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한겨레 방북 취재 사건으로 수감 중 집으로 보낸 편지(2)
1989,7,4 (火)
사랑하는 아내 영자에게
30여년 만에 당신을 이름으로 불러보니 각별한 심정이 되오.
매일 접견에서 만나면서도 제한된 시간에 허둥지둥,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정작 차분히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하고싶은 이야기는 못하고 흘러갔오. 오늘도 방금 접견하고 돌아와서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해요.
내일 1989년 7월 5일 오후 4시, 재판정에서야 비로서 당신을 가려지지 않은 모습으로 볼 수 있겠오. 결국 재판이오. 당신은 물론이지만, 많은 사람들, 선량한 이 사회의 시민들이, “무슨 재판까지 할 일이 있는가? 기소할 일도 못되는 것을!”이라고 생각하는 일이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쪽에서는 그런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오.
중앙정보부에서 끌고 가, (검열 삭제됨)에서 연일 조사한 끝에 변호사들의 강력한 요구와, 그들 스스로의 사회에 대한 어떤 계산된 효과를 위해서 중부경찰서에서 당신과 변호사들을 면회시킨 자리를 기억하지요?
그때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라고 말하니까, 당신이 한마디로 “아니!”라고 대답했지. 나는 당신의 그 답변을 얼핏 해석하기가 힘들었오. 당신은 “이까진 일로 무슨 마음의 준비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럴 필요 없다”는 아주 단호하고도 간단한 답변이었지요. 정보부에서 그렇게 당하고 나온 나의 감각으로서는 지하실에서의 느낌과 밖에서 생각하는 일반적 반응이 너무나 차가 있어서 오히려 당황했었어요. 그 자들이 나를 얼마나 (검열 삭제된)처럼 여기는지, 당해보지 않은 당신으로서야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오?
낙관적으로 단정한 것이 당연하지. 결국 보석신청도 무효였지 않소? 지금의 판사들, 재판부(사법부)가 무슨 독자적 판단을 할 수 있기에?
이제, 결국 재판이 열리게 되고, 내일 나는 법정의 피고인석에, 당신은 방청석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같은 공간에 떨어져 자리하게 되었오. 당신은 세 번째로 법정에 서는 남편을 보게 되었오. 난들 그러고 싶은 까닭이 있겠오? 한겨레신문의 북한취재보도 구상을 처음 들었을 때 당신이 “편안히 살고 싶다”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응한 것을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당연한 심정이지요. 당신은 개인적 평안이나 가정·식구의 안일보다 공적 정의를 앞세워 생각하는 경향의 남편 때문에 당신과 자식들의 행복을 얼마나 희생했오? 당신의 그 심정을 잘 아는 나이고보니, 내일 다시 통일을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서 재판의 피고인석에 서게 되는 마음 정말 괴롭기 한이 없오. 당신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당신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 알수가 없오. 죄송하오.
그런데 어제의 면회 때에 가정내의 일로 또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당신과 면회실에서 헤어지고, 저녁 밥을 먹고나서 밖이 어두어진 방 뒤의 철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반성했오. 오래간만에 눈물이 흐르더군요. “내일 면회오면 아내의 마음을 풀어주고, 가정내의 일은 일체 ‘당신의 판단에 맡기고 따르겠오’라고 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짐했던 것이오. 오늘 면회에서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고나니 지금 나의 심정이 한결 가벼워요. 내가 아직도 노여움을 참지 못하니, 앞으로 많은 수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오. 다시 어울려 생활하는 날까지 많은 노력하겠어요.
오늘 점심에는 닭훈제를 뜨거운 식수에 넣었다가 꺼내서 아욱국에 찢어 넣어 먹으니 참 맛이 좋았어요. 어쩌다가 한 끼, 밥먹는 것이 즐거운 때가 있어요. 오늘 낮의 식단은 관식으로 나온 보리밥, 아욱국, 선 깍두기, 게다가 풋고추와 된장... 이것이 신선한 맛을 준 탓인가부에요. 게다가 조금씩 곁들여 먹는 것이지만 마늘장아찌, 김, 삶은 달걀 한 알(이것들은 ‘사간식’이라고 구매하는 것).
내일의 재판이 당신이 애당초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주변 외적정황이 흉흉해지는 속에서 열리는 까닭에 좋은 전개를 예상키 어려울 것 같아요. 판사라는 자가 또 과거의 정권에 충성했던 소위 "5공판사"라니 더욱이나 그렇고. 그런 자에게 사건심리를 맡기게끔 되어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들이요. 그러니 당신은 마음 침착하게 먹고, 낙관적 기대의 결과로 오는 실망에 좌절하지 않도록 하세요. 내일 법정에서 봅시다. 출입구 가까운 곳에 있다가 잠깐이라도 손만이라도 만져보면 좋겠오. 물론 이 편지는 재판이 다 끝나고 며칠 뒤에 당신 손에 배달되겠지요. 방청석에서 당신이 얼마나 애타게 앉아있을까. 가끔 돌아다 보겠소이다.
당신이 부디 부탁한대로 의연하게 재판에 임해야지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통일의지 때문에 형무소에 쳐넣어진다는 것은 진실로 민족의 비극이웨다. 비극이에요.
글을 마무리지으면서, 어제 면회 때에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을 다시 사과합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고, 당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나로 말미암은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그래서는 벌을 받을 것이오. 깊이 반성하였오. 저녁식사시간이 되요.
편히 쉬시오. 나의 하루도 저물어가요. 지루한 하루였오. 내일을 위해서 깊이 잠들겠오.
1989,9,4(月)
세월이 유수같아 벌써 9월에 접어들었어요.
여보, 주말을 어떻게 지냈오. 지난 금요일에 면회왔을 때가 나흘만이었는데 피로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 얼굴이 활짝 피지를 못합디다. 너무 수고가 많아요. 미안해요.
회갑 기념으로 우리 동남아 관광여행을 하자던 계획이 이렇게 변했군요. 하기는 내가 투옥되지 않았다 하드라도, 이 사회의 양심을 가졌다는 사람이면 줄줄이 끌려가 형무소를 채우고 있는 판국인데 어떻게 한가하게 관광여행을 떠날 수 있었겠오? 결국,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의 일상적 생활 계획조차 본인인들 선택에 있지 않고 사악한 권력집단의 결정에 달렸으니 저주받을 나라의 꼴이웨다.
지난 며칠 사이의 신문은 계속 한심한 소식만 전해주는군요. 버젓이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시민의 권리를, 그 알량한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을 더욱 강화해서 깡그리 박탈해버리겠다고 서둘고 있다니, 이게 어찌 하늘에 머리를 둔 인간이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이오? 민주화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그들 스스로 인정했던 1년 반전에 그들 자신도 없애거나 개선해야 하겠다고 동의했던 그 천하의 악법을 이제 자기들의 힘이 강해지니까 언제 그런 말 했더냐는 듯이, 헌법 같은 것 뭐하는 거냐는 듯이, 악법 강화를 국회에 제기할 것이라니...
(검열 삭제된 문장)
당신도 같은 현상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이니 그 얘기는 그만 합시다.
어제 있은 일. 사랑하는 사람의 면회도 없고, 그 이름뿐인 운동도 없고 사랑과 격려와 걱정을 보내주는 편지들도 없는 무료한 24시간이었오이다. 벌써 이 속의 생활을 시작한 지도 어제로서 꼭 4개월이 넘었으니 일요일을 사는데 퍽 이골이 난 셈인데도 역시 일요일의 징역은 정말 징역입니다 .
그런대로 화창한 가을 날씨여서 비교적 덜 우울했습니다. 감방 뒷문으로 내다보는 저기 바깥 세상의 한구석, 화양동 집에서 당신이 모처럼의 한가를 빨래일로 앉았다 섰다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 보았지요. 언제나 그랬듯이 일하는 당신의 발에 와서 감기는 삐삐와 실갱이하는 장면도 그려보았오. 마당은 작지만 이런 쾌청한 날에 그 현관 계단에 앉아서 햇볕을 즐기던 생각을 해 보았지요. 그러면서 두어 시간 철창을 통해 정면으로 비치는 서울구치소의 태양에 얼굴을 맞대고 일광욕을 시켰어요. 정남향에 가까운 향작이어서 거의 하루종일 해가 비쳐주는 것, 이것이 지금 나의 감옥 생활의 커다란 위안이에요. 눈을 감고 얼굴을 쳐들어 태양을 대하면, 가을해의 살이 수천수만 개의 실바늘 같은 가는 침이 되어 간지럽게 얼굴을 찔러 줍니다. 간질간질하게, 따끔따끔하게, 문지르듯 시원하게, 얼굴 전면에 수만, 수백만 개의 실침을 놓아줍니다. 그리고나서 ...수건 여섯 장을 꿰매서 만든 이불보를 빨아 철창에 매어 늘어뜨렸어요. 아직 때가 묻은 것도 아니지만 햇볕이 너무 아까워서 빨았지요. 널어놓고 방에 돌아와 한겨레 신문을 다 읽고나니까 벌써 깨끗이 말랐지 않았겠소? 한 두어 시간 남짓 사이에!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해요. 구치소에서 주는 관담요도 새것이거나 세탁한 것이면 살을 대어도 싫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서 나는 사담요는 아예 들여오지 않고, 처음부터 관담요를 받아 써왔지 않았오? 그런데도 수건을 사가지고 이어서 만든 것이지만 깔개를 펴고, 그 위에 몸을 누이면 한결 기분이 좋거든요! 마음을 비(空)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집착하기 때문이지요. 집착을 버리면은 부처님이 되지만, 웬만큼의 깨달음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런 속에서도 뭔가 있으면 안심되고 하루라도 없으면 초조해지고...
그래서 마음의 수양을 위해서는 아침마다 반야심경을 읽고 있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수를 모은 아주 짧은 경인데 그 정수는 ‘空’이 사실(깨달음)이요. 수건을 이어서 만든 깔개보를 깔고 누우면 기분이 좋고, 담요 위에 누으면 언짢고... 그런 차이를 넘어야 하고, 모든 집착을 버려야 하고, 그런 차이는 본래 없는 것이라 깨달아야 하는 거지요... 말하자면.
이 진리를 조금만 깨우쳐도 징역 생활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면회온 날에 안 오거나,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바라던 일이 빗나가거나... 징역살이에서 마주치거나 겪어야 할 그같은 많은 일에 있어 한결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그거야 끝이 없는 구도(求道)의 길이지만, 당장에 징역살이의 조건과 환경에 적용해도 효과가 있어요.
그렇다고 뭐 어떻게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조금 ‘정신주의’(또는 ‘자기마취’, ‘최면술’)의 효용을 빌려 보는 거지요. 언제나 이야기해온 일이지만 나는 이론과 논리성을 자료로 삼고 토대로 하는 학문적 작업을 해온 사람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기독교건 불교건 이른바 ‘논리 이전(以前)의 신앙’이어야 한다는 종교에는 아무래도 저항을 느껴요. 다만 나로서는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과 실천을 숭상하는 정도에 멈추는 게 고작일거요. 형이상학적인 종교 문제에서 그런 까닭에, 국가·정부·체제·정권... 그밖의 어떤 현세적 권위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경우에라야 수긍하지요. 이런 사람은 한국같은 나라에서는 현실적으로 불행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군요. 종교의 구제도 기대하기 어렵고 바라지도 않으니 더욱 문제겠지요.
낮은 덥지 않고 밤은 적절히 시원해서 한결 지내기 편합니다. 안심하세요.
‘우익·보수’를 표방하는 신문이 11월부터 나온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아니 해방이후부터, 지금 현재, 이 나라의 신문이 전부가 ‘우익·보수’뿐인데, 그것도 못마땅하다고 ‘더욱 우익적·더욱 보수적’ 신문이라면 바로 ‘극우·반동’적 신문일 수밖에.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숭배자들만 만들어 내겠다니 이 나리의 장래가 암담하여라. 왜 이리도 정신을 못차리는지... 그런 자들과 그런 세력, 그런 사상을 따르는 몽매한 사람들이 많으니 한심한 일이올시다.
멀리서 당신에게 사랑을 보냅니다. 안녕! 당신의 남편이
리영희 안의 리영희
고병권(철학자)
1.
중국 작가 루쉰의 <“이것도 삶이다”...>라는 글이 있다. 그가 죽음을 한 달여 남겨놓고 쓴 글이다. 이미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이 나온 터였다. 병세는 조금 나아지다가 다시 더 나빠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지만, 살아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썼다. 그러나 글 자체는 어둡지 않다. 오히려 배경에 걸린 죽음의 시간표가 무색하리만치 진한 웃음기가 배어있다.
병세가 조금 호전된 날 아침, 그는 햇살을 받으며 침대 건너편 벽과 책더미를 바라본다. 평소 휴식을 취할 때나 바라보던 것들이다. “나는 이제껏 그것들을 경시하였다. 그것이 삶 속의 한 조각들임에도 차를 마시거나 몸을 긁는 것만도 못한 것으로 쳤고, 심지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내 삶에 속하지만 그다지 내세워본 적이 없는 일들, 그런 시간들이 있다.
루쉰은 위대한 인물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도 그렇다고 했다. 시인 이백(李白)이 얼마나 거침없이 굴었는지 나폴레옹이 얼마나 잠을 적게 잤는지를 강조할 뿐, 이백이 거침없이 굴지 않은 때가 있었고 나폴레옹이 잠을 자야 했다는 사실은 적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침없이 굴고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거침없이 굴지 않을 때가, 잠을 잘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평범한 것들을 생활의 찌꺼기라고 여겨 거들떠보지 않는다.”
루신의 말처럼 세상의 글들은 대부분 정화(精華) 즉 열매만을 적는다. 잎이나 가지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잎이나 가지가 열매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이 열매와 깊이 연관된 것도 사실 아닌가. 수박 한 조각을 먹을 때도 갈라진 조국을 떠올리라는 어느 글을 읽고 루쉰은 이렇게 적었다. 이런 생각으로 수박을 먹는다면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뱃속이 반나절은 꾸루룩할 것”이라고, 게다가 수박 한 조각 편히 못 먹는 전사(戰士), 온종일 비장한 얼굴로 먹고 마시는 전사가 어떻게 적과 맞서 싸울 수 있겠느냐고. 전사에게도 비장한 각오 없이 맘 편하게 수박을 먹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일상이 항전의 시간은 아니지만 결코 항전과 무관한 시간도 아니기 때문이다.
2.
리영희의 편지 11통을 읽었다. 1989년 ‘한겨레신문 방북취재 기획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가족들, 주로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그는 4월 중순에 연행되어 조사가 끝난 5월부터 집행유예로 석방된 9월까지 편지들을 보냈다. 그의 저서들만을 읽은 나로서는 무척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읽어본 적이 없는 리영희가 거기 있었다. 참 지식인, 참 언론인, 시대의 양심, 사상의 은사가 아닌 리영희, 앞서 루쉰의 표현을 따오자면 햇살을 받으며 벽과 책더미를 바라보는 리영희, 수박을 먹는 리영희가 있었다. 정치적 각성의 불을 켜는 리영희가 아니라 가을 햇살에 받으며 가족의 일상을 떠올리고 이불보를 널어 말리는 리영희 말이다.
특히 9월 4일 “여보, 주말을 어떻게 지냈소”로 시작하는 편지는 그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화양동 집에서 당신이 모처럼의 한가를 빨래일로 앉았다 섰다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보았지요. 언제나 그랬듯이 일하는 당신의 발에 와서 감기는 삐삐와 실랑이하는 장면도 그려보았소. 마당은 작지만 이런 쾌청한 날에 그 현관 계단에 앉아서 햇볕을 즐겼던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러면서 두어 시간 철창을 통해 정면으로 비치는 서울구치소의 태양에 얼굴을 맞대고 일광욕을 시켰어요. ... 눈을 감고 얼굴을 쳐들어 태양을 대하면, 가을해의 살이 수천수만 개의 실바늘 같은 가는 침이 되어 간지럽게 얼굴을 찔러 줍니다. 간질간질하게, 따끔따끔하게, 문지르듯 시원하게, 얼굴 전면에 수만, 수백만 개의 실침을 놓아줍니다. 그리고나서 ...수건 여섯 장을 꿰매서 만든 이불보를 빨아 철창에 매어 늘어뜨렸어요. 아직 때가 묻은 것도 아니지만 햇볕이 너무 아까워서 빨았지요.”
물론 이곳은 감옥이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당신 모습을 떠올렸노라고 전하는 편지에는 ‘검열필’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고, 집권세력을 비판한 문장들은 검열관들이 연행해간 듯 삭제되었다. 그러나 나는 삭제된 문장들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은 삭제되지 않은 문장들 속의 리영희다.
내가 책에서 읽은 리영희는 “지식인의 책임을 사적인 삶에서조차 다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인간형을 자식들에게도 요구했던 엄격한 가장이었다. 큰 아들이 “거의 강제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아버님의 요구를 따르기에 너무 벅찼고”, 그런 아버지가 “이방인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리고 딸이 “매사를 논리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아버지와 대화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 대신 ‘선생님’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고 했을 정도로(권태선, <<리영희 평전 –진실에 복무하다>>).
그런데 이 편지들에는 매사에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는 리영희와는 다른 리영희가 있다. “사랑하는 아내 영자에게”로 시작하는 7월 4일자 편지. “30여 년 만에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고 한 특별한 편지다. 면회 시간에 집안 일로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내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사과를 하려다 아내가 희생해온 시간들을 함께 떠올린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눈물을 떨군 그는 애정을 가득 담아 다음날 재판정에서 보자는 말을 남긴다. “출입구 가까운 곳에 있다가 잠깐이라도 손만이라도 만져보면 좋겠소.”
편지는 재판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서야 전달될 것이기에 아마도 손을 잡아본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내에게 계획을 미리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7월 6일자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글’로서 말하는 사람이지, ‘말’로서 말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글에서 쏟아내는 애틋한 말들을 직접 건네거나 행하지는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 막내아들에게 보낸 6월 23일자 편지에서 그는 면회 온 막내아들이 너무 반가워 “왈칵 껴안고 싶으면서도, ... 너를 데리고 온 어른과의 체면이 앞서서 마치 남남처럼 악수만 하였”다고 썼다.
그래도 리영희 안에 이런 리영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당신에게”라고 쓴 8월 7일자 편지. 도종환의 <접시꽃당신>을 읽고는 “젊은 부부가 .. 참 아기자기하게 산 것 같”다며, “앞으로의 삶에서 [그동안] 그 이루지 못했던 분량만큼 듬뿍 사랑하고 살아야겠”다고 썼다. 8월 31일자 편지에서는 대전의 동창생 모임에 간다는 아내가 탔을 버스를 상상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고 썼다. “[지금쯤] 저기 도로를 버스 타고 내려가고 있을까?”
나는 이 낯선 리영희가 너무 좋다. 서른이 되어가는 큰 아들의 결혼이 너무 늦은 것 같다며 노심초사하는 리영희, 아기 때 몸이 좋지 않았으나 건강히 자라 의사가 된 막내아들을 보고 너무나 대견해 하는 리영희, 딸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맘이 놓이지 않는다면서도 무척이나 딸의 응원을 받고 싶어 하는 리영희. 어쩌면 교도소에 갇혀있었기에 이런 리영희가 풀려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양심적 지식인 리영희, 우상과 싸우는 리영희, “어떤 현세적 권위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경우에야 수긍”한다는 리영희는 교도소에 갇혀서야, 그것도 편지를 통해서만 다른 리영희를 놓아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반대로도 생각해본다. 리영희는 자기 안에 이런 리영희를 보존해왔고, 어쩌면 그 덕분에 철방과 다름없는 세상 속에서 지치지 않고 싸워나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3.
나는 리영희를 생전에 단 한 번 만났다. <<리영희 프리즘>>의 저자들과 함께였다. 만남의 장소가 냉면집이어서 이북의 냉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을 만나면 대화 내용보다는 목소리와 표정을 오래 기억한다. 그날의 리영희는 쇳소리 같은 목소리와 웃을 때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분명 그의 웃음에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었다.
리영희는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어른을 요구했다고 한다. 큰아들은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요구는 누구보다도 그 자신에게 먼저 그리고 엄격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을 너무나 빨리 어른으로 만드는 시대를 살아왔고 그 속에서 특히 빠른 속도로 어른이 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게도 어린아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편지들 몇 군데서 그의 어린아이가 얼굴을 내비치는 것을 보았다. 이를테면 막내아들에게 보낸 6월 23일자 편지에서 그랬다. 그는 의대생들이 기피하는 일반외과에 지원하려 한다는 막내아들의 말을 듣고는 대학 입시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들은 한양대학을 원했는데 세상모르는 아이처럼 말했다. 한양대학에는 나뭇바닥의 실내농구장이 있어서 거기서 농구를 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는 아들의 이런 순진무구함이 병원에서 전공을 택했을 때도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에게 순진무구함이란 “이해타산의 공리를 앞세우지 않고 뭔가 의미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타산 없이 추구하는 것은 숭고하기까지 한 삶의 태도”라고 격려했다. 아내에게 보낸 8월 31일자 편지에서도 그랬다. 유치원 시절부터 만난 친구들과 4-50년간 변함없이 어울리는 아내를 보며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네 친구들에 대해서 내가 애정과 함께 존경을 품는 까닭은 그처럼 ‘어린마음’을 잃지 않은 어른들이기 때문이오.” 그는 어떤 계산 없이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들처럼 즐겁게 만나 어울리는 일에 대해 ‘존경한다’고 했다.
그는 이처럼 어린아이 앞에서 흐뭇해했고 어린아이를 존경했다. 그에게 어린아이는 경제적 타산보다 앞서는 생명의 순진무구한 운동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다음 말에 틀림없이 동의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어른을 기쁘게 하지 않는가? 어른은 더 높은 단계에서 어린아이의 진실을 재생산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리영희의 성숙한 인간의 끝에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놀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1989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 아니다”는 정신을 번쩍 깨우는 선언도 없다. 이 편지들에서 리영희는 가을햇살에 얼굴을 내맡기고, 화양동 마당에서 빨래하는 아내를 상상하며, 마룻바닥에서 농구하고 싶다는 순진무구한 아이를 떠올린다. 이것도 리영희다. 시대의 양심, 사상의 은사는 아니지만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리영희. 루쉰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전사의 일상생활은 매사가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부분과 관련이 있다. 그것이 실제의 전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