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남북문제에 관한 한국 언론의 문제」
9-5. 「남북문제에 관한 한국 언론의 문제」(1998년, 코)
정직하게 고백하건대, 나는 남북 민족관계와 통일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매스컴에 거의 절망적인 심정이다. 대중매체 가운데 어느 것이 더하고 어느 것이 덜하고의 차이도 없다. 서글픈 심정이다. 수사상 약간의 여유가 필요할까봐서 ‘거의 절망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절망’한 상태다.
나는 우리나라의 보도기관들을 흔히 이름하여 부르는 ‘언론’, ‘언론기관’, ‘언론인’이라는 명칭과 호칭을 따르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다. ‘언론’(言論)이라는 일컬음은 그 함의(含意)로 보면, 단순히 말하고 쓴다고 해서 언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언론이라는 낱말은, 그것이 말로든 활자에 의해서든 또는 겨우 최근에 비로소 ‘언론’을 자처하게끔 급성장한 영상매체에 의해서든 간에, 인류역사의 오랜 세월에 걸쳐서, 진실을 정확하게, 이성(理性)으로 공정하게, 편견 없이, 지배자나 강자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과 공공의 현명한 판단 자료가 되는 양질의 정보를 확고한 책임감을 가지고 불편부당한 자세로 제공하는 행위다. 그러기 위해서 수없이 숭고한 생명과 정신이 피 흘려 싸운 결과로 얻어진 고귀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언론이라는 부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보도와 평론의 지적(知的) 행위는 그와 같은 숭고하고 준엄한 기준에 합치할 때 비로소 스스로 그 이름으로 자처하거나 그 이름의 사용이 허용될 수 있다. 백보 양보해, 적어도 그렇게 하고자 하는 개인적 양심과 직업적 책임성이 그 행위를 뒷받침할 때에만 ‘언론’의 본래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기준과 생각으로 우리나라의 대중매체 또는 보도기관들의 형태를 평가하는 까닭에 ‘언론’ ‘언론기관’ ‘언론인’이라는 호칭에 대해서 심각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까닭은 카메라와 브라운관의 조작으로 영상화된 이 전파 미디어의 특성이, 문제의식이 낮고 비판능력이 약한 사람에게 그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서양 속담 그대로, 그런 사람들일수록 텔레비전이 비춰주는 것을 그대로 ‘진실’ 또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에서 봤어!”라는 말은 바로 “그러니까 진실이다”로 직결되어버린다.
여기서 텔레비전이 ‘언론기관’ 또는 ‘언론사’를 자처하거나 그 종사자들이 ‘언론인’을 자처할 때, 얼마나 많은 거짓이 이 사회에서 사실 또는 진실로 통하게 되는가를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극치가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에 관한 보도와 평론행위에서 나타난다. 그들의 보도와 평론은 진정 ‘언론’의 이름에 값하기 위해서 지켜져야 할, 앞에서 열거한 엄격한 기준과 준칙들에 얼마나 합치하고 충실한가?
‘언론’과 ‘언론인’이라는 고귀한 호칭은 그러나 다음의 신념과 실천을 전제로 한다. 신문이나 방송의 자유나 권리는 그것 자체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이 누구나 각기의 생각, 즉 다양한 사상을 가질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다시 말하면 힘있는 자들의 금지, 간섭, 박해, 차별로부터 개인의 사상의 자유와 그것을 표현하고 발표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방송을 포함한 언론의 자유 개념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는 권리나 자유를 뜻하지 않는다. 그 사회 내 ‘개인’의 그 권리와 자유가 앞서는 것이다.
지금은 세계 민주주의제도의 기본 원칙으로 일반, 보편화된 미국 헌법 수정 제1조, 흔히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금지 또는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라고, 소위 언론인들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그 조항은 사실은 신문(인)이나 방송(인)—그 당시에는 없던 매체이지만—이 마음대로 글을 쓰고 마음대로 사진을 만들어 방송하는 자유(또는 권리)를 뜻한 것이 아니다.
미국 헌법 수정 제1조의 법률로도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없는 자유(또는 권리)의 언론적 규정은 신문과 잡지(지금은 방송도 포함) 등 매체의 자유, 즉 ‘freedom of press’의 가치보다 앞서는 가치로서, 사회의 개인(시민)이 누구나 마음대로 생각(즉 사상)하고, 생각한 그것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 즉 ‘freedom of speech’를 설정하고 있다.
대중매체의 자유에 앞서 개인 누구나가 법률의 금지나 제한 없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 다시 말해서 사상의 자유를 대전제로 하여, 그 다양한 사상을 법의 금지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 즉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신문(인)이나 방송(인)의 보도 기능적ㆍ직업적 자유보다 앞서는 가치로 설정하고 있다.
신문(인)이나 방송(인)의 ‘언론의 자유’는 사회적 규범인데 비해서, 개인의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바로 인간이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천부적 자연권이다. 되풀이해서 강조하지만, 무슨 신문이나 무슨 방송국의 보도의 자유보다도, 무슨 신문사의 김 아무개 기자의 취재행위나 박 아무개 주필의 평론의 자유보다도, MBC나 KBS라는 방송사의 최 아무개라는 앵커나 성 아무개라는 PD나 카메라맨의 직업적 자유보다도 인간, 즉 박 아무개라는 시민이 정부와 체제가 강요하는 어떤 단일 사상이 아니라 그것에 반대하는 또는 그것과 다른 의견, 가치관, 세계관, 신념, 정치관을 가질 수 있고 또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법으로도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시장과 그 자유시장에 누구나 다양한 사상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제도와 체제를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신문(인)이나 방송(인)의 제2차적인 자유와 권리가 인정되는 것이다. 이 가치의 순서와 서열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문(인)이나 방송(인)은 그 가치의 선후 순서와 중요성의 서열을 거꾸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남북관계나 통일문제 또는 한반도 정세 등에 관해서 개인(시민)은 여러 가지 각기 상이하거나 다양한 견해, 생각, 신념, 사상, 접근 방법 등을 가질 자유가 있고 권리가 있다. 다양(多樣)과 복수(複數)의 견해와 주장이 서로 상대방의 가치와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면서 대등하게 대화할 때에만, 어떤문제에 대해서 가장 적절하고 현명한 답안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 원리와 원칙은 문제의 중요성이 크고 높을수록 더욱 소중하다. 남북관계와 통일문제가 바로 그에 해당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도 이 다양성을 금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방송은 그 방향과 내용이 섣부른 국가의 반공주의 ‘유일사상’의 주술에 꼼짝할 수 없도록 묶여 있다. 국가권력이 강요하는 어떤 유일사상의 선전 선동자 역할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다. 그것이 마치 무슨 숭고한 사명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나라의 어떤 제도에서나 국가권력의 유일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선전 선동적 역할을 담당하는 기능은 ‘체제화 언론’ 또는 짧게 ‘체제언론’이라고 부른다. 타락한 언론의 대명사다. 국가권력의 시녀가 되고 그 아폴로지스트로서 체제언론화한 타락한 언론을 나치나 파시스트, 군국주의나 전체주의, 또는 공산주의 국가 등에만 나타나는 특이 현상으로 치부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흔히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잘못이다. 우리나라의 지난 역대 군사독재 시대의 소위 ‘언론기관’이 바로 그것이었음은 이제 공동의 합의 사항이다.
그런데 지난날의 그런 치욕스러운 형태가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소재로 하는 보도와 평론행위에서는 지금도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텔레비전의 경우, 시청자에 대한 시각적ㆍ영상적 역기능이 제작, 편성, 제시의 놀라운 기술 발달 때문에 오히려 더욱 증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표현하면, ‘사실이 아닌 것을 더욱 진실(사실)처럼’ 믿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가나 체제의 뒷받침을 받는 다수 의견의 가치에 못지않게, 그것에 반대, 대립하거나 상이한 철학, 가치관, 또는 인구학적으로 소수가 제창하는 이론, 신념, 주장 등의 가치도 존중되어야 한다. 견해, 사상, 신념, 가치관 등의 추상적 차원에서는 정책의 다수결처럼 묵살하거나 경시하거나 박해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의 관습과 제도가 바로 공산주의라면, 공산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수의 가치관, 사상, 방법론적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늘날 인쇄매체보다도 더 즉각적이고 더 압도적인 인식 효과를 가지게 된 방송과 그것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명일 것이다.
북한과 통일에 관한 방송 프로그램의 발상, 기획, 제작, 편성, 방영의 과정에서 방송 종사자가 진정한 ‘방송 언론인’이고자 한다면, 한국 국내에서 정부와 다른 시각에서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생각하는 다양한 이론, 주장, 제안, 신념들, 즉 소수의 의견이 체제적 의견이나 정책과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언론’은 민주주의 언론의 근본적 인식을 근원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굳이 한국의 방송인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의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관계의 긴장완화에 작용하는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요청은 절실하다.
한국의 방송매체는 남북한 문제에서는 시청자들에게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선동적인 작태를 능사로 삼고 있다. 그것이 진실(사실)이냐 거짓이냐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체제언론’의 습관대로 진실을 가장하고 제시하고 있다. 보도에 앞서 진실과 허위를 검증해야 하는 노력은 신문 저널리즘에서와 마찬가지로 방송 저널리즘에서도 저널리스트의 양심적 명제이고 또 직업적인 윤리 강령의 제1항목이다. 한국의 방송 저널리스트들에게 이 양심적 명제와 직업 윤리강령 제1항목은 그들의 의식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이와 같은 정신적 자세로서의 직업행위는 시청자에 대한 중대한 배신행위다.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을 통해서 제시되는 것은, 그와 같은 직업적 양심의 시험을 거쳐서 나온 것이라는 전제와 묵계를 믿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시청자와 시민 전체의 신뢰를 배신하는 범죄라고 할 수 있다.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그런 사실들 가운데 바로 최근의 한 사례만을 들어보자. 대한민국의 4,500만 국민은 그날 밤, 북한의 AN2라는 비행기 편대가 옹진반도를 지나 남한 쪽으로 침공해오고 있다는 ‘중대 뉴스’, ‘긴급 뉴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피난 보따리를 챙길 셈으로 일대 혼란을 빚었다.
텔레비전 방송은 누런 색깔의 두 날개 비행기(복엽기, 잠자리형 연습기)가 편대를 지어 남쪽을 향해서 바다 위를 날아오는 모습을 몇 시간을 되풀이해 방영했다. 그러고는 그 AN2의 속도가 시속 145킬로미터라는 사실도 자막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두 날개 비행기 한 대에 20명의 무장군인이 탑승할 수 있고, 남한의 휴전선 후방에 수천 명, 수만 명의 기습공격 부대를 투하시킬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주석을 거듭했다. 4,500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이 내려앉고, 텔레비전 앞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이제 우리는 죽는가보다!”라고 겁을 집어먹은 것은 당연하다. 그날 밤, 공포감에 떨면서 모두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사와 방송 저널리즘 그리고 소위 방송 ‘언론인’의 완벽한 ‘무책임성’이 빚은 범죄행위임이 밝혀졌다. 사실은, 북한 지역 하늘을 날고 있던 도요새 몇백 마리가 잠시 나는 각도를 남쪽으로 바꾼 것이 백령도 한국 공군의 레이더에서 관측되었던 것이다. 새가 나는 높이란 어차피 몇십 미터의 낮은 고도일 수밖에 없다. 잠시 정체 확인을 하는 동안 백령도의 군부대는 경계신호를 발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 ‘저공 비행물체’의 정체가 도요새 무리임이 확인되었다. 이것이 상황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 나라의 텔레비전은 어떠했던가? 앞에서 쓴 그대로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 텔레비전 방송들이 ‘경망스럽게 호들갑을 떤다’는 일상적 평가로 넘길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첫째로 방송인들이 자기 직업행위와 관련해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드러난 것이다. 공군이 그런 자료를 제공했거나 텔레비전 방송사가 그런 자료를 자료실에서 찾아냈거나 간에 결론은 마찬가지이지만, AN2기의 속도가 시속 145킬로미터라고 되풀이해 자막으로 제시했다. 시속 145킬로미터는 고속도로에서 조금 빨리 달리는 자동차 속도와 같다.
이런 속도의 비행기가 군사적 목적에 사용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즉 지금으로부터 꼭 80년 전, 비행기 역사의 원시시대의 일이다. AN2기는 북한의 초보 비행 연습용과 연락용 목적에 쓰이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상공을 지키는 남한 공군 전투기는 세계 최첨단 최강으로, 대개 마하 2에서 2.5, 즉 시속 2,300킬로미터에서 3,400킬로미터이다. 그 무장은 가공하다. 200~300미터의 높이로 나는 도요새 무리가 레이더에 잡혔다는 사실은 AN2이건 다른 어떤 저공비행체이건 마찬가지로 전방 배치 레이더에 잡힌다는 뜻이다. 그러면 초고속 최신예 전투기가 즉각 출동한다. 승용차의 속도와 같은 시속 145킬로미터의 속도로 서울에 도달할 여지도 없다. 하물며 “후방 지역 운운”은 공상소설감도 안 된다. 또 두 날개 비향기가 무슨 목적에 쓰이는지는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방송인들은 이와 같은 공상소설 작품(도 안 되는 것)을 되풀이하여 몇 시간 동안 계속하여 내보냄으로써 진실과 허위를 검증할 직업적 책임을 저버렸다.
이것은 남북관계나 통일문제에 관해서 몸과 의식에 배어버린 무책임성의 무수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 피해자는 누구인가? 전 국민이다. 그런데 더 놀랍고 한심스러운 사실은,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방송사와 방송인들의 한마디 사과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번 일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와 유사한 수없이 되풀이된 사례들에서 여태까지 그들이 시청자에게 사과를 한 일이 있었는지 기억되지 않는다. 아무런 자기비판이나 반성의 표시가 없었다. 무책임성과 경박성의 일방통행적 행위가 그들의 통념이 되어버린 감이 있다.
그밖에도 방송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들이 남북한 관계와 한반도 정세 그리고 통일과 관련된 뉴스, 해설, 배경설명, 논평, 다큐멘터리 등에서 명심해야 할 준칙들이 많다. 그것들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1)
냉전의식의 잔재
세계는 탈냉전시대라고 하지만 한국의 언론인들은 아직도 냉전시대를 살고 있다. 반세기에 걸쳐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의 국가 이기주의적 또는 패권주의적 표현인 냉전의식이 마치 우리나라의 체제적 신념인 것처럼 되었다.
광적 반공사상
같은 반공사상이라고 해도 남한의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극단적이었다. 일정한 정도의 공산주의 비판의식은 민주주의와 휴머니티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그것은 지난날 군부 독재체제의 정권유지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간의 화해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어왔다는 이유에서 우리의 머리에서 시급히 정리되어야 한다.
맹목적 애국주의
서로 상대가 있는 일에서는, 한쪽은 전적으로 선(善)하고 다른 한쪽은 전적으로 악(惡)한 경우란 없는 법이다.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잘잘못이나 합법성, 정당성 등의 여부를 냉정하게 가리는 이성적 태도를 거부하고, 무조건 남한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남북한 문제의 해결에서 이와 같은 태도는 결국은 자기부정일 수밖에 없다.
문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없으면 그 일의 전모와 뜻을 알 수 없다. 가장 적절한 예가 몇해 전의 소위 북한 핵문제다. 1960~70년대에 남한이 북한에 비해서 모든 면에서 열세일 때 박정희 대통령이 자존(自存)을 위해서 핵과 미사일 생산 계획을 추진한 사실과, 20년 후인 1990년대에 그 위상이 완전히 역전되어 모든 면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열세해진 상황에서 핵과 미사일 계획을 추진하는 북한의 역사적 배경을 인식하면, 문제의 공평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궁지로 모는 정책이나 의식은 현명하지 못하다.
인과관계의 구조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대개의 경우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원인을 제공하고, 그에 반응하고, 다시 반응하고, 또다시 반응하는 식으로 확대, 격화되었던 것이다. 남과 북이 각기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자기는 선으로 자처하는 정신 상태는 독선이다.
휴전선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놓고 상대방만을 원인 제공자로 비난하는 남과 북의 태도는 그 어느 쪽도 옳다고 할 수 없다. 서로가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 인식이 중요하다.
동일 사실에 대한 판단의 이중 기준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는 동일한 성격과 정도의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것이 남한 측의 행위일 때에는 ‘합법, 정당’하고, 북한 측의 행위일 경우에는 ‘침략, 도발, 범죄’로 규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동일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에서 이중 기준을 적용하는 행위로서,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민족 간 화해와 통일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상대방 입장에 한번 서보는 마음
남한과 북한의 군사비는 연간 130억 달러 대 30억 달러다. 약 4대 1이다. 북한은 공포를 느끼고 있다. 우리의 지속적 군비증강은 평화적 통일에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저해 요인이다.
남한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의 팀스피리트는 20만 이상의 병력과 핵 항공모함과 핵 공격함대가 대거 동원되는 훈련이다. 과거에 소련에 대항하던 북대서양 동맹군(NATO)도 이런 대규모의 훈련은 하지 않았다. 팀스피리트 훈련 때 보이는 북한의 반응을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막강한 소련 극동 해군의 핵 공격함대와 북한군이 휴전선 바로 북방에서 여러 날을 남한을 공격 목표로 하는 소ㆍ조 합동 팀스피리트 훈련을 20년 동안 해마다 감행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겠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민족 간 화해보다 대립을 부추기는 ‘언론기관’의 습성
북한 내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은 제한되어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한국의 매스컴에 의해 선정적으로 과장하거나 선동적으로 강조하는 의식, 성향, 습성을 이성적으로 반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신문ㆍ방송 등 대중매체의 남북문제에 관한 선정적 무책임성은 남북 간 이해와 화해를 저해하는 심각한 요소다. 언론기관과 언론인의 거듭남이 시급하다.
북한의 이질화 문제
이질화의 판정 기준은 무엇인가? 남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것저것의 상태가 북한 사회의 그것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남한 사회가 인간성이 숭상되고 민족적 주체성이 고양된 사회일까?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절반 미국인’이 된 개인과 사회는 아닐까? 우리 사회는 도덕적ㆍ윤리적으로 북한보다 ‘건전한’ 사회일까? 그밖에도 우리 자신과 한국의 자화상을 객관화해서 냉정한 마음으로 따져보는 의식과 자세가 필요하다. 이 의식적 자기비판은 남북관계를 위해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다.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와 패권주의
우리는 해방 이후 반세기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미국식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동화되어버렸다. 군사적ㆍ정치적으로 과거처럼 예속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아직 다분히 미국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이 하는 일은 모두 옳고, 북한이 하는 일은 모두 그르다는 식의 민족 허무주의적 미국 숭배의식으로 남북관계, 한반도 상황, 통일문제를 대하는 한, 남북한의 합일과 평화와 통일은 참으로 요원하다. 미국 정부 통계로 미국의 동맹국가들 중 인구 비율에서 미국 유학 박사학위 소지자가 제일 많은 나라가 남한이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한국 지식인들이 주로 정부, 학계, 전문직업, 언론 분야의 대북정책 수립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이 변해야 하는 만큼 남한도 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아쉽다.
동서독 통일에서 배워야 할 교훈
한국 사람들은 서독이 자본주의 국가이고 반공정책을 취했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보다도 더 사회주의적 복지국가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서독의 국가 기본법(헌법)은 서독이 “민주주의이면서 사회주의적 연방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동독과의 어려운 협상을 거쳐서 1972년에 동서독 간의 대폭적인 접촉, 왕래, 협력, 원조, 사적 불가침 등을 실현한 것이 서독의 사회주의 정당의 집권하에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고 실현한 것이 사회민주주의자인 브란트 수상이었다. 서독은 사회주의 정당과 보수주의 정당이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맡는다. 사상의 자유는 물론 언론의 자유, 인권, 집회 등이 보장, 실현되어 있다. 서독인의 동독인 접촉이나 동독 왕래도 자유였다. 북한과의 접촉을 금지시킬 목적의 남한의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과 같은 것은 없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학문과 연구와 발표의 자유가 있었고, 사회주의 정당의 집권으로 국가정책에 사회주의적 정책이 대폭 채택되었다. 북한만 나무라지 말고 남한이 서독같이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이러한 충고의 뜻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 문화방송 통일문제연구소, 「분단국 통합과 방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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