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리영희 선생을 생각한다 / 이강수
존경하는 리영희 선생을 생각한다
이강수 (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명예교수)
리영희 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게 2010년 12월이었으니 금년으로 14년 내지 15년이 된 셈이다. 벌써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선생은 그렇게 떠나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선생은 자주 내 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생의 귀여운 딸 미정씨가 나에게 원고 청탁한 전날에도 꿈에 나타나셨던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선생님을 한두달에 한번 정도는 뵐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 보니 선생에 관한 한 이승이 저승 같고 저승이 이승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바쁘셔서 만나뵙기도 쉽지 않았던 분이 저 세상에 가셔서는 제한없이 자유롭고 편안하고 한가하기에 나같은 사람에게까지 자주 찾아주시는가 생각되어 고마움을 금할 수가 없다. 나 나름대로 꿈을 해석해보면 프로이드의 꿈 해석이 아니더라도 나의 가슴속에 선생님의 존재가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1968년인가 69년에 시사영어(時事英語)를 담당하는 시간강사로 한양대학교 신문학과에 출강하신 이래 1995년 정년 퇴임하고 2010년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선생님이 나에게 배풀어주신 은혜는 한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우선 떠오른 것만 하더라도 내 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서 주셨을 뿐 아니라 나의 대학 정년식 때 축사를 해주셨고, 정년기념논총에 『내가 아는 이강수, 교수 이강수』라는 제목의 너무 과찬의 글을 써주셨다. 조금 길지만 선생님의 과찬의 글을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아홉 페이지의 장문이다.
“한양대학교라는 거대한 기관에서 알게 되고 사귀어온 교수라는 기능의 지식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그 많은 교직원 가운데는 기술의 ‘행상인’이라는 호칭이 차라리 적절한 인물들도 많았다. 그러한 지식인의 군상 속에서 이강수라는 한 위인을 알게 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요행이 주어주지 않았다면 20여년의 한양대학교 안밖에서의 나의 삶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을 둔 채로도 존경하지만 그것들이 붙지 않은 채로의 ‘인간 이강수에게 더욱 끌리고 매혹되고 그를 사랑한다.”
이강수 선생에게 보내는 연하장 (오른쪽) 원문
선생님은 생전 아끼시던 백자 꽃병을 물려주셨고, 평생 그렇게 아껴 써왔던 원고지, 그 원고지는 1985년 동경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초청으로 일본 가셨을 때 사 와서 그동안 집필 원고지로 쓰다가 말년에 몸의 불편으로 절필하면서 남은 원고지였다. 나는 그렇게 물려주신 귀한 원고지로 정년퇴임 후 마지막으로 저술한 『뉴스론』을 집필했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글도 그 원고지에 쓰고 있으니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다. 다시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매년 나는 보내지도 못한 연하장을 빠짐없이 보내주셨고, 더욱이 해외에 나가셨을 때도 마찬가지고, 특히 뇌경색으로 글쓰기가 곤란했을 때도 연하장이나 군포 수리산 등반을 같이 하자는 초청 편지, 병요양차 태국 농-카이(Nong Khai)에 가 계셨을 때도 떨리는 손으로 쓴 편지들을 보내주셨다. 이분 편지의 특색은 편지 말미에 성함을 쓰고 그 밑에 반드시 인감도장 같은 크기의 네모난 도장을 찍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선생은 정확한 분이었다.
내 생각에 선생님의 군포 산본 수리동 시절 정확히 말한다면 산본 수리동 한양아파트 813동 1902호에서 사시던 그때가 선생님 내외분으로서는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동안 오래동안 살았던 제기동의 옛집에서 화양동을 거쳐 산본집으로 이사온 뒤의 기쁨을 곧잘 표현하고 자랑삼아 말씀해주셨는데, 말하자면 제기동 한옥집에서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제대로 해본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 아파트로 이사온 뒤 겨울에도 따뜻한 난방으로 추운 줄도 모르겠고, 더욱이 처음 이사온 날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모처럼 실컷 샤워를 했던 일이 얼마나 신기하고 좋았던지 몰랐다고 실토하셨다. 그동안 선생의 일상생활에서 근검 절약정신은 체질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예를 든다면, 선생이 일직이 애독하였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빈보모노가다리(貧乏物語)』(『빈곤론』으로 번역 출판됨)에서 적수화상(適水和尙)이라는 일본의 유명한 스님의 ‘목욕탕물’일화와 비슷한 이야기인데, 선생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제기동 시절에는 한번 사용한 목욕물도 그냥 버리지 않고 다른 용도에 다시 사용한다는 이야기였다.
선생의 수리산본 시절에는 선생의 몸도 불편했기 때문에 간간히 병문안 차 방문한 일도 있었는데, 한번은 ‘산본에 놀러와서 같이 아파트 뒤에 솟아있는 수리산에 등산가자’는 간곡한 편지를 떨리는 손으로 써서 보내주셨다. 선생님댁 바로 뒤편에 있는 수리산은 19층 선생댁의 뒷창문에서 바라보면 초봄 온 산이 넓은 녹색으로 물들어있는 것이 마치 품안으로 안기는 듯 그 아름다움은 장관이었다. 그 수리산을 선생은 사랑하고 극찬하셨다. 선생은 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가벼운 등산이 신경회복의 좋은 치료법의 하나라는 의사의 권유도 있고 해서 가끔 등산을 시도해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과 함께 등산을 하지는 못했고, 수리동 자택에서 약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반월 저수지 근처에 있는 민물매운탕집에 간 일이 있다. 이 매운탕집은 선생이 즐겨찾는 음식점으로 선생님이 직접 운전해서 갔다. 선생님의 이야기로는 가벼운 산행이 신경장애 회복에 좋은 것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를 서서히 운전하면 역시 신경장애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의사가 권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가까운 거리를 직접 운전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여 매운탕집에 초대한 선생님의 정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이 1968년 <조선일보> 외신부장이었던 시절부터 한양대 신방과에 출강하고 1972년 정교수로 교직생활을 시작한 전후, 박정희 유신정권의 반민주적 체제에 대한 처절한 저항정신으로 실천적 지성인의 선구자가 되어 구금되고 해직되고 형무소에 장기간 수감되는 형극의 참상을 옆에서 직접 보고 경험했음에도, 동시대 같은 학과에서 같이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그런 적극적인 저항운동에 참여하지도 흉내내지도 못한 쁘띠 부르조아적, 몰지성적인 나의 교직생활에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용기없음과 선생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선생이 구금되어 재판을 받을 때 가능한 법정에 가보기도 하고 80년 광주형무소에서 출옥하실 때 선생의 출옥을 맞이하기 위하여 제자인 서울대 신문과 교수인 강명구 교수와 함께 광주에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이강수 선생에게 보내는 초대장 원문
이 선생의 모든 행적은 선생이 일찍이 저술한 바 있는 『역정』과 선생의 화갑논문집에 게재된 백영서 교수와 정민씨와의 인터뷰 즉 ‘전환시대의 이성 이영희 선생의 삶과 사상’, 임헌영씨와 대담한 『대화』 등의 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선생에 대한 나의 증언이랄까 이야기는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나의 글은 내가 선생과 같은 직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극히 한정된 부분만을 서술하는데 그치겠다.
내가 이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8년인가 69년, 선생이 한양대학교 신문학과(당시 학과 명칭)에 시사영어(時事英語) 담당 시간강사로 처음 출강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때 학과장은 장룡 교수였는데, 이분의 추천으로 학과에 첫발을 디딘 것이다. 이때는 선생이 <조선일보> 외신부장때인데, 학과장 장룡 교수는 미국 미주리대학에서 저널리즘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학자이다. 이분은 저널리즘 실무교육으로 유명한 미주리대학 저널리즘 학과의 교과과정을 도입하며 실무교육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타 대학과 달리 저널리즘 내지 커뮤니케이션의 이론교육보다는 교과 과정에서 기사작성이나 편집, 또는 방송 프로그램제작 등과 같은 실무교육을 우선시하였다. 여기에서 특히 시사영어를 중요시한 것은 신문학과 학생들의 언론계 진출 시험에 영어과목이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과 학과장 장룡 교수와의 친분은 선생이 한국동란때 11사단의 통역장교로 있을 때 같은 사단에서 통역장교로 있었던 장룡 교수와 업무 관계로 서로 알고 지냈던 것이 인연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선생이 한양대에 출강한 당시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있었던 팽원순씨도 시사영어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 이 선생은 1969년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조선일보> 외신부 부장에서 퇴사해 있었는데 이듬해인 70년에 <합동통신> 외신부장 팽원순씨가 한양대 신문과 교수로 옮기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합동통신> 외신부장이 됐다. 그러나 선생은 또다시 박 정권의 압력에 의해 1971년 <합동통신>을 떠나야 했고, 그러다가 마침내 1972년에 한양대 신문학과 조교수로 정식 부임했던 것이다.
선생이 약 3년간 시간강사로 출강했을 때는 1주일에 하루 정도였기에 만나기가 힘들었으며,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엄숙함, 냉정함, 매서운 눈빛 등으로 접근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72년 정식 교수로 발령된 뒤에는 자주 뵐 수가 있었고, 날이 갈수록 처음에 받았던 차가운 인상이 나도 모르게 마치 빙산이 점차로 녹아내리는 것처럼 녹아서 늦봄의 햇살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후 선생은 정열을 다 모아서 강의하고 연구하였고, 74년에는 한양대에 중국문제연구소를 창설한 세 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선생은 이 중국문제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을 닦은 것 같았으며, 연구의 정열을 쏟아부었던 것 같다. 1974년 세상을 놀라게 한 『전환시대의 논리』와 그 이후 계속 발간된 여러 저서뿐 아니라 중국 관계의 여러 논문이 쏟아져 나온 것도 모두 중국문제연구소에서의 연구 업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행당동산에서 선생의 생활은 연구실과 중국문제연구소에 파묻혀 있었기에 학과 교수들뿐 아니라 학원 내 수많은 교수들과의 관계도 매우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이 『대화』에서 실토한 것처럼 근 20여년 동안의 한양대 생활 동안 서로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대화』에서 친구관계를 묻는 질문에 “옛날 합동통신사 초병시절 즉 50년대부터 변함없는 벗으로 삼는 정도영씨와 이왈수(李曰洙)씨를 비롯하여 <조선일보> 동료기자 임재경씨, <조선일보>에서 언론자유투쟁을 선도하여 강제 해직된 신홍범씨와 정태기씨, 그리고 교수 시절부터 말하면 한양대 이강수 교수와 영남대 이수인 교수를 들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있다.그 외에 언급된 분을 포함하여 선생을 형님으로 부른 분은 고은 시인, 김상현 의원, 한승헌 변호사와 학계에서는 장을병 교수를 들고 있는데 선생은 이들 동생들을 ’저그니‘(평안도 말로 ’적은 이‘)로 불렀다고 한다. 선생은 나에게도 항상 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하였기에 형님으로 불러볼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매우 후회가 된다.
선생이 친한 친구로 지칭한 여러 지식인 가운데 내 기억에 인상 깊게 남아있는 분이 이왈수씨이다. 선생이 별세하시기 전에 몇 번인가 병원을 옮기셨는데 아마도 마지막 병원이었던 녹색병원에 몇 번 병문안 차 찾아갈 때마다 의식이 거의 없는 선생의 머리 언저리에 앉아서 애통해하는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그때 선생의 모습도 애처롭거니와 이왈수씨의 모습도 애처로웠던 생각이 난다. 그때 나는 그분이 어떤 분인가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50년대 합동통신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왈수씨임을 알게 되었다. 이 분은 선생을 위한 모임 뒤에서 조용히 선생을 생각하고 애도하고 추모하는 깊은 마음을 가진 분으로 보였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선생은 일상생활 다시 말해서 교우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일을 행하는 경우 정확하고 철저하고, 진지하고 빈틈이 없는 분이었다. 특히 책을 읽거나 저술할 때의 태도, 그리고 기사 취재의 경우에도 그러한 일관된 태도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 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책 한 권을 읽으면서도 지나간 것과 뒷부분의 내용 하나 하나까지 연결시켜가면서 굉장히 철두철미하게 책을 읽었다‘고 실토하고 있으며, 가령 신문사 외신부에 근무하고 있을 때 60년 이후 국제관계에 대한 정보 수집을 할 때도 ’그때 그때 나오는 국제관계 변동에 관한 정보도 외신에 들어오는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고, 외국대사관(영, 미, 프 대사관)을 주로 찾아가서 새로운 자료를 수집, 사건을 가능한 한 사실과 진실에 가깝게 취재 보도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러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국내 정치학자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한양대 교수뿐 아니라 타 대학 교수 가운데 교우관계를 맺은 국제 정치학자는 없었던 것 같다. 비단 국제 정치학자뿐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외국에서 학위 취득을 한 교수들에 대한 선생의 태도도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보다 주체적 입장의 학문적 자세가 아닌, 미국이나 선진국의 교수나 학풍을 모방하거나 자료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많은 학자들의 학문적 태도를 비판한 것이었다. 선생의 시니컬한 비판적 태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태도일 것이다. 실제, 내가 직접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 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와 같은 반민주적 인사들 뿐 아니라 그와 대조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진보적 정객까지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성격의 정확성을 이야기하다가 옆으로 새어,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게되었다.
선생에 대하여 좀 서운했던 것은 선생이 너무 국제관계에 학문적 관심을 경주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신문학과 교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언론 내지 언론학 다시 말해서 저널리즘 내지 매스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대화』에 의하면 “나는 언론학보다는 국제정치학, 그 가운데서 ‘국제관계론’을 강의하거나, 그 일부로서 ‘중국현대혁명론’을 강의하기를 원했어요”라고 실토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대화』 p.434).
한양대학에 와서 20년이 되는 짧지 않은 세월동안 저술한 책만도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 거의 20여권이 있고, 그외 중국문제연구소에서 중국관계 논문 등을 포함해 방대한 저술과 논문이 있지만, 이 가운데 언론에 관한 저서는 별로 없는 편이다. 뿐만 아니라 언론학 분야의 여러 학술논문 발표시 혹은 매년 몇번씩 개최되는 언론학회 학술모임에도 선생은 거의 참석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타 대학의 언론학 교수들과의 교우도 거의 없는 셈이었다. 한양대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선생은 권력이나, 돈, 그리고 명예와는 거리가 먼 그저 순수한 학자였고, 민주화 투쟁의 실천적 지식인의 선구자였다.
내가 학문하는 입장에서 선생님에 대하여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그분의 학문 세계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선생이 관심을 갖고 영향을 받은 사상가나 학자와 그들의 저서가 어떤 분야에 집중되고 있는가 하는, 말하자면 선생의 지식의 편력을 알고 싶었다. 백영서, 정민씨와의 인터뷰를 보면 “50년도, 60년도에서부터 원천적인 사물관계의 기본인식에 큰 영향이라고 할까, 인식의 틀을 잡아준 것은 역시 마르크스의 저술을 꼽아야겠지요. 일찌감치 50년대부터 군대에 있으면서도 읽었으니까요. 군대에서 나와서는 더욱 영향을 많이 받았죠”라고 술회하고 있다. (『리영희선생화갑기념문집』 1984, p.585) 그러나 다른 글에서 보면 선생의 독서 지평은 마르크스주의적 도서에만 편중됨이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그러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선생이 주로 읽었던 책의 면면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마르크스경제학을 도입한 유명한 교토대학 교수 가와카미 하지메가 지은 『빈보모노가타리』를 비롯, 사회주의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의 『해공선』 (게 가공어선), 호소이와 키조의 『여공애사』 등을 읽은 반면, 여러 책중에서 내가 놀라웠던 것은 선생이 표현한대로 “이 시기에 읽은 많은 책들 중에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없이 되풀이하여 읽고 여행에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때마다 40년 전에 읽을 때나 조금도 다름없는 지적 사상적 감동이 나에게 다가오는 책”으로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의지(意志)에 입각해서 집단을 분류한 책으로 역시 독일의 유명한 고전 사회학자인 게오르그 짐멜의 저서 『사회학』과 함께 형식사회학 분야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는 사회학도의 필독서의 하나이다. 70년대인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날 선생이 학교 내 연구실로 오셔서 혹시 퇴니즈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라는 책이 있으면 빌려달라고 하였다.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책은 소화 2년 (1927년) 일본 동경에 있는 업송당 출판사에서 출간한 391페이지에 달하는 번역책으로 번역자는 井森降平이고 책 제목은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되어있다. 아마도 이 책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책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선생은 이미 이 책을 1960년도에 읽은것으로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왜 나에게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선생은 이 책을 1960년 초 일본 이와나미 문고판으로 읽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분명 1957년 스기노하라 쥬이찌가 번역한 2권으로 된 책일것이다. 선생은 이 책에 대하여 ‘내 지식의 피가 되고 사상의 뼈가 된 책’이라며 방대한 독서편력에서 마르크스의 것들을 제외하면 이 책이야말로 선생의 역사의식과 세계관의 초기형성에 제일 큰 지적작용을 한 사회철학이론서라고 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가운데 좌파 이론가 내지 혁명가로 지칭되는 로자 룩셈부르크나 트로츠키와 같은 반스탈린주의의 저서, 특히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나 『러시아혁명사』그리고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평전』을 읽고 있지만, 오소독스적 공산주의 이론가 내지 혁명가로 지칭되는 레닌이나 스탈린의 저서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는 점이 흥미롭다. 선생은 특히 트로츠키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선생은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같은 유명한 책은 거론하지 않는 대신 트로츠키의 대표적인 저서는 모두 거론하고 있으며, 특히 아이작 도이처가 쓴 3권으로 된 『트로츠키 평전』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번역하도록 출판사에 권유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에서 이 책이 번역 출판된 동기는 선생의 권유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을 처음 번역 출판한 김종철씨에 의하면 “1985년 당시 해직언론인이 경영하던 출판사중에 두레출판사가 있었는데 사장은 신홍범씨였다. 해직 언론인들이 존경하는 리영희 선생이 어느날 신 사장에게 이 책을 번역 출판하라고 권유하셨고 그 작업이 나에게 맡겨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2017. 두레, p.618).
선생의 학풍의 성격과 관련해서, 학문의 접근방법의 성격도 이 기회에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대상은 역사적 정치적 사회현상을 대상으로, 거기에서 야기되는 현상 내지 사건과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사실 내지 진실을 규명하고 기술하고 설명하고 예측 전망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 현상에 대한 어프로치, 즉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저널리즘은 사건에 대한 현실을 보도자가 직접 현장에서 목격하고 혹은 그것에 관하여 증언을 통해서 수집한 그 사실적 내용을 즉시적으로 전달하는 현장성과 즉시성의 이른바 1차적 자료가 강조되는 반면, 아카데미즘은 저널리즘이 요구하는 보도내용에 대한 1차적 자료는 반드시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에 대한 선생의 접근방식에서 특징적인 것은 두 분야 다같이 1차 자료에 입각해서 ‘좌우의 어떤 이데올로기적 체제나 권력이든 진실을 은폐 날조 왜곡하려는 흉계에 대항해서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른 모습대로 세상에 밝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선생이 저술한 『전환시대의 논리』나 『베트남전쟁』에서 기술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 발생 동기나 통킹만 사건, 기타 국제정세에 대한 보도나 저술은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1차 자료를 근거로 월남전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능한 한 1차 자료를 근거로 진실을 파헤치는 선생의 보도 내지 저술 태도는 투철한 기자정신에 입각해있다고 본다.
1차 자료를 근거로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적, 학문적 태도는 그의 독특한 문체로도 나타난다, 임헌영씨에 의하면 ‘선생이 시대의 우상 내지 허위의식을 비판할 때 그의 글은 송곳으로 찌르고 거기에다 소금까지 뿌리는 문체’라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선생의 편지나 에세이를 읽다보면 눈 내리는 남쪽 어느 산사 앞뜰 매화나무에서 매화꽃 향기가 은은히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김소운 선생이 그의 에세이에서 말하는 향충에서 풍기는 동물성 향기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의 선생에 대한 학문적 이미지는 아카데미즘쪽 보다는 저널리즘쪽으로 더 기울어져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 비추어 나는 선생님을 참다운 기자정신을 구현한 영원한 기자요 참다운 학자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선생의 이런 독특한 학풍을 저널리즘과 아카데이즘의 접합 내지 합성으로 생각하였고, 생성 문법을 탄생시켜 인간의 마음과 뇌가 언어를 획득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세계적인 언어학자며 현대적 아나키스트인 노엄 촘스키와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 폭로한 <워싱턴포스트>의 대기자인 밥 우드워드를 합성한 인물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선생은 80년 1월 광주 교도소에서 출옥한 뒤 3월 학교에 복직했다가 배반된 ‘서울의 봄’으로 4년 동안 해직교수 생활을 하고 84년 다시 복직했는데 이후의 학원 분위기는 80년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고 여겨진다. 선생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학원탄압 분위기가 사라지니까 대학 분위기가 싹 달라져서 학생들이 굉장히 열성적이었어요. 나도 역시 보람을 느꼈고, 4년만에 형무소에서 나와 서게 된 강단이고, 다시 만난 학생들이니까, 학원탄압의 고통에서 해방된 듯 했으니까. 그런 부푼 기대와 기분으로 강의실이 꽉 찼지요”라고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생은 『독일 이데올로기』와 같은 마르크스의 중요 저서로부터 모택동의 『모순론』, 『실천론』이나 노신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학적 이론이나 사상을 열심히 강의하셨다. 이러한 강의는 다른 교수들로부터 듣지 못한 참신한 내용이어서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하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박사학위 지도를 받은 최영묵군에 의하면 학부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재학기간에 강의내용으로 영향을 받은 교수는 리영희 선생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선생님에 대한 학생들의 인기와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님으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아 외국대학에서 비판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언론학자로는 한양대 신방과 에서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로 옮긴 강명구 박사, 전북대 고 김승수 박사, 서울여대의 주창윤 박사가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비판커뮤니케이션 학자이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해서 서술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하드한 내용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기억에 소프트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면관계로 술과 담배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만두고,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이야기로는 권총 사격술에 관련된 이야기와 ‘스킨 스쿠버’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80년 중반 내가 한양대학교 사회과학대 학장 시절 어느날 한양대학교의 전주고등학교 교우회 앞으로, 휴전선 근처 연천에 있는 모 육군 연대장으로부터 일선 부대 방문 초청장이 왔다. 그 연대장은 전주고등학교 동창으로, 아마도 군에 대한 홍보 일환으로 초청장을 보냈다. 이 방문단에 선생도 동행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방문했다. 이때 연대장이 부하장교들과 자기 부인을 대동하고 우리들을 안내하는 도중 사격장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때 이 선생이 연대장이 휴대하고 있던 45구경 권총의 사격 연습을 하자고 요청하였다. 권총을 넘겨받은 선생이 사격자세로 두발을 시험 발사한 다음, 일곱발 모두를 표적에 명중시키니까 연대장을 비롯 거기에서 그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감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연대장 옆에 있던 부인도 놀라서 자기 남편을 쳐다보면서 당신보다 훨씬 잘 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연대장은 자기 부대에서 최고 사격수였다고 한다. 이러한 권총 실력은 선생이 1953년 제대한 이후 30년만에 처음으로 쏜 것이었으니 가히 놀랄 만했다.
또 한가지 소프트한 이야기는 스킨스쿠버와 관련된 것이다. 1980년도 중반 신방과 제자인 김재범 신방과 교수와 서강대 최창섭 교수가 주도한 환경단체 ‘맑은물 되찾기운동’의 일환으로 한강물 쓰레기줍기나 해변가 쓰레기줍기운동을 실시한 일이 있었다. 강이나 바다에서 그런 작업을 하기 위한 일환으로 스킨스쿠버 운동을 병행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잠실 올림픽 수영장에서 기초연습을 끝내고 동해안과 남해안 그리고 제주도까지 실습 연습을 가게 되었다. 이 환경단체에 선생도 명의상의 이사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제주도와 흑산도 근처의 홍도에 같이 간 일이 있다. 선생은 해양대학 출신이고 재학 시절에는 실습생으로 화물선까지 운전한 경험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바다를 좋아하고 사랑하여 수영 실력도 대단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후에는 군대생활, 기자생활, 교수생활의 바쁜 생활 탓으로 바다에 들어갈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제주도까지 가서 바다를 보고, 바다속에 들어갔을 때의 선생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스킨스쿠버 운동을 할 기회가 없어 중단했지만, 등산을 좋아했던 만큼이나 바다에서의 스킨스쿠버도 좋아했던 것 같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도 있지만 선생의 성격은 표면상으로는 냉정하고 엄격하고 도덕적으로 보여 접근하기가 어려운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마음속에 따뜻한 온류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따뜻하고 개방적인 마음은 학생들과 제자들에 대한 선생의 모습에서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을 따르는 학생이 내가 질투할 만큼 많다. 그런 현상은 선생의 은퇴전의 대학생활 경우나 정년후의 경우, 더욱이 별세한 이후에도 선생을 추모하고 기리는 제자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학교생활에서 학생들에게는 자애로운 애정이 넘치는 교수였다. 학생들과의 야유회나 체육회같은 모임들에서 선생은 매우 개방적이어서, 씨름의 상대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여학생이나 남학생과 춤을 추면서 즐거워하였다. 학생들의 표현대로 확실하게 놀아주었다. 제자들과의 이런 학교생활에 관한 한 선생은 매우 행복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한국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 기자와의 관계, 그리고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과 그 출판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세카이』 잡지와의 관계이다. 선생은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60~70년대 그 어느 시기에나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의 언론기관과 나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어. 일본의 유력 신문인 <아사히>나 <마이니치>를 비롯 <교도통신>이나 잡지사들의 한국 주재기자들과 광범위한 인간관계를 유지했어. 한 예로 <교도통신>과의 관계를 말하면, 60년대부터 나는 그들의 한국사태 보도에서 일종의 감정사 필터 역할을 해주었어. 그 역할인즉 취재보도할 만한 한국 각계의 문제들에 대한 선택 그 내용과 의미와 관련된 인물들의 인적사항 등을 검증해주거나, 그들이 독자적으로 얻은 정보의 진실성을 확인해주는 것 등이었어요. 그 20년에 걸친 기간에 일본 언론기관들의 주한 특파원은 수없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들은 모두 나에게 빚을 진 셈이지.” (『대화』 pp.413~414).
내가 생각하기에 이와나미서점과의 관계는 그 서점에서 출판된 여러 도서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와나미서점은 일본을 대표하는 가장 양심적이고 지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서점이다.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보모노가타리』에서 부터 모택동의 『모순실천론』,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독일 이데올로기』 그리고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나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와 같이 사상의 양대산맥을 대표하는 책들의 대부분은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간행된 도서들이다. 그 뿐 아니라 선생의 글이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세카이』 잡지에 여러번 소개되었다고 선생은 말하고 있다. 이 글들은 일본 지식인 또는 일반 독자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고 그들 가운데 당시 동경대 총장을 비롯하여 이와나미출판사 사장인 야스에 료스케, 이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세카이』에 선생의 별세를 애도하는 글을 쓴 이토 나리히코 일본 중앙대 명예교수도 여기에 포함된다. 동경대 총장은 선생의 글에 감명을 받아, 85년에 동경대 사회과학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선생을 초빙했고, 『세카이』 편집장에서 이와나미서점의 사장이 된 야스에 료스케 사장도 『세카이』 시절부터 이 선생의 글을 통해서 감명을 받고 가까이 지낸 관계로, 선생이 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재직시 추진했던 ‘창간 기념 북한취재기자단’ 방북 기획에 많은 도움을 준 사이다. 이토 나리히코 교수는 선생과 4번에 걸쳐 만나 친교를 맺은 학자로, 그는 4번째 선생과의 만남 때 뇌경색으로 고생하는 선생을 돕기 위하여 일본 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에 있는 휴양지에서 요양하도록 초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태국의 농카이에서 정양하게 된다. 이토 교수는 선생을 매우 존경한 것 같다. 그는 선생이 별세한 후 2011년 『세카이』지 6월호에 ‘한국의 지성과 양심 리영희씨를 추도한다’는 6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추도사를 쓴 바 있다. (『세카이』 2011/6월호 pp.271~276). 나는 선생에 대한 나의 추억에 관한 글을, 마지막으로 이토 교수가 추도사에서 쓴 글의 일절을 소개함으로서 끝맺을까 한다.
“김대중씨는 사람들로부터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흠모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리영희씨는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끊임없이 역사의 현재를 예민하게 분석하여 미래를 가르치는 지식인이었다. 리영희씨는 타계하여 위체는 광주민주화항쟁의 희생자가 잠들어 있는 광주 5.18 묘지에 모셔졌으나, 그 따뜻하고 넓은 마음과 역사와 현재에 대한 깊고 예민한 통찰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미래를 창조하는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도 생생하게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세카이』 2011년 6월호/pp.27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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