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35년 전쟁의 총평가(창작과비평, 1975)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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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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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베트남 35년 전쟁의 총평가」*(1975년 『창작과 비평』, 우상)
“이게 어찌 된 셈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남베트남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지난주 너무도 급작스러운 사태 발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의 걷잡을 수 없는 당혹감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군사력 앞에 사이공 정부군이 이렇다 할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와해해버린 뒤에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한둘, 국부적 예외는 있을지 모르지만, ‘베트남공화국’국군은 그들의 진지를 지키기 위해서 총을 들기는커녕, 완전 궤멸 상태가 되어 세계의 전쟁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게 패주해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거의 모든 일이 잘못된 것이다(『타임』지, 1975.4.14).
1975년 5월 1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정부 대통령이 민족해방전선군 대표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35년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전쟁에 막이 내렸다. 베트남 사태는 그 긴 과정과 종결 형식에서 많은 ‘교훈’을 준다. 그러나 그 교훈을 올바르게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 인식
첫째는, 평가와 판단의 토대가 되는 베트남 사태에 관한 편견과 선입관의 배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만도 35년의 역사를 가지는 이 전쟁은 그 성격이나 요인이나 과정에서 누구도 한마디로 규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내용을 띠고 있다. 판단의 토대는 정보다. 베트남 사태에 관한 보도가 너무도 많았다는 사실과 너무도 일방적으로 각색되어 전달되었다는 두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사건마다의 단편적 정보에 압도된 나머지 본질적인 것을 파악할 수 없었고, 사태를 대하는 이해관계에 따라 한 측면이 강조되고 딴 측면은 애써 무시되는 보도 방식이 오랫동안 계속된 탓에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판단이 지극히 어렵게 되어 있다.
둘째는, 평가와 판단의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베트남 국민의 역사와 현실적 입장과 이해가 판단의 입장을 결정하는 조건이어야할 것이다. 각기 어느 한쪽의 편에 섰던 미국이나 중국 및 소련의 입장이 건전할 수 없듯이, 한쪽을 지원한 관계자의 입장도 종합적일 수는 없다. 외부 세력은 어차피 제3자일 수밖에 없다. 전쟁에 운명을 걸었던 전쟁 당사자인 남ㆍ북 베트남 정부 및 민족해방전선 등의 세 입장도 다르고 보면, 그 어느 쪽의 입장에서도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는 실로 불가능하다. 심지어 각기의 정부 및 전쟁 지도층과 민중의 입장이 반드시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정전(停戰) 방식이나 전쟁 해결 및 한반도 정세에 대한 최종적 판단자는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제3자인 대한민국 또는 우리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베트남 사태의 종결을 가장 정확하고 최종적 판단이라 고집한다면 한반도의 사태에 대해 외부의 어떤 제3자가 최종적이고 가장 정확한 판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우리 자신의 입장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게 마련인 까닭이다. 베트남 사태의 종결은 베트남 인민의 역사와 현재 및 장래를 규정한 것이다. 미국, 소련, 중국의 그것도 아니고 한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몇만 또는 몇 천의 병력을 일방 당사자 편을 들어 일시적으로 파견 참전함으로써 잠시 당사자가 되었던 한 국가나 정부나 국민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역사적ㆍ현실적 의지의 최대공약수적 방향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셋째는, 베트남전쟁의 현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노력이다. 그 본질적 성격의 규정이 가능하면, 그 토대 위에서 전쟁의 전체 과정, 각 국면, 그 종합적 종결의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 베트남전쟁처럼 많은 성격과 이름으로 불린 전쟁은 역사상 없었다. 복잡한 제2차 대전 후의 가치관이 각기의 입장에 따라 투영된 전쟁이라는 데서 더욱 그렇다.공산주의 침략전쟁, 제국주의 전쟁,신식민지 전쟁,백인과 유색인종의 전쟁,양대 정치 이데올로기의 투쟁, 후진ㆍ저개발 민족 대 선진문명 민족의 전쟁, 강대국의 대리전쟁, 민족해방전쟁, 혁명 또는 반(反)혁명전쟁 등이다. 그 각기일 수도 있고, 몇 성격의 복합일 수도 있고 그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폭넓은 연구와 깊은 구명을 하려고 노력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긴 전쟁 역사를 통해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두드러지고 굵은 하나의 민족적 의지를 말한다. 베트남 국민의 민족해방과 분단된 민족의 재통일이다.
베트남 사태의 결말에 대해 ‘비극’이라는 표현이 유행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민족의 통일보다 정치이데올로기의 투쟁적 측면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입장에게는 비극일 수 있다. 분단에서 기인하는 30여 년의 고통이 하루 속히 끝날 것을 갈구하는 사람이나 외국에 의존해서 살찌기보다는 차라리 통일민족사회 속에서 가난하지만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극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내일이 비극일 것인지 그와 반대일 것인지를 단정할 자격은 제3자에게는 없을 것 같다. 또 그 어느 것일지는 오직 앞으로의 베트남 사태의 전개 양식에 달려있다.
파리휴전협정의 행방
베트남 사태의 급속한 결말은 파리휴전협정이 이행되지 않은데서 기인한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당사자들과 방관자들은 각기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그 불이행과 불성실의 책임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 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베트남 휴전협정의 특성과 항목별 내용 및 그 이행 여부로 나누어보는 것이 편리하다.
정치적 조항
파리휴전협정(1973.1.27 조인)은 공식적으로는 ‘베트남에서의 전쟁 종결과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종결시킨 제네바협정(1954.7.20 조인)의 공식 명칭은 ‘베트남에서의 적대행위의 종결에 관한 협정’이다. 두 협정의 명칭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제네바협정은 프랑스와 베트남 인민의 ‘적대행위’(전쟁)를 끝맺는 단순한 휴전 절차적 성격이었다. 실제로 정전 뒤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정치적 해결, 즉 평화의 회복에 관해서는 별도로 제네바회의 참가국에 의한 ‘최종 공동선언’의 형식이 취해졌다. 그리고 미국과 남베트남(그 실태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이 협정의 조인을 거부했기 때문에 휴전에는 성공했으나 그 뒷마무리를 해야 할 정치적 해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파리협정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조인함으로써 제네바협정보다 강화되었다.
형식상으로 말해도 제네바협정은 군사 위주였던 것에 비해, 파리협정은 군사적 해결과 정치적 해결을 유기적으로 결부시킨 구조다. 구체적으로는 군사적 처리와 정치적 처리의 시기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군사적 휴전 조항의 이행 의무는 정치문제의 해결 또는 이행을 조건으로 했다. 이 정치문제의 가장 중요한 것이 사이공 정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민족해방전선),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도적 제3세력, 이 셋으로 ‘민족화합협의회’를 정전 후 90일 내에 구성하는 합의다(제12조 B항). 이 3자 협의기구가 남베트남의 통합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준비 관리 실시하도록 쌍방은 합의했다. 이 정치적 해결의 주체가 될 3자 협의기구 구성에 선행되는 중도 제3세력의 형성에 어느 쪽이 적극적이고 어느 쪽이 소극적이었느냐, 또는 어느 쪽이 그 결성을 탄압으로 거부했느냐 안 했느냐의 판단은 군사 조항의 이행 여부의 책임 구명과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전무한 듯하다.
다음은 파리협정의 해석이나 각 조항의 이행 여부의 구명은 20년 전에 체결되어 그대로 존속해온 제네바협정 체결의 정신과 배경 및 해석, 그리고 그 이행 여부의 책임 소재를 토대로 해서 보완된 사실이다. 파리협정의 역사, 협정의 정신적 모체는 제네바협정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베트남 사태의 이해는 협정 해석면에서 미국 개입 이후, 즉 1964년이후 사태의 진전에 비추어서만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셋째로, 중요한 사실은 사이공 정부와 임시혁명정부는 동등한 조인주체라는 사실이다. 제3국이나 양자 사이의 승인 여부와는 관계없이 협정상 양자는 완전히 동격ㆍ평등이다. 따라서 협정 이행의 의무에 관한 한 어느 정권이 타방 정권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일방적 권리의 주장을 내세웠다면 그것 자체가 협정 위반이다.
다음은 파리협정이 남베트남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전체’의 정치적 해결을 규정한 것이지, 사이공 정부 관할권하의 베트남인이거나, 임시혁명정부 관할권하의 베트남인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더욱이 어느 한쪽 정부가 상대방 정부 지역의 주민을 자기 정부하의 합법적 ‘국민’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게 되었다. 협정의 ‘전문’(前文)은 다음과 같다.
베트남에 관한 파리회담 참가자(複數)는 베트남 인민의 민족적 기본권(fundamental national right)과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 존중을 토대로 해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종결하고 평화를 회복하며 또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목적으로, 아래와 같은 조항들에 합의하고 이를 존중 이행할 것을 약속한다.
이 전문의 ‘fundamental national right’를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문서나 신문기사가 다 같이 ‘국민적 기본권’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오역이며 사소한 듯이 보이는 이 번역의 차이는 남베트남의 협정상 해결 방식과 의무 이행 여부를 가리는 데 중대한 착각의 원인이 된다. 원문의 ‘national right’는 ‘people of Vietnam’, 즉 남북을 가리지 않는 남북 베트남 인민 전체의 ‘민족적 권리’(민주적 권리가 아님)를 말한다. 이것은 프랑스 식민지 전쟁을 승리로 끝낸 베트남 인민(전체)의 독립ㆍ통일을 규정했던 제네바협정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 것이다. 사이공 정부나 임시혁명정부 각기의 ‘국민’적 권리가 아니라,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독립할 베트남 ‘민족’의 권리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people of Vietnam’을 ‘월남 인민’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것도 사이공 정부가 대표하던 ‘월남’이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베트남’, 즉 남북을 통틀어 ‘베트남’인민이다.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 존중’도 마찬가지로 사이공 정권이나 임시혁명정권이 각기 자결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의 인민을 합친 ‘남베트남 전체 인민’의 남베트남에서의 자결권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이런 용어 사용의 혼란과 고정관념으로 말미암아서 협정 이행 여부의 문제를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능력은 극히 제약되어왔다.
미국: 파리협정과 관계없이 미국은 앞으로도 베트남공화국정부(사이공)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계속 인정할 것이다(닉슨 대통령 가조인 후의 연설).
베트남: 파리협정은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 즉 남쪽 동포의 신성한 자결권을 보장하는 정치적 법적 기초다.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다. 남베트남에는 임시혁명정부와 사이공 정부, 이 두 개의 정권이 존재한다(노동당 중앙위원회 성명).
파리협정 전문을 통해서 특기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경합하는 남베트남 두 ‘정권’가운데 어느 쪽에 대해서도 ‘정부’라는 말이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사실이다. 협정 이행과 관련해서는 어느 쪽도 ‘유일 합법정부’를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정치적 발언이나 선전문구로서는 각기 상대방을 ‘괴뢰’또는 ‘유령’정권이라 부르고 스스로 ‘유일 합법정부’를 주장해도 좋다. 그러나 협정으로는 그렇지 않다. 유일 합법정부를 주장하는 것은 상대방을 흡수하는 해결을 고집하는 것으로 협정 위반이다. 사이공 정부는 조인후에도 이 주장을 버리지 않았다.
협정에 의한 정치적 해결의 토대는 ‘민족화합협의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사이공 정권과 임시혁명정권을 두 ‘당사자’로 하고, 그에 속하지 않는 중도 제3세력을 합쳐서 구성될 이 협의체에 남베트남의 단일 합법정부를 구성하고 장차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권리가 위임된 것이다.협정 조인 후 90일 내,즉 1973년 4월 말까지 협의체를 구성하는 데 쌍방은 합의한 것이다(제12조 B항).
민족화합협의회는 휴전협상 과정에서 그것을 ‘연립정부’형식(라오스식)으로 하라는 북베트남 측과, 그것을 다만 남베트남의 단일 합법정부 수립을 위한 일시적인 협의기구로 하자는 미국 측의 주장이 맞서오다가 북베트남 측의 양보로 미국안대로 된 것이다. 이 협의체는 모든 결정에서 제3세력의 ‘만장일치’합의제 때문에(제12조 A항), 창설이 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협정이 위임한 단일 합법정부 수립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문제된 것은, 그 설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규정한 남베트남 전역에서의 민중ㆍ정치인ㆍ단체ㆍ개인의 자유 의사 표시와 시민적 권리의 보장 의무가 쌍방 정권에 의해서 이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남베트남 시민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는 협정에서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상세히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제11조: 종전 직후, 남베트남의 양 당사자는 다음의 사항을 실시한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룩하고, 증오와 적의를 해소하고, 일방 또는 타방과 협력해온 개인 또는 단체ㆍ조직에 대한 모든 보복과 차별행위를 금지한다.
인민의 민주적 자유, 즉 개인적 자유, 언론의 자유, 신문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 신앙의 자유, 이동의 자유, 거주의 자유, 노동의 자유, 재산 보유의 권리, 자유기업의 권리를 보장한다.
이렇게 상세히 규정한 자유와 권리는 ‘재산 보유의 권리’와 ‘자유기업의 권리’까지 들어 있어 자본주의(적) 체제에 아무런 제약도 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이공 정부로서는 적어도 자유ㆍ민주ㆍ자본주의를 표방하는 한 이 조항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사이공 시에서는 1일 28일 휴전의 발효를 축하하는 모임도 시위도 금지했다. 쌍방에 다 같이 가해진 이 자유와 권리를 허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정부와 체제의 취약함을 뜻하거나 협정을 이행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전후 정치 해결의 핵심이자 토대가 되는 이 조항의 이행 여부에 관해서는 아무리 선의의 이해를 한다 하더라도 티우 대통령과 사이공 정부가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다. 주로 미국 정부의 견해를 대변하는 한 미국 주간지는 정치적 자유 분위기가 보장되어야 할 휴전 직후의 상태를 이렇게 보도했다.
“티우, 기선을 제압하다”
티우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남베트남에서 새로운 큰 조치를 취했다. 전국에 걸친 강경한 비상조치를 명하고 이에 따라 군대와 경찰에서는 공산주의의 사주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가혹하게 까부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시위대나 탈영병에 대해서는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남베트남에서는 더욱 강경한 경계조치가 취해졌다. 사이공과 그밖의 도시들에서는 처음으로 야간 통행금지가 엄격히 시행되었다. 사이공 시에서는 밤 11시만 되면 일절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움직임의 원천이 되는 스위치를 꺼버리기나 한 듯이 모든 움직임은 정지한다.
치안 예방조처는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베트콩 기(旗)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전국의 모든 상점과 창고에서 적ㆍ청ㆍ녹세 색깔의 천을 모두 압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모든 양복점ㆍ양장점에 대해서는 남베트남 정규군의 신분을 증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모양이건 유니폼 식의 옷을 만들어주지 못하게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티우 대통령은 특히 언론기관, 정치정당 또는 정치단체 그리고 전국적 선거, 이 세 가지를 가장 싫어한다. 티우 대통령은 그세 가지가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영향의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휴전협정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전에 이 세 가지를 철저하게 탄압하려 하고 있다.
휴전 조인 후 첫 몇 주 동안에 전국적인 예비검속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갖가지 새로운 비상조치가 발해졌고 이에 따라 성(겛)장관에게는 누구든지 달갑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자유 재량으로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사이공의 외국인 전문가들은 반정부적 또는 정부를 비판하는 인사들이 갖가지 죄명으로 무더기 체포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으로서가 아니라 각종 보통 법령의 위반자로서 투옥하는 이유는, 휴전협정이 정치범 석방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범이 아니라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다(US News and World Report, 1973년 2월 첫호).
이렇게 해서 투옥된 사람의 수는 확인된 바 없다.모든 정치범은 서로 휴전협정 발효 15일 이내에 석방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상호간에 민간인 억류자(정치범)의 명단ㆍ억류 장소ㆍ석방 방식을 교환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것은 이행되지 않고 말았다. 사이공 정부는 민간 억류인의 수를 5,081명이라고 발표한 데 대해 해방전선은 3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방전선이 억류하고 있는 수에 관해서 사이공 정부는 8,622명(지방관리)이라는 숫자를 제시하면서 그 석방을 요구했다. 티우 대통령이 많은 민간인 억류자의 석방을 거부하면서 더 많은 민간인을 협정 발효 후에도 투옥한 것은 그들이 바로 해방전선을 지지하거나 민족화합협의회를 구성할 세력의 주축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중립적 또는 정부 비판 인사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한 티우 대통령은 휴전협정 체결이 거의 확실해진 1972년 10월 12일, “휴전이 성립되기 전에 전선 전후방의 공산주의자를 최후의 1인까지 죽여놓고 조인하겠다”고 선언했다(휴전반대 청년대회 연설).사이공 정부의 민간인석방 반대에 항의해서북베트남은 미군 포로의 석방을 일시 중지했다(1973. 2.27). 당황한 미국 정부는 티우 대통령에 대해 민간인 억류자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는 압력을 가해야 했다.
결국 남베트남의 정치적 해결을 담당할 한 주체인 제3세력은 형성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결과로 민족화합정부 수립을 위한 모든 절차는 거부당하고 휴전 후의 새로운 남베트남을 구상한 모든 정치적 조항은 조인 이전에 사실상 백지화된 셈이다.
끝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외국(군대)의 주둔을 고집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노력을 거부했느냐 하는 평가다. 협정 본문 제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1조: 미합중국 및 그밖의 모든 국가는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협정에 의해서 승인된 베트남의 독립ㆍ주권ㆍ통일ㆍ영토 통합을 존중한다.
전문 부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제네바협정으로 승인된 베트남 인민의 민족적 일체성ㆍ불가분성이 파리협정의 기본정신이다. 제네바협정이 결정한 1956년 7월 예정의 통일선거를 거부하고 남북 베트남을 분리된 적대적ㆍ독립적 전정단위로 굳혀버린 외국, 즉 미국의 공작의 재판을 막기 위해서 6년의 협상 과정을 통해 북베트남이 일관되게 요구한 조항이다. 조항의 서두에서 구체적으로 미합중국을 지칭한 것이 그 과정과 동기를 말해준다. 미국이 미합중국을 이렇게 명시하는 데 동의한 것은 1954년 협정에 의한 총선거 실시의 거부책임을 묵시적으로 시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남북 베트남의 분할 고정화나, 남베트남 일부의 분할ㆍ독립을 획책하는 기도는 이 협정 기본원칙인 제1조 위반이 된다. 어느 쪽이 더 남북 분할현상의 항구화ㆍ고정화 정책을 썼는가가 협정 위반의 평가기준이 된다. 또 남베트남 전역에 대한 지배 확대가 불가능하면 현 지배 지역의 고정화에 의해서라도 남베트남의 분할적ㆍ독립적 정부의 유지를 정책으로 추구했느냐도 협정 위반의 기준이 된다.
정치적 해결의 합의사항을 주로 사이공 정부가 위반한 것은 티우 대통령의 주장이 협정에 덜 반영되었다는 데서 이해는 할 수 있다. 휴전협정의 골격으로 내세운 쌍방의 기본적 해결안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사이공 정부 입장
① 북베트남과의 대등한 직접 협상
② 비무장지대의 복원, 남베트남의 영토 보유, 남베트남의 불간섭.
③ 북베트남군과 파괴분자(민족해방전선을 가리킴-필자)의 북베트남으로의 철수 및 효과적 국제감시.
④ 북베트남군의 철수 후, 그리고 무력활동이 저하한 연후에, 미국과 동맹국 군대의 남베트남 철수.
⑤ 평화 회복 후 남북 베트남 재통일을 위한 남북 베트남의 협의.
(1968.9.4, 사이공 정부가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정치해결에 관한 입장」)
민족해방전선의 입장
① 조국독립ㆍ민주평화ㆍ번영 및 궁극적ㆍ평화적 통일의 신성한 권리.
② 미국 침략전쟁의 정지, 모든 미국 군대와 그 위성국가 군대의 철수, 군사기지의 철거.
③ 외부 간섭 없는 남베트남 인민 자신에 의한 민족ㆍ민주연합정권의 수립과 자유선거를 통한 해결.
④ 외부 간섭 없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베트남의 협의와 협정을 토대로 한 단계적 재통일의 실현.
⑤ 남베트남이여하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는다는 보장.
(1968.11.3,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의「남베트남의 정치해결에 관한 성명」)
파리협정의 정치적 해결 방식의 구조는 대체로 임시 혁명정부의 해결안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1954년 제네바협정의 정치해결 구조를 따랐기 때문이다. 제네바협정에서 합의된 남북 베트남 통일을 위한 총선거가 미국과 남베트남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한 점을 고려해서 미국은 파리협정의 규정을 살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파리휴전협정의 해석이나 위반 여부의 검토에서 제네바협정과 그것이 깨진 역사 배경 및 책임 소재를 반드시 참작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54년 제네바협정이 결정적으로 깨진 것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양베트남 통일정부 수립을 규정한 총선거를 거부한 데서 비롯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만약 약속한 대로 선거를 실시하면 80퍼센트의 남북 베트남인이 호치민을 지지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것이다(The Mandate of Change 참조). 파리협정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전체 구상도 제세력의 형성 허용과 3세력에 의한 민족화합정부 수립을 위한 남베트남 선거의 반대로 깨졌다. 그러면 군사적 측면은 어떠했는가.
군사적 조항
당연한 일이지만 파리협정 가운데 가장 깊고 세밀한 규정은 제6장의 군사조항이었다. 제네바협정에 의한 휴전 방식과 다르기 때문도 있었지만 제네바협정의 군사적 의무가 쌍방에 의해서 성실히 이행되지 않았던 사실 때문에 그 내용은 오해의 여지 없이 분명하게 짜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4자 사이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협정 위반의 비난이 그치질 않았다. 그 전면적인 사실의 규정은 고사하고, 어느 한쪽이 주장하는 상대방의 위반에 관한 부분적 사실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사태가 계속되었다. 휴전의 방식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끝맺은 제네바협정에 의한 휴전 방식과 몇 가지 점에서 두드러지게 다르다는 사실도 그 사실의 적발과 책임 소재의 확인을 더욱 어렵게 한 한 가지 중요한 이유다.
남베트남의 쌍방 당사자, 또는 미국과 북베트남을 합친 4당사자 사이에 가장 말썽이 된 위반 사항들을 골라 검토하면 대체로 그 윤곽이 드러난다.
(1) 휴전선 침범, 영토 확장
1954년 휴전과 다른 방식의 하나는 교전 당시 군대가 그리니치 표준시 1973년 1월 27일 24시(한국 시간 28일 오전 8시)를 기해서 있는 그 자리에서 모든 전투행동을 정지한 것이다(제2조). 이른바 ‘현상ㆍ현지’휴전이라는 것이다.1954년에는 프랑스군(그 속의 베트남인 식민지 용병군 포함)과 항불(抗佛) 독립 베트남군이 북위 17도선 남ㆍ북으로 이동ㆍ재집결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교전군대 사이의 휴전선은 분명했고, 그것이 그 후 통일총선 실시의 거부로 마치 남북 베트남 사이의 ‘국경’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전선이 분명한 정규전이기보다는 내란의 특색인 유격전이 13년이나 계속된 뒤의 전선은 이른바 ‘표범 무늬’처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혼재하는 상태였다. 뒤범벅이 되어 있는 각 당사군대의 점령 지역, 그 병력, 그 경계를 확인하기란 제네바 휴전 때보다 훨씬 치밀하게 조직된 몇 겹의 감시제도와 접촉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전 5개월 후인 1973년 8월 말에는 벌써 휴전이 지켜질 희망이 사라진 듯했다. 이 첫 5개월 사이에 사이공 정부 측은 민족해방전선 측의 휴전 위반이 만 5,000건이라고 주장했다. 해방전선측은 같은 기간의 사이공 정부의 휴전 위반만 만 2,000건이라고 임시기구에 보고했다. 실제로 그 후에는 쌍방의 휴전 위반은 집계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감시기구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 해버렸다. 군사적 협정조항과 정치적 조항은 유기적으로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합의 하나의 위반은 상대방에게 군사적 합의 하나를 위반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다. 상대방의 작은 군사적 위반으로 자기의 보다 큰 정치적 합의의 불이행을 정당화하는 사태가 되풀이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한쪽만의 비난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게 공통된 견해다. 더욱이 어느 한쪽이 협정을 상습적으로 위반했다거나 어느 한쪽에 협정 위반의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식의 판단은 타당성이 없다. 그러면 협정이 발효한 직후의 현지 상황은 어떠했던가.
요란한 국제적 환호 속에 미국ㆍ남베트남ㆍ북베트남ㆍ임시혁명정부의 대표들은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베트남에서 전쟁을 끝맺고 평화를 회복하는 데 관한 합의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투는 끝난 일이 없다. 사이공과 공산주의자 쌍방은 사실 협정 내용의 몇 가지 주요한 합의사항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 그 방법을 모르는 형편이었다.쌍방은 서로의 지배 지역을 명시한 지도를 교환한 일도 없다(이 각기의 지역에 대해서 각기 협정상의 ‘법적’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서 각종 전국선거를 준비했어야 할 민족화합협의회도 창설되지 못했다. 그들은 군사보급의 대체를 위한 장소를 지정하지 않았다. 공산 측 지배 지역의 한 지점에 재집결하기 위해서 베트콩 군부대가 이동을 시작하면 사이공 정부군은 베트콩에 대해서 기습공격을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하노이 측에서 본다면 협정의 모든 합의사항은 다만 호치민의 유훈(遺訓)-‘미국인이 사라질 때까지 싸우라, 그리고 괴뢰정부가 쓰러지는 날까지 다시 싸우라’-을 실천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모든 조인 당사자가 협정을 위반했다. 미국은 휴전협정이 발효되기 직전에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를 단시일 내에 사이공 정부에 반입 양도함으로써 협정 문구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협정 정신을 위반했다. 휴전 후 1년 사이에 사이공 정부 군대는 군사행동으로 그 지배 지역을 20퍼센트나 확대했다. 그 결과 약 100만 이상의 주민이 사이공 정부의 깃발 아래 들어갔다. 그뿐 아니라 협정을 성실히 이행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티우 대통령은(거기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협정이 여러 조항으로 규정한 남베트남에서의 공개적 정치투쟁에 관한 합의사항을 있는 힘을 다해서 저지했다(「붕괴의 사후진단」, 『타임』지, 1975.4.14).
휴전 성립 후 50일 사이에만 사이공 정부군 사망 5,000명 부상 2만 5,000명, 베트콩 사살 2만 명, 부상 수만 명이라는 전투가 계속되었다(사이공 정부 발표, 1973.5.17). 이와 같은 혼란이 계속된 첫 1년 동안에 20퍼센트의 점령 지역을 확대하는 데 성공한 사이공 정부 측은 74년 후반부터는 민족해방전선군의 반격으로 확장한 지역을 잃었을 뿐 아니라 군사 형세는 거꾸로 사이공 정부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2) 남베트남의 북베트남 군대
사이공 정부군의 치욕스러운 붕괴나 베트남 사태의 종말에 관해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월맹군의 불법적 공격’설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의 경우 하나의 고정적 이론이 되어 있다. 휴전 발효 이후에 남베트남에 ‘월맹군’이 있다는 것이 협정 위반이라는 해석에 입각해 있다.
협정의 제2장 ‘전쟁행위의 정지 및 군대의 철수’조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3조: 모든 교전 당사자는 휴전을 유지하고 항구적이고도 안정된 평화를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 휴전이 발효되는 즉시, A. 미국군대, 미국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동맹하고 있는 모든 외국의 군대 및 베트남공화국 군대는 철수계획의 실시기간 중 현상을 유지한다. B. 남베트남의 두 당사자의 군대는 현상을 유지한다. C. 남베트남의 양 당사자의 모든 병종(兵種)의 정규군과 부정규군 부대는 상호간 모든 공격행위를 정지한다.
제5조: 본 협정 조인 후 60일 이내에 기술군사요원 및 평정 계획에 관련한 군사요원을 포함해,미국 및 제3조 A항에서 규정한 그밖의 외국의 군대ㆍ군사고문ㆍ군사요원, 그리고 무기ㆍ탄약ㆍ군사자재는 남베트남에서 전면 철수한다. 또 이 기간 중에 상기 제국으로부터의 모든 민병조직에 대한 고문(顧問)요원과 경찰요원도 철수한다.
제6조: 제3조 A항에서 규정한 미국과 동맹국은 본 협정조인 날부터 60일 이내에 남베트남 군사기지의 철폐를 완료한다.
이상이 파리휴전협정의 남베트남에서의 ‘외국군, 그 유사ㆍ준군사적 요원, 무기ㆍ물자ㆍ기지 등’의 철수ㆍ철폐에 관한 조항이다. 그밖의 사항을 규정한 관련 조항에서도 남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할 군대 속에 북베트남(월맹) 군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철수해야할 군대는 제3조 A항에서 규정한 ‘미군과 그와 동맹한 제외국의 군대’로 되어 있다.
휴전 당시 남베트남에는 약 14만 5,000명의 북베트남 군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미국 측 발표). 남베트남에서의 북베트남 군대의 존재 여부와 법적 또는 조약상 지위는 베트남전쟁이 미국 전쟁화한 이후부터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주장되어왔다. 북베트남군 정규 부대의 존재는 확인되었고, 사이공 정부와 미국은 이것이 주권국가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에 대한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침략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은 이 ‘침략’을 물리치고 ‘침략군’을 북베트남으로 추방 또는 철수시키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그 침략과 침략군 격퇴 전쟁을 끝맺는 휴전협정에는 반드시 북베트남으로부터의 ‘침략군대’에 대한 규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조약상 상식이 아닌가? 파리휴전협정은 북베트남 군대의 남베트남 잔류를 ‘적극적 권리’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일언반구의 언급 없이 전(全) 휴전구조로 짬으로써 소극적으로 그 잔류를 묵인한 것이다. 그 토대 위에 휴전 후의 모든 해결방안의 구조에 대해 조인 당사자들이 합의를 본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파리협정은 제네바협정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베트남(남ㆍ북)의 문제는 승리한(프랑스에 대해서) 베트남 인민의 민족자결권에 의한다는 원칙이다. 둘째는, 북베트남 군대가 남베트남에 들어온 것은 제네바협정을 위반해서 미국이 정치 군사적으로 개입한 ‘뒤’라는 주장을 미국이 오랜 거부 끝에 묵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셋째의 논리는 다소 복잡하다. 1954년 제네바휴전협정이 규정한 ‘휴전선’의 법적 성격의 해석문제다. 북위 17도선을 넘는 것이 한 국가와 국가간의 ‘국경’을 침범하는 것과 같은 침략행위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로 연결된다. 이 문제야말로 베트남의 ‘침략’여부를 가름하는 핵심적 문제가 되었다. 미국과 남베트남 측의 이론ㆍ주장ㆍ입장은 북위 17도선이 휴전선이 아니라 국경이라는 것을 토대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남베트남의 학자ㆍ전문가ㆍ정치인들을 제외한 일반적인 견해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 미국의 전문가ㆍ학자ㆍ정치인들도 나중에는 미국 및 남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반대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즉 베트남전쟁은 ‘침략전’이 아니라 ‘내란’이라는 해석이 대세가 된 것이다.
어떻든, 북베트남의 주장과 이론은 이러했다.
제네바휴전협정과 최종 선언 제6항은 북위 17도선이 “일시적으로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민족군대를 격리ㆍ재집결시키기 위해서 설치된 일시적 군사분계선이지, 여하한 경우에도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선으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군에 승리한 베트남인 군대가 그와 같은 성격의 선 이북으로 이동한 것은 휴전 조인 2년 후인 1956년 7월에 협정이 결정한 남북통일 총선거를 준비하기까지라는 조건부였다. 그 총선거가 어느 쪽에 의해서 거부되었건 그것을 전제로 한 일시적 군사분계선의 설치 근거는 조약상ㆍ사실상 소멸되었다는 것이 북베트남의 시종일관한 주장이었다. 따라서베트남의 전체 상황은 1954년 7월 20일 이전의상태로 환원되며,북으로 이동한 군대의 협정 체결 전 상태로의 복귀는 당연한 권리이며 이것을 막을 조약상 구속력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4년간의 열띤 휴전협상과 북베트남이 미국의 전면적인 폭격으로 ‘석기시대’화해버리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가장 큰 원칙이다.
결국,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별개의 정치적 자결단위로 인정하는 양보(궁극적으로는 하나지만, 그러나 남베트남의 3개 세력이 그 정치적 장래를 결정한다는 조건부로)를 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은 북베트남 군대의 남베트남 잔류 권리를 인정하는 양보를 했다는 것이 파리휴전협정의 독특하고도 복잡한 합의인 것이다. 이 30년에 걸친 배경과 1954년 제네바휴전협정의 정신, 그리고 미국이 그것을 대체로 그대로 승인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파리휴전협정의 전체적 정신과 원칙이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협정 위반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티우 대통령과 남베트남 정부는 휴전협정의 정치 조항과 북베트남군의 잔류를 승인한 휴전협정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었다. 계약이 충실히 이행될 때 이롭다고 인식하는 당사자와 불리하다고 인식하는 당사자 중 어느 쪽이 계약의 성실한 이행을 요구하고 어느 쪽이 그 이행을 거부할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다. 티우 대통령과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이해관계만이 압도적으로 지배한 파리휴전협정에서 불리한 계약에 도장을 찍은 셈이다. 더욱이 54년 이후 30년간 남베트남에서 유일 정부를 자처해온 입장에서 보면 그 불리한 계약의 이행에 성의를 다하기를 요구하기란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협정’의 위반 여부 차원에서 문제가 논의될 때에는 불리한 계약도 계약이라는 일반적 원칙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미국의 이해 계산을 앞세운 미국 정부의 조인 압력이 사이공 정부의 협정 이행의무의 면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의문시되었다).
(3) 병력ㆍ무기 증강
1975년 2월 사이공 정부군의 최북부 지방 철수로 시작된 대패주(大敗走)의 뒤에는 북베트남군 약 22만이 있다고 미국 정부는 비난했다. 휴전 당시의 14만 5,000보다 7만 5,000이 증가된 병력이다.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군은 합계 200~400대의 여러 가지로 추산되는 탱크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그밖에 각종 무기도 증강된 것이 확실하다. 휴전협정의 무기ㆍ장비에 관한 조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7조: 휴전 실시 이후 본협정 제9조 B(정치적 제합의) 및 제14조(남베트남 화해정부 수립 후의 외국의 군사ㆍ경제원조 수락에 관한 규정)에서 규정한 정부의 구성까지의 기간 중, 두 개의 남베트남 당사자는 부대ㆍ군사고문ㆍ기술군사요원을 포함하는 군사적 요원과 장비ㆍ탄약ㆍ군사물자를 남베트남에 도입하지 않는다.
남베트남의 두 당사자는 두 개의 남베트남 당사자의 합동군 사위원회 및 국제적 관리ㆍ감시위원회의 감시하에, 휴전 후에 파괴ㆍ손상ㆍ소모 또는 폐품화한 장비ㆍ탄약ㆍ전쟁물자를 1대 1 기준으로 같은 특징과 성능을 가진 것으로 정기적으로 대체한다.
북베트남과 해방전선 측의 상당한 양의 무기가 사이공 정부군에게서 노획 또는 부패한 사이공군의 장병들이 팔아넘긴 무기ㆍ장비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이 내린 무기의 정보 평가를 토대로 할 때 신종ㆍ다량의 장비가 휴전 후에 들어온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휴전협정 위반은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하다.
그러면 남베트남 정부와 미국 측은 어떤가?
휴전에 앞서는 전쟁 마지막 해인 1972년 말 현재 사이공 정부군의 병력과 무기는 다음과 같다.
육군: 정규군 41만, 지방군 28만, 국민군 24만, 국민자위대 140만, 야전경찰군 3만 5,000(계 236만 5,000). 탱크(중ㆍ경형 합계) 240대, 장갑차 250대, 기타형 105대.
해군: 병력 3만 9,000, 호위구축함 7척, 고속초계정 70척 및 하천초계정(100톤 미만) 500척,
공군: 병력 4만 1,000, 전투용 비행기 275대, 각종 수송기 약 510대,헬리콥터 480대,연습기 465대(영국 국제전략연구소 연감,1972~73년의군사력 비교,남베트남 부분).
1972년 5월에 이미 레어드 미국방장관은 사이공 정부의 군사력, 특히 공군력은 미ㆍ소ㆍ중 3대국 다음가는 세계 제4위라고 자랑한 바 있다. 그런데 휴전 직전에 미국은 비행기, 탱크 등 기본 무기를 단시일 내에 급속히 증강시켰다. 이것은『타임』지가 지적했듯이 문구상으로는 협정 위반이 아니지만 협정 정신의 위반이다. 소련ㆍ중국도 그랬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문제는 휴전 이후다. 미국 군대의 철수에 앞서 대부분의 중(重) 무기는 사이공 정부군에 이양되었다. 그 사실은 미국 정부의 발표나 보도로 확인되었지만 숫자는 밝혀진 바 없다. 임시혁명정부 대표는 그 수를 탱크 및 장갑차 600대,야포 600문,함정 200척,포탄 50만 톤이라고 주장했다(4자 군사합동회담에 대한 항의보고, 1973.2.1). 이 항의에서 혁명정부 대표는 “휴전 이후 40일 동안 사이공 정부 공군의 대(對) 지상공격 400회”라고 보고하고, 공군기의 폭격하에 지상 점령지의 잠식과 대규모 공격전을 계속했다고 주장했다.
전쟁요원의 잔류 또는 증강문제도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미국과 남베트남 동맹국의 각종 군사적 요원(협정 제2장 제3조 A항 규정)은 협정 조인 후 60일 내에 베트남에서 완전ㆍ전면 철수하게 되어 있다. 이 조항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베트남에는 정식으로 발표된 대사관 관계 직원 및 그 가족, 순수한 상인ㆍ민간인 기술자 등과 관광객이 있을 뿐이다. 이 조항은 남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군사관계의 ‘일절ㆍ전면’정지ㆍ철수ㆍ철폐이므로 민간인의 자격으로도 잔류하거나 증강될 수 없게 되어 있다.
1975년 4월 28일 미국이 미국인의 긴급 철수작전을 완료했다는 발표에서 미국인은 6,000명이라고 밝혔다. 실제로는 몇 명인지 알 수 없으며, 현지에서 쏟아져 나온 미국 보도기관 특파원들의 기사들을 읽어보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인 것 같다. 이에 관해서 임시혁명정부 대표는 그 규정된 60일이 지나는 날, 미국이 ‘위장 군사요원’을 다량 투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들이 합동회의에 제출한 그 민간인을 가장한 수는 다음과 같다.
① 28성(省) 1시(市)(사이공)에 새로 영사관 부속 ‘성(省) 팀’(team)을 신설ㆍ배치. 평정계획 활동을 인계ㆍ수행.
② 사이공 주재 대사관 무관(武官) 사무소(DAO)를 확장. 육해공군 무관의 증강 외에 병참 관계 국방성 요원 1,200명 새로 부임.
③ 민간인 기술자의 민간사업계약을 가장한 병기ㆍ통신 보수 업무요원 5,000~6,000명 배치.
④ 대사관 공보문화국 및 AID 관계 요원 1,300명.
⑤ 그밖에 각종 명목 요원.
합계 8,500명
임시혁명정부 측은 휴전 2년이 가까워지는 1975년 초에는 미국의 위장 군사요원의 수가 1만 9,000명이 되었다고 여러 차례 비난했다. 미국 국방장관 레어드가 이미 휴전 10개월 전 미국의 외교위원회 증언에서 남베트남군, 특히 공군이 세계 제4위의 막강한 군사력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베트남전쟁에서 사용하던 미국 군대의 중무기ㆍ최신장비가 휴전 바로 전후에 대량 양도된 사실을 고려할 때, 그 유지ㆍ보수ㆍ훈련을 위한 상당한 기술요원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도 협정 조문상 위반 문제가 논란이 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협정 위반의 책임을 밝히기란 어려운 것이고, 더욱이 어느 한쪽만의 책임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 혼란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상호불신-상호위반-위반의 순환적 확대-불신의 심화-공공연한 위반-전투의 계속-종말이라는 과정이 휴전 이후 2년간의 현실일 것이다.
베트남전쟁의 성격
1975년 5월 1일, 35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은 끝났다. 남베트남의 정권도 갈리고 사회의 제도도 달라졌다. 베트남인 자신이나 외부의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각기의 입장ㆍ이해관계에 따라 남베트남전쟁을 해석하는 각도도 다를 것이고, 그 긴 전쟁 역사와 그 종말의 형태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도 극에서 극까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나의 극은 그 종말을 ‘비극’으로 표현하는 심정이고, 다른 극은 ‘환희’로 맞는 심정이다. 어느 반응이건 그 긴 세월의 극한적인 인간적 고통을 겪지 않은 방관자의 태도일 것만 같다. 대부분의 베트남인은 비극과 환희의 중간에서 이 날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베트남전쟁은 압도적으로 강대한 군사력과 보잘것없이 약한 인간집단의 싸움이었다. 세계 제1의 군사ㆍ경제ㆍ과학의 총력을 동원한 국가와 그 지원하에 세계 제4위의 군사력을 가진 현지 집단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전쟁의 최초의 예로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패배에서의 교훈은 단순히 ‘군사력’의강약이나 ‘, 군사적방위태세’의우열측면에서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외국에서의 반응은 거의 예외없이 그런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교훈을 배격하고 있다. 베트남 사태는 이 글 제1,2부에서 상세히 살펴보았듯이 군대ㆍ군사력ㆍ군사적 방위 태세ㆍ양분법적 이데올로기ㆍ전쟁철학 외의 요인과 요소에서 더 많은 교훈을 준다.
그런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에서 하나의 역사적 파탄을 겪었다. 1949년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사태의 어쩌면 그렇게도 완벽한 재현인가? 중국대륙 사태의 종말을 ‘비극’이라고 본 사람들은 그 10년 뒤 다시 같은 함정에 빠지고, 25년 뒤에는 똑같은 비극의 연출로 아시아 대륙의 지도의 색이 달라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원인을 무시한 탓이다. 수많은 요소의 동적 과정(dynamic process)에 무감각했던 탓이다. 그러면 베트남 사태의 당사자들은 어떻게 보았던가?
베트남의 사태는 도시가 농촌을, 도시적 주민이 농촌 전체를 적으로 몰고 싸우는 전쟁이다. 이런 성격의 전쟁에서는 이기기 위한 유일한 전술은 오직 압도적인 물질적 중량으로 농민을 분쇄하는 것이다.
농업작물의 파괴, 고의적이고 계획적인피난민만들기, 암살ㆍ고문의 피닉스(phoenix) 작전, 농촌ㆍ농가ㆍ농사시설의 전면적 파괴, 주민에 대한 공포적 강압…… 이것밖에 없다(로버트 코머 안(案), 1972년 5월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베트남 사태의 원인ㆍ과정ㆍ교훈에 관한 청문회’의사록, p.81).”
로버트 코머는 미국 국무성 고위관리로 베트남전쟁의 수행 방안을 연구 건의하는 작업반의 책임자였다.
역대의 남베트남 정권은 그 어느 것이건 자발적인 민중의 가치를 못 받고 대중적 정치 토대가 없는 권력이었다. 사이공 정권은 과거에는 프랑스 식민지체제의 계승자였다. 미국의 개입 이후에는 시급히 필요한 사회개혁은 모두 민족해방전선이 실시했고, 베트남 사회에서 그 사회개혁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소위 ‘베트남 정부’(government of Vietnam)는 민족해방전선과 도저히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 사실은 사이공 정부 지도자들 자신이 자인하고 있다.
티우, 키, 키엠 등 남베트남군 최고의 사령관급은 모조리 자기 민족ㆍ국가의 해방ㆍ독립에 반대해서 식민지국가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싸운 사람이다(노엄 촘스키 교수 증언, 같은 의사록, p.82).
레어드 국방장관(미국)은 남베트남 정부가 전투기 1,000대, 대형병력 수송용 헬리콥터 500대를 비롯해서 무제한의 탄약, 완벽한 제공권을 가진 세계 제4위의 군사력이라고 증언했다.
인구비율로 치면 세계에서 최강ㆍ최대의 육군ㆍ해군ㆍ공군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런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서도 사이공 정부가 견뎌내질 못한다면 그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문제는 군사력 요소가 아니라 딴 곳에 있다. 문제는 남베트남의 지도자들과 지도 역량의 성격 및 남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이다(Leslie Gelb 증언, 같은 의사록, p.42).
레슬리 겔브는 1960년대에 수년간 남베트남에서 사이공 정부를 도와 평정계획의 현지 총책임자로 일한 미국 국무성의 고위관리다.
이상은 남베트남의 사회ㆍ정부의 내부 실정을 진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의 한 주체를 도운 미국의 정책은 어떻게 진단되고 있는가? 사태의 결말로 입증된 논리와 결과로 부정된 논리가 있다. 원인ㆍ과정ㆍ결과를 정확히 예견했던 쪽의 논리에 당연히 설득력이 있다.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서 슐레징거의 논리
① 반공군사적 집단안보의 두령 의식
② 외국에 대한 미국의 문명적 우월 의식과 미국식 민주주의 화의 사명감
③ 절대적 반공주의
④ 민족해방ㆍ독립투쟁을 공산주의와 동일시하고, 그와 같은 투쟁을 일률적으로 소련ㆍ중공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본 잘못
⑤ 미국의 모든 제도ㆍ기구(행정부, 군, CIA, 민간기구……)의 냉전포교(冷戰布敎) 기구화
⑥ 경제적 제국주의(이 항목에 관해서는 시인ㆍ부인 반반의 증언)
슐레징거(뉴욕시립대학 교수)는 케네디, 존슨 두 대통령의 안보 특별고문이었고, 베트남 사태의 군사적 측면에 늘 회의적이었다.
레슬리 겔브의 논리
① 강대한 힘(국력)에의 도취ㆍ교만
② 한 가지밖에 못 보는 관료주의적 정치
③ 미국 국내정치의 요소와 영향
④ 제국주의
⑤ 현실 사태의 각 단계에 실효적으로 대응한다고 생각하면서 줄줄이 끌려 들어간 프래그머티즘
⑥ 강대국 간 ‘힘의 균형’위주 정책
⑦ 정부 각층 지도자급 사람들의 판단력 미숙과 부주의
⑧ 그러나 가장 큰 요소는 ‘공산주의를 저지한다는 도미노이론’(같은 곳)
휴전협정 위반의 각도에서는 쌍방의 책임의 질과 양을 거의 교량하기 어려울 만큼 상호적임을 보았다. 군사력과 군사적 기구의 측면에서는, 한쪽은 한 대의 전투기도 없고 한쪽은 세계 제4위의 공군력으로 완벽한 제공권을 누렸다는 사실 한 가지로도 결론은 분명하다. 더욱이 군대(군인)식 사고방식을 중요시한다면 그토록 막강한 사이공 정부군이 총 한 방 제대로 쏘지도 않고 물거품처럼 완전 붕괴된 과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
결국 남베트남 사태의 종말은 남베트남 사회에 내재하는 특수성ㆍ원인, 그 작용, 작용에 대한 반응형식, 그리고 30여 년에 걸친 긴 과정의 인과관계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베트남인의 민족주의
베트남인의 민족의식에는 베트남전쟁의 어느 편에 서는 입장이건 예외없이 감탄한다. 천 년에 걸친 중국과의 관계에서 베트남은 결코 예속된 일이 없었다. 베트남인의 높은 의식과 자질은 인도차이나의 다른 민족의 두려움이 되어왔다.
프랑스 식민정책은 이 강인한 민족의식을 거세하기 위해 베트남을 북부(통킹),중부(안남),남부(交趾支那)로분할통치하는 방법을 취해왔다. 이것은 같은 제국주의ㆍ식민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의 아시아 식민지 운영방식과 대조적이다.
1858년의 프랑스-베트남전쟁, 1862년의 중부 베트남의 식민지화를 기점으로 한 프랑스에 의한 100년의 분열 지배정책은 이세 지역의 각각에 어느 정도의 특수성을 남긴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식민ㆍ외세가 조성한 지방적 차이점이나 특수성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차이성을 과장하는 견지는 바로 베트남 인민의 분열 상태의 지속에서 이익을 얻는 외부세력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식민지 예속화와 그 가장 악랄한 지배 방법으로서의 분열통치는 오히려 국가통치의 제약적 요소이기보다는 민족적 통합과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에네르기를 자극했다.
제2차 대전 후 전(前)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의 전후처리 구상에서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역시 분할통치를 추진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중국은 일정한 신탁통치 기간 후의 통일ㆍ독립 베트남을 구상했다(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시 구상). 한 민족의 내부적ㆍ역사적(일시적) 차이성이나 특수성을 강조하는 논리는 언제 어디서나 민족적 통합을 반대하는 동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민족 외부에서의 그런 논리는 그 민족의 분열ㆍ약화ㆍ예속적 상태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민족 내부에서의 그런 논리는 분열ㆍ대립의 항구화에서 이익을 얻는 자의 궤변이기 쉽다. 베트남전쟁의 긴 역사는 이것을 웅변으로 확인해주었다.
외국의 긴 지배를 겪은 베트남인의 민족주의를 가장 잘 이해한 것은 같은 동양인이고 같은 민족적 시련을 겪은 장개석인 듯하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탈린과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를 배제한 베트남 신탁통치안을 성안시켰다. 이 안은 아시아에서의 전쟁 진전 상황에 따라 수정되었다. 대(對)일본 전쟁이가열해진 1943년경에는 대일본 전쟁에서 중국의 역할 확대와 중국전선의 유지를 위해 인도차이나 ‘전역’(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를 합한)을 중국에 ‘증여’하는 안을 장개석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이 제의를 받은 장개석은 “베트남인은 결코 중국에 동화되지 않을 민족”이라고 답변하면서 루스벨트안을 사양했다(Henry Wallace, Toword World Peace, p.97).
1954년 제네바협정이 규정한 2년 후의 총선거가 예정대로 실시 되었다면 호치민이 80퍼센트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판단은 호치민의 개인적 위대성도 있었겠지만, 그가 민족통합ㆍ해방ㆍ독립의 민족적 결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사회주의ㆍ공산주의…… 그밖에 미국이 붙이기를 즐겨한 정치적 이념의 어떤 것이기에 앞서 베트남 인민의 민족주의의 권화(權化)였다. 남베트남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권위는 전쟁 중에도 높이 평가되었다. 적어도 민중의 차원에서 베트남 사태의 본질은 흔히 외부에서 말하기 즐겨하듯 현대 이데올로기의 투쟁이기보다는 민족의 해방ㆍ재통합을 위한 투쟁의 계속이라는 면이 기조였던것 같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파탄을 결과했다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건전한 의식을 가진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남베트남 정부의 황제,역대 대통령, 최고 지도자들은 이것을 국제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자본주의)의 투쟁으로 해석했다. 그들이 외국의 총애와 지원을 더 받으면 받을수록, 외부의 힘에 더 깊이 의존하면 할수록 대중의 눈에는 베트남 민족주의에 대한 적대적 존재로 비치게 되었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베트남의 역사 및 정치 문화적 환경에서는 거역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러면 남베트남의 소위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대중과는 어떤 입장에 섰던 것인가?
민족적 지도역량
사이공 정권이 1954년 이후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수세 또는 열세에 놓여온 이유를 ‘지도자의 결핍’에서 찾는 견해가 많다. 대표적인 하나의 예를 제시한다.
월남의 국가 운영에서 또 하나의 곤란은 지도자의 결핍이다. 프랑스에 의해서,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디엠 정부에 의해서 지도층이 거의 전멸되었다. 그리하여 정권의 지도자를 충원할 원천지는 군부가 유일한 형편이다. 이러한 지도자 또는 훈련된 관리의 부족은 정부 운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M. Beacher,“Political Instability in the New States of Asia”, Comparative Politics,『한국정치학회보』,제6집, 156쪽에서 부분 인용).
이 견해를 인용하면서 남베트남(사이공 정권)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논술한 입장(민병천,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은 그러나 그 과정의 어려움은 남베트남의 또 하나의 지도역량인 민족해방전선(또는 임시혁명정부)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작용한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인식 못 하고 있다. 소위 엘리트군의 형성이 그와 같은 요인으로 해서 형성되기 어려웠던 것은 오히려 해방전선쪽임은 모든 사실이 증명한다. 그러면 어째서 같은 조건환경에서 한쪽은 지도역량이 양성 강화되고 다른 한쪽은 계속 약화 쇠퇴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 두 개의 권력(정치적 집단)의 정치적 토대의 성격, 최고 지도층의 성분ㆍ경력ㆍ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종교적 성분
인구 1,881만(1972)의 남베트남의 약 80퍼센트가 불교도이고, 11퍼센트가 가톨릭교다. 가톨릭 가운데는 1954년 북베트남에서 내려온 가톨릭 신자 약 30만(전체 약 60~80만 중)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인구의 불과 11퍼센트밖에안 되는 가톨릭이 남베트남의 정부ㆍ군ㆍ관료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인구대비에서 극단적인 ‘과도권력집중’현상을 이루었다(Bernard Fall). 외래 종교인 가톨릭이 서양(非民族) 지향적이었음에 반해 불교도는 토착적이고 민족주의적이었다. 북베트남에서 도피해온 배경이 그 반공적 성격을 극단화했다. 그래서 사이공 군대 장교단의 50퍼센트 이상이 이 인구비 1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가톨릭이었다. 개중에는 최고 지도자 가운데 극소수의 불교도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국가의 절대적 권력을 소수의 가톨릭이 독점하게 되었다. 가톨릭은 교육과 사회적 기회를 장악했기 때문에 모든 국가 운영의 엘리트를 형성했고 가톨릭 정권이 하는 일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불교는 그 자체적 성격 때문에도 그랬지만 가톨릭 정권의 강력한 작용으로 인해서 바로 반(反)가톨릭 정권, 즉 반사이공 정권적 성향을 짙게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서로 비교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가톨릭 불교도
도시세력 중심 농촌세력의 대중성
부유층ㆍ지식인 이익 옹호 피수탈대중 이익 옹호
서구적 외부 지향 민족적 내부 지향
외세 의존 현대화 우선 토착ㆍ민족적 통합 우선
철저한 반공주의 관념보다 현실 해결
소극적 민족해방ㆍ통일 의욕 전통적인반식민투쟁의 토대
현상유지 노선 사회개혁 촉구
사이공 정부와 민족해방전선의 정치적 토대 및 성격은 이런 것이었다. 국민 11퍼센트와 80퍼센트의 대결이라는 성격의 일면을 말해준다.
최고 지도자의 경력
대중적 기반이 지도자를 규정하는 일면과 함께 지도자의 성분이 투쟁의 성격과 지향을 규정했다.
의장(풀브라이트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퍼시 상원의원이 방금 한 질문에 나도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남베트남 정부에 관해서인데, 키 장군(당시 부통령)이 1954년까지 베트남인의 대(對)프랑스 항전 시기에 프랑스 공군의 일원이었나요? 두 분 중에 아는 분이 있습니까?
겔브(증인)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톰슨(증인) 기억이 없습니다.
의장 그러면 키 장군은 어디서 비행기 타는 기술을 배웠나요? 우리 미국이 그에게 비행술을 가르쳤나요, 아니면 프랑스군이 가르쳤나요?
겔브 확실치는 않지만 프랑스군에서 배웠다고 믿습니다.
의장 티우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키와 티우 두 사람은 각기 프랑스 공군과 프랑스 육군의 장교가 아니었나요?
겔브 제가 판단하는 한 그렇습니다.
의장 얼마 전까지의 디엠 대통령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정부의 한 성장(省長)이 아니었던가요? 아십니까?
겔브 예, 그랬습니다.
의장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호치민은 이미 베르사유 회의 때부터 베트남 민족의 독립운동을 했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서 베르사유 회의에서 각국 대표에게 호소하고 다니며 민족독립에 몸바쳐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열강은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겔브 그렇습니다.
톰슨 그렇습니다.
(베트남 사태의 원인ㆍ과정ㆍ교훈에 관한 증문회(證問會)-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1972.5 의사록, pp.49~50)
사이공 정권의 역대 최고 지도자는 초기의 고 딘 디엠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군인이었다. 남베트남의 사태가 복잡해질수록 군대(군인)식 사고방식으로는 해결의 길을 찾기 어려워졌다. 대중을 세력기반으로 하여 사회혁명과 통일의 이념을 내걸어 정치투쟁을 전개하는 민족해방전선에 대해서 무력과 탄압으로 대응하는 ‘반응 양식’은 날이 갈수록 대중을 적으로 돌리는 결과가 되었다. 더욱이 그들이 거의 예외없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자기 민족을 억압하는 프랑스 식민군대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식민세력을 도운 프랑스군 현지인 장교였다는 경력은 그들의 의식 구조를 결정한 듯하다.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정체 모를 사람들’(facelessness)로 알려져 있었다. 1975년 5월 초순, 사이공에서 임시혁명정부의 새로운 각료 명단이 부분적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이미 1965년 프랑스의 트론 퓌(Tron Phu) 출판사에서 발행한 『남베트남 해방운동의 인물들』(Personalités du Mouvement de Libération du Sud Vietnam)이 밝혀낸 39명의 민족해방전선 지도자들과 일치한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남베트남 출신이고 각종 직업의 혼합을 이루고 있다. 여성까지도 저항전쟁 또는 독립투쟁의 경력을 가진 점에서 남성과 다름없다. 거의가 투쟁 과정에서 투옥의 경험이 있으며 지식, 교육, 출신 성분 등에서도 다양하다. 사이공 정부 지도자들에 비해서 어떤 하나의 소수집단을 대표하지 않는 대중적 배경을 갖고 있다. 특기할 것은, 직업적 군인은 몇 명 없고 대부분이 학자, 변호사, 건축가, 의사, 간호원, 소수민족, 배우, 교사, 문인, 학생으로서 항불(抗佛)ㆍ독립전쟁에 참가한 ‘아마추어 독립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다.(트론 퓌 연감의『공동연감』(共同年鑑), 1969판 베트남 특집 pp.84~85).
민족해방전선의 ‘통일전선’전략의 성공은 그들의 세력기반이 남베트남 사회의 모든 상하ㆍ좌우의 민중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와 같은 대중적 정치토대 없이 ‘전략’만으로는 성공이 가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베트남에 형성되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두 개의 세력에 관해서는 해리만(존슨 대통령의 파리휴전협상 미국 수석대표)의 예언이 너무도 적중했다는 감이 있다.
남베트남에서의 투쟁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나 다름없다. 한쪽은 자기 민족을 억압한 식민지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고 또 한쪽은 긴 독립ㆍ반식민지 투쟁에 몸바쳐 싸운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다. 어느 쪽 지도자들이 베트남인을 더 사랑하는가는 분명한 사실이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쪽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1969.1.20 협상 수석대표직을 사임하고 나서의 기자회견).
외부원조의 기능과 역기능
미국의 남베트남 정부 원조 부족이 패배의 주원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사이공 정부에 대한 지도자들의 입장이 그렇고, 미국 대통령과 군부 일부의 주장도 그렇다.
남베트남의 반공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쓴 미국의 군사비는 약 1,500억 달러로 알려졌다. 이것은 군사비만이다.
경제원조는 다음과 같다.
1950~54년(프랑스-인도차이나전쟁 지원) 27억 달러
1954~65년(제네바휴전 이후) 20억 달러
1966~74년(미국 전쟁화한 이후) 50억 달러
합계 97억 달러
(앞의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의사록과 AID 연간보고 종합)
이밖에 민간단체 원조, 미국 군인 및 가족ㆍ현지 기관이 남베트남 현지에서 소비한 막대한 금액과 각종 미분류 사용 금액이 있다. 그 액수는 어느 기록에서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으나 이 항목의 경제원조적 효과는 약 2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어떻든 미국만의 경제원조도 100억 달러를 넘는다. 한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의 경제물자 지원은 전적으로 도외시하고서도 그렇다.
이것을 장개석 국민당 정권에 쏟아부은 군사원조ㆍ경제원조의 합계와 비교해보자. 미국은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개시하여 49년 사실상 장개석 정권의 운명이 결정나서 미국이 철수할 때까지 12년간 경제ㆍ군사 목적의 무상공여와 차관 등 각종 지원 합계 35억 2,300만 달러, 주로 현물 또는 군사비 대충자금으로 사용된 10억 7,810만 달러, 합계 46억 110만 달러를 주었다. 각종 잡항을 합치면 50억 달러로 추산된다(미국 정부발행, 『중국백서』원조부).
중국의 광대한 땅을 유지하기 위해서 쓴 약 50억 달러(그것도 군사ㆍ경제 합계)에 비해서 1,500억 달러의 직접 군사비를 제외하고도 경제적 지원만을 위해 100억 달러가 남베트남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처럼 막대한 원조가 전쟁수행 능력의 일시적 효과라는 적극적 기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반면 외국 경제의 압도적인 작용은 오히려 장기적인 안목에서 남베트남의 사회ㆍ경제ㆍ문화적 구조와 남베트남인의 도의적ㆍ정신적 바탕에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국가의 전체 기능이 외국원조(따라서 외세) 의존적이 된 것이다. 전쟁경제는 극소수의 권력층에 부를 집중시킨 반면 대중의 복지는 거의 무시되었다. 도시 위주의 경제구조가 형성되고, 따라서 전쟁경기에 접하는 부유권력층의 사치풍조는 불교ㆍ가톨릭적인 본래의 검소한 생활양식을 파괴했다. 무한한 듯 보이는 물질의 충격으로 부패ㆍ타락은 남베트남 사회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장 심한 것이 사이공 정부 군대였다. 전통적으로 남베트남 사회의 조직적 토대였던 지방의 자치적 생활방식은 깨어지고 미국식 개인주의가 생존의 신조가 되었다. 사이공 정부 군대의 장교와 사병이 군수물자와 무기를 민족해방전선에 팔아넘기는 데서 수입을 잡는 사태가 일반화했다. 무기를 적재한 배, 트럭의 대열이 송두리째 해방전선으로 넘어가는 일에 관해서는 외국의 특파원도 나중에는 관심이 없을 만큼 생활화했다.
이 모든, 그리고 그밖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상은 한마디로 베트남 민족의 인간적ㆍ사회적 타락을 초래했다. 그럴수록 그것은 긴 항불ㆍ독립ㆍ통일 투쟁의 전통을 계승하는 민족해방전선에서는 세력확장의 기회가 되었다.
사이공 정권과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라고 단정한 민족해방전선에게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장기적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의 속성은 바로 그 반대 방향을 치달은 것 같다. 그 책임과 과오는 미국도 분담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그런대로 베트남 인민의 전통을 존중했다. 프랑스에 비해서 미국은 베트남 민족의 전통을 무시했다. 프랑스는 미국보다 가난했다. 미국의 경제력이 프랑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강대할수록 그 물량적 중압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눌려 베트남 사회의 고유 윤리는 붕괴해버렸다. 미국인은 동양인 특히 그들의 문화와 이질적인 베트남의 불교적 생활양식ㆍ가치관을 멸시했다. 베트남의 불교도에게는 독재ㆍ탄압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미국이 베트남의 파괴자로 비친 것이다(트리 쾅 僧,War, Crimes and the American Conscience, Erwin Knoll 엮음. pp.133~134).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에 대해서 미국과 사이공 정부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제도와 민중
서로 경쟁하는 상이한 사회제도와 이데올로기가 투쟁할 때, 후진적 농업국가에서 승부를 판가름하는 요소는 가난한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지지임을 남베트남은 실증했다. 1949년 중국의 결과가 그에 앞서는 좋은 예다.
남베트남의 농업(농촌)인구는 전체 인구의 80퍼센트면서 국가 수입 면에서는 30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공업이란 초보적인 상태여서 전체 제조공업의 고용인구는 12만(사이공 6만, 전 지방 6만)이다. 이밖에 5명 미만 고용의 가내공업 인구가 16만 8,000명이었다(「베트남 전후개발」-미월(美越) 합동개발조사반 보고).
몇 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만 보아도 남베트남의 제도가 특권ㆍ권력층 지향이지 대중ㆍ농민복지 지향이 아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 딘 디엠 대통령 시대인 1956년 농지 소유 100헥타르를 상한으로 하는 농지개혁(분배)법이 성립했다. 이것은 디엠 대통령의 민족주의적 정책의 일면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동기는 남북 총선거를 거부한 후 남베트남에서의 대중적 정치 기반을 굳히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의 사회주의적 토지분배 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특히 전(前) 식민권력 프랑스의 정부ㆍ프랑스인 지주ㆍ공인ㆍ개인의 소유였던 농지 41만 5,000헥타르가 베트남공화국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구적산’(舊敵産)인 이 농지 가운데 1970년까지 농민에게 분배된 것은 약 7만 헥타르에 불과했고, 34만 5,000헥타르는 1970년 3월까지 분배되지 않았다. 그러면 그 토지는 어떤 상태로 있었는가?
최근까지 베트남 정부의 고문으로 현지에서 근무한 미국 관리의 보고서에 의하면 대부분의 미분배 토지는 ‘정부 관리’하에 있었고, 정부 고위 권력자들이 최고액의 입찰자에게 그 땅을 도지(賭地)주고 있다. 지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은 토지분배의 이상적인 시기는 아니다. ……그러나 수백만의 농토 없는 빈농은 사이공 군대가 농촌 지방의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면 모든 것을 다시 빼앗기곤 했다. (베트콩에 의해서 분배된 농토는) 정부군이 그 지역을 점령하면 다시 정부군에 의해서 과거와 같은 낡은 소작제도가 복구되기 때문이다. 정부군이 점령하고 들어온 지역에서는 실제로 군부대의 보급트럭에 구지주가 함께 타고 들어와 부대장과 이익금을 분할한다는 계약으로 자기 소유 농지에 대한 소탕작전을 명하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베트콩에 의해서 이미 분배된 농지 소유권을 차라리 그대로 기정사실화 하는 방식을 포함한 농민 지향적 농지개혁을 하는 것이 어떤 한가지의 반란 진압 방법보다도 농민의 지지를 얻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사이공에 앉아 있는 ‘지주 지향적 지도층’이 진정 그와 같은 농지개혁을 지적(知的)으로 구상할 수 있느냐 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이공의 군장성과 의사들로 구성된 집단이기 때문이다(Bernard Fall, “Vietnam in the Ballance”, Foreign Affairs, 1996년 10월호, p.5).
1970년 미국은 농지개혁의 정치적 효과를 느껴 사이공 정부에 ‘무상분배’를 위한 재정원조 제공과 동시에 그 실시를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외국인 특파원의 현지 보도는 정부관리와 군장교들에게 일정한 비율의 ‘유상금’을 뇌물로 바쳐야 ‘무상’분배분의 명의변경이 되는 부패상을 알려주었다.
미국의 기본적 구상에도 문제가 많았다. 전쟁의 주도적 사회집단이 가톨릭ㆍ부유층ㆍ군장교단, 도시생활 기반의 주민, 외세 지향적 반공 지식인이었던 까닭에 베트남 농민의 복지는 거의 무시되게 마련이었다. 미국 정부와 사이공 정부는 베트남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을 예상했다. 그 승리를 토대로 남베트남의 ‘10년 경제복구계획’을 공동으로 작성했다. 웅장한 남베트남의 미래상을 국가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서 집대성한 것이「베트남 공화국의 전후개발:정책과 계획」(“The Postwar Development of the Republic of Vietnam: Policies and Programs”, March 1969)이다. 이 계획서는 농업ㆍ농촌의 부흥에 관해 이렇게 결론짓고, 정책화를 권고하고 있다.
……생산과 농가 수입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대토지 보유를 소단위로 분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부분의 작물은 (농지 소유를 분해하면) 대규모의 농지 보유 방식에 비해 경제적으로 경작할 수 없다. 그리고 농지 개량은 그와 같은 유리한 기업이나 노동이 불가능한 잠재적 사용자를 창조해내는 데까지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 지역적으로는 농업과 농민의 빈곤 해결은 작은 자가경작 방식보다 경제성이 높은 유효한 농업 노동력에서 찾을 수 있다(종합적 권고, 제7장 농업개발).
대단위 농지보유제도가 경제성ㆍ생산성이 높다는 것은 당연한 이론이다. 그러나 농민을 농업노동자화하는 방식으로 베트남의 농촌ㆍ농민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와 같은 견해야말로 땅에 굶주린 베트남 농민의 염원을 완전 무시한 것이다. 대단위 농업이란 농장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의 역사상 그와 같은 제도가 무엇을 뜻했는지 밝혀져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가난한 농민과 토지 사이의 정신적ㆍ정서적 관계를 일절 고려하지도 않은 태도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베트남 농민 1세대의 생계는 1헥타르의 땅이면 된다고 한다. 농지개혁 법안이 통과된 1956년 이후 70년까지 15년간 국가에 수용되어 권력자와 군장성들이 입찰자에게 임대해서 사복을 채워온 40만 헥타르를 처음부터 농민에게 분배했더라면 40만 세대의 생존이 확보되었으리라는 뜻이 된다. 토지 분배를 제네바휴전협정 이후, 상황이 평온할 때 즉시 실시했더라면, 1세대 5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200만의 농민이 정부를 지지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전체 농민의 자발적인 정치적 지지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며 베트콩이 생겨날 근거를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제도와 지도층은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었던 것 같다.
도시 주민의 복지정책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면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의료문제가 있다. 네덜란드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아르츠(Harold Arts) 부처의 남ㆍ북 베트남 방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1972년 8월 북베트남 방문과 73년 초의 남베트남 방문 기간중 의료 관계 사업과 지방을 조사한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국민의 의료복지에 대해서 북베트남 정부보다 훨씬 성의도 관심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인구 7,000명에 유자격 의사 1인꼴인데, 남베트남에서는 인구 5만 명에 1인꼴이다. 그나마 돈이 없는 사람은 혜택조차 받기 어렵다. 남베트남에서는 전쟁 그 자체로 인한 희생자 수보다 사이공 정부와 미국 정부의 민중의료ㆍ복지에 대한 무관심 탓으로 인해 생기는 환자 쪽이 더 많다는, 남베트남 근무 6년 경력의 미국 정부 파견의사의결론에 동의한다(日本東京, 共同通信社 발행,『世界週報』, 1973.4.17, pp.62~73).
그밖에도 많은 요인이 있다. 모든 것을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로 양분해버리는 사고방식도 그 하나임은 거의 모든 권위 있는 관측자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미군의 군사개입이 오히려 남베트남을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건전한 감각을 지닌 외국의 많은 사람들의 견해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 베트남인은 그런 성격의 민족인 것이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게 간곡히 충고한 대로 사태는 미국의 ‘비극’으로 끝났다.
베트남 사태는 그 종말의 형태에서보다 남베트남의 내부적 특수성ㆍ인과관계에서 더 많은 참된 교훈을 주는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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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앞서『창작과비평』에 실린「베트남전쟁」I, II에 이은 제3부다. 제1부는 1972년 여름호, 제2부는 1973년 여름호에 각각 발표되었다. 이 제3부는 제1부와 제2부를 합친 35년간의 베트남 사태의 총평가며, 특히 파리휴전협정 조인(1973. 1.27) 후부터 전쟁 종결(1975.4.30)까지의 사태 발전을 토대로 한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 사태의 전 과정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전환시대의 논리』, 「베트남전쟁(I)」과「베트남전쟁(II)」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게 어찌 된 셈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남베트남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지난주 너무도 급작스러운 사태 발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의 걷잡을 수 없는 당혹감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군사력 앞에 사이공 정부군이 이렇다 할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와해해버린 뒤에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한둘, 국부적 예외는 있을지 모르지만, ‘베트남공화국’국군은 그들의 진지를 지키기 위해서 총을 들기는커녕, 완전 궤멸 상태가 되어 세계의 전쟁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게 패주해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거의 모든 일이 잘못된 것이다(『타임』지, 1975.4.14).
1975년 5월 1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정부 대통령이 민족해방전선군 대표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35년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전쟁에 막이 내렸다. 베트남 사태는 그 긴 과정과 종결 형식에서 많은 ‘교훈’을 준다. 그러나 그 교훈을 올바르게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 인식
첫째는, 평가와 판단의 토대가 되는 베트남 사태에 관한 편견과 선입관의 배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만도 35년의 역사를 가지는 이 전쟁은 그 성격이나 요인이나 과정에서 누구도 한마디로 규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내용을 띠고 있다. 판단의 토대는 정보다. 베트남 사태에 관한 보도가 너무도 많았다는 사실과 너무도 일방적으로 각색되어 전달되었다는 두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사건마다의 단편적 정보에 압도된 나머지 본질적인 것을 파악할 수 없었고, 사태를 대하는 이해관계에 따라 한 측면이 강조되고 딴 측면은 애써 무시되는 보도 방식이 오랫동안 계속된 탓에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판단이 지극히 어렵게 되어 있다.
둘째는, 평가와 판단의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베트남 국민의 역사와 현실적 입장과 이해가 판단의 입장을 결정하는 조건이어야할 것이다. 각기 어느 한쪽의 편에 섰던 미국이나 중국 및 소련의 입장이 건전할 수 없듯이, 한쪽을 지원한 관계자의 입장도 종합적일 수는 없다. 외부 세력은 어차피 제3자일 수밖에 없다. 전쟁에 운명을 걸었던 전쟁 당사자인 남ㆍ북 베트남 정부 및 민족해방전선 등의 세 입장도 다르고 보면, 그 어느 쪽의 입장에서도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는 실로 불가능하다. 심지어 각기의 정부 및 전쟁 지도층과 민중의 입장이 반드시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정전(停戰) 방식이나 전쟁 해결 및 한반도 정세에 대한 최종적 판단자는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제3자인 대한민국 또는 우리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베트남 사태의 종결을 가장 정확하고 최종적 판단이라 고집한다면 한반도의 사태에 대해 외부의 어떤 제3자가 최종적이고 가장 정확한 판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우리 자신의 입장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게 마련인 까닭이다. 베트남 사태의 종결은 베트남 인민의 역사와 현재 및 장래를 규정한 것이다. 미국, 소련, 중국의 그것도 아니고 한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몇만 또는 몇 천의 병력을 일방 당사자 편을 들어 일시적으로 파견 참전함으로써 잠시 당사자가 되었던 한 국가나 정부나 국민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역사적ㆍ현실적 의지의 최대공약수적 방향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셋째는, 베트남전쟁의 현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노력이다. 그 본질적 성격의 규정이 가능하면, 그 토대 위에서 전쟁의 전체 과정, 각 국면, 그 종합적 종결의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 베트남전쟁처럼 많은 성격과 이름으로 불린 전쟁은 역사상 없었다. 복잡한 제2차 대전 후의 가치관이 각기의 입장에 따라 투영된 전쟁이라는 데서 더욱 그렇다.공산주의 침략전쟁, 제국주의 전쟁,신식민지 전쟁,백인과 유색인종의 전쟁,양대 정치 이데올로기의 투쟁, 후진ㆍ저개발 민족 대 선진문명 민족의 전쟁, 강대국의 대리전쟁, 민족해방전쟁, 혁명 또는 반(反)혁명전쟁 등이다. 그 각기일 수도 있고, 몇 성격의 복합일 수도 있고 그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폭넓은 연구와 깊은 구명을 하려고 노력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긴 전쟁 역사를 통해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두드러지고 굵은 하나의 민족적 의지를 말한다. 베트남 국민의 민족해방과 분단된 민족의 재통일이다.
베트남 사태의 결말에 대해 ‘비극’이라는 표현이 유행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민족의 통일보다 정치이데올로기의 투쟁적 측면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입장에게는 비극일 수 있다. 분단에서 기인하는 30여 년의 고통이 하루 속히 끝날 것을 갈구하는 사람이나 외국에 의존해서 살찌기보다는 차라리 통일민족사회 속에서 가난하지만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극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내일이 비극일 것인지 그와 반대일 것인지를 단정할 자격은 제3자에게는 없을 것 같다. 또 그 어느 것일지는 오직 앞으로의 베트남 사태의 전개 양식에 달려있다.
파리휴전협정의 행방
베트남 사태의 급속한 결말은 파리휴전협정이 이행되지 않은데서 기인한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당사자들과 방관자들은 각기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그 불이행과 불성실의 책임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 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베트남 휴전협정의 특성과 항목별 내용 및 그 이행 여부로 나누어보는 것이 편리하다.
정치적 조항
파리휴전협정(1973.1.27 조인)은 공식적으로는 ‘베트남에서의 전쟁 종결과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종결시킨 제네바협정(1954.7.20 조인)의 공식 명칭은 ‘베트남에서의 적대행위의 종결에 관한 협정’이다. 두 협정의 명칭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제네바협정은 프랑스와 베트남 인민의 ‘적대행위’(전쟁)를 끝맺는 단순한 휴전 절차적 성격이었다. 실제로 정전 뒤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정치적 해결, 즉 평화의 회복에 관해서는 별도로 제네바회의 참가국에 의한 ‘최종 공동선언’의 형식이 취해졌다. 그리고 미국과 남베트남(그 실태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이 협정의 조인을 거부했기 때문에 휴전에는 성공했으나 그 뒷마무리를 해야 할 정치적 해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파리협정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조인함으로써 제네바협정보다 강화되었다.
형식상으로 말해도 제네바협정은 군사 위주였던 것에 비해, 파리협정은 군사적 해결과 정치적 해결을 유기적으로 결부시킨 구조다. 구체적으로는 군사적 처리와 정치적 처리의 시기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군사적 휴전 조항의 이행 의무는 정치문제의 해결 또는 이행을 조건으로 했다. 이 정치문제의 가장 중요한 것이 사이공 정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민족해방전선),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도적 제3세력, 이 셋으로 ‘민족화합협의회’를 정전 후 90일 내에 구성하는 합의다(제12조 B항). 이 3자 협의기구가 남베트남의 통합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준비 관리 실시하도록 쌍방은 합의했다. 이 정치적 해결의 주체가 될 3자 협의기구 구성에 선행되는 중도 제3세력의 형성에 어느 쪽이 적극적이고 어느 쪽이 소극적이었느냐, 또는 어느 쪽이 그 결성을 탄압으로 거부했느냐 안 했느냐의 판단은 군사 조항의 이행 여부의 책임 구명과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전무한 듯하다.
다음은 파리협정의 해석이나 각 조항의 이행 여부의 구명은 20년 전에 체결되어 그대로 존속해온 제네바협정 체결의 정신과 배경 및 해석, 그리고 그 이행 여부의 책임 소재를 토대로 해서 보완된 사실이다. 파리협정의 역사, 협정의 정신적 모체는 제네바협정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베트남 사태의 이해는 협정 해석면에서 미국 개입 이후, 즉 1964년이후 사태의 진전에 비추어서만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셋째로, 중요한 사실은 사이공 정부와 임시혁명정부는 동등한 조인주체라는 사실이다. 제3국이나 양자 사이의 승인 여부와는 관계없이 협정상 양자는 완전히 동격ㆍ평등이다. 따라서 협정 이행의 의무에 관한 한 어느 정권이 타방 정권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일방적 권리의 주장을 내세웠다면 그것 자체가 협정 위반이다.
다음은 파리협정이 남베트남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전체’의 정치적 해결을 규정한 것이지, 사이공 정부 관할권하의 베트남인이거나, 임시혁명정부 관할권하의 베트남인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더욱이 어느 한쪽 정부가 상대방 정부 지역의 주민을 자기 정부하의 합법적 ‘국민’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게 되었다. 협정의 ‘전문’(前文)은 다음과 같다.
베트남에 관한 파리회담 참가자(複數)는 베트남 인민의 민족적 기본권(fundamental national right)과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 존중을 토대로 해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종결하고 평화를 회복하며 또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목적으로, 아래와 같은 조항들에 합의하고 이를 존중 이행할 것을 약속한다.
이 전문의 ‘fundamental national right’를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문서나 신문기사가 다 같이 ‘국민적 기본권’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오역이며 사소한 듯이 보이는 이 번역의 차이는 남베트남의 협정상 해결 방식과 의무 이행 여부를 가리는 데 중대한 착각의 원인이 된다. 원문의 ‘national right’는 ‘people of Vietnam’, 즉 남북을 가리지 않는 남북 베트남 인민 전체의 ‘민족적 권리’(민주적 권리가 아님)를 말한다. 이것은 프랑스 식민지 전쟁을 승리로 끝낸 베트남 인민(전체)의 독립ㆍ통일을 규정했던 제네바협정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 것이다. 사이공 정부나 임시혁명정부 각기의 ‘국민’적 권리가 아니라,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독립할 베트남 ‘민족’의 권리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people of Vietnam’을 ‘월남 인민’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것도 사이공 정부가 대표하던 ‘월남’이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베트남’, 즉 남북을 통틀어 ‘베트남’인민이다.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 존중’도 마찬가지로 사이공 정권이나 임시혁명정권이 각기 자결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의 인민을 합친 ‘남베트남 전체 인민’의 남베트남에서의 자결권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이런 용어 사용의 혼란과 고정관념으로 말미암아서 협정 이행 여부의 문제를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능력은 극히 제약되어왔다.
미국: 파리협정과 관계없이 미국은 앞으로도 베트남공화국정부(사이공)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계속 인정할 것이다(닉슨 대통령 가조인 후의 연설).
베트남: 파리협정은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 즉 남쪽 동포의 신성한 자결권을 보장하는 정치적 법적 기초다.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다. 남베트남에는 임시혁명정부와 사이공 정부, 이 두 개의 정권이 존재한다(노동당 중앙위원회 성명).
파리협정 전문을 통해서 특기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경합하는 남베트남 두 ‘정권’가운데 어느 쪽에 대해서도 ‘정부’라는 말이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사실이다. 협정 이행과 관련해서는 어느 쪽도 ‘유일 합법정부’를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정치적 발언이나 선전문구로서는 각기 상대방을 ‘괴뢰’또는 ‘유령’정권이라 부르고 스스로 ‘유일 합법정부’를 주장해도 좋다. 그러나 협정으로는 그렇지 않다. 유일 합법정부를 주장하는 것은 상대방을 흡수하는 해결을 고집하는 것으로 협정 위반이다. 사이공 정부는 조인후에도 이 주장을 버리지 않았다.
협정에 의한 정치적 해결의 토대는 ‘민족화합협의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사이공 정권과 임시혁명정권을 두 ‘당사자’로 하고, 그에 속하지 않는 중도 제3세력을 합쳐서 구성될 이 협의체에 남베트남의 단일 합법정부를 구성하고 장차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권리가 위임된 것이다.협정 조인 후 90일 내,즉 1973년 4월 말까지 협의체를 구성하는 데 쌍방은 합의한 것이다(제12조 B항).
민족화합협의회는 휴전협상 과정에서 그것을 ‘연립정부’형식(라오스식)으로 하라는 북베트남 측과, 그것을 다만 남베트남의 단일 합법정부 수립을 위한 일시적인 협의기구로 하자는 미국 측의 주장이 맞서오다가 북베트남 측의 양보로 미국안대로 된 것이다. 이 협의체는 모든 결정에서 제3세력의 ‘만장일치’합의제 때문에(제12조 A항), 창설이 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협정이 위임한 단일 합법정부 수립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문제된 것은, 그 설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규정한 남베트남 전역에서의 민중ㆍ정치인ㆍ단체ㆍ개인의 자유 의사 표시와 시민적 권리의 보장 의무가 쌍방 정권에 의해서 이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남베트남 시민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는 협정에서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상세히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제11조: 종전 직후, 남베트남의 양 당사자는 다음의 사항을 실시한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룩하고, 증오와 적의를 해소하고, 일방 또는 타방과 협력해온 개인 또는 단체ㆍ조직에 대한 모든 보복과 차별행위를 금지한다.
인민의 민주적 자유, 즉 개인적 자유, 언론의 자유, 신문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 신앙의 자유, 이동의 자유, 거주의 자유, 노동의 자유, 재산 보유의 권리, 자유기업의 권리를 보장한다.
이렇게 상세히 규정한 자유와 권리는 ‘재산 보유의 권리’와 ‘자유기업의 권리’까지 들어 있어 자본주의(적) 체제에 아무런 제약도 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이공 정부로서는 적어도 자유ㆍ민주ㆍ자본주의를 표방하는 한 이 조항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사이공 시에서는 1일 28일 휴전의 발효를 축하하는 모임도 시위도 금지했다. 쌍방에 다 같이 가해진 이 자유와 권리를 허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정부와 체제의 취약함을 뜻하거나 협정을 이행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전후 정치 해결의 핵심이자 토대가 되는 이 조항의 이행 여부에 관해서는 아무리 선의의 이해를 한다 하더라도 티우 대통령과 사이공 정부가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다. 주로 미국 정부의 견해를 대변하는 한 미국 주간지는 정치적 자유 분위기가 보장되어야 할 휴전 직후의 상태를 이렇게 보도했다.
“티우, 기선을 제압하다”
티우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남베트남에서 새로운 큰 조치를 취했다. 전국에 걸친 강경한 비상조치를 명하고 이에 따라 군대와 경찰에서는 공산주의의 사주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가혹하게 까부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시위대나 탈영병에 대해서는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남베트남에서는 더욱 강경한 경계조치가 취해졌다. 사이공과 그밖의 도시들에서는 처음으로 야간 통행금지가 엄격히 시행되었다. 사이공 시에서는 밤 11시만 되면 일절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움직임의 원천이 되는 스위치를 꺼버리기나 한 듯이 모든 움직임은 정지한다.
치안 예방조처는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베트콩 기(旗)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전국의 모든 상점과 창고에서 적ㆍ청ㆍ녹세 색깔의 천을 모두 압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모든 양복점ㆍ양장점에 대해서는 남베트남 정규군의 신분을 증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모양이건 유니폼 식의 옷을 만들어주지 못하게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티우 대통령은 특히 언론기관, 정치정당 또는 정치단체 그리고 전국적 선거, 이 세 가지를 가장 싫어한다. 티우 대통령은 그세 가지가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영향의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휴전협정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전에 이 세 가지를 철저하게 탄압하려 하고 있다.
휴전 조인 후 첫 몇 주 동안에 전국적인 예비검속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갖가지 새로운 비상조치가 발해졌고 이에 따라 성(겛)장관에게는 누구든지 달갑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자유 재량으로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사이공의 외국인 전문가들은 반정부적 또는 정부를 비판하는 인사들이 갖가지 죄명으로 무더기 체포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으로서가 아니라 각종 보통 법령의 위반자로서 투옥하는 이유는, 휴전협정이 정치범 석방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범이 아니라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다(US News and World Report, 1973년 2월 첫호).
이렇게 해서 투옥된 사람의 수는 확인된 바 없다.모든 정치범은 서로 휴전협정 발효 15일 이내에 석방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상호간에 민간인 억류자(정치범)의 명단ㆍ억류 장소ㆍ석방 방식을 교환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것은 이행되지 않고 말았다. 사이공 정부는 민간 억류인의 수를 5,081명이라고 발표한 데 대해 해방전선은 3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방전선이 억류하고 있는 수에 관해서 사이공 정부는 8,622명(지방관리)이라는 숫자를 제시하면서 그 석방을 요구했다. 티우 대통령이 많은 민간인 억류자의 석방을 거부하면서 더 많은 민간인을 협정 발효 후에도 투옥한 것은 그들이 바로 해방전선을 지지하거나 민족화합협의회를 구성할 세력의 주축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중립적 또는 정부 비판 인사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한 티우 대통령은 휴전협정 체결이 거의 확실해진 1972년 10월 12일, “휴전이 성립되기 전에 전선 전후방의 공산주의자를 최후의 1인까지 죽여놓고 조인하겠다”고 선언했다(휴전반대 청년대회 연설).사이공 정부의 민간인석방 반대에 항의해서북베트남은 미군 포로의 석방을 일시 중지했다(1973. 2.27). 당황한 미국 정부는 티우 대통령에 대해 민간인 억류자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는 압력을 가해야 했다.
결국 남베트남의 정치적 해결을 담당할 한 주체인 제3세력은 형성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결과로 민족화합정부 수립을 위한 모든 절차는 거부당하고 휴전 후의 새로운 남베트남을 구상한 모든 정치적 조항은 조인 이전에 사실상 백지화된 셈이다.
끝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외국(군대)의 주둔을 고집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노력을 거부했느냐 하는 평가다. 협정 본문 제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1조: 미합중국 및 그밖의 모든 국가는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협정에 의해서 승인된 베트남의 독립ㆍ주권ㆍ통일ㆍ영토 통합을 존중한다.
전문 부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제네바협정으로 승인된 베트남 인민의 민족적 일체성ㆍ불가분성이 파리협정의 기본정신이다. 제네바협정이 결정한 1956년 7월 예정의 통일선거를 거부하고 남북 베트남을 분리된 적대적ㆍ독립적 전정단위로 굳혀버린 외국, 즉 미국의 공작의 재판을 막기 위해서 6년의 협상 과정을 통해 북베트남이 일관되게 요구한 조항이다. 조항의 서두에서 구체적으로 미합중국을 지칭한 것이 그 과정과 동기를 말해준다. 미국이 미합중국을 이렇게 명시하는 데 동의한 것은 1954년 협정에 의한 총선거 실시의 거부책임을 묵시적으로 시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남북 베트남의 분할 고정화나, 남베트남 일부의 분할ㆍ독립을 획책하는 기도는 이 협정 기본원칙인 제1조 위반이 된다. 어느 쪽이 더 남북 분할현상의 항구화ㆍ고정화 정책을 썼는가가 협정 위반의 평가기준이 된다. 또 남베트남 전역에 대한 지배 확대가 불가능하면 현 지배 지역의 고정화에 의해서라도 남베트남의 분할적ㆍ독립적 정부의 유지를 정책으로 추구했느냐도 협정 위반의 기준이 된다.
정치적 해결의 합의사항을 주로 사이공 정부가 위반한 것은 티우 대통령의 주장이 협정에 덜 반영되었다는 데서 이해는 할 수 있다. 휴전협정의 골격으로 내세운 쌍방의 기본적 해결안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사이공 정부 입장
① 북베트남과의 대등한 직접 협상
② 비무장지대의 복원, 남베트남의 영토 보유, 남베트남의 불간섭.
③ 북베트남군과 파괴분자(민족해방전선을 가리킴-필자)의 북베트남으로의 철수 및 효과적 국제감시.
④ 북베트남군의 철수 후, 그리고 무력활동이 저하한 연후에, 미국과 동맹국 군대의 남베트남 철수.
⑤ 평화 회복 후 남북 베트남 재통일을 위한 남북 베트남의 협의.
(1968.9.4, 사이공 정부가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정치해결에 관한 입장」)
민족해방전선의 입장
① 조국독립ㆍ민주평화ㆍ번영 및 궁극적ㆍ평화적 통일의 신성한 권리.
② 미국 침략전쟁의 정지, 모든 미국 군대와 그 위성국가 군대의 철수, 군사기지의 철거.
③ 외부 간섭 없는 남베트남 인민 자신에 의한 민족ㆍ민주연합정권의 수립과 자유선거를 통한 해결.
④ 외부 간섭 없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베트남의 협의와 협정을 토대로 한 단계적 재통일의 실현.
⑤ 남베트남이여하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는다는 보장.
(1968.11.3,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의「남베트남의 정치해결에 관한 성명」)
파리협정의 정치적 해결 방식의 구조는 대체로 임시 혁명정부의 해결안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1954년 제네바협정의 정치해결 구조를 따랐기 때문이다. 제네바협정에서 합의된 남북 베트남 통일을 위한 총선거가 미국과 남베트남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한 점을 고려해서 미국은 파리협정의 규정을 살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파리휴전협정의 해석이나 위반 여부의 검토에서 제네바협정과 그것이 깨진 역사 배경 및 책임 소재를 반드시 참작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54년 제네바협정이 결정적으로 깨진 것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양베트남 통일정부 수립을 규정한 총선거를 거부한 데서 비롯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만약 약속한 대로 선거를 실시하면 80퍼센트의 남북 베트남인이 호치민을 지지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것이다(The Mandate of Change 참조). 파리협정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전체 구상도 제세력의 형성 허용과 3세력에 의한 민족화합정부 수립을 위한 남베트남 선거의 반대로 깨졌다. 그러면 군사적 측면은 어떠했는가.
군사적 조항
당연한 일이지만 파리협정 가운데 가장 깊고 세밀한 규정은 제6장의 군사조항이었다. 제네바협정에 의한 휴전 방식과 다르기 때문도 있었지만 제네바협정의 군사적 의무가 쌍방에 의해서 성실히 이행되지 않았던 사실 때문에 그 내용은 오해의 여지 없이 분명하게 짜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4자 사이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협정 위반의 비난이 그치질 않았다. 그 전면적인 사실의 규정은 고사하고, 어느 한쪽이 주장하는 상대방의 위반에 관한 부분적 사실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사태가 계속되었다. 휴전의 방식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끝맺은 제네바협정에 의한 휴전 방식과 몇 가지 점에서 두드러지게 다르다는 사실도 그 사실의 적발과 책임 소재의 확인을 더욱 어렵게 한 한 가지 중요한 이유다.
남베트남의 쌍방 당사자, 또는 미국과 북베트남을 합친 4당사자 사이에 가장 말썽이 된 위반 사항들을 골라 검토하면 대체로 그 윤곽이 드러난다.
(1) 휴전선 침범, 영토 확장
1954년 휴전과 다른 방식의 하나는 교전 당시 군대가 그리니치 표준시 1973년 1월 27일 24시(한국 시간 28일 오전 8시)를 기해서 있는 그 자리에서 모든 전투행동을 정지한 것이다(제2조). 이른바 ‘현상ㆍ현지’휴전이라는 것이다.1954년에는 프랑스군(그 속의 베트남인 식민지 용병군 포함)과 항불(抗佛) 독립 베트남군이 북위 17도선 남ㆍ북으로 이동ㆍ재집결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교전군대 사이의 휴전선은 분명했고, 그것이 그 후 통일총선 실시의 거부로 마치 남북 베트남 사이의 ‘국경’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전선이 분명한 정규전이기보다는 내란의 특색인 유격전이 13년이나 계속된 뒤의 전선은 이른바 ‘표범 무늬’처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혼재하는 상태였다. 뒤범벅이 되어 있는 각 당사군대의 점령 지역, 그 병력, 그 경계를 확인하기란 제네바 휴전 때보다 훨씬 치밀하게 조직된 몇 겹의 감시제도와 접촉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전 5개월 후인 1973년 8월 말에는 벌써 휴전이 지켜질 희망이 사라진 듯했다. 이 첫 5개월 사이에 사이공 정부 측은 민족해방전선 측의 휴전 위반이 만 5,000건이라고 주장했다. 해방전선측은 같은 기간의 사이공 정부의 휴전 위반만 만 2,000건이라고 임시기구에 보고했다. 실제로 그 후에는 쌍방의 휴전 위반은 집계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감시기구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 해버렸다. 군사적 협정조항과 정치적 조항은 유기적으로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합의 하나의 위반은 상대방에게 군사적 합의 하나를 위반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다. 상대방의 작은 군사적 위반으로 자기의 보다 큰 정치적 합의의 불이행을 정당화하는 사태가 되풀이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한쪽만의 비난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게 공통된 견해다. 더욱이 어느 한쪽이 협정을 상습적으로 위반했다거나 어느 한쪽에 협정 위반의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식의 판단은 타당성이 없다. 그러면 협정이 발효한 직후의 현지 상황은 어떠했던가.
요란한 국제적 환호 속에 미국ㆍ남베트남ㆍ북베트남ㆍ임시혁명정부의 대표들은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베트남에서 전쟁을 끝맺고 평화를 회복하는 데 관한 합의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투는 끝난 일이 없다. 사이공과 공산주의자 쌍방은 사실 협정 내용의 몇 가지 주요한 합의사항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 그 방법을 모르는 형편이었다.쌍방은 서로의 지배 지역을 명시한 지도를 교환한 일도 없다(이 각기의 지역에 대해서 각기 협정상의 ‘법적’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서 각종 전국선거를 준비했어야 할 민족화합협의회도 창설되지 못했다. 그들은 군사보급의 대체를 위한 장소를 지정하지 않았다. 공산 측 지배 지역의 한 지점에 재집결하기 위해서 베트콩 군부대가 이동을 시작하면 사이공 정부군은 베트콩에 대해서 기습공격을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하노이 측에서 본다면 협정의 모든 합의사항은 다만 호치민의 유훈(遺訓)-‘미국인이 사라질 때까지 싸우라, 그리고 괴뢰정부가 쓰러지는 날까지 다시 싸우라’-을 실천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모든 조인 당사자가 협정을 위반했다. 미국은 휴전협정이 발효되기 직전에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를 단시일 내에 사이공 정부에 반입 양도함으로써 협정 문구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협정 정신을 위반했다. 휴전 후 1년 사이에 사이공 정부 군대는 군사행동으로 그 지배 지역을 20퍼센트나 확대했다. 그 결과 약 100만 이상의 주민이 사이공 정부의 깃발 아래 들어갔다. 그뿐 아니라 협정을 성실히 이행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티우 대통령은(거기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협정이 여러 조항으로 규정한 남베트남에서의 공개적 정치투쟁에 관한 합의사항을 있는 힘을 다해서 저지했다(「붕괴의 사후진단」, 『타임』지, 1975.4.14).
휴전 성립 후 50일 사이에만 사이공 정부군 사망 5,000명 부상 2만 5,000명, 베트콩 사살 2만 명, 부상 수만 명이라는 전투가 계속되었다(사이공 정부 발표, 1973.5.17). 이와 같은 혼란이 계속된 첫 1년 동안에 20퍼센트의 점령 지역을 확대하는 데 성공한 사이공 정부 측은 74년 후반부터는 민족해방전선군의 반격으로 확장한 지역을 잃었을 뿐 아니라 군사 형세는 거꾸로 사이공 정부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2) 남베트남의 북베트남 군대
사이공 정부군의 치욕스러운 붕괴나 베트남 사태의 종말에 관해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월맹군의 불법적 공격’설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의 경우 하나의 고정적 이론이 되어 있다. 휴전 발효 이후에 남베트남에 ‘월맹군’이 있다는 것이 협정 위반이라는 해석에 입각해 있다.
협정의 제2장 ‘전쟁행위의 정지 및 군대의 철수’조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3조: 모든 교전 당사자는 휴전을 유지하고 항구적이고도 안정된 평화를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 휴전이 발효되는 즉시, A. 미국군대, 미국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동맹하고 있는 모든 외국의 군대 및 베트남공화국 군대는 철수계획의 실시기간 중 현상을 유지한다. B. 남베트남의 두 당사자의 군대는 현상을 유지한다. C. 남베트남의 양 당사자의 모든 병종(兵種)의 정규군과 부정규군 부대는 상호간 모든 공격행위를 정지한다.
제5조: 본 협정 조인 후 60일 이내에 기술군사요원 및 평정 계획에 관련한 군사요원을 포함해,미국 및 제3조 A항에서 규정한 그밖의 외국의 군대ㆍ군사고문ㆍ군사요원, 그리고 무기ㆍ탄약ㆍ군사자재는 남베트남에서 전면 철수한다. 또 이 기간 중에 상기 제국으로부터의 모든 민병조직에 대한 고문(顧問)요원과 경찰요원도 철수한다.
제6조: 제3조 A항에서 규정한 미국과 동맹국은 본 협정조인 날부터 60일 이내에 남베트남 군사기지의 철폐를 완료한다.
이상이 파리휴전협정의 남베트남에서의 ‘외국군, 그 유사ㆍ준군사적 요원, 무기ㆍ물자ㆍ기지 등’의 철수ㆍ철폐에 관한 조항이다. 그밖의 사항을 규정한 관련 조항에서도 남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할 군대 속에 북베트남(월맹) 군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철수해야할 군대는 제3조 A항에서 규정한 ‘미군과 그와 동맹한 제외국의 군대’로 되어 있다.
휴전 당시 남베트남에는 약 14만 5,000명의 북베트남 군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미국 측 발표). 남베트남에서의 북베트남 군대의 존재 여부와 법적 또는 조약상 지위는 베트남전쟁이 미국 전쟁화한 이후부터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주장되어왔다. 북베트남군 정규 부대의 존재는 확인되었고, 사이공 정부와 미국은 이것이 주권국가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에 대한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침략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은 이 ‘침략’을 물리치고 ‘침략군’을 북베트남으로 추방 또는 철수시키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그 침략과 침략군 격퇴 전쟁을 끝맺는 휴전협정에는 반드시 북베트남으로부터의 ‘침략군대’에 대한 규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조약상 상식이 아닌가? 파리휴전협정은 북베트남 군대의 남베트남 잔류를 ‘적극적 권리’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일언반구의 언급 없이 전(全) 휴전구조로 짬으로써 소극적으로 그 잔류를 묵인한 것이다. 그 토대 위에 휴전 후의 모든 해결방안의 구조에 대해 조인 당사자들이 합의를 본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파리협정은 제네바협정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베트남(남ㆍ북)의 문제는 승리한(프랑스에 대해서) 베트남 인민의 민족자결권에 의한다는 원칙이다. 둘째는, 북베트남 군대가 남베트남에 들어온 것은 제네바협정을 위반해서 미국이 정치 군사적으로 개입한 ‘뒤’라는 주장을 미국이 오랜 거부 끝에 묵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셋째의 논리는 다소 복잡하다. 1954년 제네바휴전협정이 규정한 ‘휴전선’의 법적 성격의 해석문제다. 북위 17도선을 넘는 것이 한 국가와 국가간의 ‘국경’을 침범하는 것과 같은 침략행위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로 연결된다. 이 문제야말로 베트남의 ‘침략’여부를 가름하는 핵심적 문제가 되었다. 미국과 남베트남 측의 이론ㆍ주장ㆍ입장은 북위 17도선이 휴전선이 아니라 국경이라는 것을 토대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남베트남의 학자ㆍ전문가ㆍ정치인들을 제외한 일반적인 견해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 미국의 전문가ㆍ학자ㆍ정치인들도 나중에는 미국 및 남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반대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즉 베트남전쟁은 ‘침략전’이 아니라 ‘내란’이라는 해석이 대세가 된 것이다.
어떻든, 북베트남의 주장과 이론은 이러했다.
제네바휴전협정과 최종 선언 제6항은 북위 17도선이 “일시적으로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민족군대를 격리ㆍ재집결시키기 위해서 설치된 일시적 군사분계선이지, 여하한 경우에도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선으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군에 승리한 베트남인 군대가 그와 같은 성격의 선 이북으로 이동한 것은 휴전 조인 2년 후인 1956년 7월에 협정이 결정한 남북통일 총선거를 준비하기까지라는 조건부였다. 그 총선거가 어느 쪽에 의해서 거부되었건 그것을 전제로 한 일시적 군사분계선의 설치 근거는 조약상ㆍ사실상 소멸되었다는 것이 북베트남의 시종일관한 주장이었다. 따라서베트남의 전체 상황은 1954년 7월 20일 이전의상태로 환원되며,북으로 이동한 군대의 협정 체결 전 상태로의 복귀는 당연한 권리이며 이것을 막을 조약상 구속력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4년간의 열띤 휴전협상과 북베트남이 미국의 전면적인 폭격으로 ‘석기시대’화해버리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가장 큰 원칙이다.
결국,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별개의 정치적 자결단위로 인정하는 양보(궁극적으로는 하나지만, 그러나 남베트남의 3개 세력이 그 정치적 장래를 결정한다는 조건부로)를 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은 북베트남 군대의 남베트남 잔류 권리를 인정하는 양보를 했다는 것이 파리휴전협정의 독특하고도 복잡한 합의인 것이다. 이 30년에 걸친 배경과 1954년 제네바휴전협정의 정신, 그리고 미국이 그것을 대체로 그대로 승인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파리휴전협정의 전체적 정신과 원칙이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협정 위반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티우 대통령과 남베트남 정부는 휴전협정의 정치 조항과 북베트남군의 잔류를 승인한 휴전협정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었다. 계약이 충실히 이행될 때 이롭다고 인식하는 당사자와 불리하다고 인식하는 당사자 중 어느 쪽이 계약의 성실한 이행을 요구하고 어느 쪽이 그 이행을 거부할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다. 티우 대통령과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이해관계만이 압도적으로 지배한 파리휴전협정에서 불리한 계약에 도장을 찍은 셈이다. 더욱이 54년 이후 30년간 남베트남에서 유일 정부를 자처해온 입장에서 보면 그 불리한 계약의 이행에 성의를 다하기를 요구하기란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협정’의 위반 여부 차원에서 문제가 논의될 때에는 불리한 계약도 계약이라는 일반적 원칙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미국의 이해 계산을 앞세운 미국 정부의 조인 압력이 사이공 정부의 협정 이행의무의 면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의문시되었다).
(3) 병력ㆍ무기 증강
1975년 2월 사이공 정부군의 최북부 지방 철수로 시작된 대패주(大敗走)의 뒤에는 북베트남군 약 22만이 있다고 미국 정부는 비난했다. 휴전 당시의 14만 5,000보다 7만 5,000이 증가된 병력이다.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군은 합계 200~400대의 여러 가지로 추산되는 탱크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그밖에 각종 무기도 증강된 것이 확실하다. 휴전협정의 무기ㆍ장비에 관한 조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7조: 휴전 실시 이후 본협정 제9조 B(정치적 제합의) 및 제14조(남베트남 화해정부 수립 후의 외국의 군사ㆍ경제원조 수락에 관한 규정)에서 규정한 정부의 구성까지의 기간 중, 두 개의 남베트남 당사자는 부대ㆍ군사고문ㆍ기술군사요원을 포함하는 군사적 요원과 장비ㆍ탄약ㆍ군사물자를 남베트남에 도입하지 않는다.
남베트남의 두 당사자는 두 개의 남베트남 당사자의 합동군 사위원회 및 국제적 관리ㆍ감시위원회의 감시하에, 휴전 후에 파괴ㆍ손상ㆍ소모 또는 폐품화한 장비ㆍ탄약ㆍ전쟁물자를 1대 1 기준으로 같은 특징과 성능을 가진 것으로 정기적으로 대체한다.
북베트남과 해방전선 측의 상당한 양의 무기가 사이공 정부군에게서 노획 또는 부패한 사이공군의 장병들이 팔아넘긴 무기ㆍ장비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이 내린 무기의 정보 평가를 토대로 할 때 신종ㆍ다량의 장비가 휴전 후에 들어온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휴전협정 위반은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하다.
그러면 남베트남 정부와 미국 측은 어떤가?
휴전에 앞서는 전쟁 마지막 해인 1972년 말 현재 사이공 정부군의 병력과 무기는 다음과 같다.
육군: 정규군 41만, 지방군 28만, 국민군 24만, 국민자위대 140만, 야전경찰군 3만 5,000(계 236만 5,000). 탱크(중ㆍ경형 합계) 240대, 장갑차 250대, 기타형 105대.
해군: 병력 3만 9,000, 호위구축함 7척, 고속초계정 70척 및 하천초계정(100톤 미만) 500척,
공군: 병력 4만 1,000, 전투용 비행기 275대, 각종 수송기 약 510대,헬리콥터 480대,연습기 465대(영국 국제전략연구소 연감,1972~73년의군사력 비교,남베트남 부분).
1972년 5월에 이미 레어드 미국방장관은 사이공 정부의 군사력, 특히 공군력은 미ㆍ소ㆍ중 3대국 다음가는 세계 제4위라고 자랑한 바 있다. 그런데 휴전 직전에 미국은 비행기, 탱크 등 기본 무기를 단시일 내에 급속히 증강시켰다. 이것은『타임』지가 지적했듯이 문구상으로는 협정 위반이 아니지만 협정 정신의 위반이다. 소련ㆍ중국도 그랬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문제는 휴전 이후다. 미국 군대의 철수에 앞서 대부분의 중(重) 무기는 사이공 정부군에 이양되었다. 그 사실은 미국 정부의 발표나 보도로 확인되었지만 숫자는 밝혀진 바 없다. 임시혁명정부 대표는 그 수를 탱크 및 장갑차 600대,야포 600문,함정 200척,포탄 50만 톤이라고 주장했다(4자 군사합동회담에 대한 항의보고, 1973.2.1). 이 항의에서 혁명정부 대표는 “휴전 이후 40일 동안 사이공 정부 공군의 대(對) 지상공격 400회”라고 보고하고, 공군기의 폭격하에 지상 점령지의 잠식과 대규모 공격전을 계속했다고 주장했다.
전쟁요원의 잔류 또는 증강문제도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미국과 남베트남 동맹국의 각종 군사적 요원(협정 제2장 제3조 A항 규정)은 협정 조인 후 60일 내에 베트남에서 완전ㆍ전면 철수하게 되어 있다. 이 조항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베트남에는 정식으로 발표된 대사관 관계 직원 및 그 가족, 순수한 상인ㆍ민간인 기술자 등과 관광객이 있을 뿐이다. 이 조항은 남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군사관계의 ‘일절ㆍ전면’정지ㆍ철수ㆍ철폐이므로 민간인의 자격으로도 잔류하거나 증강될 수 없게 되어 있다.
1975년 4월 28일 미국이 미국인의 긴급 철수작전을 완료했다는 발표에서 미국인은 6,000명이라고 밝혔다. 실제로는 몇 명인지 알 수 없으며, 현지에서 쏟아져 나온 미국 보도기관 특파원들의 기사들을 읽어보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인 것 같다. 이에 관해서 임시혁명정부 대표는 그 규정된 60일이 지나는 날, 미국이 ‘위장 군사요원’을 다량 투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들이 합동회의에 제출한 그 민간인을 가장한 수는 다음과 같다.
① 28성(省) 1시(市)(사이공)에 새로 영사관 부속 ‘성(省) 팀’(team)을 신설ㆍ배치. 평정계획 활동을 인계ㆍ수행.
② 사이공 주재 대사관 무관(武官) 사무소(DAO)를 확장. 육해공군 무관의 증강 외에 병참 관계 국방성 요원 1,200명 새로 부임.
③ 민간인 기술자의 민간사업계약을 가장한 병기ㆍ통신 보수 업무요원 5,000~6,000명 배치.
④ 대사관 공보문화국 및 AID 관계 요원 1,300명.
⑤ 그밖에 각종 명목 요원.
합계 8,500명
임시혁명정부 측은 휴전 2년이 가까워지는 1975년 초에는 미국의 위장 군사요원의 수가 1만 9,000명이 되었다고 여러 차례 비난했다. 미국 국방장관 레어드가 이미 휴전 10개월 전 미국의 외교위원회 증언에서 남베트남군, 특히 공군이 세계 제4위의 막강한 군사력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베트남전쟁에서 사용하던 미국 군대의 중무기ㆍ최신장비가 휴전 바로 전후에 대량 양도된 사실을 고려할 때, 그 유지ㆍ보수ㆍ훈련을 위한 상당한 기술요원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도 협정 조문상 위반 문제가 논란이 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협정 위반의 책임을 밝히기란 어려운 것이고, 더욱이 어느 한쪽만의 책임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 혼란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상호불신-상호위반-위반의 순환적 확대-불신의 심화-공공연한 위반-전투의 계속-종말이라는 과정이 휴전 이후 2년간의 현실일 것이다.
베트남전쟁의 성격
1975년 5월 1일, 35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은 끝났다. 남베트남의 정권도 갈리고 사회의 제도도 달라졌다. 베트남인 자신이나 외부의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각기의 입장ㆍ이해관계에 따라 남베트남전쟁을 해석하는 각도도 다를 것이고, 그 긴 전쟁 역사와 그 종말의 형태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도 극에서 극까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나의 극은 그 종말을 ‘비극’으로 표현하는 심정이고, 다른 극은 ‘환희’로 맞는 심정이다. 어느 반응이건 그 긴 세월의 극한적인 인간적 고통을 겪지 않은 방관자의 태도일 것만 같다. 대부분의 베트남인은 비극과 환희의 중간에서 이 날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베트남전쟁은 압도적으로 강대한 군사력과 보잘것없이 약한 인간집단의 싸움이었다. 세계 제1의 군사ㆍ경제ㆍ과학의 총력을 동원한 국가와 그 지원하에 세계 제4위의 군사력을 가진 현지 집단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전쟁의 최초의 예로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패배에서의 교훈은 단순히 ‘군사력’의강약이나 ‘, 군사적방위태세’의우열측면에서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외국에서의 반응은 거의 예외없이 그런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교훈을 배격하고 있다. 베트남 사태는 이 글 제1,2부에서 상세히 살펴보았듯이 군대ㆍ군사력ㆍ군사적 방위 태세ㆍ양분법적 이데올로기ㆍ전쟁철학 외의 요인과 요소에서 더 많은 교훈을 준다.
그런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에서 하나의 역사적 파탄을 겪었다. 1949년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사태의 어쩌면 그렇게도 완벽한 재현인가? 중국대륙 사태의 종말을 ‘비극’이라고 본 사람들은 그 10년 뒤 다시 같은 함정에 빠지고, 25년 뒤에는 똑같은 비극의 연출로 아시아 대륙의 지도의 색이 달라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원인을 무시한 탓이다. 수많은 요소의 동적 과정(dynamic process)에 무감각했던 탓이다. 그러면 베트남 사태의 당사자들은 어떻게 보았던가?
베트남의 사태는 도시가 농촌을, 도시적 주민이 농촌 전체를 적으로 몰고 싸우는 전쟁이다. 이런 성격의 전쟁에서는 이기기 위한 유일한 전술은 오직 압도적인 물질적 중량으로 농민을 분쇄하는 것이다.
농업작물의 파괴, 고의적이고 계획적인피난민만들기, 암살ㆍ고문의 피닉스(phoenix) 작전, 농촌ㆍ농가ㆍ농사시설의 전면적 파괴, 주민에 대한 공포적 강압…… 이것밖에 없다(로버트 코머 안(案), 1972년 5월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베트남 사태의 원인ㆍ과정ㆍ교훈에 관한 청문회’의사록, p.81).”
로버트 코머는 미국 국무성 고위관리로 베트남전쟁의 수행 방안을 연구 건의하는 작업반의 책임자였다.
역대의 남베트남 정권은 그 어느 것이건 자발적인 민중의 가치를 못 받고 대중적 정치 토대가 없는 권력이었다. 사이공 정권은 과거에는 프랑스 식민지체제의 계승자였다. 미국의 개입 이후에는 시급히 필요한 사회개혁은 모두 민족해방전선이 실시했고, 베트남 사회에서 그 사회개혁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소위 ‘베트남 정부’(government of Vietnam)는 민족해방전선과 도저히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 사실은 사이공 정부 지도자들 자신이 자인하고 있다.
티우, 키, 키엠 등 남베트남군 최고의 사령관급은 모조리 자기 민족ㆍ국가의 해방ㆍ독립에 반대해서 식민지국가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싸운 사람이다(노엄 촘스키 교수 증언, 같은 의사록, p.82).
레어드 국방장관(미국)은 남베트남 정부가 전투기 1,000대, 대형병력 수송용 헬리콥터 500대를 비롯해서 무제한의 탄약, 완벽한 제공권을 가진 세계 제4위의 군사력이라고 증언했다.
인구비율로 치면 세계에서 최강ㆍ최대의 육군ㆍ해군ㆍ공군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런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서도 사이공 정부가 견뎌내질 못한다면 그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문제는 군사력 요소가 아니라 딴 곳에 있다. 문제는 남베트남의 지도자들과 지도 역량의 성격 및 남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이다(Leslie Gelb 증언, 같은 의사록, p.42).
레슬리 겔브는 1960년대에 수년간 남베트남에서 사이공 정부를 도와 평정계획의 현지 총책임자로 일한 미국 국무성의 고위관리다.
이상은 남베트남의 사회ㆍ정부의 내부 실정을 진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의 한 주체를 도운 미국의 정책은 어떻게 진단되고 있는가? 사태의 결말로 입증된 논리와 결과로 부정된 논리가 있다. 원인ㆍ과정ㆍ결과를 정확히 예견했던 쪽의 논리에 당연히 설득력이 있다.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서 슐레징거의 논리
① 반공군사적 집단안보의 두령 의식
② 외국에 대한 미국의 문명적 우월 의식과 미국식 민주주의 화의 사명감
③ 절대적 반공주의
④ 민족해방ㆍ독립투쟁을 공산주의와 동일시하고, 그와 같은 투쟁을 일률적으로 소련ㆍ중공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본 잘못
⑤ 미국의 모든 제도ㆍ기구(행정부, 군, CIA, 민간기구……)의 냉전포교(冷戰布敎) 기구화
⑥ 경제적 제국주의(이 항목에 관해서는 시인ㆍ부인 반반의 증언)
슐레징거(뉴욕시립대학 교수)는 케네디, 존슨 두 대통령의 안보 특별고문이었고, 베트남 사태의 군사적 측면에 늘 회의적이었다.
레슬리 겔브의 논리
① 강대한 힘(국력)에의 도취ㆍ교만
② 한 가지밖에 못 보는 관료주의적 정치
③ 미국 국내정치의 요소와 영향
④ 제국주의
⑤ 현실 사태의 각 단계에 실효적으로 대응한다고 생각하면서 줄줄이 끌려 들어간 프래그머티즘
⑥ 강대국 간 ‘힘의 균형’위주 정책
⑦ 정부 각층 지도자급 사람들의 판단력 미숙과 부주의
⑧ 그러나 가장 큰 요소는 ‘공산주의를 저지한다는 도미노이론’(같은 곳)
휴전협정 위반의 각도에서는 쌍방의 책임의 질과 양을 거의 교량하기 어려울 만큼 상호적임을 보았다. 군사력과 군사적 기구의 측면에서는, 한쪽은 한 대의 전투기도 없고 한쪽은 세계 제4위의 공군력으로 완벽한 제공권을 누렸다는 사실 한 가지로도 결론은 분명하다. 더욱이 군대(군인)식 사고방식을 중요시한다면 그토록 막강한 사이공 정부군이 총 한 방 제대로 쏘지도 않고 물거품처럼 완전 붕괴된 과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
결국 남베트남 사태의 종말은 남베트남 사회에 내재하는 특수성ㆍ원인, 그 작용, 작용에 대한 반응형식, 그리고 30여 년에 걸친 긴 과정의 인과관계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베트남인의 민족주의
베트남인의 민족의식에는 베트남전쟁의 어느 편에 서는 입장이건 예외없이 감탄한다. 천 년에 걸친 중국과의 관계에서 베트남은 결코 예속된 일이 없었다. 베트남인의 높은 의식과 자질은 인도차이나의 다른 민족의 두려움이 되어왔다.
프랑스 식민정책은 이 강인한 민족의식을 거세하기 위해 베트남을 북부(통킹),중부(안남),남부(交趾支那)로분할통치하는 방법을 취해왔다. 이것은 같은 제국주의ㆍ식민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의 아시아 식민지 운영방식과 대조적이다.
1858년의 프랑스-베트남전쟁, 1862년의 중부 베트남의 식민지화를 기점으로 한 프랑스에 의한 100년의 분열 지배정책은 이세 지역의 각각에 어느 정도의 특수성을 남긴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식민ㆍ외세가 조성한 지방적 차이점이나 특수성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차이성을 과장하는 견지는 바로 베트남 인민의 분열 상태의 지속에서 이익을 얻는 외부세력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식민지 예속화와 그 가장 악랄한 지배 방법으로서의 분열통치는 오히려 국가통치의 제약적 요소이기보다는 민족적 통합과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에네르기를 자극했다.
제2차 대전 후 전(前)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의 전후처리 구상에서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역시 분할통치를 추진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중국은 일정한 신탁통치 기간 후의 통일ㆍ독립 베트남을 구상했다(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시 구상). 한 민족의 내부적ㆍ역사적(일시적) 차이성이나 특수성을 강조하는 논리는 언제 어디서나 민족적 통합을 반대하는 동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민족 외부에서의 그런 논리는 그 민족의 분열ㆍ약화ㆍ예속적 상태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민족 내부에서의 그런 논리는 분열ㆍ대립의 항구화에서 이익을 얻는 자의 궤변이기 쉽다. 베트남전쟁의 긴 역사는 이것을 웅변으로 확인해주었다.
외국의 긴 지배를 겪은 베트남인의 민족주의를 가장 잘 이해한 것은 같은 동양인이고 같은 민족적 시련을 겪은 장개석인 듯하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탈린과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를 배제한 베트남 신탁통치안을 성안시켰다. 이 안은 아시아에서의 전쟁 진전 상황에 따라 수정되었다. 대(對)일본 전쟁이가열해진 1943년경에는 대일본 전쟁에서 중국의 역할 확대와 중국전선의 유지를 위해 인도차이나 ‘전역’(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를 합한)을 중국에 ‘증여’하는 안을 장개석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이 제의를 받은 장개석은 “베트남인은 결코 중국에 동화되지 않을 민족”이라고 답변하면서 루스벨트안을 사양했다(Henry Wallace, Toword World Peace, p.97).
1954년 제네바협정이 규정한 2년 후의 총선거가 예정대로 실시 되었다면 호치민이 80퍼센트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판단은 호치민의 개인적 위대성도 있었겠지만, 그가 민족통합ㆍ해방ㆍ독립의 민족적 결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사회주의ㆍ공산주의…… 그밖에 미국이 붙이기를 즐겨한 정치적 이념의 어떤 것이기에 앞서 베트남 인민의 민족주의의 권화(權化)였다. 남베트남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권위는 전쟁 중에도 높이 평가되었다. 적어도 민중의 차원에서 베트남 사태의 본질은 흔히 외부에서 말하기 즐겨하듯 현대 이데올로기의 투쟁이기보다는 민족의 해방ㆍ재통합을 위한 투쟁의 계속이라는 면이 기조였던것 같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파탄을 결과했다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건전한 의식을 가진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남베트남 정부의 황제,역대 대통령, 최고 지도자들은 이것을 국제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자본주의)의 투쟁으로 해석했다. 그들이 외국의 총애와 지원을 더 받으면 받을수록, 외부의 힘에 더 깊이 의존하면 할수록 대중의 눈에는 베트남 민족주의에 대한 적대적 존재로 비치게 되었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베트남의 역사 및 정치 문화적 환경에서는 거역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러면 남베트남의 소위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대중과는 어떤 입장에 섰던 것인가?
민족적 지도역량
사이공 정권이 1954년 이후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수세 또는 열세에 놓여온 이유를 ‘지도자의 결핍’에서 찾는 견해가 많다. 대표적인 하나의 예를 제시한다.
월남의 국가 운영에서 또 하나의 곤란은 지도자의 결핍이다. 프랑스에 의해서,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디엠 정부에 의해서 지도층이 거의 전멸되었다. 그리하여 정권의 지도자를 충원할 원천지는 군부가 유일한 형편이다. 이러한 지도자 또는 훈련된 관리의 부족은 정부 운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M. Beacher,“Political Instability in the New States of Asia”, Comparative Politics,『한국정치학회보』,제6집, 156쪽에서 부분 인용).
이 견해를 인용하면서 남베트남(사이공 정권)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논술한 입장(민병천,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은 그러나 그 과정의 어려움은 남베트남의 또 하나의 지도역량인 민족해방전선(또는 임시혁명정부)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작용한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인식 못 하고 있다. 소위 엘리트군의 형성이 그와 같은 요인으로 해서 형성되기 어려웠던 것은 오히려 해방전선쪽임은 모든 사실이 증명한다. 그러면 어째서 같은 조건환경에서 한쪽은 지도역량이 양성 강화되고 다른 한쪽은 계속 약화 쇠퇴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 두 개의 권력(정치적 집단)의 정치적 토대의 성격, 최고 지도층의 성분ㆍ경력ㆍ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종교적 성분
인구 1,881만(1972)의 남베트남의 약 80퍼센트가 불교도이고, 11퍼센트가 가톨릭교다. 가톨릭 가운데는 1954년 북베트남에서 내려온 가톨릭 신자 약 30만(전체 약 60~80만 중)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인구의 불과 11퍼센트밖에안 되는 가톨릭이 남베트남의 정부ㆍ군ㆍ관료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인구대비에서 극단적인 ‘과도권력집중’현상을 이루었다(Bernard Fall). 외래 종교인 가톨릭이 서양(非民族) 지향적이었음에 반해 불교도는 토착적이고 민족주의적이었다. 북베트남에서 도피해온 배경이 그 반공적 성격을 극단화했다. 그래서 사이공 군대 장교단의 50퍼센트 이상이 이 인구비 1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가톨릭이었다. 개중에는 최고 지도자 가운데 극소수의 불교도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국가의 절대적 권력을 소수의 가톨릭이 독점하게 되었다. 가톨릭은 교육과 사회적 기회를 장악했기 때문에 모든 국가 운영의 엘리트를 형성했고 가톨릭 정권이 하는 일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불교는 그 자체적 성격 때문에도 그랬지만 가톨릭 정권의 강력한 작용으로 인해서 바로 반(反)가톨릭 정권, 즉 반사이공 정권적 성향을 짙게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서로 비교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가톨릭 불교도
도시세력 중심 농촌세력의 대중성
부유층ㆍ지식인 이익 옹호 피수탈대중 이익 옹호
서구적 외부 지향 민족적 내부 지향
외세 의존 현대화 우선 토착ㆍ민족적 통합 우선
철저한 반공주의 관념보다 현실 해결
소극적 민족해방ㆍ통일 의욕 전통적인반식민투쟁의 토대
현상유지 노선 사회개혁 촉구
사이공 정부와 민족해방전선의 정치적 토대 및 성격은 이런 것이었다. 국민 11퍼센트와 80퍼센트의 대결이라는 성격의 일면을 말해준다.
최고 지도자의 경력
대중적 기반이 지도자를 규정하는 일면과 함께 지도자의 성분이 투쟁의 성격과 지향을 규정했다.
의장(풀브라이트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퍼시 상원의원이 방금 한 질문에 나도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남베트남 정부에 관해서인데, 키 장군(당시 부통령)이 1954년까지 베트남인의 대(對)프랑스 항전 시기에 프랑스 공군의 일원이었나요? 두 분 중에 아는 분이 있습니까?
겔브(증인)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톰슨(증인) 기억이 없습니다.
의장 그러면 키 장군은 어디서 비행기 타는 기술을 배웠나요? 우리 미국이 그에게 비행술을 가르쳤나요, 아니면 프랑스군이 가르쳤나요?
겔브 확실치는 않지만 프랑스군에서 배웠다고 믿습니다.
의장 티우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키와 티우 두 사람은 각기 프랑스 공군과 프랑스 육군의 장교가 아니었나요?
겔브 제가 판단하는 한 그렇습니다.
의장 얼마 전까지의 디엠 대통령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정부의 한 성장(省長)이 아니었던가요? 아십니까?
겔브 예, 그랬습니다.
의장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호치민은 이미 베르사유 회의 때부터 베트남 민족의 독립운동을 했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서 베르사유 회의에서 각국 대표에게 호소하고 다니며 민족독립에 몸바쳐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열강은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겔브 그렇습니다.
톰슨 그렇습니다.
(베트남 사태의 원인ㆍ과정ㆍ교훈에 관한 증문회(證問會)-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1972.5 의사록, pp.49~50)
사이공 정권의 역대 최고 지도자는 초기의 고 딘 디엠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군인이었다. 남베트남의 사태가 복잡해질수록 군대(군인)식 사고방식으로는 해결의 길을 찾기 어려워졌다. 대중을 세력기반으로 하여 사회혁명과 통일의 이념을 내걸어 정치투쟁을 전개하는 민족해방전선에 대해서 무력과 탄압으로 대응하는 ‘반응 양식’은 날이 갈수록 대중을 적으로 돌리는 결과가 되었다. 더욱이 그들이 거의 예외없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자기 민족을 억압하는 프랑스 식민군대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식민세력을 도운 프랑스군 현지인 장교였다는 경력은 그들의 의식 구조를 결정한 듯하다.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정체 모를 사람들’(facelessness)로 알려져 있었다. 1975년 5월 초순, 사이공에서 임시혁명정부의 새로운 각료 명단이 부분적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이미 1965년 프랑스의 트론 퓌(Tron Phu) 출판사에서 발행한 『남베트남 해방운동의 인물들』(Personalités du Mouvement de Libération du Sud Vietnam)이 밝혀낸 39명의 민족해방전선 지도자들과 일치한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남베트남 출신이고 각종 직업의 혼합을 이루고 있다. 여성까지도 저항전쟁 또는 독립투쟁의 경력을 가진 점에서 남성과 다름없다. 거의가 투쟁 과정에서 투옥의 경험이 있으며 지식, 교육, 출신 성분 등에서도 다양하다. 사이공 정부 지도자들에 비해서 어떤 하나의 소수집단을 대표하지 않는 대중적 배경을 갖고 있다. 특기할 것은, 직업적 군인은 몇 명 없고 대부분이 학자, 변호사, 건축가, 의사, 간호원, 소수민족, 배우, 교사, 문인, 학생으로서 항불(抗佛)ㆍ독립전쟁에 참가한 ‘아마추어 독립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다.(트론 퓌 연감의『공동연감』(共同年鑑), 1969판 베트남 특집 pp.84~85).
민족해방전선의 ‘통일전선’전략의 성공은 그들의 세력기반이 남베트남 사회의 모든 상하ㆍ좌우의 민중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와 같은 대중적 정치토대 없이 ‘전략’만으로는 성공이 가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베트남에 형성되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두 개의 세력에 관해서는 해리만(존슨 대통령의 파리휴전협상 미국 수석대표)의 예언이 너무도 적중했다는 감이 있다.
남베트남에서의 투쟁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나 다름없다. 한쪽은 자기 민족을 억압한 식민지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고 또 한쪽은 긴 독립ㆍ반식민지 투쟁에 몸바쳐 싸운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다. 어느 쪽 지도자들이 베트남인을 더 사랑하는가는 분명한 사실이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쪽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1969.1.20 협상 수석대표직을 사임하고 나서의 기자회견).
외부원조의 기능과 역기능
미국의 남베트남 정부 원조 부족이 패배의 주원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사이공 정부에 대한 지도자들의 입장이 그렇고, 미국 대통령과 군부 일부의 주장도 그렇다.
남베트남의 반공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쓴 미국의 군사비는 약 1,500억 달러로 알려졌다. 이것은 군사비만이다.
경제원조는 다음과 같다.
1950~54년(프랑스-인도차이나전쟁 지원) 27억 달러
1954~65년(제네바휴전 이후) 20억 달러
1966~74년(미국 전쟁화한 이후) 50억 달러
합계 97억 달러
(앞의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의사록과 AID 연간보고 종합)
이밖에 민간단체 원조, 미국 군인 및 가족ㆍ현지 기관이 남베트남 현지에서 소비한 막대한 금액과 각종 미분류 사용 금액이 있다. 그 액수는 어느 기록에서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으나 이 항목의 경제원조적 효과는 약 2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어떻든 미국만의 경제원조도 100억 달러를 넘는다. 한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의 경제물자 지원은 전적으로 도외시하고서도 그렇다.
이것을 장개석 국민당 정권에 쏟아부은 군사원조ㆍ경제원조의 합계와 비교해보자. 미국은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개시하여 49년 사실상 장개석 정권의 운명이 결정나서 미국이 철수할 때까지 12년간 경제ㆍ군사 목적의 무상공여와 차관 등 각종 지원 합계 35억 2,300만 달러, 주로 현물 또는 군사비 대충자금으로 사용된 10억 7,810만 달러, 합계 46억 110만 달러를 주었다. 각종 잡항을 합치면 50억 달러로 추산된다(미국 정부발행, 『중국백서』원조부).
중국의 광대한 땅을 유지하기 위해서 쓴 약 50억 달러(그것도 군사ㆍ경제 합계)에 비해서 1,500억 달러의 직접 군사비를 제외하고도 경제적 지원만을 위해 100억 달러가 남베트남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처럼 막대한 원조가 전쟁수행 능력의 일시적 효과라는 적극적 기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반면 외국 경제의 압도적인 작용은 오히려 장기적인 안목에서 남베트남의 사회ㆍ경제ㆍ문화적 구조와 남베트남인의 도의적ㆍ정신적 바탕에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국가의 전체 기능이 외국원조(따라서 외세) 의존적이 된 것이다. 전쟁경제는 극소수의 권력층에 부를 집중시킨 반면 대중의 복지는 거의 무시되었다. 도시 위주의 경제구조가 형성되고, 따라서 전쟁경기에 접하는 부유권력층의 사치풍조는 불교ㆍ가톨릭적인 본래의 검소한 생활양식을 파괴했다. 무한한 듯 보이는 물질의 충격으로 부패ㆍ타락은 남베트남 사회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장 심한 것이 사이공 정부 군대였다. 전통적으로 남베트남 사회의 조직적 토대였던 지방의 자치적 생활방식은 깨어지고 미국식 개인주의가 생존의 신조가 되었다. 사이공 정부 군대의 장교와 사병이 군수물자와 무기를 민족해방전선에 팔아넘기는 데서 수입을 잡는 사태가 일반화했다. 무기를 적재한 배, 트럭의 대열이 송두리째 해방전선으로 넘어가는 일에 관해서는 외국의 특파원도 나중에는 관심이 없을 만큼 생활화했다.
이 모든, 그리고 그밖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상은 한마디로 베트남 민족의 인간적ㆍ사회적 타락을 초래했다. 그럴수록 그것은 긴 항불ㆍ독립ㆍ통일 투쟁의 전통을 계승하는 민족해방전선에서는 세력확장의 기회가 되었다.
사이공 정권과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라고 단정한 민족해방전선에게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장기적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의 속성은 바로 그 반대 방향을 치달은 것 같다. 그 책임과 과오는 미국도 분담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그런대로 베트남 인민의 전통을 존중했다. 프랑스에 비해서 미국은 베트남 민족의 전통을 무시했다. 프랑스는 미국보다 가난했다. 미국의 경제력이 프랑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강대할수록 그 물량적 중압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눌려 베트남 사회의 고유 윤리는 붕괴해버렸다. 미국인은 동양인 특히 그들의 문화와 이질적인 베트남의 불교적 생활양식ㆍ가치관을 멸시했다. 베트남의 불교도에게는 독재ㆍ탄압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미국이 베트남의 파괴자로 비친 것이다(트리 쾅 僧,War, Crimes and the American Conscience, Erwin Knoll 엮음. pp.133~134).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에 대해서 미국과 사이공 정부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제도와 민중
서로 경쟁하는 상이한 사회제도와 이데올로기가 투쟁할 때, 후진적 농업국가에서 승부를 판가름하는 요소는 가난한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지지임을 남베트남은 실증했다. 1949년 중국의 결과가 그에 앞서는 좋은 예다.
남베트남의 농업(농촌)인구는 전체 인구의 80퍼센트면서 국가 수입 면에서는 30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공업이란 초보적인 상태여서 전체 제조공업의 고용인구는 12만(사이공 6만, 전 지방 6만)이다. 이밖에 5명 미만 고용의 가내공업 인구가 16만 8,000명이었다(「베트남 전후개발」-미월(美越) 합동개발조사반 보고).
몇 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만 보아도 남베트남의 제도가 특권ㆍ권력층 지향이지 대중ㆍ농민복지 지향이 아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 딘 디엠 대통령 시대인 1956년 농지 소유 100헥타르를 상한으로 하는 농지개혁(분배)법이 성립했다. 이것은 디엠 대통령의 민족주의적 정책의 일면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동기는 남북 총선거를 거부한 후 남베트남에서의 대중적 정치 기반을 굳히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의 사회주의적 토지분배 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특히 전(前) 식민권력 프랑스의 정부ㆍ프랑스인 지주ㆍ공인ㆍ개인의 소유였던 농지 41만 5,000헥타르가 베트남공화국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구적산’(舊敵産)인 이 농지 가운데 1970년까지 농민에게 분배된 것은 약 7만 헥타르에 불과했고, 34만 5,000헥타르는 1970년 3월까지 분배되지 않았다. 그러면 그 토지는 어떤 상태로 있었는가?
최근까지 베트남 정부의 고문으로 현지에서 근무한 미국 관리의 보고서에 의하면 대부분의 미분배 토지는 ‘정부 관리’하에 있었고, 정부 고위 권력자들이 최고액의 입찰자에게 그 땅을 도지(賭地)주고 있다. 지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은 토지분배의 이상적인 시기는 아니다. ……그러나 수백만의 농토 없는 빈농은 사이공 군대가 농촌 지방의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면 모든 것을 다시 빼앗기곤 했다. (베트콩에 의해서 분배된 농토는) 정부군이 그 지역을 점령하면 다시 정부군에 의해서 과거와 같은 낡은 소작제도가 복구되기 때문이다. 정부군이 점령하고 들어온 지역에서는 실제로 군부대의 보급트럭에 구지주가 함께 타고 들어와 부대장과 이익금을 분할한다는 계약으로 자기 소유 농지에 대한 소탕작전을 명하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베트콩에 의해서 이미 분배된 농지 소유권을 차라리 그대로 기정사실화 하는 방식을 포함한 농민 지향적 농지개혁을 하는 것이 어떤 한가지의 반란 진압 방법보다도 농민의 지지를 얻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사이공에 앉아 있는 ‘지주 지향적 지도층’이 진정 그와 같은 농지개혁을 지적(知的)으로 구상할 수 있느냐 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이공의 군장성과 의사들로 구성된 집단이기 때문이다(Bernard Fall, “Vietnam in the Ballance”, Foreign Affairs, 1996년 10월호, p.5).
1970년 미국은 농지개혁의 정치적 효과를 느껴 사이공 정부에 ‘무상분배’를 위한 재정원조 제공과 동시에 그 실시를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외국인 특파원의 현지 보도는 정부관리와 군장교들에게 일정한 비율의 ‘유상금’을 뇌물로 바쳐야 ‘무상’분배분의 명의변경이 되는 부패상을 알려주었다.
미국의 기본적 구상에도 문제가 많았다. 전쟁의 주도적 사회집단이 가톨릭ㆍ부유층ㆍ군장교단, 도시생활 기반의 주민, 외세 지향적 반공 지식인이었던 까닭에 베트남 농민의 복지는 거의 무시되게 마련이었다. 미국 정부와 사이공 정부는 베트남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을 예상했다. 그 승리를 토대로 남베트남의 ‘10년 경제복구계획’을 공동으로 작성했다. 웅장한 남베트남의 미래상을 국가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서 집대성한 것이「베트남 공화국의 전후개발:정책과 계획」(“The Postwar Development of the Republic of Vietnam: Policies and Programs”, March 1969)이다. 이 계획서는 농업ㆍ농촌의 부흥에 관해 이렇게 결론짓고, 정책화를 권고하고 있다.
……생산과 농가 수입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대토지 보유를 소단위로 분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부분의 작물은 (농지 소유를 분해하면) 대규모의 농지 보유 방식에 비해 경제적으로 경작할 수 없다. 그리고 농지 개량은 그와 같은 유리한 기업이나 노동이 불가능한 잠재적 사용자를 창조해내는 데까지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 지역적으로는 농업과 농민의 빈곤 해결은 작은 자가경작 방식보다 경제성이 높은 유효한 농업 노동력에서 찾을 수 있다(종합적 권고, 제7장 농업개발).
대단위 농지보유제도가 경제성ㆍ생산성이 높다는 것은 당연한 이론이다. 그러나 농민을 농업노동자화하는 방식으로 베트남의 농촌ㆍ농민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와 같은 견해야말로 땅에 굶주린 베트남 농민의 염원을 완전 무시한 것이다. 대단위 농업이란 농장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의 역사상 그와 같은 제도가 무엇을 뜻했는지 밝혀져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가난한 농민과 토지 사이의 정신적ㆍ정서적 관계를 일절 고려하지도 않은 태도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베트남 농민 1세대의 생계는 1헥타르의 땅이면 된다고 한다. 농지개혁 법안이 통과된 1956년 이후 70년까지 15년간 국가에 수용되어 권력자와 군장성들이 입찰자에게 임대해서 사복을 채워온 40만 헥타르를 처음부터 농민에게 분배했더라면 40만 세대의 생존이 확보되었으리라는 뜻이 된다. 토지 분배를 제네바휴전협정 이후, 상황이 평온할 때 즉시 실시했더라면, 1세대 5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200만의 농민이 정부를 지지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전체 농민의 자발적인 정치적 지지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며 베트콩이 생겨날 근거를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제도와 지도층은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었던 것 같다.
도시 주민의 복지정책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면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의료문제가 있다. 네덜란드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아르츠(Harold Arts) 부처의 남ㆍ북 베트남 방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1972년 8월 북베트남 방문과 73년 초의 남베트남 방문 기간중 의료 관계 사업과 지방을 조사한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국민의 의료복지에 대해서 북베트남 정부보다 훨씬 성의도 관심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인구 7,000명에 유자격 의사 1인꼴인데, 남베트남에서는 인구 5만 명에 1인꼴이다. 그나마 돈이 없는 사람은 혜택조차 받기 어렵다. 남베트남에서는 전쟁 그 자체로 인한 희생자 수보다 사이공 정부와 미국 정부의 민중의료ㆍ복지에 대한 무관심 탓으로 인해 생기는 환자 쪽이 더 많다는, 남베트남 근무 6년 경력의 미국 정부 파견의사의결론에 동의한다(日本東京, 共同通信社 발행,『世界週報』, 1973.4.17, pp.62~73).
그밖에도 많은 요인이 있다. 모든 것을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로 양분해버리는 사고방식도 그 하나임은 거의 모든 권위 있는 관측자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미군의 군사개입이 오히려 남베트남을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건전한 감각을 지닌 외국의 많은 사람들의 견해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 베트남인은 그런 성격의 민족인 것이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게 간곡히 충고한 대로 사태는 미국의 ‘비극’으로 끝났다.
베트남 사태는 그 종말의 형태에서보다 남베트남의 내부적 특수성ㆍ인과관계에서 더 많은 참된 교훈을 주는 전쟁이었다.
-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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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앞서『창작과비평』에 실린「베트남전쟁」I, II에 이은 제3부다. 제1부는 1972년 여름호, 제2부는 1973년 여름호에 각각 발표되었다. 이 제3부는 제1부와 제2부를 합친 35년간의 베트남 사태의 총평가며, 특히 파리휴전협정 조인(1973. 1.27) 후부터 전쟁 종결(1975.4.30)까지의 사태 발전을 토대로 한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 사태의 전 과정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전환시대의 논리』, 「베트남전쟁(I)」과「베트남전쟁(II)」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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