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라고 슬픔은 조금씩 엷어졌지만, 가끔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선생님, 시계추가 저쪽으로 가더니 안 오네요. 언제나 이쪽으로 다시 올까요?”라고 질문도 하고 싶다.

든든하게 기댈 수 있었던 스승은 떠나시고, 긴 겨울은 추웠다.

어두울수록 별은 맑게 빛나고 험할수록 길은 멀리 열려있다 (2012년 12월 6일, 이도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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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2-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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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6일 한양대학교 경영관 SKT홀에서 '故 리영희 선생님 2주기 추모 강연회'가 '우리 시대의 리영희 선생을 생각한다'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당시 민교협 상임의장이었던 이도흠 한양대 교수의 추모사를 옮깁니다.


 


리영희(李泳禧) 선생님! 선생님께서 운명을 달리 하신 지 어언 두 해가 지났습니다. 계신 곳에는 늘 진리가 꽃을 피우고 사람들이 함께 나누며 행복하겠지요. 지금 이 땅에선 진리에 재갈을 물린 채 이기적 탐욕을 끝없이 분출하고 있습니다.

 

암울한 군사독재정권 시절, 선생께서는 투옥과 해직을 예삿일로 여기시며 허위와 불의와 올곧게 맞섰습니다. 선생의 펜은 누구보다 예리하셔서 독재정권에게는 깊은 상처를 내는 비수가 되었고,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는 깜깜하게 어두운 하늘에 맑게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선생의 글은 남다른 힘을 간직하고 있어서 글을 읽은 이들은 모두 제자가 되어 그 길을 따랐습니다. 하여 이 땅의 모든 진보적 지식인이 선생을 '사상의 은사'로 모시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강의와 <전환기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 등의 책을 통하여 그동안 우리를 눈멀게 한 우상을 똑바로 인식하게 되었고, 미국과 베트남전의 실상을 깨닫고 중국과 사회주의 체제의 가치를 마음에 담게 되었습니다. 진리탐구의 도량이어야 할 대학마저 시장으로 전락한 지금, 선생께서 일구어놓으신 참스승의 길을 따라 분연히 걸어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선생께서는 늘 진리의 파수꾼이셨습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연임한 시절을 물론, 평생에 걸쳐서 고문과 투옥을 무릅쓰며 허위와 이를 통하여 이익을 보려는 권력과 단호하게 맞서서 진리를 수호하셨습니다. 이 바람에 아홉 번 연행을 당하였고, 다섯 번 기소 또는 기소 유예되었으며, 총 1,012일 동안 징역살이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정론직필을 휘둘렀으며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이명박 정권의 파시즘적 행태를 호되게 비판하였습니다. 언론은 물론 인터넷까지 통제되고 민간이 사찰까지 자행된 지금, 한국 최고의 언론인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온갖 허위와 우상을 만드는 세력과 결연히 맞서 싸워나갈 것을 맹세합니다.

 

선생께서는 늘 통일과 사회주의 공동체를 꿈꾸셨습니다.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각자가 이기적 탐욕에 물들어 타인을 소외시키고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혐오하셨습니다. 국민의 레드컴플렉스를 심화하여 독재를 합리화하고자 반공이데올로기를 절대가치로 신봉하도록 강요하던 그 시절에 제3세계의 민족해방 운동을 올바로 알리고, 중국과 베트남의 실상을 전하고, 온몸으로 반공이데올로기와 맞서서 싸우며 통일의 중요성과 사회주의적 가치를 알렸습니다. 제가 한 문예지의 주간으로 산본의 자택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였을 때, 간경화가 악화되고 복수가 차서 운신하기 어려운 그 순간에도 서늘하게 빛나는 눈빛을 한 채 사회주의의 가치에 대해 사자후를 토하시던 그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극단에서 쌍용자동차에서만 23명의 노동자가 죽음을 맞고 860만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지금, 선생께서 꿈꾸셨던, 함께 노동하고 더불어 나누는 공동체와 남북 평화통일을 기필코 쟁취할 것을 마음 속 깊이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아! 선생은 가셨어도 그 정신과 말들은 살아 오늘 이 자리에 요동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길이 험하고 어둡더라도 거기 별만 빛난다면 나그네는 흐뭇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어두울수록 별은 맑게 빛나고 험할수록 가야할 길은 멀리 열려 있습니다. 한국 지성들의 사상의 은사로서, 한양을 대표하는 참스승으로서 선생께서 보여주신 그 삶과 정신을 별로 삼아 꿋꿋하게 걸음을 내디뎌, 여기 한양에서 제2, 제3의 리영희가 나오리니, 극락에서 편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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