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1945년 ‘히로시마’ 영원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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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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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1945년 ‘히로시마’ 영원한 논쟁」(21세기)


 


내가 일본 ‘나이찌’(內地)의 히로시마(廣島)라는 도시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전 1년 반 동안 매일해온 대로, 경성(京城, 지금의 서울)의 남대문역 옆 봉래동(逢萊洞)에 있는 경성전기회사(지금의 한전) 물자창고로 가기 위해서 흑석동에 있는 하숙집을 나섰을 때였다. 1945년 8월 8일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에 종막이 내려지는 그해, 중학교 4학년생으로 열일곱 살이었다. 그때 조선에서는 일본 본토를 ‘나이찌’라고 불렀다.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일본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고 불렀다. 일제는 전쟁의 막바지여서 바닥이 드러난 생산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1943년 학기 초부터 전 조선의 중학교를 사실상 폐쇄하고, 전체 학생을 노동력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소위 전시학도동원령(戰時學徒動員令)이다. 이 학도동원령과 함께 5학년제였던 중학교가 4학년제로 단축되었다. 나보다 한 해 위의 클라스가 입학할 때의 꿈이던 1학년 졸업을 하지 못하고 소위 ‘단축 제1기’로 4학년 졸업을 하고 나간 뒤였다. 그 단축 4년제도 마지막 1년간은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였다. 나는 ‘단축 중학 제2기’로서 벌써 1년 반을 군수품 생산공장에 동원되었다가 그해 봄부터 시작된 경성시 소개(疏開)작업에 끌려나가고 있었다.
소개는 미국 공군의 폭격에 대비하여 불타기 쉬운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의 집들을 헐어버림으로써 경성 시내에 여러 개의 공간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 본토의 주요 폭격목표가 거의 바닥이 나자 B.29 폭격기가 경성 상공에 더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예상되는 이들의 폭격으로 인한 화재를 그런 공간지대를 만들어서 저지하자는 생각이었다. 지금의 동리 이름으로 말하면 청량리ㆍ왕십리ㆍ아현동ㆍ염리동ㆍ마포ㆍ공덕동ㆍ만리동 등, 주로 경성부의 여러 언덕배기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조선인 초가집들이 싹 헐려버렸다.
간단히 말하면 경성부 주민 가운데서 조선인을, 그것도 경성부에 사는 조선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의 조선인들을 몰아내는 작업이었다. 소개된 그전 동리들은 경성부에서도 가장 가난한 조선인 초가집의 밀집지대였다.
그날 아침에도, 지금의 만리동 꼭대기에 있던 허물어진 초가집더미 속에서 쓸모도 없는 전선ㆍ애자ㆍ두꺼비집ㆍ전등ㆍ소켓 따위를 회수하는 여러 학교 학생 작업대의 합류장이었던 봉래동의 경전 창고를 향해 흑석동의 하숙집을 나섰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길가 여기저기에 나와 앉아, 신문지를 펴든 사람 둘레에서 불안스러운 거동으로 서성대고 있었다. 발을 멈추고 어른들의 몸을 비집고 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큰 활자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50년이 지났는데도 이상하게 그날 아침 그 신문의 제목이 생생히 떠오른다.



대본영(大本營) 발표─지난 6일 미국 폭격기가 히로시마 시에 특수폭탄을 투하하여 피해가 심대




그 제목 밑의 기사는 짧았다. 제목만 유달리 큰 기사였다. 짧은 기사의 첫 줄은 히로시마 시가 거의 괴멸ㆍ전소되었고 막대한 인명피해가 났다는 사실을 말한 다음, 둘째 줄에는 이번에 투하된 폭탄이 “여태까지의 폭탄과는 전혀 다른 특수한 성능의 새로운 폭탄”이라는 대본영의 설명이 있었다. ‘원자폭탄’이라는 말은 없었다. 일본 군부도 그것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4일 뒤인 8월 10일, 당시 미국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외교기능을 위임받은 스위스 정부를 통해 일본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전달한 공식 항의문 중에 ‘원자폭탄’이라는 용어는 없기 때문이다. 그 항의문은 “본건의 폭탄은 낙하산을 달고 투하되어 공중에서 작열하여 극히 넓은 범위까지 파괴 효과를 미치는 것……이라고 길게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서 그렇다.
조선민족의 운명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전환점이 된 이 “낙하산에 달아매어 투하된 특수무기”가 ‘원자폭탄’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예상한 조선인은 그날 아침 한 사람도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그날 아침 ‘신형폭탄’의 소식을 듣고 봉래동 경전 자료창고에 모인 여러 중학교 학생들은 크게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들이 100명이 넘었지만, 신문보도로 알게 된 “낙하산에 달려서 투하된 폭탄”이 터진 뒤에 다가올 대일본제국 패망의 신호탄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때쯤에는 오끼나와 섬까지 점령당해서 전세가 날로 불안해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본군 대본영의 제도적인 허위보도와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 군국주의의 철통 같은 정보ㆍ언론통제 때문에 일본제국의 패망이 내일모레로 다가온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원자탄의 위력이나 일본의 항복을 예상해서가 아니라, 객지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공부는 못 하고 매일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생활에 지친 나머지, 시골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어머니 병세가 위독하니 급히 왔다 가라는 전보를 치게 했다. 그 전보를 읽은 수학 선생인 무뚝뚝한 일본인 담임교사는 별로 따져 묻지도 않고 학생여행증과 8월 10일의 철도표 구입증을 꺼내어 도장을 찍어주었다. 꼬박 이틀이 걸려 평안북도의 고향에 돌아온 12일, 나는 경성을 떠나기 전날인 9일에 또 “낙하산에 매달린 신형폭탄”이 나이찌의 나가사끼(長崎) 시에 떨어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리고 해방을 맞았다. 50년 전의 일이다.
두 발의 원자폭탄의 힘으로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된 한국(인)으로서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투하한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서 일본(인)과 같은 입장일 수도 없고, 그럴 까닭도 없다. 한국(인)으로서는 오히려 미국의 원자탄을 “낙하산에 매달려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으로 여길 만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의 원자탄 사용에 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반세기의 긴 세월이 흘러간 지금, 한국인들은 최초의 원자탄 투하를 둘러싸고 세계의 지식사회에 제기되어온 많은 논쟁들에 대해서 과거와는 다른 지적 관심을 가져도 될 만큼 성숙했다. 우리는 지난날 이 논쟁거리에 대해서 별로 알지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원자폭탄 덕분으로 해방된 한국민족으로서는 원폭투하로 전쟁을 승리로 종결한 미국의 논리만이 정답이었다. 그밖의 제3자적 관점이나 주장, 특히 일본 국민의 일부를 대변하는 감정이나 논리는 고려의 여지도 없는 것으로 무시되었다.
그중의 한 예가 히로시마 원자탄은 미국 군인 50만에서 100만의 생명을 구했다는 미국 정부의 공식논리였다. 이 같은 막연한 숫자의 신빙성에 대한 반론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두 개 도시의 일본인 비전투원 남녀노소 수십만 명을 일순간에 무차별 살상한 행위가 전쟁 승리자의 국제법 위반 및 ‘비인도적 범죄’를 구성하지 않느냐 하는 법이론도 나왔다. ‘비인도적 범죄’라는 개념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나치 독일에 대한 뉘른베르크 전쟁범죄 재판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규범으로, 패전자인 일본에게도 적용되었다. ‘비인도적 범죄’는 패자에게만 강요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 같은 법이론이나 이의제기는 승리자에 의해서 간단히 묵살되고 면책되었다. 승자의 범죄가 국제적 심판을 받기에는, 진주만 기습공격, 중국전선에서의 무차별 학살(예를 들어 난징 대학살), 포로에 대한 일상적 잔학행위, 점령지와 식민지 주민의 강제노동, 생물학적 생체실험 등 패자인 일본의 범죄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일본의 인구밀집 도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대한 원자폭탄 공격과 그 결과적 참상은 다만 ‘범죄 국가’에 대한 ‘합법적 응징’이라는 승자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통용되어 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오끼나와와 이오오지마(硫黃島)에서 격전을 치른 미국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50만에서 100만의 미국인 살상이 예상된다는 막연한 추측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자폭탄은 본토작전 없이 전쟁을 끝내주었기 때문에 그만한 미국인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원자폭탄의 인도(人道)론’이다. 미국이 이처럼 많은 피해를 예상했던 까닭은 두 가지였다.
일본은 막바지에 15세부터 60세까지의 모든 남자와 여자를 ‘국민의용전투대’로 편성하여 미국 군대와 일본 본토에서 대결한다는 최후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만주의 관동군(關東軍)은 사실상 남방전선으로 배치 전환되어 왕년의 관동군은 흔적도 없었지만, 미국으로서는 관동군의 본토이동 이전에 전쟁을 끝내야 할 긴박한 정세이기는 했다. 게다가 오끼나와 군도와 이오오지마에서 일본 군대와 민간인의 소위 옥쇄전술(玉碎戰術)이라는 ‘인간폭탄’의 처절한 저항에 직면한 미국은 일본 본토 작전의 피해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냉혹한 전쟁논리다. 이 논리가 미국 측 전쟁 책임자들에게 일본 본토전 피해 예상인원 50~100만 명이라는 계산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산법의 관제성(官製性), 일방성 및 오류를 지적하고 일본 도시에 대한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를 반대하거나 만류한 논자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원자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과학자단의 한 사람인 닐스 보어를 비롯한 몇몇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나치 독일이 패망한 1945년 5월경에,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간 원자폭탄의 실전사용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제조계획 자체의 백지화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했다. 그들의 논리는 원자폭탄이 비인도적 대량학살 무기로서의 위험성을 갖고 있으며, 나치 독일을 패망시킨 2차 대전 이후의 세계를 다시 대결과 전쟁(즉 핵전쟁)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소름끼치는 예측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 『히로시마의 그늘』제5장의 ‘알소스 작전’부분에 잘 기술돼 있다.
또 하나의 유력한 반대론은 첫 원자폭탄이 완성된 1945년 7월의 단계에서 일본은 원자폭탄 투하나 소련의 참전 그리고 미군의 본토상륙 없이도 45년 말까지는 항복할 것이라는 미국전략폭격조사단의 조사결과였다. 일본의 육ㆍ해ㆍ공군(특히 해ㆍ공군)은 사실상 완전 소멸되었고, 본토의 육군도 압도적인 미국 제공권하에서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아이젠하워 장군도 같은 견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주최한 원폭투하 B.29 폭격기 에놀라게이와 복스카 호 전시사업 자문위원회의 일원인스탠포드 대학의 역사학교수 번스타인은, 일본 본토에서 결전이 벌어졌을 경우에 발생했을 미국 군대의 사상자 수로 6만 3,000이라는 숫자를 제시한 바 있다(『世界』, 1995년 9월호, 28~32쪽). 전시의 미국 군부 측 주장인 50만에서 100만과 그 반대쪽의 6만 3,000 간의 차이는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해야 하는가, 아니면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고도 일본을 패망시킬 수 있는가의 중대한 선택을 가능하게 할 만큼 현저하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에 더 가까웠을까? 그 해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 폭발과 함께 영원한 과거의 역사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전쟁을 반대하고 인간의 양심에 의지해서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려는 염원이 끊이지 않는 한, 이 물음은 언제나 되살아나와서 우리에게 답변을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끼 원폭공격으로, 수백 년 동안 군사ㆍ법률학자들 간의 논쟁거리였던 전투행위(전쟁)에서의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차별성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즉 이론적 군사학의 시조 클라우제비츠 이후 논란이 되어온 전투원과 비전투원 사이의 경계와 차별성이 뭉개져버린 것이다.
미국은 나치 독일에 대한 뉘른베르크 전쟁범죄 재판과 일본군벌에 대한 도쿄 극동전쟁범죄 재판(정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ㆍ잔학행위를 “비인도적 행위”로 유죄판결했다. 히로시마-나가사끼 원자탄 공격이 표현의 완전한 의미에서 전통적 개념인 도시주민 비전투원 대량살상의 전형적 행위로 해석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전범재판에서 비전투원 대량살상ㆍ잔학행위를 유죄판결한 근거인 국제법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연합국에 의해 새로 그 개념이 도입된 “비인도적 죄”외에 전통적 개념인 ‘육전(陸戰)의 제규정 및 관례에 관한 조약’(1910년 발효), 그 ‘조약부속서’, 전시 해군포격에 관한 조약’(1910년 발효), ‘공전(空戰)에 관한 규칙’(1922년 서명됐지만 1945년 히로시마 원폭 당시에는 미발효) 등이었다.
이들 국제법에 근거해서 히로시마.나가사끼 원폭공격의 성격을 검토하기에 앞서, 참고삼아 두 도시의 피해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이보다 앞선 3월 10일 도쿄 대폭격에서는 2시간 22분간의 폭격으로 8만 명이 사망했다.)

●[표 1] 히로시마.나가사끼 원폭 피해

*高木仁三郞, 일본 원자력 자료정보실 연구원

히로시마-나가사끼 원폭공격을 비난하는 측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국제조약 위반을 지적한다.



육전 법규 및 관례에 관한 조약

제22조: 교전자는 적을 공격하는 수단 선택에서 무제한의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공격수단으로서 원자탄 선택 문제)
제27조: 〔포격의 제한 조항1)〕적에 대한 포격에서는 종교ㆍ기예(技藝)ㆍ학술ㆍ자선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건물, 역사적 기념 건조물, 병원 및 판자의 수용소는 그것이 군용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는 한, 그에 대한 피해를 배제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히로시마-나가사끼의 도시 성격 문제)
제35조:〔기본원칙〕
1. 어떤 무력분쟁에서도 분쟁 당사국이 전투 방법 및 수단을 선택하는 권리는 무제한이 아니다.
2. 과도한 상해(傷害)나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무기ㆍ발사체ㆍ물질 및 전투방법은 금지한다.
3. 자연환경에 대해서 광범위하고 장기적 및 심각한 손해를 끼칠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전투 방법과 수단은 사용을 금한다. (원자폭탄의 기능ㆍ효과ㆍ영향)
제36조: 〔신개발 무기〕신형 무기, 새로운 전투수단 및 방법의 연구ㆍ개발ㆍ취득ㆍ채용에는, 그것의 사용이 이 의정서 또는 당해 체약국에 적용되는 국제법의 다른 규정에 의하여 특정의 경우 또는 모든 경우에 금지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할 의무를 진다. (신무기=원자탄의 경우 해당)
제57조:〔군사공격에앞서는예방조치〕
1. 비전투적 민간주민에 대한 불공격 원칙.
2. 공격개시에 앞서는 예방조치.
   a. 공격목표가 군사적 성격 또는 용도인가를 확인할 모든 노력의 의무.
   b. 공격의 수단 및 방법 선택에서 비전투원, 민간인 및 그들의 소유물에 대한 손해의 파급을 최소화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예방조치의 의무.
   c. 군사목표가 있더라도 그에 대한 공격이 군사적 이익과 비교해 민간인과 그 재산의 과대한 피해가 예상될 경우에는 공격을 취소 또는 중지할 의무.
3. 같은 정도의 군사적 이익을 위해서 공격목표 선택이 가능할 때는 민간인ㆍ민간재산 피해가 가장 적은 쪽 목표를 선택할 의무.
4. 민간인ㆍ민간재산 피해 극소화를 위한 모든 국제법상 예방조치를 취할 의무.
5. 이 조()의 어느 규정도 민간인 주민과 민간인 재산에 대한 공격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國際條約集』, 有斐閣, 1985)




그밖에 많은 학자ㆍ전문가 들이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끼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 많은 국제법 규정을 제기했다.
위에서 열거한 국제법적 측면에서 볼 때, 원자폭탄이라는 “새로운 무기” “새로운 공격 수단” “새로운 공격 방법”을 처음으로 사용하려는 트루만 대통령이 주로 “민간적 성격인 도시”를 “공격목표로 선정”한 기준이 문제가 된다. 트루만 대통령은 이렇게 밝혔다.



내가 임명한 원자폭탄 전략위원회는 빠른 시간에 이 폭탄을 적에게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위원회는 또 폭탄투하는 아무런 사전경고 없이 실행돼야 한다고 권고했다. 뿐만 아니라 공격목표는 폭탄의 괴멸적인 위력이 분명하게 입증될 수 있는 것으로 할 것을 권고했다. 나는 물론 원자탄의 폭발이 상상을 초월하는 물적 파괴와 인명살상을 초래하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자탄을 실제로 투하하지 않고 다른 기술적인 방법으로 그 위력을 입증하여 전쟁을 끝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들은 원자폭탄의 직접적인 군사적 사용 외에는 수락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원자폭탄을 직접 투하하는 방법 외의 기술적인 방법, 이를테면 무인 사막에서 위력을 과시하는 방법으로는 전쟁의 종말을 초래할 수 없다는 견해가 그들의 결론이었다(『트루만 자서전』제1권, SIGNET BOOK, 1955, pp.462~463).




트루만 대통령은 바로 이 같은 권고를 받아들였다. 원자탄 개발계획을 추진한 전임자 루스벨트 대통령이 규칙을 존중하는 고전적 정치가였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그는 금융가 출신답게 냉철하고 현실주의적인 계산가였다. 그에게는 국제조약이나 국제법이 안중에 없었던 것 같다. 그 같은 계산가적 사람됨은 원자폭탄투하를 결정한 앞뒤 정황에 관한 다음 자백에서 알 수 있다.



원자폭탄을 언제 어디에 어떻게 투하할 것인지의 최종 결정권은 나에게 있었다. 그에 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나는 (원자)폭탄을 어디까지나 군사용 무기로 간주했고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전쟁의 법칙이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서 어디까지나 전쟁의 무기로 쓰이게 최선을 다했다(같은 책, pp.462~463).




그는 공격 (투하)목표들의 선정까지 직접 자신이 관여하여 결정하고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끼 원자탄 폭격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의 수수께끼가 아직 남아 있다. 여러 국제조약을 위반하면서까지 두 발의 원자폭탄을 3일 사이에 잇따라 투하해야 했던 목적과 이유다. 한 발만으로도 충분하고 남았는데.
이 문제와 의문에 관해서 가장 권위적인 연구가는 미국의 과학사가 스탠리 골드버그 박사다.
그에 의하면 트루만 대통령의 연속적 원폭투하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미국 군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대일전쟁을 단시일에 종결시킨다는 ‘인도적’이유이고, 둘째는 만주에서 대일전쟁에 참여할 소련을 견제하고, 미국의 단독적 승리로 전쟁을 종결시킴으로써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단독적 패권을 확고히 다진다는 외교적 이유이며, 셋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책임자들이 그 계획 추진과 관련된 많은 비난과 반대를 모면하고 중요한 실책들을 면책받기 위하여 폭발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민간도시를 목표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들 쟁점에서 ‘전쟁 조기종결’설은 위에서 충분히 검토했다. 외교적 동기는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소련의 세력권 확장을 저지하려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와 군대의 일관된 주장인 ‘인도주의적 동기’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항복일로부터 3개월 내에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대일전쟁에 참전한다는 얄타협정의 비밀합의에 따라서, 나치 항복일로부터 정확히 3개월 되는 날인 8월 8일 만주로 진격했다. 미국은 바로 그 이틀 전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전면적 군사개입으로 일본은 사실상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는 무력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군이 만주에서 총공격을 개시한 바로 다음날 제2의 원자폭탄을 급히 나가사끼에 투하했다.
트루만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군부와 정책고문들은 얄타협정 비밀합의에 따라 8월 8일 소련군이 대일전쟁에 참전하기 앞서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미국이 일본군 항복의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소련 정부를 통해서 연합국 정부들에게 항복의사를 전달하고 있던 상태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적인 단계에서, 그리고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하루씩 전후해서 미국이 일본의 인구밀집 도시 두 개를 원자폭탄으로 소멸해버린 동기와 목적이 ‘전쟁 조기종결’의 필요 못지않게 대소련 견제에 있었다는 논리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셋째는 미국 국내의 정치역학 논리다. 트루만 대통령과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초대형ㆍ초비밀 계획을 추진한 정부 고위직 관리, 군인 장성, 과학자, 원폭사업 물자 납품업자 등 이익집단은 그들이 만든 신무기의 위력을 일본의 도시 폭격에서 극적으로 입증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할까봐서 오히려 두려워했다.
1941년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밀명령으로 미국 군부가 원폭제조 초대계획을 결정했을 때의 총 소요예산은 1억 3,000만 달러였다. 그러나 그로브즈 장군의 전권하에 온갖 반대ㆍ비난ㆍ반발을 억누르고 45년 7월에 그 원형 폭발체가 제조되기까지는 예상액의 15배가 넘는 20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무엇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20만 명의 각급ㆍ각종 직종의 미국 시민들의 불만과 반발은 끊임없이 정치쟁점화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목적과 내용에 관해서 완전히 배제ㆍ소외된 의회는 소수 군 고위장성 독점하의 비민주적 극비 거대사업계획의 공개를 요구하거나 중단시키려는 압력을 가했다.
거액의 투자와 무리한 계획 추진, 의회 권한의 침해, 극소수 전쟁수행 책임자들의 권한 남용, 극비 거대계획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정부권력과 자본가의 횡포, 부패사실 폭로 등등. 만약 일본에 대해서 어떤 극적인 방법과 형태로 원자폭탄의 효과가 입증되지 않거나 입증할 기회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준엄한 책임추궁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두려워했다. 트루만 대통령이 일본의 인구밀집 도시들에 원자폭탄을 사용하기에 앞서 사막이나 해양상에서 공개적으로 폭발을 권고한 건의를 거부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를 직접 선택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국내 정치역학적 배경이다.

히로시마-나가사끼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꼭 50년이 지났다. 그 후 반세기 동안 세계와 인류는 광적인 핵무기 경쟁으로 치달아, 인류공멸의 위기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핵무기를 두려워하고 평화를 희구하는 선량한 시민들과는 다른 이해관계와 입장에서 언제나 ‘신무기’를 숭상하며 더욱 더 가공할 무기의 개발에 전념하는 집단이 있다.
50년 전의 히로시마-나가사끼를 되돌아보는 것은 평화가 지배하는 미래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원자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두 도시에 투하된 지 근 40년이 지난 뒤에 창비의 제3세계총서로 발행된 윌프레드 버체트의 이 책을 그로부터 다시 10여 년이 지난 오늘 교양문고로 바꿔 다시 내는 까닭은 이 책이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의 일방적 논리와 선전에 가려졌던 많은 진실을 처음으로 밝혀낸 책이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의 진실이 1950년대에 세계에 알려지기만 했어도 그 후 수십 년 동안 불장난처럼 계속됐던 미ㆍ소 초핵강대국의 광적인 핵무기 경쟁은 많이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는 1945년 8월의 사건으로 끝난 일이 아니다. 지구상 어딘가에 핵에네르기를 평화목적 외의 용도로 이용하려는 국가나 권력집단이나 개인이 있는 한, 이 책은 언제까지나 그 가치와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다.

• 『히로시마의 그늘』, 창작과비평사, 1995, 「추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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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편집국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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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북한-미국 핵과 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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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한반도 핵위험의 구조: 그 해부와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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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한반도는 강대국의 핵 볼모가 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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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1945년 ‘히로시마’ 영원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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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핵은 확실히 ‘죽음’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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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핵무기 숭배사상의 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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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핵무기 신앙에서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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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미국군사동맹체제의 본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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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미국식 평화주의의 이율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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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릴리대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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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북진통일과 예속의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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