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의 버클리대 초빙교수 시절
리영희의 버클리 시절 tv를 보면서 쓴 이 메모는 1987년, LA에서의 '흑인폭동'은 1992년이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기승을 부릴 때 미국에서는 반아시안 증오범죄가 폭증했고 이는 전형적인 소수계 분열정책의 결과였다.
백인 사회, 코리안, 흑인
코리안 머리 좋다는 평, TV 조크의 한 장
집에서 생전 공부라고는 하지 않는 아들이 어느 날 시험성적표의 A점을 아버지에게 보인다.
부 "너는 생전 공부는 안하면서 어떻게 A학점을 받았니? 신기하구나!"
아들 "문제 없어요. 나의 짝이 코리안인걸요.
문제점: 1.백인들이 황인종을 추켜올리는 것은 흑인들에 대한 간접적인 멸시의 표시방법. 코리안의 두뇌에 대한 칭찬은 니그로의 지적 열등, 근면에 대해서는 나태를 대립시키는 등. 흑인 고립화, 적대의식 강조
2. 코리안의 '준백인화' 의식, 백인의 흑인 적대감정 표현 술책에 놀아난 코리안이 마치 백인적 지위를 확보한 것처럼 착각하고 흑인을 적대시하거나 열등시하는 데서 일어나는 인종 분쟁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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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강좌를 소개한 버클리 대학신문 1987,10,21 기사
<UC 버클리, 한국인 교수를 초청하다>
한국의 반정부 인사가 방문하여 대학 과정을 가르치다
데이비드 사이러스 기자
1987,10,21 더 데일리 켈리포니안(버클리대학 신문)
많은 UC 버클리 학생들은 대학이 제공하는 과정에 불만족할 때, 그들 스스로 강좌를 열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한인 학부생들은 그 이상의 일을 해냈다. 그들은 해외에서 교수 한 명을 모셔왔다.
한국학위원회는 한양대 리영희 교수가 한국에서 와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이번 여름 현지 한인이민자 커뮤니티에서 기금을 모금했다.
아시아지역학과(Asian-American Dept.)와 평화분쟁학과(Department of Peace and Conflict)가 공동으로 후원하는 이 강좌의 제목은 “한국: 지역분쟁 사례 연구”이다. 이는 급변하는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학생들에게 직접적이고 최신의 분석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학생들은 이 강좌가 한국학 수업을 충분히 제공하는 데 실패한 대학 커리큘럼의 중대한 공백을 메우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학위원회 위원 바비 김은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오직 도서관에 가보는 것이다. 그곳에는 중국과 일본에 관한 수백, 심지어 수천 권의 책이 있지만 한국에 관한 책은 오직 몇 개의 선반만을 차지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리영희 교수는 아시아 정치에 관한 네 권의 책을 쓴 한국의 저명한 반정부인사이며 과거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국 일간지 <조선일보>의 외신부장직에서 해고되었고, 글을 썼다는 이유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바비 김은 “리영희 교수는 한국 진보정치의 선봉에 선 지 오래이다. 한국정부 입장은 이미 충분히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반대 관점을 가진 사람을 원했다.”라고 말했다.
리영희 교수는 본인의 투옥과 관련해 한국정부가 언론인과 언론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언론의 자유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오랜만에 쓰는 영어로 인해 처음에는 리 교수가 강의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학생들은 그가 영어로 하는 강의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리영희 교수는 매일 미국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들으며 여러 시간 강의 리허설을 하고 영어 연습을 한다.
“한국에서 온 분께서 이 강좌를 가르친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리영희 교수의 강의는 대부분 그의 인생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2학년 수잔 리가 말했다.
이 강좌의 다른 수강생 조나단 유는 이에 동의하며 “교수님께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경험하셨습니다. 일반 강좌와는 다르죠.”라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 학생 파이아 춘은 “저는 이 강좌가 역사의 다른 면을 알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제 교육의 대부분은 미국인의 관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항상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반대 입장의 견해를 듣는 것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게 바로 교육의 진정한 목적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리영희 교수가 한국전쟁 동안 미군과 한국 보병대 사이에서 연락장교로 미군과 함께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영희 교수의 강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에 비판적인 편이다.
리영희 교수는 “미국 정부의 시야는 아주, 정말 좁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영희 교수는 1950년대에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지금은 그때와 다른 세상이라고 말했다. “나는 흑인들의 사회-문화-경제적 개선에 깊이 감명 받았다.”
그러나 리영희 교수는 미국 사회의 물질주의와 그가 전통적 가치의 붕괴로 보는 현상들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미국 사회는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개인주의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리영희 교수는 10월 22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 “한국인들은 미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제목의 공개 강의를 할 예정이다. 강의는 2223 풀톤 가에 있는 UC 익스텐션 건물 6층에 위치한 동아시아 연구회의 회의실에서 열린다.
리영희 교수의 강좌는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3시 30분부터 5시까지 102 우스터홀에서 열린다. 이 강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참석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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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교이기도 했던 장태한 선생님의 글과 리영희로 부터 받은 편지와 사진
리영희 교수님과의 인연
장태한 UC 리버사이드 대학 교수, 김영옥 재미동포연구 소장
나는 1984년 미국 최초로 신설된 소수인종학 박사 1기생으로 버클리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소수인종학은 신생 학문으로 한국과 미주 한인들에게도 아주 생소한 학문이었다. 소수인종학은 1960년 미국을 휩쓴 민권운동과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소수인종들이 미국 사회에 기여한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학생들이 요구해서 생긴 학문이다. 1984년 버클리 대학교에서 미국 최초로 소수인종학 박사과정을 신설했는데 7명의 1기생 중 한 명으로 그리고 한국계로는 유일하게 버클리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1982년 버클리 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는데 당시 한인 학생들이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갖고 학생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버클리 대학에는 한국을 전공한 학자가 거의 없었고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던 스칼라피노 교수가 한국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스칼라피노 교수는 원래 일본학 전공자였고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교수였다. 그의 수업을 들었는데 정말 한국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다고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진보 성향의 한인 학생들이 Committee for Korea Studies를 조직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 상황에 대해 좀더 객관적으로공부하고 싶다고 대학에 요구하고 여름에 활발히 기금 모금을 전개하여 리영희 교수님을 초빙할 수 있게 되었다.
1987년 가을학기에 리영희 교수님을 한국에서 초빙해서 한국정치 강좌가 개설되었다. 나는 무보수 조교로 리영희 교수님의 수업을 도왔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리영희 교수님과 가깝게 지냈다. 수강하는 학생들은 정말 진지한 자세로 수업에 임했고 리영희 교수님도 영어 강의에 부담을 느끼시면서도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해서 영어 강의를 진행했다. 초반에는 영어에 부담을 느끼시다가 차차 익숙해지면서 학생들에게 한국 정치와 사회를 인식하는 새로운 안목을 주었다. 수업이 끝나면 자주 리영희 교수님 아파트에 들러서 대화를 주고 받았는데 미국 사회의 인종문제에 대해 많은 질문이 있었다. 특히 아시아계를 ‘모범 소수민족’으로 칭송하는 것은 흑인과 라틴계들이 못사는 것은 그들 탓으로 돌리는 백인들의 전형적인 분열정책임을 알려드렸는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기승을 부릴 때 미국에서는 반아시안 증오범죄가 폭증했고 이는 전형적인 소수계 분열정책의 결과였다. 당시 딸 앤지(유라)가 1987년 4월에 태어나서 리영희 교수님과 사모님이 아주 예뻐해주셨다.
‘실천하는 지성’으로 불린 리영희 교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분이다. 다음은 리영희 교수의 자서전인 <대화>에 포함된 내용이다. “또 미국 서부에서 동양계 인종문제에 대해 자주 발언하고 권위를 얻은 제자로 미국 시민권자인 장태한 교수가 있어요. LA 흑인폭동이 났을 때, 한인들이 흑인들의 공격목표가 되었을 때도 장태한 박사가 중재적 발언을 하곤 했지요. 내 조교를 했어요.”(<대화> 634면) 그 이후 한국을 방문하면 리영희 교수님을 자주 찾아뵈었는데 은퇴 후 리영희 교수님은 안산으로 이주했다. 지하철로 안산역에 도착하면 리영희 교수님이 손수 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고 자랑하시면서 근처의 호수공원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집에 가서 사모님을 뵙고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곤 했다.
리영희 교수님은 평소 “나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감옥에 갔어”라고 하셨다. 실제로 <전환시대의 논리> <분단을 넘어서> 등의 저서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의식화됐고 반독재 투쟁에 나서면서 감옥에 가게 되었다. 리영희 교수님은 평소 예리한 통찰력으로 시국을 분석하곤 했는데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셨다. 뇌졸중 이후 리영희 교수님은 의사가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했다고 푸념했는데 더 이상 글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글을 쓰지 말라고 했으니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2005년 <대화>를 출간하셨다. 비록 인터뷰로 기억을 써내려갔지만 그래도 많이 회복된 것을 의미했다.
1994년 리영희 교수님이 나에게 보낸 엽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내가 <LA 타임즈>에 로스앤젤레스 폭동 2주년을 맞이하여 기고한 글을 리영희 선생에게 서신으로 보냈는데 답장을 보내주신 것이다. “장 박사, 학교로 보내준 편지와 동봉한 LA Times 기사를 반갑게 보았어요. 좋은 견해와 관점이고 좋은 글이었어요. 미국의 인종 문제(사회, 문화 문제)는 참 큰일이요. 우리 여기서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알 수가 없어. 집을 임시로 이사했소. 7월 말에 교외의 아파트로 본이사를 갈 때까지의 임시 살림이요. 편지가 돌아갔지만, 다행히 대학 쪽은 변화가 없으니 계속 연락합시다. 7월 말까지의 주소는... 전화는 그대로...”
2010년 한국 방문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기 직전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리영희 교수님이 위중하여 서울 백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연락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급히 백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직 의식은 있었고 나를 보자 매우 놀라워했고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와서 짧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해 12월 5일 리영희 교수님이 간경화로 별세하셨다.
필자가 쓴 미국의 인종문제에 관한 LA타임즈 기사를 보고 좋은 글이라 칭찬한 리영희의 엽서
왼쪽부터 안병욱 선생, 리영희, 필자, 박후건(경남대 북한학과 교수), 2000년대 초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