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상적 변천으로 본 중국근대화 백년사」
2-3. 「사상적 변천으로 본 중국근대화 백년사」(1972년 <창조>, 전논)
-서구문명 극복의 백년
유럽문명에 대한 반격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의 형성으로 일단락되는 중국 근대화투쟁의 사상적 기조는 서구문명의 ‘부정과 극복’이라는 것으로 두드러진다.
이것은 서구문명의 단순한 이식이나 심지어는 ‘서구화’그 자체를 근대화의 목표와 내용으로 여긴 일본, 터키 등을 비롯해 오늘날 후진국 근대화의 일반적ㆍ역사적 유형에 속하는 많은 국가들과 대조적인 가장 핵심적 특성이다. 심지어 같은 사회주의면서도 소련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데 중국 근대화 과정의 사상적 특성이 있다. 따라서 중국 근대화 과정과 결과적 성격은 그것이 서구문명을 낳은 자본주의적 사상에 대한 사회주의적 성격이라는 것만으로는 해석이 끝나지 않는다.
문화의 역사학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유럽문명에 대한 꾸준한 반격과 저항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현대 중국으로 일단락된 근대화운동의 결과도 한마디로 서구문명에 대한 반격으로 비친다.
유럽 문화는 16세기 이후 과학ㆍ기술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킴으로써 군사적 지배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적으로도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의 근대화투쟁은 바로 중국의 반(半)식민지화의 수단이 되어온 이 유럽문명의 군사ㆍ경제적 지배를 거부하려는 지극히 정치적인 저항의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게다가 정신문화의 측면에서 유럽의 신ㆍ구 기독교는 이중의 역할을, 그러나 결국은 자기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중국 농민혁명의 전형인 태평천국의 홍수전(洪秀全) 등과 근대 부르주아 정치혁명의 손문 등을 낳음으로써 일차적으로는 중국 근대화투쟁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유럽사상인 기독교는 유럽 제국주의의 중국지배와 자기를 분리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은 표리를 이루면서 중국 민중에 작용했기 때문에 마침내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부정함으로써만 근대화를 달성할수 있다는 사상적 각성을 일으키게 했다.
이 과정은 중국의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의 변증법적 발전형식으로도 해석되고 어떤 면에서는 토인비의 문명의 역사학으로도 해석된다.
해석은 어떻든 그와 같은 특성의 근거는 중국의 ‘4천 년 문화’ 그 자체에 있다. 근대화 100년을 통해 중국 문화는 표면상 패배를 당하면서도 공격해오는 모든 외래사상에 지배되지 않고 그것을 동화시켜버렸다. 사주(四周)의 민족을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으로 취급한 중화사상(中華思想)은 극히 내셔널리스틱한 성격으로 드러난다. 현대의 국가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 지리ㆍ문화적 상황으로 해서 그것은 내셔널리스틱하고 자기 충족적이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또 하나의 특성은 중국 문화가 유럽의 기독교적 문화나 불교의 인도, 알라 신의 아랍 문화 등에 비해 지극히 현세적이며, 따라서 정치주의적 사상이라고 한다면 중국 근대화투쟁은 이 현세적 선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사상을 토대로 해서 진행되어왔다.
그 정치적 선의 구현으로서의 성왕(聖王)의 이상, 성왕 밑에서의 평화와 대동(大同)의 사상은 많은 변화를 겪은 현재의 중국 민중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위 ‘모택동 숭배’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준다.
이와 같이 ‘자급자족’적이고 긍지 높은 내셔널리스틱한 성격과 현세적이고 정치주의적 성격의 중국사상에, 20세기에 들어와 근대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결부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수용은, 그에 앞서는 중국문명의 그와 같은 두가지 사상의 토대 위에서 이룩하려던 근대화투쟁이 신해혁명(辛亥革命)이라는정치개혁의실패로 좌절을 겪은 단계에서 시작되었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중국 근대화투쟁은 두 차례의 아편전쟁(1840~42, 1856~60)의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충격으로 기폭된 태평천국의 난(1851~64)은 모든 면에서 중국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100년의 근대화투쟁의 기점이 된다.
크게 간추려서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제국주의 침략, 잇따른 패전, 의화단사건, 신해혁명(청조 타도), 공화정부혁명, 5ㆍ4문화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100년의 근대화운동은 외세 지배의 강화와 내부적 사회의 분해작용만을 촉진했을 뿐이다.
4천 년의 자랑스러운 문명이 중국 전통사상만으로나 양무론(洋務論)과 같은 피상적인 서구과학ㆍ기술문명의 도입만으로는 유지ㆍ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자, 중국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외생(外生)사상을 채용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채용
마르크스사상은 그 단계에서 중국이 절실히 필요했던 생산관계(재산의 소유와 분배 관계)의 변혁과 유럽 과학ㆍ기술문명의 사상이라는 점에서 쉽게 수락되었다. 또 중국사상의 비형이상학적 현세위주ㆍ정치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세계관, 실천적 교리, 정치우위 사상과 합치될 요소가 많았다.
바로 이 시기에 레닌이 후진적인 러시아의 조건에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한 거대한 실험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중국인에게는 마지막 남은 가능성으로 비쳤다. 마르크스주의는 삼중의 현대화 기능을 동시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기능으로서 수용되었다. 그것은 ①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100년의 유럽ㆍ일본 제국주의 지배에서 중국 민족의 해방 ② 제국주의와 결탁한 내부 지배세력으로부터의 피압박 민중의 해방 그리고 ③ 이 두 가지의 내외적 해방으로 가능해진 사회혁명과 물질적 혁명의 동시적 근대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삼중적 기능은 4천 년의 ‘아시아적 정체’라는 굴레에서 중국 사회와 인민을 풀어놓아, 전통적 중국 문화와 유럽문화의 변증법적 통합ㆍ고양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중국을 형성할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한 것이다.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묘사했지만, 이상과 같은 중국 현대화의 사상적 과정에서 우리는 그 기본적 자세가 서구문명의 수용ㆍ부정ㆍ극복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마르크스사상의 수용으로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는 동시에 ‘반(反)유럽’의 사상으로 자기를 높이는 역사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상적 기조가 같은 근대화를 이룩하면서도 ‘유럽화’의 길을 걷는 소련ㆍ일본ㆍ터키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때의 후진국과 판이한 오늘의 중국을 낳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리하여 중국 근대화는 ‘반유럽’이라는 반격의 역사적 단계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 문화라는 자랑스럽고 위대한 전통을 사상적 토대로 견지했음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의 중국 지도자들과 그 사회이념이 마르크스사상으로 수정된 중국 전통사상과 문화를 얼마나 아끼고 다듬고 있는지는 모든 방문객이 한결같이 놀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중국 근대화투쟁의 사상적 측면을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소 지루하지만 그대로 인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패했을 때부터 중국의 선진적인 사람들은 서방나라들의 진리를 추구했다. 당시 중국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중국인은 새로운 지식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책이라도 구해 읽었다. 국내에서는 과거를 폐하고 저마다 학교를 세워 서방문명의 흡수에 여념이 없었다. 내 자신이 젊었을 때 배운 것도 이렇게 해서였다. 그것은 유럽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문화, 즉 모든 신학(新學)으로서 당시의 사회학설과 자연과학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봉건적 문화 즉 모든 구학(舊學)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런 신학을 배움으로 중국의 선진적인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가지고 중국은 충분히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당시의 외국으로서는 자본주의국가들만이 진보적이었다. 그들은 부르주아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유럽에서 배워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중국인들도 일본인에게서 배우려고 했다. 당시의 중국인에게 러시아는 후진적이었던 까닭에 러시아에서 배우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아편전쟁부터 20세기 초기에 걸쳐 중국인이 외국을 배운 상황이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가. 제국주의는 서양에서 배우려는 중국인의 꿈을 참혹하게 깨버렸다.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선생은 언제나 학생을 침략하는 것인가. 중국인은 서양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나 중국에 이로운 결과는 없었고, 이상은 언제나 실현되지 않았다. 근대화의 투쟁은 모두 실패했다. 신해혁명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운동을 포함해서 모든 투쟁은 한결같이 실패했다. 나라의 꼴은 날로 악화하고, 그런 정세 때문에 중국인은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의문은 늘고 커졌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러시아인들이 10월혁명을 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를 세웠다. 이때까지는 존재도 없던 러시아의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근로 인민의 혁명적 에네르기가 돌연 화산처럼 폭발하자, 중국인과 전 인류는 러시아인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 순간, 바로 이 순간에서야 비로소 중국인은 사상에서 생활에 이르기까지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 중국인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세계 어느 곳에나 적용될 수 있는 진리를 알게 되었고, 중국의 모습은 그것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제외한 서방 부르주아 문명,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공화국 방식은 그 모두가 중국 인민의 가슴에서 파산해버린 것이다(「인민민주주의 전정(專政)에 관하여」, 1949.6.30).
태평천국—근대화의 사상적 원천
중국 근대화 100년의 역사는 여러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각 단계의 투쟁은 앞 단계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발전의 연속이지만 그 모든 단계를 꿰뚫고 작용한 사상의 계보는 ‘태평천국의 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태평천국은 서양사상ㆍ제국주의가 낳은 아들이며,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반항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근대화투쟁은 크게는 태평천국의 난을 기점으로 한다. 물론 한 민족의 커다란 역사적 과정에 일선으로 격할 수 있는 단결된 시점이란 있을 수 없겠다. 하지만 손문ㆍ모택동을 포함하여 강유위(康有爲)ㆍ양계초(梁啓超)ㆍ이대교(李大釗)ㆍ진독수(陣獨秀) 등 모든 사상적 지도자들이 태평천국혁명 속에서 중국 근대화의 근원과 사상적 전통을 찾고 있는 것이다.
태평천국은 농민혁명이다. 그것은 내부적으로는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으로서, 대외적으로는 반제국주의ㆍ반식민주의의 혁명으로서 모든 근대화사상을 통합한 영원한 전통을 남겼다. 한마디로 태평천국 농민혁명은 중국 근대화를 추진한 모든 사상의 샘(泉)인 것이다.
그것은 중국 역사상 농민전쟁으로서 그 규모가 최대였다는 점에서보다 처음으로 분명한 혁명의식을 가진 것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그 30년 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운동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둘 다 기독교의 외래사상과 토착종교가 혼합된 민간 신흥종교의 비밀결사 형태로 결집된 농민전쟁이었음은 틀림이 없으나, 동학운동은 태평천국의 난처럼 명확한 혁명의식이 없었고,혁명적 실천의전통으로 이어지지못하고 말았다는 데 차이가 있다. 동학운동의 ‘창의문’과 ‘상소’는 어디까지나현 체제를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탐관오리의 숙청에 중점을 두고 있다. 태평천국의 난은 사회제도 그 자체의 부정과 평등ㆍ무계급 사회건설이라는 분명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상발전의 직접적 동기는 외래적 충격이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은 중국 경제를 영국을 비롯한 서양 자본주의의 시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영국의 근대화한 각종 생산품은 중국 농민의 보조적 생활수단인 토착적 수공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아편전쟁 후의 거액의 배상금과 세계 전쟁사상 처음으로 강요된 승리자의 전쟁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던 만주족 지배의 청국왕조가 그것을 농민에게서 거두어들이려 한 정책으로, 중국의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외세에 대한 굴복과 위기는 정치적으로 청조의 권위를 떨어뜨려 만주왕조의 300년 전제에 대한 한족(漢族)의 궐기를 자극했다. 이것은 1911년 손문 등에 의한 봉건적 만족왕조 타도와 공화제 실시의 정치적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아편전쟁을 통해서 중국인은 중국의 학자ㆍ군인ㆍ관료 지배제도의 무력을 통감하게 되었고 이것은 억압된 민중의 사회혁명 사상을 고취하는 결과가 되었다.
양무론의 공과(功過)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충격은 중국인의 마음에 주로 군사적 과학ㆍ기술의 신비주의를 낳게 했다. 이것은 밖으로 서방 제국주의와 안으로 혁명의 압력 사이에 몰린 청조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서양무기에 의한 군사적 현대화와 공장ㆍ도로를 세우는 물량주의적 발전을 하기만 하면, 밖으로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안으로 민중을 계속 억압ㆍ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상의 양무론을 낳게 했다. 이와 같은 양무론적 사상은 오늘날에도 근대화를 서두르는 많은 나라의 정권이나 지도자들이 빠져 있는 하나의 사상적 유형이다. 양무론은 그 자체로는 구질서의 유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을 서양사상에 접하게 하는 기회를 줌으로써 구질서를 부정하고 개혁의 에네르기를 발생시키는 ‘역사적 역할’을 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혁명의 관계는 중국 특유의 형태로서 정치적 근대화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흔히 오늘날에도 ‘근대화 독재’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예속국가에서의 외세의 ‘강자정책’이다. 태평천국혁명이 거의 결정적으로 기진맥진한 청조와 그 부패한 전제적 지배계급의 숨통을 끊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영국ㆍ프랑스 등 외세는 농민혁명정권에 대한 초기의 묵인 태도를 버리고 그들의 전통적인 ‘강자정책’(Strong Man Policy)으로 중국 지배를 강화했다. ‘스트롱 맨 폴리시’란 “외국의 명령이나 지배를 수락할 정도로 충분히 약하되, 국내의 민중에 대해서는 명령과 지배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자”를 골라 그를 지원함으로써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지속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외세의 중국 지배 방식은 청조 말기의 이홍장(李鴻章)에서 장개석으로 끝나는 20세기 중엽까지의 중국 정치를 특징 지은 추악한 군벌정치의 본질이다. 그러나 외세로의 예속 및 민중의 탄압과 착취를 토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스트롱 맨 폴리시’와 군벌지배정치에 대항하는 근대화사상은 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미완의 혁명’투쟁으로 금세기 초기에 구체화되었다.
중국의 근대화사상은 1919년에 일어나 오늘의 중국을 이끈 주동 역할을 담당한 문화혁명을 제외하면 ‘농민비밀결사 신앙의 이념화’라고 할 수 있다. 하긴 5ㆍ4문화운동도 지식인에게서 출발했으나 농민 지향적이었다는 점에서 예외라고 할 수는 없다.
기독교사상의 토착화
기독교사상은 중국 근대화의 불을 질렀으나 불행하게도 결국 그 불에 타죽은 셈이 되었다.
18세기 중엽에 들어오기 시작한 가톨릭교와 훨씬 뒤에 들어온 신교는 사회사업의 측면을 떠나 근대화의 사상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 역할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유럽에서 종교혁명을 겪은 가톨릭교는 유럽 사회 변화에 대해 가장 수구(守舊) 저항적인 사상을 대표했던 만큼,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도 신자를 획득하고 교세를 펴려는 데는 열심이었던 반면 중국의 보수적 정치ㆍ사회ㆍ사상 구조와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순응 태도였다. 구교가 우선 왕실과 지배계급에 접근하여 그들의 애총을 받게 된 포교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와는 반대로 신교파는 다만 중국인을 ‘몽매한 이교도’로 보았으며, 중국인을 열등한 민족으로만 본 듯하다. 중국 사회의 모든 잘못과 결함은 그것이 빈곤이든 무지든, 부인의 전족(纏足)에서 가족제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원인은 신교의신을 믿지 않는 탓으로 귀결지었다. 따라서 중국인 개종자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정신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의 사상이나 실천면에서도 전통적인 자기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에 반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신교는 중국에서 단순한 신앙이기보다 하나의 반역 혁명사상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로 이 사상적 자세가 전통적으로 억압되어온 농민들 사이의 비밀결사와 결합해,관료ㆍ지주ㆍ군벌의 지배계급과 대립함으로 인해 박해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럴수록 종교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었다. 아편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화남지역에서 일어난 대기근의 재액으로 농민의 혁명 기운이 폭발점에 가까워지고 있을때 들어온 신교는, 가톨릭의 위계질서에 반대하는 구조로, 굶주리고 짓밟힌 중국 농민에게 평등과 우호의 강력한 사상적 밑거름이 되었다.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파괴사상으로 발전했다.
이 유럽 신교와 토착종교 및 잡다한 비밀결사의 이상한 결합이 ‘상제회’(上帝會)가 되고, 후에 태평천국이라는 정치적 목적의식이 짙은 농민 종교세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과 조건이 태평천국의 절대적 평등주의 사상을 낳게 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 종교적 사상의 역할을 평가하는 데는 다소의 이견이 있다. 태평천국 농민전쟁 기간에 홍수전ㆍ이수성(李秀成) 등 농민 지도자와 행동을 같이했던 영국인 린들리(Augustus F. Lindley)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태평천국』(Tai-Ping Tien-Kwoh: The History of the Tai-Ping Revolution)의 전 권을 통해서 종교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태평천국의 아들인 주덕(朱德)은 “그것은 중국 역사상의 모든 사회변동과 마찬가지로 정치ㆍ경제적인 성격의 것이며, 종교적 색채는 다만 우연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하고 있다(Agnes Smedley, The Great Road, The Life and Times of Chu Teh). 동학운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역시 한 시대의 농민의 물질적ㆍ사회적 조건이 동기이고 종교사상은 하나의 추가적인 응고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1851년에 일어난 태평반란은 순식간에 수륙 양군을 합쳐 100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불어 64년까지 14년 동안 광서성(廣西省) 동부에서부터 화북의 천진(天津)까지를 그 치하에 두는 일대 농민정권을 수립했다.
대동사상(大同思想)의 근대적 표현
태평 농민반란이 이토록 급속한 혁명에 성공한 이유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중국 근대화의 사상적 요소의 전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은 진격하는 곳마다 관리, 지방토호, 지주, 관료적 학자, 고리대금주를 말살하고, 조세부(租稅簿)ㆍ전지(田地)문서ㆍ차용증서 등을 불살랐다. 산업을 몰수하여 도시민에게 분배하고 토지분배를 강행함으로써 도시 수공업자와 농민의 지지를 얻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기의 토지ㆍ가옥들을 팔아 현금을 교회단체의 공고(公庫)에 넣고 그 대신 의식(衣食)의 지급을 보장받는, 일종의 공산사회를 꾸렸다. 남경에 도(都)를 정하고는 ‘천조전무(天朝田畝)제도’를 시행해 원칙적으로 지주의 토지소유권을 부정하고, 노비ㆍ창기(娼妓)를 해방하여 계급ㆍ신분제를 폐지했다. 앞서 인용한 린들리의 목격 기록인 그 저서에 의하면, 100년 전 중국 사회에서 이루어진 이 신분제 폐지와 남녀평등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실감나게 느낀다. 공업생산 면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고 자유경영을 허가하는 한편, 세금을 감함으로써 무역은 급속히 늘고 경제는 안정되고 아편무역은 한때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중국의 전통적 사상인 ‘대동’(大同)의 이념을 전면적으로 실천한 중국사상 유일의 혁명이다.
이것은 54개의 도시로 구성된 ‘유토피아’섬에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꿈꾸어보았던 공상적 사회주의 사회를 철저하게 그리고 동양의 방대한 대륙 위에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로버트 오웬이 태평천국보다 약 20년 앞서 아일랜드에서 꿈꾸어본 사상과 비교해도 그렇다. 거의 같은 시기이면서도 지식인의 자기만족적인 기독교적 ‘애타주의’(愛他主義)에 근거한 서양의 하향적 개혁과, 민중 에네르기의 폭발로 상향적 개혁을 지향하는 중국 농민운동의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 상ㆍ하향의 근대화사상의 차이는 20세기에 들어 이홍장ㆍ손문ㆍ장개석의 그것과 모택동의 그것으로 대립되는 사상으로 계승 발전된다.
농민운동의 지도자들은 중국 남부지방의 객가(客家)라고 불리는 최하층 천민의 신분에서 태어나 태평천국의 ‘천왕’(天王)이 된 홍수전, 광서성의 숯(炭)구이 인부 출신인 양수청(楊秀淸), 역시 광서성 빈농 출신인 이수성 등이었다. 근대화운동 지도자의 이와같은 출신 성분은 그 후 공산당에 의한 혁명운동의 중요한 지도적 사상으로 정착한다.
물질만능주의에서 제도ㆍ문화개혁으로
중국 근대화운동도 20세기에 접어들려는 무렵부터 현재 우리나라가 빠져버린 것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그것은 꾸준한 근대화 정신의 발전이며 심화 과정이었다.
양무론과 변법(變法)운동이 그것이다. 이 사상적 발전도 각각 외적 충격에 대응하는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아편전쟁에서 영ㆍ불의 근대적 군대의 위력에 눌리고 태평천국의 농민군에 의해서 왕조 상비군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낀 지배계급은 그 모든 원인이 군사력과 과학ㆍ기술의 후진성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주족의 독재왕조는 태평천국 이래 강력해진 한족의 민족독립투쟁을 억압하기 위해서도 군대의 근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만주왕조와 한인 관료ㆍ군인 계급은 태평천국난이 아직 한창인 1860년대부터 80년경 사이에 이홍장 등으로 하여금 영ㆍ미ㆍ불ㆍ독 등의 정치ㆍ경제 이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신무기를 들여오게 했다. 그리하여 무기제조 공장과 조함(造艦)시설이 들어오고 영ㆍ불군 고문단과 교관에 의한 서양식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처음으로 천진(天津)–북경 간 철도를 부설하는 한편, 광산ㆍ제철ㆍ방직ㆍ전신ㆍ우편사업들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무기의 근대화와 군사체제의 강화는 주로 그 지배계급의 연명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차관과 기계의 대가로 중국의 외국상품 시장화와 경제의 매판화, 세관과 산업의 외국자본으로의 일체화를 허용하는 한편, 러시아까지 곁들인 제국주의 세력에 영토와 정치적 주권을 양도하는 온갖 조약에 서명, 그것을 근대화로 착각한 것이다. 이것이 양무론으로 알려지는 피상적 근대화사상이다.
이와 같은 근대화의 사상적 도착현상은 당연히 그 반작용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그 본격적인 사상적 확립도 또 하나의 외부 충격을 거쳐야만 했다. 청ㆍ일 전쟁은 양무론에 의한 무이념적인 ‘부국강병’이 실제로는 얼마나 전근대적인 사상인가를 알려주었다.
미개한 작은 섬나라로 야만시하던 메이지유신 후의 일본에 의한 참패는 근대화사상의 근본적인 반성의 물결을 일으키기에 족했다. 식자들은 일본에 의한 패배는 군함과 대포와 철도의 후진성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모든 사회제도의 정체성과 모순 때문임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 정치ㆍ사회ㆍ문화적 전면개혁이 선결조건이라는 주장이 일반화되었다. 이로써 태평천국 이후 반세기 만에 근대화사상은 그 핵심을 다시 찾은 것이다. 온갖 수모와 굴욕의 길을 거쳐서.
보수적 지배계급은 이 여론에 못 이겨 마침내 교육ㆍ행정ㆍ예산ㆍ조세ㆍ과거(관리등용)ㆍ출판ㆍ언론 등에 대한 근대화 개혁을 약속했다. 이때가 1898년 무술(戊戌)의 해였기 때문에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 부른다.
변법사상은 본질적으로는 유교적 도덕주의의 개량(수정)주의적 변형이었다. 그나마 만족왕조와 한인 지배계급은 몇 달이 안 가서 원세개(袁世凱)를 끌어내어 쿠데타를 일으켜 혁신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보수정권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무술혁신은 100일 만에 실패했다. 그러나 근대화사상은 이 정치 반동으로 죽지 않고 오히려 20년 후 5ㆍ4운동으로 그 전통을 이어 확대, 재생산된다.
봉건제도ㆍ사상의 배격
중국 근대화운동은 그동안 사상적 개조의 분야를 제외하고는 모든 측면에서 모든 시도를 다해보았다. 그러고도 중국 사회의 근대화는 이루어지기는커녕 더욱 심각한 사회적 분해의 길을 재촉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러ㆍ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무산자혁명,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제국의 중국 식민지화 등의 외적 압력이 작용함에 따라 내부적으로는 1900년의 절망적 배타주의적 표현인 ‘의화단사건’, 1911년 손문 등에 의한 청조 타도와 공화국 수립의 ‘신해혁명’등 역사적인 정치ㆍ사회적 사건이 일어났다.
신해혁명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수립하고 한족의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중국 근대화 세력의 일대 승리를 이루었으나, 보수ㆍ군벌과 그들을 통해서 스트롱 맨 정책으로 중국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제국주의의 작용으로 다시 끝없는 내전과 혼란 속에 빠져들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방안으로 식민지해방ㆍ민족자결을 내세운 윌슨 14개 조항에 희망을 걸었던 중국 인민은 또 한 번 유럽과 유럽화한 일본에 배신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중국 영토 내 권익을 찬탈한 일본제국주의는 일본과 서구자본의 앞잡이로 화한 군벌 간의 이간책으로, 사실상 중국 일부를 일본의 식민지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22개조 최후통첩을 외국자본의 괴뢰인 단기서(段棋瑞) 정권에 들이대어 조인하게 했다.
1919년 5월 4일 북경대학 교수와 학생이 선봉에 선 전국적 대항의(大抗議)운동은 그 성격상 정치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운동은 전국의 상인ㆍ공인(노동자)ㆍ농민에게 확대되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 민족의 모든 정치ㆍ사회ㆍ경제적 패배가 중국의 봉건적 문화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구국운동은 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 외세의 괴뢰인 반인민적 통치계급으로부터의 인민해방이라는 이중의 정치투쟁과 사회와 민족사상의 전면적 개조를 요구하는 격렬한 문화운동으로 심화되었다. 이것이 5ㆍ4운동과 그 후의 사상적 방향이다.
문화혁명은 사실 청조의 전제체제가 무너진 1911년을 전후해서 움튼 것이다. 5ㆍ4운동은 정치적 실천을 수반한 민족개조운동으로서의 시발점으로 간주된다.
이때부터 근대의 사상적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다. 선진국의 모든 사상이 밀려들어오고, 지식인은 선진사상을 농민에게까지 파급시키기 위해 닥치는 대로 번역ㆍ출판했다.
이때의지식인들이 얼마나 이 근대화 정신의사명감에 불타 있었는가는 임서(굟성)라는 문학자가 혼자서 영서 93권, 불어책 25권, 미국서적 19권, 러시아어책(露語書) 6권을 번역ㆍ출판한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Simone de Beauvoir, La Longue Marche).
변법운동의 지도자 강유위ㆍ양계초 등의 사상적 제자인 이대교ㆍ진독수ㆍ호적(胡適)ㆍ노신(魯迅)ㆍ채원배(蔡元培) 등은 이 시대의 중심인물들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 30대의 청년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잡지『신청년』(新靑年)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5ㆍ4문화운동은 민족의 운명이나 근대화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행동의 불을 질렀다.
그런 청년 가운데 북경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는 모택동이 있었다. 그는 “모든 행동적인 청년운동이『신청년』의 영향을 받고 조직되었다. 나는 그때 이미 강유위ㆍ양계초의 사상을 극복하고 진독수의 글과 사상에 빠졌다”고 술회한다(Edgar Snow, “Days in Changsha,”Red Star Over China, 제4장). 이대교와 진독수는『신청년』을 통해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혁명의 의의를 중국 지식인에게 전달했다.
과학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러나 5ㆍ4운동의 사상적 기조는 부르주아 데모크라시와 ‘공가점(孔家店, 유교) 타도’와 사이언스였다. 그와 함께 모든 사상이 무제한 경쟁에 참가했다.
구신분질서의 유지수단이며 구윤리의 전달수단인 문어(文語)를 없애고 ‘평민’에게 문화를 돌려주기 위해 호적은 처음으로 백화(白話,구어체)신문을 발간했다. 노신은「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백화로 발표했다. ‘문화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그것은 ‘혁명의 문학’운동으로 자기발전을 계속한다. 표현형식도 그랬지만 표현수단으로서도「광인일기」는 백화로 씌어진 근대문학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실용주의ㆍ합리주의ㆍ과학주의의 강한 조류에 따라 존 듀이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근대화사상으로서 그의 철학이이 시기의 중국 사상계를 주름잡은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헉슬리의『진화론과 윤리』는 번역ㆍ출판되자마자 전국 학생의 ‘필독서’가 되었고, 스펜서, 스튜어트 밀, 애덤 스미스, 흄, 러셀 등의 사상이 근대화를 대변했다. 특히 다윈의『진화론』은 구사상과 구윤리에 대한 무기로서 중국 지식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듀이, 러셀 등을 포함해서 당시의 이름 있는 서구ㆍ미국의 석학ㆍ사상가들은 이들의 초대로 몇 해씩 중국을 방문, 중국 지식인ㆍ학생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 전국 각지에서 강연을 했다.
서구사상의 극복
그들이 데모크라시와 리버럴리즘, 프래그마티즘과 형이상학적 관념론에 머물러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사상적 변동도 역시 외적 충격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1920년대 말부터 본격화한 만주와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지식인들에게 지식 이상의 것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행동주의를 낳게 했다.
중국 본토가 일본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고 중국 사해(四海)가 붕괴 과정을 줄달음치고 있는데도 공산당 토벌작전에 군대를 투입한 장개석 국민당 정권이 오히려 일본과의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중국 지식인들은 행동을 강요당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중국 인민의 수천 년래의 염원인 사회개혁을 단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철저한 항일ㆍ구국투쟁을 요구하는 공산당의 호소에서 5ㆍ4정신의 추동력을 발견했다. 소비에트혁명의 성공과 1921년 7월 1일의 중국공산당 창설, 그리고 5ㆍ4문화혁명의 지도자들이 마르크시즘에서 중국 근대화의 이론적ㆍ실천적 방법을 찾게 된 것이 이에 가세했다.
서구문명의 이념인 자본주의적 지식과 사상은 또 한 번 중국인의 준엄한 실천적 시험대 위에 올려놓아졌다. 그리하여 일본 침략의 확대와 중국 사회의 처참한 분해 과정을 저지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러시아의 토양을 거쳐 들어온 마르크스주의가 채택된 것이다.
그동안에도 많은 지도적 서구 지식인들은 중국의 근대화와 정치적 독립은 ① 질서 있는 정치의 확립 ② 중국인이 지배하는 산업 개발 ③ 교육의 보급을 이룩하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개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되풀이 강조했다(Bertrand Russel, The Problem of China —Prospect of China’s Future, London, 1922). 그러나 러셀과 듀이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혁명과 마르크시즘의 길을 선택했다. 누가 옳은지는 역사만이 판가름할 것이지만, 판가름은 이미 난 것 같아 보인다.
항일전과 그 후의 과정은 세상에 하나의 경이로 비치고 있는 현대 중국의 건설과 함께, 북경을 북미합중국의 제38대 대통령 닉슨이 찾아가는 것으로 일단 막이 내린다.
닉슨이 그곳에서 만난 모택동과 주은래와 비행장에 마중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5ㆍ4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110년 전 성왕과 백성이 일체가 되는 ‘대동’사상을 품고 공상적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태평천국의 손자이기도 하다.
- 『창조』, 197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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