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영희 선생의 슬기로운 감옥 생활 3 / 김학민
리영희 선생의 슬기로운 감옥 생활 3

김학민(경기아트센터 이사장)
리영희 선생은 1977년 11월 23일,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 필화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구속·기소되어 대법원에서 최종 2년 징역형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서울구치소를 떠나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피살 소식을 감옥 안에서 접하였고, 그 2개월여 후인 1980년 1월 9일 형기를 모두 채우고 감옥 문을 나왔다. 그리고는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인 2월 29일 사면 복권되었고, 3월 7일 한양대 교수로 복직했다.
세 번째 구속 ‘김대중 내란음모’ 배후조종(1980)
그러나 리영희 선생이 2년여 동안 빼앗겼던 자유를 누리면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은 고작 4개월 정도였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이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 선포하고 정치인·재야인사·지식인·언론인·문인·종교인·노동운동가·학생 등을 대거 연행 구속할 때, 리영희 선생도 한밤중에 화양동 자택에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곧 선생도 전두환 신군부 일당이 벌인 ‘내란’의 ‘수거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선생은 감옥에서 갓 석방된 1980년 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각종 정치단체와 학생 노동자 대중들의 시국 관련 시위와 운동이 자기 규제와 운동세력 간의 상호 조절 없이 난무하는 상태를 불안하게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년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 국내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또 4년 동안 대학에서 추방당했다가 모처럼 복직되어 강의와 연구, 집필 생각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리영희 선생이 전두환 신군부의 표적이 된 것은 ‘서울의 봄’이 절정에 달했던 5월 15일에 발표된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한 일 때문일 것이다. 학계·종교계·법조계·문단·언론계 인사 등 134명이 이 선언에 서명했는데, 선언문은 비상계엄령 즉각 해제, 최규하 과도내각의 단축, 학문의 연구와 발표의 자유 보장, 족벌재단 교수 재임용제 폐지, 언론의 독립과 자유 보장, 해직 기자 전원복직, 노동기본권 보장과 대기업 편중 지원정책 폐기, 민주인사 석방·복권·복직, 국군의 정치적 중립, 전두환의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겸직 시정 등의 내용을 담았다.
전두환 신군부로서는 대학사회에 영향력이 지대한 지식인 134명이 서명한 이 ‘시국선언’이 그들의 정권 탈취에 큰 위협이 되리라고 보았고, 그래서 계엄 확대 때 이들을 학생 시위의 배후로 간주해 대거 구속한 것이다. 그러하니 감옥에서 나온 후 리 선생이 의도적으로 사회참여를 삼가려고 했지만, 신군부는 당시 김대중 진영에 발을 깊숙이 담근 학계·종교계 인사들을 빼고는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리영희 교수를 꼭 집어 구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5월 17일 11시 30분경, 안방에서 막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에 담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온 다섯 명의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가택 수색을 당하고는 곧바로 연행되어 남산 중정 건물 지하 3층에 갇혔다. 리영희 선생은 두 달여 동안 거기에 불법 구금되어 있으면서 조사를 받았다, 리 선생의 회고다.(『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 대화』)
“…(나도 내가) 끌려온 이유가 뭔지도 모르는 거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조사관이 4명인데, 나에게는 하나가 더 붙어서 5명이야. 후에 알고 보니까 나를 굉장한 거물로 취급했거 나, 제일 악질이거나 영향력이 있다고 봤던 것 같아. …오직 김대중 씨 이야기를 집요하게 묻더군. 그래서 김대중에게 뭔가 문제가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광주에서 무슨 일이 났다 는 것은 전혀 눈치를 못 챘지. …끝내 광주에서 뭐가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고 지냈다구. …두 달여 만에 석방되어 나오니 집사람이 내가 ‘광주폭동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호외를 보여줘요. 기가 막힐 노릇이지.”
중앙정보부는 그렇게 리영희 교수를 ‘거물’로 취급, 김대중과의 연계점을 밝히기 위해 집요하게 조사했지만, 리 교수가 최근까지 2년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고, 이전에도 김대중 등 정치인들과는 교유가 거의 없어 조사는 10여 일 만에 싱겁게 끝났다. 그러자 중정은 도표를 하나 들고 와 “김대중이 집권하면 조세형이 그 정권 아래에서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여, 경향신문 출신 서동구를 편집국장으로 하고, 리영희가 논설주간을 맡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김대중과의 연계에 실패하자, 중정은 서동구를 고문하여 별건 사건을 조작, 리 선생을 엮어보려 했으나 그 허술한 시나리오를 리 선생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리 선생에게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중정 수사팀장은 “별거 아니니 시인해 주시라”고 선생께 간절히 요구했고, 리 선생은 그 지긋지긋한 중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충 그 요구와 타협, 두 달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기세등등하게 몰아쳤던 ‘내란음모’는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되었지만, 리영희 선생 앞에는 다시 한양대 교수직에서 쫓겨나는 등 ‘형극의 길’이 펼쳐졌다.

네 번째 구속 기사연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사건(1984)
1982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극에 달하던 시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약칭 기사연, 원장 조승혁 목사)은 통일의 관점에서 교과서 분석 작업을 하기로 하고, 기사연 부원장 김용복 목사를 책임자로 하여 이를 1983년도 사업으로 편성했다. 이에 따라 기사연은 현직 교사 9명을 초치, 이들에게 초·중·고 교과서 내용 중 통일 관련 부분 분석·연구를 맡기기로 하고, 사전 작업으로 이들 분석연구팀을 포함하여 20여 명의 교사에게 ‘통일과 분단 극복에 관한 교육’을 실시했다.
이 강의는, 1983년 4, 5, 6월 3회에 걸쳐 당시 해직 교수였던 김진균 선생이 ‘사회학적 분석방법론’을, 리영희 선생이 ‘남북의 분단 현실과 분단을 유지하고 있는 제반 조건’을, 강만길 선생이 ‘분단과 통일 과정의 역사적 배경’을 각기 주제로 하여 열렸는데, 그해 겨울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세 사람의 강의 내용과 이 사업의 수행 과정을 포착하고, 1983년 12월 31일 조승혁 목사와 리영희, 강만길 교수를 연행, 조사를 벌인 후 1984년 1월 10일에 구속했다.
이 사건은, 1983년 12월 ‘노동야학’ 조직을 기획 수사하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기사연 분석연구팀의 일부 교사를 관련 혐의로 내사하면서 시작되었다. 대공분실은 분석연구팀의 팀장 격인 유상덕과 면목여중 김한조 교사가 이에 연루되었다고 보고, 교사 9명을 모두 참고인으로 불러 진술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교과서를 조사 분석하여 내놓은 결과물은 특이한 점이 없어 교사들을 입건하지는 않았지만, 대공분실은 이들을 ‘교육한’ 강사들에 주목했다. 리영희 선생은 그 얼개를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 대화』)
“기사연은 세검정에 있었어요. (당시) 나는 기사연의 국제(문제) 전문위원인가를 맡고 있었어요. 강의는 진지한 사후 토론과 함께 잘 끝났지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 강의 가 있은 지 몇 달 후입니다. 나는 그 일을 다 잊고 있었어요. 그 작업에 참여했던 토론반의 좌장 격인 유상덕이라는 교사가 있었어요. …나의 강의를 메모한 이 친구의 노트가 문제가 되었지요. …이 친구가 (남북문제에 대해 내가 이야기한) 그런 여러 가지 해석을 처음 들으니까, 그 기록을 자세히 적어 보존하려고 했는지 벽시계 속에 그 노트를 숨겨놨대. 그러다가 무슨 다른 사건으로 가택 수색을 당했는데, 그 시계에 숨겨놓은 것이 나온 거지. …그래서 어이없게 고초를 치렀지요.”
남영동 대공분실은, 리영희 선생 등이 현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판하면서 ‘6.25는 정통성을 가진 북한의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반제국주의 투쟁이었다,’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고려연방제가 현실적인 통일방안이다,’ ‘남한의 반공교육이 통일을 방해하는 요소다’ 등등 교사들에게 반국가적 의식화 교육을 했다고 발표했으나, 내용과 형식 자체가 용두사미 꼴이 되어 리영희 선생 등 3인은 2월 14일 모두 공소보류로 풀려났다. 다시 리영희 교수의 회고다.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 대화』)
“(들어갈 때는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는데) 내보낼 때는 서대문형무소로 보내서 나온 거지. 그때 내 담당이 이희윤 검사였는데, 박정희에게 아주 충직한 인물이었지요. 공안부장은 이건개였고. 간첩 문서나 나온 듯이 큰일을 만들려고 했지. (그런데) 알고 보니 강의 내용이 (그저) 그랬는데, 용두사미로 내보낼 수도 없고, …이건개가 나에게 제안을 하더군. 하여간 사전에 ‘내가 잘 못 했다’는 녹화 테이프를 촬영한 후 그것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도되면 풀어주겠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 ‘무슨 이야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녹화 방송이 아니라 라이브로 하자.’ …그것 가지고 또 일주일 연기되고 하다가, 결국은 ‘내보낼 테니 뭔가 한마디는 해야 하지 않는가,’ 뭐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 …아무 소리도 안 할 수 는 없는 상황이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다’고 이야기했지.”

필자는 그 사건 즈음 동대문구 장안동의 30여 평 되는 삼성빌라에 살고 있었다. 리영희, 강만길, 조승혁 세 분이 대공분실에 연행된 후인 1984년 1월 초일 것이다. 기사연 연구원 이미경(전 국회의원)과 유상덕으로부터 좀 긴박한 문제로 여러 사람이 모여 며칠간 토의할 장소가 필요한데, 우리 집의 방을 하나 내줄 수 있는가, 물어 왔다. 직감적으로, 혹시 모를 구속을 피하기 위한 은신처를 구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아내를 얼버무려 안심시키고는 방 하나를 내주었다.
그렇게 대여섯 명의 교사가 20여 일 동안 우리 집에 은거하고 있다가, 2월 들어 리영희 선생 등 구속자들이 풀려나자 이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분석연구팀 교사 9명은 그 사건으로 형사 조치 단계로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바로 모두 자신들이 근무하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강제 전보되었다. 그중 한 사람인 안승문 선생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최근 관련 교사들과 협의하여 ‘진화위’(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강제 전보의 진상을 규명해 주도록 요청서를 제출하였다고 한다.
다섯 번째 구속 ‘한겨레신문 방북 취재’ 사건(1989)
1988년에 창간한 한겨레신문 편집국은 그해 7월 말 소속 기자를 북조선에 파견해 김일성 주석과 회견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리영희 선생은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겨레의 비상임 논설 고문만 겸하고 있어 편집국에서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는 그 계획은 전혀 알지 못했다. ‘방북 취재’가 성공하든 못하든 이에 관련된 사람은 실정법상 모두 구속될 가능성이 큰데, 감옥을 들락날락했던 리 선생을 거기에 또 끌어들이기에도 부담이 컸을 수 있다.
그런데 결과는? 1988년 한겨레 편집국의 야심 찬 ‘방북 취재’는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해 그냥 ‘계획’으로만 남았는데, 1989년 4월 11일 리영희 선생만 이와 관련하여 자택에서 안기부로 연행, 이틀 후인 14일에 구속되었다. 그리고는 한겨레 편집국이 압수·수색을 당하고, ‘방북 취재’ 계획에 관련된 임재경 부사장 등 회사 간부와 편집국의 편집위원장, 기자들도 입건되거나 검찰에 출두하여 참고인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그런데 ‘방북 취재’를 기획하지도, 추진하지도 않은 리영희 선생만 왜 구속되었을까. 그간 독재정권의 주구였던 공안 기관은, 리영희 선생의 사상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 사상을 구체화한 리 선생의 글과 말씀이 대학생들을 의식화시켜 반정부 행동으로 유도했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의 말과 글, 생각에서 조금이라도 빌미가 잡히면 바로 구속하여 감옥에 가둔 것이니, 1989년 4월 선생이 ‘한겨레 방북 취재 사건’으로 구속된 이유도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의 네 차례 구속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한겨레의 방북 취재’ 기획과 추진에 리영희 선생이 어느 정도까지 관련되었고, 또 어떤 수준까지 역할을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2009년 ‘한겨레 창간 30년사 편집팀’이 아카이브에 정리, 발표한 글이 있고, 1988년 7월 한겨레 편집국의 북한 취재 시도 때 방북 기자로 선발되었던 문학진은 지난 5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그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나는 조선일보를 사직, 반토막 월급을 받고 한겨레로 옮겼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마음 놓고 언론자유를 누리며 기자 생활을 할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 당시 나는 사회부 소속으로 영등포경찰서를 출입하고 있었는데, 창간 초기의 푸르른 꿈과는 달리 매일매일 쳇바퀴 도는 경찰 관련 취재에 에너지가 죽죽 방전 되고 있었다. 그즈음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적 공존’을 골자로 하는 ‘7.7선언’을 발표했다. 나는 그 ‘7.7선언’을 읽고는 한겨레 사회부 김두식 부장을 만나 ‘민주, 민족 문제에 깊이 천착하겠다는 한겨레의 창간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방북 취재를 추진해 보자’고 설득했다.
김두식 부장은 바로 내 제안을 장윤환 편집국장에게 보고하였다. 이 계획은 철두철미 보안을 유지하여 편집국의 장윤환 편집위원장, 김두식 사회부장, 나, 그리고 조금 늦게 참여한 고희범 네 사람만 공유하며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사장을 비롯한 신문사 간부들은 물론, 자기 가족에게도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방북 취재를 위해서는 우선 북조선 측이 입국을 허가해야 하고, 둘째 김일성 주석과의 회견이 보장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두 난제를 해결해줄 루트는 당시 대한민국 내에 전무 했으므로, 편집국장과 사회부장도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나는 기사를 쓰기 위해 온갖 정보 소스를 찾아다니며 묻고 확인하는 것처럼, 이 난제의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골몰하다가 먼저 한양대의 리영희 교수를 찾아갔다. 한겨레의 방북 취재 계획을 간추려 설명하고는 선생의 의견을 물었다. 리 선생은 ‘김일성 주석과의 회견은 기자 시절 나도 꼭 해보고 싶었다’며, ‘한겨레가 이를 추진한다면 큰 의미가 있을 역사적 사건이다’라고 격려했다. 그 후 리 선생과 술도 마시는 등 여러 차례 만나 우리의 ‘방북 취재’에 도움이 될 말씀을 들었다. 한마디로 북조선 측이 신뢰할 만한 일본의 유력인사와 의논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쿄대 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와 일본의 권위 있는 월간지인 <세카이(世界)>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가 그들이었다.
1988년 7월 말, 나와 고희범은 김두식 부장이 챙겨주는 ‘봉투’를 받아 상의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고는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나리타공항에 내려서는 바로 당시 도쿄대 대학원에 유학 중이던 강창일(전 주일한국대사)의 하숙집으로 가 짐을 풀었다. 당시는 비자 없이도 3일은 머물 수 있어서 3일 안에 북조선의 입국 허가서가 도착하면 곧바로 베이징 경유하여 평양에 들어가기로 계획을 짰다. 북조선 측과의 교섭은 야스에 료스케가 맡았고, 와다 하루키는 그로부터 결과를 들어 우리에게 전달해 주기로 했다. 이제나저제나 그 ‘허가서’를 기다리다가 후딱 3일이 지나가 비자가 만료되었다. 도쿄의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내 지인의 도움으로 10일 체류의 비자를 받아 계속 기다리다가 북조선 측의 연락을 받았다.
야스에 료스케로부터 직접 들었는지, 아니면 와다 하루키에게서 전해 들었는지 기억이 감감하지만, 북조선 측이 보내온 내용은 ‘당신들의 취재 요청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8월 17일부터 서울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데, 이때 당신들이 공화국에 들어와 뉴스들을 내보내면 88올림픽을 방해하려는 책동이라고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귀국하면 바로 구속될 터인데, 공화국으로서는 당신들을 보호하지 못한 꼴이 된다’는 논리였다. 그 소식을 듣고 나와 고희범은 와다 하루키와 함께 밤새 통음하고는 빈손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겨레의 ‘방북 취재 프로젝트‘는 다시 추진되지 않았고, 나도 검찰로 출입처가 바뀌어 바쁘게 지내고 있었는데, 1989년 4월 리영희 선생이 구속되는 등의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리영희 선생 구속 즈음 나도 검찰에 출두해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신문사 내에서도 극비로 추진되었고, 전혀 실현되지도 않은 계획을 안기부가 샅샅이 알고 있어 깜짝 놀랐다. 짐작되는 바가 있지만, 확증이 없어 지금까지도 그 부분은 가슴 속에 눌러두고 있다.
검사는 한겨레의 검찰 출입 1진인 나를 대우해서인지 비교적 설렁설렁 조사하고는 사건을 종결했다. 결국, 직접 취재를 위해 북조선에 가려고 했던 젊은 나는 참고인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나고, 우리에게 조언을 해준 회갑의 리영희 선생은 구속되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다.”
그렇다면 2009년 ‘한겨레 창간 30년사 편집팀’이 아카이브에서 밝힌 ‘한겨레 방북 취재’ 사건의 전말은 어떠한가?
1989년 들어서자 여소야대의 정치정세 아래서 노태우 정권은 국내적으로 유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국제적으로도 소련, 중국 등 공산권 나라들과의 수교를 은밀히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 사이에도 평화적 분위기가 일면서 종교계, 체육, 언론 등을 중심으로 북한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 미국에 지사를 둔 언론들은 미국 국적 지사 기자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 소식’을 취재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1989년 1월, 한겨레의 임재경 부사장, 리영희 논설 고문, 장윤환 편집위원장, 정태기 개발본부장 등이 모여 창간 1주년 특집으로 소련, 중국, 동유럽 등 공산권 나라들을 기획 취재하기로 하고, 여기에 북한도 포함했다. 그리하여 리영희 선생이 일본의 진보적 월간지 <세카이(世界)>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에게 김일성 주석과의 회견을 주선해 주도록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고 기다렸으나, 야스에로부터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런 중에 중앙정보부가 리영희 선생을 전격 연행, 구속한 것이다. 그리고 한겨레 편집국이 압수 수색을 당했고, 임재경, 장윤환, 정태기 세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결국, 1988년 한겨레 편집국의 ‘단독 방북 취재 기획’이 1차 시도였다면, 1989년 한겨레 고위 간부진들의 ‘소련, 동유럽 등 공산권의 일원으로서의 방북 취재 기획’은 2차 시도라 할 수 있다. 1차, 2차에 모두 간여한 리영희 선생을 중앙정보부가 주목하였음은 그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1977년 성균관대 2학년 재학 중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서 리영희 선생을 만났던 성종대는, 1989년 서대문에서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간 서울구치소에서 다시 리 선생을 만났다. 당시 국회의원 이철의 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성종대는, 1989년 5월 중순, 국방부의 국회 보고자료를 평화연구소 조성우 소장에게 전달하여 ’군사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리영희 선생도 그해 4월 14일 한겨레신문의 방북 취재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것이다.

당시는 여소야대(與小野大)의 노태우 대통령 치하여서 감옥살이가 그렇게 까탈스럽지는 않았다. 교도 행정도 완화되어 리영희 선생은 검찰, 법원, 변호인 측에서 생성한 관련 자료, 또는 밖에서 넣어준 자료들을 소지하여 항시 연구하고 탐색했다. 그리고 이미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진 분이 되어 교도관들도 리 선생을 ‘수번(囚番)’으로 부르지 않고 ‘선생님’으로 불렀다.
리 선생과 성종대는 운동을 나갈 때 각기의 감방을 찾아가 2, 3분 만나거나, 가끔은 가족 면회 때 스치듯 조우하기도 했다. 리 선생은 자신의 구속은 “한겨레신문 등 진보세력에 가하는 일시적 ‘공안’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그렇게 감옥에 오래 있지는 않을 것”으로 느긋하게 판단했다. 성종대는 “1977년에 만난 리영희 선생은 ‘꼿꼿한 선비’의 모습이었으나 1989년에 만난 리 선생은 ‘세상사에 달관한 도사’ 같은 원숙함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리영희 교수의 ‘한겨레신문 방북 취재 관련 사건’ 일지
1989년
4. 12. 안기부, 리영희 선생 안기부 연행
4. 14 구속(영장청구 - 서울지검 이상형 검사, 발부 - 서울형사지법 임채균 판사)
4. 22 5.3까지 구속 기간 연장(결정 - 서울형사지법 송두환 판사)
5. 2 서울구치소 입감(8사하 2방, 수용 지휘 - 서울지검 이상형 검사)
5. 9 부인 윤영자 여사와 첫 면회
5. 13 한겨레신문 송건호 사장에게 서신 발송
5. 29 기소(국가보안법 등 위반)
6. 24 전방(11사상 2방)
7. 24 1심 1차 공판
8. 9 1심 2차 공판
8. 21 1심 3차 공판
9. 11 결심(징역 4년, 자격정지 4년 구형)
9. 25 선고(판결 - 서울형사지법 이태운 판사, 징역 1년 6월에 자격정지 1년)
석방(집행유예 2년, 석방지휘 - 서울지검 이은중 검사)
1993년
2. 2 항소기각(서울형사지법 제6부 곽동효, 이상민, 김우진 판사)
1989년 서울구치소에 수감 되었을 때 리영희 선생은 치통으로 많이 고생한 듯했다. 7월 12일에는 부인 윤영자 여사가 ‘치아 파절(破切)을 치료하기 위해 외래 치과의사 진료 신청을 했고, 구치소 당국이 이를 허가해 7월 13일 오전 9시 40분부터 11시까지 치근단 농양을 치료했다. 7월 18일에도 치통이 심해 사약(私藥) 진통제 구매를 요청했으나 불허되었다.
하찮은 물건이지만 사람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손톱깎이이다. 손톱깎이가 널리 일반에 보급되기 전에는 가위로 손톱 발톱을 깎았지만, 가위를 사용하려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하므로 불편했다. 감옥에서 수용자 개인이 가위나 손톱깎이를 지참하는 것은 위해(危害) 물건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손톱을 깎으려면 교도관에게 공용 손톱깎이를 요청하여 해결하고 꼭 반환해야 한다.
리영희 선생도 손톱을 깎아야 하는데 ’일일이 손톱깎이를 신청하고, 또 반환하고 하는 그 일‘이 성가셨던 모양이다. 1989년 5월 18일의 서울구치소 ’동태(시찰) 상황‘ 기록에 의하면 ’손톱깍기 사용 허가 상신‘이라는 제목 아래 “이 사람은 89. 5. 2 국가보안법으로 입소, 현재 8동하 2실에 독거 수용 중인 자로서, 동인의 연령(60세)과 건강상태(치아 의치)를 참작하여 타 재소자 접촉을 사전 방지하고자 손톱깍기를 개별 지급하여 사용토록 하므로서 수용 생활에 안정을 도모함이 좋겠습니다.”라는 담당 교도관의 상신이 있었고, 보고자인 보안과장은 구치소 부소장에게 “동인의 연령 및 건강과 수용 처우상 손톱깍기 개별 지급하여 수용 생활에 안정을 도모함이 좋겠습니다.”라는 의견을 내 그 ’상신‘은 이루어졌다.
담당 교도관에게서 손톱깎이를 넘겨받은 그 날, 선생께서는 그 손톱깎이를 어루만지며 잠시나마 빙그레 미소를 지셨을 것이다.

|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 102 |
캄보디아 범죄단지에서 본 동아시아식 개발주의 경험
관리자
|
2025.12.06
|
추천 0
|
조회 108
|
관리자 | 2025.12.06 | 0 | 108 |
| 101 |
『베트남전쟁』을 읽어야 하는 시대는 끝났는가?
관리자
|
2025.12.06
|
추천 1
|
조회 47
|
관리자 | 2025.12.06 | 1 | 47 |
| 100 |
혁명의 유산. 누가 네팔의 미래를 훔친 걸까? / 전명윤
관리자
|
2025.11.01
|
추천 4
|
조회 905
|
관리자 | 2025.11.01 | 4 | 905 |
| 99 |
트럼프의 미국과 탈단극의 세계, 그리고 한국의 선택 / 차태서
관리자
|
2025.10.01
|
추천 0
|
조회 430
|
관리자 | 2025.10.01 | 0 | 430 |
| 98 |
반중/혐중의 시대에 다시 읽는 <8억인과의 대화> / 하남석
관리자
|
2025.10.01
|
추천 0
|
조회 475
|
관리자 | 2025.10.01 | 0 | 475 |
| 97 |
조세이탄광 터에서 기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 김영환
관리자
|
2025.09.01
|
추천 5
|
조회 1068
|
관리자 | 2025.09.01 | 5 | 1068 |
| 96 |
리영희 선생의 슬기로운 감옥 생활 3 / 김학민
관리자
|
2025.08.31
|
추천 1
|
조회 538
|
관리자 | 2025.08.31 | 1 | 538 |
| 95 |
리영희 선생의 슬기로운 감옥 생활 2 / 김학민
관리자
|
2025.07.01
|
추천 1
|
조회 833
|
관리자 | 2025.07.01 | 1 | 833 |
| 94 |
분단의 비극을 불멸의 사랑으로 승화시킨 연인들의 이야기
관리자
|
2025.06.03
|
추천 0
|
조회 523
|
관리자 | 2025.06.03 | 0 | 523 |
| 93 |
트럼프의 미국과 세계, 그리고 한국의 선택 - 여전히 한반도 비핵화가 정답이다 / 이삼성
관리자
|
2025.06.03
|
추천 2
|
조회 750
|
관리자 | 2025.06.03 | 2 | 750 |
| 92 |
리영희 선생의 슬기로운 감옥 생활 1 / 김학민
관리자
|
2025.06.03
|
추천 4
|
조회 595
|
관리자 | 2025.06.03 | 4 | 595 |
| 91 |
리영희 선생과 나 / 김만수
관리자
|
2025.05.02
|
추천 3
|
조회 887
|
관리자 | 2025.05.02 | 3 | 887 |
| 90 |
트럼프의 미국과 세계, 그리고 한국의 선택 - 주한미군과 한반도 전수방위 원칙 / 이삼성
관리자
|
2025.05.02
|
추천 1
|
조회 740
|
관리자 | 2025.05.02 | 1 | 74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