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냉전의 역사와 전개]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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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2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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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9

3-1. 「냉전의 역사와 전개」(1977년 『우상』)


 


이(異)체제의 동맹시대


 


냉전을 이체제 간의 관계현상으로 본다면, 냉전의 기원은 자본주의 질서의 세계와 역사 속에, 그에 대립하는 사회주의가 국가의 형태로 출현한 시기로 파악된다. 그리고 냉전이 체제 간의 ‘평화적 공존’과 대립이라면, 소비에트 정부와 그밖의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그 기원과 책임을 찾게 된다.


소비에트 정부는 혁명 직후의 제2차 소비에트 대회(1971.11.8)에서 체택한 휴전 강화 조건으로서의 ‘평화에 관한 포고’에서 모든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적 관계를 제안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출병 간섭이 거의 끝날 무렵인 1922년 3월 15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대한 각서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부르주아 국가들과의 정부ㆍ경제의 기본적ㆍ체제적 차이에 대해서 추호의 환상도 갖는 바 아니지만,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러 국가들과의 사이에 상호간 유익한 협력을 이룩할 수 있는 협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적으로 믿고 있다. 쌍방은 각기의 정부, 경제적 조직, 제도에 대한 불간섭을 보장하는 조건에서 모든 국가들과 밀접한 경제적 협력관계를 이룩하려는 굳은 결심으로 제네바회의에 참석할 것이다”라는 국가관계의 원칙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제의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1934년에 국제연맹 가입이 허용되고 미국이 혁명정권을 승인한 후에도 체제간 평화 공존, 상호 협조, 침략전의 규정안, 군축, 불가침 조약 등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국가의 ‘전사(前史)시대’적 대소(對蘇) 냉전정책은 대체로, 1930년대의 대공황의 결과 파쇼ㆍ나치ㆍ일제 세력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된 40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평화적 공존관계는 혁명 완수와 피폐한 경제의 복구 및 급속한 공업화를 위한 소련의 ‘자기보존’정책이었다. 약자가 공존을 요구하고 강자가 냉전정책을 추구하는 방식은 제2차 대전 후의 냉전, 특히 1950년대 중기까지의 미ㆍ소 관계에 그대로 계승됨을 본다.


소비에트 정권 수립 이후 20년 이상 계속된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공식적으로 끝난 것은 1941년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에 다 같이 적대적인 파쇼ㆍ나치 독재라는 새로운 ‘제3의 체제’와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결과였다. 1941년 7월에 영ㆍ소 상호 원조조약이, 8월에는 미ㆍ소 경제원조협정이 체결되었다. 대파시스트 전쟁이 끝나는 45년까지 5년간은 이체제 간의 동맹관계가 계속되었다.


 


전후 냉전의 성격과 전개


 


제2차 대전 후의 냉전은 ‘전사시대’적 냉전과는 기본적으로 그 구조적 성격과 규모를 달리했다.


① 정치적 분할: 그 대립이 전 세계적으로 거의 예외적 존재를 남기지 않을 만큼 세계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치ㆍ경제적 체제 세계로 분할했다.


② 양대 군사진영화: 두 세계는 핵무기를 갖는 것으로 해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멸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고, 어떤 민족이나 국가도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군사적 진영에 가입하고 이를 형성해야 했다.


③ 미소 중심 권력체제: 세계의 경제ㆍ정치ㆍ군사의 모든 권력이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미국을, 사회주의 세계에서는 소련을 중심으로 고도로 조직화ㆍ반항구화되는 양극화를 이루었다.


④ 이데올로기의 택일: 권력 정치적 대립의 이념적 구조로서 전세계의 인민은 두 가지 ‘생활양식’가운데 하나를 강제적으로 택일하게 되고, 각기 상대방의 이념에 대한 ‘전면적 부정’위에서만 전체적 구조의 존속이 보장되는 듯했다. 평화의 전 인류적 보편성의 유지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⑤ 소(小) 군주권 국가의 미ㆍ소 예속체제: 이상의 모든 요인은 필연적으로 모든 주권국가가 두 진영에서 하나의 초강국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종적 예속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냉전’이라는 차원을 떠나서 볼 때, 로마제국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정치구조가 되었다.


냉전의 전개 과정은 복잡했다. 그 과정을 형성하고 또 촉진하기도 한 요인도 무수히 많다. 무엇이 냉전의 원인이냐 하는 규명은 더욱이 어려운 문제다.


냉전은 현실적으로는 많은 요인과 요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과정은 한 요소가 발생ㆍ성장ㆍ소멸하고 새로운 요소가 뒤따라 동일한 과정을 걷는 생물학적 발전 과정, 이를 테면 요인의 일렬종대적 과정이기도 했고, 전 기간을 통해서 많은 요인이 횡대적(橫隊的)으로 병행, 상호작용해 확대 재생산되는 복합적 과정이었다. 그러기에 그 많은 요인을 수형화(數型化)해서 검토하는 방법은 시간적 관계를 놓치기 쉽고, 연대적 순서에 치중한다면 병존적 요소들 사이의 동시기적 상호작용ㆍ반작용의 과정을 파악하기 어려운 흠이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해 이 글에서는 편의상 몇 가지의 동시기적 요소들을 성격화해 그 특징을 전개 과정상의 시기적 구분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시도한다.


 


세계의 분할시기(1944~45)


 


1944년 1월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총반격이 개시되고 그에 앞서 미국 참전으로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 세력의 패배가 결정적인 국면에 들어갔을 때, 이미 추축국(樞軸國)의 구식민지와 전쟁 점령국가 및 지역에 대한 전후 처리 협상 과정에서 냉전은 시작되었다. 얄타ㆍ포츠담 회담은 종전 후 세계의 분할 회담이었다. 전 식민지ㆍ점령국의 분할 내지 지배권 구상은 발칸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걸친 것으로, 그중에서도 그 후의 냉전 과정에서 열전의 요인이 되는 독일ㆍ한국ㆍ인도차이나ㆍ(인도와 파키스탄 분리 독립구상에 의한)ㆍ아인도대륙ㆍ(이스라엘 건국 구상에 의한) 아랍 등 분할 국가ㆍ분할 지역의 출현은 냉전을 항구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냉전의 발동(1945~50)


 


이 시기의 사태 발전은 동구 국가ㆍ발칸반도ㆍ독일ㆍ일본ㆍ한반도 등에서 소련과 서방 측의 이해 대립이 고조되면서 중국 사회주의 정권 수립과 한국전쟁 발생으로 쌍방 세계의 이해 조정에 결정적인 종지부가 찍히는 시기다. 미국의 일방적인 원자탄 보유는 미ㆍ영 등의 대소협상에서 군사적 우위성을 확인했으며,이것을 반영해 이미 1946년 3월 처칠의 ‘철의 장막’연설이 나왔다. 한국전이 없었더라도 그리스 내란(1947)을 계기로 이미 소련 포위정책 노선을 확인하는 트루만 독트린이 나왔고, 대소(對蘇) 원폭 독점을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바르크안(1946.6), 마셜 플랜의 성립(1947.6)과 이에 대항하는 코민포름의 결성(1947.10),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전쟁과 이에 대한 미국의 지원(1949), 소련의 베를린 봉쇄(1948.6), 트루만 대통령의 저개발지역 개발원조계획(Point Four Programm) 선언에 의한 반공(反共) 군사경제원조계획 발표(1949.3), 그리고 중국 사회주의화(1949.9)와 때를 같이한 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1949.9) 등의 사태로 동서냉전은 이미 단계적 확대(escalation)를 시작한 것이다. 중국 사회주의화나 한국전쟁은 냉전의 원인이기보다 오히려 그 과정을 촉진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양극적 군사진영화 과정(1950~55)


 


그러나 중국의 사회주의화와 한국전쟁은 결정적으로 쌍방체제를 군사진영의 시대로 몰아넣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약한 입장에서 평화적 공존을 꾸준히 제의하던 소련은 원자무기의 개발과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성, 중국을 포함해 세계의 4분의 1의 땅과 3분의 1의 인구를 사회주의체제 속에 갖게 됨으로써 군사적 대결의 자세를 강화했다.


이때까지 주로 유럽에서 전개되어온 미국의 대소냉전은 아시아와 중동을 연결하는 전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서 동구ㆍ소련ㆍ중국ㆍ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을 포위 고립시키려는 범세계적 군사 체제의 조직화를 완수했다. 소련의 독일 통일 제안을 거부한 서방 측은 독일의 분할정책에 따라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동맹(NATO) 가입 (1952.2),이에 앞서는 일본의 독립과 재무장 및 일본의 미국 군사기지화(1951.9), NATO와 일본을 연결하는 바그다드동맹과 동남아방위조약(1955)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대사회주의 대량 보복 군사체제가 완성되었다. 소련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나토 결성보다 5년 늦은 1954년, 바르샤바 군사동맹을 결성하는 동시에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개별적 군사동맹 관계로 군사진영화를 완성했다. 이 체제는 미ㆍ소 쌍방의 수소폭탄 개발(미국 1952.11,소련 1953.8)을 뒷받침함으로써 그 전 단계까지의 국지적 대립은 핵 전면전쟁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


 


광기와 이성의 혼합시대(1955~62)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시초프의 공존 외교와 전략무기의 극한적ㆍ경쟁적 발전이 인류에게 희망과 위기를 교대로 안겨주는 사태가 연속되었다. 전후 처음으로 전쟁연합국의 정상이 제네바에서 회동하고(1955.7)‘경쟁적 공존’의 불가피성이 상호 시인되었다. 흐루시초프의 비스탈린화(1956.2)와 진영 내부의 개혁ㆍ통제 완화는 내외의 냉전 완화 요구가 시대적 주류임을 확인한 결과였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의 이에 대한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각기 진영 내부의 모순이 연속적으로 폭발했다. 동방에서는 헝가리와 폴란드 폭동으로(1956.10~ 11)으로, 서방에서는 이스라엘,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침략 및 후퇴(1956.11), 이라크 혁명으로 인한 동남아방위조약의 사실상의 와해와 미ㆍ영의 레바논ㆍ요르단 군사간섭(1958.7)은 각 ‘진영’의 취약성을 노출시킴에 충분했다. 쿠바혁명(1959.12)과 그에 앞서는 아시아ㆍ아프리카 신생 독립민족의 평화세력화(1955.4)와 유엔의 미국 지배하에서의 탈피(1960년 이후)는 덜레스의 극한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흐루시초프의 방미(1959.9)로 미ㆍ소의 공존 의지 확인과 병행해 중ㆍ소의 대립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은(1959.6) 냉전사의 큰 전환점이 된다. 쌍방의 궁극적 전략무기의 개발(1957)과 쿠바를 둘러싼 진영 간 핵전쟁 위기(1962.10)는 역사적으로는 냉전 에네르기의 양적 극한이 변증법적인 공존체제로의 질적 전환점이 되었다.


 


냉전질서의 해체 과정(1963~72)


 


핵무기에 의한 ‘공포의 균형’이 핵전쟁의 가능성을 후퇴시키는 구체적ㆍ심리적 작용은 자기보존의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미ㆍ소에 민족적ㆍ국가적 주권을 양도했던 예속 국가들에게 정치적 독립의 의지를 조성했다. 양극 군사진영은 정치적 ‘다원화’시대로 이행하면서 동서 냉전질서의 해체 과정을 촉구했다. 이는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중국ㆍ유고를 비롯한 많은 국가와 자본주의 진영에서 프랑스의 이탈과 유럽 공동체의 상대적 대미(對美) 독립 경합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핵실험(1964. 10)은 결정적으로 양극 질서의 개편을 알리는 종소리로 울렸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확대에도 불구하고 미ㆍ중ㆍ소ㆍ유럽의 정치적 다원화 과정과 전쟁의 ‘국지화’, 전면적 회피 노력은 쿠바 위기의 소산인 부분적 핵실험금지협정(1963.7), 핵확산금지조약(1968.7), 미ㆍ소 핵무기 제한교섭회담, 우주 평화이용 등의 일련의 군축노력으로 나타났다. 진영 간 모순이 해소되는 과정이 구조의 내부 모순을 격화하는 변증법적 발전을 촉구했다. 정치적으로는 독일ㆍ베를린ㆍ핀란드(1972)……문제의 합의로 사실상 2차대전 결과의 현실 승인으로 되돌아갔다. 새로운 권력정치적 질서 개편 노력은 마침내 미국 대통령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과 ‘세계의 헌병’역할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으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미국의 냉전 지향적 시대는 끝이 났다. 레닌이 평화공존을 제기한 지 꼭 반세기 만에 자본주의 세계는 냉전의 종식을 수락한 셈이다.


 


동북아시아의 냉전 전개 과정


 


전후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은 대체로 3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 아시아 공산주의 고립화 시기(1946~49), 둘째, 중국 포위고립화 시기(1950~69), 셋째, 4대국 질서 모색 시기(1970~).


미국은 처음 전시 동맹국인 중국을 일본 군국주의의 재기를 견제하고 소련ㆍ북한에 대항하는 자본주의적 아시아의 반공 주도국화할 것을 구상했다. 장개석 정권에 대한 전면적 지지와 원조로도 반공 중국의 실현 가능성이 멀어지자 만주만의 분리라도 달성하려 했다. 이 노력이 모두 실패하게 됨으로써 미국은 최소한 중국 대륙의 완전한 사회주의화를 저지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시도했다. 국제정치의 정통적 형태로서는 종전 후 국공합작의 실패까지의 기간 중의 미국정책은 ‘냉전’정책이라기보다는 카이로 선언, 포츠담 선언에 따르는 전후 동북아 처리의 노력이었다. 대(對)중국정책이 냉전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다. 일본에 대한 최초의 원자탄 사용을 들어 이미 미국의 동북아 냉전의 의사 표시로 해석하는 견해도 유력하나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적어도 중국의 사회주의화 이후인 1960년 1월 5일, 대만이 중국의 영토임을 재합의한 얄타ㆍ포츠담 회담을 재확인하는 트루만 성명이 나온 것은 이때까지의 미국정책은 2차 대전의 연장이지 전후 냉전의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주의화(중국 대륙의 ‘상실’이라는 용어는 중국이 본래 미국의 것이 아니었던 이상 제3자적 입장에서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로 자극된 미국 국민의 실망과 공포는 미국 정치를 급속도로 반공적 성격으로 몰아갔고 이에 한국전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중국 불간섭정책은 한국 참전을 계기로 유럽에서의 대소관계와 같은 포위ㆍ고립화정책으로 전환케 하는 한편, 대만과 한국의 항구적 반공 군사기지화, 일본의 동북아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군사 및 경제 기지화 정책으로 전환했다. 일본 점령ㆍ관리체제에서의 소련의 실질적 배제는 소련의 냉전적 대응을 일으켰다. 유엔에서의 압도적 우위를 이용한 정치ㆍ군사ㆍ경제면에서의 단호한 대(對)중국 제재 조치와 일본의 재무장 결정으로 정착한 동북아에서의 양체제 간 냉전은 유럽과 전 세계적 관계 정상화 조류와는 단절된 채 굳어가기만 했다. 정치ㆍ경제ㆍ군사적 측면의 구체적 이해 고려보다도 황화론적(黃禍論的) 편견과 공포의 심리적 요소가 미국의 국가 이성의 작용을 저해한 사실이 유럽에서의 대소(對蘇) 냉전 과정과 대조적이다. 냉전에서 심리적 요소는 1차적 기능을 가진다.


4대국(미ㆍ소ㆍ중ㆍ일)에 의한 동북아 평화질서의 모색은, 아시아의 두 ‘분할 국가’-베트남과 한국-가 실제로 열전화할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미국의 뼈저린 체험으로 확인된 뒤에야 기동하기 시작했다. 이 측면에서는 한국전쟁보다 베트남ㆍ인도차이나전쟁이 더 효과적이었다.


중ㆍ소의 결정적 대립관계 발전, 아시아 대륙에서의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 내 여론의 강화,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및 동북아문제 해결의 불가능성, 일본의 종합적 국력 강화와 대미 관계에서의 상대적 독립화는 동북아 4강의 ‘힘의 균형’을 형성했다. 종전 후의 분할 지대-베트남ㆍ아랍ㆍ중동ㆍ대만ㆍ아인도 대륙-가 예외없이 전쟁의 현재적(顯在的)ㆍ잠재적요인이라는 확고한 인식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4강의 대(對)한반도 냉전에 종지부를 찍은 듯하다. 정상적 국제정치ㆍ외교의 차원에서 한반도의 평화질서를 구축하려는 4강의 노력은 냉전적 세계관의 청산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열전과 냉전사의 교훈


 


열ㆍ냉전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의 공통적 현상(결과)은 그것이 사회주의나 사회주의적 국가세력을 산출해왔다는 사실이다. 제1차 대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체제인 소련이, 그리고 제2차 대전의 결과로 동유럽과 중국ㆍ베트남ㆍ북한 등이 나타났다. 서방 측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의 중동전쟁은 많은 아랍 국가들을 자본주의 노선에서 중립 내지 친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도록 했음을 보게 된다. 아인도 국제전쟁에서 승리한 인도와 서파키스탄은 친소련으로, 패배한 동파키스탄도 내부체제를 사회주의화하면서 친중국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베트남ㆍ인도차이나전쟁의 결과, 크메르ㆍ남베트남ㆍ라오스ㆍ버마 심지어 태국까지 국가체제와 국제 정치상 노선이 친서방에서 친동방적으로 전환된 것을 본다. 여러 전쟁과 장기간의 냉전은 미국의 종합적 국력의 약화로 말미암은 서방세계의 정치ㆍ경제적 혼란의 항구화, 상대적으로 제3세력ㆍ후진 국가세력의 대(對)중국 접근 노선을 촉진했다. 과도적 현상이라 하더라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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