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광주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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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21 20:36
조회
207

10-3. 「광주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1993년 7월, 새는)


 


 


‘광주’라는 이름은 광주 밖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아주 다른 이미지를 한꺼번에 떠오르게 한다. 민족문화의 극치인 전라도지방의 그윽한 민중예술과 삶의 문화가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민족과 사회의 기세가 막힐 때마다 처절한 몸부림으로 그 고비를 정면 돌파해온 역사상 크고 작은 전라도 민중의 항쟁이다. 광주는 그 양면을 상징한다.
부드럽고 유한 것이 굵고 강한 것과 서로 배척함이 없이 융화해있는 전라도의 기풍은, 나 같은 평안북도 압록강 유역 태생의 머리와 가슴에게는 가히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는 예술적 소양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전라도의 민속예술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즐길 뿐, 잘 이해하지 못한다. 백제의 예로부터 긴 역사를 통해서 이 지방 주민이 겪어온 삶이 끈적한 진처럼 우러나온 것이 광주가 상징하는 전라도의 문화와 예술이라고만 이해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한’(恨)의 문화라고도 말하고, 억압당한 가난한 백성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그와는 달리, ‘광주’로 상징되는 굳고 강한 다른 한 면에 관해서는 웬만큼은 느끼고 또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 또한 주제넘은 말이다. 조선의 남쪽 전라도 땅에서, 대대로 뿌리내려 삶을 살아온 토박이가 아니고는 그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쨌건, 광주는 오랜 왕조시대와 일제하 및 해방 후의 시기를 통해서 한국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왕조 양반 세도하의 수많은 민란. 한말, 외세와 결탁하여 가렴주구를 일삼는 정권에 대항해서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 일제의 국토 병탐에 항의했던 각 지방의 의병. 일제하 사회혁명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위적 소작 농민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사건으로 분출한 항일운동의 꽃. 해방 후에는 친일파 권력의 비호를 받는 계급적 적에 대한 전라도 농민의 피어린 싸움…….

언제나 그곳에있었다

시대에 따라 그 대상은 바뀌었지만, 전라도 민중의 끈질긴 투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광주가 있었다. 광주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언제나 전라도의 빛이었다. 그리고 전라도는 민족사회 내부의 억눌린 계층의 혁명운동과 생존권 투쟁에서 그 사상적ㆍ실천적 전위에 서왔다.
때로는 민족 전체가, 때로는 억압받는 계층이, 행동을 이끌어갈 영감이 아쉬워지면 어디서나 전라도에 눈을 돌렸다. 그럴 때마다 광주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상과 문화와 인재를 마련하고 제공했다. 전라도는 이 민족의 가장 귀한물질과 정서와 두뇌의 보급창 노릇을 해왔다.
그 보급창은 푸면 풀수록 물이 고이는 샘처럼 끝없이 풍부한 예술과 문화로 이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푸근히 채워주었다. 그 보급창은 그러나 싸움이 필요할 때는 전사들이 요구하는 무기와 전략과 용기를 마련해주는 병기창이기도 했다.
이것이 긴 왕조사와 일제 식민치하와 해방 후의 1980년 4월까지의 민족사를 통해서 전라도의 심장이자 두뇌인 광주가 맡아온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광주의 존재는 이 민족 생존권 안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그 빛도 한반도의 지리적 판도를 넘지 못했다.
1980년 5월 18일은 그 오랜 과거의 역사와 그 이후 사를 가르는 시대구분적 분기점이 되었다.
이 5월을 기해서 광주는 남한의 한 지방의 지도에 표시된 작은 도시명으로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동시대적 세계의 한 이념(理念)이 되었다. 광주는 ‘광주’가 되었다. ‘사우스 코리아’의 남단의 한 점은 1980년 5월 이후 세계의 한 정신ㆍ문화적 중심으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광주’와 ‘光州’는 세계의 ‘Kwang ju’가 되었고, 그 단어는 폭력과 부정에 항의하여 목숨을 바친 민주주의적 시민의용기와 감동적인 희생정신을 뜻하는 추상명사가 되었다.

3세계 민중의 희망과 좌절의 표상

제3세계 인민들 사이에서 이 추상명사는 ‘KWANGJUISM’으로 철학화되었다.
그것은 1789년 어느 날, 프랑스의 한 고유명사인 ‘바스티유’가 전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정신을 알리는 ‘자유ㆍ평등ㆍ형제애’라는 추상명사가 된 것과 같다. 낡고 흉측한 한 형무소의 이름 바스티유는 ‘바스티유’로 이념화된 것이다. 그 단어의 뜻은 ‘감옥’이 아니라 ‘혁명’이며, 권리 없는 백성들의 ‘인간화’였다. 그러나 그 단어는 그 후, 혁명과 인간화의 이쪽저쪽에서 세느 강의 물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다.
광주가 1980년 5월에 경험한 투쟁은 또, 그 110년 전인 1871년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파리 시의 영용한 시민들이 잔인무도한 제3제정(帝政) 계급의 군대에 대항했던 저 ‘파리 꼬뮌’의 ‘피의 1주간’과도 같다. ‘파리 꼬뮌’은 세계 인류사에 굵게 그려진 특이한 사건이다.
그것은 앞뒤로 빼어 3일간의 짧은 민중항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때까지의 두려움을 모르던 프랑스와 유럽의 포악한 지배계층에 준 공포와 타격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파리 꼬뮌’은 그후 수십 년 사이에 전 유럽 나라들에서 억압과 착취, 위선과 부정에 항의해서 일어서는 혁명의 신호가 되었다.
제왕의 군대가 파리 시민들에게 강요한 희생과 유혈 때문에 ‘파리 꼬뮌’에는 종교적 떨림으로 그것을 회상케 하는 장엄함마저 있다. 제정 군대의 포위 속에서,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의 무자비한 살육에 대항해서, 파리 시민들이 총을 들고 싸우다 죽어간 무덤에는 그 후 세계 곳곳에서 자유, 인권, 평등을 원하는 인간들의 뜨거운 기도가 보내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 무덤은 110년이 지난 오늘에서 더,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 뿌려진 고귀한 피의 의미로 평가되고 기억된다.
한국의 ‘광주’는 한국 민족만의 정신문화적 빛이 아니다. ‘광주’는 20세기 말의 ‘바스티유’이며 ‘파리 꼬뮌’이다. 그래서 광주는 세계의 ‘광주’인 것이다.
‘광주’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락 무도한 군부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제3세계의 많은 나라 인민들에게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영감(Inspiration)인 것이다. 그들의 미래를 비쳐주는 행동의 프로토타이프(원형)이기도 하다. 광주는 이미 고유명사가 아니다. 세계화한 추상명사다.

거부하고 싶은 역사와 현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국적 현실로서의 ‘광주’의 문제로 돌아오자. 추상에서 다시 구체로 내려오자. 세계 인류의 희망에서 광주로, 그리고 그것이 대표 또는 상징하는 남한의 전라도 땅으로 내려와보자. ‘광주’라는 비극을 분출케 한 전라도의 고통과 서러움에 눈을 돌려보자. ‘광주’가 한국의 정신문화적 중심이고 세계의 이념으로 일반화된 뒤에는 전체 전라도민의 한 맺힌 현실적 삶이 있다.
한민족과 인류에 남긴 ‘광주의 영광’은 어쩌면 전라도민 본인들에게는 거부하고 싶은 역사이고 혐오스러운 현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광주사태’로 추상화된 ‘광주’는 이 민족의 해방 이후 남한에 축적된 수많은 부정적 요소들의 총체적 폭발이었다.
‘광주’의 중요한 의미는, 전라도(주민)의 3중의 소외구조를 한쪽 틀로 하고, 그것으로 해서 나머지 국민 전체를 동시적으로 소외시킨 다른 소외의 틀로 구성되어온 전 국가적인 두(2) 층의 소외제도의 총체적 파탄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인은 경상도인 권력과 그 제도에 의해 다른 국민에게서 소외를 당했다. 그 결과,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ㆍ인간적 불이익을 회피하려는 마음에서 스스로 자신의 출생지와 정체(正體)를 위장하는 반(半)자발적 ‘자기상실’에 빠졌다. 이중적 소외다. 그들은 더 나아가, 대립적 사회에 대한 강요된 증오심과 상호이익의 보호를 위해 ‘부족’(部族)적 결속에 의존함으로써 3중적 소외를 결과했다.
이 같은 일부 국민에 대한 비인간적 소외구조는 동시에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같은 사회의 나머지 대부분 구성원의 제도적 비인간화를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사적 소외의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더욱 제도적ㆍ인간적 폭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총체적 타락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광주’에서 종말의 신호를 울렸다.
유럽의 백인ㆍ자본주의ㆍ기독교(신구교) 사회는 그들 제도의 퇴폐성과 폭력성, 그리고 허울 좋은 위선을 은폐하기 위해서 어떤 ‘열등한’ 인간적 집단이 그들의 사회 속에 필요했다. 인간적 자질이나 덕성 및 집단적 특성에서 백인과 자본주의 선봉자와 기독교인들이 멸시할 수 있고 혐오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자기 사회구조 내부의 반항적 세력의 적대감을 외부적 존재로 분출시키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대상이 유대인이었다.
퇴폐적 체제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적개심과 증오심을 제도 밖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 피지배계급에게 사디즘(sadism)적 우월감과 멸시의 대상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것이 유대인이다.
만약, 유럽 백인ㆍ자본주의ㆍ기독교 문명 속에 유대인 집단이 없었다면 그들은 ‘유대인’을 만들어라도 냈을 것이다. 이 제도적 바바리즘(야만주의)은 유대인의 3중적 소외와 유럽사회의 중층구조적ㆍ총체적 소외를 본질로 했던 것이다. 이 바바리즘을 극단의 형태로 실현했던 것이 히틀러이며 나치즘(파시즘)이다.

한국의 아우슈비츠

인간성의 부정을 자신의 존재 원리로 삼은 히틀러의 극우ㆍ반공산주의ㆍ폭력숭배 체제는 마침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과 자신을 파멸시키고 말았다.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아우슈비츠라는 제단에 60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으로 바쳐졌다. 600만 명의 유대인과 유럽 백인문명의 야수성을 대표한 나치즘을 스스로의 체질에서 정화(淨化)해버림으로써 백인ㆍ자본주의ㆍ기독교 사회는 비로소 소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광주는 한국의 아우슈비츠다. 한국의 히틀러들은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1951년 2월 거창, 문경, 함평…… 등 수많은 곳에서, 크고 작은 아우슈비츠를 치렀다. 광주는 그 연장선상의 단말마적인 마지막 아우슈비츠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해방 후 한국의 히틀러들은 식민지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친일ㆍ반민족 행위를 일삼았던 가장 비열한 분자들의 직계 후예들이다.
그들은 동물이든 인간이든, 적대적인 자에 대한 공포감과 증오심을 불어넣으면, 동정심이나 자기억제, 심지어 희미한 동류(同類)의식조차 그 마음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동물적 본능에 대한 야수적 통찰력을 갖춘 자들이다. 그들은 살육해야 할 ‘적’, 또는 ‘빨갱이’, ‘공산주의자’가 자기들과 전혀 유(類)를 달리하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이 같은 동물심리학적 적개심과 증오심은 인간을 동물로 만든다. 이것이 1980년 5월 광주에 온 특전대다. 광주 시민은 하나같이 ‘빨갱이’ ‘적’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 증오심과 멸시감으로 열광한 병사들에게는 ‘벌레 같은 빨갱이’들과 그 ‘새끼’를 잉태한 임신부의 배에 대검을 찔러 넣는 데 따르는 심리적 장애가 제거된다.

스스로 내부 성찰할 때

이제 ‘광주’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틀림없는 답변은 오직 1980년 5월, 광주라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명을 달리한, 아직껏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원혼만이 말할 자격이 있다. 오늘을 살고 있는 광주 시민도 아닐 것이다. 그밖의 지역에서 1980년 5월을 구경꾼으로 살았던 사람은 더욱 아니다.
그와 같은 냉엄한 인식 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적대관계라는 것은, 증오라는 가장 낮은 동물적 본능으로 갚아지면 더욱 적대관계로 확인되고 고정되고 완결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理性)도 다음의 사실을 가르쳐준다. 즉 ‘증오’는 비인간화다. 상대방의 증오를 증오로 갚는 것은, 자기 자신의 행동을 ‘적’이 먼저 한 행동의 범주에서 단순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퇴화이며, 따라서 자신을 부자유하게 한다. 나의 행위의 선택이 ‘적’이 나에게 둘러씌운 그 한계 속에 굳어져버린다.
악(惡)을 악으로 갚고 싶은 당연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자만이 상호간의 부정적 관계를 변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적’과의 부정적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활짝 열어젖히는 ‘자유’(自由)를 ‘적’과 ‘나’에게 동시에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19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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