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권위와 언론의 자유(문학과 지성, 1971)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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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0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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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1971년 『문학과 지성』, 전논)

 

우화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인간생활의 진리를 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그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 온 형제 상인은 어째서 그토록 맹랑한 술책이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 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레 아첨배에 속게 마련인 것일까. 그리고 옷을 걸치지 않고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 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인가.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했을까.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 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 속에서 산 셈이다. 마침내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보다 현명한 어른들을 타락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왕국을 지배한 타락과 비인간화와 비굴과 자기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상태가 결과한 인간파괴와 사회적 해독은 무엇으로 측량할 것인가.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차피 독선에 대해 회의(懷疑)가, 권위에 대해 이성(理性)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 임이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한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법적 구조와 정치의 내적 정신베트남정책에 관한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를 세상에 폭로 보도한『뉴욕 타임스』의 용기는 정부 또는 권력에 대한 자유언론의 승리라는 차원에서 예외없이 치하되었다. 미국 언론사상 사전검열을 금지한 헌법(수정 제1조)을 둘러싸고 처음으로 전개된 법적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신문과 정부의 태도는 한마디로 페어 플레이 그것이다. 세계의 정부와 언론기관은 물론 생각 있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지켜본 이 역사적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종결지은 것은 직업적 독립성과 시민적 양식을 남김없이 입증한 대법원판사들이다.국가의 안전을 제일의적(第一義的) 임무로 여기는 정부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법정(法庭)과 민주사회의 이성적 발전을 믿는 자유언론의 어느 하나도 그 기본원리인 양식과 준법정신에 오점을 남기지 않고 그토록 중대한 분쟁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언론의 승리이자 동시에 진정한 뜻에서의 정부의 승리이기도 하다. 행정권력이 법보다 우위에 선다고 맹신하거나 견강부회하기 좋아하는 집권자의 나라였으면 판결은 달리 나왔을 것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을 수 없는 나라였으면 신문은 처음부터 그와 같은 대담한 폭로기사를 보도할 생각도 못 했을 것이고 법의 판단에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언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였으면 그와 같은 행정권력의 페어 플레이 정신과 사법부의 독립성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그러고 보면 베트남전쟁에 관한 정부의 비밀문서를 폭로 보도하여 야기된 미국 사회의 커다란 시련은 일차적으로는 자유언론의 귀중함을 헌법에 못 박은 건국의 아버지들의 영광과 그 정신을 극한의 대립 속에서도 저버리지 않고 그 정신의 토대 위에서 문제를 해결한 195년 후의 자손들의 명예를 한층 더 빛나게 해주었다.세상에는 불과 10년 전 또는 2, 3년 전에 자기 손으로 만든 헌법과 헌법의 정신을 헌신짝처럼 편의에 따라 내동댕이치는 정부가 허다함을 생각할 때 195년 전의 정신을 문자 해석에까지 충실하려고 노력한 국민의 양식은 본받을 만하다.문제의 비밀문서 보도금지에 반대하는 다수 법관의 견해를 대변한 휴고 블랙 판사는 헌법의 용어와 어구는 바로 그 ‘어구대로’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그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이 개정된 헌법하에서는 정부의 어느 부도 국민의 출판ㆍ언론ㆍ종교ㆍ집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것을 제약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 법원의 일부 법관들도 이에 동의하는 것 같다. 역사를 이 이상 왜곡하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다. 매디슨을 비롯하여 헌법 제1개정조항을 마련한 이들 유능한 분들은 절대로 잘못 해석될 수 없으리라고 그들이 진지하게 믿었던 용어로 분명히 다음과 같이 썼다. “의회는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 이 제1개정조항의 역사와 용어는 언론기관이 그 출처에 관계없이 검열이나 금지명령이나 사전금지를 받지 않고 뉴스를 자유로이 발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절대로 잘못 해석될 수 없으리라고 그들이 진지하게 믿었던 용어’로 분명히 씌어진 헌법조항을 견강부회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국가의 비극이 초래된 사례들을 생각할 때, ‘용어 그대로 생각하자’는 헌법해석의 태도가 국가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규정하는 유일한 척도여야 하겠다.옛 먼 나라의 우화는 ‘왕은 옷을 안 입었다’고 진실을 말한 소년의 그 후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첨의 무리들이 왕에게 소년을 벌하라고 요구했을 것은『뉴욕 타임스』에 대한 미국 정부 내부의 관료들의 발언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허위의 권위가 벗겨진 왕은 차라리 아첨배들을 벌하고 진정한 권위를 되찾게 해준 소년에게 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정의와 진실은 사는 셈이다. 보면서도 못 본 척했거나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 있던 많은 ‘현자’들과 백성은 스스로의 비굴을 뉘우칠 것이다. 그러면 임금도 살고 백성도 사는 왕국이 되어 몇천 년 뒤의 동화는 이 파멸에서 되살아난 왕국의 행복을 전해줄 것이다.이와 같이 위기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내면적 자질에 관해서 프랑스 정치학자 또끄빌은 “문제는 법적 구조보다도 정치의 내면정신에 있다”고 말한다. 베트남전쟁 비밀문서를 에워싸고 일어난 미국 내의 사태는 법적구조의 굳건함과 아울러 정치의 내적 정신의 건전함도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국가나 국민의 생활원리가 되어주는 일반적 정치의 내적 정신이 건전하지 않을 때 법적 구조의 건전이란 기대하기 어렵다. 한 달 동안을 두고 분쟁을 소개하거나 평가한 우리나라 언론기관의관심도 요약하면 주로 이 법적 구조와 정치의 내적 정신의 측면에서 표명되었다. 외국의 경우도 그랬고, 어쩌면 외국 신문의 관심의 각도가 그러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우화를 들어 말하자면, 소년의 용기와 그것이 그 왕국의 제도 속에서 갖는 중요한 의의 같은 측면이다.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그 어리고 힘없는 소년이 나타나서 진실을 지적할 때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그 왕국의 사회적 침체와그 신민(臣民)들의 도덕적 타락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임금이 진리를 외면하고 권력의 측근 아첨배들이 왕국의 기본정신을 왜곡하여 허위를 진실로 내세우는 과정에서 나타난 많은 신민의 생명에 대한 파괴와 왕국의 발전에 대한 반동은 별로 논의되고 있지 않다. 더욱이 그 피해가 어리석은 그 왕국과 왕국 신민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엄청난 ‘허위’와 ‘허구’에 입각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남의 나라의 수백만 신민을 죽이고 왕토(王土)를 파괴한 죄에 대해서도 별로 구명됨이 없는 것 같다.국록을 먹는 선비나 학자들도 많았을 터인데 그들은 왜 임금이 소수의 무리들에게 농락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는가 하는 문제도 그렇다. 모든 어른은 임금이 분명히 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한 그 왕국의 제도는 어떠했고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를 구명하는 데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한마디로 말해서『뉴욕 타임스』사건의 의의 중 중요한 한 면이 우리나라 언론과 식자들에게 인식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우리나라 언론은『뉴욕 타임스』가 보도한 그 분쟁의 핵심인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그 자체는 읽지 않고, 다만 정부 대 언론의 극적인 투쟁만을 따른 것 같다. 미국 언론의 승소(勝訴)가 아무리 빛나는 결과라고 하더라도 비밀문서로 밝혀진그 30년간의 과정에 뿌려진 추악함과 독선과 비인간성은 회복할 길이 없다. 더욱이 거의 절대적인 힘을 가진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국가권력이 광기를 띠게 되는 경위가 중요하다. 남은 하나도 속지 않았는데 거꾸로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는 권력이라는 최면술이 자기 사회와 남의 민족까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메커니즘을 이 비밀문서는 소름 끼칠 만큼 감춤 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국가권력이 이성을 상실해가는 이 긴 과정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기록 이상으로 상세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서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국가권력과 이성한 작품의 해피 엔드는 과정의 줄거리가 가열될수록 더욱 행복하게 느껴진다. 고뇌와 비참과 과오가 아무리 처절했어도 종말이 행복하면 그 과정은 그것으로 잊혀진다. 『뉴욕 타임스』와 정부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게 받아들여진 감이 있다. 그러나 해피 엔드로 슬펐던 과정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관객의 경우다. 슬픔을 겪은 주인공은 종말의 행복보다도 불행했던 과정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그 차이는 불행을 체험한 사람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위치의 차이다.베트남전쟁은『뉴욕 타임스』의 해피 엔드와는 관계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미국 국민은 물론 우리나라 국민들도 이 문제에서는 당사자이지 관객이 아니다. 어쩌면 모든 인류의 양심과 가치를 시험한 전쟁이라는 스페인내란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쟁은현 시대를 사는 모든 인류를 시험하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전쟁에는 관객이 없다. 모두가 슬픈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뉴욕 타임스』대 정부의 대단원을 해피 엔드로 관람한 우리들에게는 이제부터 베트남전쟁 정책의 진실을 말해주는 소위 ‘미국 국무성 비밀보고서’라는 것을 면밀히 검토해볼 의무가 있다. 이 보고서 속을 체험자의 마음으로 걸어나오지 않고는 해피엔드의 의의를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행복한 종말도 우리에게 아무런 교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비밀문서는 현대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분자에게 한없이 많은 교훈을 제공한다. 이 보고서를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베트남전쟁의 한쪽 당사자이며 더욱이 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계속 확대해나갔다는 점에서 거의 전면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할 미국 지도자들의 일종의 ‘자기비판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임금만의 책임을 비판한 진술서는 아니다. 관료와 군부, 학자와 전문가, 지식인과 국민대중…… 어느 하나도 그 응분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결과로 계속된 비극의 진술서다.이 비밀문서는 한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이 방향감각을 상실할때 어떤 일이 일어나며,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지식인들이 어떻게 해서 그 책임을 포기하게 되는가를 여실히 밝혀주었다.비밀문서가 밝혀지기까지의 경위와 문서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들의 문제로 생각해봐야 할 숱한 문제들에 마주친다.두 가지 언론형『뉴욕 타임스』의 용기는 반사적으로 우리 언론의 두 가지 유형을 연상시킨다.하나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유형이고, 또 하나는 ‘이제는 비밀을 말할 수 있다’는 유형이다.전자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도 발표도 하지 못하고 있던 언론이나 지식인이 문제를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객관적 상황의 변동이 생기자, 말하지 않고 있던 비굴은 제쳐놓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내세우는 유형이다. 지식인과 언론의 소임에 이처럼 모독적인 유형은 없다. 최근 미국 대통령 닉슨의 북경 방문 결정이 발표되자 우리의 인쇄 및 전파미디어와 언론은 한 달을 두고 제각기 긴장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교수ㆍ기자 들의 발언으로 정신을 못 차릴 형편이다. 그러나 바로 두 달 전, 선거에서 극동과 한반도의 긴장완화 문제가 중대한 이슈로 등장했을 때 그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밝혀준 학자나 기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한국 국민은 닉슨의 중공 방문에 하늘이 무너질 듯 놀랐다. ‘영원한 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던 한국 국민은 그 보도 이후 한국의 안위와 국가적 방향과 자기 이해관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만일 요즈음 앞을 다투어 극동정세 해빙의 불가피성을 알고 있었음을 자랑하는 지식인과 언론이 평소 그 소임에 10분의 1만 충실했더라도 국민들은 국제정세 진전의 낌새를 어느 정도는 알아차리고 있었을 것이다.우리의 언론과 지식인은 한마디로 반공(反共) 외의 딴 가치나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한 지식과 사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가치가 없다. 어떤 개인의 지식이나 사상은 그 개인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사회 계발을 위해 반환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 소크라테스처럼 자기의 지식과 사상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자세를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운명을 같이할 수 밖에 없는 한 사회의 대중이 오도된 사고방식이나 정세 판단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 최고의 책임이자 의무다.미군 철수에 관한 기사를 6개월 동안이나 보도하지 못하고 있던 언론기관은 느닷없이 공식 발표된 뒤에 일어난 국민의 불안과 동요에 대해 그 책임을 통감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권력의 압력에 대해서 그 전에도 그렇고 그 후에도 이 나라의 언론은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세계적 사조와 국제정세의 변천에 무지몽매한 상태로 억압되어 있던 이 나라 국민에게는 앞으로 놀라운 소식이 무수히 전해질 것만 같다. 언론과 지식인이 알고 있는 지식과 갖고 있는 사상을 발표해야 하는 때는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다. 내일 발표되는 지식은 이미 주위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비화’(秘話) 언론도 마찬가지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제국 육군은 남경(南京)에서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의 편린이나마 보도한 일본 신문은 하나도 없었다. 본국의 일본 국민에게 이 천인공노할 사실이 밝혀진 것은 패전 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비화식 언론을 통해서였다. 있는 사실이 그 자리에서 그 시각에 보도되지 못하고 안전한 상황하에서 비화로 밝혀져야 했던 그동안 일본의 지도자들은 더욱 악독한 범죄 집단으로 화했고 국민대중은 무지와 환상 속에서 더욱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타락했다. 미국 시민은 군인 신분이면서도 미라이촌(村) 베트남 양민학살 사건을 세상에 폭로했고, 미국의 지성인은 고위관리이면서도 자기 정부의 기만에 가득 찬 베트남 정책을 국민의 양심에 고발했다.일본의 지식인은 10년 뒤에 비화를 엮어 원고료를 벌려고 한 데 반해, 미국의 지식인은 자신을 권력의 핍박 앞에 내맡기면서 사회의 조직적ㆍ제도적 불의와 악에 항거했다. 우리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던 거창(居昌) 양민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집단 아사(餓死) 사건 등을 비롯한 수많은 대소 사건들이 비화로서만 밝혀지는 동안 민중의 생명을 파괴한 책임자들은 영화를 누렸다. 최근의 소위 한강변 정 여인 사건만 하더라도 사건 발생 이틀 동안은 제법 상세한 보도가 있더니 사흘째부터는 보도기관이 무슨 명령에 따른 듯,일제히 정부의 발표문만을 게재하는 괴이한 태도를 보였다. 어렴풋이나마 그 진상을 파헤치고 상세한 내막을 보도한 것은 도리어 외국의『와싱톤 포스트』지다. 국내보도는 억압되었다.소위 국방이니 국가안보에 관한 보도라는 것을 보아도 정부의 발표문을 옮겨놓는 구실밖에 못 하고 있다. 국가안보에 관한 것일수록 언론기관은 정부 발표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예리하고 광범위한 취재를 해 그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국가안보’라고 정부가 딱지를 붙이기만 하면 그것은 국민을 대표하고 대변해야 할 언론기관의 직접취재의 권외로 밀려나간다.오늘의 사실을 오늘에 규명하지 않고 먼 훗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비화나 읽을거리의 자료로 생각하는 한, 통치계급의 횡포는 계속되고 대중은 암흑을 더듬는 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임을 안 이발사가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 산속 굴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것은 차라리 우리 언론기관보다는 애교가 있다. 그 이발사는 그 사실을 당장에 알려야 할 사회적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론은 대중에 의해서 그 요청을 받고 있으며 보도기관은 그 임무를 자청하며 조직된 기관이다.관리가 된 지성인베트남전쟁 비밀문서는 마치 드라마의 대사를 읽는 느낌을 준다. 첫 줄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국가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한 행정부 관료기구 속의 지성인들이 베트남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제각기 성격배우로서 파트를 연출한다. 정부가 민주적 성격을 띠는 한 원칙적으로 지성인과 관료 사이에 모순이나 대립개념은 서 있지 않다. 그러나 형식은 어떻든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소수 이익의 위탁자 역할을 하거나 부패한 정권을 돕는 지식인은 반지 성적이고 따라서 반국민(민중)적일 수밖에 없다.미국 정부를 일단 민주적으로 보고 또 직업군인ㆍ관료를 제외하면 월트 로스토,로버트 맥나마라,조지 볼, 다니엘 엘스버그의 4인으로 특색 있는 주역이 두드러진다.국무성 정책기획위원장으로, 뒤에 존슨 정부의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인 월트 로스토는 전(全) 문서를 통해서 미국의 국가이념을 반공과 군사적 대국주의(大國主義) 및 대국에고이즘에 입각한 팍스 아메리카나로 믿는 광신적 지식인의 면모를 여실히 나타낸다. 중세기 암흑시대의 봉건왕제나 교권을 수호하려는 어용학자를 연상케 한다. 베트남전쟁의 민족해방ㆍ사회혁명적인 성격에는 눈을 딱 감고, 베트남정책의 파탄이 분명해진 단계에서도 오직 대국 미합중국의 아시아 지배권 상실과 국가적 체면유지만을 목적으로 한 건의를 하고 있다. 식민지 민족의 염원에는 아랑곳없을 뿐만 아니라 국무성 정책 담당자로서 그리고 뒤에는 미국의 대외 정책을 쥐고 흔드는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서의 자기 개인의 권위가 정책 파탄으로 실추될 것만을 방지하기 위해 날이 갈수록 투쟁적으로 나타남을 본다. 세계적 사조에 대한 개의나 이성적 비판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며 그에게 뜻있는 것은 오직 ‘권력의 철학’ 뿐이다. 히틀러의 보좌관 헤스의 전기를 다시 읽는 감이 있으며 대영제국주의자 처칠의 화신을 보는 느낌이다. 이와 같은 지성인을 잠시나마 최고 정책 책임자로서 필요하게 되는 한 정부의 제도적ㆍ정신적 풍토가 문제이겠다. 결과는 베트남정책의 파탄이며, 또 그 결과는 당연한 논리로 그의 반지성적 오욕으로 끝났다.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인간의 최고의 자질, 즉 이성과 의지와 가치관과 희생심마저도 전자계산기로 산출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의 과학ㆍ기계만능주의적 지식인을 대표한다. 그가 신봉하는 미국의 온갖 과학과 기계의 힘은 베트남 인민이 아니라 미합중국 사회의 파괴와 좌절을 초래했다. 경제 위주, 물신주의(物神主意), 물질적 현대화, 공업화,GNP만 섬기고 ‘도덕적ㆍ정신적 인간’의 가치를 경시하는 지식인에게 중요한 교훈일 수 있다. 이 ‘걸어다니는 전자계산기’가 중도에서 관직을 떠난 것은 스스로 추진한 베트남전쟁의 부도덕함을 깨달아서라기보다는 그의 전문인 ‘경제– 효율’적 견지에서 ‘수지 맞지 않는 전쟁’임을 확신한 탓인 듯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소는 정책의 ‘윤리적 측면’도 고려한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책이 실패했을 때 책임자로서 물러설줄 알았다는 점에서 로스토보다는 지성적이라 하겠다.힘의 철학과 체면이 지배하는 관료기구 속에서 국무차관 조지볼은 로스토나 맥나마라와 대조적이다. 문서 전체를 통해서, 미국 군대의 체면만을 생각하는 테일러등 군부지도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이성을 호소한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특수한 전쟁임을 인식한 유일한 관료였으며, 일시적인 전쟁 패배에서 오는 국가위신의 손상보다 부정하고 승산 없는 정책을 고집함으로써 받을 장기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국가위신의 추락을 염려한다. 그는 1965년 7월 1일자로 대통령 존슨에게 보낸 건의에서 베트남전쟁은 지는 전쟁이라는 것, 미국 정책은 황색인종을 상대로 하는 백인종의 전쟁이라는 사실, 소위 도미노 이론이라는 것의 허구성을 강조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개입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국가적 치욕 없이는 우리 목표의 완전 달성을 중도에서 멈출 수가 없게 됩니다. 국가적 치욕을 당하느냐 목표를 달성하느냐의 두 개의 가능성 가운데 우리가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목표 달성보다는 국가적 치욕이 더 심각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외면하면서 눈앞의 체면만을 고집하는 군부장성들과 많은 민간 엘리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조지 볼은 자세를 끝내 굽히지 않았다. 관료기구 속에서 반지성화하지 않는 바람직한 이상적인 지성인의 한 유형이다.베트남정책의 수립을 위한 조사연구에서 시작하여 정책수습과 정의 핵심적 지위에까지 올라갔다가 기밀문서를 전 세계에 폭로한 다니엘 엘스버그는 햄릿적인 과정을 밟아 하나의 진리를 실천한 독특한 지성인이다. 그의 행동에 대해 우익적 여론과 군부에서는 비난과 인신공격, 중상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진실과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매머드화한 관료기구 속에서 자기의 임무와 정부의 정책이부정이며불의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국가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힌 용기는 고민하는 지성인의 최고의 자세인 듯하다.소위 국가기밀이나 국가이익이라는 것이 민주사회의 국민을 시종일관 기만하는 정부체제와 세력에 의해 이용될 때는, 그 집권자와 집권세력의 기만을 폭로하는 것 이상으로 애국적인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지성인의 최고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엘스버그는 그의 객관적 인식 변천의 과정에서 로스토–맥나마라– 볼의 단계를 거쳐 그 자신에 도달한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엘스버그였던 것이 아니라, 로스토에서 시작하는 사상발전의 과정에서 가슴을 에는 수년간의 고민을 겪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의 실천의 뜻을 깊게 해준다. 그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스탠리 호프만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비난받아야 할 일은 허위의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 엘스버그 박사의 극적인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비난받아야 할 것은그 장막의 뒤에서 이루어져온 일들, 음모에 관한 모든 진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치를 살피거나 그에 방조하거나 갈피를 못잡거나 침묵했을 뿐 그것을 밝혀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이다. 진실로 놀라운 것은 엘스버그와 같은 고위관료들 속에서 더많은엘스버그가나오지않았다는사실이다……『( 뉴욕타임스 위클리』, 7월 18일).

국가이익—지배자의 논리신문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일본 군대 지도자들의 내왕 같은 것도 정부가 대부분 ‘국가이익’ 또는 ‘국가안보’의 이유로 밝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신문 관계자들 자신이 일본군 간부들의 왕래를 알 경우에도 정부의 ‘뜻을 받들어서’ 보도를 ‘자율규제’하고 있다고도 말한다.국민의 시대적인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는 이런 문제마저 국민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구체적인 문제에서는 미국에 적용되는 원리와 우리 사회에 적용될 원리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진실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가장 국가를 위할 줄 안다’는 기본원리는 공통으로 통한다.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어떤 사회도 어떤 정부도 비판의 여지없이 최선이거나 만능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민주제도는 진실– 비판– 개선의 끊임없는 과정을 걸어갈 수 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체제나 정부는 분명 비판에 견딜 수 없는 체제와 정부다. 그러기에 비판을 봉쇄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개선과 향상이 없고 그 결과는 더한층의 타락이며, 타락한 제도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은 탄압에 호소하는 악순환 속에 침체할 수밖에 없다.국가이익을 해치고 국가안보에 중대한영향을 끼친다고 미국 정부가 공개를 반대한 그 비밀문서를 숙독해보면, 그것이 공개됨으로써 타격을 입을 것은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집권자와 정책에 참여한 인물들의 위신과 체면뿐임을 말해주고 있다.베트남전쟁이 상대방에서 시작되었다는 선전으로 국민을 끌고들어간 재화(災禍)의 진상은 종전 직후부터 역대 미국 정부의 조작 결과라는 것밖에 밝혀진 것은 없다.몇 해 전, 국회에서 정부가 제출한 한미 석유협정이라는 것을 놓고 연일 토의가 벌어졌다. 협정은 미국 측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안으로서 그 예비토의에 참가한 한 정부관리는 “하도 한국의 주권을 무시한 일방적인 내용이기에 역사에 이름이 남을까봐 첫 회의 이후에는 참석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이 협정안이 양국 정부에 의해 그대로 조인되어 국회에 회부되었다.이 국회심의에서 한 전직 장성이 그 일방성을 깐깐히 지적하면서 강력히 수정을 요구했다. 항목마다 지적하는 이 국회의원에 대해 분과위원장은 “누구나 그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측이 꼭 원안대로 통과되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그것을 문제 삼으면 한ㆍ미 간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냥 통과시킵시다”라고 발언을 제지하고 그대로 통과시켜버렸다. 그에 관한 의사록이 있다.한국 국민의 지성의 전당이어야 할 국회는 국가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외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이익이나 국가안보라는 표현을 빌린 내용과 실태를 분석해보면 그 문제와 관련된 어느 특정 개인, 또는 어느 특수 이익집단과 세력임이 드러난다. 한국의 외채고(外債高)와 상환 전망을 보도하여 한 신문사가 발칵 뒤집힌 기사의 내용은 정부 경제정책의 이해이며, 외채와 관련된 재벌들의 이해관계다.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국군의 전사상(戰死傷) 상황 보도가 국가이익을 해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파월을 결정한 정부나 전상자 공개를 꺼려야 할 어떤 이유가 있는 군부의 이해관계 때문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한강변 여인 살해사건이 어떻게 해서 국가이익과 관련되는지도 해명되지 않는다.대만(臺灣)으로 패배해 온 1949년 이래 여태까지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국부(國府)사회에서는 공식발표 외에는 모든 것이 국가이익과 국가안보를 해치는 것으로 강변되고 있다. 그 결과는 지금 세상의 눈앞에서 비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진실을 따지고 보면 국가이익이나 국가안보라는 것은 즉각적인 피해가 예상되는 군 이동이나 작전계획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실이 진실대로 밝혀짐으로써 가장 잘 보호될 수 있다.해롤드 라스키가 “권력자란 자기의 부정과 과오를 은폐할 수만 있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나 국민의 자유를 부정하려 한다.그리고 권력자에 의한 이 자유의 부정이 성공할 때마다 다음 번에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그만큼 쉬워진다”(『현대국가에서의 자유』)라고 말한 것은 통치세력의 논리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거의 모든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통치자의 논리로 억압되어 있는 사회에서는『뉴욕 타임스』소송에 대한 미국 대법원의 다음과 같은 판결문이 어떤 원리가 되어준다.

‘안보’라는 용어는 광범하고 막연한 뜻을 지닌 일반적 개념으로서, 제1개정조항에 구현되어 있는 기본법을 폐기하기 위해서그 개념이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군사적ㆍ외교적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국민의 알 권리를 희생시킨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참다운 안보를 위하는 소위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1937년 대법원이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 참가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한, 위인이며 명판사인 당시의 휴즈 대법원장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웅변으로 풀이되었다. “우리의 제도를 힘과 폭력으로 전복하려는 선동으로부터 우리의 사회를 지켜야 할 중요성이 크면 클수록 정부가 국민의 뜻에 부응할 수 있도록, 그리고 원한다면 평화적인 수단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자유로운 정치토의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지켜야 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바로 거기에 공화국의 안보가, 입헌정부의 토대가 놓여 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음의 한마디에 그친다.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집권세력이 내세우는 국가이성은 처음부터 이성적 토의를 그 분야에서 배제해버리려는 원리다. 바로 이처럼 간단한 이유에서 그것은 자유와 어울릴 수 없다. 국가이성은 진리도 정의도 전제하지 않으며 오직 항복을 요구한다(해롤드라스키, 『현대국가에서의자유』).

밀리터리 멘털리티문제된 비밀문서는 한 정부의 최고위 정책수립 과정이 밀리터리 멘털리티(군대식 사고방식)에 의해서 지배되고 추진되었음을 증언한다. 이제는 그 조작과 허위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 통킹만 사건이라든가, 베트남 주변국가를 향해 수년 전부터 은밀히 본격화해온 군사 파괴작전 같은 것은 그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그 본질상 군사지도자들의 주도적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전반적 전략구상에서 군부의 발언권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ㆍ국제적ㆍ도덕적 고려를 배제하고 오직 ‘무력(武力)의 논리’에 도취되어 전쟁의 도덕성과 세계적으로 고립된 상황도 무시하고 승산 없는 군사적 ‘승리’만을 추구하는 정신구조를 뜻한다. 전쟁이란 어느 정도의 불법행위를 수반하게 마련이라 해도 비밀문서로 폭로된 크고 작은 모든 음모가 군부에 의해 착상되고 조직되고 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국민이나, 한국을 제외한 세계에서 ‘미국 정부가 발표하는 바로 그 반대를 믿으면 된다’는 미국 정부 발표에 대한 불신감을 확립케 한 책임은 군부에 있는 듯하다. 정부 내의 어느 당국도 군부가 꾸미고 있는 음모를 모르는 수가 많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것을 부인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월맹(越盟)에 대한 공격작전에서부터 베트남전에 정식으로 개입하기 이미 오래전에 월맹에 침투공작을 전개하고 있던 일들도 크게 놀라운 것이 못 된다. 놀라운 것은 한 단계의 음모가 폭로되고, 실패하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새로운 음모를 조작하고, 그 결과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대통령과 행정부에 압력을 가해 더욱 큰 실책으로 국가를 끌고 들어간 행동이다.미국의 군부는 확실히 ‘국가 내의 국가’를 형성한 감이 있다. 군사적 고려는 정치적 고려를 지배했다. 무력의 논리밖에 모르는 군인들이 국가기능의 종합적 서열을 무시하고 군사의 상위에 서는 정치정책에 도전할 때 국가는 그 이성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일본의 예는 우리에게 가장 실감나는 비극이다.군대식 사고방식은 미국의 군사적 모험의 누적이 국내적 사회분배 상태를 위기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할 수 없었던것 같다.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음모와 모험의 취미를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본다.밀리터리 멘털리티는 군 장성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로스토나 번디 같은 관료화한 민간 지성인에게도 그 멘털리티의 노출을 본다. 또 밀리터리 멘털리티가 전쟁정책 수립 과정에 한정된 문제라면 차라리 안심할 수 있다. 현대국가의 모든 정책이 정치ㆍ외교ㆍ경제적 분야와 아울러 군사적 측면을 강하게 내포함을 생각할 때 이 군대식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상황이나 정신풍토 및 세계관은 어느 사회, 어느 국가에서나 지극히 위험한 결과를 예상케 한다.현실론과 현실주의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는 베트남전쟁의 장기화는 미국 사회를 병들게 했다. 장기화가 문제가 아니다. 그 전쟁 자체가 미국의 숭고한 건국정신과 정의를 사랑하는 미국의 국가이념과 상용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국민 자신들에 의해서 인정되었다.그런데 이토록 미국인의 정신과 사회를 병들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현실주의자’들이다.비밀문서가 커버하고 있는 종전 직후부터 1967년까지의 전 기간을 통해서 그 비극적인 전쟁확대는 현실(상태)을 그대로 시인하고 그 위에 또 하나의 현실을 올려 쌓으려는 ‘기정사실화’의 연속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대통령도 장관도 보좌관도—각 단계의 무비판적인 기정사실화의 역사를 비판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어제의 현실의 직선적 연장선상에 그대로 오늘의 현실을 설정하고 또 다음에는 그 연장선상에 내일의 현실을 설정하는 것이 미국 위정자들과 국민 전반의 의식이었던 듯하다. 물론, 베트남 비극의 초기부터 무비판적으로 기정사실화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역사의 단면’으로 보는 많은 지성인들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다. 『뉴욕 타임스』나『뉴 리퍼블릭』같은 지성인의 대변지들이 기정사실=현실=타당=필연성이라는 공식화를 꾸준히 거부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국민은 정부의 기만적 선전과 사관(史觀)의 미숙 때문에, 정부가 꾸며나가는 기정사실화를 그대로 역사로 시인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는 현실주의의 파탄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레스턴은 “정책수립의 전 과정을 통해서 정책의 윤리성을 생각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통킹 만에서 월맹 어뢰정이 불법으로 미국 순양함을 공격했다는 조작으로 의회로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 정부와 군부는 의회 결의와 흥분으로 도착된 미국인의 감정을 ‘현실’로 하여 다음은 대규모 폭격을 ‘현실화’한다. 이 현실이라는 것이 역대 행정부와 군부에 의한 조작과 허구의 ‘연속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회 결의에 반대한 상원의원은 100명의 의원 가운데 모스와 구루닝 두 사람뿐이었다. 풀브라이트 같은 의원조차 ‘현실적 대응책’이니 할 수 없다고 찬성표를 던졌다.언론기관이 통킹 만의 진상을 알았던들, 알아낸 신문이 그것을 용감하게 보도했던들, 이런 일은 ‘그날의 현실’로 끝나고 내일의 현실은 직선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각도의 선상에 있었을 것이다. 집권세력과 어떤 권력집단, 예컨대 군부 같은 것이 국민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수법이 이 현실주의다.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미국의 지성인들은 역사의 ‘현실’을 수락할 뿐 역사에 ‘작용’하려 하지 않았다.매카시즘의 결과『뉴욕 타임스』대 정부의 소송사건이 언론의 승리로 끝나고 그 충격을 완화하려는 듯 닉슨의 중공 방문이 발표되었을 때, 오웬라티모어 박사는 미국의 30년에 걸친 불행은 매카시즘의 반지성주의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진단했다. 베트남전쟁도 그렇거니와 오늘날 미국의 사회적 와해와 국민도덕의 타락은 ‘부정적 가치’ 즉 반공주의의 사상통제의 결과라고 그는 단정했다.그는 1950년대에 매카시즘의 공포 분위기와 사상통제의 반지성주의가 철저하게 미국 국민의 창조력과 자유를 위축시킨 탓에 정부와 학계와 여론지도층에는 거의 어용적 성격의 지식인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적극적 개념’이며 창조적 상상력이다. 반공주의란 부정(否定) 개념이며 그것 자체로서 소모적이며 파괴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베트남전쟁의 격화와 확대로 미국 사회가 반사적으로 경찰국가적 성격을 짙게 하는 가운데서도 비판과 정의의 소리를 꾸준히 외친 사람은 있다. 풀브라이트, 한스 모겐소 등 소수의 지성인은 매카시즘의 ‘빨갱이 잡이’(witch hunting)의 시련에 굴복하지 않은 진정 용기 있는 지성인이고 애국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성인은 50년대와 60년대 초에 이 파괴적인 사상통제의 압력으로 공직을 떠났거나 침묵을 선택했다.라티모어 박사는 미국이 세계에 자랑할 모든 가치와 전통을 매카시즘이 철저하게 짓밟았다고 항의한다. 그 자신도 매카시즘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학문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반공이라는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공포정치의 책임은 바로 오늘의 대통령 닉슨 본인에게도 있다. ‘빨갱이 잡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라네트 핸드 판사는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이라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는 사회는 이미 분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고 미국 국민이 영원히 기억하는 날카로운 경고를 했다.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사회가 한 권력자나 사상적 광신자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사태를 개탄한 한 신문은 미국의 장래를 다음과 같이 걱정했다.

미국의 병은 정신과 영혼의 병이다. 종교재판의 이단자 탄압이나 소련의 비밀경찰,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주의, 쿠 클럭스 클랜(KKK,미국의 극우적 인종주의 단체)과 같은 사악한 세력을 모조리 합친 병이다(D.F. 플래밍,「우리는 파시즘을 향하고 있는가」, 『저널 오브 폴리틱스』(Journal of politics), 1954년 4월호).

자유의 수호신을 자처한 미국 국민을 국내에서뿐 아니라 세계도처에서 자유의 파괴자로 만들어버린 매카시즘에 대해서 1953년 버트런드 러셀조차 미국의 장래를 두려워한다고 예언했다.33개 주가 법률을 제정하여 교사와 교수에게 충성을 선서시키고 리버럴한 교과서를 금지했으며 조금이라도 반공주의의 건전성에 의심을 표하는 서적은 불살라졌다. 리버럴한 간행물을 서가에 진열했다는 이유만으로 도서관장이 파면되고, 해외에 있는 미국공보관ㆍ문화관에서 이 기준을 적용하자 읽을 만한 서적은 자취를 감추고, 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밀려나게 되었다.이와 같이 해서 미국 집권세력은 60년대의 국가적 파탄을 ‘애국과 반공’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손으로 준비했던 것이다.경찰국가적인 감시제도는 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처음 충성 테스트의 대상은 정부의 피고용자(공무원) 250만에서 확대되어 군인 300만, 방위관계 계약기업체의 피고용원 300만에까지 이르렀다. 800만의 시민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이름 공개 의무를 지지 않는 밀고자ㆍ감시자 들의 한마디면 언제나 반미행위위원회나 당국에 출두하여 충성심을 입증해야 하는 지경에 놓였다.미국의 반지성ㆍ반이성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대의 반공활동을 한 사람도 안전할 수가 없었다. 1953년 10월 당시의 검찰총장(법무장관)은 전 대통령 트루만이 소련의 간첩을 은닉했다고 주장, 정식으로 고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케네디 등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이 나왔고, 얼마전까지도 미국의 지적 풍토 속에서 웬만한 학자ㆍ작가ㆍ교수ㆍ기자들은 추방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어용으로 화했다. 이것이『뉴욕 타임스』와 같이 훌륭한 언론기관이 있으면서도 진정한 사상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가 미국 내에 존재할 수 없게 됐던 경위의 일부다. 위대한 반공주의자 매카시는 10년 후 미국 사회의 분해를 초래한 셈이다.『뉴욕 타임스』라는 언론기관과 다니엘 엘스버그라는 진정한 지성인이 있음으로 해서 미국의 지성적 풍조는 이제 큰 전환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소년이 왕의 알몸을 폭로할 때까지 오랫동안 온 지식인과 백성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사회는 공포와 타락과 암흑 속에 침체해야 했던 그 엄청난 인간적ㆍ사회적 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거듭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남의 나라의 불행한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가나 국민에게는 영원히 한 사람의 소년도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이다.냉전의식의 자기기만성베트남전쟁 비밀보고서를 상세히 읽고 있으면, 미국 정부 지도자들의 머리와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단 한 가지 의식형태가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그것은 냉전의식(冷戰意識)이다. 『뉴욕 타임스』와 미국의 지성의 승리는 부정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전후 30년 가까운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앞으로 긍정적 또는 적극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새로운 창조의 시대를 향한 문을 열 것으로 믿어도 좋겠다. 방대한 미국 정부 비밀보고서를 3개월 걸쳐 편집한 책임 기자인 닐 쉬언은 보고서 전체를 요약한「30년에 걸친 개입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모든 판단은 베트남사태에서 미국이 본래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비밀보고서 속에는 이런 역사적인 판단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미국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처음에는 공산주의의 봉쇄에 있었으나, 그것이 차차 미국의 힘, 그 영향력 및 그 위신의 보호라는 목적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단계에서도 베트남과 베트남 인민의 현지사정은 전적으로 무시되어왔다는 것을 시사한다.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사적 방향은 식민지 인민의 해방과 독립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방된 베트남 인민의 독립을 분쇄하고 재식민지화하려고 베트남에서 전쟁을 일으킨 프랑스에 군사ㆍ경제원조를 제공한 것이다. 트루만 정권의이 같은 행동이 역대의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그리고 닉슨)의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자기기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냉전의식의 자기기만성은 정부지도자들이나 미국의 지배층을 구성하는 군부ㆍ경제계ㆍ재계ㆍ극우익 등뿐 아니라 대부분의 지성인들의 가치관마저 좀먹었다. 지성인들만이라도 냉전의식의 소모성과 부정적 해독과 자기기만성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동안의 미국 사회와 국민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냉전의식은 너무도 큰 희생과 대가를 미국 시민에게 치르게 했다.미국은 창조력을 가진 대국가이면서도 자기 제도와 이념의 자유로운 창조적 발전을 목표로 하지 않고 세계의 작은 국가와 인민의 솟아오르는 목표와 염원과 해결을 까부수는 데 전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미국의 힘은 무엇인가 남의 가치를 ‘반대’하기 위해서만 쓰여졌다.미국의 예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가치관이나 태도에서는 건설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남의 가치나 이념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으로 바깥세계와 절연하는 장벽을 쌓아 둘러야 하고, 국내에서도 모든 종류의 장벽을 겹겹이 쌓아 둘러야 한다. 이런 비창조적인 사고방식이 극단에 이르면 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위에 온갖 명분의 높은 장벽을 쌓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때로는 생물학적으로 배제해버리는 공포사회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바로 부정하려는 제도나 사고방식에 자기가 변질해버리는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그 수단으로서 구체적으로 죄목 규정도 하지 않은 귀걸이 코걸이식의, 집권자의 뜻대로 자유자재로 해석될 수 있는 금지법률이 잇달아 제정돼야 하고, 모든 교육은 그 목적을 위해서만 알맞게 개편돼야 한다. 널리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 또는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이런 식의 교육처럼 자기기만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두고두고 그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 해독을 끼치고 세계의 많은 민족과 국민들의 생활무대에서 자유로운 창조로 경쟁하고 인류문명에 공헌할 기회와 자격을 박탈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신생(新生)의 감격과 민주적 자부를 안고 해방된지 오늘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에 민족적인 특유한 자질이나 인류문명에 공헌할 수 있는 무엇 한 가지라도 이룩했거나 창조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민주주의라는 사상과 제도 속에 넘칠 만큼 풍부히 간직되어 있는 자유와 창조의 에네르기를 분출하면서 높은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꿈을 품고 무엇인가 문명에 공헌할 큰일을 하려 하지는 않고, ‘부정적ㆍ방어적인 정신상태’에 빠져버린 나라의 국민이 겪어야 할 진화로의 역동(逆動)을 미국에서 배우게 된다. 잠재력이 크고 기본적으로 창조적 정신을 그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었던 미국이 그렇다면, 그런 정신적 유산과 전통적 바탕이 약한 우리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국가의 목적이 그와 같은 부정적ㆍ방어적 냉전의식으로 좁혀진 세계의 다른 국가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자기기만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른바 민주주의를 믿는 서방사회에서의 대만ㆍ베트남ㆍ태국ㆍ필리핀ㆍ터키ㆍ그리스ㆍ포르투갈ㆍ스페인은 물론,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나 민족은 세계의 조류에 역행하고 뒤떨어지고 내부적 침체와 후퇴로 전후 30년을 지내왔다. 지금은 전후시대가 아니다. 세계가 이성의 눈을 뜨기 시작한 오늘, 어느 나라의 지도자도 집권세력도 그리고 국민도 부정적 가치관으로 자기만을 기만하고 있을 수는 없는 시대다. 냉전시대의 기이한 신화ㆍ우화ㆍ권위의 실태를 묻는 회의가 필요한 때다.냉전용어의 반지성성그와 같은 인식이 섰을 때 제1차적으로 시도해야 할지식인의 과업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냉전용어를 정리ㆍ청소하는 문제이겠다.옛날 공자(孔子)는 한 제자한테서 만약 제왕이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공자는 서슴지 않고 “바른말을 쓰도록 백성을 가르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른바 정명론(正名論)이다. 이것은 지극히 옳은 견해라고 생각된다.여기서 말하는 ‘바른말’이란 요새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예의 바른 말’의 뜻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관념(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라고 풀이함이 나을 것이다. 인식은 관념을, 관념은 개념을, 그리고 그 개념을 담은 용어가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상대방에게 관념표상의 작용을 일으켜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상을 표현ㆍ전달하려는 용어가 그 사상의 내용이나 성격의 정확한 반영이 아닐 때에는 전달된 뜻이 더욱 왜곡ㆍ변형되거나 혼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일그러진 유리를 통해 보는 사상은 일그러질 것이고 그것으로 형성된 개념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공자의 말은 오늘날 진실과 지성과 이성을 회복해야 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를 제시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나 출판물에서 전후 냉전시대에 일시적인 편의 덕분에 만들어진 숱한 ‘정치성을 띤’용어가 아무런 비판 없이 상용되고 있다. 이런 정치적 성격의 언어는 앞으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국민이 정확하게, 진실 그대로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위해서 그 시대적 기능을 면제해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왜곡되고 혼란해진 내부의 가치관과 의식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더욱 긴급한 과제다.예컨대 우리 국민은 ‘피로 맺은 관계’니 ‘혈맹’또는 ‘영원한 맹방’(盟邦)이라는 표현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교육받아왔다. 심지어 몇 명 안 되는 태국 군대가 철수한다고 할 때도 이런 용어가 신문에 거리낌없이 등장했다. 닉슨 독트린과 미국의 대중공 접근이 알려지자 모두들 분격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그 어느 것도 사실은 피할 수 있었던 반응이다. 그것은 ‘혈맹’이나 ‘영원한……’등의 용어가 긴 세월을 두고 우리 국민의 머리에 심어준, 처음부터 혼란된 관념인 것이다.1949년 대만으로 패퇴한 이래 아직까지 계엄령을 실시하고 있는 나라에서 쓰는 표현이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자유……”이다. 신문ㆍ잡지ㆍ방송 등을 보고 듣고 있노라면 이와 같은, 그리고 그밖에 얼마나 무수한 냉전용어가 문장과 대화를 구성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유ㆍ괴뢰ㆍ독재ㆍ기아선상ㆍ강제노동ㆍ집단농장ㆍ평화ㆍ민주ㆍ자유경쟁경제ㆍ침략ㆍ간접침략ㆍ동맹ㆍ진영ㆍ안보ㆍ파괴활동ㆍ우방ㆍ적ㆍ공산주의ㆍ자본주의ㆍ현대화ㆍ역사법칙ㆍ국제적 고립ㆍ반공전초ㆍ귀순ㆍ의거ㆍ해방전쟁ㆍ호전적ㆍ숙원ㆍ공존…… 신문단 한 면 일부분만 훑어도 이렇게 많은 낱말이 나온다.그밖에 얼마나 많은 냉전용어가 아무런 비판 없이 쓰이고 있으며 얼마나 우리 국민의 진실 확인의 능력을 제약하고 고정관념의 반응조건을 형성해왔는지 모른다. 앞서의 모든 용어가 반드시 냉전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전인수 격으로 지성적 정의ㆍ규정에 앞서 애증의 감성적 사용법에 동원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이 모든 용어에 기성관념, 고정관념, 감성적 친화감 또는 저항감 같은 심리적 작용이 병행할 때, 세계의 모든 사상은 흑과 백, 천사와 악마, 올 오어 나싱, 죽일 놈 살릴 놈 등의 양(兩) 가치적 사고형태를 결과한다. 이것처럼 지성을 마비시키고 중독시키는 요소도 드물다.이런 양가치적 사고방식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회와 국가의 기본목적인 ‘진리를 구현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방해하게 마련이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굳어져버린 사람이나 세력은 세계와 국내의 모든 ‘사실이 사실대로’보도ㆍ전달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진실 또는 진리에 반대하는 힘 또는 세력은 대중이 진리를 배우도록 훈련ㆍ교육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가르치는 대로 믿을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는 것은 흑백뿐이다. 이제는 용어에서 ‘정치성’을 빼고 ‘학문성’으로 대치해야 할 상황에 와 있다.“오늘날 교육(직접ㆍ간접)이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서 기만당하는 것을 가르치는 기술이라고 정의해도 결코 부당한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은 기만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현재로는 사회의 지배자들이다”라고 갈파한 서양의 유명한 석학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자유의 나라 서구에서도 그렇다. 하물며…….마지막 남은 다니엘 엘스버그라는 젊은 학자가『뉴욕 타임스』라는 입을 빌려 진실을 밝힐 때까지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미국 국민과 지도자들의 가치관이 이런 것이었다. 남의 실패는 나의 교훈이 돼야 한다. 미국 국민의 실패가 자칫하면 같은 전철을 밟을 위험이 있거나, 현재 이미 전철 속에 깊이 빠져 있는 다른 나라 국민에게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배우지 못한 국민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또 인류와 더불어 향상하고 진보하기를 바라는 점에서 어느 한 국민이 그 교훈을 통해서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 인류의 손실이겠다.희서(戱書) 2제(題)베트남전쟁 비밀문서가 강대국과의 ‘피로 맺은 혈맹’‘영구불변할 우방’을 국가관계의 기조로 믿고 있는 많은 후진국 지식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그것만이 아니다.다음과 같은 문서에서의 발췌는 베트남전쟁을 하는 미국의 성스러운 목적을 믿었거나 아직도 믿고 있는 후진국 지식인들에게 약간의 생각해볼 만한 근거가 되어준다.

자료 36맥노튼 국방차관보가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각서에 첨부한「부속문서─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의 첫 초안(1965. 3.24)미국의 목적70퍼센트: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하는 것(보호자라는 우리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20퍼센트: 남베트남(및 이웃국가들)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키려는 것.10퍼센트: 남베트남 인민에게 보다 나은 자유스러운 생활을 가능케 하기 위해.그리고 수락할 수 없는 후유증이 남게 되는 것을 피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간다.그러나 만약 철퇴가 불가피할 때는 우리의 목적은 ‘우인(友人)을 돕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명심한다(이하 ‘정세’부분등 생략).

자료 29사이공에서 국무성에 보내온 항공우편의 발췌(1964.12.24) (원문의 주: 이것은 국무성 문서 중에 들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주월대사 테일러 대장과 알렉시스 존슨 부대사가 이른바 베트남 군부지도자들 ‘청년장교’와 회견했을 때의 것. 장교들 속에는 구엔 카오 키, 구엔 반 티우, 구엔 챤 티 그리고 칸이라는 이름의 제독이 있다).테일러 대사 제군은 모두 영어를 아는가(티우 장군은 영어를 모른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베트남군 장성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웨스트 모얼랜드 대장이 베푼 야식회(夜食會)에서 ‘우리 미국인들은 쿠데타에 진절머리가 났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 소리는 하나마나였던 것 같다. 제군들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질 않는다.제군이 하려는 계획은 모두 정부의 안정이 이루어진 뒤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런데도 제군은 또 대혼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래서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이 가운데 대표는 누군가?키 장군 저는 대변인은 아니지만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어를 잘합니다. 우리는 책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0년 이상 우리 국민이 치러온 희생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안정을 바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통일이 없으면 안정이 안 됩니다(그리고 쿠데타를 한 이유를 설명).티우 장군 헌법상 국민평의회는 통치할 수 없습니다. 평의회 위원들은 전쟁할 의사가 없습니다.키 장군 국민평의회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쿠데타 경위를 설명).테일러 대사 나는 제군 신사들의 성의를 존경한다. 그럼, 제군이 저지른 사태의 수습책을 논의하자. 그 전에 얘기할 사람은 없나?칸 제독 우리는 마치 죄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옳다고 생각한 것을 한 겁니다. 나라를 위해서 했을 뿐입니다.테일러 대사 그렇다면 내가 어떤 생각인가를 말하지. 제군이 마치 훌륭한 정치가인 체하며 그런 행동을 저지른 덕택에, 지난 가을 세계적인 찬사를 받으면서 합법적으로 성립된 인민정부가 자라기도 전에 깨부서졌다. 키 장군, 당신은 원대복귀할 수는 없다. 군대가 또 정권을 쥔 것이다. 제군은 목덜미까지 정치에 빠진 것이다. 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 칸 장군인가?키 장군 예스 써…….(국민평의회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베트남 장성들을 설득하는 대화)테일러 대사 우리 미국 측에게 이건 아주 두통거리다. 앞으로 그래가지고서는 내가 계속 제군들을 지지해나갈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제군은 왜 일을 저지르기 전에 우인(友人)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가. 오늘 다시 이런 소리를 해야 한다니 참 어처구니없다. 위기에 처해 있는 일은 산적해 있는데, 참…… (우편 내용 끝).

권력과 언론베트남전쟁 비밀문서 보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은 위에서 훑어본 바와 같이 많은 교훈을 내외에 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귀중한 교훈이다. 『뉴욕 타임스』와 엘스버그의 행동은 미국 국민뿐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통치자들과 국민 일반, 특히 지식인에게 다음과 같은 효과를 거둔 것으로 생각된다.첫째, 정부의 독선과 비밀주의는 국민 전반의 성격과 지식을 변칙적일 만큼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독선과 비밀주의는 본래 사회를 위해 이용될 수 있을 국민의 정력과 능력의 광범한 해방을 저해한다. 또 모든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을때 당연한 결과로서 다수의 욕구ㆍ견해ㆍ필요ㆍ복지가 버림을 받는다. 이 두 가지 결과는 사회의 손실일 수밖에 없다.둘째, 소수의 권력자나 정책 수립자들의 비밀주의의 결과는 또그 세력자 또는 지배계급(층)과 국민대중과의 대립을 초래하고 만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되어국민과유리되며 마침내는 권위만을 강요하는 것으로 만사는 해결된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미국 정부와 지난 몇 해 동안 일어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분해현상과 국민의 저항으로 입증되었다. 소수 집권 세력의 이와 같은 권위는 반드시 국민으로 하여금 회의를 갖게 하여 그에 대한 집권자의반응이 탄압적일수록 회의는 번지고심화된다. 결과는 미국에서처럼 집권세력의 권위의 분쇄로 끝을 맺는다.셋째, 소수 권력자들의 자유 억압정책은 국민에게 운명적인 열등감을 갖게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억압 속에서 자라고 살아온 인민은 민주주의의 두 개의 기둥인 질서와 지성을 가지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욕망도 상실해버린다. 말하자면 구실과 명분이야 어떻든 실질적으로는 소수자의 체면ㆍ이익ㆍ권위ㆍ안전만이 주안(主眼)인 그런 정치와 체제는 인민에게서 주체성과 책임감을 박탈해버린다. 이 현상은 후진사회일수록 그 위험성이 크다.끝으로, 이와 같은 통치세력과 피치(被治)대중 사이의 모순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산속 굴에 들어가서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소리도 그 소리가 모이면, 몰랐던 사람에게도 진실이 알려질 뿐 아니라 언젠가는 맞대놓고 ‘임금은 벗었다’고 말하는 많은 소년이 나오는 법이기 때문이다.•『문학과 지성』, 197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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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먼저 사죄를 하자(1999)
관리자 | 2021.01.06 | 추천 0 | 조회 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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