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친일문학(인)의 매저키즘과 새디즘

한일관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1-21 19:3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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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친일문학(인)의 매저키즘과 새디즘(1986년, 역설)


 


친일문학(인)의 매저키즘과 새디즘


문학인의 윤리의식에 대한 현재적 교훈

지난 몇 해 동안 낮과 밤을 이어서 하루에 400페이지짜리 책을 2권이나 독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새 학기가 바로 내일 모레로 다가와서 책 읽을 시간이 없으리라는 초조감도 있었지만 책 자체가 나를 떠나려 하지 않았고, 나 역시 잠시도 책에서 손을 놓을수가 없었다. 식탁에서도 입으로는 밥을 먹으면서 눈으로는 책을 훑었다. 심지어 변소에도 가지고 들어가서 읽었다. 나는 아직도 한자가 섞이지 않은 글은 줄줄 읽어내려가는 데 힘이 든다. 그런데도 두세 편의 글을 뒤로 미루고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서야 책을 놓았다. 김규동(金奎東)ㆍ김병걸(金炳傑)편,『친일문학작품선집』(실천문학사, 1986) 1,2이다. 임종국(林鍾國)씨의 고집스러운 노력으로 이루어진『친일문학론』이라든가 임헌영(任軒永) 씨의 글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접하기는 했지만, 40명 가까운 주도적 문인들의 글이 한 군데 모인 것을 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탓이다. 사회과학적 측면과 분야에서 친일파와 반민족행위자의 문제를 중요시해왔던 나로서는, 문학 분야의 그 측면에 새로운 안목이 트였다. 이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의 본령인 시와 소설에 대한 비평은 나의 능사가 아니기에 임헌영 씨나 임종국 씨 그리고 백낙청 씨나 박태순 씨의 글을 통해서 계몽받기를 기대하거니와, 그밖의 관점에서 나 나름으로서의 소견을 적어보고 싶어졌다.
우선「책머리에」에서 ‘친일문학’을 오늘에 드러내어야 할 의의에 대한 정신이 너무나 훌륭했다. 다소의 과장을 허용한다면 그것은「3ㆍ1독립선언문」을 읽을 때의 감동으로 숙연해지는 그런 글이었다. (그 감동적인 선언문을 기초했다는 이들이 바로 이 책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나타난 것은 슬픈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선 이 기록들을 통하여 민족사의 참담한 한 대목을 숨김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둘째로 그것이 한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감출 길 없는 과거임을 깊이 인식함으로써, 더욱이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 있는 과거라는 점을 사무치게 앎으로써, 민족현실에 대한 우리의 늦추어진 경각심을 새로이 일깨우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문학인의 윤리의식에 대한 현재적 교훈을 이로부터 얻어내고자 한다.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떳떳이 그 과거에 맞서 교훈을 얻어내고, 그것을 오늘의 힘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다소나마 역사 앞에서 궁색함을 가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그 사람과 문학, 그리고 그것을 낳은 시대와 사상이 추악했을수록 그것이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일’이라는 사실에 나의 일차적 관심이 있다. ‘문학인의 윤리의식에 대한 현재적 교훈’은 이 2권의 책을 읽으면서 얻는 교훈이 ‘문학인’만의 윤리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일제하와 현재 이 민족사회의 모든 직능자의 윤리의식이라는 점에 나의 관심은 지향되는 것이다.

친일문학인의 마조히즘과 사디즘

이 책에 수록된 37명의 적극적 친일파 문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발견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통사항은 그들의 철저한 ‘민족 니힐리즘’이다. 이광수의「민족개조론」은 대표적인 것이어서 재론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친일행각의 출발점은 자기 민족(집단이나 개인으로서)에 대한 병적인 매도와 모멸이다. 인간으로서 ‘벌레 이하’의 존재이고 민족으로서 모든 악덕과 결점의 집합적 상징으로 비친다. 그들 모두의 글에서 낱낱이 인용할 겨를도 없으니 한두 대목만 인용해보자.



조선 사람이 황국신민이 된다는 것은 ‘게다’를 끌고 ‘다꾸앙’을 먹고들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정신적인 내장(內臟)을 소제하는 데 있다. 재래의 조선사람이었기 때문에 가졌던 모든 불미불선(不美不善)—취기(臭氣)분분한 그 썩은 내장물을 위로는 토해내고 아래로는 관장ㆍ배설하여 속을 깨끗이 해야 한다. ……제 아무리 조선 민족주의자일지라도 과거의 그 냄새나는 민족주의가 다시 기어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1)




사람이 자신을 학대하기에 이에 이르면 거의 병적이라고밖에 달리 볼 수가 없다. 김문집은 대강용지개(大江龍之介)가 됨으로써 모든 김씨, 박씨 동포가 모든 ‘불미불선’의 상징이고 그들의 존재는“취기분분한 썩은”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김문집 자신은 전미전선(全美全善)한 존재로 순화되고 그의 몸에서는 그윽한 꽃향기가 발산된다. 정말로 위대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자기비하에서 철두철미하고 노예근성에서 구제불능이다. 이보다 더한 식민지 근성은 없다.
그런데 정신병학적으로 흥미 있는 것은, 이들이 자기들의 민족 니힐리즘적 타락을 당시의 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을 병적으로 취급함으로써 자기정당화하려는 일관된 심리상태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은 조선을 스스로 ‘식민지’라고 부름으로써 자기 가치를 유린했지만, 그들은 그런 이론을 내세움으로써 그들의 투쟁을 선동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식민지적인 노예근성이었던가!2)




그러고는“그런 불유쾌하고 범죄적인 인식착오는 절대로 용서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일본국민이 된 2,300만 국민은 역사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또한 현실문제인 조선통치의 근본정신에서도 결코 저 서양식의 식민지가 아니다. 식민지의 민중은 더군다나 아니다”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의 반동형성(反動形成, reaction–formation)의 표본이라 하겠다. 억압이 과도하게 일어난 결과로 그 반대의 욕구ㆍ희망을 의식화한 것이다.
이 같은 자학적인 자기부정은 ‘반동형성’의 욕구와 희구를 체현한 대상에 의해서 충족돼야 한다. 이 심리학적 작용은 이광수에서 시작해서 곽종원(郭鍾元)에 이르는 37명의 친일문인에게서 하나같이 나타난다. 거의 ‘법칙’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통적이다. 그 대표적인 표출을 보자.



나는 이해심이 있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정열이 솟아 넘치는 가슴을 탁 터놓고 진실의 언어를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이 중대한 문제(조선인의 일본인화—필자)에 관한 고민과 희망을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직접 고백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격에 넘쳐서 ‘고백하고 싶은’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경애하는 모든 내지인(內地人)을 나의 사형(師兄)이라고 단적으로 부르고 싶다. 나는 그들의 생도이며 아우인 관계를, 그 혈연적으로 값지을 그리움을, 국민적인 자각과 신념적인 감사와 심리적인 만족 속에서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와 사랑이 있는 사형의 앞에서 어떠한 ‘응석부림’도 할 수 없겠는가?3)




친일문인의 전체를 대변하는 김용제(金村龍濟)의 말은, 바로 자신의 글에서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한 대로 심리학적ㆍ정신병학적연구의 이상적인 연구대상이 되어준다.
친일문학가들의 800여 쪽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단적으로 그들의 성격ㆍ심리에서 감득한 것은 그들이 예외없이 마조히즘(피학대음란증) 환자이면서 동시에 사디즘(가학음란증) 환자라는 발견이다. 설명할 필요도 없겠으나. 사디즘은 성교 대상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쾌감을 얻는 성애(性愛) 형식이고,반대로 마조히즘은성 대상에게 학대받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다같이 성적 도착심리다. 그것은 강간심리의 양면적 표현이기도 하다.

일본인에 대한 병적인 동일화 현상

나는 그들의 ‘문학’(시ㆍ소설ㆍ비평ㆍ논문 전체)을 읽고 나서 그와 같은 심리적ㆍ정신병학적 원인과 동기 및 목적에 새로운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측면에서의(문학작품의 내용이 아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관찰이랄까 진단이 옳다는 것을 우리나라 정신의학의 최고 권위자인 서울대학교 의학대학 조두영(趙斗英) 박사가 확인해주었다.4)
친일문인들은 정신병학에서 말하는 ‘동일시’(同一視)의 병을 앓는 환자들이다. 동일화(IDentification)란“부모ㆍ형ㆍ윗사람ㆍ주위의 주요인물들의 태도와 행동을 닮거나 닮으려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단순한 흉내(Imitation)와는 다른 것으로서, 좀더 적극적으로 자아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기제(機制, mechanism)이며 초자아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런데 동일시가 완전무결하게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조선의 친일문인(지식인 전반이라고 해야겠지만)들이 아무리 ‘일본인화’ ‘황국신민화’ ‘천황의 적자화’(赤子化)가 되고 싶었고, 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완전무결’하게 되지 못한, 차라리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결과를 해방 후 그들의 재변신의 작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발견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처음부터 조선민족ㆍ조선인임을 미워하거나 혐오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이다. 한일합방을“결과적으로 잘된 것”이라고 찬양하지만 처음에는 일본(인ㆍ민족)에 대한 민족심(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다가 얕잡아보던 상대방의 ‘우월성’을 확인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열등성’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일본인화’되기에 안간힘을 쓰게 된 과정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리분석학에서 말하는 ‘부정(否定)적 동일화’(hostile or negative IDentification)다.“ 제일닮지말았으면하던사람을닮는”과정이다.
대표적 친일문인들 중 한두 사람의 글에서는 조금 다른 면을 발견한다. 일본(민족ㆍ국가ㆍ인)에게서 어떤 이상(理想)을 발견하고 그와 공생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일본(인ㆍ국가ㆍ민족ㆍ국민)이 가진 힘ㆍ권력ㆍ도덕성ㆍ위엄ㆍ가치 등등을 자신도 공유(共有)하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려 애쓰는 심리다. 조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이는“속으로부터가 아닌 겉만 일시적으로 닮는 것”이라고 한다. 이 기제를 ‘병적 동일화’(病的同一化, pathological IDentification)라고한다.
그들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그 상대방의 신비한 힘이 꺼지거나 그로부터 거절당하면 ‘병적 동일시’는 어이없이 사라진다.역시 해방 후 친일문인(친일파)들의 감탄할 만큼 변화무쌍한 작태에서 우리는 이것을 확인했다.광신적 천황 숭배자, 대동아공영권 이론가, 대화민족(大和民族) 국수주의자인 일본인들에게서도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하물며 친일문인들에게서야 지극히 있을 법한 병적 상태다. 패전 후의 독일의나치당원들, 가까이는 우리 사회에서 4ㆍ19후의 이승만 숭배자ㆍ자유당 행동대원 들에게서, 더 가까이는 박정희 숭배자들과 그들 속에서 이(李)나 박(朴)의 비극적 최후 뒤에 한 명의 ‘순사’(殉死)자도 없이, 멀쩡하게 새 현실에 더 ‘동일화’되려고 한(하고 있는) 자들의 심리ㆍ정신상태에서 이것을 본다. 이 ‘병적 동일화’의 실례는 800쪽의 책을 일관해 있다. 너무나 많아서 인용하기조차 어렵지만, 일본인과 무엇인가 ‘공유’하게 됐다는 생각에서 ‘권력’마저 공유한 듯한 환상에 젖었던 주제(主題)는, 일본화 의무교육, 창씨개명, 지원병 및 징병제 실시에 따르는 ‘황국군인화’, ‘조선인과 내지인(일본인) 사이의 통혼(通婚)’, 양자 입양허가 등이다.아무렇게나 한 장을 펼쳐보자.이런 대목이 있다.



이 일(일장기 날리는 구역의 확대—필자)에 대하여서 나는 아무것도 공헌한 것이 없으니 죄송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내 피도 못 바치고 돈도 못 바치고, 황군용사가 피로 얻은 영광을 향수(享受)하기에 어찌 죄송하고 부끄럽지 아니하겠읍니까.
하물며 성전(聖戰) 3년간에 조선인의 지위는 격세의 감이 있는 향상을 하였읍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요, 오직 광대무변한 성은을 망령되이 힘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공로가 있기로 내선일체의 영예를 바라겠읍니까. 그런데 교육도 평등되고, 국방의 영예로운 신뢰도 받게 되었읍니다. 내선양족(內鮮兩族) 간에 혼인과 양자가 허하여지게 되었고, 공통한 씨명(氏名)을 칭하게 되었읍니다. 이것은 어느 치자(治者)와 피치자 양족 간에도 보지 못한 광고(曠古)의 신례(新例)입니다.5)




이렇게 일인과 ‘공유’하게 된 것으로 그들이 갖게 된 ‘부와 권력의 공유’라는 환각은 어떤 것인가? 한 예를 들면 이렇다.



……언제 우리가 이만한 교육혜택을 받았던가? 언제 우리가 이만한 교통ㆍ위생ㆍ문화의 시설을 가졌던가? 언제 또 우리가 이만한 부력(富力)을 가졌던가? 허심탄회하게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에 아무리 전형적인 불평가라 할지라도 이 은혜는 승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공유적 동일감’은 다음과 같은 환각에서 극치를 이룬다.



……관리등용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인이 국체관념(國體觀念)과 습성과 지력이 내지인과 동일수준에 오르는 날 조선인은 내지인과 다름없이 내각총리대신도 되고, 육해군 대장도 될 것이요 대공사(大公使)도 될 것이다.6)




친일문인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그들의 말대로 하면 조선인과 조선민족이) 곧“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된다고 입을 모아 목청을 돋우어 노래하고 있다. 아니, 이미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되었다고 자기도취되어 있음을 본다.

친일문인들의 이중구조적 심리와 형태

친일문인들이 성격적으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동시적 공유체인 성격결함자임을 보자.

우리는 앞서 김문집의 고백으로 친일문인들이 얼마나 구역질나는 자기비하와 일본인에 의한 박해와 멸시를 미화하는가를 확인한 바 있다. 그들은 자기를 철저하게 무가치한 존재로 가학(加虐)하고, 일본인에 의해서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병적인 쾌감을 느낀다. 학대의 고통이오히려 감미로움으로 전화한다.자신(조선인)을 일본인이 짓누르고, 때리고, 침뱉고, 멸시하고, 피를 낼수록 그들의 쾌감은 황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럴수록 그들은 일본인에게 애무, 은혜, 사랑, 애착, 존경,동경, 정신적 오르가슴을 느낀다. 이것은 어떤 여자에게 있어서 완전히 병적인 피학대음란증과 같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일본인에게는 가장 추악하고 가혹한 가학음란증을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일본 도쿄의 성실연(性實演) 비밀극장에서 이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실연을 구경한 일이 있다. 그 장면은 인간의 전면적 소외와 동물화였다. 도저히 글로 옮기기 불가능할 만큼 병적이고 광적이었다. 정상적 성장과정을 거쳐온 사람, 정상적 성격ㆍ심리ㆍ정서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는 추악하고 일그러진 인간심리의 표출이었다. 아픔에 비명을 지르면서 희열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런데 친일문인들은 자기와 조선인의 몸에서“썩은 냄새가 물씬”나고, 모든 악덕과 부덕과 추악으로“오장육부가 썩어”있다고 자학했다. 이 병(病)의 대극적 요소는 자명하다. 일본인을 지선(至善)ㆍ지미(至美)ㆍ지강(至强)ㆍ지완(至婉)으로 보고, 그들에 의한 학대에서 희열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친일문인=마조히즘:일본인=사디즘’의 공식적 관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인에게서 받은 병적인 학대를 그들은 조선인 동족ㆍ동포에게 그 몇 배로 증폭한 형태로 가학한 이중구조적 심리와 행동으로 ‘가학음란증’까지 만족시키려한 것이다. 자기 민족의 역사에 대한 혐오와 동포에 대한 모멸이 어찌 이다지도 냉혈적이고 병적일 수가 있을까? 친일문인들이 일본인에 대한 피학대음란증 환자라고만 해도 동족으로서 ‘연민’을 느낄 여지가 없지는 않다. 심지어 추악한 병마에 걸린 환자라고 억지로 용서할 마음의여유인들 없겠는가? 그러나 동족에 대한 가학음란 행위로 쾌감을 일삼음에 이르러서 그들은 연민과 용서의 한계를 넘어선다. 범죄자가 된 것이다.

친일심리의 현재적 굴절

이상과 같은 고찰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과거사’여서 마음 편히 비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가아니다.바로『친일문학작품선집』1,2권의 엮은이가 똑똑히 말했듯이 그것은“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 있는 과거”이며“민족현실에 대한 우리의 늦추어진 경각심을 새로이 일깨”울 절실한 필요성에서다.
해방 이후 일제에서 해방되어 ‘독립’했다는 이 나라에,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오늘 이 ‘현재’에 이 민족과 국가 안에 ‘부정적동일화’ ‘병적 동일화’ ‘가학음란증’과 ‘피학대음란증’정신병환자들은 없는가? 아메리카라는 나라와 일본이라는 나라와 이 반도의 민족, 대한민국의 국민ㆍ동포 사이에서 왕년의 친일문인(지식인)과 같은 언동을 일삼고 있는 정치가, 기업가, 군인, 목사, 각 분야의 지식인은 없는가? 북미합중국의 세계지배 운동의 충직한 신민되기를, 일본국과의 군사동맹으로 ‘신판 황국신민’ ‘신판 아시아공영권’의 용사가 되기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부정적 동일화 환자들은 없는가? 이것이 친일문학을 오늘에 되새기는 의의다.
일본에 정신을 팔아먹은 조선인 고학생(가난한 농가 출신의 일본인 가정교사인 경성제국대학 예과생 이원구)이 동료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회에서 비판을 받자 거꾸로 가슴을 딱 펴고 조선인을 매도하는 논리를 들어보자.



“제군이 만일 진정으로 조선민중을 사랑한다면 광주학생사건에 나타난 그러한 잘못된 감정을 하루바삐 청산해야 할 것이오.”
“청산하고는 어찌하라는 말이냐?”
“청산하고 우리는 순순히 일본국민의 길을 걸어나가야 할 것이오. 여러분은 날더러 반역자라고 하거니와…… 여러분이야 말로 용서할 수 없는 반역자요. 그리고 조선민족을 죽이는 자들이오.”
그로부터 40여 년 뒤인 오늘, 이렇게 말하는 지식인은 없는가?
“나더러 대일 굴욕외교를 한다고 욕하지만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해서는 나는 이완용(李完用)이 될 각오가 되어 있다.”
“북괴와 싸우기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력을 끌어들여야 한다.”
“미국을 비평하는 학생은 민족반역자다. 미국 없이는 우리는 못산다.”
“미국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이상(理想)이다. 미국에 비하면 한민족은 결점투성이다. 아!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가, 아메리카여!”
시시한 글 한 줄 쓰는 데도 첫머리서부터“미국의 에드워드 스미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로 시작해야 권위를 과시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교수는 없는가? 그리고 또 그밖에…….




친일문학인의 환상적 관념주의

친일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은 그밖에도 여러가지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이 관념론자라는 점이다. 객관적 사실이나 관계의 과학적 분석력이 전혀 없다(시인ㆍ소설가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양해의 범위ㆍ한계를 넘어서 말이다).
소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상황분석능력은 한심할 정도로 비과학적이고 주관주의적이다. 물질적(자원ㆍ생산력ㆍ기술수준ㆍ조직력ㆍ군사력 등) 요소에 대해서는 거의 초등학생의 판단능력밖에 없음이 역력하다. 소위 일본인들의 비합리적 ‘정신주의’의 대표적 표현인 ‘야마또 다마시이’(大和魂)가 그들에게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을 치르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정신’의 힘이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인간적요소임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조선의 친일문인들의 시와 소설, 평론 들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거의 무방비 상태인 중국인과의 전쟁을 기준으로 태평양전쟁의 성격을 보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나는 그들이 다소나마 사회과학과 이공 분야의 초보적 지식과 소양을 갖고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환상적 결론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음은, 그들의 철저한 자기모멸(민족으로서, 조선인으로서)이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친일문인 누구에게서나 일치된 일본(인)화의 출발점이다. 일본역사의 신비화ㆍ미화는 도착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을 본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열등감과 혐오의 반작용적 충동으로 그들은 조작된 일본민족사를 환상적일 만큼 맹신하고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이조(李朝) 연간을 조선의 독립시대라고 한다면, 백일하에 고백하거니와 나는 이조의 독립국 백성이기보다 차라리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에서 산돼지 잡아먹고 돌아다니는 야인(野人)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7)




이 같은 민족사의 ‘이해’는 일본국가의 ‘신성’(神性)으로 아무런 매개도 없이 직결 접목되어 버린다.



……대일본이 신국(神國)임은…… 천조(天照)와 일신(日神)의 통(統)을 이어받아 스스로 신국의 체(體)를 갖춘 것은 일본역사의 개권(開卷)과 함께 입증(번역문에는 ‘전시’—필자)된 ‘사실’이며, 후세의 이론가에 의해서 억지로 조작된 공허한 관념이 아님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신국은 유구한 예부터의 ‘사실’입니다.




나 자신도 조선왕조 500년사, 특히 말엽에 이르러서의 현실에 대해서 결코 만방에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소한 일본과의 관계사에서 이 민족의 우월성을 몽땅 털어버리고, 심지어 대부분의 친일문인들은 일본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갖은 허무맹랑한 논거를 제시하면서, 일본의 ‘신국’(神國)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는데, 이러한 학문적자세는 타락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현실의 문제로 돌아올 때 이것은 일본에서의 이른바 일본역사의 ‘신국화’(神國化)를 비롯한 ‘교과서 내용 왜곡’사태와 관련되어 우리 자신들의 문제로 제기된다. 이 민족 안에서는 불과 40년전에 일본의 사악한 의도를 일본인들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지지한 조선 지식인들이 있었다. 오늘과 내일, 자기 민족과 나라의 실의(失意)한 지식인의 전철을 밟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의 보수세력과 군국주의ㆍ천황숭배사상자들의 정치ㆍ외교ㆍ경제ㆍ군사적 지원으로 정권을 유지하거나, 자신의 부(富)를 확보하려는 이 나라의 개인과 세력이 40년 전의 친일문학가들의 뒤를 이을 가능성은 없는가? 따라서 자기 민족과 사회의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은 생겨나지 않을 것인가? 현실의 전개와 추세는 나에게 자신 있게“없다!”고 답변할 용기를 주지 않는다.

친일문학인의 무인(武人) 숭배적 심리

친일문학인들의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상무’(尙武)ㆍ‘무용’(武勇)에 대한 동경과 찬미다. 일본인에 대한 피학대음란증은 자신(민족)을 ‘문약’(文弱)으로 규정하고 ‘상문’(尙文)적 인생관과 정신을 인간(민족)적 결함으로 단정해버린 데서 출발한다. 이 같은 의식에서 곧바로 빠져버린 함정이 군인ㆍ군대 숭배사상, 침략행위와전쟁의 정당화 및 미화다. ‘복종’이 인간의 본질적 속성으로 찬미된다.



모든 직역(職域)에서 우리는 병사요 직공이요 관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명령체제 속에 있는 것이다. 명령계통의 질서는 오직 복종으로만 유지되는 것이니 신체제의 국민생활은 오직 복종의 생활이다. 이 복종에는 통제력도 있지마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쁘게 즐겁게 복종할 때에 그 속에서 우리는 신체제의 자유와 쾌미(快味)를 느끼는 것이다.8)




이 얼마나 비문학적인 인간관인가! 친일문인들에게는 그들의 조상의 ‘문’은 ‘역사의 부채(負債)’가 되고, 일본인의 ‘사무라이’제도와 정신이 그토록 영광된 것으로 비친다. 자발적으로 일본군대에 입대하여 ‘성전’(聖戰)에서 죽으려 한다는 어떤 경성제국대학 학생 F군의 편지를 받은 한 시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의 회답을 쓰는 것이다.



역사의 부채(선조들이 문약해서 사대주의를 받들었다는 부채), 오랫동안 조선민족의 배후에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는 이 부채를 이제야말로 제군의 손으로 청산하여주기 바란다. ……오랫동안 감추이고 가리어졌던 무용조선(武勇朝鮮)의 참 자태를 마음껏 발휘할 천재(千載)의 호기(好機)가 지금 우리 앞에 와 있다. 무절조하여 기회주의였다고 하는 부조(父祖)의 오명을 일거에 씻어버릴 자는 제군밖에 없다.9)




친일문학인들은 이러한 점에서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대상’(代償, compensation) 추구적 성격결함자들인 것 같다. 대상이란, 심리적으로 어떤 약점ㆍ결함ㆍ제한이 있는 사람이 이를 보충 보완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와 대조적이거나 다른 것을 과도히 추구 발전시키는 심리적 경향을 말한다. 앞서 지적한 반동형성(reaction–formation)으로서의 비정상적 추구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비정상 심리의 소유자들인 까닭에 친일문학인들은 일본군대의 노예적 용병, 하수인적 앞잡이가 되어서 아시아의 여러 전선에 나가는 것을 마치 ‘지배민족’이 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면 40년 뒤인 현재의 이 민족에게는 그런 정신병리적인 착각은 없는가? 언제나 오늘과 내일을 위한 교훈으로서 지나간 날의 친일문학(인)을 되새길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과오에서 교훈을 얻었는가를 자성(自省)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걸친 기간에 베트남전쟁으로 파병할 때의 이 나라의 지식인(문인들도 포함해서)과 대중의 심리상태는 어떠했던가? 박 아무개라는 이름나고 존경받는 여(겿)정치가는 그 당시 어느 날 베트남 시찰을 위해서 탄손누트 공항에 내렸을 때의 감상을 이렇게 술회한 글을 썼다.



탄손누트 비행장에 내려 베트남의 땅 높은 국기게양대에 태국기가 휘날리는 것을 본 순간 나는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공항에 접근하면서 비옥한 베트남 땅이 눈 아래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역사상 침략만 받았던 우리 민족이 수천만 리 남의 나라 땅에 군대를 파견한 위업에 가슴의 고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비옥한 땅이 우리의 것이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나 하고 생각했다. (이 정치가가 귀국 후 신문에 기고한 글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기에 거의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을 만큼 재생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서 여기에 적지 못했다.)




이 같은 심리상태는 남의 나라(일본)의 전쟁에 자기의 아들딸을 몰아내고 그 생명의 대가를 노래한 다음의 시와 뭐가 다른가? 이 시는 ‘지원병’으로 나가 중국전선에서 죽은 22세의 이인석 일등병(죽어서 ‘군신’(軍神)이라고 떠받들어지면서 2계급 특진으로 상등병이 되었다)의 죽음을 찬미한 것이다.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냈었겠지
웬걸, 지사(知事)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祭床)에 내렸겠나.10)




사회과학적 세계인식의 공백상태

친일문학인들의 글을 읽고 난 뒤의 또 하나의 소감은, 그들이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ㆍ정치적 원리와 기능법칙 같은 것에 대한 지식이 거의 백지상태였다는 결론이다. 이것은 소위 일본의 아시아 정복 야욕의 가면인 ‘팔굉일우’(八紘一宇, 천하를 한 집으로 여긴다), ‘대동아공영권’,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로부터의 아시아민족의 ‘해방’, 백인종의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황인종의 자유, 정복한 각 지역 국가의 지배계급 또는 정부의 포악으로부터의 국민해방, 그들 아시아지역 국민에 대한 일본의 ‘일시동인’따위의 허울좋은 명분ㆍ이론ㆍ이념에 친일문인들이 얼마나 감격했는가를 읽으면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의 친일행위의 정당화 근거로 가장 강조된 논리가 이것이다. 그들은 제국주의ㆍ식민주의의 내용과 형식의 일면만을 알았지 양면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백인종 대 황인종, 서양(플러스 미국) 대 동양, 제국주의와 식민지민족 등의 등식에서밖에 20세기 중반의 세계적 갈등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대동아전쟁은 …… 단순히 일본과 영ㆍ미와의 전쟁만이 아니라, 영ㆍ미가 아세아와의 대등한 관계를 무시하고 아세아 민족을 학살하고 세계정복을 꾀하려는 영ㆍ미적 세계사에 대한 일본의 폭탄적인 방비전(防備戰)이며, 아세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선양하는 아세아의 자각전(自覺戰)이기도 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근대의 영ㆍ미의 영광은 바로 우리 아세아의 굴욕이었습니다. 그들의 문명이 하나하나 약진한 그 그늘에서 수없이 많은 아세아 민족의, 우리의 옛적부터의 맹방이었던 아세아 민족의 생생한 피가 참혹하게 대지에 쏟아졌던 것입니다.……
그(그들에게 터진—필자) 폭탄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거룩한 옛 정신을 지켜온,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온 일본제국이 아세아의 자율과 독립을 위한 통쾌한 정의의 폭탄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이 폭탄은 동시에 전(全) 아세아 민족의 폭탄이기도 한 것입니다.11)




친일문학인들은 20세기 자본주의의 최고 발달단계에서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획득 충동이 영ㆍ미에 적용되는 것을 추상적으로는(즉 상식적으로는)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 자본주의가 독점단계에 도달해 식민지 획득 없이 존속할 수 없는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정치ㆍ경제적 지식은 희박했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의 과학적 인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기들이 빠져버린 친일파ㆍ민족반역자의 입장에서 그것밖에 강조할 길이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십분 참작하면서도 말이다.)
그들의 당시의 시각과 관점을 오늘의 표현으로 말하면 일면적이분법 논리라고 하겠다. ‘흑백논리’라고도 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적 색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계정세에 대한 주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고, 사회과학적 지식과 그 지식을 도구로 삼은 과학적 인식력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들이 제국주의에 대한 치열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만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제국주의ㆍ식민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민족해방의 열정을 가진 다른 동포들, 주로 국내의 좌익이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간파하여 항일투쟁에서 희생되고 있던 같은 시간에, 그들이 극우적 (일본) 국수주의ㆍ군국주의ㆍ제국주의ㆍ식민주의적 신념에 자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외의 민족주의적 독립투사들이 가졌던 정도의 인식조차 그들은 갖지 못했다. 문학을 하는 이들에게 사회과학적 교양이 절실히 필요한 것임을 일깨워준 쓰라린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친일문인들에게는 그밖에도 논할 사실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정도로 끝맺는 것이 비문학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끝으로 나는 전후 독일에서 나치에 대하여, 프랑스 등 주변 국가에서 친나치ㆍ민족반역자들에 대한 다면적인 정신병학적ㆍ심리적ㆍ사회학적ㆍ연구를 했던 것과 같은 작업이 친일파(지식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교훈’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1) 김문집(金文輯, 大江龍之介), 조선민족의발전적해소론서설, 친일문학작품선집2, 268. 이하에서는 책이름은 빼고 1, 2권으로 약기함.

2) 김용제(金龍濟), 민족적감정의내적청산으로, 2, 163.

3) 김용제, 같은 글, 2, 162.

4)임상행동과학종합병원정신의학, 일조각, 1985 참조.

5) 이광수, 성전3주년(聖戰三週年), 1, 86.

6) 이광수, 같은 글, 72.

7) 김문집, 조선민족의발전적해소론서설, 2, 263.

8) 이광수, 반도민중의애국운동, 1, 76

9) 김소운(金素雲), 부조의오명을일소(父祖汚名一掃), 1, 203.

10) 김동환(金東煥, 白山靑樹), 권군 취천명(勸君 就天命’), 1, 189.

11) 조연현(趙演鉉, 德田演鉉), 아세아부흥론서설, 2, 356~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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