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광복 32주년의 반성」

한일관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1-21 19:24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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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광복 32주년의 반성」(1977년 『대화』, 우상)


 


민족적 긍지와 국가적 독립


 


벌써 서른두 번째의 광복 기념일을 맞게 되었다.


이 해의 8ㆍ15는 30여 년이지만, 이(齒)와 입술의 관계처럼 알고 살아온 미국과의 관계 양식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하여 여느 해와는 좀 다른 기념일이 될 것만 같다. 일본의 동향도 미묘해 보인다. 미국의 역할을 일본이 더욱 폭넓게 떠맡게 되리라는 말도 들린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32년 전의 그날에 그렸던 나라의 모습과는 달라져온 세월이다. 미국이나 일본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생존이 어려우리라는 것은 그 감격의 날에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해방시켜준 강대국들이 잠시 들어와 있는 것쯤으로 생각했던 민족과 국토의 분단이 32년이나 계속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미국을 대신해서 다시 일본이 들어올 줄은 더욱이나 상상하기조차 싫었던 일이 아니었던가.


모두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없는 사태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런 때일수록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생각해봐야겠다는 충동을 느낀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생각해야 할까. 어쨌든 준엄한 자기성찰을 해야 할때가 온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들에게는 남(他)과의 관계가 무엇인가 잘못되어갈 때 으레 자기반성은 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만을 탓하는 버릇이 있다. 주한 미군의 철수 결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듯 보이는 외국 군대의 철수 문제에 관한 그 숱한 말과 글은 남의 나라 국민, 정부, 지도자들, 국회, 대통령……에 대해서 못마땅하다는 이야기뿐이다. 공식적으로는 조금만 더 있어달라는 것이지만 많은 국민의 심정은 ‘언제까지라도 있어달라’는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다. 국민 일반이나 지식인들이나 심지어 나라의 지도자라는 지위의 사람들까지도,“‘양키 고 홈!’을 부르지 않는 것은 한국(인)뿐이다”를 무슨 큰 자랑거리나 되는 것처럼 내세우는 것 같다. 그런 구호를 부르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진정한 민족적 긍지와 국가적 독립성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이민족과 국가와 국민의 자질과 덕성을 말하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남을 안방에 모셔놓고 주인처럼 섬기기 30여 년, 해방 후부터 치면 32년인데, 그만하면 됐지 얼마나 더 모셔야 종의 근성이 풀린다는 말일까. 30여 년 동안, 자기를 세우고 자신을 간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몇십 년을 더 있으면 얼마나 더 달라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20세기의 마지막 시대를 사는 현대 국가의 지도자나 국민이나 시민이라면 우리와 같은 성장 과정을 걸어온 다른 나라의 정부나 지도자나 시민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왔으며 살고 있는가를 깨우친 지도 이미 오래되어야 할 것이다. ‘특수 사정’이라는 말도 많이 들린다. 어느 정도 ‘특수’한 사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특수했던’그 상황을 20년 또는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별로 특수하지 않은’상황으로 바꾸어보려는 노력을 우리가 얼마나 했는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그 특수 사정이라는 것을 특수한 채로 유지하는 것으로 정치도 경제도 생활도 해온 것은 아니 었는지 한번쯤 반성해볼 만하다. 나라 안에서도 그랬고, 세계에 내놓고서도 그랬고, 그 ‘특수 상황’이라는 것을 모든 행위의 면죄부로 사용하지는 않았나?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특수 상황’을 특수하지 않은 것으로 풀어볼 생각은커녕 더욱 특수하게 만들고 더욱 굳혀오지는 않았던가? 이제는 그 특수가 차라리 국가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개인생활에서나 ‘일반 상황’이 되어버린 감이 있다. 나라와 개인의 생활에서 제도나 이념이나 인생관마저 특수 상황적 모순과 왜곡을 정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고는 그 특수 상황적 모순과 왜곡을 정상화하려는 시대정신과 정상화하려는 상황 앞에서 겁을 먹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이런 정신적 기형아, 생태적 불구를 만든 데는 이 나라에 대해서 주인 행세를 해온 그쪽의 잘못도 있다. 사실 그 잘못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중하다. 그렇지만 그 주인의 생각과 행동이 그러하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30여 년 동안, 우리와 같은 형편의 수많은 나라와 그 나라와의 관계의 본질과 성격과 많은 사례를 통해서 무수히 드러났던 것이다.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터키, 에티오피아,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타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아르헨티나, 칠레, 쿠바, 엘살바도르, 앙골라, 로디지아, 남아연방……헤아리는 데 숨이 가쁠 정도다. 긴 세월에 걸친 그 많은 나라와 그 주인의 관계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배우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남의 나라, 남의 국회, 남의 대통령, 남의 국민에게 돌리려는 듯한 우리 자신의 머리 어딘가에 문제가 없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헛된 노력은 아닐 것이다. 남에게서 속죄의 양을 찾음으로써 자신의 결백이 입증될 것이라고나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나라와 민족도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건망증이 심하다. 자기에게 불리한 과거의 일을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해방된 지 32년이 되는 현재의 ‘특수 상황’에서 재미를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 겨레, 이 나라, 이 사회의 과거에 얼룩져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잊고 싶어할 것이다.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며 잊지 않았다면 상기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누군가가 그것을 다시 들추어 들어 보인다면 애써 보지 않으려 할 것이다. 괴로운 일이니까. 그럴수록 정말로 어려운 사정 속에서 해방의 32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잘못된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32년의 ‘해방후사’(解放後史)에 분명히 있으면서도 왜 그런지 사실대로 밝혀지지 않는 일, 진실되게 그 뜻이 해석되거나 이해되지 않은 일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려져버린 채 재론되는 것이 막혀온 일들…… 이런 것이 오늘 우리의 생존의 ‘내적 근거’가 되어 있다. 맥락을 추려서 그것을 다시 캐내어 똑똑히 들여다보는 것이야 말로 어려운 내일을 사는 지혜이고 용기라고 생각한다.


 


부정을 부정하는 작업


 


해방 30년의 역사 속에서 생각해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어 구(舊)조선총독 관저의 이름을 경무대로 바꾸고 그곳에 들어갔을 때, 건물 안팎의 전기배선용 애자(碍子)와 소켓 따위를 자신이 망치를 들고 다니면서 모조리 깨부쉈다는 말이 있다. 그 당시 국민은 그것이 이 대통령의 철저한 반일감정과 민족주의 정신의 발로라고 존경하는 경향이었다. 어차피 낡은 것이고 뜯어 고쳐야 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대통령은 그와 같은 행동으로 상징되는 발상이나 정책에 민족주의의 옷을 입히고, 일부 학자들과 언론은 그 옷에다가 ‘민족적 주체의식’이라는 눈부신 후광을 얹어 주었다.


이승만 씨의 민족 광복을 위한 약간의 공이나 민족 주체심을 결코 의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적어도 ‘식민지에서 해방된’그리고 ‘타의에 의해서 두 동강이가 나 있는’나라의 지도자가 할 일은 따로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통일을 하자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는 일이고, 통일을 지향해서 우러나오는 민중의 에네르기를 박멸하는 데 대통령의 온갖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고, 다시는 외세의 지배나 영향력의 졸개가 되지 않도록 나라의 기본원리와 정책노선을 닦아나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실정에서 그와 같은 국가 생존의 여러 가지 기본적 토대를 닦는 가장 중요하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작업은 식민지적 유제(遺制)와 잔재(殘滓)를 철저하게 말끔히 청소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혁명이다.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민족이 ‘내 나라’를 꾸려나가는 작업은 결코 식민 지배자가 남기고 간 것 위에서의 변장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니었던가. 그 작업은 식민지(상태)의 연장이거나 겉치레의 분장일 수는 없는 일이다.그런 것이 아니라 식민 지배자와 그 제도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을 일단 부정하고 그것과 단절하고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작업으로서의 ‘질적 변화’여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나라’를 건설하려는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은 거족적(擧族的) 역량을 퍼부어 ‘부정(否定)을 부정(否定)’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 의해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민족의 모든 것이 부정되었다는 것이고 부정된 상태를 말한다. 실제로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언어를, 우리의 자질과 경험을 자기들의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부정해버리고 그 바탕 위에 일본적인, 그것도 제국주의ㆍ군국주의 그리고 당시의 자국 내에서도 가장 악랄한 착취적 경제제도를 이 민족에 들씌웠던 것이다.


연합국의 승리에 크게 힘입어 조선민족의 정치적 노비문서는 찢기었다. 그렇지만 식민제도가 겨레에 강요하기를 35년, 이 민족에 간섭하기 시작한 후 반세기에 걸쳐서 불어넣음으로써 노예적 속성으로 굳어져버린 이 민족사회 내부의 ‘내적 정신’과 ‘내적 근거’는 해방과 건국 후에 거의 그대로 온존되었다. 그 내적 근거란, 일본의 착취적ㆍ식민주의적 자본주의 형태와 그것을 토대로 하는 사회적 구조다. 내적 정신이란 그 제도와 구조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합리성을 제공하고 또 그 유지 보존을 목적과 임무로 여기는 인간, 관습, 사상, 법률, 도덕, 가치관…… 통틀어 개인과 사회의 존재 양식이다.


이런 것에 대한 근원적인 수술 작업 없이 오랜 식민지적 노예였던 민족이 진정으로 해방되고 이름과 내용이 다 같이 ‘독립’이라 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들은 이 민족의 것이면서도 모두 남의 것, 그것도 이 민족을 부정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한 노예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왜냐하면 노예는 실제로서나 법률적으로서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이니까-주인(master)이라는 인간이 자기를 물건이나 동물로 만들어버린 그 모든 물적ㆍ정신적ㆍ문화적 조건을 일단은 깡그리 부정해야 한다. 즉 번신(飜身)이 아니면 적어도 재생(再生)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예가 인간이 되는 변증법적 논리이다. 민족도 마찬가지로 ‘부정을 부정’함으로써만 비로소 자주적 민족, 독립적 국가일 수 있다.


 


내적 근거와 내적 정신의 마련


 


우리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새 나라, 새 사회의 건설이라는,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으려는 민족적 작업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작업을 거부하는 온갖 인간과 제도와 이해관계의 의지(意志)의 집약적 표현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特委)를 무력으로 해산시킨 사실과 그 뒤에서 일어난 일들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나라와 동족을 외세에 팔아넘긴 앞잡이들과, 그 바탕 위에서 외세와 공모 결탁해 동포를 유린했거나 치부했거나 입신 영달한 자들을 민족정기의 이름 아래 단죄하려는 권력은 당시 국회에 창설된 ‘반민족행위처벌법’과 그 의지를 집행할 ‘반민족행위특별조사 위원회’였다. 거족적 의지의 표현인 이 법률과 이 위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30년이 지난 이 해방 기념일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각별한 뜻이 있다.


1948년 9월 7일,제헌국회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고 22일에는 그것이 법률로 공포되고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일부에서 이 법과 위원회의 생겨남에 대해 반대가 일자, 정부는 그것을 거의 무력화하는 수정안을 다음해인 1949년 2월 15일에 국회에 제출했으나 국회는 24일 그것마저 폐기해버렸다. 6월 6일에는 반민특위의 주먹 역할을 하게끔 배치되어 있던 특별경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게 되어 반민특위는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9월 22일에는 특별조사기관과 특별재판부 부수기관의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로써 반민특위의 사업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는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숭고한 역사적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던 반민특위와 법률은 한 사람의 매국노도 친일분자도 처단하지 못한 채 거꾸로 그들과 그들에 업힌 세력에 의해서 사실상 6개월 만에 맥없이 매장 당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자기 나라를 세우려는 바로 첫 해에 한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자들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런 자들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두 궁금한 일이다. 반민족적 독소들을 민족정기의 칼날로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그런 개인과 그런 개인의 집합체인 세력이 일제와의 공모로 소유했거나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그 힘의 기둥인 물질적 토대를 빼앗았어야 할 것이다. 그와 병행해서 그들의 힘의 또 하나의 지렛대인 정치ㆍ법률ㆍ사회ㆍ문화적 제반 제도가 근본적으로 혁파되었어야 한다. 그 작업은 혁명이거나 적어도 혁명에 가까운 근본적 개혁이 아닐 수 없다.


외세에 의탁해서 그 앞잡이로서나 그 뒤를 따르는 하수인적 졸개로서 민족의 이익을 팔고, 동포의 희생으로 살찌고 영달하는 행위는 반드시 민족의 이름으로 준엄한 단죄를 받게 된다는 새 나라의 원리와 정신은 이렇게 해서 폐기되고 말았다. 두고 두고, 개인이나 정권이나 지도자에 대해서 행동규범으로 확립됐어야 할 민족적 원리가 없어짐으로써, 그 후부터 이 나라에는 외세, 외리와 결탁해 민족의 권익을 좀먹는 행위가 버젓이 자행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개인과 세력은 아무런 보복도 제재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오히려 온갖 합리화의 이론과 정당화의 괴이한 슬로건을 앞세워 행동할 수 있는 내적 근거와 내적 정신이 마련된 것이다.


본질적으로 친일적인 그 수구(守舊)세력에 명분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근본적인 개혁 없이 진정한 민족적 해방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특히 식민지하에서 일제와 친일세력의 이중 학대를 받아온 일반 대중의 에네르기를 압살한 것은 이런 논리였다. 즉 북쪽에서 공산주의가 혁명을 했으니 남쪽에서 혁명하는 것은 공산주의적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과 직접적인 의도는, 외세의 식민지 민족 분열정책의 비호하에 기회와 혜택을 나눠 먹던 그 기득권을, 상전이 물러간 뒤에도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지엽적인 개혁을 제외하면 미국 군정의 지배는 그들을 지배적 지위에 앉힘으로써 그들을 매개와 도구로 삼아 수행되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상황이었던 많은 신생 해방사회의 실정이 이것을 방증해준다. 식민지의 이름은 벗어났지만 일제 식민지의 성격을 규정하는 재산제도와 소유질서, 그것의 보호 수단인 법질서와 이데올로기는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가상(假像) 아래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식민지적 재산질서를 반영한 지주계층과, 식민지 교육으로 ‘지식인’이 된 ‘식민지적 엘리트’가 모든 분야의 지배질서의 상층부를 그대로 장악해버렸다. 국내외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애국ㆍ독립 지사들이 적지 않게 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국내의 대중적 기반이 없었다. 친일ㆍ수구ㆍ반민족적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너무도 분열돼 있었다. 시대적ㆍ역사적 상황에서 수세에 선 친일ㆍ수구ㆍ반민족적 세력은 기득권의 보존이라는 공통적 이해 문제로 단결했지만, 개혁을 앞세운 시대적 세력은 대중을 조직화하지 못했고 지도층도 분열되어 있었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인가? 당시 우리의 사회적ㆍ국가적 실태를 살펴보도록 하자.


식민지 통치와 억압의 물리적 힘이었던 일제의 경찰ㆍ검찰ㆍ법원ㆍ형무소ㆍ정보기관의 잔재가 해방된 나라의 바로 그 권력과 기관을 차지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새나라의 군대는 진실로 민중의 군대여야 한다. 시대역행적이고 대재벌의 앞잡이이던 일제 ‘황국군’의 정신과는 아예 인연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했나? 제국주의ㆍ식민주의ㆍ전제주의적 일제가 쥐어준 총을 메고 일제가 채워준 칼을 찬 채, 침략과 민중 탄압의 제국 군대의 정신에 젖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대로 이 나라의 신성한 군대의 기틀이 되지는 않았던가?


새 나라의 교육은, 노예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주인으로서의 긍지와 지식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바로 전날까지 ‘일선동조동근’(日鮮同祖同根)을 외친 자들, ‘황국신민’(皇國臣民)되기를 ‘무상의 영광’이라고 가르친 자들, 황국군대에 들어가 무고한 이웃 백성들을 학살하는 행위를 조선인의 의무라고 선전했던 자들이 그대로 둥지를 틀고 앉지 않았던가. 이것은 그에 해당하는 개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반적 사실이 문제다.


엄숙히 반성할 때, 우리 사회는 스스로 해방을 거부한 셈이다.


치안과 질서유지의 신청도 있었을 것이다. 행정과 관리의 필요가 있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 민족이 노예에서 번신(飜身)하는 순간에 거쳐야 할 작업은 일시적인 혼란과 사회의 정체(停滯)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실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지불해야 할 희생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 ‘내 나라’를 꾸리기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려고 한 정열이 2천만 민중의 가슴을 끓게 했던 감격을 생각한다면 혼란과 정체의 고통은 단시일 내에 극복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여러 가지 요소와 이유에 돌릴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민족이 요구하는 개혁을 하지 않은 데서 온 민중의 반발과 매국ㆍ친일ㆍ기득권 세력이 해방된 사회를 일제를 대신해서 유지하고 군림하려 했던 데서 오는 민중적 반항도 지극히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혼란과 정체는 그후의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번신에 필요한 쓰라린 작업을 기피하고 거부한 데서 생긴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허구와 환상 그리고 진실과 현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청산한다는 한일 국교 정상화 노력의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의 합법ㆍ정당ㆍ유익성을 주장하는 구(舊)주인 측의 많은 발언이 있었다. 최근에는 1974년 다나까(田中)라는 일본의 총리대신이 식민통치시대의 식민교육을 찬양하고 한국인에 유익한 교육이었다는 발언을 해 두 나라 사이에 크게 말썽이 되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모두가 이에 항의하고 시위를 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을 기억한다(그 손가락 자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에 관해서는 외국의 특파원이 놀라운 사실을 폭로한 일이 있지만).


이와 같은 모욕적인 말이 해방된 지도 30년이나 지난 대한민국에 대해서 어째서 지금도 끊임없이 나오게 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과 잘못이 과연 일본인들에게만 있는 것일까? 일본인들이 져야 할 책임 못지 않은 양의 잘못이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 것일까?


일본인의 오만을 규탄하고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윽박지를 때, 우리는 그들에 대한 것에 못지않은 분노와 회한으로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파헤쳐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검토했듯이, 우리가 해방 이후 일본이 남기고 간 인물, 제도, 사상 등을 철저히 청산했다면 어떻게 그들이 지금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지배자의 우리에 대한 부정이 철저했을수록 이 민족은 그만큼 철저하게 유물적(遺物的) 잔재를 부정하고 청산함으로써 독립한 국가를 긍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 작업은 되풀이되지만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 고통을 겪지 않은 우리가 구지배자와 긍지를 가지고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우리에 대한 망언이 서슴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허용하는 근거가 이 민족ㆍ사회ㆍ국가의 내부에 존재하는 탓도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의 민족이 스스로의 존립과 생존을 정당화하는 원리, 또는 정기나 가치관, 이상과 세계관 같은 것이 얼마나 준엄하게 확립되었는가의 문제다. 눈앞의 편의와 당장의 안일, 일시적인 효율을 추구한 나머지, 민족 생존을 위한 그와 같은 제반 기본 원리를 닦아 올리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나 정부에 대해서 구지배자나 남의 나라가 존경심을 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내적 근거와 내적 정신에 눈을 돌리지 않고 남의 나라만을 규탄한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보는 시각으로 에이브릴 해리만이라는 사람의 견해는 하나의 시사(示唆)를 준다. 해리만은 20세기 미국 정치의 한 거물이며, 베트남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전쟁을 종전으로 이끈 파리평화회담의 한 단계의 미국 수석대표였다. 미국의 대재벌이며 대통령 입후보 경력을 가진 해리만이 어떤 뜻에서건 호치민(胡志明)이나 공산월맹이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편들 사상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다.


그 해리만이, 본국 정부의 정권교체로 2년여의 파리협상 미국 수석대표직을 사직하고 나온 직후 기자회견에서 대체로 다음과 같이 자기의 경험에 입각한 견해를 밝혔다. 즉 북베트남(월맹)이나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시대에 식민권력에 앞장섰거나 협력한 인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은 식민통치 권력ㆍ행정ㆍ군대에 대항해서 민족해방 투쟁을 해온 사람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남베트남(월남)의 정부ㆍ군대ㆍ종교ㆍ사회ㆍ문화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 가운데는, 식민통치 권력에 대항해서 베트남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뿐 아니라, 월남의 지도층 인물은 거의가 프랑스 식민정권의 관리나 군대의 장교ㆍ하사관으로서 자기 동포에 대해 적대적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분석하고 나서 해리만은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서는, 그것도 적과의 협상을 이끌어온 당사자로서는 지나치게 대담할 정도로, “그러니까 베트남의 대중이 어느 쪽을 더 존경하고 믿을 것이냐는 문제와, 어느 쪽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베트남인과 민족을 위해서 일할 것인가는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베트남전쟁을 ‘지는 전쟁’이라고 예언했다. 해리만의 이 예언은 그로부터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무서울 만큼 정확히 현실화됐다. 어떤 형식으로건 사회혁명을 하려는 사회와 그것을 거부하는 사회의 본질적 측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해리만의 예언은 그러나 그 한 사람만의 예언이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 정부, 국민 그리고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에 대한 웬만한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가 같은 현실 분석과 예언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대세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그러기에 베트남 사태의 경과와 결말을 놓고 이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강조된(되고 있는) ‘교훈’이, 많은 나라에서 강조된(되고 있는) 교훈과 아주 다르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 할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교훈’을 해석하고 활용할 권리가 있다. 누구나가 모든 일을 동일하게 대하고 파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개인생활에서 자기의 견해나 신조나 판단이 주변의 많은 사람과 다를 때에는 일단은 남들의 말도 들어볼 가치는 있다. 자기가 전적으로 잘못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배우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있고 없고는, 그 사람이 이웃 속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의 도(度)를 결정해주는 조건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말해주는 바다. 국가나 민족이나, 정부나 국민이나 국제사회를 살아가는 데 그와 같은 마음가짐은 그 국제사회 속에서의 생존의 어려움의 도를 결정해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베트남의 교훈이라는 것을 많은 다른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종합하고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즉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국가)이 제1차적 사업인 정치ㆍ경제ㆍ문화 및 사회개혁을 하지 않았거나,그 지도층이 식민세력과 협력한 사람들로 주성분을 이루거나, 따라서 그들의 세계관이 반(反)민족 외세 의존적이거나, 분단된 나라(전후의 베트남)의 통일보다 분단 상태에서 더 이익을 얻는 세력이 지배적이거나, 하층 대중의 시급한 이익과 염원보다 소수의 ‘가진자’의 더 많은 이익을 우선하거나, 외국과의 관계에서는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요소에 중점을 두어서 동맹관계를 유지하려는 강대국의 비호를 받거나 세계적 사조와는 유리 또는 역행하면서 전후 얼마 동안의 한 시기의 사상이었던 냉전의식으로 만사를 규정하려 하거나…… 이러한 나라나 국민은, 20세기 종반부의 현대를 살아가기가 무척 어렵다는 식으로 교훈을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해방 이후 30년간, 이 사회를 지배해온 유일한 가치관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주의다. 이 대통령과 그 후의 모든 지도세력이 오늘날까지30여 년간 ‘유일무이’(唯一無二)하고 ‘, 절대적’이며 ‘시간을 초월한’‘성스러운’이념으로 삼아온 결과는 이제 그 이념의 수호신으로 믿었던 미국마저 경원하게 되었다. 미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한정책(對韓政策)의 전환이 공언되고 주한미군의 철수가 기정 방침으로 밝혀졌다. 당황한 정부가 일본에 군사적 동맹 관계 형성의 뜻을 비치자 일본 정부는 ‘그것은 되지도 않는 말’이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1976년 말에서 77년 1월 초 사이의 신문 보도에서). 그러나 최근에는 그렇지도 않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인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떤 허구와 환상을 진리와 현실로 믿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한창 한일회담이 진행되고 그에 대한 찬반운동이 치열하던 1965년인가, 그 당시 영국의『이코노미스트』지가 실은 저명한 평론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 요지는 “한국의 정부나 국민이 국가의 존재이유를 융통성 없는 반공주의에만 고정시켜버리는 한, 일본 경제에의 예속은 불가피할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자기 힘만으로 현재와 같은 국가이념과 노선을 추구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양자택일밖에 길이 없어 보인다. 남북한 사이의 화해로서의 반도적 자존이냐, 아니면 일본에의 재예속이냐의 길이다.” 정확한 문구 인용은 아니지만 뜻은 그런 것이었다. 해리만의 베트남 예언만큼이나 투시력 있는 판단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10년간의 현실 전개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 일본마저도 지금 한국관계에 어떤 중요한 수정을 가하거나 재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대통령과 그 시대의 이 나라의 지도자ㆍ지식인ㆍ대중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가 이승만이라는 자연인의 생명과 함께 끝났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그 후의 현실은 오히려 이 대통령적 세계관의 편협성과 완고성을 확대 재생해왔다는 감이 있다.


남북한 관계의 ‘진정한’개선 노력으로 일본에의 재예속을 거부하느냐, 일본에의 재예속을 대가로 남북 민족 간의 진정한 융화를 계속 거부할 것이냐의 두 갈래 길을 놓고, 1977년의 해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박정희 정권의 김 아무개 국무총리는 “일본 기업체 하나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1개 사단의 일본 병력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뜻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도 중대한 뜻이 담긴 발상이다. 이 나라의 국민 가운데 일본과의 현재와 같은 관계 실태를 걱정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일본의 힘이 우리 자신의 반대와 저항을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그들의 의사를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그 반대일 것이다. 구식민모국(舊植民母國) 일본의 힘은 오히려 이 나라의 지도세력이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세계관과 발상법으로 ‘끌어들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진 나라의 자본을, 그것도 세계에서도 가장 수탈적 성격으로 이름난 일본의 자본에다 나라의 ‘근대화’와 ‘공업화’를 전적으로 의탁하는 국가 기본전략이라면, 오늘과 같은 경제ㆍ정치ㆍ사회ㆍ문화적 상태를 초래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 아닐까. 나라의 운명을 일본에 밀착 일제화시켜놓은 당사자들이, 어쩌다가 지엽적이거나 일시적인 갈등이 발생할 때 국민에게 반일ㆍ배일사상과 실력행사를 선동함으로써 자신의 ‘민족ㆍ국민적 주체성’같은 것의 발로로 호도하려는 일이 혹시라도 있다면 자가당착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1973년을 전후한 몇 해 사이에 우리는 이런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사실은 반대일 것이다. 현재와 같은 일본 경제와의 일체화로 큰 덕을 보는 친일세력은, 해방 후와 현재 ‘부정을 부정’하는 것을 거부한 세력으로서, 실제로는 국민대중이 하루 속히 모든 측면에서 일본화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회와 개개 국민의 의식을 마비 혼동시키는 그 많은 일본의 쓰레기 같은 문물이 이 나라를 뒤덮도록 방치하고 있는 세력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한때 미국이나 미국과 관련된 어떤 구체적 사실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행위가 마치 무슨 반국가적 행위나 되는 것처럼 여겨지던 정책과 풍조가 지난 몇 해 사이에 일본에 대한 것에서 적용되고 있는 감이 있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와 국민의 상호관계에서 일본의 사디즘과 우리 자신의 마조히즘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혹시라도 달러만 번다면 이 나라 여성의 품성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일인유치(日人誘致) 관광 철학이나, 바다가 썩건 남성의 덕성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쓰레기 처리장화(化)의 경제관계가 된다면 이것은 한가지 뿌리에서 나오는 발상이라 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과 사회와 국민의 자립정신


 


일본이라는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들과 그들의 사상ㆍ세계관을 살펴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패전 이후 오늘날까지 일본의 각 분야를 지배해온 세력은 집권 정치세력인 자유민주당으로 수렴되는 정치ㆍ경제ㆍ문화ㆍ사회의 지배층이다. 일본에서 우익ㆍ보수세력을 구성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지난 얼마 사이에 ‘대동아 전쟁 긍정론’‘조선ㆍ만주 식민지화 필연론’, 과거와 현재를 두고서의 일본의 ‘아시아 주역론’‘한일 일체론’…… 따위가 공공연히 횡행하고 있다. 이 세력을 대표하는 것은 자민당의 노령층이다. 정치계에서, 경제계에서, 그리고 사상 계에서 자민당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개가 과거, 조선ㆍ만주ㆍ중국을 비롯해서 동남아시아의 지역 민족에 대해 침략의 선봉에 섰거나 그 후위(後衛)로서 이른바 ‘대일본제국’의 의지를 충실히 집행해온 사람들이다. 기시노부스께(岸信介), 가야 오끼노리(賀屋興宜),야츠기 가즈오(矢次一夫),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志夫) 등등은 그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바로 아시아 특히 우리 민족에 대한 식민정책을 담당했거나 관련된 자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재 일본의 지도층 가운데서도 특히 이런 패거리들이 소위 ‘친한파’로 알려져 있고, 사실이 그러하다.


이들을 핵심으로 하는 세력이 한일 양국 간의 정치ㆍ경제면에서와 민족관계의 많은 협력기구의 일본 측 대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어째서 하필이면 그와 같은 군국주의ㆍ침략사상ㆍ식민정책, 그리고 현재는 부정과 타락행위의 중심 인물들인 그들이 이 신생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을 양으로 음으로 떠받들 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왕년의 행적과 사상은 이 민족의 노예화와 문화 말살을 위한 것이었다. 이 민족의 사형 집행자였거나 그 공모 하수자였던 바로 그 인물들이 지난 10여 년간 우리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자들이다. 이런 과거를 가진 사람들은 한국의은인처럼 여겨지고 있는 반면, 한일 간의 그와 같이 기이하게 밀착된 인맥관계를 비판하는 많은 일본인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나 언론계나 각계 지도자들은 ‘반한적(反韓的) 친공분자’이거나 ‘무책임한 진보주의자’라는 악담으로 대하고 있다. 과연 그런 분류가 옳은 것일까? 우리의 판단기준에 잘못은 없는가?


많은 일본인 지도층 인물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그런 인물들이 주로 한국에 대해서 호의적이라는 데는, 뒤집어 말하면 우리 국가 사회의 내부에 그런 것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어떤 ‘내적 근거’가 있다는 뜻은 아닐까. 이 내적 근거가 무엇인가는 앞에서 검토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국의 안전과 발전을 돕는 일본의 주역들이라고 한다. 그러한 과거 배경과 사상의 소유자들만이 주로 열성을 기울여서 이루어지는 안전과 발전이라면 거기에도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경제발전이란 그것을 이룩하는 민족이나 국민의 위대성의 일부일 뿐이지 ‘큰 일부’도 아니며, 더군다나 그 위대성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류의 일본 지도층과의 일체화로 추진되어온 공업화ㆍ근대화는 그 질이나 ‘윤리성’또는 장기적인 결과에 문제점이 있다. 이 사회의 많은 측면과 분야에서의 그 ‘일그러짐’이 이런 발전원리와 내용에 큰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경제는 몰가치적이다’고 해버린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공업국가들이 경험하고 있는 위기감은 그 반대임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질’과 ‘덕성’을 무시한 공업화와 근대화의 ‘물질주의적 사상’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지만 특히 일본과의 문제에서는 중대한 한가지 각성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일본은 경제대국을 자랑하지만 서양과 서양인에 대해서는 열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 메이지의 선각자 후꾸자와 유끼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이론이다. 즉 “동양(아시아)의 일원임을 거부하고 유럽화한다”는 사상과 국가정책이다. 그 같은 모방으로는 영원히 유럽의 ‘아류’(亞流)의 지위를 면할 수 없다. 실제로 100년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로서 중요시해야 할 점은 따로 있다. 일본의 공업화ㆍ근대화 작업의 이념과 내용이 서양의 그 과정과 내용의 모방이었던 탓에, 서양인은 일본의 경제ㆍ생산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ㆍ문화ㆍ정신적으로 일본에 대해서 인간적ㆍ민족적 우월감을 갖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언제까지나 일본(인)은 서구(인)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게 마련이다. 이 관계는 지난 10여 년과 현재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국가 목표로 추구하는 이른바 ‘조국 근대화’의 모든 작업이 일본 경제의 모방이고 하청작업이라면 이 민족과 국민이 앞으로 일본을 대등하고도 독립적인 자격으로 대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진다.


이것은 일본(인)이 중국(인)을 대하는 태도와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의 현저한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국토ㆍ인구의 크기에 기인하는 것만도 아니다. 중국문화와 한국(조선)문화의 우열의 차이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문화적 영향에 관한 한,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우열과는 관계없이 압도적으로 우리 조상의 혜택을 받지 않았던가. 또 중국을 침략하고 반(半)식민지화했던 과거에 대한 속죄감에서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조선 식민지정책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만, 일본에게는 (특히 우익적 사상적 사람들에게는)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서 그런 죄책감 같은 것은 희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와는 달리 오늘의 중국(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우월감은커녕, 경탄과 찬사에 인색하지 않다(우리에 대해서 왜 그렇게 되느냐는 것은 부정을 부정하지 못한 국민이라는 데서라 함은 이미 언급한 바다). 그것은 주로 현재의 중국이 추진하는 공업화ㆍ사회발전ㆍ경제발전이, 후진적 위치에서 시작했으면서도 서양의 모방도 아니고 더군다나 서양을 모방한 일본의 모방이 아닌, 어디까지나 중국 독자적인 이념ㆍ내용ㆍ방법 때문이다.


개인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 사이에서도 자기를 모방하는 자에 대해서는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은 갖게 될지언정 존경심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자기를 모방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특한 삶의 내용과 방향을 추구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설사 두려움이나 경쟁의식은 품을지 몰라도 존경심을 갖게 마련이다. 존경심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대등한 상대라는 의식을 품을 것은 당연하다. 일본 지식인들이 같은 민족인 남ㆍ북한을 각기 대하는 태도에서도 우리는 이런 감정 표시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지식인이 좌경적이라거나 그밖의 여러 가지 표현으로 우리 정부와 언론기관이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해명될 수 없다.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단순화하고, 감정적으로, 조건반사 적으로 대응하는 우리의 편협한 독단론의 위험성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지난 30년 사이에 분명히 많이 변화했다. 이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과거 식민지시대의 일본을 오늘의 일본과 동류시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물질적인 발전면에서뿐 아니라 사상ㆍ제도적 측면에서도 크게 민주화되었고 평화에의 의지도 일반적으로는 국민의 가슴에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객관적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이와 같은 소론(所論)이 필요한 이유는, 대한민국과의 관계만은 일본 국민의 일반적 염원이나 지향과는 달리 식민지적 과거 배경과 경제지배적 현실적 이익을 동기로 하는 세력이 압도적으로 좌우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분야에서 현재 일본의 정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후꾸자와 유끼치(福澤諭吉)의 사상을 현대에 살리고 있는 그의 제자들이라는 인상이다.


 


 


지나(支那)와 조선은 일본과 협력하여 서양세력의 동점(東漸)을 막아야 한다. 조선인이 문명의 지식에 어두워, 생활의 안정을 이룩하지 못하는 한, 일본이 조선인을 대신해서 그것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정치ㆍ경제ㆍ군사적 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일체화 같은 것을 주장하는 일본인 중에는 어쩌면 일단은 선의로 그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대체로 친한파라는 사람들로 보이며, 우리 지도자들은 그 선의를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래로 일본의 침략이 언제나 도착(倒錯)된 지도자 의식과 개발 원조를 가지고 진행되었다는 것, 무엇인가를 언제나 반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과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면서 들고 나온 지역협력론이 침략을 미화하는 이론에 이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볍게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 몇 해 전에 있었던 사실 한 가지는 소름 끼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도쿄에서 한일 국회의원 친목간담회가 있었는데,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모 국회의원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일본은 마땅히 한국의 군사비를 부담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국군을 해산해버릴 것이다.


 


 


의원단이 돌아온 뒤에 이 발언을 에워싸고 국회에서 논쟁이 벌어졌음은 당연하다. 본인이 그런 소리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자, 야당 의원들이 일본 신문에 난 그 발언 기사를 낭독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경제적 의존이 정치의 의존관계를 형성하고, 더욱 나아가 군사적 의존관계로까지 미치게 될 가능성을 누가 자신 있게 부인할 수 있을까. 이 육군참모총장의 중책을 거친, 그리고 국가의 군사적 노선 결정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국회 국방분과위원장이라는 지도자의 그 말썽난 발언과 착상이 사실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다. 어째서 우리가 국가적으로건 국민적으로건, 또는 군사적 차원에서건, 일본을 보호하는 목적과 역할을 자청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와 겨누고 싸우기 위해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과거 행적과 세계관의 주인공들이 지배하는 일본에 군사적으로마저 의존하려는 것일까. 그런 발상법은 곧 민족분열의 항구ㆍ고정화를 전제로 해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군사적 의존은 정치ㆍ문화ㆍ경제적 의존의 종착점임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운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을 본떠서 최근에는 갑자기 전국의 학교들에서 그 모형의 상을 세우는 운동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좋은 일이다. 충무공의 생지(生地)를 성지(聖地)로 모시는 발상에도 찬성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나라가 일본 일색으로 덮어버리게끔 조장하면서 충무공 동상이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들 무슨 뜻이 있을까. 실제에서는 일본화를 호도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국가적 정신분열증의 표시가 아닐까.


요컨대 국가와 민족과 사회와 국민의 진정한 ‘자립정신’이라는 것은 그런 기념비적인 외면적 표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으로 주체적인 민족주의가 확립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모두 ‘부정을 부정’하지 못한 우리의 제반 ‘내적 근거’의 자기현시(自己顯示)의 형태라고 생각된다.


 


자신에 대한 냉엄한 성찰


 


우리가 30여 년간 미국과의 관계 양식에서 진정 떳떳하고 명예스러운 위치에 섰던가 의심스럽다. 그것은 일본과의 관계에서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강대한 외국과 관계를 맺고 사는 작고 약한 나라의 입장에서는 생각해야 할 적지 않은 공통적 고려사항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변화가 나라의 앞날에 일어나려는 듯 보이는 서른 두 번째의 광복일을 맞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남의 나라가 취하는 태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만 여길 것이 아니라 자신을 냉엄하게 성찰하는 슬기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코리아라는 말이 그들 나라에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는가, 그 책임이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를 찾아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남의 멸시를 받지 않고 또 외톨이가 되지 않으면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결과는 지난 32년의 해방 후 역사에서 청산할 것을 청산하지 않고 지나온 그 잘못된 내적 근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민족적ㆍ국가적 그리고 국민적 자세를 엄청난 것으로 바로잡을 때, 비로소 가깝게는 우리 자신의 내일과 길게는 우리의 후손들이 남의 모욕과 열등감에서 진정 해방될 것으로 믿는다. 그 방법은 식민지주의와 제도가 우리를 부정했던 그 부정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우리의 의지로 내부적으로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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