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모택동의 교육사상」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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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1-2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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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모택동의 교육사상」(1976년 『대화』, 우상)


-사회주의혁명에서 모택동의 위치


 


모택동이라는 사람만큼 비방과 찬양의 극과 극 사이의 다양한 평가를 받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 가장 흉악한 의미로서의 스탈린ㆍ히틀러의 재현이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방대한 권력을 쥔 권력자로서 유례없이 인간적이고 겸손한 지도자라는 평도 있다. 극에서 극까지의 선과 악의 모든 자질로서 비쳤다는 사실이 모택동의 인간적 ‘큼’(반드시 위대성이라는 뜻이 아니라)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회주의혁명에서 모택동의 역할과 위치를 평가하려는 작업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 첫째 이유는 물론 모택동의 사망이 바로 몇 달 전의 일로서, 아직 그가 ‘역사적’인물이기보다는 우리의 ‘동시대적’인물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중국 사회주의혁명이 현재 이 순간에도 이른바 ‘웅장한 인류사적 실험’으로서 진행 중에 있다는 이유에서다.


모택동 자신이 만년에 프랑스인 방문객에게 실토했듯이 자신의 사망 후의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방향과 변화에 대해서 그 자신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혁명 그 자체의 과정도 가변적이며, 따라서 모택동에 대한 평가도 가변적이다. 이에 보태어서 어려움을 더하는 요인은, 중국 사회주의혁명은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틀 속에서 평가되게 마련인데, 단적으로 중소관계의 극적 변화로 예증되듯이 그 변화관계는 아직 역사에 남겨진 거대한 숙제다. 그것은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미래, 운동의 틀로서의 중국 혁명과 세계혁명이라는 이중구조로 구성되는 ‘2원 2차 방정식’이며 그 변수의 값은 아직 확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유보를 전제하고서도, 모택동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공인받고 있는 에드가 스노가 평하듯이, 교사ㆍ정치가ㆍ전략가ㆍ철학자ㆍ시인 등의 다양한 자질을 지닌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때에 이런 말이 유행했다. 즉 모택동의 선배격인 마르크스ㆍ레닌ㆍ스탈린 등과 대비하면서,마르크스는 혁명의 철학을 창출했지만 혁명은 못 했고, 레닌은 혁명은 했으나 사회주의를 건설하지는 못했고,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은 했지만 사상(인간) 혁명은 못 했는데, 모택동은 그 세 선배의 한 것과 못한 것을 아울러 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현 그대로는 지나친 과장이고 부분적으로는 진실이기도 한 그런 평이다. 문화혁명의 막이 내리고, 모택동의 반세기에 가까운 중국혁명 지도자로서의 생애가 끝난 지 몇 달이 되지 않은 현재, 이미 부분적으로는 모택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역사에 점하는 그의 무게가 클수록 우리는 그에 대한 판결을 시간(역사)에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스노의 모택동 평의 첫째가 ‘교사’인 데에는 그가 교사 출신이라는 이유 이상의 뜻이 있다. 모택동 자신이 자신을 평한 측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교사’라는 칭호를 그는 가장 좋아했다. 다른 모든 칭호를 제쳐놓고 교사로 불러주기를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교육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 속에 모택동의 다른 모든 측면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과 우리에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대혁명’의 전모가 그것으로 해명되기 때문이다. 즉 모택동이 마르크스ㆍ레닌ㆍ스탈린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도적 혁명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사상)혁명을 가능한 것으로 보고 또 실제로 인간의 관념을 혁명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 여러 가지 시도의 종합적 표현이 ‘문화대혁명’이며, 문화혁명은 이론만으로만 있던 것을 5억, 6억 또는 8억의 인간에게 적용한 대사업인 것이다. 이 공간의 대실험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견해는 구구하다. 인류 역사상 있어본 일이 없는 엄청난 시도이고 소위 ‘인간성’이라는 이름으로 본질적으로 고정, 불가변하다고 생각해온 관념과 신앙에 대한 거대한 도전인 까닭에, 세상은 지금 다만 놀라움으로 중국을 바라볼 뿐이다. 모택동의 이 실험과 도전의 수단은 교육혁명이다.


 


모택동사상과 스탈린주의


 


문화혁명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되풀이 되었고, 그 한 측면, 한 사례 같은 것이 많은 이론가와 중국 방문자들에 의해서 설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코끼리의 전체상이 아니라 꼬리 하나, 발톱 하나, 다리 하나의 묘사인 감이 있다. 이처럼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이해하기 어려운, 또는 어려웠던 이유는 대개 소련혁명, 특히 스탈린주의의 이론과 실천 과정을 사회주의혁명의 준거로 삼은 데 있지 않나 생각한다. 실제로 서구나 그밖의 사회, 심지어 소련과 동구 공산국가들까지를 합쳐서 많은 이론가, 특히 마르크스사상과 사회주의이론에 깊은 지식이 없는 일반 지식인들은 모든 ‘사회주의혁명’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그것을 건설한 스탈린의 이론ㆍ실천 방법,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구체적 사실의 종합을 토대로 해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평가와 판단의 재료가 우선은 그것뿐이고, 또 토대에 제일 가까운 시약(試藥)이었으니까.


그러면 종래의 마르크스혁명 이론과 그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스탈린주의와 모택동의 문화이론은 무엇이 다른가? 종래의 이론으로는 물질적, 즉 경제사회적ㆍ제도적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면 사회주의는 실현되고 그 후 소위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가 구자본계급에 대한 독재(무산계급 전체를 위한 그리고 그에 의한)를 하기만 하면 사회주의를 건설해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혁명이 필요 없고 그것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산수단을 개인적 소유에서 사회적 소유로 바꿔 놓으면 물질적 발전과 사회적 소유의 하부구조의 ‘반영’인 상부구조, 인간의 의식도 자연히 사회주의적 형태로 전환(또는 변질)한다고 생각했다. 정치, 사회,문화제도,인간의식 등 이른바 그 사회의 소유 형태(방식)의 보호ㆍ유지ㆍ지속을 위한 제반 제도ㆍ형태는 경제제도의 변혁으로 자연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경제적 사회주의가 완성되면 그에 따라서 과거의 지배계급이던 부르주아 계급도 없어지고 또 제도적 혁명 후 구지배계급을 지배하던 계급인 무산계급도 동시에 지양(폐기ㆍ폐절)된다는 소위 ‘계급소멸론’이 그것이다.


스탈린은 이 이론에 따라 1936년의 소위 ‘사회주의 헌법’의 제정과 동시에 소련에는 낡은 지배계급도 새로운 지배계급도 다 같이 없어진 ‘무계급사회’가 되었다고 소리 높이 선언했던 것이다. 스탈린과 그 후 흐루시초프와 현재의 소련 지도세력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여러 가지 양상을 보면,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그것을 토대로 한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 및 부의 사회주의적 분배, 즉 물질적 발전에 대한 공산주의적 신앙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사상ㆍ의식의 측면을 경시한(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지난 얼마 동안 훨씬 자유로워진 소련 내의 외국인 여행을 통해서 알려지는 단편적인 기행문ㆍ보도ㆍ견문담에 의하더라도 당 고위층의 사치생할, 정부 및 기술관료들의 독선적 관료주의와 출세주의, 그들의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상대방에 못지않은 유흥적 생활양식, 모든 활동 분야에서 소득의 상당히 심한 격차, 생산 의욕을 자극하기 위한 물질적 보수의 다양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돈을 위한 매춘행위, 봉사에 대한 팁의 요구, 암시장, 전체의 복지와 발전을 위하기보다 자기와 자기 가족 위주의 이기주의, 그런 사회현실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알코올 중독자와 범죄자의 증가 등,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는 아주 역행하는 현상이 심화하는 듯한 인상이다. 그 결과는 공동의 목적 의식을 상실하고 계급적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계층적 격차의 확대(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질라스의 ‘신계급’이겠지만), 일반 대중과 지도층의 일체감 상실, 사회적 결정에서 대중의 소외와 인간의 무력감에서 오는 현실도피, 무관심, 생활목적의 상실, 따라서 풍부해지는 물질적 생활 속에서의 인간소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솔제니친이나 사하로프의 고발은 바로 이런 객관적 현상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된다. 다만 그와 같은 현상이 물질 제일주의, 즉 자본주의적 요소의 증대로 해서 심화되었다는 소련의 특수 현실을 생각할 때, 과연 솔제니친이 주장하듯이 서구식 생활양식이나 자본주의 경제이론의 도입으로 바로잡힐 수 있다고 솔제니친이 믿는다면 그것은 그의 착각일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선진사회가 입증하고 있다. 솔제니친은 물론 구제도(구러시아의 나로드니키적 그리운 옛날)를 동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그는 소련의 현실에 대한 감각에서 자기분열이고, 이율배반적이라는 평을 받을 만한 이유는 있다. 그가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 속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서구적(즉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실망을 토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여담이 되겠지만, 어쨌든 소련의 그와 같은 현실은 자본주의적 이념이나 제도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혁명을 보완할 인간의 사상(관념)혁명을 안(못)하고 넘어온 소련 사회주의혁명의 필연적인 현실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모택동이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에서 스탈린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도 계급은 있다.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사회주의혁명은 인간의 사상혁명으로 끝나는 것이지, 물질적ㆍ제도적 혁명으로 완수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사회주의 내의 혁명’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소련 사회주의의 변질(모택동에 의하면 자본주의로의 역행)을 분석한 결과다. 모택동이 추진한 변태적으로 비친 많은 정책과 운동은 소련 사회주의의 이 현실과 대치시켜볼 때 훨씬 이해하기 쉬워진다.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의 방법론적 차원이 아니라 본질론적 차원의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사는 태도와 사는 목적에 관한 중ㆍ소 지도자 간의 신앙적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화대혁명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위에서 본바와 같이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의 역행을 방지하고 계속 혁명을 전진시켜야 한다는 혁명관에 입각해 있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의 투쟁 대상으로 일컫는 ‘주자파’(走資派) 또는 ‘수정주의’라는 것이 그런 사람들과 그런 경향과 그런 경향의 사상ㆍ관습ㆍ잔재ㆍ관념ㆍ행동 동기를 총칭한 것이다.


모택동은 소련 사회의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적 역행’을 중국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혁명의 일반적 경향과 중국적 특수ㆍ구체적 표현의 혼합이다.


첫째, 중공혁명으로 타도된 구지배계급의 ‘반동’(이런 용어는 모두 모택동 이론의 용어이지 필자의 용어는 아니다)이다. 이 구지배계급은 현재 중국에 살고 있고 혁명 성공 이후 25년 동안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이 세력과 그 개인의 상당한 부분은 당연한 일이지만 신사회제도와 사상으로의 개조를 거부하고자 자기 계급의 멸망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분자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들의 세력에 관해서는 다음의 인용이 참고가 될 것이다.


 


 


앙드레 말로 그렇다면 중국에는 현재도 수정주의의 계층(급)이 광범하게 존재한다는 말인가?


모택동 상당히 광범위하다. 사람 수는 적지만 영향력이 크다. 그것은 구사회의 지주ㆍ부농ㆍ자본가ㆍ지식인ㆍ신문기자ㆍ작가ㆍ예술가와 그들의 자녀의 일부다.


앙드레 말로 작가ㆍ예술가는 왜 들어가는가?


모택동 일부 작가의 사상은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이다. 우리는 구사회의 그들을 그대로 인계받았다. 우리 자신에게는 예술가ㆍ기자ㆍ작가ㆍ교수ㆍ교원 같은 인텔리가 없었고 그들은 모두 국민당이 남기고 간 것이다(모택동과 프랑스 국무상 말로의 담화, 1965.8.3).


 


 


그들의 수는 얼마나 되었던가? 다시 모택동 자신의 말을 빌려 알아보도록 하자.


 


 


이 계급에 속하는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수백만, 가족을 합쳐서 아마 3천만쯤 될 것이다. 진짜 자본가는 70만 명 정도이고 그 가족이 몇 배 되겠지. 지식분자는 400만 내지 500만 되겠지. 어쨌든 이것을 모두 합쳐서 나는 600만으로 보고, 그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비교적 부유하니까 자식들이 많은데 그것까지 합치면 5에 6을 곱해서 3천만이 되겠지. 그들은 비교적 교육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기능을 지니고 있다(최고 국무회의에서의 강화(講話), 1957.10.13).


 


 


문화대혁명을 발동시킨 1966년의 정치회의에서도 모택동은 그 수를 전체 인구의 약 5퍼센트로 보면서 그 가운데 구사회적 사상을 고수하는 사람이 약 2퍼센트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2퍼센트는 반공적이라고 밝혔다(중앙공작회의에서의 강화, 1966.10.25).


그러나 모택동이 ‘사상개조’의 주대상으로 삼고, 또 그 존재의 위험성을 크게 경계한 것은 분명한 적대자보다는 당과 프롤레타리아 내부로부터의 적대분자의 발생이었다.


‘수는 적지만 영향력이 큰’이 구질서적 세력은 당ㆍ정부ㆍ공장과 특히 교육ㆍ언론ㆍ문화예술의 분야에서 소련적 경향의 사회를 지향했던 것 같다.


약 5퍼센트의 그들은 물론이고 노동자ㆍ농민들도 제도의 변혁으로 하루아침에 새 제도가 요구하는 사상ㆍ관습ㆍ가치관을 저고리 바꿔 입듯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자본주의적 원리인 사적 이익의 추구는 중국의 경제적 빈곤성과 생산성의 낙후라는 구체적 조건 때문에 은연중에 생활원리로 작용했던 것 같다. 노동자ㆍ농민 하나하나 사상적 개조를 하지 않고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전체 계급에 의한 구지배계급의 잔존세력에 대한 독재(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내부로부터 붕괴할 것이라고 모택동은 생각한 것이다. 스탈린이나 특히 흐루시초프 이후의 소련처럼 물질(생산) 제일주의에 따라 생산발전이 인간사상의 변혁을 촉진한다는 관점에 선다면 생산기업, 인민공사(人民公社) 등은 행동의 자극책으로서 물질적 보수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소기가 모택동을 대신해 실권을 장악하게 된 것(1957)이, 이 세력과 그 사상의 토대인 물질 우선ㆍ경제 제일주의가 모택동의 혁명 우선ㆍ정치 및 사상ㆍ인간 제일주의를 압도한 결과였다. 백화제방(百花齊放)ㆍ백가쟁명(百家爭鳴)으로 모택동의 인간ㆍ사상 제일주의는 구사회에 뿌리를 가지는 5퍼센트와 그것이 작용한 수정주의적 경향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 후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촉발시키기까지 중국 사회는 흐루시초프 노선하의 소련과 같은 현상이 급속히 재현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중국의 물질적 생산을 촉진했다. 그 반면 당은 모택동이 중요시하는 ‘당내 민주주의’가 깨져 하향식 명령기구의 성격을 짙게 했고 관료기구는 대중의 비판을 허용치 않는 특권계층화한 흔적도 많다. 기업, 공장, 기관 등에서는 대중의 창의력과 결정 과정의 참여가 봉쇄되는 경향이 짙었다. 능률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윤이론이 도입되어 대중의 기본적ㆍ전체적 소요보다는 우선 팔리는 상품에 생산 역점이 주어졌다. 능률은 물질(금전)적 자극에 의했던 까닭에 기능계층 간의 월급ㆍ임금의 격차가 확대되고, 한때는 40여 종의 금전적 유인이 실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와 소련의 현실이 중국의 혁명에 재현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소외의 문제와도 깊게 관련된다. 대중의 능동적ㆍ적극적 참여가 거부되고 명령에 따르기만을 강요당하고, 무엇 때문에 일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게 되고, 알려주지도 않고, 다만 개인의 물질적 증대에서만 행복을 발견하려는 태도는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도 인간소외가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로 모택동은 판단한 것이다.


문화혁명은 이상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하나하나의 현상, 그 전체가 종합적으로 사회의 존재ㆍ기능양식을 변질시키는 사태 발전을 저지하고 뒤집어엎어버리려는 모택동의 ‘사회주의 속에서의 계속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당기구를 그 당의 창시자와 지도자가 대중을 시켜서 깨어버린 예는 세계의 공산당(어쩌면 어떤 당)사에 없는 일이다. 정부의 ‘능률적’인 기능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해버리거나, 공장ㆍ학교ㆍ인민공사ㆍ군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활동단위에서 하부 대중이 정책 결정 과정과 관리 운영의 업무에 제도적으로 참여하도록 보장한 것, 엘리트ㆍ간부ㆍ지식인에게 그 각 기관에서 최하 직종의 육체노동을 해야 할 의무의 제도화……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모택동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조반유리’(造反有理)이겠다. 모든 사람에게 상부의 지시ㆍ명령ㆍ권위에 대해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정당성ㆍ타당성ㆍ대중이익에의 부합, 인간 개인의 자주성, 창의력 발휘에의 기여 같은 고려 기준에 비추어서 검토ㆍ비판ㆍ합의를 거친 뒤에 그 복종ㆍ시행 여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조반(기성 권위에 대한 반항의 도리 또는 권리)을 줌으로써 대중을 불러일으켜 꾸준히 기성ㆍ기존의 껍질을, 상부의 소수가 체제와 권위 속에서 동맥경화증에 걸리는 경향을 지속적으로 깨나간다는 사상이다. 소수의 상층 지배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택동 자신을 포함한 그 상부층을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비판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도리를 사회정신으로 정착시키려 한 것이 문화혁명이라 하겠다. 소련의 지도자들이 이 ‘반권위적’대중노선과 반물질주의로 나아가는 모택동과 중국에 대해서 반마르크스주의ㆍ반혁명이라고 비난하는 이유와 심정도 알 만하다.


그러면 그와 같은 사상인 모택동과 소위 ‘모택동 숭배’라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모택동은 그 자신이 솔직히 인정하듯이 많은 과오와 판단 착오를 저지른 사람이다. 자신의 어록이 사상혁명과 일상생활의 ‘성전’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자신의 권위는 조반의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그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일까.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모택동에 대한 대중적 숭배에 대해서는 앞서 본 바와 같은 구사회에 뿌리를 둔 사람들에 의해서 비난받고 있다. 당내에서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반대하는 구체적 사건이 적지 않다. 직접적이며 공개적인 예가 1959년의 팽덕회(彭德懷)에 의한 모택동 비판, 간접적 예가 1965년 팽진(彭眞)ㆍ오함(吳唅)ㆍ등척(鄧拓) 등에 의한『해서파관』(海瑞罷官),『삼가촌례기』(三家村禮記) 등 문예ㆍ언론을 통한 것이 각각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당의 비판정신이 쇠퇴하고 당내 민주주의가 변질되면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작업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모택동은 이것을 역겹게 생각한 흔적이 있다. 1970년 에드가 스노가 국경일에 군중이 “모택동주의 만세”를 외치는 것을 보면서 “저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묻자 모택동은 ‘번거롭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당내외 신문이 자신에 대한 많은 수식사를 붙이기 시작하자 이것을 금지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몇몇 외국인은『북경주보』(北京週報)나 신화사(新華社)의 대외선전에 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모택동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이전에는 없던 짓을 왜 시작했는가. 문화대혁명 이후 지금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너무 나를 추켜올리는 까닭에 사람들은 반발을 느낀다고 한다. 어떻게 내가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겸허해야 한다. 더욱이 대외적으로는, 또 밖에 나갔을 때에는 겸허해야 한다. 물론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나는 어저께 수소폭탄의 공보문(각 신문,1967.6.17-필자)에서 그 ‘위대한 도사(偉大的導師), 위대한 영수(偉大的領袖), 위대한 통사(偉大的統師), 위대한 타수(偉大的舵手)’라는 소리를 모두 지워버렸다. ‘광망무제’(光茫無際)도 지워버렸다. 어떤 인간이 도대체 ‘광망무제’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래서 지워버렸다. ‘만분(萬分)의 기쁨과 설레이는 마음’에서 만분도 지워버렸다.십분도 아니고, 백분도 아니고, 천분도 아니고, 만분이라니, 나는 일분도 필요 없다. 싹 지워버렸다(대외활동에 관한 지시).


 


 


그러나 웬만한 것은 국내적으로 혁명적 정열의 한 초점을 제공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묵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의 생일축하니 그런 개인적 문제에 관한 공사화(公事化)는 전혀 없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스탈린 숭배와의 비교가 말해주는 것이다. 스탈린이 대중과 접촉한 것은 1924년 디나모 공장을 시찰한 것이 마지막이라고 한다. 당시 스탈린은 45세에 불과했다. 그는 그 후 30년간, 크레믈린 속에 들어앉아 죽는 날까지 끝내 대중 앞에, 대중 속에 나타난 일이 없다. 다시 말하면 스탈린은 민중에게서 스스로 멀리하는 방법으로 권력적으로, 인위적으로 그의 신격화와 숭배를 조작한 것이다. 모택동은 스탈린이 죽은 해에 74세라는 고령인데도 양자강에서 수영하고, 극장 속에서 군중에 섞여 경극(京劇)을 감상하고, 행사 때에는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는 것으로 신격화라면 신격화를 완성했다. 스타일만의 차이가 아닌 중요한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스탈린은 정부ㆍ당ㆍ지도자ㆍ간부에 대한 비판을 금지시킨데 반해 모택동은 바로 그것에 대한 대중의 비판을 가르치고 권장했다는 점에서, 권력의 편이기보다 항상 대중의 편에 섰다는 데서, 대중 속에 그런 감정이 우러날 소지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지도자와 대중의 일체성 여부를 기준으로 보고 비판할 문제이겠다.


 


교육혁명의 배경


 


모택동의 교육의 기본사상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모든 사회ㆍ체제하에서의 교육의 일반적 목적ㆍ기능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즉 ① 경제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의 생산, ② 정치적 지배에 필요한 간부의 양성과 방법의 연구가 그것이다. ①의 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경제를,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경제를 말함은 물론이다. ②의 정치적 지배도 경제적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주의적 정치의지배,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적 정치의 지배를 말함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교육이란 일반ㆍ보편적인 목적ㆍ내용일 수도 없고 그 사회제도의 차이로 달라지게 됨은 당연하다. ①의 경제와 ②의 정치적 지배가 주로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것인가가 그 교육의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사회주의의 문화는 본래적으로는 위(상부)에서 내려 먹이는 것이 아니라 ‘인민’대중 쪽에서 자신의 해방된 창의력의 소산으로 창조해나가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 문화는 결국 사회주의 경제를 반영해 사회주의의 정치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택동의 그와 같은 문화관, 특히 교육사상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회에 불안정하고 역행적인 요소가 팽배하게 되었던 1958년, 즉 건국 후 10년 사이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 노력이 민중의 자주적ㆍ자체적 자각과 창의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면이 많았다. 그것은 워낙 낙후된 사회에서 성과에만 급급한 나머지 소련의 ‘경제-정치-문화-교육’양식을 그대로 모방해 중국의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려 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은 구체제의 문화ㆍ교육사상의 실패를 반대 방향에서 반복한 셈이다. 즉 반(半)봉건적 구질서에서는 중국 현대화의 길로서 자본주의의 소산인 서양식 교육ㆍ문화를 무비판적으로 기계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실패했는데, 모택동의 초기는 러시아 사회주의 교육의 제도ㆍ방식ㆍ내용을, 아직도 반미개(半未開)할 뿐 아니라 러시아 사회와는 전연 다른 중국 토양에 기계적으로 적용했던 것이다. 객관적 구체성과 특수성을 무시한 이 교육은 많은 소련 사회주의적 모순의 씨가 되었다. 이에 대한 모택동의 반성이 본격적으로 정책으로 제창되는 것은 중국의 조건에 맞는, 그리고 구제도에서 계승한 부르주아적 지식인에 대항해서 새로운 중국 사회주의적 지식인을 농민과 노동자 속에서 양성하는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 1956, 57년경이다. 음악가들과의 대담에서 이 노선을 밝힌「민족적 예술을 창조하자」와 지식과 노동을 결부시키는 ‘학노’(學勞)교육을 강조한 당전국선체공작회의(黨全國宣體工作會議)에서의 ‘지식인을 개조하자’는 뜻의 강화가 그것이다. 특히 지식인의 사상개조를 위한 후자는 전국의 중앙과 성(겛)과 시(市)의 문화ㆍ선전 책임자 380명과 과학ㆍ교육ㆍ문화ㆍ예술ㆍ신문 출판 부문의 비당원 최고위 전문가가 전부 출석한 획기적인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모택동은 1946년의 ‘정풍운동’(整風運動)에서 비친 그의 사상개조이론의 초보적 구상을 발전시켜 본격적으로 지식인 문제에 정면 도전해 나섰다. 주로 구제도하의 지식인과 지식ㆍ사상 개혁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인민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와 함께 뒤에 문화대혁명으로 구체화될 모택동의 교육(화)사상을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분야의 급속한 발전을 위한 ‘속도’가 성과를 가름하는 제일의적 척도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문화적 분야의 현실적 활동과 교육의 혜택은 경제적 여유가 있고(이때까지 구자본가계급은 대체로 그전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경제적 특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따라서 노동할 필요 없이 전업(專業)으로 고등교육을 계속할 기초교육을 이미 받은 구사회의 유력자ㆍ지식인 가정의 자제들에게 독점된 상태였다. 혁명을 했다는 사회에서 소수(그것도 구지배계급의)에게 교육의 이익을 베풀고, 혁명의 혜택을 받아야 할 대중은 소외되어 계속 노동에 종사하게끔 하는 상태였다. 그것은 사회주의로 가는 과도기에 소련에서도 일어난 어쩌면 필연적 현상으로서 객관적으로는 정당화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사상과 입장에서는 그것으로 인해서 인민 내부에서의 대립과 갈등ㆍ모순이 심화되고, 소외된 대중 쪽에서 말한다면 모택동의 정책은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지 않느냐는 반발마저 일어나게 된 것이다. 특히 중학교와 소수의 고등 교육기관은 도시에 집중되어 있던 까닭에 구사회 자제들의 혜택은 큰 반면 농촌 대중의 기회는 사실상 막혀 있는 상태였다. 전통적인 출세주의, 지배적 관료로의 지향이 뿌리 깊은 중국이기에 농촌에서는 자손들의 출세를 위해 무리해서 도시학교로 진학시키려는 풍조가 생겼지만, 기성계층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배제되었다.


그 누적된 결과의 하나가 모택동이 가장 혐오하는 노동의 기피,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감, 지식분자의 우월감 팽배였다. 둘째는, 도시민에 대한 농민의 열등감과 적대감, 도시와 농촌 각 분야에서의 격차의 확대로인한 ‘인민 내부의 모순’의 격화다.이런 현상의 심각성을 시사한 것으로서 한 성(江蘇省)의 당위원회에서는 “진학 요구와 노동 참가를 둘러싼 대중 간의 모순은 인민 내부 모순과 적대 모순의 동시적 존재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문화(교육)와 노동을 대립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 수억 인구의 심정과 위치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모택동은 어떤 풍조나 경향, 그 중심적 인물이나 세력, 또는 사회 일부의 작풍과 사상을 규탄할 때, 그들에게 붙이는 ‘딱지’(악명)를 수없이 사용한 사람이다. 앞에서도 말한 수정주의ㆍ주자파ㆍ관료주의ㆍ분파주의ㆍ기회주의ㆍ반혁명분자ㆍ반대중적 인텔리 등과 같은. 그런데 이와 같은 비난이 안 나올 수 없었던 당내와 사회 전반의 ‘교육기회의 편재’와 ‘지식인과 대중의 거의 적대적 모순’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는 외부에는 잘 인식되어 있지 않다. 중국 공산당 통치의 철저한 탄압과 강제력에 의해서 모든 모순은 무조건 복종 방법으로 ‘다스려졌다’는 식의 인식이, 외부 사람에게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중국 공산당과 모택동이 당시 혁명이 깨지느냐 유지되느냐의 심각한 현실 앞에 놓이게 되었던 것을 모택동 자신의 많은 술회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모택동이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에드가 스노에게 “나는 귀찮은 집안 늙은이처럼 버림받았다”고 말한 것은 그 당시의 당 내외정세를 기록에서 찾아보면 사실이었던 것 같다.


모택동이 1966년 문화혁명의 불을 질러 주로 해방(중공 건국) 이후 세대인 10대의 중(고)학생을 시켜 지식인(엘리트)의 사상개조에 마지막 안간힘을 쓴 것이 1957년 5월 10일자의 다음과 같은 시도다. 지시문은 제1절에서 우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 당내에는 지난 수년 내,대중과 현실에서 유리된 분파주의ㆍ주관주의ㆍ관료주의가 새로이 팽배하기 시작했다.”


이 경고와 함께 얼마 후인 5월 16일에는 상부의 간부가 육체노동으로 정신개조를 해 그것을 전국 지식인에게 확대하라는, 앞에서 말한 4개 행동방법이 명시되었다.


 


 


① 각 기관 및 각인의 구체적인 조건을 토대로 해, 일정한 생산단위 또는 건설단위(농업생산협동조합, 공업생산협동조합, 공장, 광산, 작업장, 공사현장, 상점, 식당) 등과 항시 연락해 그 단위의 동의를 얻어, 농민ㆍ노동자ㆍ수공업자 및 각종 업무 담당자의 지도하에,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자기가 능히 견딜 수 있는 육체노동에 참가한다. 그 노동의 주 종류는 몇 가지의 단순노동, 예를 들면 풀 베기,수확작업, 똥 치기, 가축의 똥 줍기, 물푸기, 흙 나르기, 위생작업, 재료운반, 물자의 정리작업이다.


② 하급에 내려가 시찰활동을 하고 있는 당 간부는 그 기간 동안 현지의 일정한 생산단위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한다. 귀성 중인 간부도 마찬가지다.


③ 각자의 당과 정부기관 지도하에, 대중과 더불어 도로의 청소, 식수, 조림, 댐건설, 수로건설, 밭 일구기를 비롯한 공공적 의무노동에 참가한다.


④ 각자의 소속기관에서 야채농사, 돼지치기를 비롯한 기관 자체의 생산노동과 노동활동에 종사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후 문화혁명까지 이 지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유소기(劉少奇)가 국가주석으로서 추진한 ‘생산 제일주의’ ‘경제 우선주의’노선으로 지식인의 ‘지배자ㆍ명령자’적 작풍은 더해간 것 같다. 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그 후의 중국교육의 개혁에 관해서 중요한 시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지만 ‘1957년 4월 27일자 지시’를 길게 인용해본다. 이것을 보면 10년 후의 문화혁명이 어째서 교육혁명을 핵으로 해서 전개되었던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연안시대 이전부터 중국 공산당에게 생활화되어 있던 것이어서 별로 새삼스러운 내용은 아니다. 다만 집권 이후 간부ㆍ지식인 엘리트들이 관리면에 치중했기 때문에 자연히 육체노동에서 멀어지고 이론과 주관에 치우치는 경향이 생긴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감각적으로 노동대중과 괴리가 생기고 일체감을 상실하게 되어 독선적이 되고, 지배자 감각에 사로잡혀 혁명의 목적인 대중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군림하여 명령하는 경향이 생겼다는 것도 시사해준다. 사상개조의 수단으로 육체노동 참가를 의무화하고 제도화함으로써 인텔리와 엘리트에 대한 재교육의 효과와 전반적ㆍ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모택동식 교육개혁의 현상


 


문화혁명을 통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온 중국의 공식ㆍ비공식 교육의 현상에 관해서는 상당히 많은 정보와 자료들이 있다. 1966년부터 대체로 69년까지 완전 또는 부분적으로 문을 닫았던 각급 학교는 1971년부터 개혁된 제도에 따라서 문을 열었다. 많은 외국인이 각종 교육기관 특히 대학들을 방문해 충실한 보고와 방문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모택동 사상의 교육적 측면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론적인 해명보다도 오히려 실제적으로 오늘의 중국 교육기관의 운영방식을 종합함으로써 모택동이 인간(사상)개조의 방법론적 중심으로 삼았던 혁명적 교육을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런 뜻에서 여기서는 중국의 교육기관의 변모를 좀 상세하게 그려보기로 한다.


모택동은 지식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독특한 개념 규정을 했다. 그에 의하면,“도대체 지식이란 무엇인가? 자고로 이 세상에는 지식에 두 가지 종류밖에 없다. 하나는 생산투쟁의 지식, 또 하나는 계급투쟁의 지식이다. 계급투쟁의 지식에는 민족투쟁의 지식도 포함된다. 이밖에 또 어떤 지식이 있는가? 없다. 자연과학과 사회 과학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의 결정이며 철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개괄이며 총괄이다. 이것 외에 다른 지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은 생산투쟁을 위한 지식이고, 사회과학은 계급투쟁을 위한 지식이고, 철학은 즉 사상으로서 생산투쟁과 계급투쟁을 방향지어주는 것이 된다. 모택동의 철학이란 의식ㆍ사상ㆍ정치ㆍ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그 네 가지가 생산(즉 물질), 계급(즉 제도)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러시아 혁명의 레닌주의나 그 후의 소련의 공식이론과도 반대되는 견해로 해석되고 있다. 실무적이고 생산(물질)과 계급(제도)의 선도적 기능에 입각했던 유소기와의 대립이 불가피했던 원인도 여기서 이해된다.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 생산관계의 변혁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ㆍ기계ㆍ제도보다는 인간 의식의 변혁이며 이것을 끌어내는 것은 사상ㆍ정치교육이라는 논리다. 사실 중국 공산당은 모택동의 그 논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기계는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다. 물질적 수단의 생산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비로소 실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사는 인민대중의 주관적 능동성이야말로 위대한 원동력이다”(중앙당 제8차 전대회 제2기 회의에서의 보고). 이 견해를 소련 공산당의 이론과 비교하면 대조가 분명해진다.


“당은 공산주의가 물질적 관심의 원칙에 서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명제에서 출발하고 있다”(1962.10 소련 당 제22차 대회의 당 강령). 레닌이 반드시 그런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견해의 차만으로도 중ㆍ소 교육이념의 근본적 차이를 알 수 있다. 소련 지도자들이 모택동을 가리켜 반마르크스ㆍ반레닌적 ‘주관주의자’라고 규탄하는 근거도 알 수 있다. 모택동의 사상은 인간(의식ㆍ사상) 우선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 인간이란 모택동에게는 대중을 말하는 것이지 소수의 자각된 엘리트(지식인 간부)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간의 의식혁명ㆍ사상개조를 교육의 궁극적 목적으로 보는 까닭에 모택동이 말하는 교육은 공식ㆍ제도적 학교교육이라는 범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 그는 모든 사회ㆍ정치운동을 교육으로 보았다. 이것은 이론과 실천의 문제로 따로 제기되지만 문화대혁명은 바로 이 ‘대중의 실천을 통한 교육’으로 진행된 것이다. 만약 모택동이 정규 학교의 제도ㆍ교과 내용의 개혁으로 구폐(舊弊)를 일소할 수 있었다면 문화혁명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문화혁명을 3년 이상이나 계속시킨 것은 계획적으로 8억의 인민대중이 빠짐없이 참가하는 정치ㆍ사회운동을 통한 교육 효과를 위해서였다. 틀에 박힌, 규정에 얽매인 학교 교육을 지배자(전통 중국의 과거를 통한 관료와 지식인) 양성ㆍ확대 재생산으로 그는 보았다. 후진성의 극복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지 않은 나라는 후진국 가운데서 중국뿐일지도 모른다. 모택동에게 학교교육이란 어느 사회에나 제한된 기회와 혜택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 생산품은 중국적 관료, 소련식 기술 전문가(테크노크라트)일 수밖에 없었다. 관료와 테크노크라트는 그 자체가 지배세력화하거나 지배계급의 도구화할 필연적 존재로 그는 보았다. 수없이 많은 그의 교육 관계 논문ㆍ담화ㆍ강화(講話)ㆍ지시의 기본정신은 이에 대한 경고와 예방을 강조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엘리트와 엘리트 교육에 대한 혐오감은 모택동의 교육사상의 원동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원초적으로 소년ㆍ소녀의 새세대의 의무교육을 제도화에 의하지 않고 다양한 교화방법에 의존하게끔 한 이유로 해석된다.


그 두드러진 방법이 소위『모택동 어록』이라는 것이다. 늘 인용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이야기는 다 알려져 있는 것이니 생략하고, 모택동이 하려는 말은 대행산(大行山)도 움직이려 하기만 한다면 대중의 자각된 힘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단순한 것이다. 이 우화는 옛날에는 불가능한 짓을 왜 하려 하느냐는 ‘몰법자’(沒法者)의 중국 민중의 무력화와 체념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후에는 인간의 시도란 모두 ‘천’(天) 또는 ‘천제’(天帝)가 승락할 때, 즉 천의(天意)가 주관하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타심 사상의 해설로 이용되기도 했다. 모택동이 말하려는 것은 중국인의 전통적인 ‘몰법자적’체념을 깨려는 것과, 우공과 그 아들이 감연히, 끈질기게 산을 파는 것을 보고 상제가 감동해서 천사로 하여금 산을 져 나르게 한 것이 ‘천’의 뜻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결심의 표상이라는 새로운 해석이다.즉 그전까지는 상제(天, 자연, 초인간적 존재)와 인간의 종속적 의식이던 것을 ‘인간은 천이다’라는 차원에 인간(모택동의 인간대중)을 승격시키는 사상이다.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의식개조의 이 한 구절이 중국을 돌아보고 놀라는 많은 외국인이 목격한 그 많은 자연개조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라고한다. 『모택동어록』이란흔히일부에서생각하듯이 성전(聖典)이라기보다는, 몽매하고 무기력한 수억의 중국 대중에게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에 처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지혜’와 ‘인간 능력에 대한 신앙’을 심어주는 평범한 안내서 같이 보인다. 『어록』의 안내에 따라서 사물을 대해 그것이 해결된 체험이 대중 속에 쌓인 결과, 자연히『어록』에 대한 중국 대중의 믿음이 높아진 것이 아닌가 싶다. 모택동식 대중교육 방법이라 하겠다.


다음은 정식 학교제도의 개혁이다. 학제개혁에서 우선 문화혁명 전과 판이한 것은 수업연한의 단축과 입학자격의 변혁이다. 그것이 장기적 안목으로 과연 현명한 변혁이냐의 여부에 관해서는 외국인 전문가들 사이에 견해가 분분하다. 그것은 어쨌든, 종래 소학 6년, 중학 6년(초급중 3년, 고급중 3년)이던 것을 소학 5년, 중학 5년으로 단축하고, 대학은 과거의 4년(의학은 5~6년)이던 것을 2~3년(의학은 3년)으로 단축했다(아직도 시험적 시기인 까닭에 대학마다 다소의 독자적 신축성이 있다고 한다).


모택동의 논문과 지시사항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대학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 도대체 중학은 소학에서 배운 것의 되풀이, 대학은 중학에서 배운 것의 되풀이가 너무 많다. 대발명가인 와트, 에디슨, 프랭클린…… 등 모두 대학을 나와서 인류에 공헌할 큰일을 했는가?……국민당의 장군들은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면서 하나도 제대로 전쟁을 못 했다.


 


 


이것은 “실제에 즉응(卽應)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1965년 항주(杭州)에서의 연설 일부다. 또 그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보인다.


 


 


현재의 대학교육에 관해서 나는 굉장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 소학에서 대학까지 전부 16,17년 걸린다. 졸업할 때까지 20수년 동안 콩ㆍ벼ㆍ수수가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르고 건강만 해쳐서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의 교육사상은, 많은 시간을 책 속에 묻혀 심오한 이론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덜한 이론이라도 실제적 노동과 결부시킨 지식과, 그러한 형태의 인텔리를 이상으로 하고 있다. 전(專, 이론ㆍ전문화)과 홍(紅, 노동ㆍ사상ㆍ정치의식ㆍ혁명ㆍ자기희생)을 합친 소위 ‘전홍’교육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모택동식 ‘전인격’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을 기피하는 ‘지배형ㆍ명령형’의, 대중과 유리된 인텔리를 모택동은 제일 싫어하고 미워했다.


그것이 문화혁명을 통해서 반영된 것이 학교(특히 대학) 입학자격의 변혁이다.


외국의 많은 교육 관계 권위자들의 보고를 보면 대체로 일치하고 있기에 굳이 인용의 출처를 밝힐 필요 없이 적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 중학교(5학년): 문화혁명 전까지의 입학시험제도를 폐지하고 거주지역구 내 중학으로의 자동적 입학제도. 당 간부ㆍ부유층(1969년까지 이자를 계속 받아가면서 살던) 구자본가와 정부 및각 분야의 고위층 자제들이 주로 집중하던 이른바 ‘일급중학’의 폐지와 평준화로 과거의 특권층 재생산적 기초를 봉쇄한 것.

  • 대학: 문화혁명 전까지는 소련 대학과 같이 어려운 학술(필기)시험을 기초로 했던 까닭에 앞에서 본 중학교육의 폐단이 생기는 순환적 요인이기도 했다. 노동자ㆍ농민의 자제는 어떤 북경의 ‘일급 중학’의 한 반 50명 가운데 둘밖에 없었다는 보고도 있다. 대학입학제도에 근원적인 수술이 가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첫째는, 2년 이상 노동 경험의 조건이다. 중학 5년을 나오면 직접 대학으로의 진학은 없고 누구나 공장ㆍ인민공사ㆍ기업ㆍ군에 들어가서 2년 이상의 노동을 하는 것이 의무제로 되었다. 둘째로, 사회성분으로서 고위간부ㆍ부유층의 자제가 아니라 농민ㆍ노동자ㆍ병사의 자제 또는 그 본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셋째는, 입학자격의 평가다. 종전의 시험제도는 없애버리고 그 대신 2년간의 노동에 종사한 직장ㆍ농장ㆍ기관에서 희망자를 접수해 정치의식, 실제 노동에서의 창의력, 자기희생적 정신자세 등을 기준으로 선정해, 해당 당위원회가 인준한 다음, 희망 대학의 재심사를 거쳐 결정된다. 1차적인 관문은 노동하는 직장의 동료 노동자ㆍ농민ㆍ병사들의 평가다. 두뇌는 후차적 기준인 까닭에 입학이 허가된 뒤에 학업성적이 불량한 경우도 가끔 생긴다는 보고다. 그런 경우에는 그전처럼 퇴학을 시키는 대신 속성 과정, 보충 과정, 단기전문 과정 등에서 보완 또는 전교(轉校)시킨다고 들린다. 모택동의 사상으로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통과된 정치의식이 뚜렷한 학생은 입학 후의 학업에서 오히려 재래식 학생보다 앞설 수 있다는 정신주의가 짙다.

  • 대학행정ㆍ운영체제: 대학마다 인원수에는 다소의 차가 있으나 모든 대학에서 공통적인 것은 교직원ㆍ학생ㆍ대학 당위(黨委)의 ‘3자결합’결정기관의 운영이다. 3자는 각기 대표를 내고 각기의 발언권은 동등하며, 작고 큰 모든 대학 운영상의 결정사항은 이 3자회의에서 의결하도록 하고 있다. 대학당국의 일방적 결정은 있을 수 없으며 학생은 자신의 교과 편성, 교수의 임명ㆍ징계 문제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대학 운영에 직접 참여하게 되어 있다.


서방사회의 한 교육 권위자의 보고는 유명한 상해의 복단대학(復旦大學)의 경우, 빈농ㆍ노동자ㆍ해방군 병사 출신 대학생의 비율은 문화혁명 전(1956)에는 전체 학생의 25퍼센트에 불과했던 것이 71년에는 98퍼센트라고 전한다. 다른 대학들도 대체로 유사한 비율임을 그는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모택동의 교육혁명 후 중국 대학에는 부모의 돈으로 4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만 하는 ‘직업적 학생’은 없어진 셈이다. 대학생은 재학 중 그대로 추천되어온 그 공장의 노동자이고 그 인민공사의 농민이며 그 부대소속의 병사다. 그들은 졸업 후 육체노동을 하던 회사ㆍ공장ㆍ기관으로 돌아가는 경우에는 재학 중에도 그 소속단체에서 받던 월급이 지급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약간의 용돈이 지급된다. 노동ㆍ기술의 직장과 대학에서의 이론교육과 다시 그 원직장으로의 환영이라는 일관된 교육효과의 과정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택동이 배격해온 ‘지식의 신비주의’의 타파라고도 할수 있다. 구중국의 과거제도에 의한 지배자ㆍ관료 지식인이 지식을 독점하고 절대다수의 대중에게는 지식이란 도저히 그들이 소유할 수도 없고 가까이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신비주의를 깨버리려는 것이다. 지식의 신비주의는 어느 사회에서도 그랬지만 구중국에서는 지배의 한 수단이었다. 빈농ㆍ노동자ㆍ병사들이 대학생의 98퍼센트를 차지하게 되면 소수가 지배의 수단으로 수천 년 동안 독점해온 지식은 대중의 것이 되고 지배의 수단이었던 지식의 신비주의는 깨지게 될 것이다.


이 변혁은 중국에서는 특히 큰 의의가 있는 역사적 변혁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지식인의 의무적 육체노동 참여와 함께 모택동 사상의 토대인 ‘노동자의 지식인화, 지식인의 노동자화’의 표현이라 하겠다. 모든 공장ㆍ기업ㆍ학교ㆍ병원ㆍ당ㆍ정부ㆍ군……의 간부는 1년에 2개월간 각지 기관의 최하위 직분의 육체노동을 하거나 공장ㆍ농촌에 가서 농민ㆍ노동자 속에서 ‘사동’(四同)생활을 체험하게 되어 있다. ‘사동’이란 농민ㆍ노동자ㆍ병사들과 ‘동흘(同吃)ㆍ동주(同住)ㆍ동노동(同勞動)ㆍ동상량(同商量)’하는 생활이다. 엘리트의 이론을 실천 속에서 꾸준히 검증하고, 인민 대중에게서 유리되지 않고 전체 인민이 지식인ㆍ비지식인 가릴 것 없이 거대한 일체감을 갖게 하려는 모택동 나름의 ‘대동’(大同)의 사상이다. 앞에서 1957년, 당 고급간부의 육체노동 의무화를 지시한 상세한 내용에 ‘똥 푸기ㆍ소똥 줍기’…… 같은 항목을 보았다. 같은 사회에 사는 인간(인민)으로서 지도자는 마땅히 지도받는 대중 속의 가장 미천한 노동을 몸소 체험해야만 지도자ㆍ지식인의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 되며, 자칫하면 자기완결적 경향으로 흐를 관료주의ㆍ권위주의ㆍ엘리트의식ㆍ지도자의식을 타파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것이 모택동 교육사상의 ‘노동자의 지식인화, 지식인의 노동자화’이며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사회분열ㆍ계층화를 방지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에 대해 서구학자들은 적지 않은 회의를 표시하기도 한다. 대병원의 일류 외과 전문가나 연구소의 전자공학자가 농촌에 가서 똥지게를 지는 것이 과연 장기적 안목으로 중국의 과학발전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이냐 하는 점에서다. 그것은 두고 봐야 할 일이고 아직은 뭐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모택동 사상은 변증법적인 것이어서 전자공학자가 똥지게 지는 것으로 잃는 전문 연구의 손실은 그가 좁은 ‘전문인’으로서의 활동으로 인해서 잃어버리는 대중과의 일체감, 전 인민적 공동의 목적의식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충되며, 전체 지식인의 그 새로운 체험과 정치적 자각이 종합 고양될 때 ‘전 사회ㆍ전 중국인’의 발전은 오히려 촉진된다는 것이다.


학문의신비주의 타도는 대학의 커리큘럼과 교육방법에 더욱 혁명적으로 반영되었다. 그 하나는 학생의 자주성ㆍ독창력을 중시하는 변화다. 대학에서의 시험은 교수와 학생이 협의하에 문제를 결정한다. 한 학기의 학습 중에서 중요한 것을 골라 예로 20개의 문제점을 협의 결정하면, 학생은 그 어느 하나 또는 둘에 관해서 연구 조사해, 결과를 제출한다. 주로 실제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학생의 독창적 능력을 평가하려는 것이지 강의 내용의 충실한 기술은 아니다.모택동의 다음과 같은 일면에서 나온 개혁인 듯하다.


 


 


현재의 시험방법은 적에 대해서 쓰는 방법이지 인민에 대한 방법이 아니다. 기습공격을 가하는 식인데다가 편향된 문제, 쓸데없는 문제를 내고 있다. 옛날 과거의 팔고문(八股文, 고전의 형식주의 문장)을 쓰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찬성할 수 없다. 철저하게 개혁해야 한다. 나는 시험문제를 공개하고, 학생에게 공포해, 학생 스스로가 읽고 조사 연구해서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홍루몽』에 관해 20문제를 낸다. 어떤 학생은 절반밖에 못 썼다고 하자. 그러나 그중 몇 개는 재래식 해석과는 다른 독특한 창조성이 인정되면 100점을 주어야 한다. 다른 학생은 교수의 강의대로 완벽했다고 하자. 어디 창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50점밖에 줄 수 없을 것이다……(과도한 독서는 사람을 망친다는 것을 경고한 교육제도 개혁에 관한 담화-春節談話紀要, 1964.2.13).


 


 


모택동은 기성권위ㆍ학설ㆍ규정ㆍ전례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는 ‘창의적 인간형’을 교육의 이상으로 삼는 것 같다. ‘반항적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조반유리’라는 말을 홍위병(紅衛兵)들에게서 많이 들었다. 그 뜻은 ‘반대의 도리’이다. 모든 기성의 권위에 대한 ‘창조적 반항’, 즉 비판정신은 모택동 교육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당ㆍ정부ㆍ노동자ㆍ학생 등에게, 상부의 지시라고 절대로 무조건 복종할 것이 아니라, 그 도리를 검토하고, 비판해 따를 만한 도리가 있느냐 없느냐를 자주ㆍ주체적으로 판단해서 따르거나 반대하라고 역설했다. 맹목적ㆍ무조건적 복종을 ‘노예사상’이라고 배격한 것은 자신의 긴 혁명 체험의 결과이겠지만 이것을 젊은이ㆍ학생의 권리로까지 인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비판 속에서만 발전과 단결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지도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문화혁명 후의 교육혁명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말하는 그의 조반유리사상의 종합적표현이아닐까 한다.모택동에게는 왕해용(主海蓉)이라는 조카가 있다. 모택동이 외국 인사를 접견할 때그 중간 뒤쪽에 앉아서 통역을 맡는 여성을 우리는 가끔 사진에서 보는데 그것이 왕해용이다. 지금은 외교부 부부장의 한 사람인 왕해용이 북경 외국어대학 학생이던 1964년, 아저씨를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해용은 자기 학급에, 강의시간에는 낮잠을 자고 소설이나 읽고 기숙사의 귀사시간에는 일요일마다 늦게 돌아오는 농땡이 학생이 있어 말썽이라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택동 그럼 교수는 강의시간에 너희들이 낮잠을 자거나 소설을 읽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니?


왕해용 예, 못 하게 합니다.


모택동 학생에게는 수업 중에 소설 읽거나 낮잠 자는 것쯤은 허용해야 한다. 학생의 건강이 제일이 아닌가. 교수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게끔 도우면 된다. 네가 말한 그 학생 그놈, 장래 반드시 큰 물건이 될 거다. 두고 봐라. 토요일에는 집회에 빠진다, 일요일에는 귀사시간에 늦어 돌아온다, 그거 대단한 놈이다. 학교에 돌아가면 그 학생에게 내가 말하더라고 일러라. 8시, 9시에 돌아오는 것은 너무 이르다. 11시, 12시가 돼서 와도 좋다고, 일요일에 집회를 한다니 그런 시시한 규칙을 누가 만들었나. 너는 학교에 돌아가면 조반(造反)하라, 선두에 서서. 일요일은 나와서 놀아라. 회의가 있어도 나가지 말라.


왕해용 그런 대담한 짓은 할 수 없어요. 학교의 제도이고 규칙인데요. 그것을 위반하면 제도를 파괴했다고 큰일납니다.


모택동 무엇이 제도이고 무엇이 규칙인지는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냐.


왕해용 그럴 수 없어요. 비판받습니다.


모택동 그래 가지고는 내가 보기에 너는 장래에 큰일 못 하겠다. 한마디만 하면 제도의 파괴자라는 말에 겁을 집어먹고,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교수 수첩에 적히는 것을 걱정하고, 퇴학당할까 봐서 미리 떨고, 입당 못 할까봐 복종만 하고, 그래서야 뭐가 되겠니. 학교는 학생의 조반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왕해용 동지와의 담화).


 


 


이 조반정신이 문화대혁명에서 젊은이ㆍ학생들에게, 모택동 자신이 당과 정부와 공장과 인민공사의 기성권위와 무조건 복종의 체제를 깨버리게 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는 중국의 교육제도 전반과 특히 대학교육에 혁명을 가져왔다.


모택동의 교육사상과 그 결과인 중국의 교육혁명에는 문제도 많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적 조건에서의 것이지 반드시 보편ㆍ타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택동이 사라진 앞으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어쩌면 중국을 위해서는 타당할지도 모르며, 그밖의 전 세계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도전으로서 유심히 지켜봐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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