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북진통일과 예속의 이중주」
7-2.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북진통일과 예속의 이중주」(1992년, 새는)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와싱톤에서 서명
1945년 11월 17일 발효
본 조약의 당사국은 모든 국민과 모든 정부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희망을 재확인하며 또한 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기구를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고,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이 태평양지역에서 고립해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가지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통의 결의를 공공연히 또한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며,
또한 태평양지역에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조직이 발달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제1조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라도 국제적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또한 국제관계에서 국제연합의 목적이나 당사국이 국제연합에 대하여 부당한 의무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의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제2조 당사국 중 어느 일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당사국은 단독으로나 공동으로나 자조(自助)와 상호원조에 의하여 무력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하여 강화시킬 것이며 본 조약을 실행하고 그 목적을 추진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하에 취할 것이다.
제3조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지배하에 있는 영토와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지배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금후의 영토(領土)에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지역에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제4조 상호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미합중국에) 허여(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제5조 본 조약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에 의하여 각국의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서가 양국에 의하여 와싱톤에서 교환되었을 때 효력을 발생한다.
제6조 조약은 무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뒤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지시킬 수 있다. 이상의증거로서 하기(下記)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한다.
본 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와싱톤에서 국문과 영문 두 벌로 작성됨.
대한민국을 위하여 변영태(卞塋泰)
미합중국을 위하여 존 포스터 덜레스
어떤 체약국도 이 조약의 제3조 아래서는 타방국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을 제외하고는 그를 원조할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다. 또 이 조약의 어떤 경우도 대한민국의 행정적 관리하에 합법적으로 존치(存置)하기로 된 것과 미합중국에 의해 결정된 영역에 대한 무력공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합중국이 대한민국에 대하여 원조를 제공할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란?
대한민국(남한)과 미합중국(미국)의 해방 이후의 관계양식을 남한의 모습에서 규정하면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미국 군사점령하의 무주권 시기(1945.8~1948.8) ② 피보호적 반(半)독립국가 시기(1948.8, 대한민국 남한 단독정부 수립~1950.6, 한국전쟁 발생) ③ UNㆍ미국 공동후견하의 전시 피보호국 시기(1950.6~1953.7, 한국전쟁 휴전) ④ 미국 냉전적 세계질서의 최전방 군사 기지 역할 시기(휴전~1988.7, 제5공화국) ⑤ 제한적 상대적 자율성 회복 시기(1989~현재, 제 6공화국의 ‘북방정책’전개 이후~현재).
이와 같은 남한ㆍ미국 존재관계의 반 세기 가운데 ④와 ⑤의 시기, 즉 한국전쟁 휴전 성립(1953)부터 오늘까지의 40년간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제하의 대미 군사기지국가”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⑤에 해당하는 최근 2~3년은 군사 우선 냉전체제에서 정치ㆍ경제 우선의 탈냉전질서의 전개에 발맞춘 방위조약 ‘재평가 단계’다. 분단민족 내부질서의 개편정책으로 미국과의 존재양식에서 ‘탈예속’ㆍ ‘제한적 자율성 회복’의 시대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양국관계의 고차적 구조는 아직도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불평등적 기조 위에서 운영되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과 대한민국의 국가적 의무ㆍ권리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그런 시각에서의 인식과 총체적인 재평가가 시급히 요구된다. 이 글은 해방 후 40년 이상이나 우리를 지배ㆍ규정ㆍ구속해온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① 그 생성 과정 및 배경 ② 조약의 성격과 의무관계의 해부 ③ 그 조약이 남한의 국가ㆍ국민ㆍ정부ㆍ사회적 일상생활의 여러 측면에 작용하는 구체적 문제들, 그리고 ④ 그것이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남ㆍ북한(조선)의 각기 및 상호관계에 어떻게 연관되며, 어떻게 작용하는가 등등을 검토해보려는 것이다(반드시 이 순서와 구성을 따르지는 않는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발상에서부터 정부 간 조인 및 양국 의회의 비준(발효)까지의 복잡한 과정은 몇 개의 단계로 나뉜다.
① 한국전쟁 휴전회담의 초기 단계
② 이승만 한국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전후(한ㆍ미 간 갈등의 시작) 시기
③ 휴전협정 체결 전후(한ㆍ미 간 갈등의 절정) 시기
④ 한(조선)반도 통일을 위한 제네바 정치회담 전후(한국전쟁재발 위기 고조) 시기
⑤ 방위조약 조인 비준 및 발효(반세기 대미 예속체제의 본격화)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의 발상-한미 간 갈등의 시작
한미 양국 정부 사이에 최초로 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1952년 3월 21일자로 트루만 미국 대통령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보낸 서신에서다.
이 시기는 한국전쟁이 이미 1년 8개월간 계속된 상태로서, 3년 2개월간의 한국전쟁이 중반전을 넘어서 가장 치열한 단계였다. 개전(開戰)에서의 ‘유엔군’ 16개국을 대표한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및 중화인민공화국 지원군과의 휴전회담이 시작(1951.7.8)된 지 반 년 후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가 한반도의모든 전선에 걸쳐서 전개되는 한편, 단속적으로 계속된 휴전회담쌍방이 마침내 잠정적 초안에 가조인(1952.6.8)하기 전이다.
이승만과 한국 정부는, 휴전을 위한 전쟁 당사자 간의 예비회담이 개성(開城) 본회담으로 본격화되자 한 달 뒤인 1951년 8월부터전 국민적 “휴전반대ㆍ전쟁계속ㆍ북진통일” 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영토가 부산을 둘러싼 최남단의 일각으로 몰렸던 현실을 잊은 이승만은,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기세를 몰아 군사적 통일을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유럽 우선 노선이었던 트루만은 이미 아시아 우선주의와 그에 따르는 대북한 및 대중국 원자탄 사용을 주장한 맥아더를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의 직위에서 파면했다(1951.4.11). 세상을 놀라게 한 이 조치는 미국 정부가 한국전쟁의 조기종결, 현 전선에서의 휴전, 군사력에 의한 통일의지 포기를 천명한 것이었다.
북위 38도선의 사실상의 백지화로, 평소 무력통일의 꿈을 달성하려던 이승만은 사사건건 유엔과 미국 정부의 전쟁정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유엔의 중화인민공화국 ‘침략자’ 결의를 명분 삼아서 ‘중공군’의 압록강 밖으로의 완전 철수 없는 휴전과 휴전협정은 절대로 수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승만의 휴전반대정책은 유엔군에 대한 대한민국 군대의 협조 거부, 유엔군사령관 지휘권하에서의 남한 군대의 일부 또는 전부철수 위협 등으로 나타났다. 군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유엔군현지 보급조달 및 인건비 지불을 위한 대한민국 정부 예산의 한화지출 정지, 유엔군 군인 및 군속에 대한 신원 안전보장 거부 등 여러 측면에서 휴전회담 방해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승만의 요구조건은 휴전회담 한국군 대표 최덕신(崔德新) 장군을 통해서 유엔군 휴전회담 수석대표에게 보낸 공식서한(영문)에서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휴전협정 초안의 수정 요구
1, 2, 3, 4(전투상황 기술: 생략)
5. 휴전초안 제61항을 다음과 같이 수정할 것을 요청한다.
“휴전협정의 조인에 앞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지원군은 교전당사 쌍방대표들의 공동감시하에 그 병력ㆍ장비ㆍ시설을 포함한 모든 군사력을 철수할 것에 동의한다.”
(대한민국 외무부 소관 휴전관계문서 마이크로 필름 1491호. 문서의 날짜는 적혀 있지 않다.)
역시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문서(달필의 한문 붓글씨의 명령서)는 다음과 같이 한국 정부의 휴전반대 조치를 밝히고 있다.
군사극비(軍事極秘)지령(指令)(口頭下達)
상황: 1, 2, 3, 4(휴전협정 초안 내용, 전투상황, 병력 장비이동, 지역, 시간, 선…… 등 기술 생략)
결심: 대한민국 정부는 정전실시(停戰實施)에 대하여 협력하지 아니한다.
행동: 1. 전투행위 중지에 불응한다. 한국 군대는 현재의 전투행위를 계속한다.
2. 한국 군대는 현재선(線)으로부터 별명(別命)이 유(有)할 시(時)까지 철수하지 아니한다.
이상
(위의 외무부 소관 필름 1524호)
이승만의 결심에 따르는 직접 명령서이거나, 군참모총장의 전군 지휘관에 대한 지령인 것으로 보인다. 명령자, 수령자, 날짜의 기록이 없다.
한국전쟁의 세계대전 위기-미국의 반이승만 쿠데타
유엔(본부), 미국 정부, 유엔군(미군) 총사령관, 한국 주재 미국대사와 이승만 대통령ㆍ한국 정부ㆍ군대ㆍ국민 사이의 ‘적전 자중지란’이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결의와 휴전반대 능력을 극적으로 과시하면서 정치적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소위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부산 일대 임시수도에 대한 계엄령 선포, 대통령직선제 헌법개정 강행, 이에 반대하는 야당의원 50여 명 육군헌병대에 감금……. 유엔군의 전쟁수행이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중대한 차질에 직면했다.
이 상태를 조성하는 데 성공한 이승만은 1952년 3월 21일, 트루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 친서에서 한미 방위협정의 체결을 요구하면서, 그것 없이는 결사적으로 휴전에 반대할 결심을 밝혔다.
……그렇지만 다음에 열거하는 의견에 대해서 각하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나 자신과 우리 국민의 협력은 한결 효과적일 것입니다. ……
① 두 나라 사이의 어떤 상호안전보장협정. ……상호안전보장협정으로 나를 뒷받침해준다면 본인은 국민에 대해서 휴전을 수락토록 설득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와 같은 안전보장적 조치가 없으면, 한국 국민은 버림을 받게 된다는 지금의 두려움이 위험한 정도까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런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인들은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행동을 할 것입니다. ……
이 편지는 미국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협박 또는 최후통첩과 같았다. 그 시간 이후에도 쌍방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화ㆍ확대되었다. 이승만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미국 정부는 마침내 1952년 6월경, 그에 대한 일종의 쿠데타를 구상하게 된다. 미국 정부(국무성, 국방성, 국가안전보장회의, 유엔군총사령관, 주한미국대사관등) 내부에 긴급히 교환된 대책협의 끝에 다음과 같은 비상수단이 강구되었다(실시되지는 않았다).
① 한국 정부에 대한 경제원조를 중단한다.
② 미국 해군함대를 부산항 내에 정박ㆍ대기시킨다.
③ 유엔군사령부 휘하부대를 부산지역에 진주ㆍ배치한다.
④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정부에 복종요구를 통첩한다.
⑤ 요구를 거부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신체적 연금(custody)을 단행한다.
⑥ 유엔군사령관의 명의로 부산(수도)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⑦ 부산지역의 남한 군대ㆍ경찰 및 준군사적 집단들과 청년단체들을 접수한다.
⑧ 한국 국회의원들과 그 가족들의 신체안전 보호, 망명처제공.
⑨ 국회 소집ㆍ개회,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체포ㆍ투옥된 사람들을 석방한다.
⑩ 전쟁수행에 전면적으로 협조할 남한 정부 지도부의 개편ㆍ구성.
이와 같은 극단적 조치를 위한 군사적 세부계획이 논의되었다.
① 한국군 참모총장의 교체ㆍ인명(백선엽(白善燁) 장군이 미국 측 의중의 인물로 거론됨).
② 혹시라도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관 지휘권하에 한국군을 배속한 1950년 7월 14일 명령ㆍ협정(대전협정)을 취소할 경우를 예상하여, 한국군 참모총장과 주요 지휘관들의 유엔군사령관에 대한 충성도를 조사ㆍ평가해둔다.
③ 신참모총장으로 하여금 계엄령에 따라 한국군ㆍ경찰ㆍ준군사ㆍ준경찰 단체…… 등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게 한다.
④ 대한민국 정부ㆍ국회 등 주권적 존재의 상징을 유지하게하고 기능하게 한다.
⑤ 유엔군 총사령관 명령의 계엄령은 가능한 한 최단시일 내에 한국 민간정부 기능 회복에 진력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협정 수락 거부
트루만에 대한 이승만의 안전보장협정 체결요구는 1952년 11월 트루만이 하야할 때까지 묵살되었다. 전쟁을 치르는 맹군(盟軍)이기보다는 차라리 반적군(半敵軍)인 상호관계가 지속되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전쟁(또는 휴전)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극적 조치를 단행했다. 포로교환 심사 과정에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인민군 포로 2만 5,000명의 일방적 석방이 그것이었다(1953.6.18). 이승만은 이 행동으로 북한과 중국의 휴전회담 거부를 유도하여 휴전협정 체결을 지연 또는 파탄시키려는 계산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소위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은 피아 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유엔 회원국들, 특히 유엔군 파견국 정부들의 비난이 이승만에게 집중되었다. 파견국들에서 자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적어도 유엔군사령부와 미국 정부는 표면상 난처한 처지에 몰린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열흘 전에 조인된 포로교환협정은 8월 5일부터 포로교환을 개시하기로 합의해놓고 있는 터였으니까. 이 상황에서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방위조약 같은 것을 미국 정부가 고려조차 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충격치료’법으로 그의 방위조약 체결요구외교를 강화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이승만의 외교감각은 적어도 그 조치의 효과를 충분히 계산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30년 후에 공개된 미국 정부 비밀문서는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서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의 전쟁수행상 이해문제를 검토한 사실을 밝혀주기 때문이다(『미국외교관계』XV, 한국 1952~1954, 792~834쪽).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요구와 함께 이승만이 전개한 전쟁수행불(비)협조정책들은 미국 내 반공주의세력의 득세를 기대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맥아더 최고사령관의 철저한 반공주의가 그것이다. 다음은 덜레스 국무장관이다. 트루만 자신도 그랬거니와 한국전쟁 초기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동지였다.
그러나 이것들에 못지않게, 어쩌면 그들에 대해서보다도 더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미국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다. 그 당시 매카시 의원은 그 악명 높은 소위 ‘매카시즘 선풍’으로 미국 사회를 송두리째 광적 반공 히스테리로 몰아가고 있었다. 트루만조차도 매카시의 ‘반미행위조사위원회’에 의해서 ‘의심스러운 인물’로 지명되었을 정도니까.
이승만은 한국전쟁에서의 완강한 비타협적 반공주의 지도자로 스스로를 부각시킴으로써 미국 내 반공주의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 빗나간 것 같다. 한국전쟁의 조기종식을 선거공약으로 하여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휴전회담을 촉진했다.
한국의 최후통첩-이승만의 마지막 도전
미국의 새 정부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얻지 못한 채 휴전협정의 급진전을 본 이승만은 다시 휴전수락에 대한 유명한 5개항의 ‘최후통첩’을 미국 정부에 제시했다(1953.4.8).
①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 주권하에 통일시킬 것. ② 그 영토에서 중국 공산군은 한 명도 남김없이 휴전성립 전에 철수완료할 것. ③ 북한 군대의 완전 무장해제. ④ 한국 내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어떤 제3자의 무기제공도 금지시킬 것. ⑤ 대한민국의 국가 주권을 확인하며, 한국(Korea)에 관한 여하한 앞으로의 국제회의에도 참석할 권리를 인정할 것(앞의 외교문서, 897~900쪽).
이 최후통첩과 함께 휴전협정 및 그 이행에 대한 한국 내의 거부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미국 정부와 유엔군 파견국들 사이에 이승만 개인과 남한 정부에 대한 통제권 시비가 매일같이 벌어졌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승만과 동맹국 정부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승만 정부가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한국군대에 의한 북진통일전쟁을 촉발할 위험성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연쇄적 대응작용으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불가피해진다. 휴전을 이루어서 전 국민적 환영을 받고 있는 신정부로서 그것은 절대로 허용하거나 묵인할 수 없는 터였다.
아이젠하워는 마침내 이승만을 무마하여 휴전협정을 준수케 하기 위해서 양수겸장을 쓰기로 결심했다.
미국은 다시는 절대로 한반도에서 전쟁에 말려들어갈 의사가 없다는 경고와 함께 한ㆍ미 양국 간에 어떤 형식의 상호방위조치를 취할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다.
1953년 4월 23일자 서신에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전쟁재발 반대의 단호한 의사를 통고했다.
① 유엔과 미국은 귀국 영토에서 북한과 중공 침략자의 축출을 명령한 유엔결의의 책임을 완수했다.
② 그 목적이 달성된 마당에 전쟁행위를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은 용인될 수 없다.
③ 세계에는 Korea뿐만 아니라 독일, 베트남, 오스트리아 등의 분단민족이 있다. 유엔이나 미국은 분단민족의 통일을 전쟁수단으로 달성하는 의무를 수락한 일이 없다.
④ Korea 통일문제는 휴전협정에서 합의한 대로 앞으로의 관계국 정치회의에서 이루어야 할 과제다.
이승만의 상처뿐인 승리-알맹이 없는 미국 초안
미국 정부는 이 통고와 동시에 한국 정부에게 ‘한미 상호안전보장조약’에 관해 논의할 뜻을 알려왔다. 1953년 4월 14일의 일이다. 이승만의 옹고집이 드디어 성공단계에 다가왔다.
한미 양국 정부 간의 협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협의에 앞서서 “대한민국 영토의 범위”를 놓고 대립했다.
한국 측은 압록강-두만강 선을 국경으로 하는 영토를 주장하면서 그 영토에 대한 외부공격의 경우에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자동적 의무로 규정하려 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계산을 경계한 까닭에 그와 같은 대한민국의 영토 규정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만약 휴전협정상의 휴전선을 대한민국 국경으로 인정할 경우에는, Korea의 분단을 합법화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쌍방이 반대하는 바였다. 현실적으로 행정권하에 들어 있지 않는 영토에 대한 방위책임 문제다. 이승만은 그 조항을 관철하여 훗날 휴전선을 돌파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유도하려는 심산이었고, 미국은 그런 의무를 조약화하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 조약 내용으로는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초보적 상식에 속하는 일이었다.
쌍방의 오랜 논란 끝에 일단 초안 형식으로 상정된 내용은 전문(前文)과 5개조로 구성된 것이었다. 미국 측의 이해계산이 다분히 깔려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글의 맨 앞에 옮겨놓은 비준된 현 조약 내용과 비교연구하는 자료로서 그 전문을 영문에서 한국어로 옮겨본다(우리 정부 보존문서에는 이 초안의 원문이나 번역이 없다).
미국 측의 한미 안전보장조약 초안문
이 조약 체결당사국은,
모든 국민 및 모든 정부와 평화적으로 생존할 염원을 확인하며, 또 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유지의 틀을 강화할 것을 희망하면서,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공격에 대항해서 그들 스스로를 방위하려는 공동의 결의를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어떤 잠재적 침략자도 그들의 어느 쪽도 태평양지역에서 홀로 있다는 환상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를 염원하면서,
태평양지역에서보다도 종합적인 지역적 안전보장체제가 개발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한 집단적 방위노력을 더욱 강화하기를 염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제I조
체약 당사자는 그들이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떤 국제적 분쟁도, 국제적 평화안전 및 정의가 위태로워지지 않는 평화적 방법으로 처리하도록 힘쓰며, 그들의 국제관계에서 유엔의 목적(유엔헌장 용어)과 어떤 형태로든 합치되지 않는 힘의 사용 또는 사용 위협을 하지 않도록 힘쓴다.
제II조
태평양지역에서의 어느 한 체약국의 정치적 독립과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공격 위협하에 놓였다고 어느 쪽이라도 판단하게 되는 상태에서는 체약 쌍방은 함께 협의한다. 체약 당사자는 본조약의 이행과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협의하고 합의하며, 필요한 행정적 조치들을 취한다.
제III조
각 체약 당사자는 태평양지역에서 현재 또는 장래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각기의 행정관할권하에 들어오게 될 영토에 대한 무력공격은 자신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인정하여 각기의 헌법절차에 따라서 이 공동의 위험에 대처할 뜻을 선언한다.
제IV조
이 조약은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이 각기의 헌법절차에 따라서 비준할 것이며, 그 비준서가 ……에서 교환됨으로써 그 효력을 발생한다.
제V조
이 조약은 영구히 유효하다. 체약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그 뜻을 통고한 1년 후에 이 조약을 종식시킬 수 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보는 한ㆍ미의 이해 대립
이 조약 초안에는 그 후 확정된 현행 한미 상호방위조약 제4조의 내용, 즉 대한민국의 영토, 영공, 영해의 모든 공간에 미국이 육ㆍ해ㆍ공군을 무조건적으로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승인한 조항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각별히 눈에 띈다. 미ㆍ일 안전보장조약(1951 체결, 1960 개정)은 그 제1조에 이러한 조항(현 한미 상호방위조약 제4조의 원형)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곧 이 사실을 깨닫는다. 이 조항의 추가삽입에 관한 미국 정부의 관계부처 간의논의 과정에서 흥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협정 규정대로 미군을 전부 일본으로 철수시킬 구상이었다. (구)일ㆍ미 안보조약 제1조는, 일본 주권 공간에 무조건 주둔권리를 갖는 미국 군대가 ① 일본 내부의 내란, 반정부 소요 ② 일본에 대한 외부공격만이 아니라 ③ 일본의 안전을 위협할 ‘극동지역의 안전’을 위해서 일본 주권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즉 휴전 후 남한에서는 일단 철수하고, 필요시에는 일본을 기지로 해서 한반도에 군사적 출동을 가능케 하는 전략이었다. 이승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먼저 발효시킨 후에 휴전협정에 서명하겠다고 요구했다.
‘압록강-두만강’선에서 휴전선으로 준 영토권
일미 안보조약을 검토한 이승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초안에미군 주둔권 조항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일미 안보조약의 전문을 다만 일본이라는 이름만 한국으로 대체해서 당장에 그대로 조인하자고 졸랐다(1953.7.7). 미국은 당연히 이에 동의했다.
미국 측 협정 초안을 검토한 한국 정부는 그것이 ‘압록강-두만강 영토’ 주장을 비롯한 한국 측 의도에 너무나 미치지 못하는 내용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승만은 미국 측 초안 구성을 검토한 결과,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에 대한 확고한 안전보장의 의사가 없음을 간파했다. 이승만은 미국 측 초안을 검토한 지 불과 사흘 만에 한국 측 초안을 서둘러 작성케 해서 이를 미국 정부에 제시했다(1953.7.9).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원문은 영어).
대한민국 측 한미 상호방위조약 초안
전문(前文)…… (미국 측 초안과 별차 없음. 생략)
제1조 (미국 측 초안과 동일한 문장). 제2조 본 조약 체결 당사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KOREA의 전통적 영역 전체로서 특히 북방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함을 확인한다.
제3조 본 조약의 여러 목표를 더욱 유효하게 달성하기 위하여, 자조(自助)에 의해서나 상호원조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또 공동으로 군사적 공격을 저지할 단독적ㆍ집단적 역량을 발전 및 유지한다. 만약 미국이 그 육ㆍ해ㆍ공군을 Korea 영역과 그 부근에 주둔시키기를 원한다면 그 목적을 위한 필요한 결정은 당장에 강구될 수 있다.
제4조 체약국은 본 조약의 이행문제와 관련해서 쌍방의 외무장관 또는 그 대리로 하여금 수시로 협의케 하며, 체약국의 어느 한쪽이든 체약국의 어느 한쪽의 영토보전ㆍ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공격으로 위협에 처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협의하게 한다.
제5조 체약국은 상대방 체약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다른 체약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데 합의하며, 따라서 그와 같은 공격이 있을 때에는 체약국 각기는 유엔헌장 제51조로 승인된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自衛)권 행사로써 그 공격을 저지하기위해 군사력을 포함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방법으로 즉시 공격받은 체약국을 돕는 데 합의한다. 그와 같은 어떤 무력공격이든 그리고 그에 대해서 취해진 모든 대항조치는 즉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되어야 한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적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조처들을 취했을 때에는 그와 같은 대항조치들은 종식되는 것으로 한다.
제6조 제5조의 목적을 위하여, 체약국의 어느 한쪽에 대한 무력공격은 각기 체약국의 본토는 물론 태평양에서 각기 행정관할권하에 있는 도서 영토들 또는 각기 체약국의 태평양에 있는 군사력ㆍ공용 선박ㆍ공용 항공기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제7조 본 조약은 체약국의 유엔헌장 규정상의 권리나 의무 또는 국제적 평화와 안전보장의 유지를 위한 유엔의 책임에 대해서는 어떤 측면에서도 상충되어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
제8조 본 조약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각기의 헌법절차에 따라서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문서의 교환으로써 발효한다.
제9조 본 조약은 유엔 또는 다른 방식으로 Korea 지역에서의 국제적 안전보장과 평화유지를 위해서 만족할 만한 유엔의 제반 결정 또는 그것을 대신하는 개별적이거나 집단적 안전보장조치들이 강구되고 집행되었다고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의 정부가 인정할 때에 만료된다.
‘북진통일’의 꿈은 사라지고-굴복하는 이 대통령
이 한국 측 초안문은 조약체결의 경험미숙 때문에 항목 구성에 중복이 많고 문장이 장황하다. 그러나 이 초안은 이승만이 휴전협정을 파기하지 않기 위해서 제기했던 5개 항목의 한국 정부 조건을 골격으로 짜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초안과 한국 초안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영토범위 미국 초안은 “현재의 영토 또는 평화적 방법으로 장래에 추가될” 영토라고 극히 막연하게 표현한 것과 대조적으로 “압록강-두만강”을, 그것도 “북방에서는”이라고 못 박고 있다. 휴전 성립 후의 ‘무력 북진통일’전쟁 합법화의 의도를 암시하는 조문이다.
한국영역에서의 미국 군대 주둔ㆍ작전권 미국 초안에는 미국 자신이 원하지 않아서 들어 있지 않은 것을 한국 정부가 자진해서 제공했다.
유사시 협의 미국 초안은 협의의 격(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한국 초안은 ‘외무장관’이나 그 대리직의 고위대표 수준으로 명시했다. 유사시의 합의에 대한 성의나 효과의 기대차가 분명하다.
군사적 원조의 의무 미국 초안은 원조방식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이름이 ‘상호방위’의 조약치고는 의무ㆍ책임거부 의도가 너무나 노골적이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서 “군사력을 포함”하는 모든 방법으로 “당장에 즉각적” 개입을 미국에 의무화하려 했다. 이 의무범위와 성격은 미국이 북대서양방위조약(NATO)에서지는 그것보다도 무겁고 강제적이다. 이승만이 휴전 후의 북진통일전쟁에 미국 군사력의 자동적 개입을 의무화하려는 의도인데, 이것이야말로 아이젠하워가 단호히 거부했던 위험성이다.
UN의 군사적 개입 연계 그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미국군 자동개입뿐만 아니라UN의 6ㆍ25전쟁식 개입까지도 의무화하려 했다.
외부로부터의 공격대상 한국의 안이 영토와 군대뿐만 아니라 공용 선박ㆍ항공기까지 포함시킨 것에 비해 미국의 초안이 명시하지 않은 것은 극히 대조적이다. 한국 안이 주로 참고한 미일 안전보장조약(1951 조인)에도 이 내용은 없다. 이 외부 공격대상의 확대ㆍ명시의 의도도 명백하다. 그 당시 한국의 군사력으로서는 미국 본토와 태평양상의 미국 군사기지ㆍ선박ㆍ항공기를 보호하러갈 능력이 없었으니 이것은 대한민국의 그것들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자동개입이라 할 수 있다.
‘헌법절차’에 따르는 비준 한국 정부는 이 대통령을 포함해서, 중대한 의무를 스스로에게 지우는 방위조약의 비준에서 “헌법적 절차를 따라”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최종적으로 비준ㆍ확정된 방위조약은 한국 초안과는 거의 무관할 뿐더러 미국 자신의 초안보다도 더 미국의 의무를 약화ㆍ면제시킨 내용이다.
1인독재 이승만이, 한국의 초안이 요구하는 6ㆍ25전쟁 재발시 미국의 자동적 군사개입 같은 중대사도 자신의 상대인 미국 대통령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승만은 덜레스 국무장관에 보낸 친서(1953.7.24)에서 다음과 같이 요구했던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대한민국 대통령의 서한
서울 1953년 7월 24일
……
첫째, 대한민국이 어떤 적의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의 자동적 군사개입을 규정하는 명문적 조항을 조약에 삽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둘째, 90일간으로 예정된 (제네바)정치회의가 결론 없이 끝날 경우, 다시 전쟁을 시작하여 우리 영토에서 중공군을 몰아내는 데 미국의 군사적 협력을 기대합니다. ……
미국 측 문서에는, 이 서한을 받은 아이젠하워의 대경실색한 모습이 역력히 기술되어 있다(『미국외교관계』XV권, KOREA, 1952~1954, 1429~1465쪽). 아이젠하워는 덜레스의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즉시 이승만에게 보낼 회신을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통령은 그(이승만)가 제의한 몇 가지 요구에 대해서우리는 대경실색했다고 회신에서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모든 조약은 특히 방위조약은 헌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우리에겐 의회의 승인과 동의 없이 선전포고를 할 권능이 없다. ……
아이젠하워와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요구를 휴전 후의 한반도에서 다시 중공과 전쟁을 벌이는 선전포고를 미리 약속해달라는 요구라 할 정도로 놀랐음이 분명하다.
마침내 대한민국의 대미예속 구조의 조약화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무력 북진통일을 위한 미국의 군사적 보증으로 삼으려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조약협상 기간 중 전국적 휴전반대운동을 더욱 확대했다. 전쟁 보증적 조약체결을 위한 미국에 대한 압력이었다. 휴전반대운동으로 제2대 대통령에 재당선된 그는 언제라도 휴전상태를 깰 수 있는 의도와 능력을 과시했다.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서도 조약체결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난처한 처지는 휴전조인 후 대통령이 참석한 최고위 정책 수립자들의 여러 날에 걸친 한국정세 종합평가회의의의사록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이승만)는 지금,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일방적으로 개시하려는 그의 시도를 미국이 저지할 능력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그보다도 더 고약한 사실은, 대한민국 정부가 공산 측의 대규모 군사적 보복행동을 초래할 것이 확실한 일방적 행동을 취하더라도 미국은 현 정세하에서는 자기들에 대한 군사적 뒷받침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그는 공산 측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징조가 농후하다. 미국을 끌어들일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더라도 그는 미국의 전면적 군사적 개입에 희망을 걸고 그런 행동을 감행할 것으로 보인다. 그 반면에, 만일 한국전쟁이 재발되어도 미국을 끌어들일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믿게 된다면 그는 군사적 도발행동을 감행하지 않는 대신,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인) 정치회의에서 대한민국이 수락할 수 없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정치회의를 중단시키도록 전략을 바꿀 것이고, 또 미국의 보호적 역량을 남한에 묶어두려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할 것으로 믿어진다. ……(비밀 SE-48 1953.10.16, 「특별정세평가: KOREA에서의 휴전과 관련해서 대한민국이 취할 가장 가능성이 높은 행동방향과 그 수행능력」).
이상과 같은 한국전쟁의 정세배경과 한ㆍ미 양국 정부 간의 관계변화에 따라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최종안이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조인되고, 53년 10월 17일 와싱톤에서 변영태(卞塋泰), 덜레스 양국 외무장관 사이에 서명, 11월 17일에 정식 발효했다.
•19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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