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한겨레 방북 취재 사건으로 수감 중 집으로 보낸 편지(1)
1989,7,6 (木)
여보, 잘 쉬었오? 여기는 아침식사를 끝낸 시간
어제의 첫 재판을 보고 돌아가서 감회가 착잡할 것으로 생각하오. 당신이 예상했던 불기소도, 기대했던 보석도 안되고, 재판에 들어가게 되니 마음의 괴로움 오죽 하겠오.
오늘 당신이 면회오면 어제 재판심리의 반응을 들을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잘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느꼈어요? 다른 분들, 변호사들은 뭐라고 합디까? 어제 공판을 앞두고 전날 밤, 취침나팔이 길게 꼬리를 끊고 조용해진 감방에서 공소장을 놓고 연구를 했지요. “모두진술”에서 말할 내용을 구상하는데 몹시 힘들었오. 당신 잘 알지요. 내가 평소에 평론 쓸 때, 그 구상에 고민하는 것을. 그리고는 구성, 다음은 문장. 그런데 모두진술은 글이 아니라 말로 해야하는 것이니 나는 서툴단 말이야. 나는 “글”로서 말하는 사람이지 “말”로써 말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아요? 그래서 집에서 늘 그렇듯이 앉았다, 일어섰다, 이불 속에 들어가 눈감고 생각하다, 변기에 올라앉아 용변을 하면서 구상의 최종 마무리를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대충 뼈다귀 골격만 만들었지요. 그리고는 누워서 그 골격을 이어가며, 보태고 설명할 세부요소들, 어디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 등....을 연습을 했지요. 당신도 만족했다고 생각하는데....
어제 당신이 듣고 본 견해는 어때요? 나는 80점은 된다고 스스로 평가하였어요. 구치소에 들어오는 마음이 아주 즐거웠오. “잘 했다” 하는 만족 때문이지요. 검사의 공소장 첫 페이지의 첫 줄1)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현실 정치의 측면에서 열 세가지로 반박한 것이야.2) 나의 학문연구 분야에서 30년간 해온 내용인데...이론으로 하자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나의 감방에 들국화가 여섯 송이나 만발했어요. 구치소의 담밑에 버려진 채 자란 들국화를, 일반재소자가 캐다가 세수대야(여기서는 “탐방기”라고 불르는데) 에 흙을 담아서 피운 것을 나에게 선사한거요. 밤에 자기 전에 물주고 아침에 뒷 철창문가에 올려놓으면 온 방안이 환하게 넓어지는 느낌이요. 황량한 환경에 진황색 꽃을 피는 식물 하나의 존재는, 재벌 집안에 모셔놓은 수백만원짜리 희귀식물보다 고귀하오.
오늘 아침 기상나팔이 나기 전에 눈을 떴는데, 바로 뒷산에서 뻐꾸기가 구성지게 울고 있었어요. 한참동안 우는 것이 배가 고프다는 것인지, 하루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행가의 가사처럼 임을 그리워 우는 것인지... 한참동안 마음의 귀를 맑게하고 이불 속에서 들었오. 그리고 일어나서 냉수마찰을 했어요. 이제는 기온이 적절해서 냉수마찰을 시작했는데, 끝나면 기분이 아주 좋아요. 온몸이 벌겋게 달아서 후끈 후끈하지. 앞으로 계속해볼까 해요. 밤에 자기 전에 하면 숙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것도 해볼까 하고. 감기에 걸릴 염려는 없을 만큼 더운 날씨가 되었으니까.
앞으로 재판도 특별히 연구할 부분도 없으니 이제부터 마음을 잡고 책이나 읽는 생활체제로 전환해야지. 느긋하게.
오늘 이(齒) 치료를 위해서 외래의사를 들어오게하는 문제에 관해 의논을 하려하오. ‘장기 집필허가’도 신청을 내려해요. 재판진행이 어떻게 되는가와 무관하게, 매일 써서 남겼다가 훗날 책 한권이 되도록 해야지.
오늘 당신의 면회가 있을 터이니 각별히 적을 일은 없어요. 이만 쓰고 그치리다. 안녕.
당신의 남편 禧
9. 11 (月)
아내 영자에게
주말은 무엇하고 지냈오? 집에서 좀 쉬고, 그동안의 피로를 풀었는지 모르겠군요. 지난 얼마동안은 면회 온 당신의 얼굴에서 피로의 흔적이 확연하드라구요. 오히려 내가 구속되어 구치소에 들어온 초기에는 피곤의 빛이 덜했었는데, 고달픔이 계속 쌓이는 가부지요. 정말 미안하오.
오늘은 결심공판 날이오. 점심을 먹고 출정 하지. 다시 돌아올 때는 폭력화한 국가권력에 의해서 ‘구형’이라는 것을 받고 오겠지. 최근의 공판을 보면 구형이 공정가격화 한 인상이오.
...................검열에 의한 덧칠로 읽을 수가 없다.................
당신과 몇 차례 의논한 대로 최후진술을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끝에 한 30분 정도의 길이로 준비하였어요. 재판 같지도 않은 재판에서 뭐 진지하게 최후진술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의견도 옳아요. 그런 생각이기는 하지만 재판이 재판답지 않을수록 밖의 사회의 기록에라도 남기고, 활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재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반민주적인가 하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오. 대학에서 강의하듯이 한 시간 이상, 하고 싶은 주장을 다 진술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제1회 공판의 “모두진술” 에서 비교적 길게, 자세히 했기 때문에, 30분 정도의 내용을 준비하였오.
세월 흘르는 것 보시오. 오늘로서 집에서 나온지 꼭 만 5개월이 되오. “뭣 때문에 가자 하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폭도같은 자들에 의해서 집에서 끌려 나온지 벌써 5개월이 지났어요. 그동안 당신의 마음고생이 어떻겠느냐를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 한이 없오이다. 이번에 나가면, 새로운 형태의, 여태까지와는 “질” 적으로 다른 삶으로 바꿉시다. 이 사회, 이 국가를 위해서 한다는 일이 끝내 이런 식으로 끝날 바에는 말이에요. 희망이 없는 나라요.
지난 5개월간, 극악한 생존조건에서 육체적으로는 감기 한번 들지 않고, 속탈 한번 앓지 않고 지난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워요. 평소 탈이 많은 이(齒)를 제외하면 용케 건강을 지켜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자니 하루 24시간, 만사에 신경을 쓰는 긴장의 지속이었지요. 이제는 이 생활에 비교적 이골이 차서 지낼만 해졌어요. 시간마다가 괴롭다는 그런 상태의 단계는 지났으니까. 밤잠 잘자는 것이 큰 축복이라고 할까.
이 주는 주말 가까이에 추석연휴가 끼어서 당신을 보는 것이 화요일 한번 뿐이겠오. 구치소에 들어온 5월 2일 이후, 가장 긴 지루한 기간이에요. 운동도 없고, 면회 나가는 일도 없이, 방안에서만 몇 날을 보내야 하니 따분할꺼요. 주로 누워서 소설이나 읽고, 읽다가 졸리우면 낮잠을 자는 것으로 지내야겠지. 추석날은 나도 이 안에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차례를 지내리다.
※나의 귀여운 삐삐에게 추석 축하로 고기국 한끼 특별히 대접하시오. 안녕
측면-최후 진술은 하나마나한 것인줄로 알면서도 지난 밤에 구상하고 준비하노라고 신경을 쓰다보니 밤잠을 설쳐서 머리가 조금 무거운 느낌이에요. 아마 30분은 넘고,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1989년 8월, 임재경 편집인이 법정에 들어서는 리영희 논설고문을 격려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구속된 리영희를 변호인단 12명과 부인 윤영자씨가 중부경찰서에서 접견하는 모습. 한승헌 윤영자 리영희 조영래
1989년 방북 취재 계획으로 인한 한겨레 탄압에 항의하는 뜻으로 많은 시민과 언론계 동료들이 한겨레를 지지 방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프레스센터 앞에서 리영희 구속 규탄대회를 하고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리영희는 노태우의 7.7선언 다음해인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20여일 후, 한겨레신문 창간 1주년을 맞이할 즈음에, 집에서 공안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에 의해 안기부로 연행된다. 당시를 리영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랜 반독재 투쟁의 수많은 목숨과 피와 눈물의 결정인 <한겨레신문>은 1989년 5월, 창간 1주년 기념사업으로 기자단 북한취재를 기획했다.
그러나 ‘방북취재‘ 계획은 그 구성단계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중단되고, 신문에 대한 일대 탄압이 가해졌다. 나는 북한당국의 초청 내지 입국허가의 가능성을 해외에서 타진한 역할 때문에 전체사건을 걸머지고 기소되었다. 군부정권에게는 ‘눈 안의 가시’였던 <한겨레신문>을 불법화 해보려던 군부정권의 시도는 신문사원의 불덩어리 같은 항거와 거센 국내외적 비난의 여론 앞에 주춤했다. 그 대신 정권은 나 한 사람을 신문과 분리하여 ‘적성국 탈출·잠입 예비음모’인가 뭔가 하는 죄목으로 사건을 엮어보려고 국가공권의 전력을 동원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중앙정보부 지하감방에서 몇 날 몇 밤을 새워가며 계속된 심문조사에 반주검 상태가 되어버린 어느날 아침,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는 지프차에 실려 나갔다. 도착한 곳에서 중부서의 간판을 보았다.
어느 사무실인가 대합실에 나를 앉힌 조사관은 그제서야 가족과 변호인의 접견이 허가됐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사건기간을 통해서 그들이 은혜를 입한 것처럼 거듭거듭 강조한 일이지만,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래로 조사과정 도중에 변호인과 가족의 접견을 허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역사상 초유의 일’이라는 그들의 엄살 섞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밖에서 얼마나 강력한 압력이 가해졌으면 정보부의 역사에 없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가족이라면 아내일 것이 분명하지만 변호사는 누구일까? 나는 잔뜻 긴장한 채로 기다렸다. 출임문 밖에서는 고함소리가 나고, 문을 부수는 듯한 소란이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신문·방송기자들이 나와 접견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취재하겠다고 밀어닥치는 것이라 했다.
한참 만에 경찰간부가 들어오고, 그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이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흔들이 보이면서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한승헌 변호사가 아닌가! 그 호리호리한 작은 체구가 나의 두 눈에 꽉 차 보였다. 한변호사가 그렇게 크게 본인 적이 없었다(또 한분의 변호사가 동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홍성우 씨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변호사는 의식적으로 억제된 어조이지만 분명히 질문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물었다.
“건강에 불편한 데는 없습니까?”
그것은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냐?’를 달리 표현한 말이었다. 나는 며칠 낮과 밤을 새운 취조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하고, 그러나 “일정한 예절을 지키는 조사를 받고 있다”고 대답했다.
덤으로 얻은 집행유예
한변호사는 나의 긴장을 풀고, ‘정보부 유사 이래 처음’인 접견을 통해 나에게 가능한 한 많은 암시를 주기 위해서 애썼다. 그 현장은 나에게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지만 그같은 중요한 정보부의 양보를 얻어낸 한 변호사에게도 변호사 경력에 적지 않은 성과로 기록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국자들의 독촉으로 접견은 약 반 시간으로 끝내야 했다. 내 손을 굳게 잡아주도 되돌아서 나가는 그의 자태가 그렇게 당당해 보일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책상에 펼쳐져 있는 1989년 5월 29일자로 된 ‘서울지방검찰청공소장’의 하단, ⑩ 표시가 붙은 ‘변호인’란에는 ‘한승헌 등 32명’이라고 적혀있다. 6개월간 계속된 제1심재판에서 한변호사는 많은 변호인들의 인간적 정열과 직업적 지혜를 모아 치밀한 번호전략으로 나를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대할 수 없었던 성과이다. 어차피 ‘유죄판결’은 기정사실이고 집행유예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시국상황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당시의 일이 화제가 될 때면, 한변호사는 오른손을 한번 흔들고 그 특유의 익살 섞인 웃음을 짓고 나서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변론을 맡으면 유죄판결은 보장받은 것이니까 집행유예는 덤으로 얻은 것이지!” 아무튼 어떤 역경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간, 한승헌 씨!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독재자의 '눈엣가시'가 되어/ 한승헌변호사 변론사건실록 5 p347
당시 상황을 논설주간이었던 신홍범 선생은 “나는 반대했어요. 방북취재를 반대한 두 가지 이유는 하나는 한겨레가 안정화되야 하는데 타격을 입으면 안된다는 것. 잘못하면 태어난지 1년쯤 된 신문이 없어질 가능성도 있는거야. 그래서 참 조심스럽더라고. 다른 하나는 리영희 선생이 더 이상 고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쉬세요 할만큼 했으니’ 했어요. 지식인은, 스승이 된다는 것은 천명을 받는거라고 하더니 ‘나도 그래야 될까봐’ 그러고 또 쓰시더라고. 양심의 소리를 거역할 수가 없는거야.”
당시 부사장이었고 안기부 조사후 불기소 처분 받은 임재경 선생은 “나는 그때 신문사에 부사장 편집인 일을 하면서 신문사에 사고 없이 어떻게 하면 오늘도 신문을 내는가가 제일 중요했어. 리선생은 그게 안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임재경이 맡은 건 임재경이하고 였지. 리선생이 하던 것은 어쨌거나 리선생의 입장에서 하되, 우리가 모른척 하면서 하는거야. 그런데 부사장이 어떻게 모른척 해. 저쪽은 자꾸만 송건호 잡아넣으려고 어떻게 신문사가 사장이 모르냐 다그치고 아니다 모른다, 그랬지. 알면 서로 힘들고. 신문사 날아갈까봐... 일본 사람들이 많이 묻는 질문인데 당신은 신문기자입니까 운동가입니까, 계속 데모하고 그러면 언제 신문 만드냐 말이지.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적당히 해야지, 그런 얘기를 해 답답하게... 리선생이나 당시 우리는 직업적인 언론인하고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본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운동가인데 운동가도 아니고, 특수한 시대가 요구하는 언론인의 어떤 역할인거지”
-8월 25일 신홍범, 임재경 인터뷰
리영희가 위의 편지에서 언급한 ‘모두진술’ 과 ‘최후진술’은 문서로 남겨진 자료는 없다. 다만 리영희가 집행유예로 출옥 후 1989년 출간된 <사회와 사상>12월호 “국가보안법 없는 90년대를 위하여”에서 ‘검사의 공소장 첫 페이지의 첫 줄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현실 정치의 측면에서 열 세가지로 반박한 것’을 읽을수 있다.
리영희는 이 글에서 ‘최근 이른바 방북취재기획사건의 법정심리 과정에서,“북한 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 조직된 반국가단체”라는 서른 네 글자, 국가보안법 전문(前文)이 그 전문의 대전제가 객관적 진실 검증에 견딜 수 있는 것인가를 반박했다’고 쓰고 있다.
모두진술에서 열 세 가지로 제시된 반박의 내용은 이 글에서 휴전선 이북 지역의 정치적 성격 규정/승계국가 여부 문제/유엔 결의의 ‘유일합법정부’ 해석의 문제/유엔 결의의 ‘권고 사항’/북한의 ‘국가’적 자격 문제/북한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통치권 유무 문제/100개 이상의 국가에 대한 교차승인/한국전쟁 휴전협정의 조인 당사자 지위 문제/‘7.4 남북공동성명’ 의 상호 국가승인/김일성(국가)주석 호칭의 공식화/‘한미 방위조약’의 남한 행정권 지역 제한 규정 11가지로 제시되 있다.
이 글은 “이 달이 지나면 1980년대는 과거 속에 흘러간다. 80년대는 인류사적 차원과 세계적 규모에서 대변혁이 발동한 기간이었다. 1990년대는 그동력이 더욱 가속화되고 확대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우리는 국가보안법 없는 90년대와 21세기를 맞기 위해 ‘새로운 사고’를 가져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자” 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