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맹약으로 존재하는 ‘법’ 한국 사회의 놀라운 역동성 / 야마구치 이즈미(山口 泉)
국민 맹약으로 존재하는 ‘법’ 한국 사회의 놀라운 역동성
야마구치 이즈미(山口 泉) / 작가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기둥이었던 리영희(李泳禧, 1929~2010)씨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쓴 적이 있다. 이 사상가와 말년까지 나눈 두터운 친분은 내게 보물과도 같다.
당시 도쿄에 거주하던 나에게 그가 보낸 김 선물 소포는 마치 "놀러 오라"는 암시 같았고, 나는 그때마다 서울 남쪽 교외의 군포시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의 배우자 윤영자씨의 따뜻한 환대 속에서 며칠씩 머물곤 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방문이 되기 전에 다시 연락이 왔다. 국가보안법 등의 이유로 7번 체포돼 총 5년에 걸친 옥중생활을 버티게 해준 《레미제라블》의 원전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시가 심해져서 안경을 써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마침 들었기에, 상판이 렌즈로 된 나무 독서대를 도쿄에서 구해 가져갔다. 이 선물을 대단히 좋아하던 그는 4권짜리 원서의 제1권을 독서대에 놓고는 들뜬 목소리로 프랑스어 원문을 낭낭하게 낭독했다.
그리고는 주인공 장발장을 추격해온 자베르 경감이 "지금 내 손에 영장이 없다"며 체포를 단념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조용히 회고했다.
"감옥에서 그 장면을 읽었을 때, 아아, 이와 반대로 박정희 정권은 정당한 절차도 없이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했지...... 이 얼마나 큰 차이인가 하고 탄식했다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정한 "혁명"이라 부를 만한 사태 속에서 내가 가장 감명받은 것은 독재를 기도한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직후, 문자 그대로 명운이 갈리는 시간에 국회의원들과 시민들이 주저없이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국가폭력의 발동을 바로 국민의 맹약이라 할 ‘법’에 의거해 저지하려는 행동이었다.
이후 《한겨레》 등 언론 보도를 통해 남북분단 상황마저 악용하려 한 비열하고 음침한 주권 말살과 국정농단 기도가 속속 드러났다. 이를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저지시킨 국민들의 식견과 용기의 자연스러운 발현!
그리고 본의 아니게 계엄군으로 동원된 아들의 손이 시민들의 피로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국회 앞에서 "방패가 되겠다"고 외친 부모들, 세차게 퍼붓는 눈에 파묻혀 가면서도 광화문 앞에서 새로운 투쟁 성가(聖歌)가 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합창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성조기를 내세운 "윤석열 지지파"의 소란에 끈질기게 맞서 1980년 5월 광주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부터 쌓아온 지혜로 현직 대통령의 체포를 이루어 낸 한국 사회. 이러한 역동성에 나는 그저 경의를 느낀다.
반면,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를 비롯해 최악의 실정(失政)과 죄악으로 가득찬 아베 신조를 추궁하지 못한 채 헌정 사상 최장기 정권이 되도록 방치한 결과 일본은 지금 ‘인권’의 파멸이 가속화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동아시아가 겪고 있는 역사적 고난에 대한 최대 책임국이기도 하다.
헌법도, 형법도, 공직선거법도, 매춘방지법도 사문화된 ‘법’의 죽음이다. 기존 미디어의 타락은 성폭력 의혹이 비등하는 《후지TV》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년 이 칼럼(제58편)에서 비판했던 바와 같이, 에도시대 매매춘제도를 대하드라마에서 성적 가해성으로 묘사한 공영방송과 주어지는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예찬하는 수용자의 의식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후지TV》에는 나 자신도 30년 전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TBS》의 미디어 비판 프로그램인 〈환영(幻影)의 제2정부〉 내용을 정리한 책 《텔레비전과 싸우다》(1995년, 일본에디터스쿨출판부)를 읽은 관계자가 "무슨 말을 하든 일절 손대지 않고 방송하겠다"고 요청해왔기에 《후지TV》의 우민화 슬로건인 "재미있지 않으면 텔레비전이 아니다" 에 대한 의견을 중심으로 스튜디오에서 녹화한 적이 있다.
자신이 직접 100억엔의 국가 예산을 투입한 요시모토코교(吉本興業)의 무대에 아베 신조가 깜짝 등장한 것은 2019년 4월의 일이었다. 자신들을 이토록 우롱하는 위정자를 그럼에도 열렬히 환호하며 맞이하는 사람들. 그런 모습을 견뎌내야 하는 고행 역시 하나의 형벌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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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코교: 오사카에 본부를 둔 일본의 최대 연예기획사로 개그맨 등 인기 연예인을 대거 거느리고 있다. 연예 관련 사업이 본업인 이 회사가 교육사업 진출을 명목으로 아베 정부로부터 100억엔을 출자받은 것을 두고 비판이 일었었다.
출처: 일본 <주간 금요일>에 연재되는 '긍정하지 않는 자로부터의 편지’ 중 제 69신
주,번역: 김종철 리영희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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