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과 세계, 그리고 한국의 선택 - 주한미군과 한반도 전수방위 원칙 / 이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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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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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미국과 세계, 그리고 한국의 선택


1. 주한미군과 한반도 전수방위 원칙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


1. 돌아온 트럼프와 노골적인 중국 견제

트럼프 2기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더욱 강력한 관세정책으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고, 세계적인 다자적 경제교역 질서를 노골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일방주의와 내셔널리즘을 극단화한 트럼프주의의 중국 견제 프로그램이 더 증폭된 형태로 현실화하고 있다.


미래 세계질서에서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집중함으로써 미국의 ‘위대한’ 제국적 위상을 견지하겠다는 트럼프주의의 뚜렷한 목표를 트럼프주의가 구현하는 방식은 ‘선택과 집중’이다. 중국에 의한 패권 교체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가 시작한 ‘아시아 재균형’을 더 본격화하는 한편, 부시 행정부가 시작하고 오바마 행정부가 매듭짓지 못한 ‘(미국에겐 무의미한) 해외 전쟁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관세정책을 포함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압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내기 위해 탈레반과 평화협상을 감행하는 행동으로 발현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트럼프의 태도 역시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에서 중국 중심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는 징표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 하나가 2025년 3월 말 한 미국 언론매체가 밝힌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가 작성한 정책지침이다. 이 매체에 따르면, 헤그세스가 작성한 내부지침 메모는 중국의 타이완 장악을 억지하고 미국 본토 방위(homeland defense)를 강화하는 것에 집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불법이민과 마약밀매를 차단하기 위해 군부가 직접 역할을 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이 기사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부터 미국이 이미 중국을 최대 위협으로 규정했지만, 중국의 타이완 침공 잠재성을 다른 모든 위협에 앞서 우선적으로 대응한다고 명시했다는 것이 이 메모가 드러낸 새로운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미국의 거대한 군사력 기반을 인도-태평양지역으로 집중하는 계획을 담은 것으로 파악했다. 또한 이 지침은 미국의 인력과 자원이 가진 한계로 인해 “다른 전역(戰域)에서 발생할 위험”을 가정하면서, 러시아, 북한, 이란의 위협은 유럽, 중동, 그리고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더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여 억지 역할의 대부분(the bulk of the deterrence role)을 감당하게끔 압력을 넣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을 맡은 엘브리지 콜비(Elbridge Colby)는 2025년 3월 4일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 네 나라의 관계를 현재 세계질서에서의 ‘대항연합’이라 규정했다. 중국을 그 주춧돌(cornerstone)이라고 정의했다. 가장 큰 경제대국으로서 중국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전쟁을 지탱하는 배후라고 보았다. 중국과 러시아는 함께 이란을 돕고 이란은 그들을 돕는다고 했다. 러시아는 다시 북한을 지원하는 관계라고 하였다. 이 청문회에서 의원들은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슈미트(Eric Schmitt) 의원은 미국이 자원의 희소성을 현실주의적으로 감안하여 집중해야 할 것이 두 가지라고 하면서 하나는 본토 방위이고, 다른 하나가 중국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릭 스캇(Rick Scott) 의원은 “정말 쉬운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중국은 우리의 적이 되려는 결정을 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콜비의 대답은 정말 쉽고 간단했다: “네, 확실히(Yes, absolutely). 맞다고 생각합니다.”


2. 흔들리기 시작하는 동맹

2018년 문재인 정부와 함께 한반도의 봄을 열었던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머지않아 한반도 평화체제의 비전에서 멀어졌고,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한계와 결합하여 한반도의 겨울을 가져왔다. 윤석열 정부는 그 겨울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고, 이제 트럼프 2기가 시작된다. “돌아온 트럼프”는 분명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은 대중국 압박에 집중하는 전략적 선택을 통해 동아시아의 위기를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미 보편관세와 함께 특히 중국에 집중된 관세폭탄으로 그 위기는 현실화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모든 가능성이나 시나리오들에 대한 논의는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접어두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지켜내고 그럼으로써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는데 기여할 최소한의 원칙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그 첫 번째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그리고 한국군의 한국 전수방위 원칙이다.


2025년 3월의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정책담당 국방차관 콜비는 중국 억제를 위해서 기존에 미국이 동아태지역에서 갖고 있는 양자동맹들의 연쇄를 미국 안보의 핵심 자원으로 지목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미국이 일본, 한국, 필리핀과 강력한 동맹을 맺고 있으며, 타이완과도 ‘강력한 안보관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베트남과도 유력한 동반자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베트남은 중국의 위협에 대해 자력 방위에 헌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쿼드(Quad)는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수준에서 의미가 있다고 지적하고, 군사적 방위라는 차원에서는 제1도선(first island line: 일본과 오키나와열도 타이완, 그리고 필리핀과 보르네오를 잇는 열도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버드(Theodore Budd) 상원의원이 인도-태평양 지역에 NATO 같은 동맹체제를 생각한 바가 있는가를 물었다. 콜비는 그런 구상에 절대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회의를 드러냈다. 자신이 2024년 방문한 한국의 정치적 동학을 언급했다. (윤석열 정부 때) 한미일 삼각 협조관계가 있었지만 그런 관계가 지속할 가능성은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앞으로 동아태지역에 동맹체제가 좀더 다자주의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아시아의 NATO’ 같은 구상은 지나친 야심(huge ambition)이라고 인식했다. 결국 기존의 양자동맹관계를 중심으로 한 동맹체제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대중국 견제 전략의 기본 전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콜비는 2025년 3월 5일의 상원 인준청문회에 별도로 제출한 서면진술서에서 미국에게 한국과의 동맹은 “미국의 이익에 결정적이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위상의 주춧돌”(the alliance with South Korea as critical for U.S. interests and a foundation stone of the U.S. geopolitical position in Asia)이라고 규정했다.


이처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한미동맹을 포함한 기존 동맹체제를 중시하는 전략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고 할 때, 콜비가 과거에 개인 자격으로 주장했던 주한미군 철수나 그에 따른 한국 핵무장 지지론은 억제될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미군을 대부분 유지하는 대신 한국의 방위비 분담 수준을 더 높이는 것 외에도 주한미군에 전략적 유연성을 부여하여 동아시아적 역할의 광역화를 강하게 압박할 수 있다. 한국을 중국 억제의 군사적 거점으로 제도화하는 것이다. 미국은 동시에 콜비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했듯이 북한과 중국의 미사일 위협에 미군이 과도하게 노출된 상태를 명분으로 삼아 자국의 미사일방어체제 운영기지로 한국을 더 본격 활용하려 할 수 있고, 미사일방어체제 확대 구성에 대한 한국의 책임과 역할을 강하게 요구할 수 있다.


3. 전수방위냐, 전략기지냐

먼저 주한미군의 역할 광역화는 곧 한국이 미군의 중국 억제를 위한 군사기지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평택을 포함한 기존의 미군기지들과 제주해군기지 역시 노골적으로든 은밀하게든 미국의 대중국 최전방 군사기지로 되는 것이다. 일본이 1999년의 주변사태법과 2015년의 안보법제를 통해 ‘일본 전수방위’ 원칙을 해체해 갔듯이 한미방위조약이 담고 있는 ‘한국 전수방위’의 원칙도 송두리째 폐기될 수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가 유념할 점들이 있다. 먼저 한미동맹의 기본 전제가 무엇인가이다. 1953년 10월 1일 한미 간에 상호방위협정의 핵심은 제3조였다. 명확하게 동맹의 의무를 규정한 부분이다. 이 조항은 두 나라의 서로에 대한 유사시 군사 원조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했다: “각 조약국은 태평양지역에서 각자 관할하에 있는 영토에서 혹은 이후로 어느 일방의 조약국이 합법적으로 자신의 관할하에 두고 있다고 다른 조약국이 인정하는 영토에서, 한 조약국에 대한 무장공격이 발생하면 다른 조약국도 그것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각자의 헌법적 과정에 따라서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이 상호방위조약 체결과정에서 비준 권한을 가진 미 상원은 더욱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상원은 비준 조건으로 ‘미국의 양해’라는 제목의 메모를 이 조약문에 추가했다. 미국이 한국의 방위를 도울 범위를 좀 더 명확하게 한정하는 내용이었다. “미국 상원은 다음과 같은 양해를 조건으로 이 조약을 비준하는 데 동의하였다. 위 조약의 제3조에 따라 각 조약국은 상대 조약국이 외부의 무장공격(external armed attack)을 당했을 때 외에는 상대를 원조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또한 이 조약의 어떤 부분도 대한민국이 합법적으로 관할하게 된 영토에 대한 무장공격이 발생한 것 이외의 경우에까지 미국이 대한민국을 원조할 의무를 지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이 이해하는 바다.”


독도와 같이 한국의 영토적 관할권에 일본이 이의를 제기해온 영역에서 벌어질 한일 분쟁에 끼어들지 않기 위한 목적이 작용했을 것이다. 미 상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요청이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이승만 정권의 친위 쿠데타 같은 사태시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을 명확히 하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 어떻든 이 문안에 근거하면, 한국이 만에 하나라도 한반도 바깥의 영역에서 전개하는 군사활동을 전개할 때 미국이 이를 원조할 의무가 없듯이, 한국 또한 미국이 동아태지역에서 괌이나 하와이처럼 미국의 합법적 관할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 예컨대 동중국해, 타이완해협 또는 남중국해 등에서 미국이 개입한 군사적 분쟁에 한국군이 도와야 할 법적 의무는 없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전 참전은 한미상호방위협정에 따른 한국의 의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결정이었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역할에 관해 한국 전수방위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은 미중 패권경쟁이 군사적 충돌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주한미군이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을 제한하는 의미가 우선 있다. 실제 미중 간에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고 주한미군이 그에 개입한다면 한국의 미군기지들은 중국의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된다. 주한미군 군사기지에 대한 중국의 공격은 곧 한국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기 때문에 한국 역시 중국과 군사적 충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중요한 것은 주한미군의 역할이 한반도를 벗어나 동중국해, 타이완해협, 남중국해로 확대됨으로써 한국의 미군기지들이 미중 패권경쟁과 군사대립의 발전에 공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통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본 방위상 나카타니 겐은 2025년 3월 말 미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중국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와 동중국해·남중국해”를 “하나의 전쟁구역”(one theater)으로 간주할 것을 제안했다. 『아사히신문』의 보도였다. 나카타니가 도쿄에서 만난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에게 이 구상을 전달하면서 말하길 “일본, 미국, 호주, 필리핀, 한국 등을 하나의 시어터로 인식해 협력을 심화해 가자”는 뜻임을 밝혔다는 것이다. 헤그세스는 이 제안을 환영했다. 이후 그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나카타니의 ‘원 시어터 구상’을 언급하며 한국·미국·일본·호주·필리핀 연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 구상은 방위성 간부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결합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이 구상은 나카타니 방위상 자신의 오래된 지정학적 관점과 연관이 있다. 그는 전임 아베 신조의 정권에서도 방위상을 맡고 있던 2015년 동중국해뿐 아니라 남중국해에 대해서도 미국과 긴밀한 협력을 계획했다. 남중국해의 상황이 일본의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라는 전략에 적극 편승하여 일본 자위대의 역할 광역화, 그리고 나아가서는 일본의 전쟁할 권리를 확보하려는 의도까지 갖고 있던 아베 정부의 지향을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지난 수십 년간 일본은 주일미군의 광역적 역할을 뒷받침할 수 있게끔 법적 제도적 장치를 확장해왔다. 원래는 전쟁할 권리와 군대를 가질 권리를 배제한 평화헌법에 따라 일본 자위대는 일본 영토가 외부의 침략을 받았을 때만 최소한의 방어적 무력만 행사한다는 ‘일본 전수방위’가 원칙이었다. 주일미군의 위상은 달랐다. 1951년 9월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은 주일미군의 일본 영토 바깥에서의 광역적 활동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미국이 일본을 타국을 공격하는 군사기지로 활용하는 것도 막을 수 없는 불평등조약으로 비판받았다. 일본 사회의 안보투쟁을 거쳐 개정된 1960년의 미일 신안보조약은 제6조에서 주일미군의 활동 범위를 “극동의 평화와 안전"으로 국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과 타이완해협, 그리고 필리핀이 극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951년 조약은 일본 안의 군사기지를 이용함에 있어서도 미국에 사실상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았었다. 일본은 미국을 위한 ‘기지국가’였고 그렇게 남았다. 1960년 신조약은 미국이 기지를 이용할 경우 일본정부와 협의를 거치도록 하는 ‘사전협의제’를 채택했다.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활동 영역이 그처럼 달랐기 때문에, 주일미군이 일본 바깥에서 광역적 역할을 전개할 때 일본 자위대가 협력할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가는 오랜 논란거리였다. 미일 두 나라는 1990년대 북한 핵문제와 타이완해협 미사일위기 등을 거치면서 ‘미일방위협력 지침(guideline)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미일 방위협력의 지역적 범위를 확장해왔다. 1978년 지침은 자위대를 포함한 일본의 역할을 일본 방위에만 한정했었다. 1997년 개정한 지침은 ‘일본 주변’의 무력 분쟁에 주일미군이 개입할 경우 일본이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지침을 일본이 법제화한 것이 1999년의 ‘주변사태법’이었다. 훗날 아베 신조 정권은 일본이 미군의 군사작전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를 더욱 넓혀놓았다. 2015년의 ‘안전법제’가 그것이다. 그 하나인 ‘중요영향사태법’은 일본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일본 주변에서 세계 전체로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일본 평화헌법의 취지와 맞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기에 아예 개헌을 하여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로 만들자는 것이 일본 보수의 관점이다.


미일동맹 조약은 그처럼 처음부터 주일미군의 광역적 역할을 제한하지 않았고, 일본의 지원 역할의 지역적 범위에 있어서도 1990년대 말 이래 역사적 전환을 겪었다. 이와 달리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제4조에서 “미국은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한국 내 육·해·공군의 배치를 위해 시설과 구역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미국이 한국의 기지를 한반도 밖에서 광역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한국이 지원할 의무는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주한미군 병력을 미국이 ‘한국과의 협의를 거쳐서’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하거나 한반도 밖에서 연합훈련을 하는 행위를 한국이 막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미국이 한국의 영토도 아니고 미국의 영토도 아닌 제3의 지역에서 전투행위를 하기 위해 미군이 한국 영토를 출격기지 등으로 사용하려 할 경우, 한미방위조약은 그것을 정당화할 근거가 없다. 미국은 한국과의 협의를 통해 요청은 할 수 있겠지만,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앞서 밝힌대로 우리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한국 전수방위’를 원칙으로 고수해야 한다.


나카타니 겐 방위상이 ‘원 시어터’ 구상을 제시하고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이를 적극 찬동하고 있는 상황임을 앞서 언급했다. 미일안보조약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본질적 내용과 역사적 성격의 차이, 그리고 일본과 한국이 각각 처해 있는 지정학적 현실을 도외시하는 발상과 행동이다.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콜비가 취한 입장에 비추어보면,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주둔해 있는 미군 병력이 더 이상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 경우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2006년 노무현 정부로부터 얻어낸 수준보다 더 확대하여 한국의 군사기지들을 한반도 바깥에서의 미군 군사작전을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할 더 광범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4. 원교근공(遠交近攻)을 넘어서: 한국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 외교와 정치사회에 심대한 딜레마를 제기할 수 있다. 그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한국 정치가 주한미군 철수를 수용하는 길을 선택하면 한국은 곧 국내 정치 지형에서 더욱 압도적인 핵무장 압박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핵무장론을 피하려면 주한미군 역할 광역화를 수용하여 미국의 대중국 군사기지로 한국을 제공하는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국내외에서 핵무장론 확산이 초래할 정치적·외교적 수렁과 함정(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남북관계·한중관계의 혼돈 심화 등)에 빠지지 않으면서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군사작전기지로 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존재하는가. 없는 게 아니다. 한국의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그 공간이 협소할 뿐이다. 그 길은 한편으로는 미국을 설득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그 규모의 감축 여부를 떠나서—의 한국 전수방위 원칙을 지키는 것이 왜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안보,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는데 더 지혜로운 선택인가를 설득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에서 남북간 군비경쟁을 통제하면서 평화체제를 구성해나가는 더 치열하고 지혜로운 노력이다.


미국을 어떻게 설득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역할과 행동을 통제할 것인가. 그 답은 외교적 둔사나 술수를 개발하는 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와 숙명의 고유성에 대한 주체적 자각에 바탕한 기본 원칙을 명확히 천명하고 이 원칙들에 대해 미국와 유엔을 포함한 국제사회를 향하여 의연하고 당당해지는 것에 지속가능한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미국에게 동맹국으로 그리고 민주주의 진영의 보루로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미국을 향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 아니라 원교근친(遠交近親)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것이 답인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패권경쟁과 그 폭력화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군사기지로 된다면 그것은 이념화된 한미동맹주의자들이 ‘고전적 생존 원칙’이라며 내세우곤 하는 원교근공을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누누이 지적해 온 바와 같이, 원교근공은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상대적 약소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패권경쟁의 주도국가들이 승자가 되고자 선택하는 논리이며 전략적 중간지대의 약소국가들에게 강변하는 양자택일의 논리이다. 한반도 안보의 백년대계는 한쪽의 칼날이 되어 다른 쪽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 역할을 자청하거나 말려들어가서는 결코 안 된다는 원칙에 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동맹국이 한국으로 하여금 주변 강대국에게 비수 역할을 하도록 강제하는 상황에 이른다면 한국의 최후 선택은 자강에 바탕한 중립일 수밖에 없다.


한미동맹 지상주의자들은 한국이 일본보다 더 충실한 미국의 동맹이 되는 것이 한국의 생존 비결이 될 거라고 주장하곤 했다. 최근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이 ‘원 시어터’ 구상을 제안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의 지정학적 정체성은 동아시아 질서에서 대륙과 자신을 대립시키는 ‘경계인적 존재’였다. 근대 이래 일본은 자신의 정체성을 해양연합의 일원으로 간주해왔다. 그 해양연합 안에서 자신의 위상이 종속적인 시기, 대등한 시기, 자신의 전쟁 도발로 인한 짧은 연합 붕괴의 시기, 그리고 다시 종속적인 동맹의 시기 등으로 역사적 변화를 겪었을 뿐이다. 일본은 그 해양연합의 힘을 빌어 대륙 국가들과 전쟁하고 점령하고 지배하였으며 그렇게 성장한 힘으로 다시 해양연합을 공격하고 전쟁을 벌여 패가망신하는 곡절을 겪었다. 대륙과 해양국가들 사이의 공존과 공영을 모색하고 진작시키는 지혜로운 비전의 공급자 역할에 지극히 인색했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과 전략가들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일본이 정상이고 원교근친을 지키려는 한국은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러한 지정학적 행위 패턴의 관성이 스스로의 역사에 초래한 결과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한국이 원교근친하겠다고 고집하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해야 한다.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엘브리지 콜비와 의원들의 대화로 미루어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판단된다. 그들의 인식과 셈법은 최소한 모순 투성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정말 그 길을 선택한다면 물론 한국 정치사회엔 충격이 크고 혼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이 스스로를 중립적 평화지대로 전환하고 핵무장을 자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4강과의 관계를 새롭게 경영하고 활용하면서 북한과 군비통제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 나아가는 비전을 개발하고 실천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 열릴 수 있다.


과연 미국과 일본의 정치권과 사회가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우리에게보다 그들에게 더 감당하기 힘든 질문이 될 것이다.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한국인들의 공포를 현금지급기로 삼는 가운데 한국의 영토를 대중국 패권경쟁의 기지로 삼으려 한다면, 한국은 한반도 전체가 중국 영향권에 놓일 경우 벌어질 일들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매파’들을 포함한 미국 정치사회의 공포를 버팀목의 하나로 삼아 대응할 수밖에 없다.



이삼성 교수의 4월 22일 <트럼프의 미국과 세계, 그리고 한국의 선택> 강연록을 편집부에서 2회에 걸쳐 필자의 동의를 얻어 요약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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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기념 토론회 참관기 / 이호근
관리자 | 2024.12.30 | 추천 1 | 조회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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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와 한미관계에서 바라본 12·3 내란 사태 / 정욱식
관리자 | 2024.12.30 | 추천 1 | 조회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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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스승과 26년 / 김연수
관리자 | 2024.12.04 | 추천 3 | 조회 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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