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과 나 / 김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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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5-05-02 02:35
조회
293

리영희 선생과 나



 


 


 


김만수 (홍익대 교양과 교수,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저자)


리영희 선생의 책 중에 내가 제일 먼저 읽은 건 『스핑크스의 코』이다. 그때는 독일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거의 다 쓰고 마음이나 시간이 좀 여유로울 때였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한국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학교 도서실에 있는 책을 빌려 읽었다. 책을 집자마자 다 읽었다.
‘나와 다른 생각이 하나도 없네.’
놀랐다. 어느 책이든 읽다 보면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반박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스핑크스의 코』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다. 단 하나도.
‘리영희’에 흥미가 생겼다.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나는 문학을 한답시고 어쭙잖게 소설을 쓰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리영희를 잘 몰랐다. 그런데 리영희를 독일에서 책으로 만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보훔 대학교 객원교수로 있을 때, 리영희 선생의 글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신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에 실었다. 『스핑크스의 코』 끝부분에 있는 글 ‘광주(2)’를 번역하여 광주항쟁 20주년(2000년 5월 18일)에 맞춰 신문에 실은 것이다. 한국에 와서 그 신문 한 부를 선생께 드렸다.>(사진, 설명 필자 제공)


2001년에 한국에 돌아와 리영희의 모든 책과 글을 읽었다. 한 다섯 번씩 읽은 것 같다. ‘사람’을 알 것 같았다. 리영희의 생각과 심리, 삶과 이력을 알 것 같았다. 리영희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리영희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였다.
리영희의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신기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있었다. 신기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대로) 나와 다른 생각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고, 재미있는 이유는 리영희의 책이 내게 글 읽는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 교육을 받아서, 해방 후 기자가 되었을 때 우리 글을 못 쓴다고 선배 기자들에게 여러 번 혼났다. 그래서 리영희는 작가에 대한 약간의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리영희는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과 작가적 소질을 갖고 있다. 아래에 예를 든다.


일본의 패색이 짙은 1944년 여름 어느 날에, 리영희는 경성 상공을 나는 미국의 B29를 보았다. ‘내가 그 시간에 본 것은 ‘무적 일본군대’가 속수무책이던 겁나는 폭격기가 아니라 절묘하게 아름다운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푸른 하늘에 수놓아지는 비행운은 일본인 조선인의 구별 없이 모두의 눈에 황홀하기만 했다. 하늘과 기계의 일대 조화로 비쳤다.’(역정 - 나의 청년시대, 76쪽). 중학교 3학년 학생의 눈에는 그것이 황홀한 예술같이 비쳤을 수도 있다.


해방 직후 공부와 생존을 동시에 해결해야 했던 서울 생활에서 리영희에게는 책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책서리’도 감행했다. ‘반질반질하고 매끈한 백색의 상질지로 되어 있는 영어교재, The Use of Life를 몇 장 펼쳐보는 사이에 나의 머리에서는 그 책값과 그것을 위해 내가 팔아야 할 담뱃갑의 개수와 그것을 팔기 위해 남대문 시장에서 보내야 할 시간 등을 계산하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머리는 아직 망설이고 있는데, 얄팍한 그 『생활의 선용』을 말아 쥔 나의 손은 눈의 동작과 함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발은 벌써 많은 사람이 서성이고 있는 그 책 가게의 낮은 문지방을 넘어 행길에 나와 있었다.’(역정 - 나의 청년시대, 98쪽)
책서리의 과정과 그때의 심리를 솔직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하여 나는 이 글을 탁월하게 문학적인 글이라고 본다.


다른 글을 보자. ‘북한산 등반의 하산길에 김신조가 지나왔다는 계곡에서 군 경비초소에 걸렸을 때. 판사, 사업가, 교수, 변호사 이름을 아무리 대도 깡마른 대한민국 국군 병장님께서는 ‘돌아가요! 글쎄 못가요!’ 막무가내였다. 이 눈길에 세 시간을 되돌아가다니? 뒤처져 내려온 일행 중의 작가 한 분의 이름을 댔다. 우리는 ‘그분 누구예요. 알지요?’ 했다. 약간의 애원과 아양이 섞인 목소리로! 작가의 이름과 얼굴을 견주어 보던 국군 병장님, ‘아! 알고 말고요, 『서울은 만원이다』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가세요!’ 그때부터 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411쪽)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보다 이 표현으로 리영희는 이미 문학성 높은 작가라고 할 만하다.


이러니 리영희의 글이 재미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고, 재미있고 즐겁게 읽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리영희의 글에는 깊이도 있다.
‘리영희의 뛰어난 문체와 문학성은 기교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글이 쉬운 데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글을 읽을 대상인 독자와 관계가 있다. ‘나의 글에 대해 ‘쉽게 쓴다.’는 평을 가끔 듣는다. … 쉬운 것밖에 쓸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평이하게 알기 쉽게’ 쓰기 위해서는 일정한 마음가짐이 앞서야 하고, 부단한 자기반성과 훈련이 따라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냥 쉽게 쓰이는 것은 아니다.’(역설의 변증, 284쪽)
그러니 리영희의 문체와 문학성은 독자 대중을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다. 리영희의 글쓰기가 그의 ‘실천’의 다른 표현인 것처럼, 리영희의 문체와 문학성은 독자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성찰의 결과이다. 
<위 네 단락은 김만수, 『리영희 - 살아있는 신화』, 66~71쪽에서 부분인용>


김만수 선생님이 재단에 보내준 자료. 필자가<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를 쓰기 위해 수집하고 참조한 리영희 글이 게재된 <독서신문>1973/12/2,9,16,23일자 '중공인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로스 테릴 교수의 심층분석' '일본의 움직임을 주시하라-바라클로우 교수의 경고' '석유전쟁은 누구의 책임인가-선데이타임즈지 홀든기자의 심층분석' '태국왕과 학생운동-국가의 위기를 극복한 부미볼 왕'


기쁘고 즐겁게 리영희의 모든 글을 읽고 글을 구분, 분류, 정리, 분석했다. 그렇게 하니 책을 어떻게 써야 할지 방향이 잡혔다. 리영희의 글이 방법론, 문제의식, 주제의식을 모두 담고 있었다. 나는 그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 되었고, 원고를 쓰면서 그렇게 했다.
책을 쓰기로 작정한 때 리영희 선생을 만날 생각은 없었다. 온종일 글 읽고 글 쓰는 일을 하니 선생을 만나려고 따로 시간을 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에 관한 평전이나 전기를 쓰는 것이 금기라는 사실도 내게는 ‘금기’가 아니었다. 내게는 웬만하면 금기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 그냥 한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리영희 선생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 학문적으로도 인연이 없다.
글을 썼다. 글을 거의 다 쓸 무렵, 우연한 인연으로 나남출판의 조상호 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조 사장은 그 자리에서 내 원고를 ‘빼앗았다’. 몇몇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 출간을 의뢰하기도 전에 출판사가 결정되고 만 것이다.
(이 경험은 그 후에 내게 큰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원고만 쓰면 어느 출판사든지 내 원고를 덥석 받아준다고, 그것도 나남출판과 같은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받아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착각은 오래갔고, 그 대가는 컸다.)
그렇게 해서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가 나남출판에서 출판되었고, 그 책은 나의 첫 번째 저서가 되었다. 내가 생각한 제목은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그것이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로 바뀌었다. 고은 선생이 제목도 바꾸고 ‘리영희’ 글자도 써주었다고 조 사장이 내게 전해주었다.


리영희가 김만수 선생에게 보낸 엽서들(사진 필자 제공)


나남출판과 계약서를 쓰고, 나남출판에서 원고를 편집하는 중에 리영희 선생을 처음으로 만났다. 양재동 나남출판사 근처에서 조상호 사장과 같이 리영희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날은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을 받은 날이었다. 저녁 무렵 리영희 선생, 조 사장, 나 셋이 사옥 근처의 식당으로 가서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조 사장은 (내 원고를 빼앗았듯이) 저녁 식사 대접의 ‘권리’도 (그러니까 밥값 계산의 ‘의무’도) 내게 일방적으로 ‘넘겨주었다’. 그때 나는 몇몇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리영희 선생이 조 사장에게 말했다.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시간강사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조 사장은 그 말을 흘려들었고, 나는 리영희 선생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는 기쁜 마음과 ‘넘겨받은 의무’의 부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밥을 먹었다. 그렇게 ‘간을 빼 먹혔다’.
그 이후, 군포 수리산 근처 산본동의 리영희 선생 댁으로 조상호 사장과 같이 선생을 찾아뵌 적도 있다. 선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건 인터뷰가 아니었고, 나는 인터뷰를 할 생각이 없었다. 선생을 만났다고 해서 원고 내용에서 달라질 건 없었다.


책이 출간되고 리영희 선생께서 나를 만나자고 하셨다. 댁으로 찾아갔는데, 불편한 몸으로도 운전을 하셔서 놀랐다.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받았다. ‘나에 관해 훌륭한 책을 써주어서 고맙다. 기쁘게 먹어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이었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쓰고 싶어 쓴 책인데, 그런 대접을 받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식사 중에 선생께서 봉투를 내미시는 게 아닌가. ‘내 고마움의 표시이니 받아달라.’고 하셨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팔을 내밀어 사양했지만, 거절하는 행동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에 황급히 팔을 거두었다. 그리고 봉투를 받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식사를 끝내고, 그 봉투는 봉투째 금정동에 살고 있는 내 어머니께 드렸다. (책을 써서 ‘저자’가 된) 자식을 키운 어머니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금정동은 산본동과 붙어있다. 나의 부모님은 1985년부터 금정역 근처 금정동에 살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금정동에 살고 계신다.)


리영희 선생은 나의 정신적 사회적 스승이다. 선생은 내게 글 읽고 글 쓰는 걸 행복으로 만들어주셨다. 선생의 글을 읽을 때 나는 행복했다. (독일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일어로 읽으면서 느낀 행복 다음의 두 번째 행복이다.)
그때까지 내가 ‘개인적 인간’이고 ‘소설적 인간’이었다면, 리영희 선생의 글을 읽고 나는 비로소 ‘사회적 인간’이 되었다. 세계사와 동아시아의 역사,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와 정세를 보는 눈에 논리와 깊이가 더해졌다.


선생께서는 2005년 3월 15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김만수 씨의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는 나를 한편으론 부끄럽게 하고, 한편으로 놀라게 한 책이다. 내가 몰랐던 나의 모순점 등에 대해 훌륭하게 비판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선생을 글로 부끄럽게 하고 놀라게 했다니, 선생도 몰랐던 선생의 모순점을 내가 선생의 글만 읽고 알아냈다니, 선생의 인터뷰는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내게 최고의 찬사였다. 그것도 다름 아닌 리영희 선생의 찬사였다.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려고 20여 년 전에 출간한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를 다시 읽었다. 부끄럽다. 글이 거칠게 느껴진다. 공부와 수양이 부족한 때 의욕과 열정만으로 쓴 책 같다. 그 책을 부드럽게 손보고 고쳐서 다시 세상에 내놓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2006년 9월. 다른 사람과 사진을 찍을 때는 웃는 모습도 보였는데, 나와 찍을 때는 매우 ‘긴장하시는’ 것 같다. 내가 선생의 모든 글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해부하니, 선생이 나를 어려워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이는 나의 (위의 첫 번째 착각에 이은 두 번째) 착각일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태어나 해방 전후에 (그리고 1950년대 말부터)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2010년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 전라남도 광주에 묻혔다. 그 시간과 공간은 선생이 20세기 한국사를 치열하게 산 시공간이다.
세상을 바꾸고자 안중근 의사가 총을 썼다면 리영희 선생은 글을 썼다. 총을 써야 하는 일제 강점기에는 총을 쓰는 게 중용이다. 글을 써야 하는 독재 시대에는 글을 쓰는 게 중용이다. 리영희 선생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평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요구하는 상식을 글로 치열하게 실천한 분이다.
2024년 겨울, 느닷없는 계엄 발동부터 지금까지, 아니 (일본군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의 말을 빌리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거의 모든 상식이 (그리고 헌법도) 뒤집혀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써야 하는가? 우리 모두 각자 ‘리영희’가 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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