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일본 ‘친한파’의 정체」
6-6. 「일본 ‘친한파’의 정체」(1986년, 역설)
일본 ‘친한파’의 정체
우리나라에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무비판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하나의 ‘미신’이 있다.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정부)에 의존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정부와 경제계가 주축이 된 상징조작으로 굳혀진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이른바 ‘친한파’로 불리는 일본인과 그들 집단에 대한 근거 없는 우호적 감정과 예우가 그것이다.
일본에서 총선거가 치러지고 개각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우리나라의 정부, 정치인 그리고 보도기관은 ‘친한파 인사 몇 명 입각’이나 ‘누구는 친한파이고 누구는 아니고’하여 웃기도 하고 울기도하는 한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어느 구석에 묻혀 있는지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인물이 내방할 때도 김포공항에서의 인터뷰 기사는 ‘친한파’운운으로 대서특필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위 ‘친한파’라고 하면, 그들의 일제시의 행적, 현재의 세계관, 인간적 품성과 도덕성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첨을 한다. 그들의 정체가 ‘파우스트’인지 ‘메피스토펠레스’인지 가려볼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굶주린 늑대인지 평화스러운 양인지조차 살펴볼 생각도 없이 짝사랑의 손짓부터 하고 있다. 그러다가“일한합방은 양국 정부와 국민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훌륭한 결정이었다”는 따위의 주장이 바로 그 친한파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것을 듣는다. 그러면 이제까지 ‘한국에 호의적인 친한파’라는 찬사를 보내던 철없는 한국의 언론은 ‘무슨 무슨 망언’이니, ‘식민주의자의 근성이니, 제국주의사상의 소유자’니 하며 규탄과 매도로 언성을 높인다.
어제까지의 일본의 여래(如來)가 갑자기 야차(夜叉)가 되었단 말인가. 본래부터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였던 것인가? 아니면 이른바 ‘친한파’라는 일본인들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인가? 선량한 국민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 상태가 벌써 2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다. 소위 ‘친한파’라는 일본인의 정체를 분명히 확인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일본과의 결탁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이 나라의 개인들과 집단들 그리고 체제의 비위를 맞추기를 일삼는 언론기관들이 ‘친한파’라는 ‘성호’(聖號)를 붙여서 오금을 쓰지 못하는 그들은 일본사회에서 어떤 속성의 개인이며 어떤 성향의 집단인가?
친한파를 똑바로 봐야 한다
한국과의 관계에서 일본인은 몇 가지 등급이 있는 것 같다. 최상급이 친한파, 상급이 ‘지한파’(知韓派), 하급이 ‘중립파’, 최하급이 ‘반한파’(反韓派)라는 구분이 그것이다. 그런데 일본인 자신들은 한국에 대한 자신의 심정적 자세나 물질적 이해관계가 어떤 것이든 그런 호칭으로 자신을 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 호칭으로 표현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꺼림칙하게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상대방 일본인에게 ‘친한파’라는 최상급의 성호를 봉정하는 이쪽 일부 한국인 자신의 경향은 ‘친일파’적 성향이라는 뜻이 된다. 물론 과거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친일파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심각하게 자기반성을 해야 할 문제임에는 다름이 없다. 바로 몇 해 전, 이 나라 정부의 시나리오에 따라 현해탄 위에 배를 띄워놓고 소위 ‘한일친선’을 노래하며 축배를 들던 일본의 대표적 ‘친한파’와 한국의 대표적 ‘친일파’들 사이에 욕설이 오가고 술잔이 날아가는 꼴이 벌어진 사실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과연 ‘친한파’라는 일본인이 이 나라를 진심으로 아끼고 위하고 걱정하는 인물들인가? 한국에 대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가장 모멸적인 발언을 일삼는 자들이 다름 아닌 ‘친한파’와 ‘지한파’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리고 ‘중립파’와 ‘반한파’적 일본인은 그 경우 어떻게 나오는가. 무력에 의한 한일합방의 사실이나 교과서 왜곡 문제에서 자기나라 정부와 소위 ‘친한파’들의 발상을 신랄히 규탄하는 중립파ㆍ반한파적 일본인들이야말로 ‘친한파’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정부와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의 정확하고도 적절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제는 일본의 친한파에게 있는 것 못지않게 이 나라의 정부와 지식인ㆍ언론인들에게도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생각해야 할 문제는 또 있다. 소위 친한파라는 일본인이 단기적으로는 정치ㆍ경제ㆍ군사적으로 이 나라에 하나의 이익을 주고 몇십의 이익을 바라는 자인지? 장기적으로 그리고 남북의 전체 민족적 이익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과연 환영할 만한 세계관과 이해관계의 인물인가 하는 규명도 필요하다. 친한적 인물과 집단이 우리의 분단상태에서 이득을 얻는 자는 아닌지? 민족간 적대관계의 장기화를 조장하는 계교 때문에 이 나라의 일부 인사들과 집단내지 세력의 환영을 받는 자들은 아닌지? 그리고 그들은 일본 내에서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측에 서는 인물들인지? 앞으로의 일본을 어떤 체질의 일본으로 만들려고 하는 인물들인지? 과거의 행적은 어떠했고,지금의 사상은 어떠한지? 과거의 행적에서 부정돼야 할 인물(들)이라면 내일은 긍정할 만한 자기변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인지?우리에게는 알아야 할 사실이 너무 많다.
친한파의 계보와 행적
친한파라는 분류와 호칭에 해당하는 일본인은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일본사회를 구성하는 대중의 어느 부분을 저변으로 최고 지배층의 일정 부분을 정점부(頂點部)로 하는, 피라밋형의 인구 구성틀에 포함되는 한국에 호의적인 사람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대중 속에도 ‘친한’적인 사람이 있고, 중층에도, 정점부에도 있다. 마찬가지로 ‘지한파’ ‘중립파’ ‘반한파’도 각기 일본국민 중에서 한국에 대한 경향성의 차이에 따르는 그 같은 피라밋형 구성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경향의 피라밋의 경우에도 우리에게 가치판단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정점부를 이루는 지도부적 ‘공적’구성분자다. 나머지 중층과 저변 대중의 사상ㆍ성향 및 행동방식은 개별적 분석이 필요하지만 대체로 정점부의 지도자급 인사들의 그것에 준하는 것으로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일본사회의 정치ㆍ사회ㆍ문화적 특징인 강한 순응성과 지도층에 대한 대중의 자기 일체화 경향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렇다. 따라서 일본민중의 ‘친한파’적 모든 요소와 속성은 친한파의 지도부 ‘거물급’인사들의 그것을 검토함으로써 귀납적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더욱 구체적으로는 1960년대부터 ‘친한파’를 구성한 정점급 인사들은 기시 노부스께(岸信介)를 비롯해서, 가야 오끼노리(賀屋興宣), 오노 반보꾸(大野伴睦), 사사가와 료오이찌(笹川良一), 야츠기 가즈오(矢次一夫),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志夫) 등이 꼽힌다. 역대 정부총리급, 집권 자민당 지도부, 재계, 실업계, 사상계, 군부(軍部), 문화계 등의 친한파 인사들은 다만 대표적인 그 여섯 거물의 보좌역이며 집행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시’와 ‘가야’는 어떤 인물인가? 일제의 한국 만주북지(滿洲北支)의 식민지 통치의 한 주역으로 제국주의 침략 및 지배의 선봉에 섰고,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태평양전쟁을 감행한 도조 히데끼(東條英機) 대장(大將) 내각의 대장대신(大藏大臣, 기시 노부스께), 상공대신(商工大臣, 가야 오끼노리)이었다. 전후의 도쿄 전쟁범죄자 재판에서 ‘가야’는 25명의 A급 피고 중 대부분 사형에 처해진 군인 18명을 제외한 문신(文臣) 7명 중의 한 사람으로 종신형을 언도받은 전범ㆍ평화 파괴자의 경력을 가진 자다. ‘기시’ ‘고다마’ ‘사사가와’는 최종 25명에서는 빠졌지만 애초 같은 A급 전범자로 기소된 경력자다. 그들은 중국을 비롯한 일제의 식민지ㆍ점령지에서 정계ㆍ군부ㆍ재벌의 침략행동의 ‘흑막의 왕’으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노를 포함한 그들은 피지배민족의 분열공작, 친일 정치인과 정권의 매수ㆍ회유ㆍ수탈을 도맡은 정치음모의 괴수들이다(고지마노보루(兒島襄), 『東京裁判』과그밖의기록들참조).
“나와 박정희 대통령은 부자지간”
그런데 전후 미국의 반공전선 구축의 정책전환에 따라 기시는 수상이 되고, 오오노와 가야는 정치거물로 부활했으며, 고다마와 사사가와는 각기 일본정계와 경제계의 막후적 거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약소국가들 정부를 일본의 정치적ㆍ경제적 세력전에 틀어쥐는 공작의 주역을 담당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각별히 깊고 짙은 흑막에 싸인 속에서 진행되었다.그들은 굴욕적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의 추진자였고, 일제히 일본 육군장교였던 박 정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일간의 각종 정치ㆍ경제적 의혹사건의 주역이었다. (5월 16일 군부쿠데타 직후 김종필의 새나라 자동차, 빠친코 도박기구, 워커힐 부정사건의 자본제공, 일본 록키드 사건과 KAL 관계,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에서의 전차 매매에 따르는 막대한 뇌물ㆍ정치자금 수수사건 등등)
야츠기는 한국을 일본경제의 하청적 지위로 일체화시킨 1970년 ‘일본 관서(關西)지방 경제권에의 한국 편입 형식으로서의 한일경제협력’구상의 창안자이거나 추진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여태까지 폭로되었거나 아직도 흑막에 가려 있는 수많은 한ㆍ일 정권과 기업 간의 유착ㆍ흑막사건의 일방 당사자들이다. 박정희 정권의 국제관계 정책수립에서 기시가 맡은 역할은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이들 소위 ‘친한파’지도자들이 한국 내지 한국정부 및 한국정치에 대해서 품고 있는 속마음은 1963년 12월 18일 서울 방문에서의 발언으로 대표되고 상징된다.
박정희 장군이 거듭한 선언 끝에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민정이양이라는 형태로 선거를 실시하여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1963년 12월 17일, 오노는 일본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의 부총재로서 ‘경축특사’로 내한했다. 많은 수의 ‘경축사절단’친한파 인사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조선호텔에서 한국 기자단과의 회견이 있었다. 왕년에 조선과 만주ㆍ중국의 친일분자들을 손아귀에서 굴리며 놀던 일본제국ㆍ식민주의의 이 거물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와 박정희 대통령의 관계는 부자지간이나 다름없다.”
이 발언에 아연실색해서 말없이 있는 기자단 가운데 한 사람이 추궁했다.
“당신과 박정희 대통령이 부자지간이라는 말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오.”
그러자 오노는 자기의 실언에 놀라 발언을 수정하는 해명을 했다.
“아니야(そうじゃない). 나의 뜻은 다만 부자지간처럼 다정하다는 것이오. 차라리 형제지간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
이 기자회견 발언기사가 보도된 이틀 후, 국회에서 김준연(金俊淵, 삼민회) 등 22명의 야당의원이 오노의 ‘부자지간’운운 발언을 추궁하는 ‘박정희 대통령 국회 출석 결의안’을 제출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합동통신사 정치부 기자로서 그날의 ‘오노’발언을 추궁한 이 글의 필자는 소위 친일파라는 인간들의 철학과 세계관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나라 각계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비굴하게 굴었으면 그런 발언이 소위 ‘친한파’들에게서 거침없이 나왔겠는가? 이것이 그들의 행위다. 과거도 그렇고 최근도 그렇다. 문제는 친한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소위 ‘친일파’에게도 있다.
친한파의 대한관(對韓觀)
‘친한파’치고 한국과 한민족을 모욕하는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드러내어 공언하지 않았다면 그럴 기회가 없었거나 보도되지 않아 이 나라 대중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그들의 철학과 사상은 한국(국민)에 대해서만큼은 현재도 ‘조선총독부’시대의그것과 다름이없다.실례를 들어 검증해보자.
1953년 : ‘구보다 강이찌로’(久保田貫一郞) 한일회담 수석대표.
“36년간의 일본의 한국 강점은 한국민에게 유익했다.”
• 1958년 : 한일간 정치흑막의 괴물로 알려진 야츠기 가즈오가 당시 ‘평화선’(平和線, 이승만 라인) 침범으로 납치되어 있는 일본 어부의 석방을 교섭하기 위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기에 앞서, 김동조(金東祚) 외무장관과 짜고 이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지배로 한국민에게 많은 폐를 끼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로 말하면 당시로서는 국제정세가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랬다고 생각하더라도 한국에는 피해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운운.
야츠기가 귀국한 후 일본국회에서 이 발언이 기시 수상의 의사를 대변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기시 수상의 답변을 들어보자.
“그 견해는 야츠기 군 개인의 견해를 말한 것이지 일본국 총리로서의 나의 견해는 아닙니다.”
• 1963년 : 시이나 에츠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이상을 기탁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라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다.”(시이나는 태평양전쟁 개전시 도조 대장내각의 기시대신 밑에서 차관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발언을 한 직후인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매듭짓고 조약에 가조인한 ‘친한파’의 거두다.)
• 1964년 : 다까스기 싱이찌(高杉晋一) 한일회담 수석대표. “일본은 분명히 조선을 지배했다. 일본은 그동안 많은 좋은 일을 했다. 지금 한국에는 산에 나무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이런 것은 조선이 일본에게서 떨어졌기(독립했기) 때문이다. 20년쯤 더 일본과 상종했더라면(식민지 상태가 계속되었더라면)그렇게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국민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했지만 일본의 노력은 전쟁으로 좌절됐다. 한 20년쯤 더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 1966년 : 사토 에이사꾸(佐藤榮作) 총리대신.
“1910년에 체결된 병합에 관한 조약은 대등한 입장에서 그리고 자유의사에 토대해서 체결되었다.”(사토 수상은 ‘친한파’의 총수인 기시의 친동생이다.기시는 양자로 가서 달라진 성이다.)
• 1982년 : 일본 교과서 첫 분쟁.
• 1985년 : 일본 교과서 두 번째 분쟁.
• 1986년 : 후지오(藤尾) 문부대신.
“한일합방은 쌍방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서 체결된 결정이다.”
• 1986년 : 자민당 국회의원 가메이(龜井).
“한국민이 일본 교과서 문제에 계속 간섭한다면, 언젠가 일본 국민의 감정이 폭발하여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
198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이 같은 발언이 늘어나고 강도가 짙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일본과 한국에서 각기 누구의 시대인가? 일본에서는 나까소네의 시대이며 한국에서는 전 정권시대다.
나까소네는 한국의 현 정권이 경제적 궁지에 빠졌던 83년에 40억 달러의 ‘지원금’(차관)을 선물로 가져온 기시의 후계자다. 그런데 왜 소위 ‘친한파’중에서도 친한파인 그가 집권한 지난 몇 해 동안에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더 많은 분쟁과 망발이 일어나는가? 친한파의 발언은 빈도가 잦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적 질도“전쟁을 하러 갈 것”이라는 데까지 흉악해져가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친한파의 위험한 철학사상ㆍ세계관ㆍ역사관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일본 친한파에 대응하는 한국 친일파들이 그들에게 의지해서 정치ㆍ경제ㆍ군사ㆍ외교적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파에 속하는 정당ㆍ단체들
소위 ‘친한파’라는 범주에 드는 인물들은 일본 보수세력 중에서도 그 우익에 서는 사람들이다. 한국인 일부에게서 소위 ‘지한파’라는 호칭을 증정받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보수세력의 중도 내지 좌파에 속하는 사상의 소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두 계보는 합쳐서 집권 자민당을 구성하는 개인이며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세력이 일본의 각계 권력구조에서 상층을 형성한다.
‘중립파’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민주사회당ㆍ공명당(公明黨)ㆍ사회당의 우파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동맹(同盟)파 노동조합과 대부분의 무관심한 지식인과 시민이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각종 기관이 자주 실시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체로 그 같은 사상ㆍ정치ㆍ경제적 분류를 뒷받침해준다.
좀더 세분화해서 ‘친한파’의 소속집단을 구체적으로 보면, 정치조직에서는 자민당의 중앙과 지방 전국조직의 각종 기관 산하의 우익들, 실업계와 재계에서는 경제인단체연합회(경단련), 상공회의소 및 자민당의 각종 정치자금 연출기업들. 군부에서는 일제군대의 고급 퇴역장교들, 현 자위대의 고급간부들, 일본사회 특유의 깡패ㆍ야꾸자 조직들. 학계 내지 준학계로서는 일본의 국수주의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되고 세력을 확장 중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國民會議), 일본안보연구센터, 일본국방학회, 일본전략연구센터, 고꾸시깡(國士→) 대학 등. 통일교회와 그 산하기관인 세계평화 아카데미, 국제문화협회, 국제승공연합, 원리연구회 등이다. 일본 고유의 종교세력으로는 15만 개의 크고 작은 신사(神社)를거느린 신사본부(神社本府), 불교계의 불교호념회(佛敎護念會), 일본 국가주의적 혼성종교인 ‘생장(生長)의 집’, 전국정치연합회, 전일본 종교정치연맹, 과거 침략전쟁의 전몰군인 유족들로 구성된 일본유족회 등이 있다.
이 모든 우익 내지 극우ㆍ반공주의ㆍ국수주의 단체, 기관들은 천황친정(天皇親政) 체제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는 원호치제화실현국민회의(元號治制化實現國民會議)를 구성하고 있다. 독자적 핵무장까지의 일본 군사대국화의 구상을 가진 자주헌법제정국민회의(自主憲法制定國民會議)도 같은 전국조직이다.
친한파의 철학ㆍ사상ㆍ이데올로기
친한파(인사)의 이데올로기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일본인(사회)은 외국의 관찰자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행동양식의 자기모순, 신념체계의 비합리적 병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단서를 붙이고서 말한다면 친한파의 경제사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이고, 사회사상은 반공주의로 통일된다.
그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공통적인 경향은 강한‘가족주의’ ‘향토사상’(鄕土思想) ‘ 민족공동체 이념’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제2의 생산력ㆍ과학ㆍ기술의 수준을 이룩한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친한파가 그중 극우적 계보를 이루는 일본의 우익ㆍ극우는 일본 국내적 정치ㆍ사회ㆍ문화적 이데올로기로서는 국가원리를 전근대적인 가족원리로 규율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소위 ‘가족국가’사상이 그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추상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21세기로 접어드는 현재에도 일본국가가 고대의 가족사회적 구성을 그대로 변함없이 지켜 내려온 가족국가적 관념이 짙다.
여기서 천황친정 체제 사상이 그 정치적 응집력으로 발동하는 까닭을 외국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우익은 일본국가의 근본적 특질을 영원한 ‘가족의 연장체’로 본다. 따라서 전체 국민의 ‘총본가’(宗家)로서의 황실과 가장으로서의 황실의 중심인천황 숭배(중심)사상이 국가원리로서 강조되고 있다. 최근 친한파 중심의 일본우익이 노골적으로 ‘국체’(國體, 천황친정 국가)를 강조하고 나온 경향이 그것이다. 일제의 국내 천황주의 파쇼통치와 대외적으로는 군대적 영토팽창ㆍ침략ㆍ식민지배 정책을 천황 국가주의의 지리적(공간적) 확대로서, 대동아공영권 팔굉일우(八紘一宇) 일시동인(一視同仁) 등 허구맹랑한 슬로건으로 미화했던 그 근본사상이 부활하고 있다. 일본 우익인사들이 최근 일본을 아시아의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일본의 위세를 지역국가 민족ㆍ국민들에게 확대하는 것을 일본민족의 ‘사명’인 양 발언하고 있는 것은 그들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리고 그들의 전후적ㆍ팔굉일우적 첫 대상이 한국인 것이다.
일본우익ㆍ친한파들의 ‘민족공동체’관념은 얼핏 보기에 전전독일 ‘히틀러’의 폴크스 게마인샤프트(Folks Gemeinschaft) 사상과같지만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히틀러’의 나치이념인 ‘피와 땅’(Blut und Boden) 관념은 가족적 관념이기보다는 공적ㆍ정치적 관념이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우익의 그것은 일본국가가 ‘실체’로서 ‘천황의 국가’라고 믿고 있다. 일본인 국가(사회)의 행동원리를 현대적 기능주의가 아니라 ‘화’(和)에 두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친한파적 극우주의자들이 개인주의적ㆍ자유주의적 세계관을 배척하고, 그것의 정치기능적 표현인 의회정치에 반감을 가지며(천황통치제), 일본 민족신화나 국수주의에 도취되는 까닭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그들의 신념은 마치 유대인의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방불케 한다. 과거 독일이 그랬고 현재 유대인(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 그렇듯이, 현재 일본우익의 선민사상은 당연한 논리로서 무사정신, 강력한 군사적 실체로서의 군사대국화, 군비확장, 군대와 전쟁에 대한 숭배와 찬미의 경향을 낳게 마련이다. 일본에서 지난 10여 년 사이에 급속도로 팽배하기 시작한 일본제국 군대의 찬양은 그것의 복고적 표현이다.
‘가족국가’와 ‘화’(和)의 정신은 사상적으로 당연히 계급투쟁적 세계관과 마르크스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로 표출된다.
친한파들이 한반도 민족의 화합ㆍ상호수용ㆍ수렴방식일 수밖에 없는 통일보다는 분단의 고정화를 바라는 이유도 알 수 있다. 국제관계에서 소련에 대한 공포감ㆍ증오심을 부채질하는 이유와 소련의 일본공격의 실제적 가능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것을 과장선전함으로써 일본의 군비강화, 군사대국화, 일본 군사력의 해외파견, 군사력에 의한 일본 정치ㆍ외교ㆍ경제정책의 뒷받침 등을 추진하는 것도 그 이데올로기의 일환이다. ‘반공주의’의 깃발만 들면 여하한 독재정권도 그들의 절친한 벗으로 간주된다.
친한파 미신은 타파돼야 한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의 그리고 그 개개의 사상ㆍ이념 심지어 심정적 특성까지를 합친 친한파적 일본우익 이데올로기의 ‘꽃’이, 군도로 자결한 작가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로 피어났다. 문학사상적으로는 정신주의이고 심미주의적인 ‘미시마’의 장렬한 죽음은 그 모든 요소의 궁극적 표현이다. 그것은 친한파적 일본우익에게는 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보도록 강요당하는 주변지역 민족ㆍ국민 들에게는 ‘독버섯’일 수밖에 없다.
일본정부와 우익이 이상과 같은 이데올로기로 강력히 추진하는 ‘국가적 과제’의 하나가 군국주의화를 예방하려는 현재의 헌법을 개정 내지 폐기하는 운동이다. 단기적 또는 중기적 과제로서 총력이 집중되고 있다.
또 하나의 장기적 과제는 각급학교 각종 교과서의 ‘개악’이다.
해방 후 일본인 세대의 두뇌 속에 그들의 이념과 목표를 자연스럽게 주입하는 사상적ㆍ지적 세뇌작업인 것이다. 그 작업은 그칠 수가 없는 것이며, 현재와 같은 보수정권이 지속되는 한 오히려 더욱 박차가 가해질 것이다. 그 작업은 바로 그들의 일본지배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강화하고 그들의 지위를 영구히 보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전쟁’의 위협마저 서슴지 않게 되었다.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서 한일군사동맹까지를 구상하는 그들이 남한에 대해 ‘전쟁’운운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소위 친한파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교과서를 개악하고 역사를 왜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회 있을때마다 우리 민족에 대한 모멸적 언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이러한 현상과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친한파’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답변을 해야 한다. 답변을 강요당하고 있다 함이 차라리 적절한 표현이다. ‘친한파미신’은타파해야한다.
소위 친한파 세력의 목표는 분단된 이 민족의 영원한 고정화에서 이익을 노리는 데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농락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남북한의 군사대결을 평화구조로 바꾸고 통일을 지향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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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일본 ‘친한파’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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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일본교과서 논쟁과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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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일본 재등장의 배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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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친일문학(인)의 매저키즘과 새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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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한국의 ‘친일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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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광복 32주년의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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