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1(창작과비평, 1972)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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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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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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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베트남전쟁Ⅰ」(1972년 『창작과 비평』, 전논)

 

우리는 이제 전후 30년을 살아온 냉전(冷戰)의 시대에서 이성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성의 눈으로 세계를 살펴보기 시작한 오늘, 어느 나라의 지식인도 민중도 냉전시대의 사상적 특징인 ‘부정적 가치관’을 고집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것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던 국가와 국민에게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했다.

냉전시대의 부정적 사고방식은 자기부정을 결과했을 뿐이다. 우리도 뒤늦게나마 냉전시대의 기이한 신화ㆍ우상ㆍ권위의 실태를 캐어묻는 회의를 품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사상은 언어를 통해서 전달된다. 우리 사회와 우리 민중의 세계관을 형성한 냉전사상은 냉전용어의 주변에 형성되었다. 얼마나 많은 냉전시대의 정치 선전적 용어가 아무런 비판 없이 쓰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얼마나 우리 민중의 진실확인의 능력을 제약하고 스테레오타입적인 조건반사적 사고반응을 일으켜왔는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냉전용어의 관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정치적ㆍ사회과학적 사상을 흑과 백, 천사와 악마, 죽일놈과 살릴 놈, 악과 선의 이치적(二値的)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처럼 지성을 마비시키고 격변하는 세계에서 자기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든 요소도 드물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라는 성경의 말은 신(진리)을 인식하는 수단으로서 언어의 중요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공자는 옛날, 만약 제왕이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서슴지 않고 “바른말을 쓰는 습관을 백성에게 가르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버릇”이겠다. 정확한 언어로 표시되지 않은 개념은 대상의 정확한 전달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이 인식 과 정은 순환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결국은 인식하는 주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왜곡하게 된다.

이것이 냉전시대를 정상적 상태로 알고 살아온 한국 민중의 인식형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정치 선전적 언어에 대해서, 현재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우리 민중이 정확하게, 사실 그대로, 편견 없이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위해 한때의 시대적 기능을 면제해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국제정세의 국면에서 그 작업이 가장 시급한 것은 베트남전쟁에 관해서다. 베트남전쟁은 현대의 모순의 집약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말씀’과 ‘바른말’의 정신으로 베트남전쟁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정치적 선전과 조작된 관념을 뚫고 현재의 세계정세와 인류의 역사적 움직임을 더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식적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실태와, 그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한 올바른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기본적 사실의 인식

베트남전쟁의 성격 규정은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전쟁 당사자의 쌍방 주장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는 데서 더욱 복잡해진다. 더욱이 한국 민중에게 그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베트남전쟁을 미군 개입 이후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한다. 미국의 개입을 합리화한 설명은 ‘월맹(越盟)의 침략’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중은, 우리 국가정책이 미국과 일체화되어 있던 사실로 말미암아, 단순히 ‘월맹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베트남전쟁의 성격과 뜻은 그 전쟁의 발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검토해야 한다. 베트남전쟁은 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듯이 현대적 성격을 띠게 된 시점을 기준으로 해도 3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는 전쟁이다. 그러기에 쌍방이 상대방의 침략전쟁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성격의 전쟁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와 우리 정부의 주장은 잘 알고 있는 터이기에 앞으로 그것에 대한 반론과 객관적ㆍ역사적 사실들을 찾아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언어(용어)로 복잡한 전체의 내용을 성격지으려는 습관이나 심리적 유혹에 앞서 하나의 분석태도를 꾸준히 지니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문제를 검토하자.

케이스 우리는 국경에 따라서 군대가 동원되고 국경을 넘어서 물리적으로 외국 영토를 점령하는 그런 유형의 침략에 비해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으며 분명하지도 않은 침략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베트남)전쟁이 전자와 같은 정도의 침략이라는 우리의 견해에 불찬성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조지 케난 베트남에서 우리가 현재 대치하고 있는 쌍방에 대해서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사고의 혼란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이 분쟁은 지극히 복잡한 배경, 그리고 지극히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닌 것이며 그 대부분은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난 사태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더욱이 남ㆍ북 베트남의 경계선은 아주 독특한 성격의 것입니다. 본래 그것은 두개의 국가의 경계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실들로 미루어 정부 내부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면 문제에 혼란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굳이 그렇게 표현하자면 부분적으로는 어떤 국가에 대한 타국 군대의 ‘침략’이라고 말할 수 없지도 않겠습니다마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용어의 확대해석이 됩니다. 어쨌든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남베트남 내부의 내란적 분규이며, 바로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베트콩은 외부세력이라든지, 외부의 뒷받침이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세력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단정해야 할 일은 아니겠습니다.

케이스 그렇습니까. 베트남이라는 특정지역의 특정정세에서 그것은 기본적인 사실문제라는 말이군요.

조지 케난 그렇습니다(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베트남문제 공청회 의사록, 1966.2.10, 목요일).

베트남 사태의 단계적 변화

베트남 사태는 오늘의 정세발전이 내일의 현실로 기정사실화되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 원점에서부터 살펴보아야 사태의 전모에 대한 시각이 정립된다. 즉 각 단계마다 ‘기본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

베트남 사태는 크게 나누어 4단계의 정세발전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①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1863.5)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근 100년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식민지민족 항불(抗佛) 해방투쟁.

② 전(全)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1945.9)부터 전후 베트남 민족해방 항불전쟁의 승리를 고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 성립(1954.7)까지의 투쟁.

③ 남베트남공화국 수립(1955.10)과, 그것으로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제네바협정의 총선거 실시 협약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지되고 베트남의 반영구적 분단이 고정된 사태.

④ 그 이후 남베트남(越南)에 내란이 일어나고 미국과 북베트남(越盟)이 개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으로 변모, 확대된 현상태.

이중 ③의 단계는 기간은 짧지만 그 후 베트남 사태의 발전에 가장 중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정치적 사실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 ④의 단계는 몇 가지의 ‘사건’또는 사태발전으로 구획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현상적 변화’였으며 ‘질적 변화’의 성격으로는 하나의 단계로 총괄되어야 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항불(抗佛) 식민지 해방전쟁

베트남 사태의 모든 요소와 국면의 뿌리는 앞서 조지 케난이 말한 것처럼 길고 복잡한 역사에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한마디로 외세간섭으로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투쟁의 역사다.

10세기를 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베트남 민족은 역대 중국왕조의 동화정책에 반항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100년의 프랑스 식민지정책에 대한 해방투쟁을 끈질기게 계속했다. 북베트남은 물론이지만 남베트남의 민중(정권과 지배층은 잠시 미루어두고) 사이에서 나타나는 외세반대의 사상과 에네르기는 이 역사와 전통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노일(露日)전쟁을 통해서 베트남 지식인들의 가슴속에 민족해방과 독립에 대한 희망이 용솟음친 것은 아시아와 그밖의 일본 및 유럽 백인 식민지하 민족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의 중국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베트남 지식인들은 일본과 식민모국 프랑스에 유학했다. 아시아민족의 힘을 새로이 확인하고 프랑스혁명과 아메리카혁명의 정신을 배워온 지도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기대가 컸던 만큼 그 후의 민족적 좌절이 컸던 것도 당연하다. 윌슨의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이 그 당시 유럽 백인열강들 사이의 세력조절과 유럽 안전의 역사적 화근인 발칸지역을 그 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던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지도자는 별로 없었다. 백인열강 지도자들의 이와 같은 의도를 통찰하지 못했던 베트남 독립운동 지도자는 후일의 호치민(당시 이름 阮愛國)으로 대표된다. 그리고 그것은 1917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하의 베트남 인민의 상태이기도 했다.

윌슨의 14개 항목 원칙에 흥분한 호치민은 전당포에서 빌린 검은색의 정복과 펠트모자로 단장하고 많은 아시아와 중동의 식민지민족의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칭’대표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의 으리으리한 방을 이리저리 헤매었다. 그러나 정열로 두 눈이 빛나는 28세의 이 젊은 베트남 지식인은 독립을 꿈꾸는 모든 식민지민족의 대표들이 겪은 운명을 맛보았다. 클레망소(프랑스 수상), 로이드 조지(영국 수상), 윌슨(미국 대통령)은 물론 이 회의에 모인 어느 강대국의 지도자도 그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면회신청이 이들 강대국 지도자들의 하급 사무원의 서류함에서 나와본 일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회의록 어디를 찾아봐도 베트남이건 안남(中部)이건 그런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시 호치민의 8개 항목으로 된 온건한 요구조건은 독립을 요구한 것도 아니며 다만 식민자와 피식민 인민의 평등, 기본권리, 더 많은 학교 건립, 명령에 의한 프랑스 통치를 법률에 의한 것으로 대체, 베트남 내부문제에 대한 프랑스 통치의 자문을 위한 원주민 대표의 임명을 요구하는 정도였다. 식민지 민족문제 해결에 대한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거부와 실패는 그 후 독일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에 실패한 결과로 나타난 것에 못지않은 중대한 결과 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Bernard Fall, The Two VietNams, p.88).

제국주의적 식민세력이라는 힘에 의해 패배당하기 전에는 그 단물(甘汁) 흐르는 식민지를 내놓은 역사가 없다는 준엄한 사실이 많은 아시아 피식민민족을 눈뜨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베르사유 평화회의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대체로 남부ㆍ중부ㆍ북부의 3개 지역으로 분할하는 통치 방법으로 베트남 민중의 내셔널리즘을 억제했다. 베르사유의 교훈은 베트남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파리에서 모스크바와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1923년 명문 출신이라는 호치민이라 칭하는 자가 파리에서 모스크바로 들어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방법을 연구하고 30년에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했다.

손문(孫文)의 민국혁명과 그것을 이어받은 장개석의 국민혁명도 초기에는 베트남의 항불독립운동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많은 독립지사들이 중국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 후 중국의 국공대립은 이들에 대해서 당파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열흘도 못 가 프랑스가 망하고 프랑스 본국에 나치독일의 괴뢰인 비시 정권이 서자 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이 북부 불령(佛領) 인도차이나에 진주했다. 태평양전쟁 발생과 동시에 호치민은 베트남 인민의 전 민족적 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유주(柳州, 또는 靖西)에서 공산당을 해소하고 “정치적 신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민주주의적 세력을 결집하는 광범한 민족운동”으로서의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한다. 비시 패전 프랑스 식민정권과 점령 일본군부 통치 사이에서, 그리고 그 양 세력을 상대로 한 ‘베트민’의 무력투쟁은 일본이 패망하기 전인 1945년 5월까지 북부베트남(통킹지역)의 6개 성(省)을 지배하는 힘으로 성장했다.

베트남의 지리적 특성과 장구한 내셔널리즘의 전통적 토대로 말미암아 반식민지ㆍ항불전쟁이 현재의 베트남이 아니라 월맹, 즉 남부에서가 아니라 북부에서 전개되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 베트남 정세를 특징지어주는 전제적 상황을 조성하게 된다.

식민주의자의 배신의 역사

무력해방투쟁은 주로 통킹지역에서 전개되었지만 현재의 베트남을 구성하는 중부(安南)와 남부(交趾支那)에서도 민족해방의 운동은 끊임없었다. 보다 투쟁적 형식을 취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 전후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의 지배를 위해 다시 들어왔다.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해방 전 조선에서 패배한 일본이 다시 식민지통치를 위해 종전과 함께 한국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고 가정하는 상황과 같다. 더욱이 일본의 식민지 재통치를 그 뒤에서 전승국가가 돕고 있다고 가정할 때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싸운 1945년 8월 당시의 한국 민중이 어떤 반응으로 대했겠는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식민세력에 대해서 무력투쟁으로 상당한 지역을 해방시킬

만큼 희생을 치른 민족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 상황은 남부베트남을 점령했던 영국정부의 공식문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베트민은 남부 불령 인도차이나의 주요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안남인(安南人)에게 단계적인 자치정부의 형태를 제의했다. 그러나 안남인들은 당장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베트남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된 9월 17일 베트민은 사이공 시를 완전히 철시하고 프랑스 고용주들에 대한 총파업을 실시했다……(동남아지역 연합군최고사령관이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한 보고서「인도차이나 분쟁에 대한 영국 개입에 관한 공식문서」, 1965.12, 영국 외무성 발행 문서집 문서 제1호 제24항).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은 베트남을 한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주둔 일본 패잔군의 무장해제와 전후행정의 편의를 위해”북위 16도(현재와 같은 17도가 아님)선 이남을 영국인이, 그 이북을 중국군이 점령한다고 합의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체 없이 인도차이나 전 식민지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했다. 이를 승인ㆍ지원한 영국은 마운트바텐 원수의 동남아지역사령부(세일론)에 프랑스 군사사절단의 설치를 허가하고 프랑스 민간행정관들을 훈련하여 프랑스군의 베트남 재점령을 도왔다.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지역이 프랑스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이 조치는 어쩌면 불가피한 ‘잠정적 조치’였는지 모른다. 사이공에서 이와 같은 영ㆍ불의 점령정책에 항거해 무력투쟁을 벌인 베트민 세력은 두 제국주의ㆍ식민국가 당국에 의해서 군사적으로 섬멸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영국 공식문서의 뒷부분은 남베트남의 베트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이공의 이 폭동은 주로 비정치적인 것이었으며 불안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익을 보려는 불량배들의 짓이었다.

프랑스는 사실 유럽전쟁이 끝남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3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불령 식민지 5개 지역을 연방화해, 연방의 실권을 1명의 총독에게 주고, 형식상의 원주민 자문회의를 설치해 인도차이나를 재지배하는 정책을 선포했다. 민족해방과 독립을 요구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이를 반대했다,

1946년 2월, 16도선 이북에 진주했던 중국 군대가 철수하자 프랑스총독부는 프랑스 군대를 앞세우고 북부지역으로 들어갔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군의 진주를 반대하지 않는 대신, 프랑스 정부는 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프랑스연방의 일원으로서 정부ㆍ군대ㆍ재정ㆍ외교의 모든 분야에서 독립적인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② 안남(중부)과 교지지나(交趾支那, 남부)를 병합해서 단일 통일국가로 할 것인지의 여부는 국민투표로 결정하기로 하고 ③ 프랑스 군대는 5년간에 걸쳐 베트남 군대로 교체되며 ④ 그 이상의 세부문제는 앞으로 계속 협상해서 해결한다는 협정에 동의했다(1946.3.6, 협정).

그러나 프랑스는 이 협정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20일 후에 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임시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발표했다. 이 식민주의 프랑스의 두 번째 배신은 베트남 인민을 격분시켰고 그로부터 주로 북부에서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과 프랑스 식민군대 사이에 전투가 재발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재지배하기 위해 중국 군대의 북부 철수를 중국 내 프랑스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교환조건으로 장개석 정부를 유화했다. 그 조건이란 ① 중국 내 프랑스 치외법권의 포기 ② 프랑스 자본으로 건설한 하이퐁에서 곤명(昆明)까지의 철도에 대한 중국 권리 인정 ③ 중국의 하이퐁 항 및 그 주변지대의 출입권 승인이다. 베트남을 희생으로 하는 강대국 이익 위주의 해결 형식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이 잠정적 해결방안에 대해, 베트남 민족을 대표한 베트남민주 공화국 호치민 대통령이 동족을 배신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즉 그에게 통일ㆍ독립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중부와 남부의 베트남인을 사실상 프랑스 식민지하에 내맡겼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국의 보호적 세력이 물러나고, 영ㆍ불의 식민주의적 공동압력 앞에 놓인 해방세력의 역량으로서 그 외의 방법이 있었겠는가는 문제이겠다. 어떻든 해방을 위해 싸운 베트남 전 인민의 노예화냐,절반만의 노예화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정세를 배경으로 생각할 문제이겠다.

프랑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힘에 의해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기까지는 절반이라도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식민투자는 지금의 베트남인 교지지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치 독일에 의해 일패도지(一敗塗地)되어 사실상 전후의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해버린 프랑스는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도 식민시장을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이었다.

중부와 남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베트남 정부의 노력은 4개월후 프랑스의 퐁텐블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호치민은 문화ㆍ경제에 한정되고 베트남민주공화국 지역에서의 휴전과 프랑스군의 철수를 새로 규정한 잠정협정만을 가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으로 3월 6일 협정을 강요한 물리적 힘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 8월 협정에 앞서 최소한 남부만이라도 분리 지배하려는 프랑스는 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선포했다. 이것은 분명히 3월 협정에 대한 배신이었다.

8월 협정도 폐기되었다. 유럽지역에서 군사력의 여유를 얻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역의 군사태세를 강화했다. 그러고는 12월 19일 베트남 정부에 베트남 군대의 자발적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들이댔다. 최후통첩에 응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을 명분삼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군사적 대결을 강요하려는 계획이었다. 3일 후 프랑스 공군은 하노이ㆍ하이퐁 등 대도시에 대한 전면폭격을 감행하는 동시에 육군은 하노이 시를 점령하고 베트남 군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하노이 시 폭격으로 죽은 베트남인만도 단 두 시간에 6,000명을 헤아렸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제20절). 베트남 인민은 세 번째의 배신을 맛보았다.

베트남 인민과 제국주의 프랑스군 40만은 이로부터 1954년5월 7일, 디엔 비엔 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하기까지 실로 7년 반의 혈투를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전쟁이었다.

미ㆍ영ㆍ불 등의 공식문서들은 이 처절한 전쟁을 ‘내란’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을 식민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는 성격 규정과 식민지 인민의 입장에서 보는 민족해방전쟁의 성격 규정을 단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내란’이란 합법적 통치권력에 대한 민중의 정권전복 반란의 뜻을 띤 정치적 용어다.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를 베트남의 합법적 통치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을 승인한 사실을 백지화하는 견해다.

식민주의자의 가장 큰 배신은 인도차이나전쟁을 종결지은 제네바 휴전협정(1954.7.21,조인)에서 합의한, 2년 후 즉 1956년 7월에 베트남 독립ㆍ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조약의무를 프랑스가 포기한 것이다. 프랑스는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해 휴전선 이남지역에서 휴전과 관련된 군사적ㆍ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고 총선거 실시를 위한 협의를 하며, 1956년 7월에는 전 지역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는 일방(一方)주체로서의 의무(최종선언 제7항)를 서약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합의된 선거날짜를 3개월 앞두고 프랑스 군대를 철수해버렸다. 그러고는 휴전협정을 이행할 조인 당사자인 주베트남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를 해체함으로써 휴전협정의 이행은 물론 총선거 실시의 책임도 기피해버렸다.

이것은 식민주의자의 네 번째 그리고 가장 중대한 베트남 인민에 대한 배신으로 지탄받게 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는 베트남 사태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총선실시 합의의 유산을 꼽는 데 미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전문가와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돼 있다(이 견해에 대해 미국과 현 베트남 정부는 별개의 해석을 하고 있다. 그에 관해서는 다음에 상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고 딘 디엠의 등장

베트남 정세의 긴 역사를 통해 가장 빈번히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것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역할에 관한 견해차다. 이 견해 대립이 대체로 식민지에서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반영하고 나타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정치학 용어로서 어의의 규정을 떠나 실천적 측면에서 나타난 이양자의 비교는 베트남에 관한 한 상당히 대조적인 면을 보여준다.

프랑스가 식민통치하의 호치민 세력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나 현재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동기는, 민족주의자는 베트남의 독립과 양립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 자는 베트남의 주권ㆍ독립을 국제공산주의에 예속시킨다는 견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 실천적 과정을 사태발전의 역사 속에서 검토해보는 것은 ‘학문적으로’유익하겠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고정관념이나 이해관계의 입장을 일단 벗어나는 학문적 태도가 전제로 요구된다.

민족해방과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프랑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베트남인의 투쟁은 그들의 일부가 소련혁명으로 어떤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되는 1930년대에 훨씬 앞서서 100년 가까이 계속되어왔다. ‘민족주의자’라는 규정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총애를 받은 고 딘 디엠이나 ‘공산주의자’라는 규정으로 배척을 받은 호치민은 이미 그 이전부터 베트남의 식민지해방과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이 사실에서 볼 때, 식민지 베트남민족의 해방ㆍ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은 누구나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인 셈이다. 내셔널리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정치학자들의 정의를 따른다면, 베트남의 반식민ㆍ반제국주의는 그대로 내셔널리즘이다. 베트남에 관한 한 민족주의는 본질이고 나머지의 철학은 해방투쟁의 방법론과 식민지에서 해방된 사회체제에 대한 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외세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는 전부가 민족주의자라는 데 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러기에 차이점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다. 이것은 베트남의 경우도 그렇지만, 모든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 말미암아 같은 민족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밀착해 있는 세력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소극적이었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는 반식민지투쟁에서 적극적이었다는 차이를 낳게 한다.

바오 다이 황제가 전형적인 경우이겠다. 1945년 3월 일본군이 베트남 전역의 군사적 점령을 완료하자, 일본은 안남왕국의 과거 프랑스 식민지하의 명목상의 황제에 대해서 북부와 남부를 합친 통일왕국의 독립선언을 요구했다. 이것은 백인 제국ㆍ식민주의 세력을 추방하려는 황색인 제국ㆍ식민주의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바오 다이는 이에 응했다. 그것이 백인 프랑스 제국ㆍ식민주의의 괴뢰에서 다만 일본 황색인 제국ㆍ식민주의의 괴뢰로 탈바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이것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최초의 베트남 통일ㆍ독립이다.

그 후 베트남 인민과 영토의 완전한 통일ㆍ독립을 요구한 베트민(베트남민주공화국)을 말살하기 위해 협정을 폐기하고 식민지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는 홍콩에 ‘망명’중이던 바오 다이를 다시 불러들여 1949년 6월,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 원수로 추대했다. 이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이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끝까지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꾸며낸 흉계였다. 그것은 베트남의 일부에 독립의 허울을 씌우는 정치극이었다.

벵상 오리올 프랑스 대통령과 바오 다이 ‘황제’사이에 체결된 이 협정은 ‘엘리제협정’이라고 불린다. 엘리제협정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되 “국방과 외교권은 프랑스 정부가 장악하고,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에 기지를 영원히 보유하며 그 통행권은 무제한으로 보장되며, 재정 및 기타 국정의 주요부문에서 프랑스 정부의 자문과 지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정치극이다(엘리제협정과 같은 것이 프랑스와 라오스 및 캄보디아 사이에도 거의 동시에 체결되었다).

이 ‘독립국가’가 현재 베트남 정부의 법통이다. 이 독립국가는 ‘비공산주의적 민족주의자’인 베트남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

앞서 1946년 3월 협정으로 독립을 선언한 호치민의 베트남민주 공화국에 대한 국가승인 요청을 거부한 영국은 바오 다이 왕국과 라오스ㆍ캄보디아 왕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했다(1950.2.7). 미국도 같은 날 3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했다.

‘주권국가’로 승인한 영국 정부의 외무성이 의회에 제출한 베트남 사태에 관한 공식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바오 다이 각하의 지위를 강화해주기 위해서 프랑스는 베트남이 독립국가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원했지만 ‘엘리제협정’에 내포된 제한과 제약으로 보아 베트남이 국제법상 진정한 독립국가였는지는 결코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1950.2.7) 3국을 승인했다(“The Official Documents Relating to British Involvement in the Indo-China Conflict: 1945~65”, 背景 제22항).

이 공식문서는 이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영국의 승인은 조심스러운 말로 표현되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프랑스연방 내의 연합국가’로서 승인되었다. 그러나 사이공 주재 총영사는 공사의 지위를 부여받고 그 후 곧 캄보디아와 라오스 조정에도 신임장을 제정했다(같은 글, 제23항).

미국이 베트남 사태 개입의 법적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이 정부와 체결한 협정ㆍ조약들이다(이 관계는 뒤에서 상술한다).

민주적 지도자의 자격 차원에서

현대 민주주의가 고전적 정치민주주의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경제적ㆍ사회적 측면의 민주주의를 그 기본요건으로 한다는 학설에 따른다면 여기서 베트남에 관한 고정관념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더욱이 고전적ㆍ정치적 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였던 자유시장ㆍ경쟁경제ㆍ사유재산의 제반 제도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절대적’요건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대에는 더욱 그러하겠다.

민주주의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 국가사회의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적ㆍ경제적 권리와 기회가 민중, 인민, 시민 또는 국민(명칭이야 어떻든)에게 얼마나 균등하게 배분되고 보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문제다. 그것은 두 지배세력의 어느 쪽이 그들의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기득권을 민중일반과 가급적 균등하게 분유(分有)하려는 뜻을 가졌는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차지한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박애심 이상의 어떤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자기희생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후진사회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규정짓는 이와 같은 복합적 요건들을 종합적으로 시험대에 올려놓고 분석할 때, 남ㆍ북 베트남에 ‘민주주의’의 양을 얼마만큼씩 배점(配點)해야 할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강력한 ‘민족주의자’가 반드시 민주주의적이고, 비계급적이고, 비외세의존적이고, 대중의 이익을 제1차적 관심으로 생각하고, 아울러 민중의 정치적 자유도 보장하는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예스’이면 어떤 구실과 수단으로도 그 세력을 돕는 것은 타당하다 할 것이다. 그 답변이 ‘노’이면 베트남 사태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이나 선전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이 어떻든 ‘진실’이라는 것을 모든 판단의 토대로 해야 한다는 바로 ‘민주주의’의 원리와 정신 때문에도 더욱 그렇다. 다른 중요한 정치적 덕성 없이, 단순히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식민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나 정권이 얼마나 반민중(인민ㆍ국민)적인가 하는 좋은 증언이 있다.

본인은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께 지난 일요일자『뉴욕 해럴드 트리뷴』지에 실린 사이공 주재 미국인 특파원의, 흥미 있고 또 본인이 보기에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낸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가끔 불안했던 과거 중국의 장개석 정권과 바오 다이 정권을 비교해보았다. 한 가지 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바오 다이 정부가 1947년 말 중 국내란에서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을 때의 장개석 정권보다 더 약하다는 결론이 거의 불가피했다. 이 정권은 장개석 정권보다 국민의 지지가 없고 권위의 정통도 더 약하며 정권을 위해서 일하는 국민과 인물들의 비율도 더 낮고 투쟁의 열의도 더 약하다. 바오 다이 정권이 분명히 더 강한 단 한 가지는 동(同) 정권이 프랑스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프랑스 행정관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은 또한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프랑스 군대가 베트남 땅에 있는 한, 바오 다이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한편 이 불행한 나라의 경제 재건과 민중의 복지는 호치민이 지배하는 대단히 광대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등한시되고 있습니다. 호치민은 진보적이고 번창하는 사회주의 복지국가로 보이는 나라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바오 다이 황제는 사이공에서 300마일 떨어진 그의 산장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고 있습니다(영국 하원의사록초, 1950.4.14, 영국 외무성 인도차이나에 관한 공식문서집 부록 문서 제11호).

……동남아지역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바오 다이 정권이 자국 내에서 아무런 통제력도 가지지 못한 정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 다이 정권이 결코 시작되어서는 안 될, 그러면서도 전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장구한 더러운 프랑스제국주의의 모험의 꼬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모험을 지지하지 않았으면서 인도차이나에서 이러한 종류의 모험을 지지하는 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그것은 또한 공산주의를 막는 최선의 방법도 못 됩니다. 본인은 호치민이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리라는 동료의원의 견해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본인은 그가 공산주의자이고 아마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본인은 그의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관련 때문에 앞으로 인도차이나의 사정이 극히 어려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베트남에 괴뢰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련식 수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련인들이 이른바 철의 장막 뒤에서 해온 수법입니다. 그것은 현지 인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이며,이것은 비민주적 수법입니다(같은 글,버밍검 에스톤 출신 와이워드 의원).

바오 다이 정권에 완전히 실망한 미국은 고 딘 디엠을 새로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소수 지배층의 정치ㆍ경제ㆍ권력 독점과 베트남 사회의 원리가 되어버린 부패를 도려내고 진정 민중(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가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미국의 베트남 로비(친베트남파) 거물은 케네디 상원의원(그후 대통령), 그 부친(전 영국대사ㆍ재계거물) 및 케네디 일가,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원판사, 헨리 캐보트 롯지(공화당 전 대통령 후보, 그 후 주베트남대사), 마이크 맨스필드(현 민주당 상원원내 총무), 그리고 반공 추기경으로 유명한(사망 전까지 한국전선과 베트남전선의 반공기지를 크리스마스 때마다 방문했던) 뉴욕의 스펠만 대주교…… 등 쟁쟁하다. 이들은 1953년, 더글러스 판사 집에서 회합을 갖고 바오 다이 민족주의를 고 딘 디엠 민족주의로 대치시키자는 데 합의했다. 그들은 고 딘 디엠의 자질을 민족주의, 인간적인 고결함, 용기, 이상주의적 결단력으로 평가했다.

이와 같은 반공민족주의자의 모든 소질을 높이 평가받은 고 딘디엠은 미국 정부의 지지로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55년 10월 국민투표에서 바오 다이를 물리치고 베트남 국가원수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모든 병폐를 깨끗이 척결할 민족주의자로 기대되었다. 아이젠하워 정부와 그 후 케네디 정부의 그에 대한 지원은 거의 무조건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사실 바오 다이 정권의 통솔력 결핍과 무기력은 베트남 인민들 사이에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싸우느냐는 감정을 일반화시켰다. 어떤 프랑스인이 나에게 말했듯이, 베트남이 필요로 하는 인물은 이승만 같은 지도자다. 설사 그런 인물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수반할 모든 곤란한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막스웰 테일러 퇴역대장 증언, 베트남에 관한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청문회 의사록, 1966.2.17).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추대된 것이 고 딘 디엠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결’한 ‘민족주의자’밑에서 민중에 대한 정치적ㆍ폭력적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경제ㆍ사회ㆍ문화적 부패는 베트남의 역사상 유례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의 민족주의는 사실상 민족적이 아니라 반민족(인민)적인 데까지 이르렀다.

디엠 정부는 전국 농토 가운데서 45만 7,000헥타르를 몰수했고,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인 전(前) 개인 소유지 24만 6,000헥타르를 베트남 정부에 반환했는데 정부가 1958년까지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 계획으로 농민에게 재분배한 것은 프랑스인 소유로 반환된 것에 해당하는 24만 8,000헥타르밖에 안 된다. 최근의 미국 AID보고에 의하면 분배되지 않은 농지는 대부분 정부가 쥐고 있으며 정부는 그것을 최고가격으로 입찰하는 자에게 임대하고 있다(Bernard Fall,“Viet Nam in the Balance”, Foreign Affairs, 1966년 10월호, p.5).

토지 없는 수백만의 빈농은 사이공 정부가 농촌지방의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시 빼앗겨버린다. (베트콩에 의해 분배되었던 농토는) 정부군이 그 지역을 재점령하면 정부군에 의해서 과거와 같은 낡은 소작제도가 다시 복구되기 때문이다. 정부군이 재점령하고 들어온 지역에서는 실제로 부대 보급트럭에 지주가 함께 타고 들어와 부대장들로 하여금 이익금을 분배한다는 약속으로 그 지역에 대한 소탕작전을 명령하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베트콩에 의해서 이미 분배된 농지 소유권을 차라리 그대로 기정사실화하는 식을 포함한 ‘농민지향적’농지개혁을 하는 것이 오히려 어떠한 한 가지 반(反)반란의 방법보다도 농민의 지지를 얻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사이공에 자리잡고 있는 ‘지주 지향적 지도자 집단’이 진정 그와 같은 농촌혁명을 지적으로 구상할 수 있느냐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이공 정부의 군장성들과 의사들로 구성된 집단이기 때문이다(같은 글).

이쯤 되면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게 된 장개석 정권의 시종일관된 실태의 재판이라 할 것이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에서는 장개석이나 바오 다이, 고 딘 디엠은 다 같다. 그들과 호치민이나 모택동 사이에는 민족주의자라는 공통점 외에 하나는 자본주의적이라는 것과 하나는 사회주의적이라는 철학적 차이가 있다는 것뿐이다(정치적 관용과 민주주의 원칙 및 국민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측면은 뒤에서 별항으로 상술한다).

존슨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 당시 ‘동양의 처질’이라 불렀고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의 친베트남파 거물급 인사들이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불러온 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는 결국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군부쿠데타에 의해 1963년 11월 2일 살해되고 만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디엠이 살해되기 얼마 전 현지조사단을 파견했다. 그 조사단의 한 사람이 내린 결론에 관해서 케네디 전기의 저자인 슐레징거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살았던 중국 전문가인 테오도어 H. 화이트(Theodore H. White)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중경(重慶)의 상태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써 보내왔다. 그는 중국 말기의 장개석 역할을 고 딘 디엠이, 장개석 부인(송미령) 역할을 누 부인(고 딘 누)이 어쩌면 그렇게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지에 놀랐다. 그는 “남베트남에서의 패배가 우리의 패배로 직결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지역을 우리가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면 우리는 적절한 인물을 찾아야 하고 단호히 간섭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Schlesinger, A Thousand Days: John F. Kennedy in the White House, p.544).

고 딘 디엠에 대한 최종판결은 그해 9월 3일 케네디가 디엠에 대한 전문 작성을 지시한 메모로 내려졌다.

나는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2개월간의 정세를 보건대 (사이공) 정부와 민중의 연대감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으로 기대한다. 필요하다면 인물 교체로 가능할 것이다……(같은 책, 992쪽).

그 후 거의 1년에 두 번씩 일어난 군부쿠데타의 주인공들과 다시 그 뒤를 이은 반공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그때마다 같은 평가가 내려졌다. 남베트남의 민중과 사회의 정세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참작하고도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치된 제3자적인 평가인 듯하다.

제네바협정의 행방

베트남전쟁의 해결이라는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반드시 그 방안의 준칙(準則)으로 제시되는 것이 제네바 휴전협정으로의 복귀다. 전쟁의 쌍방 당사자도 각기 제네바협정에 의한 해결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제네바협정 위반을 비난한다. 제3자 국가나 전문가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네바협정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소생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지만 그 협정의 행방은 묘연하다. 쟁점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① 휴전선이 2년 기한의 일시적 ‘군사적’분계선이지, 어떤 뜻에서든 ‘정치적 국경선’이 아니라는 조항 ②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증강ㆍ동맹결성의 금지조항 ③ 협정 조인 후 2년 안에, 즉 1956년 7월까지 베트남 전역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규정한 합의다. 이 조항들에 대한 위반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문제와, 그 위반의 책임을 기피하거나 상대방에 전가시키는 것이 당사자들의 입장이다. 제3자적 국가나 전문가들은 그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데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그 책임을 발견하는 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제네바협정에 대해서 행한 일방적 선언을 통해 하나의 베트남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남이든 북이든 분리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국총선 실시에 관한 조항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그 선언에서 국제 감시하의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이 달성되게끔 노력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고 나서 곧 미국은 남베트남에 분리된 하나의 국가정부를 세우는 공작을 시작했다. 고 딘 디엠을 지도자로 하는 국가와 정부를 세우는 노력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지만 디엠 정권이 제네바협정 이후 몇 해 동안 관대하게 취급되고 호치민 지지세력 측에서도 대체로 이를 방임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그 실체는 곧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제네바협정이 규정한 총선거 준비를 휴전선 이남(남베트남)에서 진행하고 준비해야 할 책임의 당사자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베트남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승리한 베트민은 그 군대를 남부에서 철수해 상당 기간 혁명활동을 중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총선거가 실시되면 호치민이 전 베트남 인민의 8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견해 때문에 고 딘 디엠 정권에 제네바협정이 금지한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그로 하여금 선거를 거부하게 해 제네바협정에 대한 책임에서 물러섰다. 여하한 궤변을 동원해 그 반대를 입증하려 해도 미국이 디엠 정권을 앞세워 제네바협정의 핵심적 합의를 무시함으로써 선언을 통해서 밝힌 입장을 배반한 사실은 은폐할 수가 없다(코넬 대학 조지 케이힌 교수).

이에 대한 반론도 강하다.

남ㆍ북 베트남의 경계선이 일시적인 것으로 설명되었다 하더라도 남베트남에 대한 공격의 침략성을 조금도 감면할 수는 없다. 남북한 간, 동서독일 간의 경계선도 잠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북한의 무력침략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러스크 미국무장관, 미국국제법학회 연례총회 연설, 1965.4.23).

제네바 휴전협정의 성립 과정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계속된 7년여의 전쟁이 베트남ㆍ라오스ㆍ캄보디아 3지역 인민의 대프랑스 식민항쟁이었기 때문에 제네바 협정은 이 3지역(국가)에 대해서 거의 비슷한 내용의 각개의 협정으로 구성되었다(이후 베트남 관계만 논하기로 한다).

가장 중요한 기본사실은 프랑스는 패전 당사자로 조인했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베트남 인민 전체’를 대표해 승리자로서 조인했다는 정치적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식민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전쟁의 종결문서에서도 그 일방(一方) 대표는 프랑스연합군 총사령관이고, 그 지역 인민을 대표해 서명한 것은 역시 베트남민주공화국 대표였다. 다시 말하면 라오스ㆍ캄보디아는 논외라 하더라도 베트남은 남ㆍ북이 없었고 전체 베트남은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인정되고 그 정부는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대통령의 정부로 되어 있다. 그것 외에는 베트남에는 국가나 정부가 없고 그것만이 유일한 국가ㆍ정부라는 전제가 식민통치국인 프랑스에 의해서 승인된 것이다. State of Viet Nam(베트남국)이라는 이름으로 바오 다이 왕국 대표가 프랑스 편에 서서 참석했지만 그것은 협정 당사자인 교전단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국가’로서의 자격은 앞서 검토한 바와 같다.

회담은 1954년 4월 26일에 열려 7월 21일 협정이 성립되었다. 미국과 바오 다이 정부는 협정에 불만을 표시해 도중에 대표를 철수했으나 미국은 협정을 준수하겠다는 일방적 선언을 발표했다. 베트남에 관한 주요조항은 무엇이며 그 합의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휴전선은 국경이 아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흩어져서 싸우던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를 일단 격리시키고 휴전에 들어가기 위해 대체로 북위 17도에 해당하는 변 호이 강을 따르는 ‘임시 군사분계선’이 정해졌다. 프랑스군은 그 남쪽에, 베트남군은 그 북쪽으로 이동ㆍ재집결하기로 하고 이동 완료기간을 300일로 정했다(협정 제1조 및 제2조).

‘군사분계선’의 성격에 대해서는 협정과 별도로 각국이 조인한 ‘최종선언’에서 이렇게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본 선언은 베트남에 관한 근본목적이 적대행위를 종식하기 위해 군사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는 것과, 군사분계선은 임시적인 것이며, 여하한 경우에도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선언 제6항).

그 후와 현재의 문제는 이와 같이 국경이 아닌 분계선을 넘는 것이 침략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는 데 집중되어 있다. 더욱이 어느 쪽인가가 제네바협정의 핵심적인 합의를 위배했을 때, 협정 전상황과 협정상 권리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국경이 아닌 ‘임시적 군사분계선’의 협정상 효과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월맹 측 견해다. 이에 반대해서 그것은 그래도 침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앞서의 러스크 발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 측 견해다. 이 대립되는 견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 준수의 전제조건으로 설정된 그밖의 협정 각 조항이 어느 쪽에 의해서 위배되었는가가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도 견해는 대립되고 있다.

1956년 통일총선의 유산

협정 조인 2년째인 1956년 7월로 합의됐던 통일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사실은 베트남 사태가 현재와 같은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가장 중대한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협정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할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각 병력의 재집결 지역 내 민정은 본 협정에 의해 재집결하는 군대의 국가가 책임진다(협정 제4조 a항).

최종선언은 이 조항을 보충해 그 날짜를 ‘1956년 7월’로 정하고 양 지역 행정책임 당사자가 이 문제에 관한 토의를 협정 조인 날부터 시작할 의무를 규정했다. 그 책임 당사자는 물론 북에서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고 남에서는 프랑스 정부(군 최고사령관)다. 이 합의와 그 불이행이 국제적 논전을 불러일으킨 핵심적인 문제다. 그 쟁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

① 쌍방 책임 당사자는 총선 준비의 책임을 이행했는가?

② 선거 실시를 거부했거나 합의를 무시한 사실이 있는가? 있다면 어느 쪽인가?

③ 그 이유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총선합의의 불이행 내지 거부의 문제는 제네바협정에 관한 ① 법적 해석 ② 당시의남ㆍ북 베트남 정세 ③ 미국 및 아시아 정치군사적 상황의 세 측면을 종합해서 검토해야 한다. 법적 측면은 주로 프랑스와 프랑스의 괴뢰정부로 인정되던 바오 다이 정권(베트남국, State of Viet Nam)과 관련된 것이다. 정치적 상황은 주로 당시의 미국이 세계적 반공정책 및 군사전략과 그 일부로서의 반공베트남 기지 확보정책의 전개 과정이다.

(1) 법적 측면

총선을 준비할 행정적 준비와 그 이행을 남베트남에서 책임진 권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협정체결 당사자인 프랑스다. 그런데도 프랑스 정부는 총선거를 실시해야 할 조약상 일자인 1956년 7월을 앞두고 4월 15일을 기해 베트남 주재 프랑스군 총사령부를 해체ㆍ철수해버렸다. 이것은 일단은 제네바협정과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서인 ‘프랑스공화국 정부의 선언’에 따른 것이기는 하다. 그 선언(1954.7.21)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프랑스공화국 정부는 양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일정한 수의 프랑스 군대가 특정지점에 특정기간 남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계 정부의 요청에 따라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 확정된 기간 내에 그 군대를 캄보디아ㆍ라오스ㆍ베트남 영토로부터 철수할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는 바다.

그러나 이것으로 협정과 최종 공동선언에서 약속한 총선 실시 주관 당사자로서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부의 선언은 이어 협정조인 이후의 모든 행동준칙으로서 다음과 같이 스스로 공약했던 것이다.

캄보디아ㆍ라오스ㆍ베트남에 평화를 재확립하고 공고히 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그 3국의 독립ㆍ주권ㆍ통일 및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근거로 하여 행동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휴전조항 준수와 총선거의 실시를 책임지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프랑스군 총사령부가 존재하지 않게 된 문제는 제네바협정의 시행을 감시할 책임을 맡은 국제감시위원단(캐나다ㆍ인도ㆍ폴란드)의 법적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사태를 조성했다. 왜냐하면 휴전과 총선거 실시를 감시할 의무 및 권리를 맡은 국제감 시위원단은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한 것이며, 그 협정은 프랑스 최고사령관이 두 조인 당사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태와 권한으로 존재하든 남베트남 정부는 프랑스군 최고사령관하에 있는 권력주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사태에 대해 제네바협정 조인국 공동의장단(영국과 소련)은 1956년 3월 23일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각서를 조인국에 발송했다.

프랑스연합국 최고사령관은 협정의 이행에 관한 책임을 인수했으며 그것을 관리할 국제감시위원단에 대한 사령부의 협조를 다짐했습니다. 프랑스 당국이나 남베트남 당국 어느 쪽도 프랑스 최고사령부의 철수 후 동위원단이 협정조항을 계속 감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런 제안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남베트남 당국은 4월 1일 이후 동위원단의 안전에 관한 책임을 인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동당국은 남베트남에 있는 프랑스 국가 권력의 계승자로서 프랑스 최고사령부의 법적 책임을 인수할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각서 제2항).

이러한 상태하에서 위원단은 협정 당사자의 일방, 즉 프랑스 최고사령부가 소멸한 이후 법적 근거를 잃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를 중대한 관심사로 생각합니다. 남베트남이 최고사령부가 부담했던 책임을 완전히 인수하지 않는 한, 위원단이 남베트남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제3항, 이상 번역문은 영국 외무성 공식문서 등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발행,「입법참고자료」,1968.10.5, 제96호에서 인용).

프랑스 정부의 이와 같은 일방적 처사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에 앞서 남베트남에서 그 의무를 전면적으로 인수할 ‘오소리티’가 있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바오 다이 정권이 그와 같은 주권정부로서의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음은 앞서 본바와 같다. 게다가 그 정권은 제네바회의 진행 중, 대표는 참석시키고 있으면서도 협정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협정과 ‘최종선언’에 조인하기를 거부했다. 바오 다이 정권은 제네바회의 기간 중 미국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 베트남 사태가 전쟁으로 확대되고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출현했을때 미국과 베트남공화국(고 딘 디엠) 정부는 그들이 제네바협정 조인국가가 아니므로 그 협정조항을 이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내세웠다. 미국과 베트남 정부의 태도는 선거일자가 가까워지자 점점 더 이 거부 태도를 굳혔다. 공동감시위원단의 일원인 인도는 사태의 중대성과 그것이 앞으로 전쟁상태를 초래할 것임을 정확히 예언했다. 선거실시 예정일을 15일 앞두고 인도 정부가 제네바회의 공동의장단에 보낸 각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따라서 베트남의 민정은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베트남민주공화국(북)과 남에서는 프랑스연합이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후 프랑스연합은 남부지역에 대한 그들의 주권을 베트남국에 이관했다. 그러므로 협의를 할 양 지역의 소관 당국은 북에서는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에서는 협정 제27조에 의해서 프랑스당국으로부터 남베트남의 민정을 인수한 베트남국이다(각서 제3항).

이와 같은 책임의 불이행은 제네바 해결방안의 기초를 와해시킴으로써 당사자 사이에 전쟁상태를 다시 초래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제4항).

결국 현재의 베트남이 ‘계승국가’로서 주권 및 국제적 권리를 주장한다면 역시 계승국가로서 프랑스 최고사령부가 수락했던 조약의무도 져야 한다는 해석이다.

베트남민주공화국(북) 정부는 협정체결 이후 2년 동안 총선실시를 준비하기 위한 협의(협정상 의무)를 프랑스 최고사령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요구하는 각서를 보낸 기록들이 남아 있다. 예정 일자를 1개월 앞서 발표한 성명(1955.6.7)은 협정상의 ‘일시적인 군사분계선’을 ‘국경화’하려는 음모가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모든 협정조인국과 특히 프랑스 당국에 대해서 최고사령부를 철수함으로써 총선실시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영국 외무성문서집 문서 제52호).

이상과 같은 많은 사전경고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프랑스 정부가 그 최고사령부를 철수한 것은 총선이 실시되지 않은 ‘원인’인 동시에 그럼으로 해서 책임추궁을 회피하면서 총선을 거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불행한 ‘결과’였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2) 남ㆍ북 베트남의 실정

법적 문제와 관련해서 문제된 것은 예정된 총선거 방법에 관한 이견이다. 주로 선거실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기피적인 태도를 취한 미국과 베트남 당국의 성명은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는 ‘자유ㆍ민주적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다. 총선을 약 1년 앞두고 남베트남에서는 바오 다이가 물러나고 공화제가 선포되어(1955.10.26) 미국의 지지를 받은 고 딘 디엠이 대통령에 취임해 있었다.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바오 다이 정권의 반민족ㆍ무능ㆍ부패ㆍ괴뢰성에 몹시 실망하여 남베트남에 확고한 민족주의적 반공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했던 미국은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네바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54년 7월 7일 미국에 망명 중이던 고 딘 디엠을 바오 다이 정부의 수상으로 앉혔다.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미국 내에서 강력 완강한 반공지도자로 인정된 디엠은 제네바회의 중 협정체결 후 베트남 정부 수상으로서 사실상 미국의 베트남정책을 대행했으며 제네바협정 반대, 총선 거부는 디엠 수상의 이름으로 주장되었다. 대체로 디엠 수상을 통해서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베트남정책은 전쟁 종결, 제네바회의(한국에 관한 회의는 협정 없이 유산했다), 선거에 대한 태도 등 베트남 휴전 1년 전에 있은 한국에서의 미국정책의 연장 선상에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어디서나 비슷한 상황에서 언제나 문제되는 일이지만, ‘자유ㆍ민주적’선거는 사회민주주의체제와 자본주의적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에서 각기 민주와 자유의 개념과 내용과 실태가 다르다는 데서 베트남에서도 문제되었다.

다만 한 가지 베트남의 특수상황으로는 서구식 개념과 방법에 의한 ‘자유ㆍ민주적’선거를 실시했더라도 베트남의 반공적 남부가 이길 수 있었겠는가 하는 가상적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당시의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만약 (제네바 협정에 의거해서) 남ㆍ북 베트남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면 아마도 주민의 80퍼센트는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인도차이나 전문가들과 얘기해보거나 편지를 교환해본 일이 없다”(회상록「변화에의 신탁」)고 말한 것은 중요한 판단자료가 되어준다. 이 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 총선을 감시할 제네바회의 의장국인 영국의 처칠에게 보낸 서한에서 표명한 두려움이다. 당시의 호치민이 남ㆍ북 베트남은 물론 인도차이나 전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존경받는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와 세계가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었다. (북베트남) 정부의 총선실시 촉구성명은 언제나 ‘자유ㆍ민주적’선거를 주장했다. 호치민은 쌍방 체제의 차이를 떠나 서방 선거방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당시의 객관적 정세는 부인할 수 없다.

북베트남에서 많은 가톨릭교도가 협정 후 남쪽으로 내려온 사실을 들어 이와 같은 정세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남으로 이동한 수는 86만 명이고 그중 60만이 가톨릭교도로 추산된다(Bernard Fall, The Two Viet-Nams).

이것은 제네바 휴전협정이 쌍방 군대가 이동ㆍ재집결을 완료하는 기간, 즉 300일 이내에 이주를 원하는 주민의 자유이주를 돕는다는 조항에 따라 허용된 것이다. 남하한 86만 명 중 가톨릭이 아닌 나머지 약 26만 명은 주로 프랑스 식민지 행정기관 및 프랑스 군대의 베트남인과 그 가족들로 알려져 있다(같은 책).

새로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려는 체제에서 그에 반대하는 종교신자와 민족해방전쟁에서 식민지군대에 가담했던 반민족적 성분의 원주민이 떠났다는 것이 과연 호치민에 대한 지지의 손실을 뜻하는 것인지는 측량하기 어렵다. 그것은 북베트남 경제의 일시적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새로운 체제에 대한 민중의 성분을 처리하는 정치적ㆍ사회적 사업에 도움을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 가톨릭 주민의 수송은 프랑스 호(號)와 그것을 지원한 미국의 함대 소속 함정이 담당했다. 북베트남은 이주 희망자의 이동을 억제하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베트남 휴전 감시위원단의 공식 보고서는 북베트남 정부가 위원단의 요청에 따라 기한이 지난 후, 이주 희망자의 이용을 위해 그 기간을 1개월간 더 연장하는 조치를 취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3) 정치ㆍ군사적 상황

베트남식민지전쟁, 제네바회의 개최, 협정 성립 그리고 총선거 실시의 유산에 이르는 1949년부터 56년까지의 모든 베트남 사태는 그것과 결부된 아시아 정치ㆍ군사적 상황을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에 대한 검토는 크게는 당시의 세계정세와 아시아지역에서의 격변하는 사태 발전, 그리고 주로 미국의 아시아정책으로 좌우되었다. 이것은 너무도 광범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별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개입

정치ㆍ사상적 전환

베트남에 대한 미국정책은 중국 대륙의 사회주의화와 한국전쟁으로 결정적인 전환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시아 식민지체제의 청산이라는 기본구상의 일환으로, 일본 식민지 조선(朝鮮)문제의 해결방안처럼 베트남을 일정한 기간의 미ㆍ영ㆍ중 3국 신탁통치를 거쳐 프랑스 식민지에서 완전 해방 독립시키는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인민에 대한 혹독한 제국주의ㆍ식민정책을 비난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처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개석과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성안시킨 신탁통치안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인도차이나가 소련의 영향력 밖에 있으므로 신탁통치국으로서의 제의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진행 과정에 따라 변모해 대일본전쟁이 가열된 1943년경에는 일본에 대한 중국 전선의 유지를 위해 인도차이나 ‘전부’(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한)를 중국에 ‘증여’하겠다고 장개석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인도차이나인은 결코 중국에 동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으로 이를 사양했다(Henry A.Wallace, Toward World Peace, p.

97). 장개석의 이 대답은 호치민이건 누구건, 베트남인은 민족적 주체성을 어느 강대국에게도 양도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기에 들어오면서 베트남정책은 적극적인 개입으로 수정되었다. 그것은 1949년 중국 대륙의 사회주의화, 소련과의 동서양에 걸친 권력투쟁, 한국전쟁, 동남아의 경제ㆍ군사적 중요성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

결정적인 전환은 1947년 트루만 대통령의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의 제기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한 미국은 모든 식민지해방 민족투쟁도 공산주의로 간주하게 되었다. “자유민에 대한, 외부 지원을 받는 전복행동은 어느 곳을 불문하고 미국의 단호한 반대를 각오해야 한다. 그와 같은 정세에 직면한 자유민은 군사력을 포함한 미국의 모든 형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트루만 독트린은 베트남의 반불(反佛) 식민지항쟁 민족해방투쟁도 전적으로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자본주의) 전쟁으로 비치게 되었다. 이 정치ㆍ사상적 전환은 필연적으로 군사 경제적 정책전환을 수반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그 가장 구체적인 정치적 의사표시는 1950년 2월, 프랑스의 보호국에 지나지 않는, 엘리제협정에 의거한 바오 다이 정권을 영ㆍ불과 더불어 공식 승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군사ㆍ경제적 개입

1949년 11월, 프랑스군이 베트민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미국의 지원이 약속됐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48년 동구에서의 대소ㆍ대공(對共) 대결 군사체제인 북대서양방위조약(NATO)의 형성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군사동맹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또 1950년 2월의 베트남ㆍ라오스ㆍ캄보디아의 국가승인으로 미국은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이들 ‘국가’에 직접 제공할 수 있는 길을 텄다. 프랑스를 통한 간접 방법과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직접 원조의 ‘합법적’방법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승인 직후인 5월에는 이 3국에 대한 경제원조 제공이 발표되었고, 12월 23일에는 미국, 프랑스 그리고 인도차이나 3국들 대표 사이에서 ‘방위 및 상호원조에 관한 협정’이 조인되었다. 한국전쟁 발생 전후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인도차이나전을 위한 미ㆍ불ㆍ영 3국 군사회담이 개최되었다. 중국이 북베트남과 원조협정을 조인한 것은 통일선거의 실시가 불가능해진 지 3년이 지난 1958년 3월 31일이다.

이 결정적인,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NATO를 통한 전면적 지원과 표리를 이루고 시작되었다.

북대서양동맹회의는 세계 어느 부분에서든지 직접 또는 간접 침략에 대한 저항은 자유세계의 공동안전에 대한 불가결한 기여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12월 6일 파리회담에서 인도차이나(베트남)의 군사 및 정치 정세에 관한 최근의 사태를 검토한 본회의는 프랑스 군대가 ‘공산침략’에 대해서 벌이고 있는 용감하고 장기적인 투쟁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며,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남아국가들의 저항은 본 동맹의 목적이나 이념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베트남에서의 프랑스전쟁은 본동맹(NATO) 가맹국가 정부들로부터 지속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NATO 이사회 결의, 1952.12.7).

이로써 베트남전쟁이 기본적으로 프랑스 식민전쟁이라는 성격, 베트남 인민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투쟁의 계속적인 한 단계라는 사실, 한국과 같이 국경을 넘은 침략전쟁과는 다른 성격…… 등이 무시되었다. 이 순간부터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세계의 전쟁이라는 해석이 공식화된다. 중공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뒤라는 이 결의의 날짜가 중요하다. 1954년 프랑스군 40여만이 5만 여의 베트남 군대에 의해 디엔 비엔 푸의 비극에 직면했을 때 미국 국무장관 포스터 덜레스는 아시아국가들과 NATO 국가들에 대해서 이미 끝난 한국전쟁에서의 방식에 따라 ‘통일행동’(unified action)을 취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한국전을 체험한 동맹국가들에 의해서 거절당했다.

미국은 부득이 단독행동을 구상해 안토니 이든 영국 수상에게 디엔 비엔 푸에 대한 ‘대량폭격’을 제안했고, 닉슨 부통령은 미군 지상군의 투입을 제안했다. 1950년 10월 10일, 최초의 미국 군사 사절단이 사이공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즉 1950년에서 54년까지 4년 동안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전쟁 지원으로 22억 8,500만 달러를 제공했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이때 미국의 인도차이나전 개입을 반대한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인민의 공공연한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쟁에는 아무리 미국의 군사력을 투입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나는 솔직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로서는 유럽에서의 서독의 재무장계획을 완강히 반대하는 프랑스 정부를 회유하기 위해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식민전쟁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 시기는 중국을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었다는 문제로 미국 국내에 매카시즘의 광적인 반공운동이 휘몰아치고 있을 때였다. 동기와 성격이야 어떻든, 상대가 자본주의자가 아니면 그것은 공산주의자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덜레스 이론이 미국 외교정책을 규정하고 있었다. 냉전과 소련의 핵군력화,중공과의 최초의 대전,한국전쟁,그리고 전후 경제의 촉진제로 이용된 군수생산과 전쟁준비 경제도 이에 가세했다. 따라서 미국의 국가정책이 사실상 군사적 사고방식으로 젖어 있었던 것도 이에 가세했다.

제네바협정과 미국

이와 같은 미국의 군사적 적극개입정책은 모든 국가가 희망하는 베트남전쟁 종결을 위한 제네바회의의 진행을 원치 않았다. 처음 개회식에 참석한 덜레스 국무장관은 며칠 만에 와싱톤으로 돌아가고 에델 스미스 차관이 격하된 대표로 참석했다.

미국은 냉전전략에 따라서 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베트남 휴전 성립에 대비해 1954년 3월 동남아시아방위조약기구(SEATO)의 결성을 추진했고, 협정이 체결된 2개월 후인 9월 8일, 영국ㆍ호주ㆍ뉴질랜드ㆍ파키스탄ㆍ태국ㆍ필리핀ㆍ프랑스ㆍ미국에 의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특히 제네바협정으로 군사동맹 가입, 외국 군원(軍援), 외국 군사기지 설치 등이 금지된 베트남을 포함하는 인도차이나국에 대한 군사적 ‘보호지역’지명조항을 삽입했다.

군사ㆍ경제ㆍ정치적으로 강력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고 딘 디엠의 베트남 정부는 사실상 미국정책의 ‘괴뢰’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부당한 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제네바협정 조항의 이행문제, 특히 총선거 실시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미국의 거부 태도를 대변한 사실은 널리 인정되었다. 미국은 아이젠하워의 사태분석대로 총선을 바라지 않았다. 남베트남의 반공기지로서의 분리가 중국에 대한 미국의 ‘포위ㆍ고립’정책에 이익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 후 미국 정부 내에서도 굳이 부인되지 않았다.

베트남내란의 재발

총선거 실시가 예정된 1956년이 지나면서 남베트남에서는 심각한 내란이 일어났다. 어느 한 시기를 기준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7년경부터 전국 지방에서 정부에 대한 폭동과 테러 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베트콩으로 불리는 민족해방 전선의 출발이다.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된 것은 1960년 12월 20일이다. 소위 베트콩이라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후 60년대에 들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확대되고 북베트남(월맹)과의 전쟁으로 확대됨에 따라서 그 성격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었다. 민족해방전선의 발생ㆍ성장과정에 관해서도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극단적 해석이 생겨났다. 하나는 전적으로 북베트남에서 넘어온 침투 게릴라라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어디까지나 남베트남에서 총선실시가 거부됨으로써 통일을 요구하고 고 딘 디엠 정권의 부패 등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집합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의당시 평가를 종합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베트남의 내란은 제네바협정으로 약속된 총선거가 ‘취소’된 다음해(1957)부터 시작되었다. 고 딘 디엠의 전횡, 무차별적 체포, 정치적 재교육이라는 이름 밑에 늘어난 강제수용소, 지방주민의 강제적 집결수용 등이 심해짐에 따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공산주의자들은 잠시 방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미국 원조에 의한 디엠 정권의 경제정책이 호치민으로 하여금 디엠 정권의 붕괴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됐다고 확신케 하자, 그는 남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폭동에 과거의 동지들이 합세하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다……(Schlesinger, A Thousand Days, p.539).

이것이 대체로 그 원인을 온건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다. 적어도 1957년에서 59년까지의 지방폭동은 이런 성격으로 해석되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1960년 그 세력이 강화되어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자, 그해 9월 월맹은 공식적으로 그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면서 소형무기의 공급을 시작한 것이 여러 가지 경로로 확인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 후 총선이 거부된 직후에 일어난 이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960년쯤에는 1년에 약 2,000명 정도가 북베트남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들 거의 대부분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쪽으로 이주ㆍ이동했던 남부 출신자들이다. 어쨌든 거의 대부분의 베트콩은 남부에서 가담한 자들이었고, 그들의 무기와 장비는 사이공 정부군에게 빼앗은 것들이었다(같은 곳).

제네바협정은 베트남인 군대에 속했으되 북쪽으로 가기를 원치않는 사람이 무장을 버리고 남부에 그대로 거주하는 문을 열어놓았다. 남쪽 출신이거나 남쪽에 가족이 있는 항불ㆍ독립 베트남 군인들의 상당수가 2년 후의 통일을 기다리면서 그대로 평민으로 남쪽에 정착하는 길을 택했다. 이들의 상당부분은 그러나 그 후 디엠 정부의 감시대상이 되었고 통일의 실패로 반정부적 자세를 굳히게 됐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디엠 정부는 총선예정 날짜가 지난 후부터 강압정책으로 치달았다. 앞서 상세히 살펴본 20년에 걸친 남베트남 사회의 혹심한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부패에 곁들인 이 정치적 탄압이 반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데는 온건한 중간적 견해를 가진 논자들이 일치한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 딘 디엠은 이미 1956년 1월 탄압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1월 11일 디엠은 강제집단수용소 설치령을 내려 그와 정부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혹독함에 놀란 미국 정부는 마침내 66년 5월 사이공 주재의 미국 정부 대표기관으로 하여금 베트남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즉 초기의 반정부세력은 공산주의자이기보다는 정치ㆍ종교적 소수파들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하게 했다.

카오다이교(高臺敎)를 구성하는 11개파 가운데 10개파가 디엠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초기의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지세력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또 호아하오교(和好敎)는 1952년에 이른바 사회민주주의당을 형성하여 그들의 정치적 의사표시의 기관으로 삼았다. 이것도 디엠에 반대했으며 56년에 이들은 디엠의 정부군에 의해서 소탕되었다. 카오다이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이 역시 초기 민족해방전선의 주력이 되었다.

세 번째의 소수파인 빈 수옌 파도 같은 입장과 같은 이유로 디엠 정권에 의해 탄압받아 초기의 민족해방전선과 협동했다(Bernard Fall,“Viet Nam in the Balance”, Foreign Affairs, 1966년 9월호).

맺는 말

미국이 베트남 내란을 월맹과 공산주의자의 원조ㆍ지령ㆍ사주에 의해서 시작된 침략이라는 명분으로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하기까지의 베트남 정세는 대체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ㆍ식민주의를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투쟁의 연장 선상에서 고려되어야 할 전쟁이다.

  • 『창작과비평』, 1972년 여름호


1-2. 「베트남전쟁Ⅰ」(1972년 『창작과 비평』, 전논)

우리는 이제 전후 30년을 살아온 냉전(冷戰)의 시대에서 이성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성의 눈으로 세계를 살펴보기 시작한 오늘, 어느 나라의 지식인도 민중도 냉전시대의 사상적 특징인 ‘부정적 가치관’을 고집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것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던 국가와 국민에게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했다.

냉전시대의 부정적 사고방식은 자기부정을 결과했을 뿐이다. 우리도 뒤늦게나마 냉전시대의 기이한 신화ㆍ우상ㆍ권위의 실태를 캐어묻는 회의를 품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사상은 언어를 통해서 전달된다. 우리 사회와 우리 민중의 세계관을 형성한 냉전사상은 냉전용어의 주변에 형성되었다. 얼마나 많은 냉전시대의 정치 선전적 용어가 아무런 비판 없이 쓰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얼마나 우리 민중의 진실확인의 능력을 제약하고 스테레오타입적인 조건반사적 사고반응을 일으켜왔는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냉전용어의 관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정치적ㆍ사회과학적 사상을 흑과 백, 천사와 악마, 죽일놈과 살릴 놈, 악과 선의 이치적(二値的)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처럼 지성을 마비시키고 격변하는 세계에서 자기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든 요소도 드물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라는 성경의 말은 신(진리)을 인식하는 수단으로서 언어의 중요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공자는 옛날, 만약 제왕이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서슴지 않고 “바른말을 쓰는 습관을 백성에게 가르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버릇”이겠다. 정확한 언어로 표시되지 않은 개념은 대상의 정확한 전달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이 인식 과 정은 순환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결국은 인식하는 주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왜곡하게 된다.

이것이 냉전시대를 정상적 상태로 알고 살아온 한국 민중의 인식형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정치 선전적 언어에 대해서, 현재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우리 민중이 정확하게, 사실 그대로, 편견 없이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위해 한때의 시대적 기능을 면제해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국제정세의 국면에서 그 작업이 가장 시급한 것은 베트남전쟁에 관해서다. 베트남전쟁은 현대의 모순의 집약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말씀’과 ‘바른말’의 정신으로 베트남전쟁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정치적 선전과 조작된 관념을 뚫고 현재의 세계정세와 인류의 역사적 움직임을 더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식적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실태와, 그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한 올바른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기본적 사실의 인식

베트남전쟁의 성격 규정은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전쟁 당사자의 쌍방 주장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는 데서 더욱 복잡해진다. 더욱이 한국 민중에게 그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베트남전쟁을 미군 개입 이후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한다. 미국의 개입을 합리화한 설명은 ‘월맹(越盟)의 침략’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중은, 우리 국가정책이 미국과 일체화되어 있던 사실로 말미암아, 단순히 ‘월맹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베트남전쟁의 성격과 뜻은 그 전쟁의 발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검토해야 한다. 베트남전쟁은 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듯이 현대적 성격을 띠게 된 시점을 기준으로 해도 3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는 전쟁이다. 그러기에 쌍방이 상대방의 침략전쟁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성격의 전쟁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와 우리 정부의 주장은 잘 알고 있는 터이기에 앞으로 그것에 대한 반론과 객관적ㆍ역사적 사실들을 찾아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언어(용어)로 복잡한 전체의 내용을 성격지으려는 습관이나 심리적 유혹에 앞서 하나의 분석태도를 꾸준히 지니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문제를 검토하자.

케이스 우리는 국경에 따라서 군대가 동원되고 국경을 넘어서 물리적으로 외국 영토를 점령하는 그런 유형의 침략에 비해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으며 분명하지도 않은 침략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베트남)전쟁이 전자와 같은 정도의 침략이라는 우리의 견해에 불찬성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조지 케난 베트남에서 우리가 현재 대치하고 있는 쌍방에 대해서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사고의 혼란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이 분쟁은 지극히 복잡한 배경, 그리고 지극히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닌 것이며 그 대부분은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난 사태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더욱이 남ㆍ북 베트남의 경계선은 아주 독특한 성격의 것입니다. 본래 그것은 두개의 국가의 경계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실들로 미루어 정부 내부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면 문제에 혼란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굳이 그렇게 표현하자면 부분적으로는 어떤 국가에 대한 타국 군대의 ‘침략’이라고 말할 수 없지도 않겠습니다마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용어의 확대해석이 됩니다. 어쨌든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남베트남 내부의 내란적 분규이며, 바로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베트콩은 외부세력이라든지, 외부의 뒷받침이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세력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단정해야 할 일은 아니겠습니다.

케이스 그렇습니까. 베트남이라는 특정지역의 특정정세에서 그것은 기본적인 사실문제라는 말이군요.

조지 케난 그렇습니다(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베트남문제 공청회 의사록, 1966.2.10, 목요일).

베트남 사태의 단계적 변화

베트남 사태는 오늘의 정세발전이 내일의 현실로 기정사실화되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 원점에서부터 살펴보아야 사태의 전모에 대한 시각이 정립된다. 즉 각 단계마다 ‘기본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

베트남 사태는 크게 나누어 4단계의 정세발전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①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1863.5)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근 100년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식민지민족 항불(抗佛) 해방투쟁.

② 전(全)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1945.9)부터 전후 베트남 민족해방 항불전쟁의 승리를 고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 성립(1954.7)까지의 투쟁.

③ 남베트남공화국 수립(1955.10)과, 그것으로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제네바협정의 총선거 실시 협약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지되고 베트남의 반영구적 분단이 고정된 사태.

④ 그 이후 남베트남(越南)에 내란이 일어나고 미국과 북베트남(越盟)이 개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으로 변모, 확대된 현상태.

이중 ③의 단계는 기간은 짧지만 그 후 베트남 사태의 발전에 가장 중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정치적 사실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 ④의 단계는 몇 가지의 ‘사건’또는 사태발전으로 구획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현상적 변화’였으며 ‘질적 변화’의 성격으로는 하나의 단계로 총괄되어야 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항불(抗佛) 식민지 해방전쟁

베트남 사태의 모든 요소와 국면의 뿌리는 앞서 조지 케난이 말한 것처럼 길고 복잡한 역사에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한마디로 외세간섭으로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투쟁의 역사다.

10세기를 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베트남 민족은 역대 중국왕조의 동화정책에 반항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100년의 프랑스 식민지정책에 대한 해방투쟁을 끈질기게 계속했다. 북베트남은 물론이지만 남베트남의 민중(정권과 지배층은 잠시 미루어두고) 사이에서 나타나는 외세반대의 사상과 에네르기는 이 역사와 전통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노일(露日)전쟁을 통해서 베트남 지식인들의 가슴속에 민족해방과 독립에 대한 희망이 용솟음친 것은 아시아와 그밖의 일본 및 유럽 백인 식민지하 민족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의 중국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베트남 지식인들은 일본과 식민모국 프랑스에 유학했다. 아시아민족의 힘을 새로이 확인하고 프랑스혁명과 아메리카혁명의 정신을 배워온 지도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기대가 컸던 만큼 그 후의 민족적 좌절이 컸던 것도 당연하다. 윌슨의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이 그 당시 유럽 백인열강들 사이의 세력조절과 유럽 안전의 역사적 화근인 발칸지역을 그 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던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지도자는 별로 없었다. 백인열강 지도자들의 이와 같은 의도를 통찰하지 못했던 베트남 독립운동 지도자는 후일의 호치민(당시 이름 阮愛國)으로 대표된다. 그리고 그것은 1917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하의 베트남 인민의 상태이기도 했다.

윌슨의 14개 항목 원칙에 흥분한 호치민은 전당포에서 빌린 검은색의 정복과 펠트모자로 단장하고 많은 아시아와 중동의 식민지민족의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칭’대표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의 으리으리한 방을 이리저리 헤매었다. 그러나 정열로 두 눈이 빛나는 28세의 이 젊은 베트남 지식인은 독립을 꿈꾸는 모든 식민지민족의 대표들이 겪은 운명을 맛보았다. 클레망소(프랑스 수상), 로이드 조지(영국 수상), 윌슨(미국 대통령)은 물론 이 회의에 모인 어느 강대국의 지도자도 그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면회신청이 이들 강대국 지도자들의 하급 사무원의 서류함에서 나와본 일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회의록 어디를 찾아봐도 베트남이건 안남(中部)이건 그런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시 호치민의 8개 항목으로 된 온건한 요구조건은 독립을 요구한 것도 아니며 다만 식민자와 피식민 인민의 평등, 기본권리, 더 많은 학교 건립, 명령에 의한 프랑스 통치를 법률에 의한 것으로 대체, 베트남 내부문제에 대한 프랑스 통치의 자문을 위한 원주민 대표의 임명을 요구하는 정도였다. 식민지 민족문제 해결에 대한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거부와 실패는 그 후 독일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에 실패한 결과로 나타난 것에 못지않은 중대한 결과 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Bernard Fall, The Two VietNams, p.88).

제국주의적 식민세력이라는 힘에 의해 패배당하기 전에는 그 단물(甘汁) 흐르는 식민지를 내놓은 역사가 없다는 준엄한 사실이 많은 아시아 피식민민족을 눈뜨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베르사유 평화회의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대체로 남부ㆍ중부ㆍ북부의 3개 지역으로 분할하는 통치 방법으로 베트남 민중의 내셔널리즘을 억제했다. 베르사유의 교훈은 베트남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파리에서 모스크바와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1923년 명문 출신이라는 호치민이라 칭하는 자가 파리에서 모스크바로 들어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방법을 연구하고 30년에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했다.

손문(孫文)의 민국혁명과 그것을 이어받은 장개석의 국민혁명도 초기에는 베트남의 항불독립운동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많은 독립지사들이 중국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 후 중국의 국공대립은 이들에 대해서 당파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열흘도 못 가 프랑스가 망하고 프랑스 본국에 나치독일의 괴뢰인 비시 정권이 서자 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이 북부 불령(佛領) 인도차이나에 진주했다. 태평양전쟁 발생과 동시에 호치민은 베트남 인민의 전 민족적 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유주(柳州, 또는 靖西)에서 공산당을 해소하고 “정치적 신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민주주의적 세력을 결집하는 광범한 민족운동”으로서의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한다. 비시 패전 프랑스 식민정권과 점령 일본군부 통치 사이에서, 그리고 그 양 세력을 상대로 한 ‘베트민’의 무력투쟁은 일본이 패망하기 전인 1945년 5월까지 북부베트남(통킹지역)의 6개 성(省)을 지배하는 힘으로 성장했다.

베트남의 지리적 특성과 장구한 내셔널리즘의 전통적 토대로 말미암아 반식민지ㆍ항불전쟁이 현재의 베트남이 아니라 월맹, 즉 남부에서가 아니라 북부에서 전개되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 베트남 정세를 특징지어주는 전제적 상황을 조성하게 된다.

식민주의자의 배신의 역사

무력해방투쟁은 주로 통킹지역에서 전개되었지만 현재의 베트남을 구성하는 중부(安南)와 남부(交趾支那)에서도 민족해방의 운동은 끊임없었다. 보다 투쟁적 형식을 취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 전후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의 지배를 위해 다시 들어왔다.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해방 전 조선에서 패배한 일본이 다시 식민지통치를 위해 종전과 함께 한국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고 가정하는 상황과 같다. 더욱이 일본의 식민지 재통치를 그 뒤에서 전승국가가 돕고 있다고 가정할 때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싸운 1945년 8월 당시의 한국 민중이 어떤 반응으로 대했겠는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식민세력에 대해서 무력투쟁으로 상당한 지역을 해방시킬

만큼 희생을 치른 민족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 상황은 남부베트남을 점령했던 영국정부의 공식문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베트민은 남부 불령 인도차이나의 주요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안남인(安南人)에게 단계적인 자치정부의 형태를 제의했다. 그러나 안남인들은 당장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베트남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된 9월 17일 베트민은 사이공 시를 완전히 철시하고 프랑스 고용주들에 대한 총파업을 실시했다……(동남아지역 연합군최고사령관이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한 보고서「인도차이나 분쟁에 대한 영국 개입에 관한 공식문서」, 1965.12, 영국 외무성 발행 문서집 문서 제1호 제24항).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은 베트남을 한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주둔 일본 패잔군의 무장해제와 전후행정의 편의를 위해”북위 16도(현재와 같은 17도가 아님)선 이남을 영국인이, 그 이북을 중국군이 점령한다고 합의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체 없이 인도차이나 전 식민지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했다. 이를 승인ㆍ지원한 영국은 마운트바텐 원수의 동남아지역사령부(세일론)에 프랑스 군사사절단의 설치를 허가하고 프랑스 민간행정관들을 훈련하여 프랑스군의 베트남 재점령을 도왔다.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지역이 프랑스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이 조치는 어쩌면 불가피한 ‘잠정적 조치’였는지 모른다. 사이공에서 이와 같은 영ㆍ불의 점령정책에 항거해 무력투쟁을 벌인 베트민 세력은 두 제국주의ㆍ식민국가 당국에 의해서 군사적으로 섬멸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영국 공식문서의 뒷부분은 남베트남의 베트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이공의 이 폭동은 주로 비정치적인 것이었으며 불안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익을 보려는 불량배들의 짓이었다.

프랑스는 사실 유럽전쟁이 끝남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3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불령 식민지 5개 지역을 연방화해, 연방의 실권을 1명의 총독에게 주고, 형식상의 원주민 자문회의를 설치해 인도차이나를 재지배하는 정책을 선포했다. 민족해방과 독립을 요구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이를 반대했다,

1946년 2월, 16도선 이북에 진주했던 중국 군대가 철수하자 프랑스총독부는 프랑스 군대를 앞세우고 북부지역으로 들어갔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군의 진주를 반대하지 않는 대신, 프랑스 정부는 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프랑스연방의 일원으로서 정부ㆍ군대ㆍ재정ㆍ외교의 모든 분야에서 독립적인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② 안남(중부)과 교지지나(交趾支那, 남부)를 병합해서 단일 통일국가로 할 것인지의 여부는 국민투표로 결정하기로 하고 ③ 프랑스 군대는 5년간에 걸쳐 베트남 군대로 교체되며 ④ 그 이상의 세부문제는 앞으로 계속 협상해서 해결한다는 협정에 동의했다(1946.3.6, 협정).

그러나 프랑스는 이 협정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20일 후에 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임시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발표했다. 이 식민주의 프랑스의 두 번째 배신은 베트남 인민을 격분시켰고 그로부터 주로 북부에서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과 프랑스 식민군대 사이에 전투가 재발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재지배하기 위해 중국 군대의 북부 철수를 중국 내 프랑스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교환조건으로 장개석 정부를 유화했다. 그 조건이란 ① 중국 내 프랑스 치외법권의 포기 ② 프랑스 자본으로 건설한 하이퐁에서 곤명(昆明)까지의 철도에 대한 중국 권리 인정 ③ 중국의 하이퐁 항 및 그 주변지대의 출입권 승인이다. 베트남을 희생으로 하는 강대국 이익 위주의 해결 형식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이 잠정적 해결방안에 대해, 베트남 민족을 대표한 베트남민주 공화국 호치민 대통령이 동족을 배신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즉 그에게 통일ㆍ독립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중부와 남부의 베트남인을 사실상 프랑스 식민지하에 내맡겼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국의 보호적 세력이 물러나고, 영ㆍ불의 식민주의적 공동압력 앞에 놓인 해방세력의 역량으로서 그 외의 방법이 있었겠는가는 문제이겠다. 어떻든 해방을 위해 싸운 베트남 전 인민의 노예화냐,절반만의 노예화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정세를 배경으로 생각할 문제이겠다.

프랑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힘에 의해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기까지는 절반이라도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식민투자는 지금의 베트남인 교지지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치 독일에 의해 일패도지(一敗塗地)되어 사실상 전후의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해버린 프랑스는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도 식민시장을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이었다.

중부와 남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베트남 정부의 노력은 4개월후 프랑스의 퐁텐블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호치민은 문화ㆍ경제에 한정되고 베트남민주공화국 지역에서의 휴전과 프랑스군의 철수를 새로 규정한 잠정협정만을 가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으로 3월 6일 협정을 강요한 물리적 힘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 8월 협정에 앞서 최소한 남부만이라도 분리 지배하려는 프랑스는 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선포했다. 이것은 분명히 3월 협정에 대한 배신이었다.

8월 협정도 폐기되었다. 유럽지역에서 군사력의 여유를 얻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역의 군사태세를 강화했다. 그러고는 12월 19일 베트남 정부에 베트남 군대의 자발적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들이댔다. 최후통첩에 응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을 명분삼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군사적 대결을 강요하려는 계획이었다. 3일 후 프랑스 공군은 하노이ㆍ하이퐁 등 대도시에 대한 전면폭격을 감행하는 동시에 육군은 하노이 시를 점령하고 베트남 군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하노이 시 폭격으로 죽은 베트남인만도 단 두 시간에 6,000명을 헤아렸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제20절). 베트남 인민은 세 번째의 배신을 맛보았다.

베트남 인민과 제국주의 프랑스군 40만은 이로부터 1954년5월 7일, 디엔 비엔 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하기까지 실로 7년 반의 혈투를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전쟁이었다.

미ㆍ영ㆍ불 등의 공식문서들은 이 처절한 전쟁을 ‘내란’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을 식민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는 성격 규정과 식민지 인민의 입장에서 보는 민족해방전쟁의 성격 규정을 단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내란’이란 합법적 통치권력에 대한 민중의 정권전복 반란의 뜻을 띤 정치적 용어다.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를 베트남의 합법적 통치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을 승인한 사실을 백지화하는 견해다.

식민주의자의 가장 큰 배신은 인도차이나전쟁을 종결지은 제네바 휴전협정(1954.7.21,조인)에서 합의한, 2년 후 즉 1956년 7월에 베트남 독립ㆍ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조약의무를 프랑스가 포기한 것이다. 프랑스는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해 휴전선 이남지역에서 휴전과 관련된 군사적ㆍ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고 총선거 실시를 위한 협의를 하며, 1956년 7월에는 전 지역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는 일방(一方)주체로서의 의무(최종선언 제7항)를 서약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합의된 선거날짜를 3개월 앞두고 프랑스 군대를 철수해버렸다. 그러고는 휴전협정을 이행할 조인 당사자인 주베트남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를 해체함으로써 휴전협정의 이행은 물론 총선거 실시의 책임도 기피해버렸다.

이것은 식민주의자의 네 번째 그리고 가장 중대한 베트남 인민에 대한 배신으로 지탄받게 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는 베트남 사태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총선실시 합의의 유산을 꼽는 데 미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전문가와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돼 있다(이 견해에 대해 미국과 현 베트남 정부는 별개의 해석을 하고 있다. 그에 관해서는 다음에 상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고 딘 디엠의 등장

베트남 정세의 긴 역사를 통해 가장 빈번히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것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역할에 관한 견해차다. 이 견해 대립이 대체로 식민지에서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반영하고 나타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정치학 용어로서 어의의 규정을 떠나 실천적 측면에서 나타난 이양자의 비교는 베트남에 관한 한 상당히 대조적인 면을 보여준다.

프랑스가 식민통치하의 호치민 세력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나 현재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동기는, 민족주의자는 베트남의 독립과 양립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 자는 베트남의 주권ㆍ독립을 국제공산주의에 예속시킨다는 견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 실천적 과정을 사태발전의 역사 속에서 검토해보는 것은 ‘학문적으로’유익하겠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고정관념이나 이해관계의 입장을 일단 벗어나는 학문적 태도가 전제로 요구된다.

민족해방과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프랑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베트남인의 투쟁은 그들의 일부가 소련혁명으로 어떤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되는 1930년대에 훨씬 앞서서 100년 가까이 계속되어왔다. ‘민족주의자’라는 규정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총애를 받은 고 딘 디엠이나 ‘공산주의자’라는 규정으로 배척을 받은 호치민은 이미 그 이전부터 베트남의 식민지해방과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이 사실에서 볼 때, 식민지 베트남민족의 해방ㆍ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은 누구나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인 셈이다. 내셔널리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정치학자들의 정의를 따른다면, 베트남의 반식민ㆍ반제국주의는 그대로 내셔널리즘이다. 베트남에 관한 한 민족주의는 본질이고 나머지의 철학은 해방투쟁의 방법론과 식민지에서 해방된 사회체제에 대한 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외세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는 전부가 민족주의자라는 데 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러기에 차이점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다. 이것은 베트남의 경우도 그렇지만, 모든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 말미암아 같은 민족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밀착해 있는 세력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소극적이었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는 반식민지투쟁에서 적극적이었다는 차이를 낳게 한다.

바오 다이 황제가 전형적인 경우이겠다. 1945년 3월 일본군이 베트남 전역의 군사적 점령을 완료하자, 일본은 안남왕국의 과거 프랑스 식민지하의 명목상의 황제에 대해서 북부와 남부를 합친 통일왕국의 독립선언을 요구했다. 이것은 백인 제국ㆍ식민주의 세력을 추방하려는 황색인 제국ㆍ식민주의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바오 다이는 이에 응했다. 그것이 백인 프랑스 제국ㆍ식민주의의 괴뢰에서 다만 일본 황색인 제국ㆍ식민주의의 괴뢰로 탈바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이것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최초의 베트남 통일ㆍ독립이다.

그 후 베트남 인민과 영토의 완전한 통일ㆍ독립을 요구한 베트민(베트남민주공화국)을 말살하기 위해 협정을 폐기하고 식민지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는 홍콩에 ‘망명’중이던 바오 다이를 다시 불러들여 1949년 6월,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 원수로 추대했다. 이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이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끝까지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꾸며낸 흉계였다. 그것은 베트남의 일부에 독립의 허울을 씌우는 정치극이었다.

벵상 오리올 프랑스 대통령과 바오 다이 ‘황제’사이에 체결된 이 협정은 ‘엘리제협정’이라고 불린다. 엘리제협정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되 “국방과 외교권은 프랑스 정부가 장악하고,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에 기지를 영원히 보유하며 그 통행권은 무제한으로 보장되며, 재정 및 기타 국정의 주요부문에서 프랑스 정부의 자문과 지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정치극이다(엘리제협정과 같은 것이 프랑스와 라오스 및 캄보디아 사이에도 거의 동시에 체결되었다).

이 ‘독립국가’가 현재 베트남 정부의 법통이다. 이 독립국가는 ‘비공산주의적 민족주의자’인 베트남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

앞서 1946년 3월 협정으로 독립을 선언한 호치민의 베트남민주 공화국에 대한 국가승인 요청을 거부한 영국은 바오 다이 왕국과 라오스ㆍ캄보디아 왕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했다(1950.2.7). 미국도 같은 날 3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했다.

‘주권국가’로 승인한 영국 정부의 외무성이 의회에 제출한 베트남 사태에 관한 공식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바오 다이 각하의 지위를 강화해주기 위해서 프랑스는 베트남이 독립국가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원했지만 ‘엘리제협정’에 내포된 제한과 제약으로 보아 베트남이 국제법상 진정한 독립국가였는지는 결코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1950.2.7) 3국을 승인했다(“The Official Documents Relating to British Involvement in the Indo-China Conflict: 1945~65”, 背景 제22항).

이 공식문서는 이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영국의 승인은 조심스러운 말로 표현되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프랑스연방 내의 연합국가’로서 승인되었다. 그러나 사이공 주재 총영사는 공사의 지위를 부여받고 그 후 곧 캄보디아와 라오스 조정에도 신임장을 제정했다(같은 글, 제23항).

미국이 베트남 사태 개입의 법적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이 정부와 체결한 협정ㆍ조약들이다(이 관계는 뒤에서 상술한다).

민주적 지도자의 자격 차원에서

현대 민주주의가 고전적 정치민주주의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경제적ㆍ사회적 측면의 민주주의를 그 기본요건으로 한다는 학설에 따른다면 여기서 베트남에 관한 고정관념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더욱이 고전적ㆍ정치적 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였던 자유시장ㆍ경쟁경제ㆍ사유재산의 제반 제도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절대적’요건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대에는 더욱 그러하겠다.

민주주의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 국가사회의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적ㆍ경제적 권리와 기회가 민중, 인민, 시민 또는 국민(명칭이야 어떻든)에게 얼마나 균등하게 배분되고 보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문제다. 그것은 두 지배세력의 어느 쪽이 그들의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기득권을 민중일반과 가급적 균등하게 분유(分有)하려는 뜻을 가졌는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차지한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박애심 이상의 어떤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자기희생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후진사회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규정짓는 이와 같은 복합적 요건들을 종합적으로 시험대에 올려놓고 분석할 때, 남ㆍ북 베트남에 ‘민주주의’의 양을 얼마만큼씩 배점(配點)해야 할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강력한 ‘민족주의자’가 반드시 민주주의적이고, 비계급적이고, 비외세의존적이고, 대중의 이익을 제1차적 관심으로 생각하고, 아울러 민중의 정치적 자유도 보장하는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예스’이면 어떤 구실과 수단으로도 그 세력을 돕는 것은 타당하다 할 것이다. 그 답변이 ‘노’이면 베트남 사태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이나 선전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이 어떻든 ‘진실’이라는 것을 모든 판단의 토대로 해야 한다는 바로 ‘민주주의’의 원리와 정신 때문에도 더욱 그렇다. 다른 중요한 정치적 덕성 없이, 단순히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식민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나 정권이 얼마나 반민중(인민ㆍ국민)적인가 하는 좋은 증언이 있다.

본인은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께 지난 일요일자『뉴욕 해럴드 트리뷴』지에 실린 사이공 주재 미국인 특파원의, 흥미 있고 또 본인이 보기에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낸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가끔 불안했던 과거 중국의 장개석 정권과 바오 다이 정권을 비교해보았다. 한 가지 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바오 다이 정부가 1947년 말 중 국내란에서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을 때의 장개석 정권보다 더 약하다는 결론이 거의 불가피했다. 이 정권은 장개석 정권보다 국민의 지지가 없고 권위의 정통도 더 약하며 정권을 위해서 일하는 국민과 인물들의 비율도 더 낮고 투쟁의 열의도 더 약하다. 바오 다이 정권이 분명히 더 강한 단 한 가지는 동(同) 정권이 프랑스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프랑스 행정관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은 또한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프랑스 군대가 베트남 땅에 있는 한, 바오 다이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한편 이 불행한 나라의 경제 재건과 민중의 복지는 호치민이 지배하는 대단히 광대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등한시되고 있습니다. 호치민은 진보적이고 번창하는 사회주의 복지국가로 보이는 나라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바오 다이 황제는 사이공에서 300마일 떨어진 그의 산장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고 있습니다(영국 하원의사록초, 1950.4.14, 영국 외무성 인도차이나에 관한 공식문서집 부록 문서 제11호).

……동남아지역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바오 다이 정권이 자국 내에서 아무런 통제력도 가지지 못한 정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 다이 정권이 결코 시작되어서는 안 될, 그러면서도 전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장구한 더러운 프랑스제국주의의 모험의 꼬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모험을 지지하지 않았으면서 인도차이나에서 이러한 종류의 모험을 지지하는 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그것은 또한 공산주의를 막는 최선의 방법도 못 됩니다. 본인은 호치민이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리라는 동료의원의 견해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본인은 그가 공산주의자이고 아마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본인은 그의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관련 때문에 앞으로 인도차이나의 사정이 극히 어려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베트남에 괴뢰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련식 수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련인들이 이른바 철의 장막 뒤에서 해온 수법입니다. 그것은 현지 인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이며,이것은 비민주적 수법입니다(같은 글,버밍검 에스톤 출신 와이워드 의원).

바오 다이 정권에 완전히 실망한 미국은 고 딘 디엠을 새로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소수 지배층의 정치ㆍ경제ㆍ권력 독점과 베트남 사회의 원리가 되어버린 부패를 도려내고 진정 민중(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가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미국의 베트남 로비(친베트남파) 거물은 케네디 상원의원(그후 대통령), 그 부친(전 영국대사ㆍ재계거물) 및 케네디 일가,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원판사, 헨리 캐보트 롯지(공화당 전 대통령 후보, 그 후 주베트남대사), 마이크 맨스필드(현 민주당 상원원내 총무), 그리고 반공 추기경으로 유명한(사망 전까지 한국전선과 베트남전선의 반공기지를 크리스마스 때마다 방문했던) 뉴욕의 스펠만 대주교…… 등 쟁쟁하다. 이들은 1953년, 더글러스 판사 집에서 회합을 갖고 바오 다이 민족주의를 고 딘 디엠 민족주의로 대치시키자는 데 합의했다. 그들은 고 딘 디엠의 자질을 민족주의, 인간적인 고결함, 용기, 이상주의적 결단력으로 평가했다.

이와 같은 반공민족주의자의 모든 소질을 높이 평가받은 고 딘디엠은 미국 정부의 지지로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55년 10월 국민투표에서 바오 다이를 물리치고 베트남 국가원수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모든 병폐를 깨끗이 척결할 민족주의자로 기대되었다. 아이젠하워 정부와 그 후 케네디 정부의 그에 대한 지원은 거의 무조건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사실 바오 다이 정권의 통솔력 결핍과 무기력은 베트남 인민들 사이에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싸우느냐는 감정을 일반화시켰다. 어떤 프랑스인이 나에게 말했듯이, 베트남이 필요로 하는 인물은 이승만 같은 지도자다. 설사 그런 인물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수반할 모든 곤란한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막스웰 테일러 퇴역대장 증언, 베트남에 관한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청문회 의사록, 1966.2.17).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추대된 것이 고 딘 디엠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결’한 ‘민족주의자’밑에서 민중에 대한 정치적ㆍ폭력적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경제ㆍ사회ㆍ문화적 부패는 베트남의 역사상 유례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의 민족주의는 사실상 민족적이 아니라 반민족(인민)적인 데까지 이르렀다.

디엠 정부는 전국 농토 가운데서 45만 7,000헥타르를 몰수했고,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인 전(前) 개인 소유지 24만 6,000헥타르를 베트남 정부에 반환했는데 정부가 1958년까지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 계획으로 농민에게 재분배한 것은 프랑스인 소유로 반환된 것에 해당하는 24만 8,000헥타르밖에 안 된다. 최근의 미국 AID보고에 의하면 분배되지 않은 농지는 대부분 정부가 쥐고 있으며 정부는 그것을 최고가격으로 입찰하는 자에게 임대하고 있다(Bernard Fall,“Viet Nam in the Balance”, Foreign Affairs, 1966년 10월호, p.5).

토지 없는 수백만의 빈농은 사이공 정부가 농촌지방의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시 빼앗겨버린다. (베트콩에 의해 분배되었던 농토는) 정부군이 그 지역을 재점령하면 정부군에 의해서 과거와 같은 낡은 소작제도가 다시 복구되기 때문이다. 정부군이 재점령하고 들어온 지역에서는 실제로 부대 보급트럭에 지주가 함께 타고 들어와 부대장들로 하여금 이익금을 분배한다는 약속으로 그 지역에 대한 소탕작전을 명령하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베트콩에 의해서 이미 분배된 농지 소유권을 차라리 그대로 기정사실화하는 식을 포함한 ‘농민지향적’농지개혁을 하는 것이 오히려 어떠한 한 가지 반(反)반란의 방법보다도 농민의 지지를 얻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사이공에 자리잡고 있는 ‘지주 지향적 지도자 집단’이 진정 그와 같은 농촌혁명을 지적으로 구상할 수 있느냐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이공 정부의 군장성들과 의사들로 구성된 집단이기 때문이다(같은 글).

이쯤 되면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게 된 장개석 정권의 시종일관된 실태의 재판이라 할 것이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에서는 장개석이나 바오 다이, 고 딘 디엠은 다 같다. 그들과 호치민이나 모택동 사이에는 민족주의자라는 공통점 외에 하나는 자본주의적이라는 것과 하나는 사회주의적이라는 철학적 차이가 있다는 것뿐이다(정치적 관용과 민주주의 원칙 및 국민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측면은 뒤에서 별항으로 상술한다).

존슨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 당시 ‘동양의 처질’이라 불렀고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의 친베트남파 거물급 인사들이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불러온 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는 결국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군부쿠데타에 의해 1963년 11월 2일 살해되고 만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디엠이 살해되기 얼마 전 현지조사단을 파견했다. 그 조사단의 한 사람이 내린 결론에 관해서 케네디 전기의 저자인 슐레징거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살았던 중국 전문가인 테오도어 H. 화이트(Theodore H. White)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중경(重慶)의 상태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써 보내왔다. 그는 중국 말기의 장개석 역할을 고 딘 디엠이, 장개석 부인(송미령) 역할을 누 부인(고 딘 누)이 어쩌면 그렇게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지에 놀랐다. 그는 “남베트남에서의 패배가 우리의 패배로 직결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지역을 우리가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면 우리는 적절한 인물을 찾아야 하고 단호히 간섭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Schlesinger, A Thousand Days: John F. Kennedy in the White House, p.544).

고 딘 디엠에 대한 최종판결은 그해 9월 3일 케네디가 디엠에 대한 전문 작성을 지시한 메모로 내려졌다.

나는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2개월간의 정세를 보건대 (사이공) 정부와 민중의 연대감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으로 기대한다. 필요하다면 인물 교체로 가능할 것이다……(같은 책, 992쪽).

그 후 거의 1년에 두 번씩 일어난 군부쿠데타의 주인공들과 다시 그 뒤를 이은 반공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그때마다 같은 평가가 내려졌다. 남베트남의 민중과 사회의 정세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참작하고도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치된 제3자적인 평가인 듯하다.

제네바협정의 행방

베트남전쟁의 해결이라는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반드시 그 방안의 준칙(準則)으로 제시되는 것이 제네바 휴전협정으로의 복귀다. 전쟁의 쌍방 당사자도 각기 제네바협정에 의한 해결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제네바협정 위반을 비난한다. 제3자 국가나 전문가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네바협정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소생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지만 그 협정의 행방은 묘연하다. 쟁점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① 휴전선이 2년 기한의 일시적 ‘군사적’분계선이지, 어떤 뜻에서든 ‘정치적 국경선’이 아니라는 조항 ②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증강ㆍ동맹결성의 금지조항 ③ 협정 조인 후 2년 안에, 즉 1956년 7월까지 베트남 전역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규정한 합의다. 이 조항들에 대한 위반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문제와, 그 위반의 책임을 기피하거나 상대방에 전가시키는 것이 당사자들의 입장이다. 제3자적 국가나 전문가들은 그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데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그 책임을 발견하는 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제네바협정에 대해서 행한 일방적 선언을 통해 하나의 베트남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남이든 북이든 분리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국총선 실시에 관한 조항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그 선언에서 국제 감시하의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이 달성되게끔 노력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고 나서 곧 미국은 남베트남에 분리된 하나의 국가정부를 세우는 공작을 시작했다. 고 딘 디엠을 지도자로 하는 국가와 정부를 세우는 노력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지만 디엠 정권이 제네바협정 이후 몇 해 동안 관대하게 취급되고 호치민 지지세력 측에서도 대체로 이를 방임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그 실체는 곧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제네바협정이 규정한 총선거 준비를 휴전선 이남(남베트남)에서 진행하고 준비해야 할 책임의 당사자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베트남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승리한 베트민은 그 군대를 남부에서 철수해 상당 기간 혁명활동을 중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총선거가 실시되면 호치민이 전 베트남 인민의 8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견해 때문에 고 딘 디엠 정권에 제네바협정이 금지한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그로 하여금 선거를 거부하게 해 제네바협정에 대한 책임에서 물러섰다. 여하한 궤변을 동원해 그 반대를 입증하려 해도 미국이 디엠 정권을 앞세워 제네바협정의 핵심적 합의를 무시함으로써 선언을 통해서 밝힌 입장을 배반한 사실은 은폐할 수가 없다(코넬 대학 조지 케이힌 교수).

이에 대한 반론도 강하다.

남ㆍ북 베트남의 경계선이 일시적인 것으로 설명되었다 하더라도 남베트남에 대한 공격의 침략성을 조금도 감면할 수는 없다. 남북한 간, 동서독일 간의 경계선도 잠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북한의 무력침략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러스크 미국무장관, 미국국제법학회 연례총회 연설, 1965.4.23).

제네바 휴전협정의 성립 과정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계속된 7년여의 전쟁이 베트남ㆍ라오스ㆍ캄보디아 3지역 인민의 대프랑스 식민항쟁이었기 때문에 제네바 협정은 이 3지역(국가)에 대해서 거의 비슷한 내용의 각개의 협정으로 구성되었다(이후 베트남 관계만 논하기로 한다).

가장 중요한 기본사실은 프랑스는 패전 당사자로 조인했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베트남 인민 전체’를 대표해 승리자로서 조인했다는 정치적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식민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전쟁의 종결문서에서도 그 일방(一方) 대표는 프랑스연합군 총사령관이고, 그 지역 인민을 대표해 서명한 것은 역시 베트남민주공화국 대표였다. 다시 말하면 라오스ㆍ캄보디아는 논외라 하더라도 베트남은 남ㆍ북이 없었고 전체 베트남은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인정되고 그 정부는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대통령의 정부로 되어 있다. 그것 외에는 베트남에는 국가나 정부가 없고 그것만이 유일한 국가ㆍ정부라는 전제가 식민통치국인 프랑스에 의해서 승인된 것이다. State of Viet Nam(베트남국)이라는 이름으로 바오 다이 왕국 대표가 프랑스 편에 서서 참석했지만 그것은 협정 당사자인 교전단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국가’로서의 자격은 앞서 검토한 바와 같다.

회담은 1954년 4월 26일에 열려 7월 21일 협정이 성립되었다. 미국과 바오 다이 정부는 협정에 불만을 표시해 도중에 대표를 철수했으나 미국은 협정을 준수하겠다는 일방적 선언을 발표했다. 베트남에 관한 주요조항은 무엇이며 그 합의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휴전선은 국경이 아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흩어져서 싸우던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를 일단 격리시키고 휴전에 들어가기 위해 대체로 북위 17도에 해당하는 변 호이 강을 따르는 ‘임시 군사분계선’이 정해졌다. 프랑스군은 그 남쪽에, 베트남군은 그 북쪽으로 이동ㆍ재집결하기로 하고 이동 완료기간을 300일로 정했다(협정 제1조 및 제2조).

‘군사분계선’의 성격에 대해서는 협정과 별도로 각국이 조인한 ‘최종선언’에서 이렇게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본 선언은 베트남에 관한 근본목적이 적대행위를 종식하기 위해 군사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는 것과, 군사분계선은 임시적인 것이며, 여하한 경우에도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선언 제6항).

그 후와 현재의 문제는 이와 같이 국경이 아닌 분계선을 넘는 것이 침략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는 데 집중되어 있다. 더욱이 어느 쪽인가가 제네바협정의 핵심적인 합의를 위배했을 때, 협정 전상황과 협정상 권리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국경이 아닌 ‘임시적 군사분계선’의 협정상 효과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월맹 측 견해다. 이에 반대해서 그것은 그래도 침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앞서의 러스크 발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 측 견해다. 이 대립되는 견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 준수의 전제조건으로 설정된 그밖의 협정 각 조항이 어느 쪽에 의해서 위배되었는가가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도 견해는 대립되고 있다.

1956년 통일총선의 유산

협정 조인 2년째인 1956년 7월로 합의됐던 통일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사실은 베트남 사태가 현재와 같은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가장 중대한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협정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할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각 병력의 재집결 지역 내 민정은 본 협정에 의해 재집결하는 군대의 국가가 책임진다(협정 제4조 a항).

최종선언은 이 조항을 보충해 그 날짜를 ‘1956년 7월’로 정하고 양 지역 행정책임 당사자가 이 문제에 관한 토의를 협정 조인 날부터 시작할 의무를 규정했다. 그 책임 당사자는 물론 북에서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고 남에서는 프랑스 정부(군 최고사령관)다. 이 합의와 그 불이행이 국제적 논전을 불러일으킨 핵심적인 문제다. 그 쟁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

① 쌍방 책임 당사자는 총선 준비의 책임을 이행했는가?

② 선거 실시를 거부했거나 합의를 무시한 사실이 있는가? 있다면 어느 쪽인가?

③ 그 이유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총선합의의 불이행 내지 거부의 문제는 제네바협정에 관한 ① 법적 해석 ② 당시의남ㆍ북 베트남 정세 ③ 미국 및 아시아 정치군사적 상황의 세 측면을 종합해서 검토해야 한다. 법적 측면은 주로 프랑스와 프랑스의 괴뢰정부로 인정되던 바오 다이 정권(베트남국, State of Viet Nam)과 관련된 것이다. 정치적 상황은 주로 당시의 미국이 세계적 반공정책 및 군사전략과 그 일부로서의 반공베트남 기지 확보정책의 전개 과정이다.

(1) 법적 측면

총선을 준비할 행정적 준비와 그 이행을 남베트남에서 책임진 권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협정체결 당사자인 프랑스다. 그런데도 프랑스 정부는 총선거를 실시해야 할 조약상 일자인 1956년 7월을 앞두고 4월 15일을 기해 베트남 주재 프랑스군 총사령부를 해체ㆍ철수해버렸다. 이것은 일단은 제네바협정과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서인 ‘프랑스공화국 정부의 선언’에 따른 것이기는 하다. 그 선언(1954.7.21)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프랑스공화국 정부는 양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일정한 수의 프랑스 군대가 특정지점에 특정기간 남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계 정부의 요청에 따라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 확정된 기간 내에 그 군대를 캄보디아ㆍ라오스ㆍ베트남 영토로부터 철수할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는 바다.

그러나 이것으로 협정과 최종 공동선언에서 약속한 총선 실시 주관 당사자로서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부의 선언은 이어 협정조인 이후의 모든 행동준칙으로서 다음과 같이 스스로 공약했던 것이다.

캄보디아ㆍ라오스ㆍ베트남에 평화를 재확립하고 공고히 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그 3국의 독립ㆍ주권ㆍ통일 및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근거로 하여 행동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휴전조항 준수와 총선거의 실시를 책임지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프랑스군 총사령부가 존재하지 않게 된 문제는 제네바협정의 시행을 감시할 책임을 맡은 국제감시위원단(캐나다ㆍ인도ㆍ폴란드)의 법적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사태를 조성했다. 왜냐하면 휴전과 총선거 실시를 감시할 의무 및 권리를 맡은 국제감 시위원단은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한 것이며, 그 협정은 프랑스 최고사령관이 두 조인 당사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태와 권한으로 존재하든 남베트남 정부는 프랑스군 최고사령관하에 있는 권력주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사태에 대해 제네바협정 조인국 공동의장단(영국과 소련)은 1956년 3월 23일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각서를 조인국에 발송했다.

프랑스연합국 최고사령관은 협정의 이행에 관한 책임을 인수했으며 그것을 관리할 국제감시위원단에 대한 사령부의 협조를 다짐했습니다. 프랑스 당국이나 남베트남 당국 어느 쪽도 프랑스 최고사령부의 철수 후 동위원단이 협정조항을 계속 감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런 제안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남베트남 당국은 4월 1일 이후 동위원단의 안전에 관한 책임을 인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동당국은 남베트남에 있는 프랑스 국가 권력의 계승자로서 프랑스 최고사령부의 법적 책임을 인수할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각서 제2항).

이러한 상태하에서 위원단은 협정 당사자의 일방, 즉 프랑스 최고사령부가 소멸한 이후 법적 근거를 잃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를 중대한 관심사로 생각합니다. 남베트남이 최고사령부가 부담했던 책임을 완전히 인수하지 않는 한, 위원단이 남베트남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제3항, 이상 번역문은 영국 외무성 공식문서 등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발행,「입법참고자료」,1968.10.5, 제96호에서 인용).

프랑스 정부의 이와 같은 일방적 처사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에 앞서 남베트남에서 그 의무를 전면적으로 인수할 ‘오소리티’가 있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바오 다이 정권이 그와 같은 주권정부로서의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음은 앞서 본바와 같다. 게다가 그 정권은 제네바회의 진행 중, 대표는 참석시키고 있으면서도 협정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협정과 ‘최종선언’에 조인하기를 거부했다. 바오 다이 정권은 제네바회의 기간 중 미국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 베트남 사태가 전쟁으로 확대되고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출현했을때 미국과 베트남공화국(고 딘 디엠) 정부는 그들이 제네바협정 조인국가가 아니므로 그 협정조항을 이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내세웠다. 미국과 베트남 정부의 태도는 선거일자가 가까워지자 점점 더 이 거부 태도를 굳혔다. 공동감시위원단의 일원인 인도는 사태의 중대성과 그것이 앞으로 전쟁상태를 초래할 것임을 정확히 예언했다. 선거실시 예정일을 15일 앞두고 인도 정부가 제네바회의 공동의장단에 보낸 각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따라서 베트남의 민정은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베트남민주공화국(북)과 남에서는 프랑스연합이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후 프랑스연합은 남부지역에 대한 그들의 주권을 베트남국에 이관했다. 그러므로 협의를 할 양 지역의 소관 당국은 북에서는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에서는 협정 제27조에 의해서 프랑스당국으로부터 남베트남의 민정을 인수한 베트남국이다(각서 제3항).

이와 같은 책임의 불이행은 제네바 해결방안의 기초를 와해시킴으로써 당사자 사이에 전쟁상태를 다시 초래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제4항).

결국 현재의 베트남이 ‘계승국가’로서 주권 및 국제적 권리를 주장한다면 역시 계승국가로서 프랑스 최고사령부가 수락했던 조약의무도 져야 한다는 해석이다.

베트남민주공화국(북) 정부는 협정체결 이후 2년 동안 총선실시를 준비하기 위한 협의(협정상 의무)를 프랑스 최고사령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요구하는 각서를 보낸 기록들이 남아 있다. 예정 일자를 1개월 앞서 발표한 성명(1955.6.7)은 협정상의 ‘일시적인 군사분계선’을 ‘국경화’하려는 음모가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모든 협정조인국과 특히 프랑스 당국에 대해서 최고사령부를 철수함으로써 총선실시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영국 외무성문서집 문서 제52호).

이상과 같은 많은 사전경고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프랑스 정부가 그 최고사령부를 철수한 것은 총선이 실시되지 않은 ‘원인’인 동시에 그럼으로 해서 책임추궁을 회피하면서 총선을 거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불행한 ‘결과’였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2) 남ㆍ북 베트남의 실정

법적 문제와 관련해서 문제된 것은 예정된 총선거 방법에 관한 이견이다. 주로 선거실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기피적인 태도를 취한 미국과 베트남 당국의 성명은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는 ‘자유ㆍ민주적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다. 총선을 약 1년 앞두고 남베트남에서는 바오 다이가 물러나고 공화제가 선포되어(1955.10.26) 미국의 지지를 받은 고 딘 디엠이 대통령에 취임해 있었다.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바오 다이 정권의 반민족ㆍ무능ㆍ부패ㆍ괴뢰성에 몹시 실망하여 남베트남에 확고한 민족주의적 반공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했던 미국은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네바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54년 7월 7일 미국에 망명 중이던 고 딘 디엠을 바오 다이 정부의 수상으로 앉혔다.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미국 내에서 강력 완강한 반공지도자로 인정된 디엠은 제네바회의 중 협정체결 후 베트남 정부 수상으로서 사실상 미국의 베트남정책을 대행했으며 제네바협정 반대, 총선 거부는 디엠 수상의 이름으로 주장되었다. 대체로 디엠 수상을 통해서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베트남정책은 전쟁 종결, 제네바회의(한국에 관한 회의는 협정 없이 유산했다), 선거에 대한 태도 등 베트남 휴전 1년 전에 있은 한국에서의 미국정책의 연장 선상에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어디서나 비슷한 상황에서 언제나 문제되는 일이지만, ‘자유ㆍ민주적’선거는 사회민주주의체제와 자본주의적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에서 각기 민주와 자유의 개념과 내용과 실태가 다르다는 데서 베트남에서도 문제되었다.

다만 한 가지 베트남의 특수상황으로는 서구식 개념과 방법에 의한 ‘자유ㆍ민주적’선거를 실시했더라도 베트남의 반공적 남부가 이길 수 있었겠는가 하는 가상적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당시의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만약 (제네바 협정에 의거해서) 남ㆍ북 베트남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면 아마도 주민의 80퍼센트는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인도차이나 전문가들과 얘기해보거나 편지를 교환해본 일이 없다”(회상록「변화에의 신탁」)고 말한 것은 중요한 판단자료가 되어준다. 이 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 총선을 감시할 제네바회의 의장국인 영국의 처칠에게 보낸 서한에서 표명한 두려움이다. 당시의 호치민이 남ㆍ북 베트남은 물론 인도차이나 전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존경받는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와 세계가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었다. (북베트남) 정부의 총선실시 촉구성명은 언제나 ‘자유ㆍ민주적’선거를 주장했다. 호치민은 쌍방 체제의 차이를 떠나 서방 선거방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당시의 객관적 정세는 부인할 수 없다.

북베트남에서 많은 가톨릭교도가 협정 후 남쪽으로 내려온 사실을 들어 이와 같은 정세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남으로 이동한 수는 86만 명이고 그중 60만이 가톨릭교도로 추산된다(Bernard Fall, The Two Viet-Nams).

이것은 제네바 휴전협정이 쌍방 군대가 이동ㆍ재집결을 완료하는 기간, 즉 300일 이내에 이주를 원하는 주민의 자유이주를 돕는다는 조항에 따라 허용된 것이다. 남하한 86만 명 중 가톨릭이 아닌 나머지 약 26만 명은 주로 프랑스 식민지 행정기관 및 프랑스 군대의 베트남인과 그 가족들로 알려져 있다(같은 책).

새로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려는 체제에서 그에 반대하는 종교신자와 민족해방전쟁에서 식민지군대에 가담했던 반민족적 성분의 원주민이 떠났다는 것이 과연 호치민에 대한 지지의 손실을 뜻하는 것인지는 측량하기 어렵다. 그것은 북베트남 경제의 일시적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새로운 체제에 대한 민중의 성분을 처리하는 정치적ㆍ사회적 사업에 도움을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 가톨릭 주민의 수송은 프랑스 호(號)와 그것을 지원한 미국의 함대 소속 함정이 담당했다. 북베트남은 이주 희망자의 이동을 억제하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베트남 휴전 감시위원단의 공식 보고서는 북베트남 정부가 위원단의 요청에 따라 기한이 지난 후, 이주 희망자의 이용을 위해 그 기간을 1개월간 더 연장하는 조치를 취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3) 정치ㆍ군사적 상황

베트남식민지전쟁, 제네바회의 개최, 협정 성립 그리고 총선거 실시의 유산에 이르는 1949년부터 56년까지의 모든 베트남 사태는 그것과 결부된 아시아 정치ㆍ군사적 상황을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에 대한 검토는 크게는 당시의 세계정세와 아시아지역에서의 격변하는 사태 발전, 그리고 주로 미국의 아시아정책으로 좌우되었다. 이것은 너무도 광범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별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개입

정치ㆍ사상적 전환

베트남에 대한 미국정책은 중국 대륙의 사회주의화와 한국전쟁으로 결정적인 전환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시아 식민지체제의 청산이라는 기본구상의 일환으로, 일본 식민지 조선(朝鮮)문제의 해결방안처럼 베트남을 일정한 기간의 미ㆍ영ㆍ중 3국 신탁통치를 거쳐 프랑스 식민지에서 완전 해방 독립시키는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인민에 대한 혹독한 제국주의ㆍ식민정책을 비난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처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개석과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성안시킨 신탁통치안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인도차이나가 소련의 영향력 밖에 있으므로 신탁통치국으로서의 제의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진행 과정에 따라 변모해 대일본전쟁이 가열된 1943년경에는 일본에 대한 중국 전선의 유지를 위해 인도차이나 ‘전부’(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한)를 중국에 ‘증여’하겠다고 장개석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인도차이나인은 결코 중국에 동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으로 이를 사양했다(Henry A.Wallace, Toward World Peace, p.

97). 장개석의 이 대답은 호치민이건 누구건, 베트남인은 민족적 주체성을 어느 강대국에게도 양도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기에 들어오면서 베트남정책은 적극적인 개입으로 수정되었다. 그것은 1949년 중국 대륙의 사회주의화, 소련과의 동서양에 걸친 권력투쟁, 한국전쟁, 동남아의 경제ㆍ군사적 중요성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

결정적인 전환은 1947년 트루만 대통령의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의 제기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한 미국은 모든 식민지해방 민족투쟁도 공산주의로 간주하게 되었다. “자유민에 대한, 외부 지원을 받는 전복행동은 어느 곳을 불문하고 미국의 단호한 반대를 각오해야 한다. 그와 같은 정세에 직면한 자유민은 군사력을 포함한 미국의 모든 형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트루만 독트린은 베트남의 반불(反佛) 식민지항쟁 민족해방투쟁도 전적으로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자본주의) 전쟁으로 비치게 되었다. 이 정치ㆍ사상적 전환은 필연적으로 군사 경제적 정책전환을 수반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그 가장 구체적인 정치적 의사표시는 1950년 2월, 프랑스의 보호국에 지나지 않는, 엘리제협정에 의거한 바오 다이 정권을 영ㆍ불과 더불어 공식 승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군사ㆍ경제적 개입

1949년 11월, 프랑스군이 베트민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미국의 지원이 약속됐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48년 동구에서의 대소ㆍ대공(對共) 대결 군사체제인 북대서양방위조약(NATO)의 형성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군사동맹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또 1950년 2월의 베트남ㆍ라오스ㆍ캄보디아의 국가승인으로 미국은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이들 ‘국가’에 직접 제공할 수 있는 길을 텄다. 프랑스를 통한 간접 방법과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직접 원조의 ‘합법적’방법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승인 직후인 5월에는 이 3국에 대한 경제원조 제공이 발표되었고, 12월 23일에는 미국, 프랑스 그리고 인도차이나 3국들 대표 사이에서 ‘방위 및 상호원조에 관한 협정’이 조인되었다. 한국전쟁 발생 전후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인도차이나전을 위한 미ㆍ불ㆍ영 3국 군사회담이 개최되었다. 중국이 북베트남과 원조협정을 조인한 것은 통일선거의 실시가 불가능해진 지 3년이 지난 1958년 3월 31일이다.

이 결정적인,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NATO를 통한 전면적 지원과 표리를 이루고 시작되었다.

북대서양동맹회의는 세계 어느 부분에서든지 직접 또는 간접 침략에 대한 저항은 자유세계의 공동안전에 대한 불가결한 기여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12월 6일 파리회담에서 인도차이나(베트남)의 군사 및 정치 정세에 관한 최근의 사태를 검토한 본회의는 프랑스 군대가 ‘공산침략’에 대해서 벌이고 있는 용감하고 장기적인 투쟁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며,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남아국가들의 저항은 본 동맹의 목적이나 이념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베트남에서의 프랑스전쟁은 본동맹(NATO) 가맹국가 정부들로부터 지속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NATO 이사회 결의, 1952.12.7).

이로써 베트남전쟁이 기본적으로 프랑스 식민전쟁이라는 성격, 베트남 인민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투쟁의 계속적인 한 단계라는 사실, 한국과 같이 국경을 넘은 침략전쟁과는 다른 성격…… 등이 무시되었다. 이 순간부터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세계의 전쟁이라는 해석이 공식화된다. 중공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뒤라는 이 결의의 날짜가 중요하다. 1954년 프랑스군 40여만이 5만 여의 베트남 군대에 의해 디엔 비엔 푸의 비극에 직면했을 때 미국 국무장관 포스터 덜레스는 아시아국가들과 NATO 국가들에 대해서 이미 끝난 한국전쟁에서의 방식에 따라 ‘통일행동’(unified action)을 취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한국전을 체험한 동맹국가들에 의해서 거절당했다.

미국은 부득이 단독행동을 구상해 안토니 이든 영국 수상에게 디엔 비엔 푸에 대한 ‘대량폭격’을 제안했고, 닉슨 부통령은 미군 지상군의 투입을 제안했다. 1950년 10월 10일, 최초의 미국 군사 사절단이 사이공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즉 1950년에서 54년까지 4년 동안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전쟁 지원으로 22억 8,500만 달러를 제공했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이때 미국의 인도차이나전 개입을 반대한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인민의 공공연한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쟁에는 아무리 미국의 군사력을 투입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나는 솔직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로서는 유럽에서의 서독의 재무장계획을 완강히 반대하는 프랑스 정부를 회유하기 위해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식민전쟁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 시기는 중국을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었다는 문제로 미국 국내에 매카시즘의 광적인 반공운동이 휘몰아치고 있을 때였다. 동기와 성격이야 어떻든, 상대가 자본주의자가 아니면 그것은 공산주의자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덜레스 이론이 미국 외교정책을 규정하고 있었다. 냉전과 소련의 핵군력화,중공과의 최초의 대전,한국전쟁,그리고 전후 경제의 촉진제로 이용된 군수생산과 전쟁준비 경제도 이에 가세했다. 따라서 미국의 국가정책이 사실상 군사적 사고방식으로 젖어 있었던 것도 이에 가세했다.

제네바협정과 미국

이와 같은 미국의 군사적 적극개입정책은 모든 국가가 희망하는 베트남전쟁 종결을 위한 제네바회의의 진행을 원치 않았다. 처음 개회식에 참석한 덜레스 국무장관은 며칠 만에 와싱톤으로 돌아가고 에델 스미스 차관이 격하된 대표로 참석했다.

미국은 냉전전략에 따라서 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베트남 휴전 성립에 대비해 1954년 3월 동남아시아방위조약기구(SEATO)의 결성을 추진했고, 협정이 체결된 2개월 후인 9월 8일, 영국ㆍ호주ㆍ뉴질랜드ㆍ파키스탄ㆍ태국ㆍ필리핀ㆍ프랑스ㆍ미국에 의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특히 제네바협정으로 군사동맹 가입, 외국 군원(軍援), 외국 군사기지 설치 등이 금지된 베트남을 포함하는 인도차이나국에 대한 군사적 ‘보호지역’지명조항을 삽입했다.

군사ㆍ경제ㆍ정치적으로 강력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고 딘 디엠의 베트남 정부는 사실상 미국정책의 ‘괴뢰’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부당한 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제네바협정 조항의 이행문제, 특히 총선거 실시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미국의 거부 태도를 대변한 사실은 널리 인정되었다. 미국은 아이젠하워의 사태분석대로 총선을 바라지 않았다. 남베트남의 반공기지로서의 분리가 중국에 대한 미국의 ‘포위ㆍ고립’정책에 이익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 후 미국 정부 내에서도 굳이 부인되지 않았다.

베트남내란의 재발

총선거 실시가 예정된 1956년이 지나면서 남베트남에서는 심각한 내란이 일어났다. 어느 한 시기를 기준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7년경부터 전국 지방에서 정부에 대한 폭동과 테러 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베트콩으로 불리는 민족해방 전선의 출발이다.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된 것은 1960년 12월 20일이다. 소위 베트콩이라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후 60년대에 들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확대되고 북베트남(월맹)과의 전쟁으로 확대됨에 따라서 그 성격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었다. 민족해방전선의 발생ㆍ성장과정에 관해서도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극단적 해석이 생겨났다. 하나는 전적으로 북베트남에서 넘어온 침투 게릴라라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어디까지나 남베트남에서 총선실시가 거부됨으로써 통일을 요구하고 고 딘 디엠 정권의 부패 등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집합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의당시 평가를 종합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베트남의 내란은 제네바협정으로 약속된 총선거가 ‘취소’된 다음해(1957)부터 시작되었다. 고 딘 디엠의 전횡, 무차별적 체포, 정치적 재교육이라는 이름 밑에 늘어난 강제수용소, 지방주민의 강제적 집결수용 등이 심해짐에 따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공산주의자들은 잠시 방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미국 원조에 의한 디엠 정권의 경제정책이 호치민으로 하여금 디엠 정권의 붕괴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됐다고 확신케 하자, 그는 남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폭동에 과거의 동지들이 합세하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다……(Schlesinger, A Thousand Days, p.539).

이것이 대체로 그 원인을 온건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다. 적어도 1957년에서 59년까지의 지방폭동은 이런 성격으로 해석되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1960년 그 세력이 강화되어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자, 그해 9월 월맹은 공식적으로 그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면서 소형무기의 공급을 시작한 것이 여러 가지 경로로 확인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 후 총선이 거부된 직후에 일어난 이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960년쯤에는 1년에 약 2,000명 정도가 북베트남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들 거의 대부분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쪽으로 이주ㆍ이동했던 남부 출신자들이다. 어쨌든 거의 대부분의 베트콩은 남부에서 가담한 자들이었고, 그들의 무기와 장비는 사이공 정부군에게 빼앗은 것들이었다(같은 곳).

제네바협정은 베트남인 군대에 속했으되 북쪽으로 가기를 원치않는 사람이 무장을 버리고 남부에 그대로 거주하는 문을 열어놓았다. 남쪽 출신이거나 남쪽에 가족이 있는 항불ㆍ독립 베트남 군인들의 상당수가 2년 후의 통일을 기다리면서 그대로 평민으로 남쪽에 정착하는 길을 택했다. 이들의 상당부분은 그러나 그 후 디엠 정부의 감시대상이 되었고 통일의 실패로 반정부적 자세를 굳히게 됐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디엠 정부는 총선예정 날짜가 지난 후부터 강압정책으로 치달았다. 앞서 상세히 살펴본 20년에 걸친 남베트남 사회의 혹심한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부패에 곁들인 이 정치적 탄압이 반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데는 온건한 중간적 견해를 가진 논자들이 일치한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 딘 디엠은 이미 1956년 1월 탄압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1월 11일 디엠은 강제집단수용소 설치령을 내려 그와 정부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혹독함에 놀란 미국 정부는 마침내 66년 5월 사이공 주재의 미국 정부 대표기관으로 하여금 베트남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즉 초기의 반정부세력은 공산주의자이기보다는 정치ㆍ종교적 소수파들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하게 했다.

카오다이교(高臺敎)를 구성하는 11개파 가운데 10개파가 디엠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초기의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지세력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또 호아하오교(和好敎)는 1952년에 이른바 사회민주주의당을 형성하여 그들의 정치적 의사표시의 기관으로 삼았다. 이것도 디엠에 반대했으며 56년에 이들은 디엠의 정부군에 의해서 소탕되었다. 카오다이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이 역시 초기 민족해방전선의 주력이 되었다.

세 번째의 소수파인 빈 수옌 파도 같은 입장과 같은 이유로 디엠 정권에 의해 탄압받아 초기의 민족해방전선과 협동했다(Bernard Fall,“Viet Nam in the Balance”, Foreign Affairs, 1966년 9월호).

맺는 말

미국이 베트남 내란을 월맹과 공산주의자의 원조ㆍ지령ㆍ사주에 의해서 시작된 침략이라는 명분으로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하기까지의 베트남 정세는 대체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ㆍ식민주의를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투쟁의 연장 선상에서 고려되어야 할 전쟁이다.

  • 『창작과비평』, 1972년 여름호


1-2. 「베트남전쟁Ⅰ」(1972년 『창작과 비평』, 전논)

우리는 이제 전후 30년을 살아온 냉전(冷戰)의 시대에서 이성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성의 눈으로 세계를 살펴보기 시작한 오늘, 어느 나라의 지식인도 민중도 냉전시대의 사상적 특징인 ‘부정적 가치관’을 고집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것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던 국가와 국민에게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했다.

냉전시대의 부정적 사고방식은 자기부정을 결과했을 뿐이다. 우리도 뒤늦게나마 냉전시대의 기이한 신화ㆍ우상ㆍ권위의 실태를 캐어묻는 회의를 품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사상은 언어를 통해서 전달된다. 우리 사회와 우리 민중의 세계관을 형성한 냉전사상은 냉전용어의 주변에 형성되었다. 얼마나 많은 냉전시대의 정치 선전적 용어가 아무런 비판 없이 쓰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얼마나 우리 민중의 진실확인의 능력을 제약하고 스테레오타입적인 조건반사적 사고반응을 일으켜왔는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냉전용어의 관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정치적ㆍ사회과학적 사상을 흑과 백, 천사와 악마, 죽일놈과 살릴 놈, 악과 선의 이치적(二値的)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처럼 지성을 마비시키고 격변하는 세계에서 자기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든 요소도 드물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라는 성경의 말은 신(진리)을 인식하는 수단으로서 언어의 중요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공자는 옛날, 만약 제왕이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서슴지 않고 “바른말을 쓰는 습관을 백성에게 가르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버릇”이겠다. 정확한 언어로 표시되지 않은 개념은 대상의 정확한 전달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이 인식 과 정은 순환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결국은 인식하는 주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왜곡하게 된다.

이것이 냉전시대를 정상적 상태로 알고 살아온 한국 민중의 인식형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정치 선전적 언어에 대해서, 현재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우리 민중이 정확하게, 사실 그대로, 편견 없이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위해 한때의 시대적 기능을 면제해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국제정세의 국면에서 그 작업이 가장 시급한 것은 베트남전쟁에 관해서다. 베트남전쟁은 현대의 모순의 집약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말씀’과 ‘바른말’의 정신으로 베트남전쟁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정치적 선전과 조작된 관념을 뚫고 현재의 세계정세와 인류의 역사적 움직임을 더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식적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실태와, 그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한 올바른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기본적 사실의 인식

베트남전쟁의 성격 규정은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전쟁 당사자의 쌍방 주장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는 데서 더욱 복잡해진다. 더욱이 한국 민중에게 그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베트남전쟁을 미군 개입 이후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한다. 미국의 개입을 합리화한 설명은 ‘월맹(越盟)의 침략’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중은, 우리 국가정책이 미국과 일체화되어 있던 사실로 말미암아, 단순히 ‘월맹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베트남전쟁의 성격과 뜻은 그 전쟁의 발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검토해야 한다. 베트남전쟁은 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듯이 현대적 성격을 띠게 된 시점을 기준으로 해도 3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는 전쟁이다. 그러기에 쌍방이 상대방의 침략전쟁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성격의 전쟁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와 우리 정부의 주장은 잘 알고 있는 터이기에 앞으로 그것에 대한 반론과 객관적ㆍ역사적 사실들을 찾아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언어(용어)로 복잡한 전체의 내용을 성격지으려는 습관이나 심리적 유혹에 앞서 하나의 분석태도를 꾸준히 지니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문제를 검토하자.

케이스 우리는 국경에 따라서 군대가 동원되고 국경을 넘어서 물리적으로 외국 영토를 점령하는 그런 유형의 침략에 비해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으며 분명하지도 않은 침략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베트남)전쟁이 전자와 같은 정도의 침략이라는 우리의 견해에 불찬성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조지 케난 베트남에서 우리가 현재 대치하고 있는 쌍방에 대해서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사고의 혼란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이 분쟁은 지극히 복잡한 배경, 그리고 지극히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닌 것이며 그 대부분은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난 사태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더욱이 남ㆍ북 베트남의 경계선은 아주 독특한 성격의 것입니다. 본래 그것은 두개의 국가의 경계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실들로 미루어 정부 내부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면 문제에 혼란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굳이 그렇게 표현하자면 부분적으로는 어떤 국가에 대한 타국 군대의 ‘침략’이라고 말할 수 없지도 않겠습니다마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용어의 확대해석이 됩니다. 어쨌든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남베트남 내부의 내란적 분규이며, 바로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베트콩은 외부세력이라든지, 외부의 뒷받침이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세력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단정해야 할 일은 아니겠습니다.

케이스 그렇습니까. 베트남이라는 특정지역의 특정정세에서 그것은 기본적인 사실문제라는 말이군요.

조지 케난 그렇습니다(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베트남문제 공청회 의사록, 1966.2.10, 목요일).

베트남 사태의 단계적 변화

베트남 사태는 오늘의 정세발전이 내일의 현실로 기정사실화되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 원점에서부터 살펴보아야 사태의 전모에 대한 시각이 정립된다. 즉 각 단계마다 ‘기본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

베트남 사태는 크게 나누어 4단계의 정세발전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①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1863.5)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근 100년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식민지민족 항불(抗佛) 해방투쟁.

② 전(全)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1945.9)부터 전후 베트남 민족해방 항불전쟁의 승리를 고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 성립(1954.7)까지의 투쟁.

③ 남베트남공화국 수립(1955.10)과, 그것으로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제네바협정의 총선거 실시 협약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지되고 베트남의 반영구적 분단이 고정된 사태.

④ 그 이후 남베트남(越南)에 내란이 일어나고 미국과 북베트남(越盟)이 개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으로 변모, 확대된 현상태.

이중 ③의 단계는 기간은 짧지만 그 후 베트남 사태의 발전에 가장 중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정치적 사실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 ④의 단계는 몇 가지의 ‘사건’또는 사태발전으로 구획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현상적 변화’였으며 ‘질적 변화’의 성격으로는 하나의 단계로 총괄되어야 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항불(抗佛) 식민지 해방전쟁

베트남 사태의 모든 요소와 국면의 뿌리는 앞서 조지 케난이 말한 것처럼 길고 복잡한 역사에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한마디로 외세간섭으로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투쟁의 역사다.

10세기를 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베트남 민족은 역대 중국왕조의 동화정책에 반항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100년의 프랑스 식민지정책에 대한 해방투쟁을 끈질기게 계속했다. 북베트남은 물론이지만 남베트남의 민중(정권과 지배층은 잠시 미루어두고) 사이에서 나타나는 외세반대의 사상과 에네르기는 이 역사와 전통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노일(露日)전쟁을 통해서 베트남 지식인들의 가슴속에 민족해방과 독립에 대한 희망이 용솟음친 것은 아시아와 그밖의 일본 및 유럽 백인 식민지하 민족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의 중국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베트남 지식인들은 일본과 식민모국 프랑스에 유학했다. 아시아민족의 힘을 새로이 확인하고 프랑스혁명과 아메리카혁명의 정신을 배워온 지도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기대가 컸던 만큼 그 후의 민족적 좌절이 컸던 것도 당연하다. 윌슨의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이 그 당시 유럽 백인열강들 사이의 세력조절과 유럽 안전의 역사적 화근인 발칸지역을 그 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던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지도자는 별로 없었다. 백인열강 지도자들의 이와 같은 의도를 통찰하지 못했던 베트남 독립운동 지도자는 후일의 호치민(당시 이름 阮愛國)으로 대표된다. 그리고 그것은 1917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하의 베트남 인민의 상태이기도 했다.

윌슨의 14개 항목 원칙에 흥분한 호치민은 전당포에서 빌린 검은색의 정복과 펠트모자로 단장하고 많은 아시아와 중동의 식민지민족의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칭’대표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의 으리으리한 방을 이리저리 헤매었다. 그러나 정열로 두 눈이 빛나는 28세의 이 젊은 베트남 지식인은 독립을 꿈꾸는 모든 식민지민족의 대표들이 겪은 운명을 맛보았다. 클레망소(프랑스 수상), 로이드 조지(영국 수상), 윌슨(미국 대통령)은 물론 이 회의에 모인 어느 강대국의 지도자도 그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면회신청이 이들 강대국 지도자들의 하급 사무원의 서류함에서 나와본 일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회의록 어디를 찾아봐도 베트남이건 안남(中部)이건 그런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시 호치민의 8개 항목으로 된 온건한 요구조건은 독립을 요구한 것도 아니며 다만 식민자와 피식민 인민의 평등, 기본권리, 더 많은 학교 건립, 명령에 의한 프랑스 통치를 법률에 의한 것으로 대체, 베트남 내부문제에 대한 프랑스 통치의 자문을 위한 원주민 대표의 임명을 요구하는 정도였다. 식민지 민족문제 해결에 대한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거부와 실패는 그 후 독일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에 실패한 결과로 나타난 것에 못지않은 중대한 결과 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Bernard Fall, The Two VietNams, p.88).

제국주의적 식민세력이라는 힘에 의해 패배당하기 전에는 그 단물(甘汁) 흐르는 식민지를 내놓은 역사가 없다는 준엄한 사실이 많은 아시아 피식민민족을 눈뜨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베르사유 평화회의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대체로 남부ㆍ중부ㆍ북부의 3개 지역으로 분할하는 통치 방법으로 베트남 민중의 내셔널리즘을 억제했다. 베르사유의 교훈은 베트남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파리에서 모스크바와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1923년 명문 출신이라는 호치민이라 칭하는 자가 파리에서 모스크바로 들어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방법을 연구하고 30년에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했다.

손문(孫文)의 민국혁명과 그것을 이어받은 장개석의 국민혁명도 초기에는 베트남의 항불독립운동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많은 독립지사들이 중국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 후 중국의 국공대립은 이들에 대해서 당파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열흘도 못 가 프랑스가 망하고 프랑스 본국에 나치독일의 괴뢰인 비시 정권이 서자 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이 북부 불령(佛領) 인도차이나에 진주했다. 태평양전쟁 발생과 동시에 호치민은 베트남 인민의 전 민족적 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유주(柳州, 또는 靖西)에서 공산당을 해소하고 “정치적 신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민주주의적 세력을 결집하는 광범한 민족운동”으로서의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한다. 비시 패전 프랑스 식민정권과 점령 일본군부 통치 사이에서, 그리고 그 양 세력을 상대로 한 ‘베트민’의 무력투쟁은 일본이 패망하기 전인 1945년 5월까지 북부베트남(통킹지역)의 6개 성(省)을 지배하는 힘으로 성장했다.

베트남의 지리적 특성과 장구한 내셔널리즘의 전통적 토대로 말미암아 반식민지ㆍ항불전쟁이 현재의 베트남이 아니라 월맹, 즉 남부에서가 아니라 북부에서 전개되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 베트남 정세를 특징지어주는 전제적 상황을 조성하게 된다.

식민주의자의 배신의 역사

무력해방투쟁은 주로 통킹지역에서 전개되었지만 현재의 베트남을 구성하는 중부(安南)와 남부(交趾支那)에서도 민족해방의 운동은 끊임없었다. 보다 투쟁적 형식을 취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 전후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의 지배를 위해 다시 들어왔다.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해방 전 조선에서 패배한 일본이 다시 식민지통치를 위해 종전과 함께 한국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고 가정하는 상황과 같다. 더욱이 일본의 식민지 재통치를 그 뒤에서 전승국가가 돕고 있다고 가정할 때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싸운 1945년 8월 당시의 한국 민중이 어떤 반응으로 대했겠는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식민세력에 대해서 무력투쟁으로 상당한 지역을 해방시킬

만큼 희생을 치른 민족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 상황은 남부베트남을 점령했던 영국정부의 공식문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베트민은 남부 불령 인도차이나의 주요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안남인(安南人)에게 단계적인 자치정부의 형태를 제의했다. 그러나 안남인들은 당장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베트남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된 9월 17일 베트민은 사이공 시를 완전히 철시하고 프랑스 고용주들에 대한 총파업을 실시했다……(동남아지역 연합군최고사령관이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한 보고서「인도차이나 분쟁에 대한 영국 개입에 관한 공식문서」, 1965.12, 영국 외무성 발행 문서집 문서 제1호 제24항).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은 베트남을 한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주둔 일본 패잔군의 무장해제와 전후행정의 편의를 위해”북위 16도(현재와 같은 17도가 아님)선 이남을 영국인이, 그 이북을 중국군이 점령한다고 합의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체 없이 인도차이나 전 식민지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했다. 이를 승인ㆍ지원한 영국은 마운트바텐 원수의 동남아지역사령부(세일론)에 프랑스 군사사절단의 설치를 허가하고 프랑스 민간행정관들을 훈련하여 프랑스군의 베트남 재점령을 도왔다.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지역이 프랑스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이 조치는 어쩌면 불가피한 ‘잠정적 조치’였는지 모른다. 사이공에서 이와 같은 영ㆍ불의 점령정책에 항거해 무력투쟁을 벌인 베트민 세력은 두 제국주의ㆍ식민국가 당국에 의해서 군사적으로 섬멸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영국 공식문서의 뒷부분은 남베트남의 베트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이공의 이 폭동은 주로 비정치적인 것이었으며 불안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익을 보려는 불량배들의 짓이었다.

프랑스는 사실 유럽전쟁이 끝남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3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불령 식민지 5개 지역을 연방화해, 연방의 실권을 1명의 총독에게 주고, 형식상의 원주민 자문회의를 설치해 인도차이나를 재지배하는 정책을 선포했다. 민족해방과 독립을 요구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이를 반대했다,

1946년 2월, 16도선 이북에 진주했던 중국 군대가 철수하자 프랑스총독부는 프랑스 군대를 앞세우고 북부지역으로 들어갔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군의 진주를 반대하지 않는 대신, 프랑스 정부는 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프랑스연방의 일원으로서 정부ㆍ군대ㆍ재정ㆍ외교의 모든 분야에서 독립적인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② 안남(중부)과 교지지나(交趾支那, 남부)를 병합해서 단일 통일국가로 할 것인지의 여부는 국민투표로 결정하기로 하고 ③ 프랑스 군대는 5년간에 걸쳐 베트남 군대로 교체되며 ④ 그 이상의 세부문제는 앞으로 계속 협상해서 해결한다는 협정에 동의했다(1946.3.6, 협정).

그러나 프랑스는 이 협정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20일 후에 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임시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발표했다. 이 식민주의 프랑스의 두 번째 배신은 베트남 인민을 격분시켰고 그로부터 주로 북부에서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과 프랑스 식민군대 사이에 전투가 재발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재지배하기 위해 중국 군대의 북부 철수를 중국 내 프랑스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교환조건으로 장개석 정부를 유화했다. 그 조건이란 ① 중국 내 프랑스 치외법권의 포기 ② 프랑스 자본으로 건설한 하이퐁에서 곤명(昆明)까지의 철도에 대한 중국 권리 인정 ③ 중국의 하이퐁 항 및 그 주변지대의 출입권 승인이다. 베트남을 희생으로 하는 강대국 이익 위주의 해결 형식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이 잠정적 해결방안에 대해, 베트남 민족을 대표한 베트남민주 공화국 호치민 대통령이 동족을 배신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즉 그에게 통일ㆍ독립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중부와 남부의 베트남인을 사실상 프랑스 식민지하에 내맡겼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국의 보호적 세력이 물러나고, 영ㆍ불의 식민주의적 공동압력 앞에 놓인 해방세력의 역량으로서 그 외의 방법이 있었겠는가는 문제이겠다. 어떻든 해방을 위해 싸운 베트남 전 인민의 노예화냐,절반만의 노예화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정세를 배경으로 생각할 문제이겠다.

프랑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힘에 의해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기까지는 절반이라도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식민투자는 지금의 베트남인 교지지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치 독일에 의해 일패도지(一敗塗地)되어 사실상 전후의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해버린 프랑스는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도 식민시장을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이었다.

중부와 남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베트남 정부의 노력은 4개월후 프랑스의 퐁텐블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호치민은 문화ㆍ경제에 한정되고 베트남민주공화국 지역에서의 휴전과 프랑스군의 철수를 새로 규정한 잠정협정만을 가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으로 3월 6일 협정을 강요한 물리적 힘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 8월 협정에 앞서 최소한 남부만이라도 분리 지배하려는 프랑스는 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선포했다. 이것은 분명히 3월 협정에 대한 배신이었다.

8월 협정도 폐기되었다. 유럽지역에서 군사력의 여유를 얻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역의 군사태세를 강화했다. 그러고는 12월 19일 베트남 정부에 베트남 군대의 자발적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들이댔다. 최후통첩에 응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을 명분삼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군사적 대결을 강요하려는 계획이었다. 3일 후 프랑스 공군은 하노이ㆍ하이퐁 등 대도시에 대한 전면폭격을 감행하는 동시에 육군은 하노이 시를 점령하고 베트남 군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하노이 시 폭격으로 죽은 베트남인만도 단 두 시간에 6,000명을 헤아렸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제20절). 베트남 인민은 세 번째의 배신을 맛보았다.

베트남 인민과 제국주의 프랑스군 40만은 이로부터 1954년5월 7일, 디엔 비엔 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하기까지 실로 7년 반의 혈투를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전쟁이었다.

미ㆍ영ㆍ불 등의 공식문서들은 이 처절한 전쟁을 ‘내란’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을 식민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는 성격 규정과 식민지 인민의 입장에서 보는 민족해방전쟁의 성격 규정을 단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내란’이란 합법적 통치권력에 대한 민중의 정권전복 반란의 뜻을 띤 정치적 용어다.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를 베트남의 합법적 통치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을 승인한 사실을 백지화하는 견해다.

식민주의자의 가장 큰 배신은 인도차이나전쟁을 종결지은 제네바 휴전협정(1954.7.21,조인)에서 합의한, 2년 후 즉 1956년 7월에 베트남 독립ㆍ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조약의무를 프랑스가 포기한 것이다. 프랑스는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해 휴전선 이남지역에서 휴전과 관련된 군사적ㆍ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고 총선거 실시를 위한 협의를 하며, 1956년 7월에는 전 지역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는 일방(一方)주체로서의 의무(최종선언 제7항)를 서약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합의된 선거날짜를 3개월 앞두고 프랑스 군대를 철수해버렸다. 그러고는 휴전협정을 이행할 조인 당사자인 주베트남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를 해체함으로써 휴전협정의 이행은 물론 총선거 실시의 책임도 기피해버렸다.

이것은 식민주의자의 네 번째 그리고 가장 중대한 베트남 인민에 대한 배신으로 지탄받게 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는 베트남 사태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총선실시 합의의 유산을 꼽는 데 미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전문가와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돼 있다(이 견해에 대해 미국과 현 베트남 정부는 별개의 해석을 하고 있다. 그에 관해서는 다음에 상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고 딘 디엠의 등장

베트남 정세의 긴 역사를 통해 가장 빈번히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것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역할에 관한 견해차다. 이 견해 대립이 대체로 식민지에서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반영하고 나타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정치학 용어로서 어의의 규정을 떠나 실천적 측면에서 나타난 이양자의 비교는 베트남에 관한 한 상당히 대조적인 면을 보여준다.

프랑스가 식민통치하의 호치민 세력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나 현재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동기는, 민족주의자는 베트남의 독립과 양립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 자는 베트남의 주권ㆍ독립을 국제공산주의에 예속시킨다는 견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 실천적 과정을 사태발전의 역사 속에서 검토해보는 것은 ‘학문적으로’유익하겠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고정관념이나 이해관계의 입장을 일단 벗어나는 학문적 태도가 전제로 요구된다.

민족해방과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프랑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베트남인의 투쟁은 그들의 일부가 소련혁명으로 어떤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되는 1930년대에 훨씬 앞서서 100년 가까이 계속되어왔다. ‘민족주의자’라는 규정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총애를 받은 고 딘 디엠이나 ‘공산주의자’라는 규정으로 배척을 받은 호치민은 이미 그 이전부터 베트남의 식민지해방과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이 사실에서 볼 때, 식민지 베트남민족의 해방ㆍ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은 누구나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인 셈이다. 내셔널리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정치학자들의 정의를 따른다면, 베트남의 반식민ㆍ반제국주의는 그대로 내셔널리즘이다. 베트남에 관한 한 민족주의는 본질이고 나머지의 철학은 해방투쟁의 방법론과 식민지에서 해방된 사회체제에 대한 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외세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는 전부가 민족주의자라는 데 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러기에 차이점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다. 이것은 베트남의 경우도 그렇지만, 모든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 말미암아 같은 민족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밀착해 있는 세력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소극적이었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는 반식민지투쟁에서 적극적이었다는 차이를 낳게 한다.

바오 다이 황제가 전형적인 경우이겠다. 1945년 3월 일본군이 베트남 전역의 군사적 점령을 완료하자, 일본은 안남왕국의 과거 프랑스 식민지하의 명목상의 황제에 대해서 북부와 남부를 합친 통일왕국의 독립선언을 요구했다. 이것은 백인 제국ㆍ식민주의 세력을 추방하려는 황색인 제국ㆍ식민주의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바오 다이는 이에 응했다. 그것이 백인 프랑스 제국ㆍ식민주의의 괴뢰에서 다만 일본 황색인 제국ㆍ식민주의의 괴뢰로 탈바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이것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최초의 베트남 통일ㆍ독립이다.

그 후 베트남 인민과 영토의 완전한 통일ㆍ독립을 요구한 베트민(베트남민주공화국)을 말살하기 위해 협정을 폐기하고 식민지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는 홍콩에 ‘망명’중이던 바오 다이를 다시 불러들여 1949년 6월,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 원수로 추대했다. 이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이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끝까지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꾸며낸 흉계였다. 그것은 베트남의 일부에 독립의 허울을 씌우는 정치극이었다.

벵상 오리올 프랑스 대통령과 바오 다이 ‘황제’사이에 체결된 이 협정은 ‘엘리제협정’이라고 불린다. 엘리제협정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되 “국방과 외교권은 프랑스 정부가 장악하고,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에 기지를 영원히 보유하며 그 통행권은 무제한으로 보장되며, 재정 및 기타 국정의 주요부문에서 프랑스 정부의 자문과 지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정치극이다(엘리제협정과 같은 것이 프랑스와 라오스 및 캄보디아 사이에도 거의 동시에 체결되었다).

이 ‘독립국가’가 현재 베트남 정부의 법통이다. 이 독립국가는 ‘비공산주의적 민족주의자’인 베트남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

앞서 1946년 3월 협정으로 독립을 선언한 호치민의 베트남민주 공화국에 대한 국가승인 요청을 거부한 영국은 바오 다이 왕국과 라오스ㆍ캄보디아 왕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했다(1950.2.7). 미국도 같은 날 3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했다.

‘주권국가’로 승인한 영국 정부의 외무성이 의회에 제출한 베트남 사태에 관한 공식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바오 다이 각하의 지위를 강화해주기 위해서 프랑스는 베트남이 독립국가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원했지만 ‘엘리제협정’에 내포된 제한과 제약으로 보아 베트남이 국제법상 진정한 독립국가였는지는 결코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1950.2.7) 3국을 승인했다(“The Official Documents Relating to British Involvement in the Indo-China Conflict: 1945~65”, 背景 제22항).

이 공식문서는 이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영국의 승인은 조심스러운 말로 표현되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프랑스연방 내의 연합국가’로서 승인되었다. 그러나 사이공 주재 총영사는 공사의 지위를 부여받고 그 후 곧 캄보디아와 라오스 조정에도 신임장을 제정했다(같은 글, 제23항).

미국이 베트남 사태 개입의 법적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이 정부와 체결한 협정ㆍ조약들이다(이 관계는 뒤에서 상술한다).

민주적 지도자의 자격 차원에서

현대 민주주의가 고전적 정치민주주의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경제적ㆍ사회적 측면의 민주주의를 그 기본요건으로 한다는 학설에 따른다면 여기서 베트남에 관한 고정관념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더욱이 고전적ㆍ정치적 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였던 자유시장ㆍ경쟁경제ㆍ사유재산의 제반 제도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절대적’요건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대에는 더욱 그러하겠다.

민주주의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 국가사회의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적ㆍ경제적 권리와 기회가 민중, 인민, 시민 또는 국민(명칭이야 어떻든)에게 얼마나 균등하게 배분되고 보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문제다. 그것은 두 지배세력의 어느 쪽이 그들의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기득권을 민중일반과 가급적 균등하게 분유(分有)하려는 뜻을 가졌는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차지한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박애심 이상의 어떤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자기희생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후진사회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규정짓는 이와 같은 복합적 요건들을 종합적으로 시험대에 올려놓고 분석할 때, 남ㆍ북 베트남에 ‘민주주의’의 양을 얼마만큼씩 배점(配點)해야 할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강력한 ‘민족주의자’가 반드시 민주주의적이고, 비계급적이고, 비외세의존적이고, 대중의 이익을 제1차적 관심으로 생각하고, 아울러 민중의 정치적 자유도 보장하는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예스’이면 어떤 구실과 수단으로도 그 세력을 돕는 것은 타당하다 할 것이다. 그 답변이 ‘노’이면 베트남 사태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이나 선전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이 어떻든 ‘진실’이라는 것을 모든 판단의 토대로 해야 한다는 바로 ‘민주주의’의 원리와 정신 때문에도 더욱 그렇다. 다른 중요한 정치적 덕성 없이, 단순히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식민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나 정권이 얼마나 반민중(인민ㆍ국민)적인가 하는 좋은 증언이 있다.

본인은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께 지난 일요일자『뉴욕 해럴드 트리뷴』지에 실린 사이공 주재 미국인 특파원의, 흥미 있고 또 본인이 보기에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낸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가끔 불안했던 과거 중국의 장개석 정권과 바오 다이 정권을 비교해보았다. 한 가지 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바오 다이 정부가 1947년 말 중 국내란에서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을 때의 장개석 정권보다 더 약하다는 결론이 거의 불가피했다. 이 정권은 장개석 정권보다 국민의 지지가 없고 권위의 정통도 더 약하며 정권을 위해서 일하는 국민과 인물들의 비율도 더 낮고 투쟁의 열의도 더 약하다. 바오 다이 정권이 분명히 더 강한 단 한 가지는 동(同) 정권이 프랑스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프랑스 행정관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은 또한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프랑스 군대가 베트남 땅에 있는 한, 바오 다이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한편 이 불행한 나라의 경제 재건과 민중의 복지는 호치민이 지배하는 대단히 광대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등한시되고 있습니다. 호치민은 진보적이고 번창하는 사회주의 복지국가로 보이는 나라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바오 다이 황제는 사이공에서 300마일 떨어진 그의 산장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고 있습니다(영국 하원의사록초, 1950.4.14, 영국 외무성 인도차이나에 관한 공식문서집 부록 문서 제11호).

……동남아지역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바오 다이 정권이 자국 내에서 아무런 통제력도 가지지 못한 정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 다이 정권이 결코 시작되어서는 안 될, 그러면서도 전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장구한 더러운 프랑스제국주의의 모험의 꼬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모험을 지지하지 않았으면서 인도차이나에서 이러한 종류의 모험을 지지하는 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그것은 또한 공산주의를 막는 최선의 방법도 못 됩니다. 본인은 호치민이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리라는 동료의원의 견해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본인은 그가 공산주의자이고 아마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본인은 그의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관련 때문에 앞으로 인도차이나의 사정이 극히 어려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베트남에 괴뢰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련식 수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련인들이 이른바 철의 장막 뒤에서 해온 수법입니다. 그것은 현지 인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이며,이것은 비민주적 수법입니다(같은 글,버밍검 에스톤 출신 와이워드 의원).

바오 다이 정권에 완전히 실망한 미국은 고 딘 디엠을 새로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소수 지배층의 정치ㆍ경제ㆍ권력 독점과 베트남 사회의 원리가 되어버린 부패를 도려내고 진정 민중(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가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미국의 베트남 로비(친베트남파) 거물은 케네디 상원의원(그후 대통령), 그 부친(전 영국대사ㆍ재계거물) 및 케네디 일가,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원판사, 헨리 캐보트 롯지(공화당 전 대통령 후보, 그 후 주베트남대사), 마이크 맨스필드(현 민주당 상원원내 총무), 그리고 반공 추기경으로 유명한(사망 전까지 한국전선과 베트남전선의 반공기지를 크리스마스 때마다 방문했던) 뉴욕의 스펠만 대주교…… 등 쟁쟁하다. 이들은 1953년, 더글러스 판사 집에서 회합을 갖고 바오 다이 민족주의를 고 딘 디엠 민족주의로 대치시키자는 데 합의했다. 그들은 고 딘 디엠의 자질을 민족주의, 인간적인 고결함, 용기, 이상주의적 결단력으로 평가했다.

이와 같은 반공민족주의자의 모든 소질을 높이 평가받은 고 딘디엠은 미국 정부의 지지로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55년 10월 국민투표에서 바오 다이를 물리치고 베트남 국가원수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모든 병폐를 깨끗이 척결할 민족주의자로 기대되었다. 아이젠하워 정부와 그 후 케네디 정부의 그에 대한 지원은 거의 무조건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사실 바오 다이 정권의 통솔력 결핍과 무기력은 베트남 인민들 사이에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싸우느냐는 감정을 일반화시켰다. 어떤 프랑스인이 나에게 말했듯이, 베트남이 필요로 하는 인물은 이승만 같은 지도자다. 설사 그런 인물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수반할 모든 곤란한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막스웰 테일러 퇴역대장 증언, 베트남에 관한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청문회 의사록, 1966.2.17).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추대된 것이 고 딘 디엠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결’한 ‘민족주의자’밑에서 민중에 대한 정치적ㆍ폭력적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경제ㆍ사회ㆍ문화적 부패는 베트남의 역사상 유례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의 민족주의는 사실상 민족적이 아니라 반민족(인민)적인 데까지 이르렀다.

디엠 정부는 전국 농토 가운데서 45만 7,000헥타르를 몰수했고,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인 전(前) 개인 소유지 24만 6,000헥타르를 베트남 정부에 반환했는데 정부가 1958년까지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 계획으로 농민에게 재분배한 것은 프랑스인 소유로 반환된 것에 해당하는 24만 8,000헥타르밖에 안 된다. 최근의 미국 AID보고에 의하면 분배되지 않은 농지는 대부분 정부가 쥐고 있으며 정부는 그것을 최고가격으로 입찰하는 자에게 임대하고 있다(Bernard Fall,“Viet Nam in the Balance”, Foreign Affairs, 1966년 10월호, p.5).

토지 없는 수백만의 빈농은 사이공 정부가 농촌지방의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시 빼앗겨버린다. (베트콩에 의해 분배되었던 농토는) 정부군이 그 지역을 재점령하면 정부군에 의해서 과거와 같은 낡은 소작제도가 다시 복구되기 때문이다. 정부군이 재점령하고 들어온 지역에서는 실제로 부대 보급트럭에 지주가 함께 타고 들어와 부대장들로 하여금 이익금을 분배한다는 약속으로 그 지역에 대한 소탕작전을 명령하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베트콩에 의해서 이미 분배된 농지 소유권을 차라리 그대로 기정사실화하는 식을 포함한 ‘농민지향적’농지개혁을 하는 것이 오히려 어떠한 한 가지 반(反)반란의 방법보다도 농민의 지지를 얻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사이공에 자리잡고 있는 ‘지주 지향적 지도자 집단’이 진정 그와 같은 농촌혁명을 지적으로 구상할 수 있느냐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이공 정부의 군장성들과 의사들로 구성된 집단이기 때문이다(같은 글).

이쯤 되면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게 된 장개석 정권의 시종일관된 실태의 재판이라 할 것이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에서는 장개석이나 바오 다이, 고 딘 디엠은 다 같다. 그들과 호치민이나 모택동 사이에는 민족주의자라는 공통점 외에 하나는 자본주의적이라는 것과 하나는 사회주의적이라는 철학적 차이가 있다는 것뿐이다(정치적 관용과 민주주의 원칙 및 국민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측면은 뒤에서 별항으로 상술한다).

존슨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 당시 ‘동양의 처질’이라 불렀고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의 친베트남파 거물급 인사들이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불러온 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는 결국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군부쿠데타에 의해 1963년 11월 2일 살해되고 만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디엠이 살해되기 얼마 전 현지조사단을 파견했다. 그 조사단의 한 사람이 내린 결론에 관해서 케네디 전기의 저자인 슐레징거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살았던 중국 전문가인 테오도어 H. 화이트(Theodore H. White)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중경(重慶)의 상태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써 보내왔다. 그는 중국 말기의 장개석 역할을 고 딘 디엠이, 장개석 부인(송미령) 역할을 누 부인(고 딘 누)이 어쩌면 그렇게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지에 놀랐다. 그는 “남베트남에서의 패배가 우리의 패배로 직결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지역을 우리가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면 우리는 적절한 인물을 찾아야 하고 단호히 간섭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Schlesinger, A Thousand Days: John F. Kennedy in the White House, p.544).

고 딘 디엠에 대한 최종판결은 그해 9월 3일 케네디가 디엠에 대한 전문 작성을 지시한 메모로 내려졌다.

나는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2개월간의 정세를 보건대 (사이공) 정부와 민중의 연대감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으로 기대한다. 필요하다면 인물 교체로 가능할 것이다……(같은 책, 992쪽).

그 후 거의 1년에 두 번씩 일어난 군부쿠데타의 주인공들과 다시 그 뒤를 이은 반공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그때마다 같은 평가가 내려졌다. 남베트남의 민중과 사회의 정세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참작하고도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치된 제3자적인 평가인 듯하다.

제네바협정의 행방

베트남전쟁의 해결이라는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반드시 그 방안의 준칙(準則)으로 제시되는 것이 제네바 휴전협정으로의 복귀다. 전쟁의 쌍방 당사자도 각기 제네바협정에 의한 해결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제네바협정 위반을 비난한다. 제3자 국가나 전문가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네바협정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소생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지만 그 협정의 행방은 묘연하다. 쟁점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① 휴전선이 2년 기한의 일시적 ‘군사적’분계선이지, 어떤 뜻에서든 ‘정치적 국경선’이 아니라는 조항 ②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증강ㆍ동맹결성의 금지조항 ③ 협정 조인 후 2년 안에, 즉 1956년 7월까지 베트남 전역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규정한 합의다. 이 조항들에 대한 위반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문제와, 그 위반의 책임을 기피하거나 상대방에 전가시키는 것이 당사자들의 입장이다. 제3자적 국가나 전문가들은 그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데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그 책임을 발견하는 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제네바협정에 대해서 행한 일방적 선언을 통해 하나의 베트남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남이든 북이든 분리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국총선 실시에 관한 조항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그 선언에서 국제 감시하의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이 달성되게끔 노력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고 나서 곧 미국은 남베트남에 분리된 하나의 국가정부를 세우는 공작을 시작했다. 고 딘 디엠을 지도자로 하는 국가와 정부를 세우는 노력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지만 디엠 정권이 제네바협정 이후 몇 해 동안 관대하게 취급되고 호치민 지지세력 측에서도 대체로 이를 방임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그 실체는 곧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제네바협정이 규정한 총선거 준비를 휴전선 이남(남베트남)에서 진행하고 준비해야 할 책임의 당사자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베트남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승리한 베트민은 그 군대를 남부에서 철수해 상당 기간 혁명활동을 중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총선거가 실시되면 호치민이 전 베트남 인민의 8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견해 때문에 고 딘 디엠 정권에 제네바협정이 금지한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그로 하여금 선거를 거부하게 해 제네바협정에 대한 책임에서 물러섰다. 여하한 궤변을 동원해 그 반대를 입증하려 해도 미국이 디엠 정권을 앞세워 제네바협정의 핵심적 합의를 무시함으로써 선언을 통해서 밝힌 입장을 배반한 사실은 은폐할 수가 없다(코넬 대학 조지 케이힌 교수).

이에 대한 반론도 강하다.

남ㆍ북 베트남의 경계선이 일시적인 것으로 설명되었다 하더라도 남베트남에 대한 공격의 침략성을 조금도 감면할 수는 없다. 남북한 간, 동서독일 간의 경계선도 잠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북한의 무력침략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러스크 미국무장관, 미국국제법학회 연례총회 연설, 1965.4.23).

제네바 휴전협정의 성립 과정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계속된 7년여의 전쟁이 베트남ㆍ라오스ㆍ캄보디아 3지역 인민의 대프랑스 식민항쟁이었기 때문에 제네바 협정은 이 3지역(국가)에 대해서 거의 비슷한 내용의 각개의 협정으로 구성되었다(이후 베트남 관계만 논하기로 한다).

가장 중요한 기본사실은 프랑스는 패전 당사자로 조인했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베트남 인민 전체’를 대표해 승리자로서 조인했다는 정치적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식민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전쟁의 종결문서에서도 그 일방(一方) 대표는 프랑스연합군 총사령관이고, 그 지역 인민을 대표해 서명한 것은 역시 베트남민주공화국 대표였다. 다시 말하면 라오스ㆍ캄보디아는 논외라 하더라도 베트남은 남ㆍ북이 없었고 전체 베트남은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인정되고 그 정부는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대통령의 정부로 되어 있다. 그것 외에는 베트남에는 국가나 정부가 없고 그것만이 유일한 국가ㆍ정부라는 전제가 식민통치국인 프랑스에 의해서 승인된 것이다. State of Viet Nam(베트남국)이라는 이름으로 바오 다이 왕국 대표가 프랑스 편에 서서 참석했지만 그것은 협정 당사자인 교전단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국가’로서의 자격은 앞서 검토한 바와 같다.

회담은 1954년 4월 26일에 열려 7월 21일 협정이 성립되었다. 미국과 바오 다이 정부는 협정에 불만을 표시해 도중에 대표를 철수했으나 미국은 협정을 준수하겠다는 일방적 선언을 발표했다. 베트남에 관한 주요조항은 무엇이며 그 합의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휴전선은 국경이 아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흩어져서 싸우던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를 일단 격리시키고 휴전에 들어가기 위해 대체로 북위 17도에 해당하는 변 호이 강을 따르는 ‘임시 군사분계선’이 정해졌다. 프랑스군은 그 남쪽에, 베트남군은 그 북쪽으로 이동ㆍ재집결하기로 하고 이동 완료기간을 300일로 정했다(협정 제1조 및 제2조).

‘군사분계선’의 성격에 대해서는 협정과 별도로 각국이 조인한 ‘최종선언’에서 이렇게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본 선언은 베트남에 관한 근본목적이 적대행위를 종식하기 위해 군사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는 것과, 군사분계선은 임시적인 것이며, 여하한 경우에도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선언 제6항).

그 후와 현재의 문제는 이와 같이 국경이 아닌 분계선을 넘는 것이 침략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는 데 집중되어 있다. 더욱이 어느 쪽인가가 제네바협정의 핵심적인 합의를 위배했을 때, 협정 전상황과 협정상 권리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국경이 아닌 ‘임시적 군사분계선’의 협정상 효과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월맹 측 견해다. 이에 반대해서 그것은 그래도 침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앞서의 러스크 발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 측 견해다. 이 대립되는 견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 준수의 전제조건으로 설정된 그밖의 협정 각 조항이 어느 쪽에 의해서 위배되었는가가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도 견해는 대립되고 있다.

1956년 통일총선의 유산

협정 조인 2년째인 1956년 7월로 합의됐던 통일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사실은 베트남 사태가 현재와 같은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가장 중대한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협정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할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각 병력의 재집결 지역 내 민정은 본 협정에 의해 재집결하는 군대의 국가가 책임진다(협정 제4조 a항).

최종선언은 이 조항을 보충해 그 날짜를 ‘1956년 7월’로 정하고 양 지역 행정책임 당사자가 이 문제에 관한 토의를 협정 조인 날부터 시작할 의무를 규정했다. 그 책임 당사자는 물론 북에서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고 남에서는 프랑스 정부(군 최고사령관)다. 이 합의와 그 불이행이 국제적 논전을 불러일으킨 핵심적인 문제다. 그 쟁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

① 쌍방 책임 당사자는 총선 준비의 책임을 이행했는가?

② 선거 실시를 거부했거나 합의를 무시한 사실이 있는가? 있다면 어느 쪽인가?

③ 그 이유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총선합의의 불이행 내지 거부의 문제는 제네바협정에 관한 ① 법적 해석 ② 당시의남ㆍ북 베트남 정세 ③ 미국 및 아시아 정치군사적 상황의 세 측면을 종합해서 검토해야 한다. 법적 측면은 주로 프랑스와 프랑스의 괴뢰정부로 인정되던 바오 다이 정권(베트남국, State of Viet Nam)과 관련된 것이다. 정치적 상황은 주로 당시의 미국이 세계적 반공정책 및 군사전략과 그 일부로서의 반공베트남 기지 확보정책의 전개 과정이다.

(1) 법적 측면

총선을 준비할 행정적 준비와 그 이행을 남베트남에서 책임진 권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협정체결 당사자인 프랑스다. 그런데도 프랑스 정부는 총선거를 실시해야 할 조약상 일자인 1956년 7월을 앞두고 4월 15일을 기해 베트남 주재 프랑스군 총사령부를 해체ㆍ철수해버렸다. 이것은 일단은 제네바협정과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서인 ‘프랑스공화국 정부의 선언’에 따른 것이기는 하다. 그 선언(1954.7.21)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프랑스공화국 정부는 양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일정한 수의 프랑스 군대가 특정지점에 특정기간 남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계 정부의 요청에 따라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 확정된 기간 내에 그 군대를 캄보디아ㆍ라오스ㆍ베트남 영토로부터 철수할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는 바다.

그러나 이것으로 협정과 최종 공동선언에서 약속한 총선 실시 주관 당사자로서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부의 선언은 이어 협정조인 이후의 모든 행동준칙으로서 다음과 같이 스스로 공약했던 것이다.

캄보디아ㆍ라오스ㆍ베트남에 평화를 재확립하고 공고히 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그 3국의 독립ㆍ주권ㆍ통일 및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근거로 하여 행동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휴전조항 준수와 총선거의 실시를 책임지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프랑스군 총사령부가 존재하지 않게 된 문제는 제네바협정의 시행을 감시할 책임을 맡은 국제감시위원단(캐나다ㆍ인도ㆍ폴란드)의 법적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사태를 조성했다. 왜냐하면 휴전과 총선거 실시를 감시할 의무 및 권리를 맡은 국제감 시위원단은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한 것이며, 그 협정은 프랑스 최고사령관이 두 조인 당사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태와 권한으로 존재하든 남베트남 정부는 프랑스군 최고사령관하에 있는 권력주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사태에 대해 제네바협정 조인국 공동의장단(영국과 소련)은 1956년 3월 23일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각서를 조인국에 발송했다.

프랑스연합국 최고사령관은 협정의 이행에 관한 책임을 인수했으며 그것을 관리할 국제감시위원단에 대한 사령부의 협조를 다짐했습니다. 프랑스 당국이나 남베트남 당국 어느 쪽도 프랑스 최고사령부의 철수 후 동위원단이 협정조항을 계속 감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런 제안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남베트남 당국은 4월 1일 이후 동위원단의 안전에 관한 책임을 인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동당국은 남베트남에 있는 프랑스 국가 권력의 계승자로서 프랑스 최고사령부의 법적 책임을 인수할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각서 제2항).

이러한 상태하에서 위원단은 협정 당사자의 일방, 즉 프랑스 최고사령부가 소멸한 이후 법적 근거를 잃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를 중대한 관심사로 생각합니다. 남베트남이 최고사령부가 부담했던 책임을 완전히 인수하지 않는 한, 위원단이 남베트남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제3항, 이상 번역문은 영국 외무성 공식문서 등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발행,「입법참고자료」,1968.10.5, 제96호에서 인용).

프랑스 정부의 이와 같은 일방적 처사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에 앞서 남베트남에서 그 의무를 전면적으로 인수할 ‘오소리티’가 있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바오 다이 정권이 그와 같은 주권정부로서의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음은 앞서 본바와 같다. 게다가 그 정권은 제네바회의 진행 중, 대표는 참석시키고 있으면서도 협정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협정과 ‘최종선언’에 조인하기를 거부했다. 바오 다이 정권은 제네바회의 기간 중 미국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 베트남 사태가 전쟁으로 확대되고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출현했을때 미국과 베트남공화국(고 딘 디엠) 정부는 그들이 제네바협정 조인국가가 아니므로 그 협정조항을 이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내세웠다. 미국과 베트남 정부의 태도는 선거일자가 가까워지자 점점 더 이 거부 태도를 굳혔다. 공동감시위원단의 일원인 인도는 사태의 중대성과 그것이 앞으로 전쟁상태를 초래할 것임을 정확히 예언했다. 선거실시 예정일을 15일 앞두고 인도 정부가 제네바회의 공동의장단에 보낸 각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따라서 베트남의 민정은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베트남민주공화국(북)과 남에서는 프랑스연합이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후 프랑스연합은 남부지역에 대한 그들의 주권을 베트남국에 이관했다. 그러므로 협의를 할 양 지역의 소관 당국은 북에서는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에서는 협정 제27조에 의해서 프랑스당국으로부터 남베트남의 민정을 인수한 베트남국이다(각서 제3항).

이와 같은 책임의 불이행은 제네바 해결방안의 기초를 와해시킴으로써 당사자 사이에 전쟁상태를 다시 초래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제4항).

결국 현재의 베트남이 ‘계승국가’로서 주권 및 국제적 권리를 주장한다면 역시 계승국가로서 프랑스 최고사령부가 수락했던 조약의무도 져야 한다는 해석이다.

베트남민주공화국(북) 정부는 협정체결 이후 2년 동안 총선실시를 준비하기 위한 협의(협정상 의무)를 프랑스 최고사령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요구하는 각서를 보낸 기록들이 남아 있다. 예정 일자를 1개월 앞서 발표한 성명(1955.6.7)은 협정상의 ‘일시적인 군사분계선’을 ‘국경화’하려는 음모가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모든 협정조인국과 특히 프랑스 당국에 대해서 최고사령부를 철수함으로써 총선실시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영국 외무성문서집 문서 제52호).

이상과 같은 많은 사전경고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프랑스 정부가 그 최고사령부를 철수한 것은 총선이 실시되지 않은 ‘원인’인 동시에 그럼으로 해서 책임추궁을 회피하면서 총선을 거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불행한 ‘결과’였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2) 남ㆍ북 베트남의 실정

법적 문제와 관련해서 문제된 것은 예정된 총선거 방법에 관한 이견이다. 주로 선거실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기피적인 태도를 취한 미국과 베트남 당국의 성명은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는 ‘자유ㆍ민주적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다. 총선을 약 1년 앞두고 남베트남에서는 바오 다이가 물러나고 공화제가 선포되어(1955.10.26) 미국의 지지를 받은 고 딘 디엠이 대통령에 취임해 있었다.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바오 다이 정권의 반민족ㆍ무능ㆍ부패ㆍ괴뢰성에 몹시 실망하여 남베트남에 확고한 민족주의적 반공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했던 미국은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네바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54년 7월 7일 미국에 망명 중이던 고 딘 디엠을 바오 다이 정부의 수상으로 앉혔다.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미국 내에서 강력 완강한 반공지도자로 인정된 디엠은 제네바회의 중 협정체결 후 베트남 정부 수상으로서 사실상 미국의 베트남정책을 대행했으며 제네바협정 반대, 총선 거부는 디엠 수상의 이름으로 주장되었다. 대체로 디엠 수상을 통해서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베트남정책은 전쟁 종결, 제네바회의(한국에 관한 회의는 협정 없이 유산했다), 선거에 대한 태도 등 베트남 휴전 1년 전에 있은 한국에서의 미국정책의 연장 선상에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어디서나 비슷한 상황에서 언제나 문제되는 일이지만, ‘자유ㆍ민주적’선거는 사회민주주의체제와 자본주의적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에서 각기 민주와 자유의 개념과 내용과 실태가 다르다는 데서 베트남에서도 문제되었다.

다만 한 가지 베트남의 특수상황으로는 서구식 개념과 방법에 의한 ‘자유ㆍ민주적’선거를 실시했더라도 베트남의 반공적 남부가 이길 수 있었겠는가 하는 가상적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당시의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만약 (제네바 협정에 의거해서) 남ㆍ북 베트남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면 아마도 주민의 80퍼센트는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인도차이나 전문가들과 얘기해보거나 편지를 교환해본 일이 없다”(회상록「변화에의 신탁」)고 말한 것은 중요한 판단자료가 되어준다. 이 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 총선을 감시할 제네바회의 의장국인 영국의 처칠에게 보낸 서한에서 표명한 두려움이다. 당시의 호치민이 남ㆍ북 베트남은 물론 인도차이나 전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존경받는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와 세계가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었다. (북베트남) 정부의 총선실시 촉구성명은 언제나 ‘자유ㆍ민주적’선거를 주장했다. 호치민은 쌍방 체제의 차이를 떠나 서방 선거방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당시의 객관적 정세는 부인할 수 없다.

북베트남에서 많은 가톨릭교도가 협정 후 남쪽으로 내려온 사실을 들어 이와 같은 정세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남으로 이동한 수는 86만 명이고 그중 60만이 가톨릭교도로 추산된다(Bernard Fall, The Two Viet-Nams).

이것은 제네바 휴전협정이 쌍방 군대가 이동ㆍ재집결을 완료하는 기간, 즉 300일 이내에 이주를 원하는 주민의 자유이주를 돕는다는 조항에 따라 허용된 것이다. 남하한 86만 명 중 가톨릭이 아닌 나머지 약 26만 명은 주로 프랑스 식민지 행정기관 및 프랑스 군대의 베트남인과 그 가족들로 알려져 있다(같은 책).

새로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려는 체제에서 그에 반대하는 종교신자와 민족해방전쟁에서 식민지군대에 가담했던 반민족적 성분의 원주민이 떠났다는 것이 과연 호치민에 대한 지지의 손실을 뜻하는 것인지는 측량하기 어렵다. 그것은 북베트남 경제의 일시적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새로운 체제에 대한 민중의 성분을 처리하는 정치적ㆍ사회적 사업에 도움을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 가톨릭 주민의 수송은 프랑스 호(號)와 그것을 지원한 미국의 함대 소속 함정이 담당했다. 북베트남은 이주 희망자의 이동을 억제하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베트남 휴전 감시위원단의 공식 보고서는 북베트남 정부가 위원단의 요청에 따라 기한이 지난 후, 이주 희망자의 이용을 위해 그 기간을 1개월간 더 연장하는 조치를 취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3) 정치ㆍ군사적 상황

베트남식민지전쟁, 제네바회의 개최, 협정 성립 그리고 총선거 실시의 유산에 이르는 1949년부터 56년까지의 모든 베트남 사태는 그것과 결부된 아시아 정치ㆍ군사적 상황을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에 대한 검토는 크게는 당시의 세계정세와 아시아지역에서의 격변하는 사태 발전, 그리고 주로 미국의 아시아정책으로 좌우되었다. 이것은 너무도 광범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별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개입

정치ㆍ사상적 전환

베트남에 대한 미국정책은 중국 대륙의 사회주의화와 한국전쟁으로 결정적인 전환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시아 식민지체제의 청산이라는 기본구상의 일환으로, 일본 식민지 조선(朝鮮)문제의 해결방안처럼 베트남을 일정한 기간의 미ㆍ영ㆍ중 3국 신탁통치를 거쳐 프랑스 식민지에서 완전 해방 독립시키는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인민에 대한 혹독한 제국주의ㆍ식민정책을 비난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처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개석과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성안시킨 신탁통치안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인도차이나가 소련의 영향력 밖에 있으므로 신탁통치국으로서의 제의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진행 과정에 따라 변모해 대일본전쟁이 가열된 1943년경에는 일본에 대한 중국 전선의 유지를 위해 인도차이나 ‘전부’(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한)를 중국에 ‘증여’하겠다고 장개석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인도차이나인은 결코 중국에 동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으로 이를 사양했다(Henry A.Wallace, Toward World Peace, p.

97). 장개석의 이 대답은 호치민이건 누구건, 베트남인은 민족적 주체성을 어느 강대국에게도 양도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기에 들어오면서 베트남정책은 적극적인 개입으로 수정되었다. 그것은 1949년 중국 대륙의 사회주의화, 소련과의 동서양에 걸친 권력투쟁, 한국전쟁, 동남아의 경제ㆍ군사적 중요성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

결정적인 전환은 1947년 트루만 대통령의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의 제기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한 미국은 모든 식민지해방 민족투쟁도 공산주의로 간주하게 되었다. “자유민에 대한, 외부 지원을 받는 전복행동은 어느 곳을 불문하고 미국의 단호한 반대를 각오해야 한다. 그와 같은 정세에 직면한 자유민은 군사력을 포함한 미국의 모든 형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트루만 독트린은 베트남의 반불(反佛) 식민지항쟁 민족해방투쟁도 전적으로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자본주의) 전쟁으로 비치게 되었다. 이 정치ㆍ사상적 전환은 필연적으로 군사 경제적 정책전환을 수반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그 가장 구체적인 정치적 의사표시는 1950년 2월, 프랑스의 보호국에 지나지 않는, 엘리제협정에 의거한 바오 다이 정권을 영ㆍ불과 더불어 공식 승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군사ㆍ경제적 개입

1949년 11월, 프랑스군이 베트민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미국의 지원이 약속됐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48년 동구에서의 대소ㆍ대공(對共) 대결 군사체제인 북대서양방위조약(NATO)의 형성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군사동맹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또 1950년 2월의 베트남ㆍ라오스ㆍ캄보디아의 국가승인으로 미국은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이들 ‘국가’에 직접 제공할 수 있는 길을 텄다. 프랑스를 통한 간접 방법과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직접 원조의 ‘합법적’방법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승인 직후인 5월에는 이 3국에 대한 경제원조 제공이 발표되었고, 12월 23일에는 미국, 프랑스 그리고 인도차이나 3국들 대표 사이에서 ‘방위 및 상호원조에 관한 협정’이 조인되었다. 한국전쟁 발생 전후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인도차이나전을 위한 미ㆍ불ㆍ영 3국 군사회담이 개최되었다. 중국이 북베트남과 원조협정을 조인한 것은 통일선거의 실시가 불가능해진 지 3년이 지난 1958년 3월 31일이다.

이 결정적인,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NATO를 통한 전면적 지원과 표리를 이루고 시작되었다.

북대서양동맹회의는 세계 어느 부분에서든지 직접 또는 간접 침략에 대한 저항은 자유세계의 공동안전에 대한 불가결한 기여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12월 6일 파리회담에서 인도차이나(베트남)의 군사 및 정치 정세에 관한 최근의 사태를 검토한 본회의는 프랑스 군대가 ‘공산침략’에 대해서 벌이고 있는 용감하고 장기적인 투쟁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며,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남아국가들의 저항은 본 동맹의 목적이나 이념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베트남에서의 프랑스전쟁은 본동맹(NATO) 가맹국가 정부들로부터 지속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NATO 이사회 결의, 1952.12.7).

이로써 베트남전쟁이 기본적으로 프랑스 식민전쟁이라는 성격, 베트남 인민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투쟁의 계속적인 한 단계라는 사실, 한국과 같이 국경을 넘은 침략전쟁과는 다른 성격…… 등이 무시되었다. 이 순간부터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세계의 전쟁이라는 해석이 공식화된다. 중공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뒤라는 이 결의의 날짜가 중요하다. 1954년 프랑스군 40여만이 5만 여의 베트남 군대에 의해 디엔 비엔 푸의 비극에 직면했을 때 미국 국무장관 포스터 덜레스는 아시아국가들과 NATO 국가들에 대해서 이미 끝난 한국전쟁에서의 방식에 따라 ‘통일행동’(unified action)을 취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한국전을 체험한 동맹국가들에 의해서 거절당했다.

미국은 부득이 단독행동을 구상해 안토니 이든 영국 수상에게 디엔 비엔 푸에 대한 ‘대량폭격’을 제안했고, 닉슨 부통령은 미군 지상군의 투입을 제안했다. 1950년 10월 10일, 최초의 미국 군사 사절단이 사이공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즉 1950년에서 54년까지 4년 동안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전쟁 지원으로 22억 8,500만 달러를 제공했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이때 미국의 인도차이나전 개입을 반대한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인민의 공공연한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쟁에는 아무리 미국의 군사력을 투입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나는 솔직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로서는 유럽에서의 서독의 재무장계획을 완강히 반대하는 프랑스 정부를 회유하기 위해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식민전쟁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 시기는 중국을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었다는 문제로 미국 국내에 매카시즘의 광적인 반공운동이 휘몰아치고 있을 때였다. 동기와 성격이야 어떻든, 상대가 자본주의자가 아니면 그것은 공산주의자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덜레스 이론이 미국 외교정책을 규정하고 있었다. 냉전과 소련의 핵군력화,중공과의 최초의 대전,한국전쟁,그리고 전후 경제의 촉진제로 이용된 군수생산과 전쟁준비 경제도 이에 가세했다. 따라서 미국의 국가정책이 사실상 군사적 사고방식으로 젖어 있었던 것도 이에 가세했다.

제네바협정과 미국

이와 같은 미국의 군사적 적극개입정책은 모든 국가가 희망하는 베트남전쟁 종결을 위한 제네바회의의 진행을 원치 않았다. 처음 개회식에 참석한 덜레스 국무장관은 며칠 만에 와싱톤으로 돌아가고 에델 스미스 차관이 격하된 대표로 참석했다.

미국은 냉전전략에 따라서 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베트남 휴전 성립에 대비해 1954년 3월 동남아시아방위조약기구(SEATO)의 결성을 추진했고, 협정이 체결된 2개월 후인 9월 8일, 영국ㆍ호주ㆍ뉴질랜드ㆍ파키스탄ㆍ태국ㆍ필리핀ㆍ프랑스ㆍ미국에 의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특히 제네바협정으로 군사동맹 가입, 외국 군원(軍援), 외국 군사기지 설치 등이 금지된 베트남을 포함하는 인도차이나국에 대한 군사적 ‘보호지역’지명조항을 삽입했다.

군사ㆍ경제ㆍ정치적으로 강력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고 딘 디엠의 베트남 정부는 사실상 미국정책의 ‘괴뢰’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부당한 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제네바협정 조항의 이행문제, 특히 총선거 실시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미국의 거부 태도를 대변한 사실은 널리 인정되었다. 미국은 아이젠하워의 사태분석대로 총선을 바라지 않았다. 남베트남의 반공기지로서의 분리가 중국에 대한 미국의 ‘포위ㆍ고립’정책에 이익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 후 미국 정부 내에서도 굳이 부인되지 않았다.

베트남내란의 재발

총선거 실시가 예정된 1956년이 지나면서 남베트남에서는 심각한 내란이 일어났다. 어느 한 시기를 기준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7년경부터 전국 지방에서 정부에 대한 폭동과 테러 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베트콩으로 불리는 민족해방 전선의 출발이다.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된 것은 1960년 12월 20일이다. 소위 베트콩이라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후 60년대에 들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확대되고 북베트남(월맹)과의 전쟁으로 확대됨에 따라서 그 성격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었다. 민족해방전선의 발생ㆍ성장과정에 관해서도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극단적 해석이 생겨났다. 하나는 전적으로 북베트남에서 넘어온 침투 게릴라라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어디까지나 남베트남에서 총선실시가 거부됨으로써 통일을 요구하고 고 딘 디엠 정권의 부패 등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집합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의당시 평가를 종합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베트남의 내란은 제네바협정으로 약속된 총선거가 ‘취소’된 다음해(1957)부터 시작되었다. 고 딘 디엠의 전횡, 무차별적 체포, 정치적 재교육이라는 이름 밑에 늘어난 강제수용소, 지방주민의 강제적 집결수용 등이 심해짐에 따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공산주의자들은 잠시 방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미국 원조에 의한 디엠 정권의 경제정책이 호치민으로 하여금 디엠 정권의 붕괴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됐다고 확신케 하자, 그는 남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폭동에 과거의 동지들이 합세하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다……(Schlesinger, A Thousand Days, p.539).

이것이 대체로 그 원인을 온건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다. 적어도 1957년에서 59년까지의 지방폭동은 이런 성격으로 해석되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1960년 그 세력이 강화되어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자, 그해 9월 월맹은 공식적으로 그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면서 소형무기의 공급을 시작한 것이 여러 가지 경로로 확인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 후 총선이 거부된 직후에 일어난 이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960년쯤에는 1년에 약 2,000명 정도가 북베트남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들 거의 대부분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쪽으로 이주ㆍ이동했던 남부 출신자들이다. 어쨌든 거의 대부분의 베트콩은 남부에서 가담한 자들이었고, 그들의 무기와 장비는 사이공 정부군에게 빼앗은 것들이었다(같은 곳).

제네바협정은 베트남인 군대에 속했으되 북쪽으로 가기를 원치않는 사람이 무장을 버리고 남부에 그대로 거주하는 문을 열어놓았다. 남쪽 출신이거나 남쪽에 가족이 있는 항불ㆍ독립 베트남 군인들의 상당수가 2년 후의 통일을 기다리면서 그대로 평민으로 남쪽에 정착하는 길을 택했다. 이들의 상당부분은 그러나 그 후 디엠 정부의 감시대상이 되었고 통일의 실패로 반정부적 자세를 굳히게 됐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디엠 정부는 총선예정 날짜가 지난 후부터 강압정책으로 치달았다. 앞서 상세히 살펴본 20년에 걸친 남베트남 사회의 혹심한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부패에 곁들인 이 정치적 탄압이 반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데는 온건한 중간적 견해를 가진 논자들이 일치한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 딘 디엠은 이미 1956년 1월 탄압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1월 11일 디엠은 강제집단수용소 설치령을 내려 그와 정부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혹독함에 놀란 미국 정부는 마침내 66년 5월 사이공 주재의 미국 정부 대표기관으로 하여금 베트남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즉 초기의 반정부세력은 공산주의자이기보다는 정치ㆍ종교적 소수파들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하게 했다.

카오다이교(高臺敎)를 구성하는 11개파 가운데 10개파가 디엠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초기의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지세력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또 호아하오교(和好敎)는 1952년에 이른바 사회민주주의당을 형성하여 그들의 정치적 의사표시의 기관으로 삼았다. 이것도 디엠에 반대했으며 56년에 이들은 디엠의 정부군에 의해서 소탕되었다. 카오다이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이 역시 초기 민족해방전선의 주력이 되었다.

세 번째의 소수파인 빈 수옌 파도 같은 입장과 같은 이유로 디엠 정권에 의해 탄압받아 초기의 민족해방전선과 협동했다(Bernard Fall,“Viet Nam in the Balance”, Foreign Affairs, 1966년 9월호).

맺는 말

미국이 베트남 내란을 월맹과 공산주의자의 원조ㆍ지령ㆍ사주에 의해서 시작된 침략이라는 명분으로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하기까지의 베트남 정세는 대체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ㆍ식민주의를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투쟁의 연장 선상에서 고려되어야 할 전쟁이다.

  • 『창작과비평』, 197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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