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라고 슬픔은 조금씩 엷어졌지만, 가끔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선생님, 시계추가 저쪽으로 가더니 안 오네요. 언제나 이쪽으로 다시 올까요?”라고 질문도 하고 싶다.

든든하게 기댈 수 있었던 스승은 떠나시고, 긴 겨울은 추웠다.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 이 시대의 리영희를 만나고 싶다 (2013년 7월 3일 윤창빈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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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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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빈 선생이 리영희재단 출범을 알리는 의미에서 페이스북에 올린 리영희 선생에 대한 회상을 수정해 보내왔다. 윤 선생은 리 선생이 한양대에 복직한 1985년부터 1989년 봄까지 조교로 재직한 바 있다. - 편집자 주


#회상 1. 안기부 직원의 협박


 

한겨레 방북사건 때인 1989년 봄, 당시 선생님 조교였던 본인에게 안기부 직원이 학교 앞 다방에서 보자고 연락이 왔다.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중년의 남자는 나에게 선생님 연구실 문을 열어 달라고 반 협박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선생님과 전화로 연결해준다며 회유하기 시작했다. 취조실에 갇힌 상황인 선생님의 뜻을 따를 수 없고 한밤중에 도끼로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간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안기부 직원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 후 선생님 석방 환영회에서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 안기부 직원이 "선생님 조교 하나는 참 잘 두었더군요"라고 하더라며 칭찬해 주던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당신의 발자취가 있기에 오늘도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리영희의 정신이 살아나기를 희망해 봅니다.


 

#회상 2. 실향의 아픔



 

선생님께선 원주에 많은 지인을 두고 계셨다. 장일순 선생, 박경리 선생, 지학순 주교 등과 술잔을 나누곤 하셨다. 저 또한 그곳이 고향인지라 선생님을 모시고 갈 기회가 있었는데, 고향이 평양이셨고 평양 숭실전문대 출신인 부친과 리 선생님이 학창시절의 추억과 실향의 아픔에 대해 장시간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생각난다. 북측 《통일신보》 박진식 주필이 선생님의 고향인 평북 삭주의 모습과 동창생 인터뷰 등을 담은 특집기사를 선생님께 선물로 드리며 실향의 아픔을 달래 드렸지만 그 아픔은 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풀리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시절 경의선 개통 시 학창시절 고향과 서울로 통학하던 철로라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시 철마가 힘차게 달렸으면 한다. 당시 제 부친과 선생님이 함께 동감하고 나누던 실향의 아픔도 가시길 바란다.

 

#회상 3. 열정


 


언론진흥재단에서 기자교육의 일환으로 수습기자 교육이란 강좌에 리 선생님을 모신 강의가 진행되곤 했는데, 교육생들은 선생님의 열변과 기자로서의 기본자세 등에 큰 감동을 받곤 했다. 한번은 선생님께서 전국언론노조 초청강연회에서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문제 등 현안에 대해 열변을 토하시느라 예정된 시간이 넘도록 강연을 지속하셨다. 그 누구도 감히 강연을 멈추게 할 수 없는 촌극이 벌어졌다. 선생님께서 평생 후학들에게 강조한 현실 변혁과 우리 사회의 모순과 우상 타파, 이를 위해 나서라고 말씀하시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회상 4. 선생님과의 첫 만남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1981년 봄 선배가 주었던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서였다. 1984년 여름이 지나서야 선생님께서 복직하셨다. 당시 혹독한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난 선생님을 찾아뵙고 조교로 모시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 후 대학원생으로 연구실에서 선생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선생님은 항상 자료와 팩트(fact)에 근간하여 글쓰기를 하셨던 분이였기에 논문 한 편에도 수많은 땀과 노력이 배어 있었다. 그 노력은 단순히 글쓰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를 변혁하는 실천적 자세로 이어지곤 했다. 당시 연구실은 그 시대를 고민하고 탄압 받던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선구자셨던 선생님은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에 대항한 참된 스승이셨다.

 

#회상 5. 애주가 선생님


 

선생님께선 평소 약주를 좋아하셨다.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수통에 독한 술을 담아 드셨을 정도로 애주가셨던 선생님은 연구실 냉장고에 항상 소주와 오징어를 넣어놓곤 하셨다. 유신시절 그 술 때문에 망가진 위가 국가보안법으로 옥살이를 할 때 나았다니, 유신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경기도 산본에 계실 때 후학들이 찾아가면 저수지 근처 매운탕집에서 막걸리를 한잔하시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인사동 평화만들기 카페의 단골이셨던 선생님은 건강이 안 좋아지셨을 때에도 반주를 즐기셨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연희동 자제 집 마당에서 후학들과 함께한 자리에서도 막걸리 한 모금 드시고 싶다던 선생님. 그 기억은 지금도 아프다. 시대의 아픔에 온 몸으로 맞섰던 선생님이 약주를 즐기신 건 당연하다. 언론인일 때나 교수일 때나 안락한 생활에서 쫓겨나길 반복한 삶이셨기에 한 가장으로서의 힘겨움은 컸을 것이다. 리영희재단이 12월 3일 7시 조계사에서 여는 2주기 추모 행사는 해직당한 후배 언론인들을 위로하는 자리라고 한다. 선생님의 정신은 계속되리라. 5.18 광주 성전에 영면하신 당신께 곧 술 한잔 올려야겠다. 


 

#회상 6. 반평화통일세력에 대항한 글쓰기

 

남과 북으로 분단된 조국에 사는 지식인이 존경할 대상 중 한 분이 선생님이라 생각한다. 1994년에 발간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평론집에서 그는 광적인 반공냉전 반평화통일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글쓰기를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진보의 날개만으론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도 앞으로 갈 수 없다고도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남과 북을 동시에 비판하는 유일한 분이셨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머리카락 하나도 가르려 한다며 분열주의를 질타하시던 선생님이다. 지금 살아 계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지, 평생 그 어느 정파나 권력에 참여하지도 않고 은폐 왜곡하려는 흉계에 대항하는 삶이 당신이었다. 자유인이고자 한 끊임없는 노력이 선생님의 삶 자체였다.

 

#회상 7. 자유인 리영희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1929년 생인 선생님의 삶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6․25전쟁, 4․19 민주항쟁, 유신정권, 광주민주항쟁 등을 거치며 선생님은 치열하게 사셨다. 언론사와 대학에 재직하셨지만 실은 이 땅 곳곳에 선생의 제자를 두셨으니 시대의 스승인 것이다. 필화사건과 국가보안법으로 네 차례의 구속과 수 차례의 해직을 경험하셨으니, 그의 삶은 그야말로 실천하는 양심 그 자체일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99년 일흔이 넘은 나이와 지병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우상과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병인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에도 남북관계 북핵 및 북방한계선 문제, 이라크 파병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등에 대해 지팡이 하나에 아픈 몸을 의지해 현장을 찾아다니신 선생님이었다. 진실을 밝히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선생님은 한평생 시대의 양심을 지키셨다.

 

#회상 8.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요즘 평화통일, 남북교류협력 운운하면 종북이니 주사파니 말이 많다. 선생님도 어쩌면 평생 동안 빨갱이로, 좌파로, 운동권의 수괴로, 광주민주항쟁의 배후 주동자로, 조작된 삶을 사셨다. 그는 한번도 이념과 우상을 지향한 적이 없고 분단된 조국의 아픔과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고난의 길을 걸었다. 리영희가 빛나는 것은 국가보안법이란 악법을 스스로 짊어지고 언론계와 학교에서 기사와 저서를 통해 스스로 형극의 길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아무도 말하지 않는 암흑의 시기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명박 정권은 북을 적으로 증오의 대상으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금강산이나 백두산에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동포여러분"이란 노래를 듣고 싶다. 지난 2006년 11월 29일 열린 제1회 금강산 남북언론인토론회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170여 명의 남북 언론인이 참여한 행사였다. 내년(2013년)엔 재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는 리영희재단이 남북 언론인들에게 리영희 정신으로 통일의 길을 함께 가자고 말했으면 좋겠다.

 

#회상 9. 변혁, 그 중심의 리영희


 


81학번 세대가 겪은 대학은 낭만과 추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두환 군부독재의 시퍼런 칼날 위에 녹화사업이란 명목으로 동지들이 군대와 감옥으로 사라졌다. 광주항쟁의 아픈 상처, 5월 그날이 오면 독재타도를 외치며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그러나 변혁을 향한 신념이 있었고 그 중심에 리영희 선생님이 함께하셨다. 우린 그의 저서를 가지고 밤새 토론하고 또 다른 아픔을 후배들과 공유했다. 그 치열한 젊은 날의 아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나이 50이 넘었다. 다시 청년으로 돌아가 가슴 깊이 시린 마음으로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외치고 싶다. 나에게 자유인의 길을 가라고 한 스승의 모습이 보고 싶다.

 

#회상 10. 지사(志士)적 언론인의 모습

 

1989년 어느 봄날, 선생님 조교로서 재학생들과 함께 한겨레방북사건으로 들끓던 한겨레 영등포사옥 편집국을 방문했다. 우리는 선생님을 구속한 공안정국을 규탄하며 한겨레 기자들과 함께 선생님의 석방을 촉구했다. 며칠 전 공덕동 한겨레신문 사옥에 있는 지인들을 만났다. 1988년 2만7천여 명이 참여해 50여 억의 국민주로 탄생된 그 창간정신을 우리가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선생님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은 민중의 힘과 성금으로 인쇄되던 신문을 만져 보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김대중, 김영삼 양김 단일화 실패가 대선 패배로 이어져 심한 무력감이 팽배한 시절, 선생님은 한겨레의 논설고문으로 재야와 우리 사회에 지사적 언론인의 모습을 남겼다. 작금의 언론 상황은 무한경쟁의 시장 속에서 권력의 눈치 보기와 자본의 예속으로 참 언론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신문지를 만들지 말고 진정한 신문을 만들라던 선생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본다. 또한 선생의 정신으로 해직된 이 시대의 후배 언론인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회상 11. 민중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라 


 


리 선생님이 존경한 인물로 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계신다. 1970년대 반독재투쟁으로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던 원주의 정신적 기둥이었고, 1980년대 생명사상의 주춧돌이 된 그의 삶은 그 시대 지식인들에겐 큰 표상이었다. 특히 그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중립화 통일방안 주장으로 3년 간의 옥살이를 겪어야 했고, 서울 유학시절을 제외한 일평생을 원주에서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살았다. 사람들은 장 선생님을 원주예수라고도 불렸다. 민중에 대한 실천적 삶, 한번도 지도자를 자칭하지 않은 무위당의 삶은 겸손 그 자체였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보거나 그의 글을 한번이라도 접하게 되면 삶의 스승이자 실천의 지도자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지금 대선 후보들은 모두가 자신이 이 시대의 지도자라고 한다. 하방(下方)의 중요함을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것이다.

 

#회상 12. 언론인과 언롱인

 

리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친 체제 지향에 길들어진 채 이를 벗어나지 못한 언론의 모습이 타락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우리 언론사(史)엔 과거 정권과 권력에 기생했던 곡필 지식인과 언롱인(말을 우롱한다)을 숙정할 수 있는 변혁의 시기가 없었다. 리 선생님은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베트남전쟁과 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강재 해직됐고(1969년),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옮긴 후에는 유신군부독재 학원탄압 반대 지식인선언으로 2차 강제 해직(1971년)을 당한다. 그 후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등 저서 내용의 반공법위반(1977년),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조종자(1980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지도사건(1984년), 한겨레방북사건(1989년) 등의 혐의로 네 번의 해직과 수 차례의 구속 기소 등을 겪었다. 분단시대의 실천적 지식인으로의 삶, 그 자체다. 그의 치열한 삶은 이 시대 참 언론인으로 기록될 것이며, 후배 언론인들에게 저항적 기자정신의 모범이 될 것이다.



 

#회상 13. 문익환과 리영희


 


1994년 겨울 인사동 '평화만들기'에서 리 선생님과 후학들이 모여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님의 서거 급보에 우린 모두 수유리로 향했다. 선생의 황망한 표정에서 늦봄이 차지하고 있는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문 목사님은 친구 장준하의 죽음과 전태일의 분신을 보며 늦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선 분이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을 주도하며 첫 구속 이후 1994년까지 11년에 걸쳐 여섯 번의 구속을 당하게 된다.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 꿈을 비는 마음으로 한 평생을 바친 그는 마침내 민중 속에서 부활했다. 그의 생은 박해와 탄압 속에서 감옥으로 이어졌지만 단 한번도 삶의 원칙과 신념을 포기한 적 없는 혁명가다.

 

회상 14. 리영희와 김근태 


 

1985년,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이 한양대 사회과학관 리 선생님 연구실로 배달되곤 했다. 선생님은 78년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 받을 때를 회상하면서 그보다 몇 십 배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고문 조사관의 이름과 얼굴, 날짜와 시간까지 다 기억해 추후 법적 징계를 가능케 했던 김근태의 초인적 힘을 《대화》에서 언급했다. 고문으로 인간의 자유와 사상을 유린할 수는 없지만, 그 시기를 살아간 많은 분들에겐 추악한 남영동의 폭력과 기억이 아직까지 상처로 남아 있다. 82년 4월 15일 고려대에서 시위를 주동했다가 20일 넘게 고문당한 나의 친구는 그 날이 주석 생일이었다는 이유로 온 몸에 푸른 멍이 들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친구의 집에 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초상을 북에 계신 분으로 착각했다나.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도 사상의 덫이 견고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을 영화 〈남영동 1985〉를 보며 생각해본다.


 

회상 15. 리영희와 명진 스님


 

리 선생님의 49제, 명진 스님은 선생이 바란 세상은 거창한 사상과 이념을 내세우는 곳이 아니라, 서로 밥을 떠넣어주는 소박한 세상이라 말했다. 지금 세상은 어떤가? 그렇게 밥을 넣어주는 세상인가? 돌이켜보아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스님은 1980년대 불교혁신 등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 성동구치소 독방에 갇혔다. 그곳에서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읽으며 인생이 뒤바뀌었다고 고백한다. 한때 봉은사 천일기도 회향을 통해 신도들과 사찰에 새로운 바람을 주었던 스님에게 선생님은 《전환시대의 논리》 등 주요 원고를 썼던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로 줬다. 명진 스님은 고등학교 선배인 선생님의 뜻은 어렵고 힘든 세상의 짐을 나눠지고 가라는 무거운 의미라 생각했다. 평소 명진 스님을 아끼고 존경했던 선생님은 평생 무신론자였지만 참 종교인의 삶을 사셨다.


 

#회상 16. 선생님과의 첫 만남


 

81년 대학 새내기 시절의 화사한 봄날이었다. 책 읽고 술 사준다는 79학번 선배의 달콤한 꾐에 빠져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을 읽었다. 모든 세상사와 인간사가 바뀌고 시나브로 졸업을 앞둔 84년 2학기를 앞둔 시점이 되어서야 선생님께서 행당동에 복직하셨다. 졸업을 앞둔 채 당신을 찾아갔다. 무작정 졸업 후 당신의 조교를 하겠다는 당돌한 뜻을 밝혔다. 이유를 물어보셨다. 당신의 저서를 통해 존경한다고 답하니 대학원 진학 후 같이 연구실에 있자는 승낙을 들었다. 대학 내내 전공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있던 운동권 학생이 그날부터 3개월 동안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학원 합격 후 85년부터 89년까지 조교로 선생님 곁에 있었다. 석사 졸업 후에도 후학으로서 선생님과 참 많은 인연을 함께했다. 직장에서 진행하는 수습기자 교육 및 강연에 선생님을 초청하기도 했다. 30년을 이어온, 참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당신이 영면하신 광주 5.18 묘역이 눈이 부시다. 지금 진달래 산하에 술 한잔 따라드리고 싶다.


 

#회상 17. 실향민 리영희 


 

6.15 공동위 남측언론본부 교류와 관련해 2006년 방북 당시 통일신보 박진식 주필을 만났다. 그는 리 교수님이 고향 산하에 대한 그리움을 한겨레논단을 통해 표한 것에 평북 삭주의 산하와 동창 등을 취재해 신문 전면에 실어드린 인연을 이야기했다. 도라산역 개통 시, 개성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타고 마냥 좋아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평양에서 서울까지 통학하던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실향과 전장의 아픔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낀 지식인이었다. 분단의 아픔에 온 몸으로 저항한 인생이었다. 내가 선생님의 숨겨진 아픔을 본 것은 평양이 고향이신 아버님을 통해서인 것 같다. 분단 60년이 넘었다. 이 땅의 실향민들은 가지 못하는 고향땅을 그리며 눈을 감고 있다. 그들에게 작은 위안이나마 줄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의 장이 조속히 이루어지길 희망해 본다.


 

#회상 18. 재단 출범과 첫 콘서트

 

리영희 선생님 타계 2주기를 앞둔 12월 3일 저녁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관에서 리영희재단 출범식 및 해직 언론인 복직 촉구 콘서트가 열렸다. 지난 2012년 9월 창립한 리영희재단(이사장 박우정)의 첫 공식 행사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많은 언론인(해직 24명, 징계 등 500여명)들이 "내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것은 진실"이라던 선생님의 말처럼 공정언론을 외치다 정직, 감봉, 해직 등의 탄압을 받은 후배 언론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리였다. 리영희 선생은 《우상과 이성》에서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라고 썼다. 박우정 이사장은 이번 자리는 리영희 선생님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오늘날 언론인들이 겪는 해직 등 수난의 의미를 공유하고 한국 언론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힘을 합치자는 데 목적이 있다며 콘서트 개최 이유를 밝혔다. 원조 해직 언론인인 리 선생님이 해직과 투옥의 고난을 겪은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후배 언론인들의 수난은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해직당한 언론인이 24명, 징계를 당한 언론인은 500여 명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리 선생 2주기 행사는 해직 언론인 복직 촉구 콘서트로 진행됐다. 서울 견지동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관에서 3일 저녁 열린 행사에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원로 해직 언론인을 비롯해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해직 언론인 선배들은 무려 40년 가까이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십니다. 새내기 해직 언론인인 저는 이분들을 뵈니 힐링이 됩니다." MBC에서 해고당한 최승호 PD가 7080 해직 선배들 앞에서 말문을 열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웃음꽃도 잠시, 원로 해직 언론인들이 해직 당시와 현재를 비교하며 현 정권이 40년 전 군사정권과 다를 바가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자 분위기가 사뭇 비장해졌다. 이어진 좌담에서 후배 언론인들은 잘못된 언론 지형을 바로 잡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행사는 뜨거운 열기 속에 애초 계획된 2시간보다 두 배 길어진 4시간 동안 진행됐다. 행사를 주관한 리영희재단은 이명박 정권에서 해직된 언론인 24명을 이 시대의 리영희들이라고 명명했다. 재단은 이들에게 공정언론 지킴이패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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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리영희 선생께 (2016. 10. 9 김형건 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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