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KBS 왜 저래?" 리영희 선생의 격려편지 (2013년 9월 13일, 정연주 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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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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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이사인 정연주 전 KBS 사장이 리영희 선생 장례식이 끝난 뒤 선생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2010.12.14일 <오마이뉴스> '정연주의 증언'에 실은 글입니다. - 편집자

 


지난 8일, 선생님을 광주에 모셨습니다. 55년의 온갖 세월을 함께 해 오신 사모님, 세 자녀와 손자 손녀들 그리고 선생님의 제자, 후배, 동지들이 선생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습니다.

 

 

다시 온 수원 연화장

 


가는 길에, 수원에 들렀습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대로 선생님의 육신을 거두기 위해 수원 연화장 화장터로 갔습니다. 1년 반 전,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육신도 이곳에서 거두었지요. 그리고 그 죽음을 보시고 "내 육신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애통해 하신 김대중 대통령님도 얼마 뒤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모질고 혹독한 세월이 어디 지난 해 뿐이었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선생님의 삶 전체가 질곡과 고난으로 가득한 바로 우리의 현대사였습니다. 백낙청 선생님께서 추도사에서 말씀하신 대로 선생님은 "겨레가 남의 종살이를 하던 시절에 태어나서 일제 말기의 험한 세월과 남북분단, 한국전쟁,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독재로 이어지는 시대를 사셨"고, "남북의 화해를 두려워하는 훼방꾼들이 선생님을 괴롭히기 일쑤"였으며, 그래서 "선생님의 시대는 의로운 인간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러한 "시대와의 불화와 그에 따른 온갖 수난을 마다치 않은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육신을 거두는 수원 연화장에는 이미 초겨울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푸르고 싱싱했던 잎들은 모두 거두어지고,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겨울을 이기기 위해, 그리고 새 봄의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그렇게 가진 것, 군더더기 죄다 버리고 텅 빈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마치 선생님 가시는 모습 같았습니다.

 

연화장 뜰에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삶과 죽음의 경계 넘어 깊은 평화의 세계에

 

선생님.

선생님 살아오신 길은 온갖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는데, 그래도 그 간난의 세월을 모두 지나신 선생님은 삶의 마지막 구비에서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듯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사모님께 마지막 떠나실 즈음 "고생했지만, 살아온 것에 여한도 없고, 후회도 없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영혼과 정신은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깊은 평화의 세계에 가 계셨음을.


 


지난 3월 초였지요. 지난해 가을 선생님을 뵌 뒤 겨울을 지나고 산본 선생님 댁을 찾았습니다. 그날은 봄이 왔다고는 했지만 세월만큼이나 모질게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나운 날씨였습니다. 선생님은 육신의 큰 고통과 싸우고 계셨습니다. 얼굴도, 몸도 많이 작아지셨습니다. 야만의 시대 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아홉 차례 강제 연행당하시고, 다섯 차례 감방 생활하시고, 언론과 대학에서 각각 두 번 강제해직되신 그 혹독한 시대의 무게가 선생님의 육신을 그렇게 짓눌렀던 탓이었겠지요.

 

그러나 선생님의 영혼과 정신은 이미 다른 세계로 승화돼 있었습니다. 삶, 생명, 죽음을 선생님은 참으로 편안하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날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생명은 하늘이 주는 것이며, 그러기에 생명의 기간에 욕심을 갖거나 집착을 가져서도 안 되며, 가질 수도 없다"고.

 

그래서 "생명의 기간에 대한 욕심이나 집착은 이미 다 무(無)와 공(空)으로 돌렸기에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생명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선생님은 한국 전쟁 당시 통역 장교 시절 여러 차례 겪으신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욕심과 집착 다 버리고

 

저는 선생님이 불교 세계에 깊이 들어가 계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도로의 불교가 아니라, 선생님의 생각과 정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정신세계 인도자로서의 불교 가르침을 선생님은 오랫동안 깊이 천착해오셨지요.

 

<금강경>을 비롯해 많은 불교 서적을 읽으셨고, "부처님의 삶과 사상에서 무심사상, 무소유, 자비, 평화, 생명 존중 등을 철학적으로 공감했을 뿐 아니라 깊은 정서적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504쪽).

 

그랬기에 선생님은 삶, 생명, 죽음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욕심과 집착을 벗어버린 걸 보여주신 건 90년대 중반에 이미 있었습니다. 글쓰기와 강연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접으시면서 "한 개인에게는 모든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할 시기가 있는데, 이제 그 시기가 온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요. 나이 들면 명예, 이름 남기는 일, 권력 등 그런 것에 더더욱 집착하고 탐닉하기 쉬운데, 선생님은 그 껍질들을 자유로이 훨훨 벗어 던지셨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마지막에 닥친 육신의 큰 고통으로 괴로워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말년을 괴롭히는 이 아픔만은 사라져 편안하게 마지막을 맞으면 좋으련만…." 고통의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고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사모님과 가족들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참 가슴 에이는 아픔이었습니다. 대전 병원, 서울 백병원, 연희동 자녀분 집을 찾아뵐 때, 늘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던 것은 선생님 육신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서대문구치소에서 상봉한 '젊은 리영희'



그렇게 큰 고통 속에서도, 선생님은 따뜻한 마음과 우스갯소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병문안 온 사람들의 걱정하는 마음을 풀어 놓으려고 곧잘 우스갯소리 하시면서 소년처럼 웃으셨지요. 그리고 선생님을 사랑하는 '8자매의 재롱'에는 수줍은 소년이 되어 해맑은 웃음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의 이야기가 나오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성의 비판을, 불의에 대해 불덩이 같은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바로 '젊은 리영희'의 모습이었습니다. 1978년 가을 서대문구치소에서 뵈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1978년 10월 말. 저를 포함하여 동아투위(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언론인 모임) 위원 10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갇혔지요. 대학가의 데모, 노동계·종교계·지식인 사회의 저항운동을 그냥 사실만 모아서 일지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저보다 1년 전쯤, 선생님의 저서인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가 반공법 위반이라 하여 구속돼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 가보니 선생님은 '4사 상(上) 30방'에 계셨고, 저는 '4사 상 15방'에 수감되어, 같은 사동에 있게 됐습니다. 당시 선생님과 제가 머물렀던 그 감방은 2층 구조로 다섯 개 동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요. 한가운데 큰 복도가 길게 늘어 있었고, 그 옆으로 15개 방이 배치되어 있었지요.

 

선생님과 함께 머물게 된 '4사 상'에는 복도에서 선생님 쪽 방인 20방에 동아투위 홍종민 선배가 있었고, 6방에는 김대중 당시 야당 지도자의 비서인 김옥두 선생이 들어와 있었습니다(얼마 뒤 그 방은 다시 수감된 동아투위 성유보 선배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선생님은 제 방 앞을 지나 1방 옆에 있는 세면장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일어나서 조그만 창이 있는 방 앞에서 선생님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선생님은 제 방을 지나시면서 "정 형, 잘 주무셨소?" 그렇게 묻곤 하셨지요. 제 차례 세면 때가 되면 저희 사동 앞 '5사 하(下)'에 수감돼 있던 민족경제학자 박현채 선생님과 동아투위 이기중 선배에게 큰 소리로 아침 문안을 드렸지요. 

 

그 때 서대문구치소를 비롯해 전국의 감옥소에는 정치범·사상범이 차고 넘쳤습니다. 서대문구치소에만도 동아투위 10명을 비롯해서 대학생 긴급조치 위반자가 수 십 명에 이르렀고, 김지하 시인도 장기 복역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79년에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한명숙(전 국무총리), 신인령(전 이대총장), 황한식(부산대 교수), 김세균(서울대 교수), 장상환(경상대 교수), 이우재(전 국회의원) 선생 등이 또 우르르 잡혀 들어왔습니다. 

 

감옥에 있던 그 해 겨울은 유달리 추웠습니다. 온기라고는 찾을 길 없는 그 감방에서 추위를 심하게 타는 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떨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웬 잠이 그렇게 쏟아지는지, 시간만 나면 밤이든 낮이든 잠을 잤지요. 선생님이 면회를 다녀오시면서 제 방 앞에 오셨을 때 거의 대부분 저는 잠에 떨어져 있어서, 선생님이 깨우시곤 하셨지요.

 

 

선생님의 검은 머리카락이 속절없이 복도 위로 떨어지다

 

제 방 앞에는 담당 교도관이 사용하는 조그만 의자와 책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감방에서 글을 쓰는 일이 금지되어 있어서, 편지를 쓸 때 교도관 자리에서만 쓰게 했지요. 그리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아 기결수가 되면 머리를 깎게 되는데 바로 머리 깎는 자리가 내 방 앞 교도관 의자였습니다.

 

그날, 79년 1월 몹시도 춥던 날, 교도관 의자에 선생님이 앉아계셨고, 그리고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깎이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상고 중이었던 선생님의 반공법 위반 사건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던 것이지요. 선생님의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속절없이 복도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에 치밀어 오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머리카락 깎이신 선생님은 바로 광주교도소로 이감하셨습니다.

 

박정희 시대가 끝난 뒤인 79년 12월 초에 저는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선생님도 광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셨지요. 그 겨울 뒤 서울에는 봄이 오는 듯했습니다. 저는 박정희 시대가 끝났으니, 군부독재 체제가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순진했지요. 수구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강고한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 이전 겨울에 있었던 12·12 쿠데타조차도 제대로 인식을 못 한 셈이었습니다.

 

저만 그렇게 순진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동아투위 동지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서울 수유리 가톨릭 피정센터에 모여서 새벽까지 '새 시대, 새 언론'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밤새워 토론하던 바로 그 시각에 전두환 신군부는 민주 인사 대량 검거에 나섰습니다. 바로 80년 5월 18일 전야였습니다.

 

 

우리의 70, 80년대는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선생님은 5월 17일 밤 11시께 잡혀가셨지요. 저의 집에도 12명의 계엄군이 자정에 들이닥쳤습니다. 저 뿐 아니라 여러 동아투위 선배들을 비롯하여 알만한 재야인사들 대부분이 그렇게 계엄군의 습격을 받았지요. 동아투위 동지들은 그날 밤 수유리에서 있었던 밤샘 토론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급보를 접한 검거 대상자들은 바로 수유리 뒷산으로 도망쳤고, 1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배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그 당시 잡혀가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된 조사를 집중적으로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1년 뒤 잡혀가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김대중 선생님으로부터 수 십만 원의 자금을 받아서 그 돈을 대학생 3명에게 전달했으며, 그렇게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엮어 놓았더군요. 3명의 대학생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계엄군에 잡혀가서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지, 나에게서 김대중 선생님 자금 수 십만 원을 받았다고 '자백'했고, 그런 '자백'이 담긴 진술서에 날인까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의 70년대와 80년대는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그 야만의 시대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던지고,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하고, 일터를 빼앗기는 고난과 희생, 헌신 덕분에 87년 6월 항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비로소 이 땅에 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기적처럼 '새 시대, 새 언론'인 <한겨레신문>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던 그날, 선생님과 송건호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떨리는 손으로 창간호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1년 뒤 <한겨레신문> 창간 1주년 기념으로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다시 구속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생겼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는 창간 1년 뒤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어서 '발전기금' 명목으로 국민성금을 모금하고 있었습니다. 반응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 구속 소식이 전해진 뒤 국민성금에 불길이 타오르면서 목표치를 훨씬 넘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글로써 뿐 아니라 이렇게 온몸으로 <한겨레신문>의 기둥이 되셨습니다.

 

저는 89년 여름부터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지요. 특파원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종종 연락이 왔습니다. 대부분 제가 보도한 기사의 바탕이 되는 자료들, 그러니까 미국 의회 청문회 자료, 국방부 등 미국 정부의 주요 문건 등의 자료를 보내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철저하게 자료를 챙기고, 그 자료를 근거로 객관적인 분석과 비판을 하셨지요. 선생님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이처럼 우리에게는 거울이었습니다.

 

 

리영희, 고은의 지극한 사랑과 우정

 

91년에는 미국 미시간에서 한국학 세미나가 열려 취재를 갔지요. 마침 그 자리에 선생님과 고은 선생님도 오셔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선생님과 고은 선생님 사이를 보니 단순히 형님, 아우 하는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아주 깊은 사랑과 우정, 존경이 어우러진 관계였습니다. '옆에서 보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랬기에 선생님을 보내는 고은 선생님의 마음은 그만큼 더 절절했고, 그런 마음과 뜨거움이 선생님을 보내면서 쓰신 조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 리영희 선생 별세에 부쳐

 

우리한테 기쁨이나 즐거움 하도 많았는데
배 터지게
참 많이 웃기도 웃어댔는데
그것들 다 어디 가버렸습니까
슬픕니다
가슴팍에 돌팔매 맞았습니다

 

리영희 선생!

 

...

 

그리도
지는 해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지식이란 지식 다 찾아가건만
그 지식이 행여
삶의 골짝과 동떨어진 것
윗니 아랫니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허나 옥방에서
프랑스어판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밀가루떡 몇 개 괴어 놓고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
그럴수록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시대가
그 진실을 모독하는 허위일 때
또 시대가
그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일 때
그 장벽 기어이 무너뜨릴 진실을
맨 앞으로 외쳐댄 사람
그런 어느날 밤
지구 저쪽에서
사상의 은사가 있다 한
그 은사로 젊은이들의 진실을 껴안은 사람
아니
고생만 시킨 마누라 생각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설거지 못한다고 꾸중 들은 사람
아시아의 아픔
조국의 아픔
조국에 앞서
사회의 아픔
아니
세계 인텔리의 아픔으로
등불을 삼았던 사람

 

대전 유성병원 침대에서
껄껄 웃다가
그 웃음 틈서리로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번은 내줄 수밖에 없겠어
하고 슬며시 내보이던 사람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벅찰 역사 차라리 풍류일러라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2000년 여름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 일을 끝내고 귀국하여, 선생님 뵙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러다 그 해 가을, 선생님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오른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잃어버린 팔과 다리의 힘을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 놀라운 의지로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산본 수리산을 쉬임없이 오르내리셨고, 많이 회복되어 그렇게 좋아하시는 자동차 여행도 다니시고, 심지어 경비행기도 타셨지요.

 

 

<대화>, <인물현대사> 그리고 KBS

 

2005년 봄, 임헌영 선생님과 나누신 자전적 대담집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 출간되었고, 이를 기리는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KBS의 <인물현대사-리영희 편>을 연출한 양승동 피디를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우리사회의 수구 기득권에서는 <인물현대사>가 좌편향된 프로그램이었다고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경직된 이념의 스펙트럼을 더 유연하게 넓혀야 된다고 평소 생각한 터여서, 그런 비판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KBS 조직의 자율이 크게 확대되어 기자와 피디들이 토론과 집단의 지혜를 통해 스스로 잘 만들어가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대화> 출판 기념식에서 처음 만났던 양승동 피디는 그 뒤 2008년 8월 초, 제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강제로 해임당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의 공동대표를 맡게 된 인물입니다. '사원행동'은 수구적 성향의 KBS '옛 노조' 활동에 절망한 젊은 기자, 피디들이 이를 버리고 새로 만든 KBS '새 노조'의 바탕이 되었지요.

 

그런데 <인물현대사>를 가운데 두고, 두 인물이 참으로 기이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사원행동'의 주축이었고, 뒷날 KBS '새 노조'의 산파역을 한 양승동 피디는 <인물현대사-리영희 편>을 직접 제작했습니다. 2008년 '정연주 퇴진'에 올인한 당시 KBS 노조의 박승규 위원장(현 보도본부 사회부장)은 공식 인터뷰에서, 그리고 노사협의회 자리에서 서슴없이 <인물현대사>와 <미디어포커스>를 편파방송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했지요.

 

내게는 이 두 사람이 참으로 여러 면에서 너무나 뚜렷한 대조로 보였습니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요즘 KBS 왜 저래?"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내 머릿속에는 이 두 사람의 얼굴이 맨 먼저 떠오르곤 한답니다. 지난 봄, 선생님께서 KBS 돌아가는 이야기 물으셨을 때 이런 얘기 들려 드렸지요.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오"

 

제가 강제 해임되기 전, 이명박 정권의 수하들인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 등이 총출동하여 온갖 겁박을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저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한 자, 한 자, 정성으로 직접 써 보내 주신 그 편지는 제가 포악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조중동, KBS 노조의 연합작전에 끝까지 버티는 데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정연주의 증언1' 참조)

 

선생님은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정 사장

 

전화들이 연결이 안 돼서 이리로 보내오.
상황의 진전을 주시하면서 정 사장의 처지와 심정을 헤아리고 있소.
같은 전선에 섰던 전우와 동지들이 허약하게도 스스로 할 바를 다하지 않고, 백기를 들고 꼬리를 감고 물러나는 꼴들을 보면서 한탄밖에 없소.
정 사장 한 사람이라도, 민주주의 제도의 책임 있는 '공인'(公人)이 자신의 권리와 직무와 직책을 정정당당하게 수행하는 자세를 끝까지 보여주면 좋겠소.
지금 나는 정 사장의 모습에서 이순신 장군을 보고 있는 느낌이오.
반 민주주의 집단의 폭력과 모략으로 꺾이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명예롭게 소임을 다 하시오.
그래서 민주주의에도 영웅이 있을 수 있다는 모범과 선례를 남기시오.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오. 

 

 

선생님은 이 밖에도 저에게 종종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은 꼬불꼬불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저에게 뿐만이 아니라 좋은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그렇게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지요.

 

 

광주 가는 길


 


수원 연화장에서 육신을 벗으신 선생님을 모시고 광주로 떠났습니다. 이날은 종일 흐린 날씨여서, 가는 길 옆 들과 산과 하늘은 더욱 짙은 잿빛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들녘 너머로, 살아오면서 굽이굽이 마다 선생님과 맺어졌던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블로거의 선생님에 대한 글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필명을 '라이사'라 부르는 이 분은 2006년에 선생님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어쩌면 이 글은 선생님 글을 읽고 '머리에 지진이 난 것' 같은 경험을 한, 그래서 선생님을 '사상의 은사' 라 부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 전,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 머리 속에 맹목적 반공주의와 파시즘적 세계관이 철옹성처럼 자리 잡고 있을 무렵,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이라는 책을 읽고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의식의 대전환을 경험했다… 그때까지 제도 교육과 군사파쇼 정권의 이데올로기 매체들이 내 머릿속에 깊이깊이 심어준 세계관의 기초는 힘없이 허물어져버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관의 토대가 그 자리에 놓였다. 이후 나는 이전과 질적으로 영원히 다른 존재가 되었으며 그것은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놀라운 점은 책의 내용뿐이 아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나온 것은 1974년, <우상과 이성>이 나온 것은 1977년이었으니, 바로 반공법과 '긴급조치'가 난무하던 유신체제의 극성기였다. 그러한 엄혹한 시절에 그처럼 '불온'한 책을 발표한 리영희라는 사람에 대해 나는 경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 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것은 존경심으로 발전했다… 이태 전 겨울, 와병 중임에도 집회에 참석하여 매서운 추위 속에서 연설을 하던 그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 것은 특히 그의 늘 비판적이고 진취적인 정신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이 사회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해서도 항상 비판적이었다. 엄혹한 시절에 나온 그의 저서들이 바로 그러한 비판정신의 산물임은 물론이고, 76세의 노인인 지금도 그것은 여전하다. 소련과 동유럽 세계가 무너지고 나서 얼마 뒤, 그는 자신의 세계관과 인간관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음을 고백하고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당시 그런 그의 모습은 내게 충격이었지만,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서슴없이 자신의 오류를 반성하고 필생의 신념을 수정하는 가운데서도 진보적 가치를 방기하지 않고 그것을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리고 왕성하게 설파해왔다는 점에서 그 모든 것은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광주에 도착하여, 5·18 민주항쟁의 뜨거운 현장인 도청앞 광장, 금남로 입구에서 선생님을 모신 장례행렬이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5·18 국립묘지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모교인 부산 해양대생들도 왔고, 선생님 제자인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학생들도 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광주시민들도 나와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광주에 묻고, 그리고 거기서 불과 수십 걸음 떨어져 있는 송건호 선생님 묘소에도 절하였습니다. 사모님께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과 송건호 선생님, 이제 서로 마실 다니시면서 못다 한 얘기 나누실 거라고요. 그래서 전혀 외롭지 않으실 거라고요.

 

선생님.
이승의 일들은 이제 수많은 '리영희의 제자들'이 해낼 겁니다. 그러니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육신의 고통도, 전쟁도, 야만적인 폭압도 없는 그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안 누리시기를 빕니다.

 

2010년 12월, 정연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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