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리영희> 출간례를 가다 / 황광우
<나와 리영희> 출간례를 가다

황광우(<철학콘서트> 저자, 인문연구원동고송 이사)
해마다 오월이 오면 서울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광주의 망월동 묘역으로 리영희 선생을 찾아오는 이가 있다. 이규이다. 그는 1975년 광주일고 재학시절 유신철폐 시위를 모의하다 제적된 ‘문제학생’이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한양대학교에 들어갔다.
1977년 그 무렵 한양대학교는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다. 이규는 외롭지만 열정적으로 한양대학교 학생운동의 밭을 일구어갔다. 긴급조치 9호 시절이었다. 이규는 박정희를 몰아내는 싸움에 젊음을 걸었다. 신림동 B지구 꼭대기를 오르내리며 겨레터 야학을 이끌었고, 1978년 10월 17일 광화문 시위를 기획하였던 ‘6개대학연합시위팀’의 일원으로 뛰었으며, 1979년 11월에는 남영동에 끌려가 남민전 관련으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이 되자 한양대에서도 ‘학원민주화의 꽃’이 피어났다. 이후 한양대학교는 전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강성 운동권 대학으로 변모하였다. 이규는 한양대 학생운동의 원조였다.
이규의 배후에 리영희가 있었다. 이규는 1978년 2학년이 되어 전공 수업은 내팽개치고 리영희 선생을 쫒아다녔다. 경제학과 학생이 신방과 수업을 들었다. 수업만 끝나면 교수 연구실로 따라가 묻고 따졌다. 사찰 대상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이규로 하여금 집으로 와서 이야기하자며 ‘자유 방문’ 티켓을 주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방문하였고, 밤 깊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철부지 학생이 사모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선생을 괴롭혔다.
리영희 선생의 훈화를 들으며 자란 이규였으나 나는 선생의 육성을 듣는 훈자(薰炙)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다만 박현채 선생으로부터 리영희의 일화를 들었을 뿐이다.
리영희: 어이, 현채, 딸이 가출했나 봐. 집에 들어오질 않네. 큰일 났어.
박현채: 공장에 들어갔겠지.
리영희: 그럼, 어떻게 해야지?
박현채: 영희, 너, 지금 딸 자랑하는 거지? 걱정은 무슨 걱정? 방값이나 두 둑하게 줘. 연탄가스 마시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니야?
오늘은 리영희 선생을 만나는 날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책, 『나의 리영희』의 출간례가 열리는 날이다. 245빌딩 4층에서 오후 7시 30분에 열릴 예정이었다.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영상물이 방영되었다. 김민기의 노래가 우리들로 하여금 1970년대로 빨아들였다. 네 분의 연사가 앉아 있었다. 제일 왼편에 박병기 교수가 자리를 잡았고, 오른편에 황석영 선생이 자리를 잡았다.
박병기 교수는 전남대 철학과에서 젊음을 보낸 연구자이다. 그곳에서 삶의 대미를 장식하고 지금은 은퇴 학자로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역시 오늘 향연의 주역은 황석영 선생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군산에서 이곳까지 와 주셨다.

마이크를 잡은 황석영은 『객지』와 『전환시대의 논리』 두 권의 책이 맺은 인연에서부터 포문을 열었다. 『객지』가 창비신서 3권이었고, 『전환시대의 논리』가 창비신서 4권이었다. 그러니까 1974도에 문제작 두 권이 동시에 연이어 출간되었던 것다. <창작과 비평사>의 백낙청과 염무웅은 수시로 작가들에게 연회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회과학자와 소설가가 동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두 분의 배려 덕택에 황석영은 리영희와 함께 자리를 하였다. 리영희 선생은 1929년생이고, 황석영은 1943년생이니, 나이로만 보아도 동석하기 힘든 사이였다.
글만 보아선 ‘날카로운 눈매의 꼬장꼬장한 지식인’일 것이 틀림없는 리영희 선생이었는데, 자리를 함께 할수록 ‘농담도 잘하는 따뜻한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고 황석영은 회고하였다.
“그때 함께 놀았던 친구들 다 갔어. 8할이 갔지. 뭐, 이부영, 김정남, 박석무, 요 정도 남았어.”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설령 60의 초로일지라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창작활동은 못 하더라도 봉사활동은 해야 한다. 봉사도 못 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84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황석영이다. 창작을 향한 그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내가 리영희 선생의 자택을 출입할 때 조그만 딸이 있었지. 초등학교 4,5학년 다니던 때였을 거야. 아, 근데 그 딸이 커서 노동운동하다가 영등포교도소에 들어갔잖아. 1986년이었을 거야. 딸 면회를 하고 나온 리영희 선생이 우는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한 방 먹였지. ‘아니, 수천 명 어머니의 애가슴을 타게 만든 장본인이 정작 딸자식이 교도소에 갔다고 우는 소릴 하면 어떡하는 겁니까?’”
마이크가 박병기 교수에게 넘어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박병기 교수와 리영희 선생이 무슨 인연을 맺었던지 몰랐다. 1996년의 일이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참신한 기획을 하였다. 현대사에서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영향을 미친 몇 분을 선정하여 논문을 쓰고 논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박병기가 선정한 인물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박병기는 왜 리영희를 가슴에 묻어두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1979년 12월로 넘어간다. 그때 박병기는 전남대 학생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고, 한 차례 유인물을 뿌린 일이 뒤늦게 발각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윤한봉이 서광주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도 박병기 때문이었다.
그때 광주교도소의 정치범을 이끌던 이는 김병곤이었다. 리영희 선생이 반성문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안대 중사에게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보안대 중사는 리영희 선생의 식사를 중단하였다. 이틀을 굶게 한 후, 곰탕을 시켜 회유하였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이런 식으로 리영희 선생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안 김병곤이 투쟁에 나섰다. 정치범들은 식판을 엎어버렸다. 식판을 두들기며 “리영희 선생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샤우팅을 벌였다. 그때 미결사에 들어온 이세천, 장석웅까지 싸움에 합류했다. 리영희 선생에 대한 고문에 가까운 괴롭힘은 중지되었다. 김병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김병곤은 형법의 모든 조항을 꼼꼼하게 확인하여 교도소의 문제점들을 찾아냈다. 규정된 돼지고기 함량의 절반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소내 처우 개선 투쟁에 돌입하였다.
박병기의 담담한 회고는 10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1989년 11월로 넘어갔다. 대구에서 연합 학술대회가 열렸고, 리영희 선생이 기조 발제를 하였다. 박병기는 그날 밤 리영희 선생과 한방에서 잠을 자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학술대회에서 리영희 선생은 여러 후배 연구자들 앞에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8억인과의 대화』에서 펼친 중국 문화대혁명 예찬에 대해 자기비판을 하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문화대혁명을 예찬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한 일면적 견해였음을 고백하였다. 더불어 리영희 선생은 사회주의에 관한 자신의 견식이 짧았음을 시인하였다. 마르크스의 인간관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음을 몰랐다고 자기의 한계를 공개적으로 반성하였다.1)
삼삼오오 다들 뒷풀이 자리로 가는데, 그날 리영희 선생은 혼자 숙소로 향하였다. 박병기는 리영희를 따라 숙소로 갔다. 밤 11시 즈음이었다. TV를 켜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때 황석영이 우스개 이야기를 앞세워 리영희를 옹호하는 발언을 이어 갔다.
“그때 버스가 다 만원이었잖아. 손님들은 버스를 타려고 하고 틈은 없고, 그러면 어떻게 하죠? 운전대를 획 돌려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이 한쪽으로 밀려버리잖아. 그런 거죠. 나도 북한을 방문하고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글을 썼잖아. 북을 미화하는 글이었죠. 제가 그 글을 쓴 이유는 반공주의, 반북주의에 대한 전회였어요. 루이제 린저도 그런 심경에서 북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고 봐요. 내가 『무기의 그늘』에서 노린 것도 그래요. 반공 소설을 뛰어넘는 작품을 쓰자는 거였죠. 사회가 극우로, 오른쪽으로 치달리고 있으니 작가는 왼쪽으로 치우치는 글을 쓴 겁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였습니까? 베트남전쟁의 비리, 모순을 파헤치는 이 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그것이었죠.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이다. 남의 슬픔으로 내 울음을 한 거였어요.”
많이들 왔다. 1970년대 광주 청년운동의 일꾼이었던 조봉훈도 왔고, 민청학련으로 옥고를 치르고 이후 김남주의 도발이를 도맡아 도와준 최권행도 왔고, 1980년 오월 마지막 날까지 싸운 채영선과 전용호와 김선출도 왔다. 전남대 학생운동의 주역 81학번 김영집도 왔고, 광주지역 독립운동사의 연구자 안종철도 왔고, 5.18 언론상을 탄 정대하 기자도 왔다.

오늘의 출간례는 요란한 빈 깡통으로 그치는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자리여서 좋았기도 하였고, 노익장을 과시한 황석영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가끔 우리의 젊은 시절을, 그 시절의 열정을 상기하는 이런 자리가 열리면 좋을 것 같았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 밤이었다. 다들 BHC 호프집으로 이동하길래 나도 쫄랑쫄랑 따라갔다.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곳, BHC 호프집은 술집이 아니라 광장이다. 정대하 기자가 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김용희, 기민도, 최예린 한겨레의 젊은 기자들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한겨레신문의 원로 박화강 선배가 동석하였다. 박화강은 리영희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한번은 고은 선생이 리영희 선생과 함께 광주에 오셨어. 지원동 쪽에 있던 허름한 술집이었지. 거 있잖아, 애꾸눈 양주 말이야. 그래 캡틴큐였지. 고은 선생이 잔을 잡드니만 ‘언더라꾸’로 따르라고 하는 것이야. 얼음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양주를 붓는 것이지. 고은 선생을 따라 나도 ‘언더라꾸’로 마실려고 했어. 그때 리영희 선생이 그러시는 거야. ‘박 군, 기자는 그렇게 마시는 것이 아니네. 기자는 스트레이트야. 독한 술이 혀를 지나 목구멍을 지나 위장으로 내려가는 그 짜릿함을 느끼면서 마시는 거야.’”
옆에 앉아 있던 최예린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박화강 선배 곁으로 다가 앉았다.
“선배님, 멋져요. 누군가 저를 ‘최 군’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최 양’이 아니고 ‘최 군’ 말이예요. 저도 ‘스트레이트’로 마실래요. 맨날 쓰는 박스기사 그만 쓰고 ‘스트레이트 기사’를 쓸래요.”
밤은 깊어 갔고, 술자리도 익어갔다. 황석영이 광주에 오면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형선이었다. 박형선의 형 박화강은 그렇게 말했다.
“동생이 죽고 없으니 이 자리는 내가 감당해야제.”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2010년 12월이었을까? 리영희 선생이 망월동에 묻히던 날, 하늘은 갑자기 흑색으로 돌변했다. 선생의 몸이 흙 속으로 들어가던 그 순간, 폭우가 쏟아졌다. 기상의 이변과 한 인간의 죽음은 아무 연관이 없는 독립 사건이었지만, 그날의 영험한 일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2026년 4월 23일
황광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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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는데, 마르크스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고타강령비판>의 핵심 논점이 이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사회가 되어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낮은 단계의 사회주의사회>를 경유하여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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