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먼저 사죄를 하자(1999)
1-5. 「베트남에 먼저 사죄를 하자」(1999년, 반세기)
-한국과 베트남, 그 바람직한 관계를 위하여1)
문학을 하는 여러분들이 우리의 민족적 양심에 가시처럼 꽂혀 있는 베트남전쟁을 놓고서 지난날의 한국의 행태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니 감동스러워서 정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가끔 집으로 보내오는 이 모임의 팸플릿들을 보면서, 어떻게 해서 이런 모임이 시작되었는가 하고 늘 궁금히 생각하던 터에, 오늘 이 모임에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지난날 일본인들의 무모한 행위에 대해서 반성을 촉구하고, 그들이 역사적 교훈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하곤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관계가, 베트남과 우리들의 관계에서는, 바로 우리가 일본이 되어 있는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식은 우리 국민들 사이에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모인 20여 명의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젊은 지식인들이 그와 같은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이 모임에 참석하게 되니 정말 깊은 감회와 아울러 나 개인적으로는 감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여러분이 내개 보내준 강의 요청에 관한 팩스를 보면, 그 내용이 상당히 많은 항목으로 되어 있었어요.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이란 무엇이냐, 베트남전쟁의 성격과 의미, 한국참전의 의미, 그리고 이런 과거사와 앞으로의 베트남문제를 보는 시각 등등,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의 항목들이 다섯 가지로 나뉘어 조목조목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평소에 하는 식으로, 오늘 하루 종일 100여 건의 기록과 문헌을 찾아보면서, 꽤 구체적인 사실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모임에 나와보니까 내가 준비한 식으로 강의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우선 당황하게 됩니다(웃음).
이를테면 내가 조사한 문헌 중에 하나는 작년(1996)에 출간된 미국의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입니다. 이 사람은 그토록 무모하게 베트남전쟁을 치른 미국의 베트남전쟁 최고 정책수립가이자 전략가죠. 나는 이 문헌을 토대로 여러분에게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었고,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정부 내의 초극비문서들을 다룬 ‘펜타곤 페이퍼’(미국 국방성 보존 최고 기밀문서), 미국 상원 청문회 기록, 국제법적 조명, 뭐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를 다룬 강의가 될 뻔했는데,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 좀 당황한 것입니다.
나도 금년(1997) 4월에 베트남에 처음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은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이 베트남에 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을 어떤 면에서 해소하는, 그런 여행이 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엔 까닭이 있습니다. 나는 한국의 불교 스님들이 베트남의 불교를 도우러 가는 모임에 초대를 받아서 베트남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스님사절단을 따라가다 보니까 주로 베트남 불교와 그 사찰 쪽만 구경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내가 알고 싶어했고가 보고 싶어했던 현장, 베트남 인민의 사회 혁명, 반외세ㆍ반제국주의 투쟁, 베트남전쟁의 현장들에는 들르지 못했어요. 그런 여행은 오히려 여러분들이 더 잘 그리고 더 자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이 되는군요. 정확하게 1965년 2월 10일에 미국은 베트남에 폭격을 단행했습니다. 엄청난 공군력을 가지고 월맹, 북베트남 전체에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격을 했습니다. ‘북폭’(北暴)이라는 전면전쟁이지요. 그때 나는 『조선일보』의 외신부장이었는데, 그날부터 전쟁이 끝나는 1975년까지 정확하게 10년 동안 단 하룻밤도 미국의 포탄 밑에서 죽어가는 베트남인들의 고통, 비참, 생명, 피흘림…… 그것들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자본 일이 없습니다.물론 전쟁을 하는 미군들의 죽음과 우리 파월국군들의 죽음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생각할 때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이 사용한 포탄과 폭탄의 합계 600만 톤보다 1.5배나 많은 약 1,000만 톤 이상의 포탄을 퍼부은 그 좁은 땅에, 그 엄청난 포탄 밑에서 심장이 터지고 머리가 으스러지고 팔다리가 찢겨나간 채 죽어가는 가난하고 순진한 베트남인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정말 10년 동안을 괴로워했습니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외신부장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전쟁 뉴스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 기사를 만들어 집어넣고는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면서, 개인적으로 술도 많이 마신 때였지만, 집으로 돌아가서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또 죽어가는 베트남인들을 생각했던 겁니다.이제는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베트남전쟁, 한국군의 월남파병, 베트남사태의 성격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그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들을 가끔씩 접하게 됩니다. 약 400만 명에 이르는 베트남인의 생명과 육체, 국토의 전면적 파괴를 거친 뒤에야 미국과 한국이 저지른 그 엄청난 비극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반공 성전’이라는 뚱딴지 같은 선전 때문에 베트남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의식은 한국 사회에 전혀 없었습니다.그 한 예로, 1965년 4월,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을 때를 봅시다. 이때 국회에서 단 한 사람만이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그 당시 국회에는 박종태라는 분과 서인석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두 분은 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당인 공화당에 속해 있었습니다. 박종태 씨의 경우는 당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끝내 부표를 고집했고, 서인석 씨는 투표가 끝난 뒤 검표 과정에서 자기는 투표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즉 기권으로 바꿨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트남전쟁 파병에 대한 국회의 반대표로 역사의 기록에 남은 것은 단지 한 표뿐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군대가 초강대국 군대의 보조물로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그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투표였습니다. 그런데도 국회의 반대표가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 남한의 정치인, 지식인,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의식수준이 어땠는가를 말해주는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죠.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가 베트남전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61년 11월 16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1년 5월에 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한국의 군부와 그 대표자인 박정희 소장이 정권 승인을 받기 위해서 미국에 조공을 바치러 갔는데, 그때 정권 승인의 조건이 네 가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단행할 것, 즉 정치적으로 일본과의 한일회담을 타결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 경제권 안에 한국을 편입시킬 것이며, 셋째는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미국 군대의 죽음을 대신할 것, 그리고 넷째는 형식상 최소한의 선거를 실시해서 합법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민정이양’의 모양새를 갖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미국도 군사정권을 인정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그 박정희 씨의 와싱톤 방문에는 리승만 정권 시대와 민주당 정권 시대에 부패ㆍ타락하지 않은 기자 세 사람만 동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지금은 통일원장관이 되어 있는 권오기 씨와 합동통신의 나, 그리고 『조선일보』에서 또 한 사람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와싱톤 방문현장을 취재하고 목격했습니다. 그때 나는 앞으로 ‘베트남전쟁에서 우리의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겠구나’하는 불길하고 무서운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때는 파병 결정을 내리기 몇 년 전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베트남전쟁에 대해 미리 관심을 가지고 베트남 사태와 역사를 혼자서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식인이나 언론인, 학자, 전문가들이 전혀 엉뚱한 각도로 베트남 사태를 보고 있을 때, 내 나름대로 외롭게 베트남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쓰고, 발언하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다음은 베트남전쟁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오랜 외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그에 반항하고 민족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며 싸운 애국지사와 역대 외세에 빌붙어서 일신의 영달을 꾀해온 민족반역자들의 싸움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일제하에서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들과 달리, 민족을 팔아먹고 일본에 부역을 했던 자들이 해방 후에 한국의 총체적인 지배권력을 장악했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수 있습니다. 즉 해방 신생 독립민족 내의 민족 양심세력과 민족 반역세력의 싸움이었습니다.재미나는 것은,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미국인과 한국인이 업신여겨서 ‘베트콩’이라고 부르는)의 중앙위원회가 3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39명 가운데는 100년 이상의 과거 프랑스 식민지와 그 뒤를 이은 3년 동안의 일본 통치하에서 민족해방과 반외세 항쟁을 벌이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또 여성위원들까지 포함해서 그로 말미암아 투옥되거나 징역살이의 투쟁경력을 갖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몇만 명의 미국인과 한국인 청년이 10년 동안 많은 목숨을 버리고 피를 흘려서 도운 남베트남의 소위 “반공 자유 월남 사이공 ‘반공ㆍ우익ㆍ친미’정권”에는, 과거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사람이라곤 육군 중령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구엔 가오키 수상, 구엔 반 티우 대통령, 구엔 콴 등 우리가 아름을 들 수 있는 모든 베트남의 ‘친미ㆍ반공’적 군장성들은 예외없이 프랑스 식민지 통치 군대의 육군 중위, 공군 소위 따위들이었습니다.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지배계층 역시 그러했던 겁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베트남전쟁이 민족 내부에서 어떤 성격을 지닌 싸움인가 하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겁니다.사회정치적으로는 개혁과 혁명을 지향하는 민중에 바탕을 둔 현상타파 세력과 식민지하에서 치부하고 권력을 장악한 기득권자들, 즉 현상유지 세력과의 투쟁이었습니다. 또 사회계층적인 성격으로 말하자면 농민 대 관료, 지주, 상인 등 농민에 반하는 세력들과의 대립이었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면 80퍼센트의 토착 불교세력과 11퍼센트의 서양 지향적 외래 종교(주로 가톨릭) 세력과의 대립이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물론 사회주의ㆍ진보세력ㆍ공산주의와 자본주의ㆍ반공주의로 대별되겠죠. 그밖에 미국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약소국가를 침탈한 신제국주의가 있겠지요.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당시에 세계적인 반공 포위망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허구적인 ‘도미노 이론’을 가지고 미국숭배적인 어리석은 동맹국가들의 정부와 국민대중의 건전한 판단의식을 마비시켜버렸던 자기기만적 사상풍조입니다. 실제로 일본이 패망한 1945년에, 전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가 다시 들어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벌인 9년간의 제1차 베트남전쟁이 끝난 1954년에 ‘제네바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2년 뒤인 1956년에 남북을 통틀은 총선을 치러서 통일 국가를 수립한다는 조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1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급변했어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제네바 휴전협정회의 의장국인 영국의 이든 수상에게 서한을 보내 제네바 정전협정에 의해서 1956년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던 남북통일ㆍ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 실시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입니다. 미국은 베트남 휴전협정대로 1년 뒤에 통일선거를 실시하게 되면 베트남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하게 될 텐데, 이런 상황현실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느냐면서 압력을 가했습니다. 의장국 영국은 이에 굴복했고 통일선거 실시 합의는 백지화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이렇게 1954년 제1차 베트남전쟁 휴전협정에서 결정된 남ㆍ북 통일선거를 미국이 보이콧하고, 남베트남을 미국의 동남아시아 군사망의 전방기지와 반공진영 속으로 굳히는 정책의 결과로서, 제2차 베트남전쟁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군사전문가들이나 군 역사학자, 정치학자 들의 일반적인 평가입니다.이런 사실을 놓고 생각할 때,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민족자결이라는 내셔널리즘 대 미국의 반공주의적 패권주의 사이의 갈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죠. 또는 미국적 관점에서 전쟁을 지배했던 이념인 무력ㆍ힘ㆍ군사력ㆍ과학기술 등 물질력의 돈 만능주의에 대해서, 베트남의 민족적 해방, 사회혁명ㆍ공산당 조직의 헌신적 지도역량, 사회주의적 일체감, 민족독립심, 정신주의, 인구 80퍼센트의 불교신자의 반외세 의식의 역량ㆍ토착적 농민들의 주인의식ㆍ지도자의 자질ㆍ역량ㆍ애국심, 이런 요소들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군사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미국 군대의 정규전에 맞서 베트남 농민 사회가 벌인 게릴라전이었다고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패권주의ㆍ국가 이기주의ㆍ반공 간섭정책 등에 대해서 당시 제3세계와 비동맹세계에 팽배했던 시대적 사조로서 반서방적 사회혁명ㆍ민족자주 정신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이런 성격을 지닌 전쟁임으로 해서, 전쟁이 최고조로 달했던 1968년 한 해 동안만 해도 미군 탈주병이 5만 3,352명이나 되었습니다. 미국이 국가를 건설한 이래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왔지만, 이처럼 미국 군인들이 자기 국가의 전쟁을 거부하면서 이처럼 대량으로 탈주한 일은 없었어요. 게다가 1961년부터 7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을 통틀어서,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기 위해 징집을 거부하거나 기피하거나, 또는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57만 명이나 됐습니다. 이런 숫자를 들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까닭은 이런 전례가 세계의 전쟁 역사상 없었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지도자들이 내세우는 대의명분과는 정반대로 윤리성과 도덕성이, 바로 자신의 국민들에 의해서 거부당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게 합니다. 남한국민만이 이런 진실을 몰랐고, 베트남전쟁을 ‘반공ㆍ자유를 위한 성전’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모임은 앞으로 베트남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더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얘기가 과거의 정책 쪽에 집중되어 있어서 좀 안됐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베트남과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알려면 과거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가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다음은 한국의 월남전 파병에 관해서 말해봅시다. 주로 참전을 주장하는 쪽에서 정당화하는 논리이지만, 흔히 미국에 대해 우리나라가 신세를 진 까닭에 그 신세를 갚기 위해 참전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반공의 ‘전쟁’이니까 참전해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나름대로의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6ㆍ25전쟁과 그 후의 경제적 원조 등 미국에 대해 신세진 점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그러나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세계에서 미국의 신세를 가장 많이 진 국가는 영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미국과 영국은 조상이 같은 형제국가이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렇거니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나치 독일에 의해서 그야말로 영국이 멸망할 것 같은 단말마적인 순간에 미국이 구출해주었습니다. 그 후에도 경제와 생활이 총체적으로 파탄되어 삼류국가로 떨어진 영국이 다시 일류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것은, ‘마셜 플랜’에 의해 도움을 준 미국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이와 같이 신세를 진 것을 질이나 양으로 따지더라도 우리보다 영국이 몇십 배로 컸습니다.그런데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마찬가지로 미국에 신세진 오스트레일리아가 처음에 200명을 보냈다가 나중에 2,000명을, 뉴질랜드가 30명에서 500명을, 대만이 30명을, 필리핀이 17명으로 출발해 2,000명을, 태국이 1만 1,000명을 보냈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 숫자는 대부분이 포병대와 공병대, 민간봉사대, 후방기지 경비대들이었습니다. 피난민 구호 등 간접적이거나 아니면 복구작업을 위해 보낸 공병대가 대부분이었어요. 그에 반해 우리 대한민국만이 전투병으로 5만 명을 베트남 전선에 상주시킨 겁니다(전쟁기간 중 연 50만 명).내가 좀 전에 영국의 예를 든 까닭은, 미국이 자기들에게 신세를 진 모든 예하 국가, 아시아의 거의 반예속적 동맹국들에 대해서 압력을 넣어 군대를 파견하게 했지만, 미국의 요청을 거부할 처지가 못 되는 영국이 끝끝내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968년에 들어와서 영국도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모습을 형식적으로라도 갖춰달라는 미국의 거듭된 애원에 못 이겨 겨우 의장대 6명을 탄손누트 공항에 파견했을 뿐입니다! 외국 귀빈들이 사이공 공항에 도착할 때 열병ㆍ사열에 영국기와 6명의 의장대가 들어 있음으로써, 마치 영국(군대)도 미국을 도와서 베트남전쟁에 참가하고 있다는 겉치레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뜻을 지닙니다.의장대 6명!영국 정부, 정치인, 지식인 들, 그리고 영국 시민들은 베트남 사태와 미국의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까 내가 강조한 것처럼, 미국에 신세를 가장 많이 진 그런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전투부대 파견은 끝내 거부했어요. 의장대 6명 파견으로 영국 국민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을 입증하면서 미국의 체면을 살려준 것입니다.이것으로써 양면의 평가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미국의 케네디와 박정희 육군 소장의 합의를 말씀드렸지만, 결국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 군부의 쿠데타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얻고, 해방 이후 최초의 군인국가를 확립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회ㆍ문화ㆍ정치 등 모든 차원에서 국가의 군사화를 이룩하게 된, 그 후 30년에 걸쳐서 오늘날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문제의 모순이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그리고 한국은 베트남전쟁의 파병으로 인해 20억 달러의 경제특수를 얻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출발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우리는 늘 일본의 경제 발전에 대해서, 한국전쟁을 기화로 돈벌이를 한 게 아니냐고 비난을 합니다. 일본은 베트남전쟁에 군인 한 사람 보내지 않고도 미군 군수품 생산이나 용역으로 직접 획득한 이득이 32억 달러, 간접으로 효과가 나타난 것이 20억 달러로, 가만히 앉아서 52억 달러의 특수라는 결과를 누렸습니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보세요.또 하나는, 우리 군대의 작전 훈련과 실전 경험을 높인 군사적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 미국과의 계약에 의해서 한국군의 무기 현대화를 추진했습니다. 이런 것이 플러스적인 측면입니다. 문제는 한국전으로 인한 일본 경제의 특수경기를 비도덕적 행위라고 우리가 공격하고 비난한다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경제ㆍ군사ㆍ무기ㆍ경제개발 계획의 공은 한쪽으로는 윤리성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겠지요. 윤리성이란 계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양을 화폐로 바꾸어 내면화하고 물질화해서 계산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부의(不義)ㆍ부정(不正)스러운 전쟁의 ‘용병’ 역할로 황폐화한 국가와 국민의 윤리ㆍ도덕적 타락은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았습니다.구체적인 한 예로, 과거에 독립운동가였다가 뒤에 우리 야당의 정치지도자가 된 박순천 여사가 베트남에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었어요. 그 광활한 토지를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고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공항에 내려서자 베트남의 땅에 입을 맞추면서,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 민족의 위력을 발휘한 이 비옥하고 광활한 땅이 우리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하고 감격했다는 내용의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의식이 자리해왔던 겁니다. 베트남 인민의 땅을 군사력으로 탐내는 그 수준의, 그런 종류의 의식이었습니다.특히 베트남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게 되었던 까닭은, 미국과 한국 정부ㆍ군대ㆍ극우 반공주의자들의 모략ㆍ선동ㆍ선전과 베트남전쟁에 대해서 무식한 우리 언론기관들이 그 비판적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반공주의와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되었지요. 세계의 누구나 알고 있는 베트남 민족의 염원과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와 패권주의의 본질을 한국 국민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 리승만 정권 말기까지는 우리 언론이 상당히 비판적 균형을 발휘했는데, 군부 폭력 밑에서 극우 반공주의와 미국의 선전에 의식이 마비되어, 언론기관과 언론인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직무로서의 비판기능을 맡지 못했습니다. 그 뒤의 결과가 우리가 몇 세대에 이어서 군사정권을 받들 수밖에 없는 사태로 나타난 것이지요. 나 개인으로 말하면 베트남전쟁에 대한 비판적 언론활동 때문에 정부의 압력을 받아 『조선일보』의 직을 강제해임당했습니다.그 반면, 비판의식을 지닌 세계 다른 나라의 지식인들에게는 미국이 하고 있는 전쟁의 성격이 분명했습니다. 그 오랜 20년 동안에 걸쳐서 직접적으로 베트남에 죽음과 황폐를 안겨준 당시 미국의 전쟁정책 최고 결정권자이자 전략가인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미국과 한국 지식인들은 ‘걸어가는 사전’, ‘워킹 컴퓨터’, 또는 ‘면도날 같은 두뇌’라고 불렀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일에 대한 답변이 머릿속에 이미 다 마련돼 있는 군사적 천재라고 미국과 한국의 신문ㆍ방송 들이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천재적인 맥나마라 장관이 종전 20년 후인 1995년에 저술한 회고록(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아니, 차라리 한심하다고 해야겠지요. 그 가운데서 다른 것은 생략하고, 핵심적인 것만 간략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베트남 민족과 ‘반공전선’이라는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그는 11개 항목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첫째,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 소위 베트콩이라고 경멸했던 사람들과 북베트남 사람들의 탁월한 자질과 능력을 완전히 오판했다.
둘째, 친미국적인 남베트남 사이공 반공 정부 지도자들의 반민족ㆍ반민주적 과거경력과무능력을 오판했다.
셋째, 아무리 약소하더라도 각성한 민족이 발휘하는 내셔널리즘의 역량에 대해 무지했다.
넷째, 베트남의 역사ㆍ문화ㆍ인민ㆍ정치의 특성과 그 지도자들의 인간적 요소 등을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이 무시했다.
다섯째, 미국 군사력의 과학ㆍ기술ㆍ지식ㆍ미국적 물질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반면에 의식화된 인민의 정신적ㆍ도덕적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여섯째, 미국 시민의 전쟁열을 조성하는 데 실패했다. 즉 미국 국민의 호응을 얻는 데 실패했다.
일곱째, 베트남전쟁을 수행하는 ‘목적’에 대해 국민적 이해를 얻는 데 실패했다.
여덟째, 미국식 사명감의 독선에 빠져 있었다. 즉 미국식 제도를 이상화해서 세계 어디서나 미국식 제도를 적용해야 한다는 독선에 빠져 있었다.
아홉째, 세계 우방국가들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지 못했고, 그런 협력 없는 전쟁에 뛰어들어간 무모함을 범했다.
열째, 미국 국력의 무적성(無敵性)에 도취된 나머지 이런 불합리한 정황 속에서 다급하게 해결하려고 한 것이 실수였다.
열한째, 마지막으로 군사력이 아닌 방법, 즉 협상이나 상황을 적절히 조성하거나 평화적인 조건을 만드는, 다시 말해서 무력이 아닌 방법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경시했다.
이렇게 11개 항목으로 나누고 있습니다.자기 자랑이 될까 좀 면구스럽지만, 나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의 첫날부터 그 사실들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의 무지와 오만 때문에 수백만의 베트남인이 죽어야 했고, 병신이 되어야 했고, 국토가 파괴되어야 했습니다. 미국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이와 같이 맥나마라라는, 전쟁을 벌인 당사자, 유일 최고 정책수립자 자신이 이제 와서 반성하며 제시한 11개의 베트남전쟁에 관한 항목은 여러분이 베트남전쟁을 뒤늦게라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국과 베트남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베트남전쟁이 계속되었던, 그 30년 동안에 미국 정부 내에서 작성되고 교환된 극비사항을 다룬 문서가 이른바 ‘국방성 극비문서집’(펜타곤 페이퍼)입니다. 이 최고급 비밀문서집이 언론에 의해 폭로되면서 미국이 북베트남 전역에 전쟁을 확대한 행동을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려 했던 소위 통킹만 사건이 미국 군부와 정보당국이 합작한 완전 조작극이었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습니다. 월맹 해군 어뢰정이 공해상에서 미국의 구축함을 공격했다는, 그래서 북폭의 구실이 된 것이 그 유명한 ‘통킹만 사건’입니다. 전 세계에 월맹에 대한 미국의 북폭을 정당한 것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죠. 펜타곤 페이퍼에서는 이 사건이 미국 해군과 CIA가 협력해서 조작한 사실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베트남전쟁 중 수없이 많은 조작공작 중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지만요. 이처럼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맥나마라 장관 자신 스스로 20년이 지난 후에 반성하고 있는 겁니다. 그밖에도 전쟁기간에 은폐되었던 많은 사실을 이 회고록은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 집권층 집단의 오만과 무지 때문에 죽은 베트남인이 몇백만이며, 포탄과 고엽제로 병신이 된 사람이 몇십만이며, 파괴된 토지와 재화가 얼마이겠습니까? 그 가난한 베트남 인민의 행복은 어디로 갔을까요?그렇다면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왜 했는가? 물론 미국의 입장은 그것이 반공, 아시아 민족의 자유, 베트남 정부와 인민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펜타곤 페이퍼의 극비문서 속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그 당시 맥노튼 국방차관보가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다시 말해 1965년 3월 24일에 나오는 대목을 한 예로 들면,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 목적’ 중에서 70퍼센트는 세계에서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하기 위해서, 즉 오로지 미국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였고, 20퍼센트만이 남베트남 및 이웃 나라를 중공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베트남 국민과 정부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은 10퍼센트,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이 통일 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한 그해에 『한겨레신문』논단에 이런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과거를 들추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서 그 원한을 잊지 못한다면, 우리가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이 단계에서 베트남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국가적으로 속죄와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현재,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과거 월남 파병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행위로 태어난 혼혈아들의 딱한 처지를 돕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별로 속죄행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파병한 우리 군대에 의해서 죽거나 부상한 베트남 국민의 아들이나 딸이 대학에 간다거나 할 적에 학비를 대고 싶다고 베트남 대사에게 그 선정을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나로서는 한국인으로서의 경건한 속죄의 표시로 학생 한 명의 학비를 돕겠다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밖에 문화적으로는 베트남전쟁이 무엇이었느냐, 우리의 참전이 무엇을 의미했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겁니다. 보기가 딱한 베트남의 현실을 보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불구자와 거지들, 직접적으로는 전쟁의 총탄에 의해 화상을 입은 불구자와 간접적으로 고엽제로 인한 불구자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서, 처절하고 불행했던 지난날의 한국(인)의 행동과 의식을 소재로 한 좋은 문학작품이 많이 창작돼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미국의 개인ㆍ민간단체ㆍ정부가 베트남에 원조를 하고 지난날을 씻으려고 하는 노력이, 미국의 극우 반공 입장의 단체인 재향군인회에서조차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미국인이 우리보다 낫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우리도 뭔가 그런 방법과 형태로 베트남에 대해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지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그중에서도, 국가적이고 국민적으로 할 일은 베트남전쟁의 피해자들, 즉 불구자들과 고엽제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길가에 버려진 그 사람들을 치료하는 큰 병원을 대한민국 정부 또는 국민의 이름으로 건설하고, 거기에 의사들이 지원해서 가고, 그렇게 해서 부정적인 베트남전쟁 파병의 역사를 씻는 관계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역이나 경제, 합작회사나 노동력 원조라는 경제적인 돈벌이에 힘을 쏟기보다도, 나는 그런 것을 더 생각합니다.
여기서 내 강의는 끝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1) 이 글은 ‘베트남을 생각하는 젊은 문인들의 모임’이 주최한 ‘제2회 베트남 연대의 밤’ 행사(대한출판문화회관 강당, 1997.10.20)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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