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15 홍위대시위로 권력투쟁에 불지른 중공의 젊은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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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3-04-0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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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67.1.15


 


홍위대시위로 권력투쟁에 불지른 중공의 젊은 세대


 


인생 제1… 「() 사상


 


붉은 스카프5천만 명


파리 한 마리 잡는데도 반미구호 내걸고


집회의 연속 닷새 동안 철야토론도


 


내가 본 그 세대


돌아온 세 목격자의 증언


▲차영환 씨(73) 차균희 경제과학 심의회의위원(전 농림장관)의 부친, 65년1월22일, 40년간 살던 중국에서 돌아와 현재 경기도 김포읍 북변리 375에서 장남 차균조 씨와 농업 겸 잡화상 경영.


▲금부석 여사(69) 서울 승동교회 이대영 목사 부인, 산동성 청도에서 55년4월 귀국.


▲이보희 양(27) 이대영 목사 따님, 서울음대 졸, 어머니 김부석 여사와 함께 청도에서 55년4월 귀국.


 


[대담]


리영희 본사 외신부장


김준길 외신부 기자


<1월13일 오후 6시>


 


<편집자주>


세계를 놀라게 했던 중국대륙내부의 문화대혁명 소동도 중국 혁명지도자 모택동 세력이 더욱 힘을 굳히는 방향으로 끝나는 것 같다. 중공을 가보지도 못한 국내외의 식자들, 전문가들에 의한 편론도 많았으나 대혁명의 불길을 지른 중국대륙의 청소년-홍위병들의 실태에 관해서는 알려진바 없다. 앞으로 중공을 지배할 중공의 청소년들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그들의 생활실정은 어떠한가를 모르고서는 중국대륙의 대파동의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없다. 이런 궁금한 점을 풀어보기 위해 본사는 과거 오랫동안 중공에서 살다 돌아온, 드문 소식의 소유자인 세 분을 각각 자택으로 찾아 그 실태를 들어보고, 중공을 방문했던 서방세계 기자들의 기록과 함께 중공의 사회면 남녀 젊은이들의 오늘과 내일을 엮어본다.


 


젖만 떨어지면 모동요(毛童謠) 가르쳐


중국대륙은 조직된 소년소녀들이 앞장서는 나라다. 25세 미만의 젊은이들은 약 7억으로 추산되는 중국대륙의 전 인구의 적어도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현재 문화혁명의 주력부대를 이루는 홍위대는 그 속에서 조직된 것이다. 1949년 중공정권 수립 이후에 태어난 적어도 2억 이상의 청소년 및 유년들은 젖 떨어지기가 무섭게 「몰유모택동, 몰유중국」(모택동이 없으면 중국이 없다)는 동요를 배운다. 차 옹은 요령성 흥경현 산골학교에서도 처음 입학한 아이에게 제일 먼저 그 노래를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모택동 사상은 강제로서가 아니라 설득방법을 취하는데 특징이 있다. 중공이 파리를 퇴치한 예가 바로 청소년들에 대한 계몽과 설득에 의한 「기적」이다. 김 여사는 49년 산동성 청도에 들어온 팔로군(당시의 공산군)이 제일 먼저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파리 잡는 운동을 벌인 일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너희들이 파리 한 마리를 죽이면 그만큼 나라의 위생이 좋아지고, 그것은 중국사람과 나라가 강해져서 지금 부강한 미국을 이기는 힘이 된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죽이는 파리 한 마리 한 마리는 너희들 보다 키도 크고 힘이 센 미국인을 죽이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설득을 받은 아이들은 공산군 병사들이 나누어주는 집게와 머큐룸병을 받아들고 거리로 들로 나가 구더기를 파묻고 파리를 찾아 잡아 그 병에다 담고 많은 수효대로 상을 탔다. 이렇게 한 달이 못 가서 청도 시의 파리는 말끔히 없어졌다는 얘기-, 소년, 소녀에서 시작한 이런 운동은 성인운동으로 확대, 얼마 뒤에는 그 넓은 중국에서 파리가 사라지는 「기적」을 낳게 했다.


파리를 잡아 상을 많이 탄 아이들은 붉은 스카프를 나누어 받았다. 이 붉은 스카프는 바로 모택동의 소년선봉대의 표시다. 30년 전 모택동의 군대가 장개석 군대에 쫓겨 2만5천리를 걸어서 답파한 장정을 할 때 아이들로 조직된 소년선봉대는 적의 정세를 살피는 연락병 비슷한 일을 효과적으로 해낸 준정규 군대였다. 이것이 홍위병의 전신이다.


 


전국대원수는 5천만 명이나


신화사 통신에 의하면 64년6월 현재 9~15세의 소년선봉대 대원은 전국적으로 약5천만을 헤아린다. 만하자면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그 대원인 셈인데, 차 옹은 심양(봉천) 거리에서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른 소년선봉대들이 길가에 서서 가래침을 아무데나 뱉는 어른들에게 점잖게 주의 주는 모양을 목격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1백20만이나 되는 고문들로부터 설득교육을 통하여 철저하게 모택동 사상을 배운다.


15~24세의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할 수」 있다. 59년 현재 단원 수는 2천5백만, 그 전 신민주청년단의 후신인데 거의 정당에 방불한 조직이다. 그들은 반혁명분자로 몰린 친아버지를 비판하고 당에서 벌이는 「운동」에는 솔선하는 모범을 보여야한다. 이렇게 해서 전체의 이익을 위한 사회의식, 정치의식을 기른 청소년들의 사생활은 물론 개인주의는 철저히 배격한다.


 


중공식 로맨스 아버지도 비판


조직된 젊은이들의 남녀관계는 자유롭다.


그러나 그들의 로맨스는 결코 서구 사회에서와 같은 전 인격적인 연애는 아니다. 그들의 낭만적인 사랑은 혁명의 아버지 모택동과 그가 남긴 전설에다가 바쳐야한다.


문화혁명과 함께 홍위병들은 30년 전 모택동 혁명군의 각고를 학습하는 뜻에서 혁명의 성지처럼 숭앙받는 정강산, 연안, 모(毛)의 고향인 상담 등지를 걸어서 「장정」하는 심신단련을 전국에서 벌이고 있다. 최근 중공을 취재한 일본 기자 다카기 씨는 모(毛)의 고향에서 장정 온 홍위병들의 모습을 얘기한다.


명소로 지정된 모(毛)의 고향집 마루에 걸린 초상화들-혁명으로 죽은 모(毛)의 동생들, 모(毛)의 제2부인과 그 아들의 초상화를 쳐다보는 열둬서너살 된 소년소녀들의 눈에는 마치 사랑하던 죽은 애인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눈물에 젖어 있더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모나 애인에게 쏟는 전 인격적인 사랑은 당과 혁명에다가 바치고, 가족으로부터는 독립되고 사회의 이익을 위하는 철저한 모제자(毛弟子)들이다.


 


애인보다 중한 당에의 애착심


따라서 이 젊은이들은 제이의적인 남녀 간의 사랑을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양은 청도의 젊은이들이 공산화한 뒤로 그전의 봉건적 습성에서 벗어나 확연하게 남녀 관계가 자유로워진 것을 기억한다. 같은 나이 또래로서 그전의 중국 소년소녀 사회를 아는 이 양에게는 그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현재의 청소년들은 중공이 집권 즉시, 1950년 신혼인법을 실시하여 배우자의 자유선택, 이혼의 자유, 여성재산의 독립 등을 규정한 사회개혁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한때 결혼 질서가 크게 문란해진 일도 있는데, 차츰 부모가 정해주는 「지시결혼」이 줄어든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김 여사는 청도에 있을 때 그러니까 그 혼인법이 실시된지 2,3년이 지나도록 공산당원들은 비교적 부모허락을 개의치않고 결혼하는 경향이었으나, 일반에서는 역시 부모의 허락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결혼식장에도 한때 모()의 사진


차 옹은 합작사(인민공사)에서 간단한 절차로 해치우는 농민들의 결혼식을 많이 보았다. 처음엔 식장에 반드시 모(毛)의 사진을 걸도록 했다가 뒤에는 없앴다고 한다. 돈의 여유가 있는 친구들은 큰 음식점을 결혼식장으로 쓰는 수가 있으나 대부분은 가난하기 때문에 농민은 합작사에서, 노동자는 공장 부속식장에서 간소하게 해치우고 즉시 부부중심의 독립생활에 들어간다.


젊은이들의 결혼연령은 법적으로는 남자 20세, 여자 18세로 되어잇다. 그러나 중국청년보에는 최근 북경의과대학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일찍 결혼하는 것은 확실히 몸에 해롭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연령은 남자 25~29세, 여자 23~27세이다. 법에 제시된 결혼연령은 그 최저한계를 뜻할 뿐이지 결코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결혼연령이 젊은이들에게 무슨 영향이 있을까? 공산당은 가정생활에서 소모되는 젊은이들의 에네르기를 사회적인 활동으로 돌릴 때 젊은이들은 아내와 자식에 대한 유대보다도 사상과 혁명에 대하여 더 깊게 맺어질 것을 노린다. 중국의 유명한 대가족 제도는 이렇게 해서 남녀 부자의 동자격적인 세분화와 사회적 독립으로 바꿔지고 그 새로운 환경 속에서 홍위병이 자라낫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배력은 탁아소에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 도시의 공장은 공장 안에 처음부터 탁아소가 생겼지만 농촌에서는 합작사가 생길 때 비로소 마련되었다고 한다.


 


웬만한 농촌선 중학진학 못해


누구나 직장을 갖기 때문에 어머니는 출근과 함께 직장의 탁아소에 어린 것을 맡긴다. 학교는 철든 젊은이들을 가족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그 다음단계이다.


교육은 무료이다. 김 여사가 살던 청도에서는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대부분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 옹이 살던 흥경현과 같은 농촌에서는 중학교 진학부터는 힘들다는 것이다. 입학시험에서 사상 성분이 중요한 참고가 되지만 대체로 공부를 뛰어나게만 잘하면 어려운 대학까지도 가게 된다.


모택동 사상을 필수과목으로 하는 교과과정도 중요하지만 직접 농장이나 공장에 들어가서 일하는 실습노동이 더욱 중요하다. 도시학생들은 방학이면 반드시 농촌 합작사를 단체로 찾아가 합숙하며 노동의 가치를 배운다. 차 옹네 합작사에서도 방학이면 도시의 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묵으면서 일했다고 한다.


이것은 책만 읽은 인텔리가 노동을 멸시하는 심리를 고치려는 것이다.


요즘처럼 문화혁명이 고조되고 있을 때는 학교는 물론 휴강이다. 학업보다는 혁명에 앞장서서 홍위병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걸어서 연안을 탐방하고 걸어서 혹은 국가가 운영하는 기차를 무료로 타고 북평을 찾아간다. 차 옹은 귀국하는 길에 북평을 구경했는데 요새 홍위대가 1백만씩 모인다고 보도되는 천안문 앞 광장은 실제로 수백만 명이 모일 수 있을 만큼 들판처럼 넓다고 한다. 『굉장히 큽데다. 백만이 뭐요. 몇 백만 명도 모일 수 있을거요. 하여간 큰 벌판 같습데다.』- 차옹의 말이다.


 


학교에서부터 비판정신 길러


소년선봉대며 공산주의청년단 같은 조직에서는 물론 학교생활에서 젊은이들은 끊임없는 정치적 설득교육을 받는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토의하는 시간, 서로 동료의 잘못을 비판하는 시간, 틈 있는대로 집회가 열린다. 젊은이들이 자라서 합작사나 공장의 일원이 될 때 똑같은 집회를 겪어야 한다. 집회를 지도하는 선생이나 당 간부가 계획한대로 모두들 사이에 결정이 날 때까지 토론은 계속된다.


차 옹의 합작사에서는 정부에서 발행한 채권을 사는 문제를 놓고 5일 밤을 새운 일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은 토론으로 결정된다. 학교나 합작사에서 무슨 문제가 제기되고 비판되거나 토론될 때 벽보(대자보)를 쓴다. 주장과 비판이 동시에, 그러나 당 간부의 방향에 따라 적힌 벽보를 통과하여 그 집단원들은 여러 가지 주장을 보고, 결국 당 간부들에게 설득당하여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스포츠-오락 홍위병에 보급


젊은이들 사이에 스포츠와 오락은 절대적으로 보급되어 있다. 영화나 연극(주로 뮤지컬로된 경극)은 그 테마가 대부분 모택동 사상적이다. 반혁명적인 생각과 행동에 빠졌던 주인공이 간곡한 당원의 설득으로 다시 열려한 모(毛)사상 숭배자가 된다는 식의 얘기-, 차 옹은 그런 영화나 연극을 때로는 의무적으로 보기 위하여 합작사 월급에서 그 입장료를 단체 지불할 때 도매금에 지불하기도 했단다.


젊은이들의 취미와 특기는 상당히 중요시된다. 이 양은 개인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는데, 그때 같이 공부하던 중국인 학생들은 퍽 열심이었고 학교에서도 매우 장려하더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의 노력은 과학기술에 집중돼있다. 젊은 과학자, 기술자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과정으로 학교를 마친 젊은이들의 일터는 성향과 특기에 따라 보장되어 있다. 『일하기 싫어도 안 할 수 있나요. 일 안하면 못 먹고 일만하면 먹게 되어 있으니까요』- 차옹은 회상한다. 『나야 뭐 알갔소. 거저 사회에 해만 끼치지 않으면 누구도 먹을 걱정할 필요는 없디요.』


앞으로의 중국은 새 교육과 새 정신을 받아가지고 자란 오늘의 홍위병-청소년들이 지배하는 「무서운 중국」이 될 것이라고 차 옹은 말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