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라고 슬픔은 조금씩 엷어졌지만, 가끔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선생님, 시계추가 저쪽으로 가더니 안 오네요. 언제나 이쪽으로 다시 올까요?”라고 질문도 하고 싶다.

든든하게 기댈 수 있었던 스승은 떠나시고, 긴 겨울은 추웠다.

"나의 부인을 존경합니다"--김선주 칼럼니스트, 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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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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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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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서해성의 직설] “난 그렇게 생각 안해, 그래서 써”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모바일


장마가 잠깐 개었던 토요일 오후 리영희 선생님 부부와 함께 예술의전당에서 김성녀의 <벽 속의 요정> 마지막 공연을 보았다. 일행은 선생님의 오빠부대를 자칭하는 여자들 몇몇이었다. 선생님의 오빠부대 중 한 사람이 <벽 속의 요정>을 본 뒤 이 연극을 꼭 선생님께 보여드려야겠다고 해서 사발통문을 돌려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의 부인을 존경합니다”


선생님은 옆에 ‘존경하는’ 아내 윤영자 여사를 모시고 산본에서부터 손수 운전을 하여 나오셨다. ‘존경하는’은 선생님의 표현이다. 지난해 대담 형식의 자서전 <대화>가 나왔을 때 선생님은 책머리에 이렇게 썼다.


 


‘긴 세월에 걸친 문필가로서의 나의 인생의 마지막 저술이 될 이 자서전을, 결혼 이후 50년 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오로지 사랑하는 자식들과 못난 남편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힘겹게 극복하고 굳건한 의지로 헤쳐온 존경하는 아내 윤영자에게 바친다.’


남편을,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기 쉽지만 존경한다는 말은 좀체 하기 어렵다. 젊은 사람이 이런 단어를 썼다면 사람들은 닭살이 돋는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생활 50년을 지낸 한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 아내에게 존경한다는 헌사를 바친 것은 그것 자체로 머리가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존경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결혼생활 50년의 역사와 함축된 의미를 헤아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빠부대가 만들어진 것도 <대화> 때문이었다. 이틀에 걸쳐 책을 정독하고 나니 한 시대를 지식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철저하게 살아온 선생님이 새삼 경탄스러워졌다. 직장생활을 마감한 직후에 읽었기 때문인지 같은 직업인으로서 얼마나 게으르고 철저하지 못했던가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후배들 몇몇에게 책을 권했더니 책을 읽은 후배들도 꼭 같은 감동을 받고 선생님과 대화 시간을 갖기를 바랐다.


임진강에 황복이 돌아오던 계절에 우리는 선생님을 강화로 초대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존경하는 윤영자 여사도 당연히 함께였다. 이러저러한 모임을 가질 테니 반드시 책을 읽고 오라고 했더니 열댓 명이 모였다. 일행 중에 언론인도 의사도 변호사도 작가도 영화배우도 있었다. 연령도 직업도 가지가지였지만 전부 여자들이었다.


그날 선생님은 책에 대한 이야기뿐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관한 이야기와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내에게 미안했던 일, 못할 짓을 겪게 한 미안함 같은 것을 솔직히 털어놓으셨다. 여성 문제나 호주제에 대해서도 여자들보다 앞선 진취적인 발언과 신념을 이야기하셨다. 진실을 추구하고 세상의 진보를 믿는 지식인이라면 선생님처럼 남녀 문제에 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참석한 여자들은 모두 선생님의 오빠부대가 되었다.


연극을 보고 나오신 선생님은 총평을 하셨다.


연극의 마지막에 30년 동안 벽 속에 갇혀서 산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는 장면이 있다. 기독교신자인 어머니가 목사를 불러서 아버지에게 하나님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한다. 목사가 “형제님, 하나님을 받아들이세요. 하나님을 믿으시죠”라고 채근했지만 아버지는 “나는 인간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뿐입니다. 인간의 사랑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겁니다” 하고는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아버지는 미소지으며 “나는 하느님한테 용서를 구하지 않아. 사람들… 당신한테 용서를 구할 뿐이지” 하며 아내에게 용서해줘라고 말하고 죽는다. 선생님은 이 부분이 연극이 하고 싶은 말이고 이 말을 하기 위해 연극이 쓰였다고 하셨다. 우리는 박수로써 선생님의 총평에 동의했다.


결혼 50년만의 발견


자리를 예술의전당 숲 속의 벤치로 옮겼다. 장마가 갠 여름날 저녁 아직 해가 떨어지기 직전의 숲은 싱그러웠다. 헤어지기 아쉬워서 우리는 둘러앉아 학예회처럼 하나둘씩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에 선생님은 윤영자 여사와 함께 <사랑의 미로>를 불렀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2절까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는 1년 전 강화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냈다. 그날 우리는 선생님께 아내인 윤영자 여사의 발을 마사지해드리라고 했다. 거절하실 줄 알았지만 선생님은 기꺼이 하셨다. 윤영자 여사의 발을 지그시 진지하게 바라보다가 얼굴을 들어 말씀하셨다. “난 결혼생활 50년 동안 이 사람 발을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이 생전 처음이야”라고. 새로운 발견, 새로운 경험인 발 마사지는 한 시간쯤 계속되었다.


한 시대의 핍박받았던 지식인이고 가정보다는 직업이, 개인보다는 사회가 중요했던 남자의 옆에서 50년을 살아낸 윤영자 여사에게 물었다. “젊은 시절에 비해 선생님이 가정적이 되셨으니까 이제 섭섭하고 힘들었던 것 다 회복되었죠” 했더니 손가락을 내밀며 조금이라며 웃으셨다.


 



 


 


얼마 전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상을 수상하신 자리에서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책에 쓴 것은 내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내 책에 쓴 내용이 상식이 되어 아무도 내 책을 안 사보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병을 이겨내고 손수 차를 운전하실 정도가 된 한 시대의 거인이 결혼 50년 만에 아내와 함께 서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심취의 시간을 갖게 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각자 울컥해지는 마음을 간직한 채 헤어졌다.


              2006년 제622호 <한겨레21> 칼럼 /종이비행기 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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