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한반도는 강대국의 핵 볼모가 되려는가」
8-5. 「한반도는 강대국의 핵 볼모가 되려는가」(1983년, 분단)
한반도 주변정세의 질적 변화
한반도를 둘러싸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개되는 국제정세의 추이는,몇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질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 반도에서 생을 타고난 전체 민족의 생존양식과 운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우리는 1950년부터 3년간에 걸쳐 민족상잔의 쓰라린 체험을 한 민족이기에, 모든 위기는 일단 6ㆍ25전쟁과 비교해서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 반도에서 남북으로 찢기어 사는 한민족이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될 일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의 갈등 속에서 그들의 ‘대리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초강국들의 ‘국가이기주의’의 어느 쪽 ‘앞잡이’가 되어서도 안 되고, 그들의 국가 이익을 관철하려는 전쟁정책의 ‘볼모, 인질’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 반도의 남쪽이건 북쪽이건, 이 민족의 누구도 주변 강대국들의 어느 누구를 위해서 죽을 필요가 없으며, 삼천리 강토의 한 치라도 강대국들의 자기 목적 추구를 위한 전쟁터로 제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에서 형성되는 강대국 간 이해관계의 구도는 바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질 듯한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 제2의 민족상잔을 유도할지도 모르는 조건들과 요소들이 우리 자신의 의지를 무시한 채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서 구축되어가고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19세기 말에 이 땅을 둘러싸고 전개된 식민국들의각축전이 거의 원형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한반도는 동북아 정세라는 기상 변화의 ‘태풍의 눈’이다. 이 태풍의 눈을 핵심으로 해 형성되는 현재의 기상도는 6ㆍ25와 그 후 지난 30년간의 그것과 몇 가지 측면에서 ‘질적’으로 달라 보인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장기적인 진정한 이해와는 관계없이, 그리고 국민경제의 능력과 한계와는 아랑곳없이 ‘무제한’ 군비경쟁이 강요되고 있는 사실이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세계적으로 선언한 군비증강 및 군비경쟁 정책은, 제2차 대전 종결 후의 ‘제한적’ 군사 대결과는 달리, 정치ㆍ경제ㆍ군사ㆍ사상적으로, 즉 종합적이고 전면적으로 ‘소련이 굴복할 때까지’무제한으로 군사적 대결을 강요하겠다는 구상이다. 미국의 세력권 속에 묶여 있는 한국은 레이건 정권의 이 같은 전 우주적 규모의 대결 강화 노선과 사상의 하위 동맹국으로서, 우리 자신의 이익을 고려해서라기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주로 하는 무제한 군비경쟁 노선에 국민적 자원을 소비하고, 자칫하면 미ㆍ소 대결의 볼모가 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속에 놓이게 되었다.
둘째는, 해방된 지 37년 만에 한국(남한)과 이 반도에 다시 일본 군대가 들어오게 될 것 같은 정세가 조성되는 사태가 진전되고 있는 점이다. 일본은 이미 1981년까지 25년간에 걸쳐, 5회의 5개 117년 군비증강 계획을 마치고 명실공히 군사대국이 되었다. 현대전을 가름하는 첨단ㆍ최신예 과학무기의 현 수준과 잠재력을 고려할 때, 일본 군사력은 오히려 중국(중공)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핵무기의 자체 생산 및 보유도 먼 장래의 일이 아닐 것이며, 핵능력으로 뒷받침되는 1990년대의 일본 군사력은 소련, 중국, 미국과 완전히 대등한 행동적 수단이 될 것이라 믿긴다. 또한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그와 같이 막강한 일본 군사력의 행동 방향(즉 가상적 작전지역)이 한반도라는 사실이다.
셋째로, 질적 변화는 한ㆍ미ㆍ일 3국 군사동맹 체제가 급속히 굳혀지고 있는 현실을 말한다. 전 지구적, 전 우주적 대소(對蘇) 전면공격 구상을 기본 전략 개념으로 하는 미국은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전쟁 책임의 ‘상당 부분’을 일본 군대에 위임하려 하고 있다. 그 역할 분담 체제는 일본과 한국의 ‘군사협력’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여태까지는 일본과 미국이 미일 안보조약으로, 한국과 미국이 한미 안보조약으로 연결되어 미국을 접점으로 하는 한ㆍ일 간에 간접적 군사동맹 체제를 이루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사태는 간접적 동맹관계였던 것을 직접적 군사동맹 관계로 한국과 일본을 엮으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1964년의 한일 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미국의 장기적 전략에 따라서 치밀하게 한 단계 한 단계씩 기정 사실화되어온 이 과정은, 우리에게 전연 새로운 국민적ㆍ민족적 자기관찰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날의 역사에 비추어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냉정한 이성적 자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는, 이 민족이 생(生)을 타고난 이 반도가 미ㆍ소ㆍ일ㆍ중 주변 4대 강국의 ‘핵전쟁터’가 될지 모른다는 위험성이다.그것은 이미 위에서 요약한 사태 진전과 아울러, 한국(남한)이 미국의 핵무기 기지가 되어 있는 은인(隱因)때문에더욱 현실화해가고 있다.
미ㆍ소(일ㆍ중) 대결 전략은 초전에서부터 ‘핵’무기의 사용을 개념화하고 있다. 재래식 국지전쟁으로 끝난 6ㆍ25와는 전혀 다른 전쟁 구상이 적대 강국들 사이에서 공인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은, 지구 어느 지역보다도 우리 민족의 생존의 터전인 이 반도를 대결의 제1차적 시험장으로 지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 위험성은 ‘자칫하면……’이라는 미래ㆍ가상형의 수식어로 완화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확정적인 모습으로 공언되고 있다.한마디로 말해서, 이 반도와 겨레는 강대국들이 이해 대립의 승부를 가리는 ‘핵전쟁의 볼모’가 되려 하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강대국들의 표면적ㆍ공식적 발언과는 관계없이 군소 국가와 민족의 운명은 그들 강대국의 ‘국가이기주의’로 요리되어왔다. 우리 민족은 조상들이 되풀이해온 비극을 우리의 세대에서는 결코 재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복잡하게 조성되는 주변 정세에 대한 정확하고도 종합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식을 안내역으로 삼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농간에 말려들지 않고 이 민족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 그 인식을 지혜로 바꾸고 다시 그 지혜를 무기 삼아 굳은 의지로, 강대국 위주의 상황 조성에 대처해 나가야 할 것으로 믿는다.
무한 군비경쟁의 위험성
지난 1960년대와 70년대는 베트남전쟁과 중동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ㆍ소 초강국은 직접 대결을 회피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무기의 질적ㆍ양적 발달로 말미암아 그들의 직접 충돌은 바로 ‘핵전쟁’임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체결된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 핵확산금지조약을 비롯한 몇 가지 중요한 합의, 1970년대 초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의 몇 개 합의 등은 바로 핵초강국인 미ㆍ소가 서로 핵충돌을 회피하려는 의사 표시였다. 이것은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미국과 소련만이 핵전력의 최고 체제를 상호 합의해 독점함으로써 미ㆍ소가 서로 각각의 영토와 국민에 대한 상대방의 공격을 회피하는 핵시대의 미ㆍ소 세계지배질서(Pax Russo-Americana)였다. 특히 전략무기제한협정은 대륙간 탄도탄의 발사체(미사일) 수량, 그 발사 기지의 위치와 수, 탄도미사일을 방어할 요격미사일의 수와 기지의 위치 등을 합의하고 상호간의 정보 통고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거리 핵미사일에 관해서는 그와 같은 제한을 두지 않았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에 관해서도 그 ‘질’적 개량은 제한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영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탄에 관해서는, 그 공격ㆍ방비의 모든 면에서 면제된다. 미ㆍ소를 제외한 그밖의 핵무기 국가들의 대륙간 핵미사일 수준은 낮고, 또 미ㆍ소는 언제나 그들을 앞서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으로부터도 면제된다. 또 대륙간 탄도탄의 질적 향상을 ‘백지 상태’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미ㆍ소는 꾸준한 질적 개선으로 미ㆍ소의 세계적 핵지배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다음은 중거리 핵미사일 문제다. 상호간 영토와 국민을 상대방의 공격 가능성 밖에 놓게 된 미ㆍ소 핵초강국은 중거리 핵미사일의 양적 생산과 질적 개발을 통해서 미ㆍ소 영토의 중간지대를 기지로 하는 공격 및 방위체제를 서두르게 되었다. 미ㆍ소의 중간적ㆍ근접 거리에 있는 국가들이 그 중거리 핵미사일의 발사 기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다시 말해서 미국과 소련은 자기 영토와 국민은 다치지 않고, 동맹국가들의 영토를 기지로 하는 핵전쟁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략은 그들 초강 핵국가의 핵무기 기지를 두는 중간 동맹국가들에 대한 초강 양대국의 핵보복 또는 선제공격을 전제로 하게 된다. 유럽 국가의 민중이 이 같은 미ㆍ소 핵전쟁 전략에 반대하는 것은, 자기들의 땅과 동족의 운명이 미ㆍ소 초강 핵국가의 이해충돌의 결과인 핵전쟁의 볼모가 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몸부림이다. 미ㆍ소 핵대결 전략이 동맹국가와 그 국민을 희생으로 하는 전략이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전략은 미국에서 레이건 보수정권이 집권함과 동시에 시작된 ‘전 우주전쟁’구상의 일부로 추진되고 있다. 소련도 미국과 비슷한 구상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레이건 미국 정부가, 자국의 ‘무제한 군비경쟁’정책을 합리화하는 구실로 ‘소련의 핵무기 협정의 위반’과 ‘소련의 군사적 우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특히 미국 군부와 군수산업)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세계의 중립적ㆍ독립적인 권위 있는 연구소나 전문가들이 적지 않은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첫째는, 소련의 군사우위가 1, 2년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닌데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시대에는 그런 주장이 없었고, 그런 주장을 앞세운 무제한 군비경쟁이 추진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1974년에 미국과의 사이에 조인된 전략무기제한협정을 비롯한 몇 개의 중요한 협정을 소련 의회는 모두 비준했는데 미국 의회는 아직껏 비준을 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이에 대한 증언으로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증언만큼 유력한 것은 없을 터인데,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주목할 만하다.
나의 백악관 시기의 경험으로는, 소련은 제1차,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 탄도미사일ㆍ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 등등, 여러 협상에서 성실하게 대응해 왔으며, 내가 아는 한에서는 소련은 이들 조약과 협정을 위반한 일이 없다.
그리고 소련이 태도를 바꾼 것이 레이건 정권 수립 후부터라는 의미로, “그런데 지난 2년간은 소련도 미국도 핵군축 제안을 하면서도 공통의 의제에 관해서는 진지한 협상을 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1983.5.28,『아사히신문』(朝日新聞), 14판 제4면, 와싱톤발 하라(原), 오다(小田) 두 특파원의 카터 전 대통령 특별 인터뷰 기사). 무제한 군비경쟁의 실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연 미국이 소련에 비해서 군사적으로 약세인가가 문제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전문가들은, 미ㆍ소를 정점으로 하는 ‘진영’, 즉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비교할 때,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전력은 실제로 소련뿐이고, 나머지 동맹국가들은 지상병력은 크지만 해ㆍ공 군사력에서 나토에 비할 수 없이 열세임을 지적한다. 또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은 소련뿐이다. 반대로, 나토에서는 영ㆍ불ㆍ독ㆍ이ㆍ캐나다 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들이 그 군사력을 일체화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을 겨냥한 독자적 핵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프랑스는 군사적으로 다소 입장이 다르지만 대항적ㆍ진영적 관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현대적 군사력을 지탱할 공업 생산력에서도 서방 진영은 모두 ‘선진 공업국가’인데 반해 동방 진영은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하면 중간 수준 이하인 현실이다. 그밖에도 미국에는 아시아에서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선진 공업과 군사력에서 일체화되어 있는데 반해 중공은 소련과 적대 관계에 있고, 그로 인한 소련의 전력 손실은 전체 군사력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군사지정학적으로도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대륙국가로서 포위되어 있고, 그들의 군사과학과 기술의 수준도 미ㆍ영ㆍ불ㆍ독ㆍ일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미국 정부 자신이 인정하는 바다.
소모적인 무제한 군비경쟁이 미국의 경제원리와 구조(자본주의)에 유리한 것인가, 아니면 소련의 경제원리와 구조(사회주의)에 유리한 것인가를 대비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밖에 미국 행정부와 군부가 군대의 규모 확대와 군사예산의 증액을 꾀할 때마다 언제나 ‘소련 군사력 우위’설을 내세운, 2차 대전 이후의 거듭된 실례가 지적되기도 한다. 소련 군부나 정치가들도 폴란드와 아프가니스탄의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적 증강의 구실로 ‘미국군사력 우위’설을 내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모든 상황은 대체로 상대적인 성격의 것인데, 한 가지 세계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1983년 1월 16일, 미국 자체의 보도ㆍ언론기관들에 폭로되어 공개 보도된 미국의 정책이다.
‘국방 지침 1984~88 회계연도 계획’이라는 기밀문서로 밝혀진 레이건 정부의 구상은 다음과 같은 주요 사항을 골자로 하고 있다.
① 대기권 우주공간 신무기 체계를 개발하여 우주공간을 새로운 전장으로 하는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다. 그 목적을 위해 미국은 우주무기의 개발을 제한하려는 제안이나 조약은 거부한다.
② 솔트협정 규정의 개정을 검토한다.
③ 해상에서 핵대결이 일어나면 핵전쟁을 해상에 한정하지 않고 확대한다.
④ 1980년대 중반에 소련은 경제적으로 중대한 곤란에 처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 상황을 이용해서 소련의 무기체제를 일소 해버리도록 군비증강 계획을 추진한다.
⑤ 무제한 군비경쟁으로 소련의 경제ㆍ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켜 사회적 불안으로 유도해, 마침내는 미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소련이 정치적으로 굴복해 들어오도록 만든다.
⑥ 중거리 핵미사일을 선제공격으로 사용하고, 여러 개의 전선에서 재래식 전쟁과 핵전쟁을 동시에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구축한다.
그밖에도 여러 내용이 있으나, 한마디로 요약해서 이 ‘동시다발 전쟁’개념에 따르는 무제한 군사경쟁은 소련의 경제ㆍ사회ㆍ군사 전면에 걸친 압력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정치적으로 굴복시키려는 전략 구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무기의 ‘선제공격’이 구상된 것도 새로운 변화다.
이런 웅대한 군비경쟁 계획에 따라 미국은 그 동맹국가들에게 재래식 군사력의 증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소련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동맹국의 내정(內政)에서 군사적 성격이 짙어지게 됨은 당연한 논리다. 미국에 의한 소련 군사력 우위설 → 전쟁 분위기 고조 → 동맹국들의 능력을 도외시한 군사력 증강 경쟁 →이에 대한 소련의 무제한 군비강화 대응 → 전 세계적 규모의 군비경쟁 가열화 → 모든 국가 사회의 군대식 사고방식ㆍ가치관 지배 → 군부 지배적 국가이념화 → 평화, 인권, 민주주의 애호정신의 질식 → 무력ㆍ전쟁 숭상 기풍 →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분쟁과 이해 대립의 해결 유혹 → 국지적 핵전쟁 → 전면적 핵전쟁 → 인류의 말살! 요약하면 이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이상과 같은 도식의 위험성이 신랄하게 지적되고 있다.
1983년 6월 3일, 미국의 가톨릭 주교단이 전 세계의 위정자들에게 경고하는 뜻에서, 그리고 특히 미국 정부의 핵군사력 무제한 증강 정책을 반대해 238대 9라는 압도적 다수로 ‘평화에 대한 도전’결의를 한 것은, 바로 현재 우리가 치닫고 있는 인류 말살 위기의 심각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일본 군사력의 한반도 지향성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60년간에 걸쳐 저지른 아시아 지역 민족들에 대한 범죄적 침략 행위와 식민지 잔학 행위를 반성하고 평화애호 국민으로 재생하기 위해 ‘평화헌법’을 채택한 나라다. 일본 국민은 영원히 전쟁에 호소하지 않을 것과, 전쟁수단으로서의 군사력을 영원히 포기할 것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인 1948년에는 초보적인 군비증강을 개시하여 현재는 아시아에서 중공과 맞먹는 일대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오늘의 군사대국적 일본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문화(死文化)되어버린, 현대 국가 역사상 최초로 ‘전쟁권을 자진 포기’한 일본 헌법을 알 필요가 있다. 그 제9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제1항: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여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하(威嚇)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적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를 영구히 방기(放棄)한다.
제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ㆍ해ㆍ공군 및 기타의 전력은 이를 보지(保持)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交戰權)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군사력에 의한 국권 발동 및 수행을 영원히 ‘포기한 평화헌법’은 1947년 3월 3일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숭고한 국가적 선언과 국민생활의 기본 정신은 3년밖에 가지 않았다.
일본과 싸운 연합국가들은 포츠담 선언(1945.7.26)을 비롯한 공식 선언들과 비밀 합의에 따라서, 일본이 다시는 군사대국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① 일본의 군수생산에 도움이 되는 공장ㆍ기계ㆍ시설의 전면적 철거와 파괴, ② 일본 국민이 최저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경제능력 전면 말살”을 공약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 침략전쟁의 희생자인 아시아 지역 민족과 태평양전쟁의 피해자인 연합국 국민은 물론, 재벌ㆍ군부ㆍ천황주의 극우세력 결합체제에 농락당한 일본 국민 일반의 공통된 염원과 희구의 집약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아시아 반공전략으로 1948년에 연합국가의 ‘일본 비군사화 합의’는 백지화되었다. 이것은 6ㆍ25전쟁이 발생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이어 6ㆍ25전쟁 직후인 1950년에도 무기징역을 받고 수감 중이던 일본인 A급 전쟁범죄자 17명이 석방되고, 민주사회에서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군국주의 시대의 각계 각 분야의 지도급 간부 10,090명이 복권되었다. 태평양전쟁 패망 후, 잠시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리던 극우ㆍ국수주의적 제국주의ㆍ국가지상주의ㆍ반민주주의적 분자들은 미국에 의한 공직 추방 해제와 재군비 개시를 신호로 일제히 다시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일본 군대(자위대)는 창설 3년 후인 1957년부터 5개년 군비증강 계획을 다섯 차례 거듭하는 과정에서 현대전 군대로서의 물질적 실체를 강화했다. 25년간의 군비강화 계획은 일본 국내의 많은 평화헌법 수호세력과 군사대국화를 반대하는 평화 애호적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단계 한 단계 기정사실화되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3년 군사예산은 1982년 12월 30일의 각의에서 전통적인 국민총생산(GNP) 1퍼센트 이하라는 제한선을 깨고 1.00퍼센트로 증대했다.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 군사력의 역할이 비약적으로 증대할 몇 해 후에 그 비율이 2퍼센트에 이르게 되면, 일본 군사력은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 전체 국가의 군사비 합계와 맞먹는 막강한 군사대국이 될 것이라 믿어진다.
일본의 이 같은 군사대국화가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는 까닭은 군사력의 ‘주요’행동 방향이 ‘한반도 지향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일본 육ㆍ해ㆍ공군은 이미 제2차 5개년 군비증강 계획 기간 중인 1963년, 즉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기에 한반도 개입 작전으로서 ‘미쓰야(三矢) 계획’이라는 최대 규모의 모의 도상훈련을 실시했다. 국교정상화 조약이 체결된 1964년에는 역시 같은 규모의 ‘비룡(飛龍)작전’이 실시되었다. 최근에는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빈도도 날로 잦아지고 있다.
제3차 5개년 군비증강 계획 기간 증인 1969년 11월에는 사토에이사꾸 수상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 사태에 대해서는 앞으로 일본이 미국과 책임을 공동 부담할 것임을 선언했다. 사토 수상은 특히 “일본의 외교력은 앞으로 일본의 군사력으로 뒷받침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장기적 구상은 곧 표면화되어 그 발언과 선언이 있은 직후인 1970년 3월, 현재의 일본 총리대신인 나까소네 방위청장관(국방장관)은 사토 수상과 함께 국회 질의ㆍ답변을 통해 일본 군대가 주로 한반도 지향적임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마이니치신문』, 1970.3.23).
① 한반도 사태에 대해서 일본 내 미국 군사기지 사용에 언제나 동의할 것이다(일본은 미일 안보조약상, 일본 행정 관할권내의 영토와 군사기지에 대한 외부 공격의 경우에 한해서 일본내의 미국 군대 출격과 귀환을 허용하는 원칙이다. 이밖의 경우 그것을 허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재량인데, 이 답변에서 처음으로 언제나 동의할 용의를 밝혔다).
② 한반도의 동ㆍ서ㆍ남해안과 대마도 해협의 해상봉쇄 임무를 일본군이 맡는다(일본군이 말하는 대마도 봉쇄는 우리의 대한해협을 포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③ 북한의 선제공격의 경우, 과거처럼 유엔군이 파견되면 일본군도 이에 참가한다.
④ 그밖의 사태라도 미국 군대가 작전하게 되면 미일 안보조약에 따라 한반도에 일본 군대가 상륙할 수 있다.
⑤ 한국(남한) 내의 일본인 생명과 재산에 위해(危害)가 가해진다고 판단될 때에는 그 보호를 위해서 일본 군대가 상륙한다.
이것은 ‘결정 사항’이 아니라 ‘고려 사항’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답변한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 미국 정부와 나까소네 일본 정부 등장 이후의 지난 2, 3년 사이에 보도를 통해서 밝혀지는 일본 군대의 한반도 지향성은 이미 1960년대의 미ㆍ일 양국 정부와 군부의 장기 구상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중대한 전략과 정책이 한국 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공언될 수 있는 일일까? 국내에서는 이 같은 일본 군대의 전략과 지향성에 관해서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 이 시간까지도 한마디도 국민에게 알려진 일이 없다.
나까소네 장관의 그런 공언이 있은 다음해(1971) 5월 31일에는 일본군 합참의장(幕僚長)이 처음으로 내한하여, 과거 만주국의 이른바 일본군 육군중위였던 이 나라의 통치자와, 양국의 군사 지도자로서 최초로 공식 회견을 했다. 1971년 7월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일본군 장성과 고위 간부 34명이 ‘사복 차림’으로 등장했다. 당시 이 사실에 관한 보도는 억제되었다. 그로부터 12년 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후 국군의 날에 그들이 또 나타났다.
미국과 일본의 이런 협동적ㆍ군사적 뒷받침이 1972년의 유신체제와 그 직후의 긴급조치에 의한 사실상의 1인 종신 통치체제의 합의된 토대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사실은, 이 같은 일본 군대에 대한 의존 상태가 국민에게 알려짐이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60년대 초에서 70년대 말에 이르는 이 같은 사태 진전이 일제 식민지 아래서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각계각층의 국민생활을 장악하고 있던 국가적 실체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또 당시 일본 정부의 대(對)한반도정책은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1970년대 중반기의 주미 일본 대사 우시지마는 미국 내 대학 순방강연에서 노골적으로 “일본에게 가장 이상적인 한반도 상태는 분단된 상태다”라고 말했다.)
그밖에도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고 유추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이 있다. 그 모든 사실과 상황을 두루 검토한 뒤의 결론은, 첫째로 일본 군사력에 대한 의존은 우리 국가의 성격을 더욱 군사화해 민주주의 실현을 그만큼 어렵게 하리라는 전망이다. 둘째는, 일본 군사력은, 이 민족과 영토의 영구 분단이 목적인 일본 집권세력의 ‘물리적 힘’으로 작용하리라는 점이다. 그것을 거꾸로 논리화하면, 이 나라의 민주화와 남북민족의 통일 지향적접근을 바라지 않는 개인이나 세력일수록 일본 군사력의 한국 지향성을 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주도적 개인들과 세력들은 거의가 ‘대일본제국’시대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천황 파쇼, 극우 국가지상주의자라는 과거 경력과 사상적 경향성을 지닌 자들이다. 미국의 극동정책 전환으로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공직 추방에서 복권된 전쟁범죄자적 전력자(前歷者)들이다. 이와 같이 반성하지 않는 왕년의 식민ㆍ군국주의적 일부 인사와 평화애호적 일본 국민 일반을 동일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력에 의해 일본의 군사대국화 정책과 사상이 추진되고 있는 현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역사적 견지에서, 1969년의 ‘사토– 닉슨 공동선언’의 의도와 목적과 내용,그리고 이후에 표면화하고 있는 사태 진전을 보면서 한말의 ‘야마가따– 로마노프 협약’ ‘가쯔라– 태프트 협정’그리고 그것들에 뒤이어 현실화한 이 나라 민족의 운명을 되새겨보게 된다.
한ㆍ미ㆍ일의 군사동맹
미국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마이어 대장은 1983년 1월 22일 서울 방문기간 중 “한ㆍ미ㆍ일 3국의 긴밀한 군사협력체제가 동북아시아의 방위능력 강화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3국 간의 협력은 미국과 일본의 방위 부담을 줄이며 군사적 효율을 높일 것”이라고 언명했다(서울발 AP통신,『동아일보』). 미국 행정부와 군부의 많은 대변인들의 입을 통해서 미국 정부의 의도는 분명해진 지 이미 오래다.
한일 국교정상화(1964) 이후 추진되어온 한ㆍ미ㆍ일 3국 군사동맹을 지향하는 노력은 이제 그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미국과 일본 정부의 장기적 대한정책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 남ㆍ북의 분단 고착화를 위해 남ㆍ북 국가를 각각 독립적인 별개 국가로 승인하고, 남한을 한ㆍ미ㆍ일 동맹체제에 편입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북한과 대항적 국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ㆍ서독 방식과 같은 것이다. 소련과 중공에게도 역방향에서 같은 구도를 승인하게 하는 대응정책이 이와 병행한다. 즉 이른바 ‘교차승인’구상이다.
강대국들의 세력권 확장을 위한 제2차 세계대전 처리 방식에서 독일민족(국가)과 한민족(국가)에 대한 구상은 전혀 달랐다. 독일 민족은 인구, 잠재력, 침략성(또는 침략적 경력), 지정학적 위치 등의 이유로 제2차 대전의 전승 연합국들이 처음부터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전 당시 한반도에서는 분명히 5년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단일한 통일 민족국가를 이룩하도록 도우려는 것이 미ㆍ중ㆍ소를 위시한 모든 연합국의 일치된 의사였다. 통일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이 유럽 대륙의 평화에 적극적인 위협적 존재인데 반해서, 한민족의 통일국가는 아시아나 동북아지역의 평화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저해 요소는 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통일 독일 민족국가’는 그 자체로서 위협적인 존재이지만 ‘통일 한민족국가’는 주변 강대국들이 이 반도에 야심을 품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위협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중립화 통일국가’안이 해방 당시의 내외 여건과 이해를 수렴할 수 있는 하나의 구상으로 제시된 것도 그런 인식에서였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영구 분단이 고착화되려는 현재까지의 복잡한 과정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이므로 재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책임 소재와 책임의 양(量)에 관한 천착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의 ‘실상’을 파헤치는 학문적 작업이 학문외적 요인으로 억제되어 있는 현실에서는 쌍방의 왜곡과 아전인수의 안개가 걷혀질 훗날의 비판적 역사 규명에 맡길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한국과 일본은,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는 ‘백지 상태’였던 것이 60년대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정치적 관계로 연결되고, 70년대에 경제적 관계가 정치적 관계를 밑받침했다. 80년대에는 이른바 ‘한ㆍ미ㆍ일 3각 군사 협조’의 기정사실화로 군사적 유대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양국 관계는 ‘군사동맹’으로 밀착하려 하고 있다. 앞에서 검토했듯이,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의 군사동맹을 향해서 그 주변적 환경 조성을 서두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여러 가지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되어야 할 사태 진전으로서 최근 ‘한국 국회’와 ‘일본 국회’사이에는 군사적 관계의 검토가 깊이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한일의원연맹(회장 이재영)이 1983년 5월 초에 ‘한ㆍ일 안보협력 관계’를 토의할 예정이라 하여 처음으로 국민에게 알려진 그 의제와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동아일보』, 1983.3.5).
① 한반도 유사시의(한국에 대한) 일본의 ‘안보’협조 방안(기본 구상)
② 상호 방공(防空)정보 교환(공군)
③ 한반도 주변 해협에 대한 일본 군대의 봉쇄 방안
④ 쌍방 군대의 상호 훈련 교환(육군)
⑤ 한ㆍ일 해군 사관생도 교환 교육(해군)
⑥ 쌍방 해군의 상호 항구 기항(해군)
이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50년대의 공백 상태에서 60년대의 정치 관계, 70년대의 정치+경제 관계, 80년대의 정치+경제+문화협력, 그리고 90년대를 지향하는 그 전면적 ‘입법화’단계로 기정사실화되는 인상이다. 그 과정을 그림으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림 7]은, 정치ㆍ경제ㆍ군사면의 압도적 영향력이 한국을 포용한 토대 위에서, 일본식 문화ㆍ사상ㆍ가치관ㆍ취미ㆍ생활양식 등 이른바 한국민 또는 민족의 ‘정신적 존재’를 규제하는 전반적ㆍ문화적 영향력이 추가되었을 때의 모습이다. [그림 1]과의 유사성을 비교해보라. 꼭 100년간의 순환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 부문의 영향력은 그동안 생산 양식, 물질적 생산품, 과학기술 등 주로 이른바 하부구조적(물질적) 차원에서 이 나라 사회와 국민대중의 생활 형태를 바꾸어왔다. 앞으로는 통틀어 ‘문화ㆍ정신’적 이른바 상부구조적 영향력이 공공연하게 상륙하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금년(1983) 초, 나까소네 일본국 총리대신이 미국과 일본 두 정부의 장기적 대한정책에 따라 40억 달러 상당의 재정적 지원을 선물로 들고 들어온 것을 계기로, 그 공동성명서에서 “한ㆍ일 양국 간의 적극적 문화협력”이 앞으로의 중요 사업으로 강조되었다. 그 뒤를 이어 ‘일본문화연구소’의 설치계획이 보도되었고, 최근(1983.7) 들어서는 일본 영화의 상륙계획이 보도되었다. 한ㆍ일 간의 과거의 거추장스러운 감정과 역사적 사실을 얼버무리는 초ㆍ중ㆍ고등학교의 역사 기술 고쳐쓰기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유관순 누나’의 행방불명, ‘임진왜란’의 이름 바꾸기, 일제 식민통치 비평에 대한 완화 등). 두 나라 정부가 무대 뒤에서 준비 중인, 앞으로 선을 보일 여러 가지 결정과 변화들은 1990년대 이후의 이 민족(국민)의 모습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한ㆍ일 군사협조는 여태까지는 양국의 국민 감정 때문에 미국을 접점으로 하는 한미 방위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으로 간접적 동맹관계를 취해왔다. 앞으로 온갖 행사와 선전, 직접ㆍ간접적 세뇌공작, 유형ㆍ무형의 상호 침투와 이익의 수여를 통해서 일본 군사력의 개입이 자연스럽게 받아지게끔 될 때에는 한일 군사동맹 체제는 완성되는 것이다.
형식상과 법적으로는 일본에서 현재의 ‘평화헌법’이 군사대국화 세력에 의해서 개정된 뒤가 될 것이다. 현 일본 헌법은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쓰고 존재하는 막강한 군사력을 아직도 불법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헌법 개정으로 군사력의 합헌성이 인정된 뒤에야 법적 동맹은 가능해진다.
지난 3월 2일 일본 의회에서의 일본 문부상의 답변은 그 시기가 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세또야마(瀨戶山三男) 문부상은 중의원 문교위원회에서, 현행 헌법은 일본 군대의 ‘위치 정립’을 명백히 하지 않고 있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헌법 제9조의 개정을 포함한 개헌을 강조했다. 이 발언은 현 집권세력인 자민당의 의도를 대변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또야마는 자민당의 ‘헌법 조사회’ 위원장을 지낸 이로서, 전부터 개헌을 지론으로 내세웠으나 정부를 대변하는 각료로서 이같이 분명히 국회에서 강조한 것은 일본 의회사상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동아일보』,1983.3.3,도쿄 발 정구종 특파원 기사).현대 국가가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과거의 관계에만집착해서는 안 된다. 유무상통하고 상호보완함으로써만 현대 국가는 국제적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으며, 자기의 잠재력을 더욱 고양 발휘하여 다른 국민들에게 기여하고 인류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그와 같은 일반 원칙에 덧붙여 경각심을 촉구해야 할 몇 가지 특수한 문제가 있다.
첫째는, 해방 이후 이 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일제시대의 민족반역자, 친일주구분자들이 숙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대한민국의 국가적 최고 지도부를 장악해온 사실로 말미암아 생긴 대일본 주체성의 상실이다. 이 상태는 해방 후 40년이 되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각 부문에서 이익을 보는 개인이나 집단은 민족, 국가, 국민의 독립성, 주체성, 긍지 및 정기(正氣)는 깡그리 잊어먹고 일본에 군사적으로마저 예속됨을 마다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것이 기우이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1984년에 들어와서는 양국 간의 군사동맹 관계가 공언되고 있다).
둘째는 지난 40년간 미국에 대한 의존적 생존에 길들여진 이 나라 국민의 의타적 세계관이다. 미국은 장기적 세계전략의 구도상에서 대부분의 한국 후견 책임을 일본에 위임하려 하고 있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의존해 살아온 국민은 미국의 자리를 떠맡는 강대국이 필요하고, 그것이 누구든 관계없다는 세계관인 성싶다. 누군가를 언제나 ‘모시고’ 살아야 하는 이 나라의 비굴한 국민성의 문제다.
셋째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에 대한 의존을 분단으로 인한 북쪽의 절반 민족과의 대치관계로 합리화하고 정당화 해온 변칙적 민족 관념에서, 앞으로는 일본의 군사력으로 남북 대결을 지탱해야 한다는 경직된 사고방식이 지배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다. 최근 방한한 미국의 고위 군사 책임자는 “남ㆍ북 민족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든 미국은 군사력을 남한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남한에서의 미국의 군사적존재는 한국(한민족)의 복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적 동기와 목적에서인지 물어봐야 한다. 일본의 군사력이 같은 지위를 굳히게 된다면 역시 같은 일본의 국가이기주의에 예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외세에 의해서 남ㆍ북으로 갈라진 같은 민족 사이에 새로운 평화적 공존양식을 구축하기 위한 ‘대(大)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는 것만이, 일본 군대가 남에도 북에도 들어올 필요 없는 국가관계를 정착시킬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남ㆍ북의 적대적 존재양식을 당연한 것으로 이념화하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한, 일본 군사력의 한반도 상륙은 ‘선’이고, ‘필요’이고, ‘당연’이며 ‘은혜’가 될 것이다.
미ㆍ소의 핵 표적이 된 한반도
우리 민족이 영원토록 가꾸고 다듬어서 자손만대에 물려줘야 할 이 반도의 땅은 초강대국들의 핵폭탄 표적으로 선정되었다. 이 사태 변화는 너무나 심각해서 그 긴박한 위기가 실감나지 않을 정도다. 현재와 같은 레이건 미국 정부의 무제한 핵무장 경쟁과 이에 대응하는 소련의 대항 조치가 누진적으로 계속되도록 방치한다면, 한반도는 그들의 이해 충돌의 불꽃이 핵폭탄으로 터지는 첫 표적이 될 것이 확실하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핵무기의 균형에 의한 전쟁 방지와, 제1격의 처참한 파괴 및 제1격에서 살아남은 제2공격력(보복공격)의 잔존 가능성 때문에 이른바 ‘공포의 균형’이 핵전쟁의 발발을 억제한다는 군사이론에 근거해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를 내다 본 레이건 미국 정부의 핵전략은, 앞에서 밝혀졌듯이, 미국이 국가적 총력을 기울여 핵경쟁의 각 국면 각 단계마다 대소(對蘇) 핵 우위를 점하겠다는 것이다.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이것을 실현성이 없거나 무모한 불장난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전쟁이론이 추진될 경우, 그 과정의 어느 단계인가에서 미국은 대소 ‘선제공격’을 감행할 의사다. 모든 핵무기 보유국이 핵선제공격을 부인했고,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많은 국가가 이를 규탄해온 지난 30년간의 핵정책을 미국 정부는 정면으로 거부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보았듯이 사실상 미ㆍ소 간의 공격과 방어 태세는 균형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선제공격은 상대방의 하위 동맹국영토에 대한 공격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미국이 그 하위 동맹국들 영토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했거나 배치하려는 전략의 목적이다. 우리는 그 전자에 속한다.
다음은 동시다발 전쟁이론에 따르는 상대방 진영의 ‘취약점’에 대한 선택적 보복공격이다. 지난 2월에 밝혀진 미국 국방장관 와인버거의 ‘1983년 국방보고서’가 그것이다. 소련이 중동 산유지역에 개입할 경우, 미국은 소련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고 석유자원 지대를 수중에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동북아의 동맹국 군사력과 함께 북한을 공격하고, 북한에 대한 핵공격을 감행하는 전략을 짜놓았다”고 보도되었다(일본『산께이신문』(産經新聞), 1983.2.12. 그리고『동아일보』, 1983.2.15). 또한 올봄에 있는 한ㆍ미 합동 대규모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83’작전에서 미국의 핵미사일 적재 항공모함이 동해에 출동한 것이 바로 이상에서의 행동을 가상한 것이라고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전략이다. 그야말로 미국의 이기주의적 발상이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불행하게도 당장에는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반도의 민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중동과 그곳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몇만 리 떨어진 이 민족의 땅에서 전쟁을 시작하고 핵폭탄으로 초토화한다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상 용납해서는 안될 전쟁논리라 하겠다.
북대서양동맹 15개국은 미국의 ‘핵우산’밑에서 핵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동맹국들은 미국이 그들과의 사전 협의 없이 자기 영토에 핵무기 기지를 설치하거나 어느 ‘적’에게 핵무기를 발사할 것인가 등에 관해 협의 없이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자의적 독단적 행동을 견제하기 위해서 5개국으로 구성된 ‘핵전략협의회’를 두어 미국의 핵무기 전략에 참여시키고 있다. 1970년대 초에, 이 핵전략협의회의 일원인 서독은 미국에게, 동독은 미국 핵무기의 공격 목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당시의 서독 집권당은 사회민주당).
동ㆍ서독 간의 근거리에서 핵무기가 폭발할 경우, 서독 자신이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논리에서다. 즉 동ㆍ서독은 분단되어 있지만 한나라의 민족이라는 것, 동포라는 것, 그리고 또 정치적으로 볼 때 서독으로서는 전체 독일의 궁극적ㆍ잠재적 통일 독일의 합법정부를 자처하는 까닭에 동독도 이론상 서독의 영토라는 것, 따라서 동독에 대한 핵공격은 서독 자신에 대한 핵공격이고, 통합 독일의 잠재적 대표를 자처하는 서독의 주권 침해라는 논리에서 였다. 우리는 서독 지도자와 그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주체성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국면에 처해 있는 것 같다.
중동의 석유 때문에 북한이 미국의 핵공격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직접적이고도 당연한 전쟁논리로, 남한은 소련의 핵공격 목표가 된다. 미국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마이어 대장에 따르면 한반도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레이건 행정부의 기본전략 개념은 재래식 전쟁이 장기화 될 때에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며, 이 개념은 한국에도 적용된다.
② 재래식 전쟁이 핵무기의 사용을 필요로 하게 될 경우에는 야전군 사령관,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한미연합군 사령관이 양국의 대통령에게 핵무기 사용을 건의할 수 있다.
③ 한국에서의 핵무기 사용 여부의 결정은 15개국의 협의를 거쳐야 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경우보다 덜 복잡한 문제다.
④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북한에는 아직 핵무기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이상 1983.1.23, 서울 발 APㆍUPI 통신 회견 기사).
미국 군부의 구상을 밝힌 마이어 육군참모총장의 전쟁논리에서 우리는 ①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은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있다는 것. ② 핵무기 사용에 관해 야전군사령관의 권한이 크다는 것, 그는 그 결단을 가리켜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결단’이라는 주석을 달았지만, 6ㆍ25 당시 맥아더 사령관이 원자탄 사용을 위협하는 발언만으로도 그 직에서 파면된 사실에 비해서 현장적 판단이 훨씬 큰 비중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③ 앞서 설명했듯이, 나토의 경우보다 한국에서의 핵무기 사용은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 두 사람의 최종 의견에 따르므로 훨씬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예상이다. 한국 대통령이 실제로 이 경우에 얼마나 주도권이 있는 가도 문제이지만 앞서의 서독의 경우와 비교해서 그의 철학ㆍ민족의식ㆍ세계관이 문제된다. ④“북한에는 핵무기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은, 남한에 대한 소련의 핵공격 위협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한국(남한)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 스스로 인정했다. 미국 전략연구소 소장 라 로크 제독은 남한에 비치되어 있는 미국의 각종 핵탄두의 수를 약 600개로 추산한 일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소련의 태도가 주목된다. 소련 제2부수상 겸 외상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소련이 한국, 일본 및 인도양에 디에르 가르시아 군도에 배치되어 있는 미국의 핵기지를 공격 목표로 해서 SS20 핵 미사일이 시베리아에 배치되어 있다고 언명했다(1983.4.4, 모스크바 발 외신, 『중앙일보』). 또 소련 육군참모총장 니콜라이 오르가코프 대장은, “미국이 유럽 배치 미사일로 소련을 공격할 경우, 소련이 오로지 유럽의 목표들만을 보복공격하리라고 믿는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이 전쟁 논리는 바로 미국 육군참모총장 마이어 대장이 밝힌 중동분쟁의 보복을 북한에 대해서 할 것이라는 경우의 남한에 해당한다고 해석된다. 미국의 경우 소련의 핵무기가 “없는 것으로 믿는”북한에 대해서도 중동분쟁 때문에 핵공격을 할 가능성을 밝혔는데, 미국의 핵무기가 있는 남한에 대해서 소련이 중동분쟁이나 유럽분쟁 보복으로 핵공격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바로 이 전쟁논리를 확신하는 듯한 태도 표시가 있다. 소련 정부 의사를 대변하는 ‘타스통신’은 3월 18일의『프라우다』(소련 당기관지)의 사설을 인용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미국 미사일 배치를 쉽게 허용함으로써 미국의 핵볼모가 되려는 자들은 미국 정책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진한 글씨-필자)고 경고했다(1983.3.13, 모스크바 발 AFP 통신,『동아일보』,3월 18일).
우리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을 믿고, 미국 정부 지도자들과 군부지도자들의 평화애호적 슬기에 기대를 걸고 싶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쌍방 초강대국 군부 지도자들이 내뱉는 위협이 현실화하지 않도록, 무모한 무제한 핵군비경쟁과 핵무기를 가지고 노는 위험한 심리작용이 진압되기를 간절히 희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를 바라는 세계의 ‘반핵운동’의 열렬한 민중적 염원과 행동으로 ‘핵무기 숭배자’들이 이성을 되찾게 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미ㆍ소 초강국의 직접적 대결이 아닌 제3자의 행동으로 인해 약소국가가 핵의 볼모가 되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다. 우리와 관련해 가상할 수 있는 예로서 군사대국 일본이 소련과 충돌을 일으켰거나 소련이 일본을 상대로 하는 분쟁이 확대될 경우다. 일본은 미국을 대신하여 하게 될 ① 소련 극동함대의 봉쇄(동해 — 일본해 속에)를 위한 그 출구 해협의 기뢰 봉쇄(대한해협이 포함된다), ② 일본 해ㆍ공군에 의한 소련 잠수함 공격 작전, ③ 시베리아와 사할린 기지의 장거리 폭격ㆍ정찰ㆍ요격, ④ 북태평양 및 남중국 해상에서의 소련 해상 함정 및 선박 공격 또는 충돌 등, 그 가능성과 범위는 헤아릴 수 없다.
한국의 직접적 이익이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과 소련의 군사적 분쟁이 확대된 결과로 인하여, 일본과의 군사적 협력을 이유로 소련이 여러 가지 형태와 방법으로 공격 또는 보복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1983년 9월의 KAL 사건을상기해보라).
일본 수상 나까소네는 한국 방문 직후, 미국을 방문하여 레이건과의 회담에서 일본 열도를 소련에 대한 ‘불침(不沈) 항공모함’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 말은, 미국에 대한 직접적 군사적 역할은 물론 한국에 대한 군사적 분담 자세를 아울러 강조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즉각 일본이 미국과 제휴하여 군비증강을 계속할 경우, “치명적인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는 전례 없이 강경한 대일(對日) 경고를 발했다(1983.1.21, 모스크바 발 AP통신). 소련 당서기장 안드로포프는 일본이라는 ‘불침 항모’는 “단 20분 안에 ‘가라앉을’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일본과의 군사관계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한국과 한겨레의 대응
남ㆍ북으로 갈라져 살게 된 우리 민족의 땅은 또다시 임진왜란 이래로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인접 (초)강대국들의 이해 충돌의 초점이 되고 있다. 강대국들의 이익을 위한 ‘대리전쟁’을 동족끼리 벌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짙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남북한의 동시적 초토화와 동포형제의 동시적 멸종이 될 위험마저 예상된다.
우리 반도의 안팎에서는 그에 따라 ‘군사력의 강화만이 살길이다’라는 의식이 고취되고 있다. 특히 핵무기가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자신(국가)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환상’을 토대로 한 의식은 날로 ‘군사력 숭배사상’을 낳고 있다.
지구상의 민족이나 국가는 저마다 시급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의 경우 그 문제는 크게는 분단 국토와 민족의 통일이다. 그러나 1980년대와 90년대의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남ㆍ북의 한 민족은 각각 한반도 내에 초강대국들의 핵무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핵폭탄의 세례를 불러들이지 않도록, 자신과 반도 내외의 조건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주체성을 가지고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남북한 비핵화(非核化)다.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밝혔듯이, 지구상의 다른 동맹국들과의 관계에서와는 달리, 한국에서만은 미국의 핵무기 사용이 현지 사령관의 큰 재량권 아래 있고 그 결정이 수월하다는 것은, 그만큼 소련의 핵보복도 신속하고 직접적일 것임을 뜻한다. 어째서 한국만이 유독 그런 상태가 되었는가 곰곰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 우리 정부는 현지 미군 사령관의 핵무기 사용의 주도권에 대해서 어떤 ‘협의권’을 가지며, 어느 만큼 그것을 제약할 법적ㆍ실제적 권한을 갖고 있는지 국민에게는 알려진 바가 없다.
미국 정부의 무제한 군비경쟁정책은 그 동맹국가들에게 무제한의 무장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 군수산업과 미국 군부의 비대화, 그리고 미국 보수정치가들의 이익을 위한 무기 판매 전술로 가난한 동맹국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경제적 적정선의 한계를 넘어, 소모적 군비경쟁에 국민의 진정한 복지를 소모하게 될 위험이 크다. 군사 우위사상과 군비경쟁의 열기는 한 국가사회의 체질적 군사화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그 실례는 역사상에도 많았고, 현재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일본과의 ‘우호’관계와 ‘협력’관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민족적 감정을 떠나서라도, 일본과의 경제ㆍ외교ㆍ정치ㆍ문화적 우호 관계의 선을 넘을 때, 이 국가와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가를 신중히 계산할 필요가 있다. 반드시 군사적으로까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가? 일본과의 군사적 협력, 나아가서는 미국을 접점으로 하는 ‘간접적’동맹이나 양국 간의 ‘직접적’군사동맹 관계가 1980년대와 90년대의 국제 정황 속에서 과연 우리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 되는지 여부를 계산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와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는 ‘질적’으로 변화했다. 그 모든 요소는 남북한 민족사회의 ‘화해’와 ‘평화’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다. 새로운 정세에서는 새로운 이념과 가치관이 필요하다.
일본 군사력의 한반도 지향성은 그 분단민족의 하나를 뒷받침하고 하나를 반대하기 위해서라는 도식에서다. 이 반도, 금수강산에 다시는 일본 군대가 들어올 필요가 없게 하는 길은 분단민족간의 화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ㆍ북 단위의 반민족주의(半民族主義)가 아니라 반도민족 전체를 생각하는 ‘대민족주의’다. 이 반도의 남에건 북에건, 일본 군대가 무슨 명분으로든 다시는 금수강산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하는 길은 남북 분단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로만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우리 내부의 과제는 전체 국민의 억압 없는 의사표시로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슬기를 짜내는 일이다. 질적으로 변한 정세는 한 사람의 지도자나 직업정치가나 관료들 또는 군인들의 판단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가능한한 모든 정보가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지혜를 짜는 토론의 장이 열려야 한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와 ‘평화’를 희구하는 민주주의로만 가능할 것이다.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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