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후배 기자들에게 하는 당부: ‘신문지’를 만들지 말고 ‘신문’을 만들자」

언론과 지식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1-21 20:19
조회
202

9-3. 「후배 기자들에게 하는 당부: ‘신문지’를 만들지 말고 ‘신문’을 만들자」(1988년, 자유인)


 


 


한국기자협회보』가 청탁한 이 글은 두 가지 사과의 말을 가지고 시작해야겠다. 한 가지는 ‘기자협회’와『기협보』에 대한 사과고, 다른 한 가지는 기협에 속하는 후배기자들에 대한 사과다.
듣자 하니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기협보』가 15년 만에 월간에서 주간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1968년 8월 3일에 창간되어 주간으로 발간되던『기협보』가 73년 8월 3일부터 월간으로 격하(?)되는 시련을 당한 것이 나 때문이었다. 지금의 젊은 기자들은 모르겠지만 그해는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으로 독재체제의 자세를 가다듬은 박정희 정권이 보도기관의 통폐합을 단행한 해다.
그 전해에 언론계에서 쫓겨나 대학으로 옮겨가 있던 나는 그 꼴을 보고서 정부의 언론탄압을 비난하는 글을『기협보』에 주어 싣게 했다.
「신문이 하나 둘 사라지는데……」라는 제목의 이 글이 게재되자 나는 즉각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또 며칠 동안 호되게 당했다. 『기협보』는 일단 정간 처분을 당했다가 월간으로 바뀌어 발행이 허용되었다. 그 뒤 15년간 월간으로 참아준 ‘기협’과『기협보』에게 그리고 그것을 읽어온 기자들에게 15년 전을 회고하면서 사과하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좀 다르다.
지난 한세월 동안 나에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新聞紙)는 있었어도 ‘신문’(新聞)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 종이)는 나에게 조석으로 배달돼왔지만 ‘새 소식’(新聞)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한결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왔다.
이것이 기자들에 대해서 이 기회를 빌려 사과하는 두 번째 이유다.
이제 ‘신문지’가 ‘신문’이 되고, ‘언롱인’들이 ‘언론인’으로서 정신을 차리려는 듯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나로 말미암아서 정간과 주간화의 고난을 겪어온『기협보』가 다시 본래의 주간으로 되살아난다는 기쁜 소식을 들으면서 월간의 마지막 호에 쓰는 나의 심정은 각별한 바가 있다.
5년 만에 나에게도『기협보』의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주겠다니 세상도 다소간 달라진 성싶다. 이런 전환점에 선 기자들은 몇 가지 반성과 함께 굳은 다짐을 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첫째는, 흔히 말하는 기자의 부르주아적 관점의 문제다.
지난 군부독재 기간 중, 정권과 신문사의 야합 관계의 결과로 각급 기자의 보수는 한국 사회의 최고 수준이 되었다. 소득과 생활 수준은 그 사람의 인간적ㆍ직업(사회)적 관점을 결정한다. 그 실례로, 작년 여름 노동자들이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일 때, 신문기사가 분쟁 당사자의 어느 쪽을 두둔했던가를 생각하면 된다. 어째서 신문기자들은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영세민들의 정당한 권리투쟁에 그렇게도 냉담해야 했는가? ‘경제가 망한다’고 떠들었던 신문기사와는 반대로 한국의 경제는 작년에 17퍼센트의 최고 성장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관점을 재점검해보자.
둘째는, 빼앗은 쪽의 입장에 서지 말고 빼앗긴 쪽의 입장에 서자는 것이다.
최근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국회 구성의 세력 분포가 달라지고 야당이 강해진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중요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어느 날의 신문기사는, 국정감사권으로 말미암아, 국민 대표인 국회를 무시하고 여태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정부와 장관ㆍ국장들의 입장이 어려워진다는 내용으로 일관돼 있었다. 어째서 국정감사권을 직접 빼앗겼던 국회와 그로 말미암아서 철저하게 농락을 당해온 유권자와 국민이 이러저러한 권리를 회복ㆍ행사하게 되었다는 쪽으로 보고 또 쓰지 못하는가? 소위 ‘지역감정’의 문제도 그렇다. 그것을 만들어낸 쪽은 탓하지 않고, 그로 인한 희생자쪽을 매질하는가? 생각할 일이다.
셋째는, 권력에 한눈을 팔지 말라는 주문이다.
언론계 출신도 권력 주변에 가서 옳고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있다. 그 권력이 민주주의적 권력일 경우에 말이다. 그런데 역대 군인독재 정권, 그것도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군인독재 정권에 빌붙은 소위 ‘전직 언론인’이라는 작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를 똑똑히기억하자. 국민의 권리, 특히 언론자유를 말살하는 가장 교활하고 간악한 짓을 한 것이 당신들의 그 선배들이 아니었던가? 당신들 속에서는 다시는 그런 배신자들이 나오지 않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넷째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주의화’(主義化)된 반공 이데올로기를 털어버리라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차원에서의 ‘사상’은 공산주의 사상 그 자체를 포함한 많은 사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마르크스의 논문한 편 저서 한 권 읽어본 일도 없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관한 진지한 이해의 노력도 해보려는 지적 탐구심이나 호기심조차 갖지 않고 뭐든지 좌로 가르고 우로 나누는 식의 ‘용공’이니 ‘좌경’이니 하는 따위의 흑백논리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들의 그 같은 ‘주의화한’단순사고와 그에 바탕한 기사들로 말미암아서 이 땅의 얼마나 많은 훌륭한 정신과 육체가 시들어갔는가를 이제는 한번쯤 반성해볼 만하다.
다섯째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민족의 남ㆍ북이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당파성’에 관해서다. 그리고 그런 보도자료로 주어지는 행정부, 정보(안기)부, 경찰, 군의 발표문을 기사화할 때 독자적인 판단을 가져달라는 말이다.
그런 종류의 발표문이 흔히 침소봉대ㆍ각색된 것이 많고, 심지어는 조작 날조된 것조차 있었다는 것을 지난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바다. 독자 대중에게 그것을 전하는 당신들은 최대한의 과학적ㆍ상식적 판단력을 동원해 그 진실을 규명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고 발표문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자위하거나,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적대 감정을 부채질하는 사족까지 첨부하면서 득의만면한다면 당신은 ‘타스 통신’기자나『로동신문』기자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럴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는 ‘내외 통신’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재료에 대해서다. 우리 사회는 ‘공개된’ ‘민간 운영’의 ‘경쟁적’뉴스 기관을 통한 보도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사회다. 국내외 환경의 개방 기운이 짙어져가는 지금, 어째서 ‘가면’을 쓴 정부기관의 통신이 북한에 관한 뉴스를 독점해야 하는가? 신문은 북한 소식을 입수할 수많은 독자적인 정보의 채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독자적으로 활용해서 보도해야 한다.
만약 ‘가면’통신이 제공하는 기사를 강제로 사용해야 한다면 신문은 그것과 별도의 독자적 채널에서 입수하는 뉴스로 ‘진실’과 ‘공정’과 ‘공익’을 유지할 의무가 있다. 정치적 목적으로 국민을 농락하는 기사 취급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다. 권력과 정보기관에 길들여진 기자와 신문의 생리를 대담하게 거부할 때 당신들은 비로소 독자가 믿음을 주는, ‘언롱인’이 아닌 ‘언론인’이 될 것이다.

15년 만에 귀한 지면을 할애해준『기협보』와 후배기자들에게 너무 많은 주문을 적은 것 같다. 이제 정말 ‘신문지’가 아니라 ‘신문’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실례임을 양해해주기 바란다.•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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