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재단은 새로운 전환시대를 맞아,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나은 민주주의를 모색하는 열린 강좌를 만들어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확장을 위하여 노력해 온 많은 민주주의자들과 더불어, 국내외의 다양한 실험을 탐구하고 나아가 현실적 적용가능성을 탐색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리영희저널리즘스쿨2022] 1강 리영희 저널리즘을 생각하다_박영흠
<리영희 저널리즘스쿨 2022>가 시작했다. 1강은 “리영희 저널리즘을 생각하다”를 주제로 한 박영흠(한국언론진흥재단 책임연구원, 전 협성대학교 교수, 전 경향신문 기자) 강사님의 강의였다. 강사님은 ‘진실의 저널리즘’을 강조한 리영희 선생님의 사상을 전달해주셨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진실이 사실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사실이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것이라면, 진실은 종합적이고 맥락적이면서 주관적이다. 진실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여러 사실들이 맥락에 따라 종합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불가피하게 특수한 관점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진실은 주관적이다. 어떤 맥락을 중심으로 어떻게 사실들을 종합할지가 진실에서 관건이기에 관점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진실은 사실들을 종합한 결과물이지, 이미 주어진 무언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이 생산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다. 요컨대 진실은 진실 생산 과정의 생산물이다. 이 생산의 과정에서 온갖 사실들은 원재료의 역할을 맡는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진실에서 중요한 두 요소를 원재료에 해당하는 사실들과 그 사실들을 가공하는 진실 생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사님이 말씀하신 현재 한국 언론에서 나타나는 잘못된 태도 두 가지는 이 요소들이 하나씩 결여된 것들에 다름 아니다.
한 가지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주로 뉴미디어 언론에서 나타나는 문제적인 태도인데, 이는 진실의 원재료가 되는 사실들 없이 진실을 가공하겠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이들은 진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외양만을 꾸며내려 할 뿐이다. 원자재 없이 무슨 생산이 가능하겠나. 다른 한 가지는 전통적인 언론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오로지 부분적인 사실만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사실에 매몰되는 언론들은 사실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생산의 과정을 통해 진실을 향해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개별적인 사실들도 온전한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이런 맥락을 따라 우리는 흔히들 말하는 (그리고 강의에서 등장하기도 한) ‘진실을 추구하다’라는 관념에 대해서 피상적인 이해가 아닌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쉽게 생각했을 때, 우리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행위를 마치 이미 주어졌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진실을 ‘찾는’ 것처럼 연상한다(아마 그렇기에 ‘진실을 파헤치다’는 말이 ‘진실을 추구하다’는 말의 등가물처럼 사용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미 주어진 진실 따위는 없다. 진실은 오직 생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파헤쳐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뿐이다. 오히려 진실은 찾아낸 사실들을 가지고 독자적인 생산을 거침으로써 산출되는 가공물이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하다’라는 말을 차라리 ‘진실을 생산하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나아 보인다. 또한 리영희의 저널리즘 정신을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이라고 하기보다는 ‘진실을 생산하는 저널리즘’이라고 하는 편이 그 배후에 있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표현일 테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리영희 저널리즘에 비추어 한국 언론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그들이 진실 생산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언론이 진실을 생산하는 작업장으로서 기능할 때에야 비로소 언론이 민주 사회에서 시민들의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수강생 강좌후기 | 저널리즘 위기의 시대, 리영희 저널리즘을 생각한다
오경혜(<리영희 저널리즘 스쿨 2022> 수강생)
9월 15일, 리영희재단의 ‘리영희 저널리즘스쿨 2022, 리영희와 행동’의 첫 강의를 박영흠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이 활짝 열었다.
박영흠 연구위원은 한국 언론의 두 가지 문제 유형을 1) 사실만 찾고 진실에는 무관심한 언론 2) 사실 없이 진실을 밝히겠다는 언론이라고 꼽았다. 이 과정에서 팩트(사실)와 진실을 분리하여 설명해주었다. 팩트와 진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수강생과 대화도 나눴다. 그러나 나는 최근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미국 순방 중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을 둘러싼 진실공방 보도를 보면서 박 연구위원이 나눈 분류를 뛰어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들은 대통령 발언을 다루며 저마다 ‘진실’을 전하고 있다. 전문가를 동원하여 사실 여부를 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팩트는 조작, 날조될 수 있는 시대이다. 무엇이 팩트인지 불확실하면 이야기는 계속된다. 점점 이 사안은 모든 다른 중요한 팩트들을 빨아들여 관심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한다. 이것이 프레임 아닐까?
윤 대통령은 이번 해외순방 목표가 △엘리자베스 여왕 조문과 동시에 세계 정상들과 외교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의 인플레 감축법으로 인한 한국 기업의 손해를 막기 위해 노력 △달러와 스와프를 통해 외환위기를 막을 것 △한일 정상회담 성사 등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조문을 하지 않았고, 한미 정상회담 불발로 달러와의 스와프, 인플레 감축법에 대한 미국 내의 변경 가능성은 무산된 것처럼 보인다. 한일 정상회담 역시 약식 간담회만 있었을 뿐, 어떤 회담 내용이 있었는지 등에 관한 팩트에 대한 정보는 적다. 오히려 막말 논란의 진실을 찾느라 뒷전이다. 이렇게 되니 국민들은 순방에서 돌아온 대통령의 보고를 받지 못한다.
자세히 보면 한 사안에 대한 진실공방으로 다른 중요한 사안들이 희미해진다. 처음의 대통령 순방 목적은 잊히고 있다. 진실찾기 프레임에 갇힌 꼴이다. 대통령의 거짓 해명을 찾고 그가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느라 본질이 망각된 일은 이번 사건만이 아니다. 오히려 무능과 무책임이 한꺼번에 알려져,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처음의 목표에 대한 실패와 그로 인한 한국의 상황에 관한 팩트도 전달돼야 한다고 본다. 현재의 미디어는 팩트와 진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기보다는, 사안들이 어떻게 프레임에 갇혀 있나를 판단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리영희 선생은 1988년 기자협회보에 기고한 <후배 기자들에게 하는 당부>라는 칼럼에서 “지난 한세월 동안 나에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新聞紙)는 있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 종이)는 나에게 조석으로 배달돼왔지만 ‘새 소식’(新聞)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중략)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왔다.”라고 하셨다. 이 당부에서 리영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새 소식을 담은 신문’에 대한 충고는 한 사안으로 전체가 덮이는 상황, 부적절한 프레임으로 본질을 가리는 상황에서 벗어나 프레임 밖을 보라는 충고로 들린다.
리영희 선생님은 시대의 지식인으로, 투철한 기자로 자신을 채찍질하셨던 분이다. 2022년 현재를 사는 평범한 기자에게 선생님과 같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기자는 팩트를 알리고, 여러 팩트를 통해 독자가 스스로 진실을 찾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뉴스타파>의 심인보 기자는 아주 훌륭한 예라고 본다. 무수한 비난에도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꾸준히 팩트를 취재해서 알렸다. 이런 점이 리영희 선생님의 당부를 잊지 않은 태도이고 독자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박영흠 연구위원의 강의를 들으면서 언론은 어떠해야 하는지, 리영희 저널리즘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시대의 큰 어른이며 지식인이며 기자인 리영희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존경심을 갖게 되는 자리였다. 훌륭한 강의를 마련해 주신 리영희재단과 토론 같은 수업을 허락해주신 박영흠 연구위원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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