에서 전공투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헬멧, 쇠 파이프, 나부끼는 깃발, 불타는 야스다 강당의 건물 이런 것들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습니까? 근데 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학교 건물을 점거하고 지금으로서 상상하기 굉장히 어려운 장면이에요 숙식을 함께 하면서 대학이나 제도권 교육에서 배울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자주적인 커리큘럼을 짭니다, 스스로 대안적인 앎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저는 주목 해보고 싶습니다.


또 적어도 전공투 초기에는 바리케이트 안에서 열렸던 토론이나 회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대표를 두지 않았고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도 전위 또는 대표가 없는 그런 모임이지 않습니까? 자기 의지로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의 장이었다. 기나긴 회의와 토론을 통해서 서로를 설득하면서 여러 가지를 결정하는 그 초기의 모습이 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전공투 투쟁이 흔히 실패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많이 되는데요, 저는 실패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실패 이후에 참여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운동으로 더 나아갈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분들에게서 찾았다는 생각이 좀 들었어요. 법과 시민사회라고 하는 안전망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분들이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대학 밖에서 일용직 노동자들과 연대한 인력시장 운동, 환경운동, 나리타공항 건설 반대 운동, 그 다음에 70년대 우먼리브 운동 이런 식으로 각자의 작은 현장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면서 나름의 싸움을 이어갔다는 것, 어쨌든 바리케이드는 해체되었지만 전공투를 계기로 해서 그 전까지는 권위에 눌려서 나오지 못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오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전공투와의 접점이라고 해야 되나요, 접속지대라고 해야 될까요, 또 동아시아라고 하는 식민자로서의 과거를 현재 진행형의 일본의 경제적 식민주의와 연관지어서 전후에 최초로 문제삼은 굉장히 소중한 집단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라이 마리코가 본인이 갇혀있던 감옥을 그린 그림. 아라이 마리코씨는 ‘늑대’부대원은 아니지만 다이도지 마사시의 대학 동기로 전공투 활동 부터 함께 했고 무장투쟁에서는 빠졌다고 한다. 대학을 그만두고 고향 부근인 센다이에 있는 간호대학에 들어가서 활동 자금 지원, 폭탄 제조에 필요한 원료 등을 제공. 그래서 함께 체포되었고 10년 후 출소.
아라이 마리코씨의 어머니, 그들이 체포되고 나서 구원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


김효순


오늘 영화에도 보지만 홋카이도 장면이 많이 나오잖아요. 다이도지 마사시, 그리고 체포 과정에서 청산거리를 먹고 자살하신 분 그 분도 홋카이도 출신인데 왜 홋카이도 출신들이 많고, 왜 이렇게 조선의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집착을 했었는지 누가 좀 설명을 해주실까요?


김미례


사이토 카즈라고 하는 체포 당시에 청산가리 먹고 돌아가신 분인데 이 분 같은 경우는 중학교 때 만났던 역사 선생님께서 이탄키 (イタンキ) 바닷가를 가봐라, 거기에 가면 많은 유골들이 밀려오는데 그것을 보고 역사를 배워라. 거기에 있는 중국인, 조선인들의 유골들이 왜 여기서 이렇게 유골인 채로 이렇게 떠밀려오는지 알아봐라 라든지 그러면 도서관에서 찾아서 공부를 하고, 그리고 직접 현장을 가봐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후에 홋카이도를 떠나서 실제로 역사 현장이라고 하는 한국에, 배를 타고 들어와서 부산에서부터 지리산 혹은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곳 그리고 자기가 글로 통해서 봤던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보고 실제로 밟고, 걷고 직접 목격을 하고서 현장을 배웠다라고 쓰셨거든요.


다이도지 마사시 같은 경우도 항상 초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아이들하고 같이 운동을 못 하는 아이누인들이라든지 이런 친구들하고 같이 있거나 아이누인들이 살고 있는 그 집 주변에 있던 친구들을 보면서 왜 저들이 저렇게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 왜 그들이 철도에 떨어지는 석탄을 주워 팔아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던 거 같고요


글들을 읽으면서 이 사람들이 태어났던 고향에 이 사람들은 감옥에 갇혔거나 죽어서 돌아갈 수 없는 곳을 나는 한번 가보자라고 해서 카메라 감독하고 그들의 글에서 읽었던 장소를 직접가서 촬영을 하기 시작을 했어요. 홋카이도로 떠나는 여정과 그들이 살았던 장소 다녔던 학교그리고 이미 폐허가 돼서 사라진 그들의 집을 다니면서 이제 그분들은 돌아오지 못하는 그리고 어렸을 때 기억이 남아있는 곳을 이미지로 남겨서 내 영화로 좀 만들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해서 홋카이도 이미지가 좀 많이 있습니다.


홋카이도 쿠시로에 있는 늑대의 다이도지 마사시의 고등학교 선배. 이 분의 집이 인쇄소를 하는데 여기서 하하하라도케이라고 하는 도시게릴라병사독본을 인쇄함. 이전에 홋카이도가 아이누모시리였고 아이누인들이 이곳에서 모여 살았었다고 설명하는 장면임.


김효순


올해 1월달에 전갈그룹의 기리시마 사토시가 50년 수배생활 끝에 말기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병원을 찾아가 자기 이름으로 죽고 싶다면서 신분을 밝혀서 일본사회가 뜨거워졌습니다. 그 때 마침 일본에 갔었죠.


김미례


코로나 이후 2020년 그리고 2021년에 일본에서 개봉을 하고 나서 계속 그분들을 만나 뵙지 못했었어요. 그 이후로 계속 만나 뵙지 못하다가 올해 1월에 올해는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둘이서 1월 26일인가 그때 가기로 일정을 잡아놨는데, 가기 며칠 전부터 그런 보도가 나오더라고요.


기리시마 사토시라는 사람이 죽을 때는 나의 본명으로 죽고 싶다면서 경찰에 자수를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도착해서 지원연 분들과 인사하는 자리를 1월 29일에 만들었는데, 그날 오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그분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누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주검을 유족이 거부하니까, 지원연에서 위임장을 써주면 우리가 주검을 인수 받아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했는데, 유족이 그것조차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진의는 정말 알 수가 없지만 그동안 관계를 맺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는 게 공식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도쿄에서 가까운 가와사키시라는 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가와사키시는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지원연의 어떤 분이 말씀하시길, 그래서 그분이 더 오래 그곳에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매우 신중하게 현금으로만 사용하고 사회복지에 전혀 기대지 않은 채로 스스로 살아가셨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SNS를 보면, 어떻게 일본의 사회복지를 하나도 혜택받지 않고 저렇게 50년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그 사람들은 뭘까라는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SNS나 보도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고, 기리시마 사토시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기해하고 호의적인 젊은층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에키테 유키코라는 분은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기리시마 사토시 씨가 납골당에 모셔지면 만나러 갈 수 있다고 해서 그게 너무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심아정


대지의 엄니와 늑대와 전갈 세 부대가 모두 관여한 작전이 있어요. 2차 세계대전 말기에 기소 단위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인과 조선인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한 사건이 있었죠. 이 사건 이후에도, 75년에도 말레이시아에서 댐을 건설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던 하자마구미라는 건설회사가 있었습니다. 그 하자마구미에 대한 공격이었는데요. 저는 이러한 공격이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전범기업이 현재 진행형으로도 그 폭력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동시대에 발신한 것이죠.


지금 50년이 지난 상태에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한국 사람들이, 발신은 했지만 수신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망망대해를 향해서 던져졌던 병 속의 편지를 50년 지나서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함께 미례 감독과 그날 갔을 때 너무 당황스러웠던 건, 3년 동안 한국에서 공동체 상영을 어떻게 했는지 보고하는 날이었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 속에 계신 분들 앞에서 입이 잘 안 떨어졌지만 그래도 열심히 얘기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망망대해를 향해서 던졌던 편지를 이렇게 받아 안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한테 빙의할 순 없어요. 저는 일본인도 아니고 그 시대 사람도 아니지만, 뒤늦게 받아가는 그 과제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받아 안고 있는지, 지금 한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더 이상 피식민자로 사는건 아니라는 인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까지 다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김효순


일본에서의 공동체 상영과 지원연 활동을 소개해주시죠


심아정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청중들과의 만남,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북미 쪽에서도 여러 상영회가 있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바로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침략당한 홋카이도의 니부타니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아직도 여성 샤먼 레라라는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고, 그 작고 아늑한 거실에서 약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상영을 했습니다. 관객은 홋카이도의 아이누 출신 여성 샤먼 레라와 그분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일본 사람들이 버리고 간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포함한, 여러 사정이 있어서 그 집 앞에 버리고 간 아이들이었습니다. 더 많은 경우에는 20명까지 키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아이들이 장성해서, 그 사람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 도쿄나 먼 도시에서 모여진 사람들과 함께 봤던 공동체 상영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미례 감독도 잠깐 얘기해주셨지만, 늑대부대 4명 중 3명이 홋카이도 출신입니다.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이도지 마사시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탄광에서 석탄 실어가는 갱차가 커브를 돌면서 나갈 때 떨어진 석탄을 줍는 아이누 아이들을 보면서 저걸 주워서 혹독한 밤을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를 걱정했던 그런 심성이 있었던 소년이었고, 사이토 카즈라는 분은 후지제철의 사택이 있는 홋카이도의 무로란에서 자랐고, 친구들과 자주 놀러갔던 해변이 영화에도 나오는 이탄키 해변입니다. 전쟁 중에 강제 연행된 중국인들의 뼈가 많이 발견된 그런 곳이죠. 그래서 아이누와 조선인들을 이웃으로 둔 다이도지 마사시와 사이토 카즈 같은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와 함께 있진 않았지만, 공동체 상영하는 그날 밤에 함께 있다는, 가족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는 홋카이도의 거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1987년에 법적인 여동생이 만든 소식지 '기타코부시'라는 소식지가 있어요. 영화에도 잠깐 나오는데요, ‘기타北’라는 게 북쪽이라는 뜻이잖아요. 다이도지 마사시가 직접 지은 이름이에요. 근데 그 코부시라는 꽃이 북방형으로 변종된 품종이기 때문에 '기타'라는 말이 붙어서 '기타 코부시'인데요, 감옥 안과 밖을 이어주는 소식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소식지로서 87년부터 다이도지 마사시가 사망했던 그때까지, 그러니까 죽지 않았기 때문에 30년간 계속 이 소식지도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소식을 나누면서 이런 이야기도 함께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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