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북한-미국 핵과 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

핵문제·북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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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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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북한-미국 핵과 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1999년 가을, 신화)


 


북한-미국 핵과 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


-위기의 주요 요인은 미국에 있다


 


북한–미국 핵과 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 : 위기의 주요인은 미국에 있다1)

북한과 미국의 새로운 미사일 대결 위기

1999년 초반에 들어서부터 핵무기와 미사일 문제를 놓고서 한반도의 위기가 1994년 초반과 같은 수준으로 가열되고 있다. 1994년의 위기는, 미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조건대로 핵시설 해체를 수락하게 하기 위해서, 소위 ‘북ㆍ미 핵협상’의 막바지 단계에서 1991년 초의 대(對)이라크전쟁과 같은 규모의 군사공격을 북한에 대해서 개시하려 했던 전쟁 준비 상태다. 새로운 ‘한반도 전쟁’ 순간의 위기 상황이었다. 현재의 조선–미국 간 군사 위기의 중심적 쟁점은, 5년 전의 쟁점이 핵문제였던 것과는 달리 주로 미사일문제다.
여러 해 동안 국가적 존립의 위기에 몰린 북한이 그 군사적 위기 상황을 ‘정면돌파’하기 위해서 선택한 핵 대항력구상과 계획은 유일한 핵 초강대국으로서 세계적 핵무기 질서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노여움을 샀다. 결과는 북한의 군사적ㆍ정치적 후퇴로 끝났다. 북한이 제2의 선택,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 선택인 미사일 발전 계획에 대해서 미국은 역시 세계의 미사일 무기 질서의 단독 심판관으로서 북한의 굴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북한은 북ㆍ미 핵협상(1991~94)의 전 과정 동안 세계 최강의 핵 군사국가에 의해 제2의 이라크 또는 ‘제2의 후세인’이 될 뻔했다.
모든 불길한 징후들로 미루어 이제 다시 북한은 미국이 지구상에서 끈질기게 찾고 있는 미국 군사력의 실험 대상인 제2, 제3의 이라크가 될지도 모르는 전쟁 위협에 직면한 듯이 보인다. 북한이 1994년의 핵위기에서 미국에 굴복한 형식으로, 이번에도 미국이 내미는 약간의 물질적 보상의 약속을 믿고 미사일 무기 보유의 주권적 권리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결과적 귀결을 상상하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군사적 대결을 선택할 것인지 예측불허의 상황이다. 그만큼 위급한 정황이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20세기 100년의 마지막 몇 달을 넘어가는 현재의 한반도의 전쟁 위기가 5년 전의 북ㆍ미 핵위기 때보다도 위급해 보이는 까닭은 그간의 몇 가지 중요한 정세 변화 때문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세계 미사일 무기 질서의 단독적 통제권 강화

미국은 1997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의 반대와 비난을 억누르고, 미국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미국의 세계적 핵무기 질서의 사실상의 단독적 결정권을 확립하는 이른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실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단계가 세계 미사일 통제체제의 완전한 장악인데, 이것이 미국의 압력으로 수립된 ‘유도무기기술이전금지조약’ 체제다. 이 체제가 자체적 미사일 보유의 권리를 주장하는 보잘것없는 ‘5등 국가’ 북한의 도전을 받고 있다고 미국은 판단하고 있다.

북한 미사일 무기의 대일본ㆍ남한 미사일 무기 경쟁 촉발 위험성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논리는 북한의 핵무기화의 가능성이 일본ㆍ한국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로 연결되고, 중국과 대만 관계의 핵 대결 상황까지 확대된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이 내세우는 주장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핵 불안정성에 미사일 무기 경쟁이 추가ㆍ중복될 위험성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군 500킬로미터 사정 미사일 보유 권리 주장은 그 초보적 대응이며, 일본의 기존 기상ㆍ통신용 위성 외에 군사용 스파이위성 2기를 2~3년 내에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궤도에 올려놓으려는 계획의 확정이 그것이다.

미국의 핵 및 미사일 보호체제로부터의 일본과 한국의 이탈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에 대한 일본과 남한의 독자적 대응은 필연적으로 일본과 남한에 대한 미국의 핵ㆍ미사일 ‘보호 우산’의 무력화를 초래한다. 그것은 일본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거의 영구적인 군사적(내지 정치적) 지배권의 자동적 붕괴를 뜻한다. 21세기에 과거의 소련과 맞먹을 만한 정치ㆍ경제ㆍ공업ㆍ군사 초강대국이 될 중국과의 필연적인 대결을 예상하는 미국은, 일본과 남한에 대한 군사(정치)적 지배권을 확고히 유지하려는 장기 전략을 세워 놓고 있다. 그 목적을 위해 북한의 독자적 미사일은 중대한 장애물이 된다(라고 미국은 주장한다).

미ㆍ일 동북아지역 전쟁 협력체제의 완결

미국이, 단기적으로는 대북한 군사공격시의 필요성과, 장기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압력체제의 일환으로 오랫동안 추진해온 미ㆍ일 합동 전쟁 시나리오로 알려진, 이른바 ‘미ㆍ일(일ㆍ미) 방위협력지침’ 또는 ‘뉴 가이드라인’이 마침내 금년(1999) 5월 일본 국회를 통과했다. 이 지침은 주로 북한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군사행동에 일본 군사력이 거의 전면적으로 협동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북한과의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 심지어 그 준비 단계에서 일본은 사실상의 국가 총동원령을 발동하여 일본군대는 물론 일본의 국가 사회 기능과 국민 생활을 미국 군사작전 지원체제로 개편ㆍ가동시키는 전쟁 수행 행동계획이다.
전쟁권 포기와 군사력 보유를 금지한 세계 최초의 ‘평화헌법’ 개헌도 미ㆍ일 양국의 다음 수순에 올라 있다. 일ㆍ미 두 나라 사이에서 다년간 준비돼온 순서대로, 1999년 8월 초에는 천황주의와 제국주의ㆍ군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애국가 ‘기미가요’의 국가(國歌)화, 그 시각적 상징인 일장기 ‘히노마루’의 국기(國旗)화가 일본 국회에서 법제화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 육ㆍ해ㆍ공군의 군사비의 비약적 증가와, 여태까지의 ‘방어’적 군사체제 및 무기의 공격형으로의 재편ㆍ증강 계획이 급속도로 추진 중에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은 이미 몇 개의 고성능 로켓 발사에 성공했고, ‘인공위성’을 가탁한 막강한 탄도로켓 미사일의 본격적 개발 및 발사 계획이 총력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패전 이후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가해져온 정치적ㆍ헌법적ㆍ법적ㆍ국민 감정적ㆍ행정적 및 재정(국가 예산)적 제약들이 금년 6, 7월을 기해서 일제히 배제되었다. 미국ㆍ러시아에 이어 중국ㆍ영국과 함께 350~370억 달러의 군사비로 이미 세계 제3, 4위의 현대적 군사력을 다투는 일본 군대가 마침내 미국의 대북한 및 동북아지역 전쟁 계획에 제한 없는 동반자로 등장한 것이다. 반공ㆍ강경 우익ㆍ대국주의ㆍ천황주의ㆍ군사대국ㆍ유엔 상임이사국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 틀어쥔 일본은, 여태까지 ‘평화헌법’ 규정 때문에 마지못해서 그들이 입은 뿔 달린 ‘가부도’(사무라이의 투구)와 ‘요로이’(사무라이의 갑옷) 위에 걸치고 있던 ‘하오리’(일본 남자의 전통 옷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일본도를 빼어들고, 두 발을 탕탕 내딛고 나선 것이다. 미국은 이제 세계 제4위의 막강한 일본 군사력을 직접 그 통제하에 거느리게 된 것이다. 미국의 대북한 정책과 군사전략은 1991~94년의 핵협상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입지가 강화되었다. 미국(그리고 일본)은 온갖 반대와 난관을 물리치고 이룩한 제한 없는 이 ‘미ㆍ일 전쟁협력 체제’의 효율성을, 가공할 미국의 신무기 체계를 주력으로 바로 2개월 전에 끝난 유럽에서의 코소보 공격 전쟁 같은 실전으로 시험해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고 있다.

미국 정치권력의 강경 보수화의 압력

공화당이 지배하는 미국 의회와 미국 내의 군부를 비롯한 강경 우익ㆍ반공 세력은 1991년의 제1차 및 1998년의 제2차 대이라크 전쟁 이후, ‘제2의 이라크’로서 다음의 전쟁 목표를 노스 코리아에 맞추어왔다. 미국은 북한의 국가와 당과 권력이 북ㆍ미 핵협정에 따르는 국제적 압력과 핵무장의 좌절로 쉽게 굴복할 것으로 예상했다. 설상가상으로 닥친 1995년 이래의 거듭된 대홍수 피해 및 식량난으로 단시일 내에 붕괴할 것으로 예상하고 또 그렇게 기대했다. 공화당 지배하의 의회는 민주당 클린턴 정권의 북ㆍ미 핵협정 이행을 방해하고자 협정상 합의사항의 집행을 가로막는 수없이 많은 조건과 제한을 입법화했다. 연락사무소 설치, 연간 50만 톤의 대체 에너지 공급, 경제ㆍ무역 봉쇄 조치의 해제 내지 완화, 동결된 북한 자산의 해제, 경제 교류의 확대, 상호 국가 승인, 외교관계 수립, 대사관 개설 등 합의사항은 주로 이같이 미국 측의 거부로 계속 지연되었다. 냉전시대 미국의 핵심이었던 이 세력은 지금도 북한에 대한 ‘이라크식’ 전쟁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북ㆍ미 핵협정을 협상하고 조인한 클린턴 민주당 정부 내의 민ㆍ군ㆍ정보 관련 최고위 수뇌부들 자신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온갖 구실을 만들어서 협정 합의사항의 이행을 끌다보면 북한은 제풀에 지쳐서 붕괴할 것으로 예상하고 기대했다.2) 그렇게 되면,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 철거와 교환으로 약속했던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지불할 필요 없이, 미국의 군부와 정치적 강경파들이 멸시적으로 일컫는 “마지막 남은 불한당” 국가를 지구상에서 쓸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 기대는 빗나갔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1994년에 체결한 타협적 북ㆍ미 핵협정을 폐기하기 위한 절호의 구실로 만들어냈던 것이 이른바 ‘금창리 핵 지하시설’설(設)이다. 금년 초 일단의 미국 전문가단에 의한 금창리 ‘핵 의혹 지하시설’ 현지사찰(북한 측은 ‘현지방문’이라고 표현) 결과는 “핵시설 의혹 없음!”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금창리’를 가지고 북한을 굴복시키려고 벼르던 미국 내 강경ㆍ보수권력의 체면만 손상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북한의 미사일(또는 인공위성, 1998년 8월 31일 발사ㆍ실패?)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고 대북한 압력을 군사적 위기의 수준까지 몰고 가고 있다(미국 군부는 이미 1991년 3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전쟁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한 직후, 대이라크전쟁은 바로 대북한전쟁의 예행연습임을 강력히 내비쳤다. ‘사막의 폭풍 작전’에는 각별히 지적돼야 할 중요한 측면이 있다. ……미국과 유엔의 이번의 강력한 의지의 과시를 김일성이 간과했을 리가 없다3)).

미국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대북한 함의

서기 2000년은 대통령 선거와 의회의 부분적 선거의 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전쟁은 언제나 집권정당과여당 대통령후보에게 더할 수 없이 유리한 당선 보증서 구실을 해왔다. 1991년 이라크를 공격한 부시 대통령의 국민적 인기는 단숨에 97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대이라크전쟁의 사령관이었던 슈와스티코프 대장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원수와 비길 만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리고 유권자들과 양당에 의해 대통령 후보의 물망에 오르기까지 했다. 제2차 대이라크 공격으로, 클린턴 대통령은 성추문 사건으로 의회의 탄핵 국면에 몰렸던 개인적ㆍ정치적 위기를 극복했고, 금년 4월의 유고슬라비아 코소보 공격 전쟁은 의회의 탄핵안으로 실추됐던 클린턴의 개인적ㆍ공적(정치적) 위신을 감쪽같이 원상으로 복구해주었다. 역사적으로도 현대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한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이래의 대금융공황과 경제위기에 처했던 민주당 정권을 구출했고, 제2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탈전시 경기ㆍ경제 위축ㆍ군비축소의 위협은 한반도 전쟁의 발생으로 구제받았다. 1960~75년 사이의 미국의 베트남전쟁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전쟁 또는 군사적 침공과 정당의 선거 승패 사이의 직접적 함수관계는 두드러진 미국적 현상이다. 이 사실의 인식이 없으면 북한–미국 간의 핵 또는 미사일문제 대결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 국민은 전쟁 영웅을 좋아한다. 그것이 장군이건 제독이건 대통령이건 마찬가지다. 미국 군대가 공격한 전쟁의 상대가 멀리 아랍세계의 인구 2,100만의 중급 군사 강국 이라크이건, 미국의 소도시보다도 작고 가난한,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인구 9만 6,000명의 그레나다(1983~85)이건 그 효과는 마찬가지다. ‘미국의 뒤뜰’인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 카스트로의 쿠바, 아옌데의 칠레, 노리에가의 파나마, 산디니스타의 니카라과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10여 개의 나라들이 번갈아서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가진 이 신묘한 효능의 증인이 되기를 강요당해왔다.
클린턴 대통령이나 민주ㆍ공화당과 그 대통령 입후보자, 그리고 상하의원 입후보자들에게, 동북아시아의 한구석에 있는 노스 코리아와 그 미사일(또는 인공위성)은 그들의 당선을 보증하는 군사행동을 일으키는 데 최적의 제물로 비치고 있다. 북한의 자기주장이 정당하고 빳빳할수록 그것은 용납될 수 없다. 미국 정부의 국무장관, 국방장관, 대통령 북한문제조정관(페리 전 국방장관)이 와싱톤에서 북한에 대한 대이라크 침공전쟁 가능성을 위협하고도 부족해서 번갈아 서울과 일본에 들러 군사적 위기설을 강조했다. 그 뒤를 이어서 주한미군사령관(존 틸럴리 육군대장)은 전쟁의 예비적 최고 지휘관답게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한ㆍ미 양국은 북한의 위협이 어떤 방식으로 닥쳐오더라도 이에 대처할 계획과 태세를 갖추어놓고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1999.8.10). 미국은 선거의 해를 맞아 새로운 전쟁 영웅의 탄생이 필요해진 것 같다.

미국 군사예산(군사적 소비)의 지속적 증대를 위해서 필수적인 무기ㆍ장비의 소모와 전쟁 분위기 조성

미국은 압도적으로 군사적 성격의 국가다. 세계 180여 개 국가의 군사비 비교에서도 그렇고, 국민 세금의 용도별 쓰임새(지출)의 비중에서도 그렇다. 1990년을 고비로 일어난 소련과 공산진영의 붕괴로 과거 미국의 진상 또는 가상 ‘적국’들과 그밖의 세계 국가들의 군사예산은 모두 급격하게 그리고 대폭적으로 감축되는 추세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증가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일방적으로 군비축소ㆍ군비삭감을 선언한 1985년 이후 세계의 군사비 지출은 1997년 8,040억 달러까지 감소되었다. 그러나 러시아ㆍ중국을 포함한 38개 주요 국가들의 총군사비 지출에서 미국 한 국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30퍼센트에서 34퍼센트로 증대했다(8,040억 달러 중 2,810억 달러).
미국 정부는 2000~2005년의 군사예산으로 약 1조 9,000억 달러, 연평균 약 3,000억 달러(2005년도분 3,314억 달러)를 의회에 요청하고 있다. 그밖에도 우리는 위의 표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표 1]미국과 대비한 세계의 국가별 군사비 비교(1998)





  • 미국 1국 군사비는 러시아와 중국의 군사비 합계의 약 3배다(러시아의 약 4.6배, 중국의 약 8배).
    • 미국과 그 동맹국(한국 포함)의 군사비 합계는 러시아와 중국의 군사비 합계의 약 5배다.
    • 미국의 군사비는 미국의 앞으로의 제1차적 공격 대상국인 북한의 56배다(많은 군사연구소와 군사전문가들이 북한 군사예산을 22~30억 달러선으로 계산하고 있어서 100 대 1의 비교가 가능하다).
    • 미국이 ‘불한당 국가’(정권)로 간주해 군사 침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5개국(북한, 쿠바, 리비아, 이라크, 수단)의 군사비 합계 80억 달러는 미국 1국의 35분의 1에 못 미친다(미국 대 쿠바(카스트로)=400:1, 미국 대 리비아(카다피) =281:1, 미국 대 이라크(후세인)=281:1, 미국 대 수단= 997:1).





이 같은 가공할 군사력과 군사비인데도 공화당 의회와 주전론(主戰論) 세력의 연합전선은 (클린턴) 행정부가 요청한 군사예산에 신무기(한 예로 F–22 전투기,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 개발ㆍ제작 계획으로 5년간 해마다 평균 100억 달러의 군사비를 자진해서 예산 책정하고, 법안을 만들고, 여론을 조성하고, 지지표를 동원, 가결해 추가로 얹어주기까지 하고 있다. 미국 의회 의원이 출신구의 군수 및 군대 관련 산업 유치와 육성을 유권자 지지의 중요한 요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은 낡은 무기와 장비를 지속적으로 소모함으로써 신무기와 신장비의 질적ㆍ양적인 발전ㆍ보충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야 하는 체제다.
이같이 해서 연구ㆍ개발ㆍ제조ㆍ대량생산ㆍ실전배치된 신무기들은 그 성능이 입증되어야 한다. 신무기 성능 검증을 위한 최고의 시험장은 미국 내의 모의 시험장이 아니라, 지구상 어느 나라엔가에서의 전쟁이다. 전장에서의 실전 실험의 성공은 미국의 군비증강과 무기개발을 주장한 강경 우익ㆍ주전세력(소련 붕괴 이전에는 극우 반공)의 주장과 입지를 강화해준다. 그 작용은 다시 새로운 무기의 개발, 그에 필요한 예산 증대 결의안에 권위와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들 상ㆍ하 의회 의원의 재당선을 보장한다. 이런 개인과 세력이 노려온 것이 다름 아닌 동북아시아의 소국 노스 코리아다.

미국의 세계적 군사 패권주의의 국내 사회 성격화 현상

미국이 단독으로 ‘세계의 헌병’ 또는 ‘국제적 경찰’로 군림하려는 국가적 의지는 미국의 국민 생활과 사회 성격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국민이 낸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가를 알면 그 국가의 성격과 의지, 그리고 사회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시민)의 물질적 생활과 정신ㆍ문화적 행복(생활의 질)을 중요시하는 국가냐, 아니면 결과적으로는 그 같은 인간 복지와 역행할 수밖에 없는 ‘힘의 조직’ 또는 군대를 중요시하는 사회냐를 알려면, 통치집단 또는 통치권력(행정부, 국회 등)이 국민이 납부한 세금을 배분하는 방식, 즉 정부 예산구조를 먼저 살펴보면 된다.
클린턴 대통령 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21세기를 여는 2000회계연도의 정부 지출 구성은 다음의 표와 같다. 국민 생활의 각 분야에 배분된 인간ㆍ사회복지 예산들이 필연적으로 소모적이고 폭력숭배적 집단인 군대의 유지에 쓰이는 비용에 비해 얼마나 미미한지 알 수 있다. 관점을 바꾸면 미국의 군대와 군사력과 군사적 패권주의가 얼마나 미국 시민의 인간적 행복을 희생으로 해서 유지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표 2]클린턴 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2000회계연도의 지출 구성(총 5,550억 달러)


전체 예산 5,550억 달러 중 2,810억 달러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쓰인다. 예산의 51퍼센트가 군사비다. 이것은 진정으로 세계의 평화를 희구하고 사랑하는 문명국가들에서는 볼 수 없는 예산 유형이다. 예산 배분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상업, 사회보장 및 의료지원, 경제개발, 기타 생활보장 등의 예산 항목은 군사비에 눌려서 질식할 것만 같아 보인다. 물론 그 같은 국민 생활의 가치(價値) 서열에서는 군사적 패권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의 안전과 세계적 패권 경쟁에 도전했던 소련과 세계 공산주의 동맹세력이 소멸한 탈냉전시대에, 미국의 안보를 넘나볼 국가나 정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이 같은 미국 군사예산은 미국의 방위적 안전보장을 위해서라기보다 소련과 공산세계가 소멸한 직후인 1991년 이라크전쟁으로 미국의 의도를 선언했던(부시 대통령)미국의 ‘신세계 질서’, 즉 미국 단독의 세계 지배체제 ‘Pax–Americana’의 확립과 항구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같은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뜻에 유일하게 반발하는 존재가 보잘것없는 노스 코리아인 것이다.

“미국의 무기 판매는 전쟁의 불길을 부채질한다”

미국은 1994~2000년에 이루어진 세계 무기시장에서의 계약액 총 1,065억 달러 가운데 63퍼센트를 독차지했다. 미계약분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클린턴 대통령은 무기 판매는 미국의 중요한 ‘국가적 정책사업’이라고 선언하고, 미국 내 무기 제조 관련산업의 이익에 맞추어서 해외 무기ㆍ장비 판매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의회는 심지어 1996년의 경우, 무기판매 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외국 무기 수입자들에게 제공할 150억 달러의 정부 보증 무기 수출차관을 자진 승인했다. 이런 조치들에는 물론 핵 부속품ㆍ장비와 미사일도 포함된다. 미국은 핵 관련 장비나 미사일 또는 미사일 구성 부분 장비를 판매ㆍ수출할 수 있지만 다른 약소국이나 북한은 그럴 권리가 없다. 미국의 그 수출 판매는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고 다른 나라들과 북한의 미사일 또는 부속 장비의 수출은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미국의 세계정책연구소(World Policy Institute)는 1995년도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미국의 무기 판매를 표현했다.4)

미국의 무기 장사전쟁의 불길을 부채질한다.”





  • 지난 10년간 발생한 45개의 분쟁 대결의 적대적 당사자들이 420억 달러 이상의 미국제 무기를 제공받았다.
    • 1993~94년에 있었던 50개의 상당한 규모의 분쟁 중 45개의 경우에 분쟁의 어느 한쪽 또는 양쪽이 전투 개시 이전에 미국산 무기나 관련 기술을 입수했다.
    • 미국은 50개의 무력충돌 중 26개의 분쟁 당사자들에게 5년 이상에 걸쳐서 적어도 5퍼센트의 무기를 제공했다.
    • 미국은 50개의 무력분쟁 중 18개의 분쟁에서 최근 5년간 한쪽 당사자가 수입한 무기의 25퍼센트 이상을 제공했다.





이상의 사실은 수많은 무기상인 국가들 중에서 미국 하나가 차지하는 비율과 분량이 그렇다는 점을 말해줄 뿐만이 아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 자신이, 무기 장사가 국가의 주요정책이라고 선언하는 미국에게는 전쟁과 무력분쟁이 없는 세계는 불안한 세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실의 현재의 제1목표가 북한이고 한반도다. 그것이 한반도의 핵문제이고 미사일문제다.

미국 재래식 무기ㆍ장비의 해외 판매정책의 목적과 효과

미국 군산복합 권력을 대표하는 대기업가 출신이며 베트남전쟁의 주도자였던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상원의원 조셉 클라크의 다음과 같은 공식성명은, 바로 한반도에서 미국의 그와 같은 목적과 상황이 현실화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해온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책과 전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국의 ‘정치ㆍ군사ㆍ자본ㆍ산업ㆍ두뇌’ 복합체의 이 이념은, 이 책의 다른 글에도 인용한 바 있지만, 현재의 미국–북한 위기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인 지식이기에 중복을 무릅쓰고 다시 인용한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나 극동 및 유럽의 군대에게 미국 무기를 증여하거나 판매함으로써 그들을 미국 국방성에 비끄러매었다.

미국은 6억 이상의 인구를 가진 1,500만 평방 마일의 영토에 걸친 40개 이상의 국가에 대한 ‘보호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 ‘보호령’들의 위성 군대(satellite army)를 조종함으로써 미국 체제에 비우호적인 정부를 타도할 수 있다.

이들 ‘보호국’들을 세력권에 매어두기 위해서는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점령’을 할 필요가 없다. 대외 원조, 차관 공여, 군사 및 무기 원조를 통해서, 그리고 ‘위성 군대’를 조종함으로써 같은 결과를 달성할 수 있다.

이들 국가를 지배하에 두기 위해서 미국 군대를 파견한다면 미국인 병사 1명당 연간 4,500달러의 비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의 전초 군사 기지망의 유지전략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500만 명의 동맹국 군대는 병사 1인당 연 540달러로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인 병사 1인분 비용으로 ‘보호국’의 ‘위성 군대’병사 8명을 고용하고 있는 셈이다.5)





그러기에 냉전 위기의 퇴조로 세계적으로 무기 구입의 열기가 식어가는 데 대해 미국 정부와 무기(군수)산업 이권 집단은 초조해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북한의 핵개발과 원시적ㆍ초보적 미사일의 생산이 미국의 국제적 무기 판매시장에 미칠 불리한 작용을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미국 내 무기 생산기업과 판매상들이 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서 북한을 핵ㆍ미사일 개발 저지의 모델로 삼아, 다른 잠재적 핵ㆍ미사일 개발 계획 국가들에 경고하기 위한 본보기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잠재적 분쟁 요소를 지닌 민족이나 국가가 북한의 본을 따라서 독자적 미사일을 개발하거나 북한제 미사일을 공급받으면 재래식 무기ㆍ장비의 구입에 대한 필요성이 그만큼 감소한다. 핵이나 미사일의 개발은 기초 내지 중간 단계까지의 개발ㆍ제작 비용이 크지만, 일단 개발하고 나면 하나에 수천만 또는 수억 달러씩 하는 수백 가지의 선진국의 첨단 재래식 무기를, 모델이 바뀔 때마다 새로 구입해야 하는 장기적 비용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계산이다. 미국의 무기ㆍ장비 생산업자와 상인들이 세계의 이 같은 재래식 무기시장의 지속적 축소를 막기 위해서 그 본보기로 북한의 미사일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견해다.

미국의 새 ‘별의 전쟁’ 계획과 북한의 미사일과 핵

평화를 두려워하는 미국 군부와 공화당을 중심으로 하는 주전론 세력은 1980년대의 미ㆍ소 대결의 절정 시기에 구상했던 이른바 ‘별의 전쟁’(star wars) 또는 ‘우주 무기전쟁’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수천억 달러의 돈을 들여도 실효성이 의심스럽다는 유력한 과학자들의 비판과 전략가들의 반대 때문에, 그리고 탈냉전시대의 도래로 그들의 망상은 일단 퇴색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과 ‘소련 제국’의 붕괴로 부득이 포기해야 했던 레이건 대통령의 낡은 ‘우주전쟁’의 꿈은, 1990년대 초의 몇 해 동안 당시 군사예산의 감축 경향에 겁을 먹은 군부와 공화당 의원들, 그리고 무기 생산자본과 그들에게 협력하는 교수ㆍ학자ㆍ과학자들의 집단에 의해서 되살아났다. 그들의 주장은 미국이 새로운 미사일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군사예산의 지속적인 증액으로 지위를 누리고 이익을 얻는 이 ‘군부–무기산업 자본–반공 우익 정치가–무기 개발 두뇌(이론가, 과학자)’집단은 ‘미국 본토’를 미사일로 위협하는 새로운 ‘적’을 찾아내야 했다.
전략미사일을 보유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동맹국이다. 일본의 ‘비군용’로켓 세력은 미국의 통제하에 있다. 구소련의 퇴색한 러시아는 그 전략무기(핵과 미사일)의 해체 계획을 미국의 예산과 미국 핵ㆍ미사일 전문가ㆍ군 감시관들의 지휘하에 진행해왔다. 미ㆍ소 전략무기 감축 계획과 미ㆍ소 간 대륙간탄도미사일요격망협정(ABM) 등으로 소련은 다량의 장거리 폭격기와 핵탄두, 그 핵탄두가 장착된 전략탄도미사일, 그리고 사용된 핵물질의 해체와 그 수송 및 안전 저장에 필요한 자금(비용)을 미국 예산에서 제공받고 있다. 즉 러시아의 핵ㆍ미사일 전략무기는 미국의 통제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목적의 예산 지출을 그 법안 공동 제출자인 리처드 루거 상원의원(공화당)과 샘 넌 상원의원(민주당)의 이름을 따서 ‘Nunn–Lugar 계획’으로 약칭하는 그 정식 법안명은 ‘미ㆍ러 협동 위기감소계획’(The Cooperative Threat Reduction Program)이라고 한다.
1991년부터 시작된 러시아와 지금은 독립한 구소련 공화국들의 전략무기 해체 작업비용으로 미국 정부는 1991~99년에 약 31억 달러를 지출했다. 클린턴 정부는 이 사업의 2000~2005년간 후속 계획 예산으로 금년에 새로이 42억 달러를 요청하고 있는 상태다(합계 73억 달러의 미국 정부 돈으로 러시아의 핵무기ㆍ탄도미사일 군사력이 실제적으로 미국 관리하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 없다).
중국이 미국 본토를 핵미사일로 공격할 이유도 조건도 없다. 50~100년 후라면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중국이 직접 미국과의 전쟁을 구상할 이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지구상에는 감히 미국 본토를 핵미사일로 공격할(또는 할 수 있는) ‘적’은 존재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럴수록 미국의 ‘군부–무기 개발ㆍ생산자본–군수산업 지원 정치인–무기 개발 이론가ㆍ과학자ㆍ기술자’들의 이익 연합집단은 기어이 잠재적 또는 심지어 현재적 적대자를 어딘가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눈은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반도의 북쪽 절반에서 ‘North Korea’라는 ‘괴물’ 또는 ‘불한당’ 국가를 찾아낸 것이다. 미국의 연간 군사예산과 이 동북아의 작은 나라의 군사예산은 실제로 거의 100 대 1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생명을 유지하기조차 급급한 실정이다. 됐다! 미국의 이 집단은 돈을 챙길 수 있는 기회와 권력과 지위를 계속 누리고 높일 수 있는 구실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노스 코리아가 대포동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 한다!” 바로 그러고 있을 때에 북한은 인공위성 로켓(미사일)을 발사한 것이다. 그 2단계가 일본을 넘어가서 떨어졌다. 이것을 구실로 30년간 억제되어왔던 일본의 군사대국화의 꿈을 단숨에 실천할 ‘북한 미사일 위기론’이 동북아시아의 공기를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계획은 2중 구조의 미사일 요격망 구축이다. 하나는 북한을 상대로 한 일본ㆍ남한ㆍ대만ㆍ오끼나와……가 가입하고, 그 땅을 기지로 하는 이른바 ‘지역미사일방어체제’(TMD, Theater Missile Defense)이고, 미국 본토에 설치하려는 것이 ‘국가미사일 방어체제’(NMD, National Missile Defense)다. 이 미국의 세력은 의회에서 금년 초에 제1차적 목적을 달성했다. 한반도 주변과 미국 본토에 설치할 그 두 ‘환상적’계획을 추진할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2000회계연도 1년간의 예산으로 NMD 비용 12억 8,660만 달러, TMD 개발착수비로 29억 6,250만 달러, 합계 42억 4,910만 달러. 이뿐이 아니다. 그들은 ① 해군용 광역 및 지역용 ② 육군 지대공 ③ 공군 및 우주궤도 정착용 등과 같은 미사일 요격망 개발비로 합계 22억 80만 달러를 예산에서 따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 같은 새로운 ‘우주전쟁’계획은 1972년에 체결된 미ㆍ소 간 ‘탄도미사일요격협정’(ABM)이나 그 후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이나 ‘,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및 II의 국제적 합의에도 위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스 코리아’라는 나라는 이런 모든 우주전쟁 군사계획을 정당화할 만큼 미국의 운명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미사일 위협이라는 것이다.
이상이 한반도 핵ㆍ미사일의 군사 정치학의 절반의 진실이고 진상이다.

한반도에서의 핵미사일 위협의 역사적 전개

남한의 핵ㆍ미사일 무장화 계획

북한은 1965년에 소규모의 기술자 연구 및 훈련용 원자로 1기를 도입하고, 86년에는 시험용 원자로(5메가와트급)를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아 건설ㆍ운영해왔다. 그 후 원자로 운영 과학자 및 기술자 집단의 양성에 따라서 발전용 원자력발전소(50메가와트급)를 1980년대 말에 건설 중에 있었고, 90년대 말에 준공 예정으로 건설을 시작한 발전소(200메가와트급)가 착공단계에 있었다. 그밖에 70년대에 소련 과학기술자들의 도움으로 5메가와트급 원자로를 건설한 노하우의 축적으로 1987년에는 자체 기술로 30메가와트급 흑연 감속형 원자로를 준공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현재 12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이며, 건설 중인 것이 6기나 있다. 1980년대에 장차 16기 또는 19기의 원자로 증설을 계획했으나, 계획의 수정으로 확실치 않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조건을 전제로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것은 남한(한국)이 1975년, 북한이 1985년이다. 한국의 조약 가입년도가 75년인 데는 이 글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한 채 ‘참패’해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미군철수를 시작한 1972년경부터, 미국의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확고한 한국보호의 능력과 의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닉슨 독트린’으로 미국정부가 앞으로의 한반도 군사분쟁에 6ㆍ25전쟁식으로 직접 군사개입을 할 의사가 없음을 천명한 것이 한국의 의혹을 더욱 확고히 했다.
미국의 베트남 패전, 닉슨 독트린의 불개입 정책,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 북한의 종합적 국력과 국가적 위상에 비해서 거의 비교할 수도 없이 허약한 한국(남한)의 극단적인 열세와 패배의식 등……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유신체제(1인 군사독재)와 군사적 ‘자주국방’정책이 발동했다. ‘자주국방’의 핵심은 남한 독자적으로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북한에 대항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박정희와 군부는 급히 무기 개발 연구기관들을 설립하고, 1972년에는 프랑스로부터 2,300만 달러 가격의 우라늄 재처리시설 도입 계약을 비밀리에 체결했다. 박정희의 계획은 그 시설의 운영으로 나오는 플루토늄을 가지고 최초의 핵폭탄을 1975년에, 그리고 북한의 평양을 사정거리에 두는 사정 300킬로미터 수준의 최초의 미사일을 76년에 완성하는 것이었다.6) 이 구상과 계획은 미국 정부가 프랑스와의 비밀 계약을 탐지하고 박정희에게 핵ㆍ미사일화 계획의 폐기를 강요함으로써 일단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여러 가지 민간 연구기관의 이름으로 설치한 핵무기ㆍ미사일 개발계획을 계속했다. 그 결과로서, 1978년 9월 박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가 추진 중인 핵개발이 95퍼센트 진전됐다는 보고를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다.7)
그밖에도 박 대통령은 1981년의 국군의 날 행사에서 핵폭탄과 미사일의 독자적 생산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하고, 동시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을 79년 1월에 측근에게 했다고도 한다.8) 박정희는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측근에게 총살당했다. 그의 후임자인 군인 출신 대통령 전두환 대장도 캐나다와의 비밀협정으로 독자적 핵ㆍ미사일 군대의 창설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역시 미국의 압력으로 백지화되었다.
한국의 군부와 통치자가 1970년대에 독자적 핵ㆍ미사일 군사력 확보를 서두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베트남전쟁으로, 하위 동맹국을 위해서 미국이 핵무기 사용(보호)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남베트남의 운명이 이를 입증했다.
    • 남한의 경제력과 물적 생산력이 북한보다 크게 열악하다.
    • 공업ㆍ과학ㆍ기술면에서 북한보다 열등하다.
    • 따라서 남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북한의 그것보다 취약해, 재래식 무기의 생산ㆍ강화로 북한 군사력을 따라잡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 국민의 정치적 결속과 사회적 응고력이 취약하다. 독자적으로 전쟁에 대처할 만한 정치ㆍ사회적 기반이 약하다.
    • 북한에 비해 국제사회에서의 지원세력이 약하다. 북한은 당시의 국제 정치세력이었던 제3세계와 비동맹국가 진영의 한 영도적 국가였고, 그 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에 반해 남한은 미국에 반예속적이어서,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 위상이 허약했고, 고립 상태에 있었다.
    • 그 모든 요소의 종합적 차이로 북한에 의한 남한의 흡수통일의 위험이 크다.





이상의 모든 사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이 논리적 귀결로 도출된다. 즉 한반도의 남ㆍ북은 그 어느 쪽이건, 배후적 강대국에게 버림받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그런데다가 국내적 제반 생명력이 쇠퇴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흡수통합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압도적 열세 상태에 몰린 한쪽은 국가적 존립의 위기를 타개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 최후의 ‘자위적’선택을 하게 된다. 핵무기와 미사일이 그것이다. 남한의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에 놓였던 내외적 조건과 상황이 그랬고, “죽지 않기 위해서” 손을 댄 것이 핵무기와 미사일이었다. 그것은 남한이 죽지 않기 위해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하고 정당하고 합법적인 선택이었다.

북한의 국가적 실정과 생존전략

1990년대에 북한이 처한 국내외적 처지는 한마디로 요약해서 1960~70년대에 남한이 놓여 있던 비참한 상황과 같다. 정확하게 반대의 입장에서 똑같은 정도의 위기, 아니 20여 년 전에 남한이 놓였던 위기 상황보다 몇 배 내지 몇십 배 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북한의 군부와 국가 통치 집단은 20년 전에 박정희 남한 통치자가 두려워했던 바로 그 위기 상황에 처했고,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자위적 선택을, 남한의 상대방이 취했던 바로 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역시 핵무기와 미사일이다.
남ㆍ북한은 그 대치적 조건ㆍ환경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문제해결을 위한 사고ㆍ행동ㆍ선택의 체계가 거의 일치한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충분히 많은 정보와 사실들이 공개되었다. 북한에 대한 극단적 적대심을 품은 광적 극우ㆍ반공주의자도 이제는 북한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고 믿어진다.
그 인식을 이성적으로 일보 전진시키면 다음의 상황판단에 도달한다. 즉 ① 남ㆍ북한은 동일한 상황 조건에 대해서 동일한 행동을 한다. ② 남ㆍ북한은 어느 쪽이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진 조건에서는 자위의 최종수단으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착수한다. ③ 남한, 박정희 대통령 정권은 1970년대의 그 같은 조건에서 핵과 미사일 무장 계획을 추진했다. ④ 박 대통령의 자체적 핵ㆍ미사일 군사 계획은 그 국가적 위기 환경에서 남한 국민으로서는 유일하고 정당할 뿐 아니라 합법적인 주권 행사였다. ⑤ 당시에 만약 소련이나 중공이 남한 핵ㆍ미사일 보유화 계획에 전쟁으로 협박했다면 남한 정권 역시 당연히 저항했을 것이다. ⑥ 북한은 20여 년 전 남한이 직면한 것보다 몇 배 심각한 국가 존립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⑦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나 통치 집단은 20년 전 남한의 통치 집단이 선택했던 핵ㆍ미사일 군사력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하려 하고 있다. ⑧ 1970년대 초의 위기 상황에서 남한의 핵무장 계획이 정당한 주권 발동이었다면, 90년대의 상황에서 북한의 핵무장 계획도 정당한 주권 행사다. ⑨ 70년대 상황에서 소련이나 중공이 남한의 핵ㆍ미사일 계획에 군사공격을 해온다면 불법ㆍ부당하듯이, 90년대의 북한 계획에 대해서 미국이 전쟁으로 위협하는 행위 역시 불법ㆍ부당하다.

한ㆍ미 방위동맹과 조ㆍ소, 조ㆍ중 군사동맹의 특징과 성격차

북한은 1961년 7월 6일 소련과, 그리고 1주일 뒤인 7월 11일에는 중공(중국)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북한의 그 배후 강대 동맹국들과의 군사동맹 협정 날짜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남한(한국)은 1954년 10월에 미국과 ‘상호방위조약’(한미 방위조약)을 체결했으나 북한 정권은 1961년 중반까지 소련과 중공과의 군사동맹 체결을 거부해왔다. 소련은 북한의 항구를 소련 극동함대의 기지로 제공할 것을 북한정권에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역시 끈질기게 거부했다. 북한 지도자와 정권의 철학 때문이었다. 즉 약소국이 강대국의 (그것이 아무리 이데올로기적 우방이라 하더라도) 군사적 예속 또는 주종관계에 들어가면 국가적 자주성, 즉 국가의 정치적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는 생각과 두려움에서였다. 북한 정권은, 소련이 1970년대에 세계의 소련의 하위 동맹국가들에 대한 합법적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브레주네프 당서기장이 제창한 약소 동맹국가들의 ‘제한주권론’(制限主權論)의 패권주의적 의도를 경계하고 배격했다. ‘제한주권론’은 미ㆍ소 초강대국이 각기 그 지배하의 하위 동맹국들의 주권 행사를 미ㆍ소에 제한적으로 위탁케 하려는(사실상 해온) 것으로,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이를 수락했다.
그런 강한 주권의식을 고집했던 북한 지도자가, 소련과 중공과의 군사동맹 조약을 1주일의 간격을 두고 서둘러 체결하기로 정책을 바꾼 까닭은, 그 직전에 남한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태 변화 때문이다. 그해 5월 16일 남한의 군부가 “확고한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다”는 구호를 내걸고 쿠데타로 문민정부를 타도하고 군부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북한 정권은 5ㆍ16군부 쿠데타와 강경 반공주의 군사독재 정권의 수립을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을 준비하는 미국과 남한의 협동적 의사표시로 해석했다.
한미 방위조약은 그 제4조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체약 쌍방은 합의에 의하여 대한민국은 그 영토 내와 주변 해ㆍ공역에 미합중국이 그 육군ㆍ해군ㆍ공군을 주둔ㆍ배치하는 권리를 허여(grant)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accept)한다.





이 조약으로 대한민국의 영토ㆍ영해ㆍ영공은 어떤 단서나 제한이나 조건 없이, 미국(군대)의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군사적 예속국가가 되었다. 게다가 한국군 작전통제권(작전지휘권)은 주한미군 사령관의 손에 들어가 있다. 미국 연방정부가 주(州)에 연방군 부대를 이동ㆍ배치할 때에는 주정부와의 협의와 동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영토ㆍ영해ㆍ영공은 미국 군대의 사용에 관한 한 미국의 주(州)보다 하위의 위상이고 무권력이다.
이런 ‘한미 방위조약’군사동맹의 특성에서 5ㆍ16 반공 군부독재 정권의 수립이 북한 정권에 주었을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김일성은 즉각 모스크바와 북경을 1주일 간격으로 달려갔다. 그는 초강대국과의 군사 동맹관계는 약소국의 정치적 주권을 대가로 해서만 유지된다는 평소의 신념을 접고서 두 강대국과의 군사조약을 체결했다. 그렇지만 조ㆍ소, 조ㆍ중 상호원조조약과 한미방위조약과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들 조약에서는 소련이나 중공이 당연한 권리로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ㆍ영해ㆍ영공에 군사기지를 마음대로 설치하거나 군대를 배치하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은 사실이다. 북한의 군대가 소련군 사령관이나 중공군 사령관에게 그 작전지휘권을 반영구적으로 넘겨버리는 조항도 없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은 전쟁이 끝난 5년 뒤인 1958년 10월 1일까지 사이에 완전히 철수했다. 북한은 군사동맹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양 강대국에 대해서 국가의 군사적 및 정치적 주권을 지키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 바쳐야 했던 대가는 크다. 즉 국가방위를 위한 군사비는 거의 자체적으로 부담해야 했다. 그 부담은 마침내 1990년대 전반에 북한 경제의 붕괴를 초래하기까지 된다. 이 군사적 부담에는 러시아나 중국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핵과 미사일의 독자적 개발비도 큰 몫으로 포함된다. 그 이유는 소련의 북한 포기다.

북한 핵ㆍ미사일 독자 개발 결정의 직접적 계기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1986년 7월 28일, ‘신 아시아ㆍ태평양지역노선’을 발표한 직후(10월 22일), 평양을 방문해 미국과의 협력ㆍ우호 관계 수립, 남한(대한민국)에 대한 국가 승인과 정식 외교관계 수립, 북한과의 과거 동맹관계의 청산 의사를 직접 김일성에게 확인했다. 북한과의 군사동맹 조약의 사실상의 폐기 의사가 통고되었다. 맹렬하게 저항하는 김일성과 북한 군부를 달래기 위해서 1988년에 고르바초프는 28대로 알려진 MIG–29 첨단 전투기를 북한에 제공했다. 그 직후(1988.9.16)에 소련 정부는 남한과의 국교수립 의사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고르바초프의 특사인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다시 1990년 9월 말 평양을 방문하여 러시아–한국 국교수립 결정을 공식 통고함과 동시에 조ㆍ소(러) 군사동맹의 사실상의 해체를 통고했다.
김일성 주석은 셰바르드나제와의 면담을 거절했다. 김일성을 대신한 김영남 외상은 소련 외상에게 러시아 정부의 ‘배신 행위’를 규탄하고 러시아 측에 두 가지 결심을 전달했다. 소련에 의존했던 “‘일부 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부 무기’는 미사일을 뜻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또 “독자적 핵무기 제조의 권리를 보유한다”고 강조했다. 정확하게 20년 전에 미국의 ‘닉슨 독트린’에 따르는 대한국정책 수정에 대응해서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 정부가 선언한 독자적 핵ㆍ미사일 군사력 보유 결정의 북한판이라고 할 수 있다(북한의 경우는 그보다 몇십 배 더 심각한 위기였다).
이때에 남한에는 약 700개로 추산되는 미국의 각종 유형과 용도의 핵무기가 북한을 공격 목표로 언제나 발사 준비 상태에 있었다(미국 국방정보센터 소장 라로크 제독, 1976년, 661~686개; 『뉴욕 타임스』, 1983년 11월 15일 보도, 250개; 『와싱톤 포스트』, 1983년 10월 19일 보도, 346개, 괌도 포함; 기타 많은 정보 원천들도 대동소이했다). 북한의 결정은 이 같은 상황 배경에 비추어 보아야만 공정한 이해가 가능하다. 북한이 이 위기 상황을 완화하고 그 진행을 지연시키려는 계산에서 택한 결정이, 그때까지 반대해온 남ㆍ북한 동시 유엔가입(1991.9)과 「남북합의서」조인이다(1991.11).

정전협정과 핵ㆍ미사일 무기의 관계

북한 영토 내에 소련이나 중공의 군사기지도 주둔부대도 없고, 그들의 핵무기나 미사일도 없던 1958년에 주한유엔군 사령부는 주한미군의 유도탄(마타도어) 보유 사실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체결 3년 후에 이미 미국은 남한에 ‘신무기’를 배치했다고 발표했다(1956.8.3, 레드포드 미국 합참본부 의장). 미국이 남한 내에 핵폭탄과 핵미사일을 반입ㆍ비치한 사실은, 미국 정부의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정책’의 허위성을 입증했다. 한국인들 중에는 1992년에 미ㆍ소(러) 합의로, 미국의 한국 비치 중거리 핵ㆍ미사일 철거 사실이 미국 정부에 의해서 공식 발표될 때까지도 미국의 핵무기와 핵미사일이 한국에는 없다고 믿고있던 순진난만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사실은, 미국 정부는 미국의 핵ㆍ미사일 무기의 남한 배치를 추진하기 위해서 정전협정이 발효된 지 4년 뒤인 1957년(5월 22일), 정전협정 제2조 12 (d)항을 일방적으로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이제 2조 12 (d)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정전협정 발효 후 Korea의 국경 밖으로부터 반입이 허용되는 무기는 정전 기간에 파괴ㆍ파손ㆍ손모 또는 소모된 작전용 비행기ㆍ장갑차량ㆍ무기 및 탄약, 동일한 유형(類型)의 것으로 하여, 그 수는 1 대 1로 교환하는 기초 위에서 교체할 수 있다.……





한국전쟁 중에 핵무기와 (핵)미사일은 쌍방 간에 사용된 바 없다. 코리아의 남ㆍ북 어느 쪽에도 들어온 일이 없다. 미국이 정전협정 제2조 12 (d)항의 일방적 폐기를 공산 측 정전위원회에 통고한 것은 핵폭탄과 핵미사일을 아무런 제약 없이 남한에 배치하기 위한 선행조치였다. 북한과 중공 측은 이것이 미국의 정전협정 위반임을 규탄했다.
정전협정 제4조 6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본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과 증보(增補)는 반드시 적대(敵對) 쌍방 사령관들(미국ㆍ북한ㆍ중공)의 상호합의를 거쳐야 한다.





미국은 협정 조인 3년 뒤부터 북한을 공격 목표로 하는 핵폭탄ㆍ핵탄두ㆍ핵지뢰ㆍ핵배낭, 핵미사일 등 각종 핵무기 수백 개를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과 중공의 핵ㆍ미사일은 북한에 없었다. 이 치명적인 무력의 질적 불균형과 그 무기 배치의 정전협정 위반 사실도 한반도(특히 북한과 미국)의 핵 및 미사일 문제를 보는 시각 속에 공평하게 넣어야 한다. 미국이 정전협정을 어기고 핵ㆍ미사일을 도입하기 시작한 1956년부터 30년간 북한은 중ㆍ소의 핵ㆍ미사일 없이 비핵정책을 지키다가, 소련의 핵우산 포기(1991) 통고를 받고 총력을 투입해 본격적인 자체적 핵ㆍ미사일 군사화에 돌입했다. 미국은 이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핵 불보유국에 대한 미국의 핵 선제공격권 독트린의 문제

미국은 과거 세계의 45개국과 군사적 방위협정을 맺고 있다. 이들 피보호국들에 대한 보호 의무는 최종적으로 그들의 가상적(과거에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들, 중공, 북한, 쿠바……)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가상적국들에 대한 미국 핵무기 사용의 일반원칙은 ‘핵무기 대 핵무기’였다.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바르샤바동맹군과의 일반원칙도 ‘재래식 무력 대 재래식 무력’이었다. 특히 1972년에 북대서양동맹(나토)과 바르샤바동맹 간에 안보협력협정이 체결된 후는 미국의 핵무기와 전략미사일은 사실상 그 용도를 상실한 셈이다.
그런데 이 핵 일반원칙에서 유일하게 제외된 국가가 북한이었다. 미국은 이란ㆍ이라크ㆍ쿠바ㆍ수단ㆍ리비아 등 미국이 규정하는 ‘불한당 국가’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북한에 대해서 ‘재래식 무기 대 핵무기’, 즉 핵무기의 ‘선제공격 사용권’을 고수해왔다. 이것은 미국의 횡포와 ‘힘의 오만’의 표시였다.
‘노스 코리아’에 대해서만은 미국은 언제나 핵공격을 할 권리를 갖는다는 미국의 오만은 미국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마이어 대장의 공개적 발언에서 잘 드러났다. 마이어 육군참모총장은 그의 공개발언 장소를 서울로 택한 기자회견(1983.1.23)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 북한에는 우리가 아는 한 소련이나 중공 또는 자체 핵무기ㆍ미사일이 없다.
    • 북대서양동맹(나토) 국가들에 배치된 미국 핵미사일의 발사는 그 국가들 정부와의 사전협의가 필요하다.
    • 그 때문에 유럽에서의 미국 핵미사일의 사용에는 제약이 있다.
    • 그러나 한국에 배치된 핵미사일 발사 여부의 기본적 판단과 권리는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그 판단과 결정을 미국(과 한국)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된다.





북한을 핵공격하겠다는 주한미국군 사령관 겸 한국군 작전지휘권자의 판단과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남한의 대통령이 있겠는가? 이의를 제기할 정치적 독자성이나 군사작전상의 여지나 있겠는가? 이것은, 미국이 중동지역 석유자원의 독점적 확보를 위해서 중동지역에서 아랍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할 때 소련의 군사적 대응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아시아에서 전개할 ‘제2전쟁’(제2전선)에 한국군은 지상공격으로, 미국은 핵미사일로 북한을 공격한다는 와인버거 미국 국방부장관의 이른바 ‘2개 전선 전쟁’(Two Front War)과 함께 나온 대북한 협박이었다. 핵무기 없는 약소국 북한에 대해 미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핵 선제공격권’을 가지고 끊임없이 협박할 때 북한으로서는 ‘죽는 권리’밖에 없는 사정이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공포감을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한ㆍ미 공동 팀스피리트 훈련이다. 1991년에 미국의 대이라크전쟁 규모의 핵군사력을 그대로 휴전선 바로 남쪽 육지와 바다와 공중에 전개한 연례적 핵전쟁 훈련을 하면서, 그 상대방에게 핵무기도 미사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와 주장은 아무리 너그럽게 해석하려는 사람에게도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어느 모로 보나 그것은 힘의 논리가 아니었을까?

미국–한국 팀스피리트 훈련의 전쟁논리

‘팀스피리트’미국–한국(미ㆍ한) 3군 합동 군사훈련은 1976년 6월에 시작하여 25년간 해마다 실시되어온 대북한 핵공격ㆍ상륙작전 훈련이다.
‘팀’훈련은 미국이 1972년 이후 전 세계에서 실시하는 동맹국가(들)와의 군사 합동훈련 중 그 규모에서 최대ㆍ최상급이며, 이라크 공격전(1991) 같은 실제 전쟁을 제외하면 유일한 ‘전쟁급’ 핵합동 군훈련이다. 1975년에 바르샤바동맹과 북대서양동맹의 동서진영 35개국이 군사대결 체제의 해체를 의미하는 전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CSCE)를 헬싱키에서 발족시킨 선언(헬싱키 선언) 이후, 미국이 그 동맹국과 평화시 상황에서 1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군사훈련(그것도 매년 고정적으로 실시하는)은 지구상에서 없어졌다. 그 때문에 미국은 지구상 어딘가에서 미국 육ㆍ해ㆍ공군의 전쟁 규모의 합동 핵 군사훈련을 매년 실시할 수 있는 구실과 장소와 대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미ㆍ한 합동 팀스피리트’훈련이다.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팀’훈련이 유럽 공산국가들의 바르샤바동맹을 상대로 한 북대서양동맹(NATO)의 전쟁규모 훈련을 할 수 없게 된 1976년부터라는 시기의 일치를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도 미ㆍ한 ‘팀’훈련은 해마다 미국의 공격형 핵항공모함 2척을 중심으로 20여 척의 핵장비 함대, B–52 핵폭격기 편대와 각종 핵공격 전폭기 편대를 주공격력으로 해 평균 20만의 미ㆍ한 육군 지상병력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ㆍ최강력급의 대북한 공격 훈련이다(참가 병력은 첫회인 1976년 4만 6,000명, 1978년 10만 4,000명, 1979년 16만 명, 1980년 14만 5,000명, 1985년 이후는 최고 수인 20만 9,000명으로 급증했다. 이 시기가 대북한 핵공격 전쟁을 상정한 ‘5027 90일 작전’계획의 수립과 일치함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팀’훈련은 바로 이라크공격미국 육ㆍ해ㆍ공군의 실전 규모다. 그 훈련 기간은 세계 군사훈련에 유례가 없는 60~90일이다.
북한은 ‘팀’훈련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업 생산기관ㆍ광산ㆍ농업ㆍ수산 기능이 국토방위태세로 전환한다. 국가의 생산 기능이 정지되고, 전 인민이 무장배치된다. ‘팀’훈련이 끝날 때까지 60일 또는 90일 동안 국가의 경제ㆍ사회ㆍ문화적 활동은 정지된다. 미국이 해마다 20여 년간 계속한 팀스피리트 미ㆍ한 공동 군사훈련은 바로 이같이 북한의 국력을 소모시키고 북한의 군사적 대응 능력과 기능을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지구상의 어느 다른 국가에 대해서도 미국이 감행하지 않는, 오로지 북한에 대해서만 25년간 계속해온 핵공격 협박인 것이다. 핵군사력을 갖지 않는 약소국가에 대해 세계 최강 핵군사력이 일방적으로 핵전쟁 위협을 25년이나 계속하는 행위는 어떤 구실이나 변명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사실상의 공격행위라 할 것이다.

●[표 3]팀스피리트 훈련 개요(1976~87)


 


기간


병력†


미군의 주요 참가부대†


주요 훈련내용


1976 6.10~20


46,000명


 


상륙작전


미군 6,000명


한국군 40,000명


1977 3.28~4.13


87,000명


오키나와 주둔 제18전술전투항공단, 오키나와 주둔 제9수륙양용여단, 제1해병항공단, 제7함대(항공모함 미드웨이)


상륙작전, 지상공격훈련


미군 13,000명


한국군 74,000명


1978 3.7~17


104,000명


제25보병사단, 랜스미사일대대,괌 주둔B–52 편대, 제7함대(항공모함 미드웨이), 오키나와 주둔 제3해병사단


해군기동훈련, 긴급출격훈련, 상륙작전, 비상활주로 이착륙훈련, 도하작전, 랜스미사일 발사훈련


미군 45,000명


한국군 59,000명


1979 3.1~17


160,000명
미군 56,000명
한국군 104,000명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제1해병항공단, 랜스 미사일대대, 제7함대, 괌 주둔 B–52편대, 제25보병사단


상륙작전, 대잠수함작전, 랜스미사일 발사훈련, 출격훈련, 공지합동훈련


1980 3.1~4.20


145,000명


제25보병사단,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알래스카 주둔 공군, 제7함대(항공모함 미드웨이)


도하작전, 해군기동훈련, 지상공격훈련, 상륙작전, 출격훈련


미군 42,800명


한국군 102,000명


1981 2.1~4.10


156,700명


제25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오키나와 주둔 제3해병사단, 괌 주둔 B–52편대, 제7함대


상륙작전, 도하작전


미군 56,700명


한국군 100,000명


1982 2.13~4.26


161,600명


제25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오키나와 주둔 제3해병사단, 괌 주둔 B–52편대, 필리핀 주둔 미 공군, 제7함대(항공모함 미드웨이)


항공모함 기동훈련, 상륙작전, 도하작전, 화력시범훈련


미군 61,600명


한국군 100,000명


1983 2.1~4.16


191,700명


제7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7함대(항공모함 미드웨이, 엔터플라이즈), 괌 주둔B–52편대, 팔리핀 주둔 미 공군


도하작전, 해상작전, 기뢰전훈련, 야외기동훈련, 상륙작전, 화력시범훈련


미군 73,700명


한국군 118,000명


1984 2.1~4월 중순


207,150명


제25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알래스카 주둔 공군, 제7함대(항공모함 키테이호크), 괌 주둔 B–52편대


상륙작전, 기뢰전훈련, 전략공수공중투하훈련, 전투기 전투훈련, 도하작전


미군 59,800명


한국군 147,300명


1985 2.1~4.30


209,000명


제25보병사단,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제7함대(항공모함 미드웨이), 괌 주둔 B–52편대, 알래스카 주둔 공군, 오키나와 주둔 특수부대


상륙작전, 전략공수공중투하훈련, 기뢰전훈련, 도하작전, 화학전훈련


미군 62,000명


한국군 147,000명


1986 2.10~4.25


209,000명


제25보병사단, 제9보병사단,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필리핀 주둔 미 공군, 괌 주둔 B–52편대, 제7함대(항공모함 미드웨이)


상륙작전, 공격작전, 해상작전, 비상이착륙훈련, 지상공격훈련


미군 70,000명


한국군 139,000명


1987 2.19~5월 상순


한미군 합쳐 약 20만 명


제25보병사단, 제9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필리핀 주둔 미 공군, 제7함대(항공모함 레인저)


상륙작전, 비상이착륙훈련, 해상훈련, 해당군수지원훈련, 화학전훈련


*『군사민론』52호 ; 강성철 지음, 『주한미군』, 일송정, 91~92쪽에서 재인용. †표시된 참가부대와 병력은 한반도 밖에서 증파된 것뿐이다. 참가한 주한미군을 합하면, 그 부대와 병력은 여기 표시된 것보다 훨씬 많다.


만약 블라디보스토크에 기지를 둔, 소련 해군 극동함대의 공격형 핵항공모함 2척을 중심으로 20여 척의 핵공격 함정과 소련의 가공할 ‘베아’핵폭격기 편대와 순항미사일 발사용 전폭기 편대를 해상과 공중에 전개해, 1986년의 미ㆍ한 ‘팀’훈련의 경우처럼, 소련군 7만 명과 북한 인민군 13만 9,000명이 동원된 ‘소련ㆍ북한판 팀스피리트’공격 합동작전을, 휴전선 바로 북쪽, 동해안의 강원도 간성과 서해안의 강화도 북쪽에서, 하루 이틀도 아닌 60일 또는 90일씩, 핵무력이 없는 (게다가 미군기지도 주한미군도 없는) 허약한 약소국 남한에 대해서 25년 동안이나 해마다 계속한(했)다면, 한국 국민과 정부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했을) 것인가? 세계는 핵 초강대국 소련과 북한의 그 같은 드러내놓은 핵전쟁 협박 행동을 뭐라 해석할(했을) 것인가? 북한에 소련군이나 중공군의 군사기지도 그 주둔 군대도 없는 것처럼, 가령 주한미군도 미군기지도 없이 고립무원에 처했다면 비핵 약소국인 한국도 그 같은 소련ㆍ북한 합동의 ‘소ㆍ북 팀스피리트’핵공격 군사훈련의 협박을 25년간이나 당하는 동안, 독자적 핵무장과 미사일 무기 개발을 구상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세계 제4위의 군사대국인 일본(북한에 대해서 철저한 적대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과거의 식민제국주의)이 미ㆍ한 ‘팀’훈련의 실제적인 제3의 합동훈련군으로서 ‘미ㆍ한ㆍ일 팀스피리트’ 핵전쟁 훈련을 25년간 계속해오고 있다면 어떠할까? 입장을 바꾸어 한 번쯤 북한의 처지에 서서 생각해보는 이성적 태도가 아쉽다.
한국 국방부가 국내의 정보를 종합ㆍ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1986년부터 소규모로 동해에서 이루어진 소련–북한 해군 합동기동훈련은 89년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소련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83년 이후, 군사훈련을 대폭 축소했고, 92년에는 단 한 건의 훈련도 실시하지 않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특히 해상훈련은 1982년부터 91년까지 78퍼센트가 감소하고, 공군훈련은 1972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으며, 1982년부터 91년까지를 보면 64퍼센트 감소했다. 공군조종사 비행훈련도 최소한의 유지 비행 수준으로, 모의 탑승훈련과 지상 학습훈련으로 대치하고 있다. 공군과 육군의 공ㆍ지 합동훈련도 91년 이후 단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특히 해군과 공군의 해ㆍ공 합동훈련은 1987년 연간 4회 실시하던 것을 91년부터는 1회로 대폭 축소해오다가, 그 후 그것마저 실시하지 않고 있다(한국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북한군사 분석상황 보고」, 『중앙일보』, 1992.9.3). 주한미군사령관겸유엔군총사령관 겸 한미연합군 사령관 로버트 W.리스카시(Robert W. Riscassi) 대장은 이미 1991년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에 제출한 「북한 군사력 평가보고서」에서, “북한 군대는 사실상 군사력이라고 할 수 없으며, 북한군 병기창의 첨단무기인 MIG–29 전투기는 부속품과 연료가 없어서 조종사의 비행훈련을 1년에 겨우 4시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뉴욕 타임스』, 1991.6.6). 같은 기간 남한(한국) 공군전투기 조종사의 1인당 평균 연간 비행훈련은 약 130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표 4]북한군의 해ㆍ공군 합동훈련 감소 실태


미국군 최고 현지 사령관과 남한의 국방부가 이처럼 공개적으로 확인한 무력화한 북한에 대해서, 25년간 계속해온 팀스피리트 핵전쟁 훈련 협박의 결과가 바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의 독자적 개발 계획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울 일도 아니며 이상할 것도 없다.
북한의 이 같은 생존적 위기보다 훨씬 안전했던 1970년대 초의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의 한국이 핵과 미사일의 독자적 개발을 시도했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의 의미는 명백해진다. 위기의 원인은 북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북한 말살정책에 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미국의 대북한정책의 ‘책임 불이행’ 문제

북한의 독자적 핵 또는 미사일 개발을 예방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개발이 애당초 불필요하게끔 만들 수 있었던 미국 측의 이니셔티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군사적 측면에서 미국의 압도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북한은, 한반도상의 군사적 대결구조를 정치적 일대 정책 전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 정치적 방안의 구체적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제4조 60항에서 합의한 대로, “정전협정이 발효한 후 3개월 내”에 참전국의 정부를 대표하는 정치회담을 소집하여 정전협정을 대체할, 종합적 관계정상화를 그 목적과 기능으로 하는 정치적 ‘평화협정’(또는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일이었다. 정치회의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정전 후 3개월이 훨씬 지난 1954년 4월 27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리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전쟁 당사 쌍방(미국과 북한 및 중공)은 여러 가지 최종안을 내놓고 흥정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쌍방이 각기 내놓고 주장한 평화협정안 초안의 많은 항목들에는 의견 접근이 있었으나, 결정적 대립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한의 입장으로서, 인구비례식ㆍ비밀투표에 의한 남ㆍ북 총선거에는 동의하면서도 유엔의 총선 참여 또는 감시는 거부한 것이다. 유엔은 한국전쟁의 일방 직접 당사자이기 때문에 총선 운영이나 감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북한ㆍ중공ㆍ소련 등의 주장이었다. 둘째는, 미국의 반대다. 정전협정 제4조 60항의 문장은 그 정치회담에서 코리아반도에 참전해 남ㆍ북 각기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 군대의 전면철수를 결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미국은 미국 군대의 남한 철수와 남한의 미국 군사기지를 제거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결과, 정치회담은 결렬되고 ‘평화협정’의 체결은 1999년 현재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전 세계에 걸쳐 소련ㆍ중공ㆍ북한 포위공격망을 구축하고 있던 미국은, 전쟁의 대가로 획득한 남한의 미국 군사기지화와 미국 군사력의 영구적 주둔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이 북한의 핵ㆍ미사일 군사화 구상을 초발단계에서 예방할 수 있었던 가능성의 상실이다.
다음은 미국의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 불승인정책이다. 한반도 위기의 성격은 한국전쟁 당시와 냉전시대의 동북아시아지역의 2대 정치ㆍ군사동맹체의 첨예한 대립적역관계구조다. 소련과 중공을 배후로 북한이 형성하는 중ㆍ소ㆍ북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과, 미ㆍ일ㆍ한 3국이 미국을 정점으로 형성하는 미ㆍ일, 미ㆍ한 상호방위조약 군사동맹 체제가 그것이다. 이 군사동맹체제는 이른바 북방 3각 동맹과 남방 3각 동맹의 형태로 한반도에서 분단국가인 북한과 남한을 접점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그림]


이 적대적 군사적 대립구조를 해체하는 방법은 정치적 일괄타결밖에 없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국가 승인하고, 중공과 소련이 남한을 국가 승인함으로써 군사적 적대관계를 정치적 선린관계 내지는 일반적 국가관계로 해소ㆍ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중공과 소련은 이 방식을 꾸준히 요구했다.
미국도 베트남전쟁을 종결한 이듬해인 1976년(7월 22일), 드디어 또 하나의 지역 내 군사위기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키신저 국무장관이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중공과 소련의 대한민국 승인, 이에 대응하는 미국과 일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승인(교차 승인), 남ㆍ북 국가의 유엔 동시가입을 제안했다. 관련 강대국들의 동시적 교차승인과 남ㆍ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남ㆍ북한의 감정적 ‘별개 국가화’, 즉 한반도의 2국가체제를 고착화할 것이지만, 군사적 적대관계와 전쟁위기를 해소해, 6ㆍ25전쟁의 정치적 일괄타결을 실현할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한반도상과 주변 지역의 평화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환영받았다. 그 후 러시아(소련)는 1991년, 중국은 92년에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전면적인 국교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정치적 해법의 제안자인 미국은 북한 승인을 완강히 거부하고 북한에 대한 끊임없는 전쟁 위협을 증대해왔다.
북방 3국 군사동맹체의 일방적 해체와 그로 말미암은 핵보호우산의 상실, 미국의 남ㆍ북한 교차승인 거부, 대북한 전쟁 위협……이 북한의 독자적 핵ㆍ미사일 계획의 동기적 배경을 이룬다. 따라서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미사일의 독자 개발을 재고하게끔 할 수 있는 이니셔티브는 전적으로 미국에 달린 문제라 하겠다.

미국 핵ㆍ미사일 정책의 이중 기준과 도덕성 문제

미국–북한 핵ㆍ미사일 분쟁의 특징을 가장 명쾌하게 말해주는 것이 세계의 다른 현재적 또는 잠재적 핵 및 미사일 보유국들에 대한 미국의 대응과 북한에 대한 태도의 너무나 대조적인 성격이다.
미국이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 핵전쟁 위협으로 원자로와 핵 재처리시설의 해체를 강요하던 1991년 현재, 세계에는 핵금지조약에 서명도 하지 않았고 조약의 비준도 하지 않은 국가가 28개국9)이나 있었다. 미국은 이 28개국 중 어느 한 국가에 대해서도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북한에 대해서와 같이 핵전쟁 위협을 함부로 한 나라도 없다.
그뿐이 아니다. 아랍지역에서의 미국의 대리인격인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등에 직간접적 지원으로 1980년대 초에 이미 아랍국가들을 공격 목표로 하는 중거리미사일 약 200기와 핵탄두 약 100개를 완성, 보유하고 있는 사실이 여러 경로로 확인되어 있었다. 아랍국가들의 맹렬한 비난과 제재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단 한마디 비난도 경고도 한 일이 없다. 그 이유는 세계가 아는 대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소수 백인이 압도적 다수의 흑인 원주민을 동물처럼 격리ㆍ차별ㆍ박해해온 최악의 반인권ㆍ반윤리적 정권ㆍ국가였다. 그 범죄적 반인간성은 근현대 역사에서 미국 백인에 의해 저질러진 수백만 인디언 원주민 대학살과 히틀러 나치독일 체제의 유대인 대학살 다음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잔인 극악한 소수백인 지배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남부아프리카의 20여 개 사회주의 경향의 흑인 국가들을 압도적으로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디바이드 앤드 룰’(분열시켜 통치함)하는 냉전시대 서방 자본주의(특히 미국)의 대행 국가였다. 세계의 경제ㆍ금융ㆍ사회ㆍ문화ㆍ정치, 심지어 각종 스포츠협회……의 장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수많은 제재결의안이 제출되었을 때, 한 번도 예외없이 남아공 정권의 제재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 미국이다. 미국에게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 지배의 전초기지이자 후방기지였던 것이다(아랍세계의 이스라엘과 함께).
그 남아공에서 1992년 8월 초, 미국의 일단의 CIAㆍ군ㆍ핵 부문 전문가들이 남아공 정권의 상대방과 협동해 6개 반(2분의 1)의 핵탄두를 해체했다. 실전화할 수 있는 핵탄두가 6개, 절반 정도의 조립 과정에 있는 것이 하나였다. 이 미국–남아공 합동 핵무기 해체작업 개시에 앞서서 남아공 정부는 1980년에 최초의 ‘히로시마’형 규모의 핵폭탄 제조에 성공해 그것들이 90년 2월까지 사이에 생산된 사실을 처음으로 시인했다. 미국이 그 제조에 관여한 사실도 밝혀졌다. 남아공화국의 이 핵폭탄들은 미국의 간섭을 거부하는 아프리카 국가에 대해서 미국을 대신ㆍ대리해서 남아공화국이 사용하는 군사정치학을 설명한다.
미국과 남아공 인종 격리주의 정권은 어째서 미국의 지원하에 제조된 그 핵무기를 1992년 8월에 와서 갑자기 해체했을까? 답변은 간단하다. 그 2년 뒤에는 소수 백인 독재체제가 종말을 고할 정치적 수순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수 흑인이 권력의 중추를 장악하는 새 체제와 정권이 등장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새 체제와 권력의 정상에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는 만델라 흑인 정치지도자가 예정되어 있었다. 미국은 미국의 이익 수호에 충실한 대리인인 반아랍적 이스라엘과, 히틀러 나치에 버금가는 극악한 인종격리주의자인 백인 통치하의 남아공화국이 핵무기와 핵미사일을 제조하는 것은 지원ㆍ묵인할 수 있지만, 미국의 일방적 힘의 논리와 명령에 고분고분 굴복하지 않는 보잘것없는 국가나 정권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갖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맺는 말

이것이 지난 50여 년간 특히 구소련이 미국에 대한 핵 대 핵 국가의 자리에서 물러난 결과 미국의 ‘단독 세계 지배질서’가 확립된 1990년 이후의 미국이라는 나라의 지배 권력의 핵ㆍ미사일 철학이고 그 행동규범이다. 지금 우리는 그 철학과 행동규범의 실제적 전개를 우리 민족의 땅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핵ㆍ미사일 위기의 주요인은 미국에 있다. 이 위기의 해법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것도 미국에 달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 이 글은 당대비평8, 1999년 가을호에 실렸던 한반도 핵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을 일부 보완한 것이다.

2) 이에 관해서는 당시 미국 의회와 정부 내부의 생각과 언동을 소상하게 묘사한 돈 오바도훠의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1997)12, 13절을 보라.

3) 주한 미국 군사령관 겸 유엔군통합 (최고)사령관 겸 미한 연합군 최고사령관 로버트W. 리스카시 대장이 본국 상원군사위원회에 제출한 정세 보고서, 199131, 19.

4) The Defense Monitor, Center for Defense Information, Washington, D.C., December, 1995.

5) The MilitaryIndustrial Complex, Sydney Lens, 1970, 2, 미국군산복합체의 기원과 목적.

6)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 외무장관 이동원.

7) 1993, 국방과학연구소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민주당 의원전 보안사령관의 발언.

8)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 선우 연의 말. 조재길, 한반도 핵문제와 통일, 66쪽에서 재인용.

9) 알바니아, 알제리, 앙골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버마(미얀마), 칠레, 코모로, 중국(5대 핵 강국의 하나), 쿠바, 지부티, 프랑스(5대 핵 강국의 하나), 기아나, 인도, 이스라엘, 모리타니, 모로코, 모잠비크, 나미비아, 니제르, 오만, 파키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아랍에미리트, 바누아투, 잠비아, 짐바브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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