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독재자의 ‘눈엣가시‘ 가 되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2-01 04:25
조회
881

독재자의 '눈엣가시'가 되어


 


유죄판결을 '확신'하는 변호사


군부독재 3대를 겪으면서 한승헌 씨와 공유한 나의 인생의 분량은 결코 적다 할 수가 없다. 조금 표현을 과장한다면 '파란만장한' 시대의 삶의 상당한 부분을 함께하거나 나누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달리 군부독재 정권의 미움을 받아 여러 번 형무소를 드나들어야 했던 나는 그때마다 '한승헌 변호사' 에게 '사법적 구원'을 호소했다. 그때마다 한변호사는 많은 수의 변호인으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이끌어 그 주역을 맡아주었다.


군부독재하의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관련 시국사건의 재판에서 '유죄' 이외의 판결을 재판부에 기대한 피고인은 거의 없다. 어쩌면 변론은 한낱 '요식행위' 인 감이 없지 않았다. 헌법에 기재된 '민주공화국'과 '법치주의' 라는 간판의 겉치레일 뿐이었다.


그런 사실이 분명한 데도, 다시 말해 유죄판결이 나올 것이 뻔한 시국사건, 그것도 나의 경우처럼 정권의 집중공격의 대상인 사건에서 '패소'가 뻔한 것을 알면서 변론을 하는 것이 변호사로서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을까! 피고인석에 앉아서 '한변'의 야무진 변론을 듣는 나는 '저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겠구나' 하는 절망감으로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언제나 재치있는 유머로 처리해버리는 '한변'은, 그 정황에서의 심정을 역시 날카로운 해학으로 답하곤 했다.


“나는 피고인이 무죄임을 확신하면서 동시에 유죄판결이 나리라는 점도 확신했다.”


'열심히 변론할수록 유죄판결은 틀림없지!'


한변호사의 회전 빠른 익살에 으레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하지만 사건이 끝난 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열심히 변론할수록 유죄판결이 틀림없었던' 그 시대의 법정에서 한변호사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숙연해지는 것이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한국앰네스티 시절


나는 지금 책상에 펼쳐놓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의 1979년도 보고(소식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새로 개편된 임원과 이 사진을 소개한 표지에 적힌 명단에서, 신임 전무이사 한승헌의 이름 뒤에 적은 직업란을 보니 '출판인'으로 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 맞아 죽기 몇 달 전, 유신독재가 극악에 달했던 시기의 한국앰네스티를 실질적으 로 이끌고 갈 책임을 맡은 한승헌 씨는 '변호사' 가 아니라 '출판인' 이다. 나는 이사의 한 사람으로 적혀 있다(나는 이 해 옥중에 있었다).


그가 변호사가 아니라 '출판인' 이었던 이 시기 전후 8년간(1975~83년)이 한변호사와 내가 제일 '즐겁게(?)' 지낸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도 많이 했고, 테니스도 많이 쳤다.


한승헌 씨와 나는, 박정희의 유신 선포 전야인 1972년 3월, 김재준 목사를 대표로 하여 결성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한국위원회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4년에는 군사독재 반대와 민주주의 실현을 목표 로 하는 시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 에서 뜻과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다.


이같은 민주회복운동에 '변호사' 로 참여한 한승헌 씨는, 시인 김지하의 반공법사건 변호를 맡았다가 군사정권에 의해서 2년 전《여성동아지에 실렸던 '어떤 조사 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 라는 짧은 글을 빌미로 잡혀 그 자신이 반공법의 쇠사슬에 묶이게 되었다.


옥에서 풀려난 그는 8년간 변호사 자격을 정지당하여 '삼민사'라는 출판사 간판을 걸었다. 졸지에 '출판인'이 된 한승헌 씨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좌절과 실의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충정로의 허름한 건물의 방 하나를 빌린 '삼민사' 에서 그는 언제 만나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 다. 출판한 책이라야 별로 돈을 벌어다줄 것같지 않아 보였다. 경제적으로 겪는 어려움도 컸다. 앞이 캄캄한 상태에서 언제 만나도 유머를 잊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인간 한승헌, 나는 '삼민사' 의 단칸방 사무실에 찾아갈 때마다, 그의 작은 체구에 담겨 있는 인간의 큼에 속으로 놀라곤 했던 것이다.


이 '추방' 의 시기에 그는 한국앰네스티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다. 평생회원 제도를 만들어 회원체제를 강화하고 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의 뼈대를 든든하게 꾸렸다.


비원(창덕궁)과 창경원 사이의 길가에 세들어 있던 앰네스티 사무실에서 우리는 많은 회의를 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박정희 정권의 막판이다. 시국사범은 1,000명대로 늘어나고, 매일같이 수십 명의 반공법 · 국가 보안법 위반 정치범 · 양심범이 무더기로 만들어질 때이다. 이 사건들의 진상을 파악하고, 전세계의 양심에 호소하며, 앰네스티 국제본부와 세계적 조직망을 통해서 그들에게 지원과 구호의 방법을 강구하게 하는 일이 한국 위원회의 전무이사인 한승헌 씨의 어깨 그리고 머리에 맡겨진 것이다.


'출판인' 한승헌이 전무이사로 있던 1979년 봄부터 1년간이 한국앰네스티가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시기이다. 월급도 없고 수당도 없이, 오히려 각기 어려운 형편에서 용돈을 털어 모아가면서 운영해야 했다. 이 기간의 한국앰네스티의 역할과 업적을 한승헌 씨는 평생을 두고 흐뭇한 마음으로 회고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기는 박정희 독재의 말기인 이 시기는 누구나가 그야말로 '영웅적' 반독재 · 민주화 · 인권의 싸움을 전개하고 있을 때였다. 피투성이가 되었던 시기이다. 국제 앰네스티의 특이한 운동방식을 지키고자 노력하면서 국내의 민주화 전투의 후방을 담당했던 한승헌 씨의 공로는 이 나라 민주화투쟁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마땅하다.


이처럼 험난한 시국에 희생적으로 만들고 키운 한국앰네스티를 한승헌 씨와 나는 1980년 여름에 역시 함께 떠나게 되었다. '떠났다' 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사실은 '쫓겨났다'. 아니, '빼앗겼다' 고 해야 정확하다.


정권장악을 위해서 광주의 대학살을 치른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군부는 1980년 초여름, 중앙정보부의 남산 지하 암석감방에 처넣은 우리에게 앰네스티 임원 · 이사직은 물론, 영구회원 자격까지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각서를 쓰게 했다. 한국앰네스티를 군부정권의 시녀노릇을 하도록 하는 각본에 따른 조치였다.


출판사도 시원치 않고, 앰네스티의 일도 없어진 한변호사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서 풀려난 뒤, 김상현 · 장을병과 나를 테니스장으로 꼬여냈다. 네 사람이 다 '실업자' 처지였다. 김상현 씨는 정치를 박탈당했 고, 장을병 씨와 나는 대학의 강단에서 추방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두번째의 '해직교수' 신세가 된 것이다. 심심치 않게 테니스장에서 만났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투옥되어 교도소에서 '프로급' 테니스 솜씨를 익힌 김상현 의원을 제외하곤 한승헌 씨와 장을병 교수는 나와 마찬가지로 초보자였다. 한승헌 씨가 8년간의 추방기간이 지나 변호사 자격을 회복하여 다시 개업한 1983년 늦게까지 우리는 테니스장에서 회포를 풀었다. 한승헌 씨는 머리가 좋은 탓인지, 나와 같은 초보자였는데도 얼마 가지 않아 김상현 씨를 위협할 정도로 숙달했다. 장을병 씨도 체력과 뚝심으로 두 사람에 육박했다. 나만이 초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중앙정보부 역사상 초유의 일'


나는 이 기간 동안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통일관계 교과서 연구분석 사업' 에 연루되어 또 한 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공소보류' 라는 희 한한 검찰조치로 풀려나올 때까지의 법적 대응을 한변호사가 맡아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네 번째로 호구虎口에 들어갔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격이었다. 여러 번 한변호사에게 신세를 진 사건 중에서도 가장 세상에 알려지고 화려하기도(?) 했던 것은 1989년의 이른바 '한겨레신문 기자단 방북취재기획' 사건이다. 오랜 반독재 투쟁의 수많은 목숨과 피와 눈물의 결정인 <한겨레신문>은 1989년 5월, 창간 1주년 기념사업으로 기자단 북한취재를 기획했다.


그러나 ‘방북취재‘ 계획은 그 구성단계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중단되고, 신문에 대한 일대 탄압이 가해졌다. 나는 북한당국의 초청 내지 입국허가의 가능성을 해외에서 타진한 역할 때문에 전체사건을 걸머지고 기소되었다. 군부정권에게는 ‘눈 안의 가시’였던 <한겨레신문>을 불법화 해보려던 군부정권의 시도는 신문사원의 불덩어리 같은 항거와 거센 국내외적 비난의 여론 앞에 주춤했다. 그 대신 정권은 나 한 사람을 신문과 분리하여 ‘적성국 탈출·잠입 예비음모’인가 뭔가 하는 죄목으로 사건을 엮어보려고 국가공권의 전력을 동원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중앙정보부 지하감방에서 몇 날 몇 밤을 새워가며 계속된 심문조사에 반주검 상태가 되어버린 어느날 아침,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는 지프차에 실려 나갔다. 도착한 곳에서 중부서의 간판을 보았다.


어느 사무실인가 대합실에 나를 앉힌 조사관은 그제서야 가족과 변호인의 접견이 허가됐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사건기간을 통해서 그들이 은혜를 입한 것처럼 거듭거듭 강조한 일이지만,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래로 조사과정 도중에 변호인과 가족의 접견을 허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역사상 초유의 일’이라는 그들의 엄살 섞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밖에서 얼마나 강력한 압력이 가해졌으면 정보부의 역사에 없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가족이라면 아내일 것이 분명하지만 변호사는 누구일까? 나는 잔뜻 긴장한 채로 기다렸다. 출임문 밖에서는 고함소리가 나고, 문을 부수는 듯한 소란이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신문·방송기자들이 나와 접견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취재하겠다고 밀어닥치는 것이라 했다.


한참 만에 경찰간부가 들어오고, 그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이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흔들이 보이면서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한승헌 변호사가 아닌가! 그 호리호리한 작은 체구가 나의 두 눈에 꽉 차 보였다. 한변호사가 그렇게 크게 본인 적이 없었다(또 한분의 변호사가 동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홍성우 씨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변호사는 의식적으로 억제된 어조이지만 분명히 질문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물었다.


“건강에 불편한 데는 없습니까?”


그것은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냐?’를 달리 표현한 말이었다. 나는 며칠 낮과 밤을 새운 취조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하고, 그러나 “일정한 예절을 지키는 조사를 받고 있다”고 대답했다.


 


덤으로 얻은 집행유예


한변호사는 나의 긴장을 풀고, ‘정보부 유사 이래 처음’인 접견을 통해 나에게 가능한 한 많은 암시를 주기 위해서 애썼다. 그 현장은 나에게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지만 그같은 중요한 정보부의 양보를 얻어낸 한 변호사에게도 변호사 경력에 적지 않은 성과로 기록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국자들의 독촉으로 접견은 약 반 시간으로 끝내야 했다. 내 손을 굳게 잡아주도 되돌아서 나가는 그의 자태가 그렇게 당당해 보일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책상에 펼쳐져 있는 1989년 5월 29일자로 된 ‘서울지방검찰청공소장’의 하단, ⑩ 표시가 붙은 ‘변호인’란에는 ‘한승헌 등 32명’이라고 적혀있다. 6개월간 계속된 제1심재판에서 한변호사는 많은 변호인들의 인간적 정열과 직업적 지혜를 모아 치밀한 번호전략으로 나를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대할 수 없었던 성과이다. 어차피 ‘유죄판결’은 기정사실이고 집행유예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시국상황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당시의 일이 화제가 될 때면, 한변호사는 오른손을 한번 흔들고 그 특유의 익살 섞인 웃음을 짓고 나서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변론을 맡으면 유죄판결은 보장받은 것이니까 집행유예는 덤으로 얻은 것이지!” 아무튼 어떤 역경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간, 한승헌 씨!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독재자의 ‘눈엣가시‘ 가 되어」, 『한승헌변호사 변론사건실록5』, pp 343-348,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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